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창조의 구속사적 조명 Ⅱ

하나님아들 2014. 6. 24. 17:16
제목:창조의 구속사적 조명 Ⅱ
본문:(창1:3-2:3)
주요내용:구원서정론 

요 약
천지창조는 말씀과 성령으로 심령을 창조하시는 서정적인 원리가 나타나 있다. 모두 7단계인데 먼저 빛 되신 예수를 영접케 하심으로 시작한다. 다음은 회개케 하사 세속과 분리 되게 하시며, 다음은 겸손케 하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심령 옥토를 만드시며, 다음은 복음에 견고히 세게 하시므로 상황을 지배하게 하시며, 다음은 생명과 능력의 성령 충만으로 듬뿍 주시며, 다음은 사랑의 하나님 형상으로 자라게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주관과 임마누엘의 참된 안식에 참여하게 하신다.

설 명

☆ 구속사 적용에서 본 심령창조

첫째날 - 빛이 있으라
빛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함 (고후4:3-4, 요12:46, 요1:12)

둘째날 -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
회개로서 세속과 분리(딤후2:11, 롬6:3-5), 영계가 열림

셋째날 - 땅과 바다와 식물들
겸손과 순종으로 옥토화된 심령(벧전1:23, 마13:8)

네째날 - 해와 달과 별들
높이 되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견고히 섬(빌4:11-13).

다섯째날 - 물고기와 새
생명과 능력으로 나타나시는 성령의 충만

여섯째날 - 육축과 짐승과 사람
사랑의 하나님 형상 회복 충만

마지막 날 - 안식
맡김과 임마누엘의 안식을 누리는 단계

(본문)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 생략-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1:3-2:3)

(강해)

이 시간에도 창조의 구속사적인 조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는 구속사의 객관적 측면을 말씀했고 이번에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각인의 심령에 적용해 주시는 측면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원리와 같이 우리의 심령에도 놀라운 창조의 역사를 베푸십니다. 말씀을 배우는 가운데 다윗처럼 나의 심령을 창조하여 달라는 간절한 기도와 아울러 각인의 심령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이 되어지시길 바랍니다.

이 주관적인 적용을 한 마디로 설명한다면 객관적으로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성령을 통하여 적용함입니다. 앞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역사는 성부의 계획과 주관하심 속에서 그리스도의 공로 즉 복음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세 가지는 언제나 함께 존중되어야 합니다. 가령 성부의 주관에 맡기지 못하고 내가 의를 이루려고 한다든지 이루신 복음의 사실을 목표로 하지 않고 육신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한다든지 기도하지 않아 성령충만함이 없이 침체상태가 된다면 창조가 아니라 시험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복음에 견고히 서서 성령의 충만을 받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심령창조는 성령 안에서 어떤 서정이 있습니다.

1. 심령 창조의 첫 단계는 빛 되신 예수를 영접하는 중생의 단계입니다.

3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맨 첫날 창조하신 것이 빛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으며 공허한 죄인의 심령에 찾아오시는 단계가 바로 빛 되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중생의 단계입니다. 그 이전에 소명하시는 과정이 있겠지만 창조를 실재로 경험하기 시작하는 과정은 중생입니다.

요1:9-12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2:46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빛 되신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심령창조의 첫 단계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후4:3-6에서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증거했습니다.

여기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란 천지창조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은 우리 심령을 살리는 예수의 복음의 빛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적용입니다. 즉 바울은 천지창조의 배경에서 구원의 심령창조의 원리라는 영적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의 기사는 물질계 창조의 원리만이 아니라 심령 창조의 원리도 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결코 제 개인의 고안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증거함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문을 여시고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까지 많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는 혼돈하고 어둡고 공허한 인생의 절망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예수를 찾고자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본질을 깊이 깨닫게 하심은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2. 심령 창조의 두 번째는 회개의 단계입니다.

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둘째 날은 물이 갈라지고 궁창이 생겨난 날입니다. 우리에게도 궁창이 열리듯 신령한 영계가 열리는 기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져야 합니다. 이 죽어짐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적용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은총에 연합되는 경험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 받음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회개의 역사를 위해서 돕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마치 '두들겨 넓게 펼친 판'이란 뜻의 궁창의 의미처럼 고난 속에서 새로워지기 위하여 부르짖게 됩니다. 그 때 물이 갈라지면서 하늘이 열리듯 심령의 문이 열려지게 됩니다.
여기 궁창은 윗물과 아랫물 사이 즉 물 속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마3:16-17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습니다.

벧전3:21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했고 골2:12에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의 다음 순서는 회개입니다. 구원론에도 구원의 서정이 있는데 그 순서를 보면 소명 중생 다음에 회심 즉 회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예수가 구주이심을 증거한 후에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외친 말씀이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였고 사도들도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2:40) 했습니다.

롬6:2-4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공로를 적용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둘째 날의 물은 세례의 상징이요, 또 물의 상하 구분은 회개가 하늘과 땅에 속한 것을 분리시키는 작업임과 아울러 이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함을 암시합니다. 이 회개가 없이는 심령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회개하므로 심령의 문이 활짝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3. 심령 창조의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습니다.
셋째 날에 바다의 물은 겸손히 제 위치로 돌아가고 생겨진 육지에는 아름다운 식물들이 자라났습니다. 이 날부터 생명의 움트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실 생명의 시작은 첫째 날부터였습니다. 왜냐하면 요1:4처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하신 대로 빛 되신 예수님은 곧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을 생명의 시작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망애 기쁨 등 생명적인 현상을 경험하기 시작됨은 좀 후의 일입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식물들의 생명이 창조된 날입니다. 그런데 창2:5에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실재와 현상은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단 번에 허락하신 복음의 축복을 누리려면 여기 비가 와야 하듯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하며 경작하는 사람이 필요하듯 기도하고 말씀에 굳게 서는 신앙적인 활동이 필요합니다.

참고적으로 영적인 단계를 논함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점은 반드시 그 단계에서만 그 내용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령 둘째 날에 죽으심을 경험했다면 그 경험한 만큼 부활도 하늘의 권세와 영광도 안식도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의 단계는 7일째인데 그 이전에도 비록 풍성하지는 않지만 회개한 만큼 그 나타남이 정비례합니다. 그리고 한 번 거친 단계라고 해서 완성적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성령의 은혜 속에서 더욱 무르익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셋째 날의 교훈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다물이 제 위치로 내려가듯 겸손 속에서 부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는 교훈입니다(약4:6). 겸손 속에서 성도의 심령동산은 옥토밭이 됩니다(벧전1:23, 마13:8). 이 나를 낮춤이란 역시 십자가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경험은 마지막 날까지 점점 더 심도 있게 역사합니다.

그런데 셋째 날의 특이한 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둘째 날에는 없지만 셋째 날에는 10절 12절에 두 번이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10절의 좋았다는 말씀은 둘째 날을 포함하여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이고 12절의 좋았더라는 말씀은 각종 식물을 만드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는 뜻입니다.
세대주의 학자인 스코필드는 둘째 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생략한 것은 사단이 거할 공중을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 중에 처음부터 선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딤전4:4).

이 셋째 날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지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11-12절에 씨와 씨 가진 열매 맺는 식물에 내용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입니다. 눅8:11에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했습니다. 베드로도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오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했습니다. 그런데 "각기 종류대로" 라고 한 것처럼 말씀의 다양한 순종이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운행하시는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더욱 성령의 충만하심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4. 심령 창조의 네 번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견고히 섬입니다.

14-18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4일째가 객관적 구속사로 보면 그리스도의 승천을 예표합니다. 주관적 구속사 역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측면입니다. 그러므로 일월성신으로 낮과 밤을 주관케 했듯 승천하사 견고히 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믿고 그 복음에 견고히 서서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그 구원의 은총을 감사함으로 누리는 신앙입니다(빌4:11-13).

복음을 알기 전에는 환경에 좌우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안 후부터는 육신적인 환경이 내 환경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복음의 영적인 환경이 나의 환경입니다. 저는 이 복음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현장 속에서 많은 훈련을 시켜 주셨습니다. 이 묵상을 통해 지상의 환경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죄악의 시험이 와도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해주신 것을 믿습니다. 사단의 시험이 있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했음을 믿고 감사합니다.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나를 저주에서 건져 주신 것을 믿습니다. 그 때 죄악도 사단도 저주도 물러갑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입니다.

그래서 진리과정에서 이 복음의 묵상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승리와 영광과 복을 받았다는 복음을 깊이 묵상하되 감사와 감격과 찬송과 기쁨이 넘치도록 진행합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도 가능하나 복음의 서적을 읽으므로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웥치만니의 서적을 모두 인정은 할 수 없지만 이 복음 부분을 설명한 면은 참 훌륭합니다. 저는 매일 이 복음을 잊어버릴 때가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기뻐서 항상 그 안에 서서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실재적 누림은 성령충만과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에 굳게 서야 하지만 한편 항상 기도로서 성령충만을 영위해야 합니다. 이 원리는 가라사대의 말씀과 운행하시는 성령이시라는 창조의 두 원리와 같습니다. 성령충만할수록 복음이 충만한 경험은 증가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치 못하다고 복음의 그 사실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복음에 서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은 마치 넷째 날 하늘에 있는 일월성신처럼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이 복음에 서면 어둠도 밝음도 다 주관할 수 있습니다. 여기 어둠이 악의 부정적인 세력이라면 밝음의 낮은 축복과 형통의 날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서서 바울처럼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빌4:12).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몰라서 만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복음에 견고히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넷째 날의 영적 수준이 되면 견고히 서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해가 빛을 주관하고 달이 어둠을 주관하듯 복음에 서서 환경을 완전히 지배합니다. 어느 지동설자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던 것처럼 그래도 주님은 나를 구원하셨다고 노래하십시오. 히 3:6에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했고 고전 15:1에도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했듯이 복음에 견고히 서시기 바랍니다.

5. 다섯째 날의 심령창조는 성령충만한 삶의 영위입니다.

20-22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이미 복음에 섰지만 그 충만함을 누리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객관적 측면의 다섯째 날은 성령강림의 예표였지만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한다면 성령충만의 예표입니다. 여기 두 부분에 생명체가 충만해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이중적인 성령의 사역의 모형인데 이중적이란 성령께서 영혼과 육체라는 두 방향에서 역사함을 가리킵니다. 즉 하늘의 새는 하늘에 속한 믿음을 갖는 영혼의 영성적인 은혜라면 바다의 고기는 험한 세파와 싸워 이기는 것으로 육체의 영성 즉 은사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 생명체가 복을 받아 번성하고 번성하듯 우리는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위해서 할 일은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눅24:53에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했고 행1:14에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했으며 행2:42에도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했습니다. 이 일은 성도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과 바다를 온통 생명으로 채우듯 성령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6. 여섯 번째 심령창조는 완성을 향한 사랑으로 자라남입니다.

24-28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은 생물을 종류대로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육축과 짐승과 기는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되 남녀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 생물들을 본능의 상징으로 봅니다. 그런데 본능이 종류가 세 종류입니다. 육축은 집에서 길들여진 것이고 짐승은 밖에서 야생적이고 기는 것은 물 속이나 음침한 곳에서 살아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도 여러 가지의 생명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속에는 건전한 속성인 성령의 감동과 짐승과 같은 육신의 본능이 존재하고 때로는 사단의 시험이 우리의 파충류처럼 소리 없이 나의 본능처럼 다가와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 완성 단계에서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원동력이 되어 은사도 사랑과(고전13:1-3) 질서 속에서 사용하고(고전14:32-33) 육체도 정욕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도구가 되어 영적인 일에 협력하고(롬12:1, 롬8:12-13) 사단의 시험은 분별하여 물리침으로 통제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말씀합니다. 갈 5:13에도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했고 갈 5:6에도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했으며 롬 13:8-10에도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는데 하나님 형상의 대표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신의 성품 즉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벧후1:4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신의 성품과 사랑이 동의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 풍성한 은사를 받고도 사랑으로 감당치 않으니까 교인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예리한 칼날도 사랑의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문명의 이기여도 악인이 가지고 있으면 문명을 파괴하는 무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다면 차라리 받지 않은 것만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아버지의 뜨겁고 거저 주시는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바울과 프란시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다가 몸에 성흔이 생겼습니다. 몸에 성흔이 생길 정도였으면 마음의 성흔은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이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몸부림쳐 울어야 합니다. 그 사랑에 감복하여 일생을 드리고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나의 최후로 남은 자아의 잔재는 사라지고 그리스도께 온전히 자신을 바쳐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으면서 다 된 줄로 알면 착각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이 성숙해집니다. 처녀 때 아기를 보는 마음과 어머니 때의 아기를 보는 마음이 다르듯 사랑은 인격에 대변혁을 몰고 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요일 4:8, 16). 그러므로 사랑은 신앙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창 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뜻은 이 사랑이 풍성하게 되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살후 1:3에도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또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1:9-11) 즉 사랑이 풍성할 때 이제 남은 것은 완성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사실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듯 우리가 자랄 하나님 형상의 목표인 사랑도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단계란 이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자라기 시작하는 단계일 뿐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복 주심의 의미는 하나님 자녀로 온 세상을 가득히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격 속에 세상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하나님의 형상인 사랑으로 가득히 채워지고 덮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얼마나 자랐느냐 그것이 곧 성장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엡4: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누가 크고 작고 앞자리 뒷자리 그런 시기도 질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적 성장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서로 일등하겠다고 투기합니다. 영적 성징이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자라남이므로 서로 다른 지체가 더 잘되라고 종이 되어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갈5:13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했습니다. 이것이 영성이 잘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6-28)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의 형상으로 온 땅에 충만하길 원하시듯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온 땅을 정복하길 원하시듯 우리가 정복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생물들을 다스리듯 전체를 사랑으로 행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의 창조를 마치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자라신 것을 보시고 왜 아니 심히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계속하여 먹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1:29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령한 측면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씨 가진 열매는 성령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는 우리가 자만하지 말고 계속해서 힘써야 할 생명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창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셨는데 이 풀의 양식은 은사적인 충만을 가리킵니다. 이 풀과 잎들은 신령한 측면에서 생명나무의 잎이 보여주는 것처럼 치유와 소생하는 힘을 아울러 갖습니다. 그리고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습니다(계22:2). 선지서에 나타나는 이런 식물들의 등장은 대개 천국의 은혜와 은사의 상징들입니다(사35:1).

만국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라이므로(벧전2:9) 만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되 하나님의 통치 자제 절제 등의 성격을 함유합니다. 즉 인간의 각종 본능들은 은사로서 영성을 입어 간수되어야 합니다. 지상을 사는 동안 육체는 신령한 도구와 아울러 탈선의 위험을 항상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은사입니다. 그런데 모든 푸른 풀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온갖 아름다운 은사들을 의미합니다.

사30:20-21에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가 있으니 안식의 단계입니다.

2:1-3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했습니다.

이 안식의 단계는 심령창조를 이룬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 창조의 안식은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참 안식의 예표입니다. 그래서 골1:16-17에 "그러므로 -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 단계에 오면 만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줄 믿어지므로 안식이 옵니다. 이 맡김의 훈련은 그 동안 줄곧 받아왔던 훈련인데 이 단계에서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늘이 무너져도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것을 안 이상 오히려 평안할 뿐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좋으신 아버지의 손에 달렸으니 무엇이 걱정입니까? 좋으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사모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단계는 심령성전이 완성되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경험되어지고 사랑하는 자에게 함께 하신다는 그 약속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거처를 함께 하심이 느껴지기 때문에 참된 안식과 평화만이 넘쳐날 뿐입니다. 그렇다고 외부적인 상황이 언제나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기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평안과 안식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것으로 어떤 감정도 이 지각이 다 압도해 버립니다(빌4:6). 그러므로 슬픔도 염려도 고독도 미움도 열등감도 마음의 상처도 느껴지지 않고 도리어 핍박과 낮아짐과 고난이 은혜가 될 뿐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기록하심은 창조주이신 하니님을 알게 하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셨고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심령창조의 구체적인 사항을 교훈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직 마음이 죄악으로 인해 공허하고 혼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이 대 선언은 이제 우리들에게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고 가라사대의 복음의 말씀을 깨닫고 확신하며 성령의 은사로서 서로 교제하며 은혜 주시고 힘 주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며 진정한 하나님의 품안의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조로 본 안식론길 (2:1-3)

이 시간에 “창조로 본 안식론”이라는 제목입니다. 안식(安息)이란 몸과 마음을 편히 쉰다는 뜻입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몸과 마음이 평안하다면 이보다 더 귀한 복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교인들에게 축복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15:1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인데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이보다 육신이 누리는 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생의 심령상태는 그러하지 못합니다. 창1:2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랬는데 꼭 이 말씀과 같이 죄인의 심령상태는 어쩌면 그렇게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듯 심히 불완전하고 불행하기 그지없습니다. 천지창조하기 전의 상태는 꼭 죄인의 심령상태와 같아요.

먼저는 혼돈합니다. 뒤죽박죽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알기 전에 율법 아래서 한 말을 보세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해도 살아지지 않고 죄악 된 길에 갈팡질팡하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또 죄인의 심령상태는 공허합니다. 적막하고 무가치하고 무질서하고 텅 빈 상태입니다. 삶의 의미도 없고 평안도 없습니다. 사48:22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고독한 마음입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심령상태는 어둡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지도 심판이 있는지도 천국이 있는지도 모르고 멸망이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인생에게 무슨 안식이 있겠습니까?

참 안식은 예수님이 찾아오셔야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창세기를 보니까 창조를 다 마치니 왔습니다. 본문 1-2절에 “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 심령도 온전히 창조 되어야 항구적인 안식이 옵니다.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 전에도 평안이 주어지긴 하지만 항구적이진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나의 주로 온전히 모셔 들이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시면 혼돈도 물러가고 공허도 채워지고 흑암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천지창조를 구속사에 적용해서 살펴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첫째 날 빛이 있으라 하셨듯 예수님이 임하시면 절망 중에 구원을 받습니다. 둘째 날 물과 물로 나뉘었듯 주님이 임하시면 세속이 분리 되는 회개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악인이 예수 믿고 변하여 선인이 됩니다. 셋째 날 땅과 바다와 식물들을 만드셨듯 주님이 임하시면 옥토 밭 심령이 되어 말씀에 순종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넷째 날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듯 주님이 더 충만히 임하시면 높이 되신 예수 안에서 하늘의 영광과 권세를 누립니다. 그리고 다섯째 날 물고기와 새를 만드셔서 생명으로 충만케 하셨듯 주님이 더욱 임하시면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 육축과 짐승과 사람을 만드셨듯 주님이 더욱 충만히 임하시면 사랑의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시켜 온전케 해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 날 안식하셨듯 성도는 풍부한 마음의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심령이 죄로 말미암아 심히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나의 주로 모시고 온전히 그 분 아래 겸손히 엎드려 내 위치에 서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게 됩니다. 새 피조물이 됩니다. 참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참된 안식을 누리시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다윗과 같이 마음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온전히 모시고 더욱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온전히 참된 안식을 누리시는 귀한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운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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