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리 지도!!

[스크랩] 성서지리에 관한 小考

하나님아들 2014. 4. 7. 20:26

 

 

 

 

                       성서지리에 관한 小考


                                                                          양희화

 

 

   *실로로 가는 길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역사에 있어서 지정학적으로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곳은 근동의 비옥한 정착지역 남서쪽 끝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외곽지역이다. 이 땅은 바사(Persia) 만에서 시나이 (Sinai) 반도에 이르는 초생달 모양의 비옥한 지대로서 소위 “비옥한 초생달(Fertike Crescent)”이라 불리운다. 이 초생달 지역은 서쪽으로 지중해를 면하고 있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아마누스, 아라랏, 자그로스 산맥 등 너무 험준해서 거의 넘을 수 없는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다. 반달 지대의 분지 안에는 광막한 수리아-아라비아 사막이 서쪽으로 시나이 반도 (Sinai Peninsula)의 바란 광야까지 뻗어 있는데 바란 광야는 성지와 이짚트를 갈라놓는 경계를 이루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짚트는 모두 큰 강이 흐르고 있는 지역으로서 일찍이 B. C.4,000년 말기에 고대 동방문명의 기초가 놓여졌던 곳들이다. 지형적인 특색과 경제적인 풍요함이 이 지역들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곧 큰 강들을 낀 광활한 옥토가 고대의 문명을 활짝 꽃피게 만들어 주었다.

 팔레스타인은 역대의 강국들이 힘을 겨루던 각축장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짚트 문명 중에 어느것도 팔레스타인이 끼지 않고 이루어진 것이 없다.

   *팔레스타인을 싸고 도는 사막들

 성지는 바다와 사막사이에 놓여 있고 이 두 요소가 성지의 성격에 영향을 준다. 서풍은 생명을 주는 비를 가져다주는 반면 동풍은 사막의 건조한 바람만을 준다. 점점 놓은 지대일수록, 그리고 바다에 가까운 지역일수록 더 습하다.

 팔레스타인 남부지방은 지구를 감싸고 뻗쳐잇는 건대 내에 포함되어 있고 광활한 사막지대는 성지의 남부와 동부에 접하고 있으며 높은 세일산이 광야의 심장을 향해 손가락처럼 돌출해 있다.  

   *고대 동방의 국제도로

 주요 대로는 성지 역사상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정착지는 거의가 다 고대 동방의 국제도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도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짚트에 이르는 대로였고 이 대로변에 중요한 정치적 중심도시가 자리를 잡았다. 고대로부터 대상들이 토산물을 비롯한 값진 사치품들을 가지고 주요 대로를 정기적으로 왕래하였고 대로변의 도시들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고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여 줌으로써 항구적인 수입의 원천을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대로들이 무역과 상업만을 위해서 열려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고대로부터 정복자들 또한 이 대로로 군사원정의 파도를 몰고 지나갔고 이들이 휩쓸고 지나간 되에는 파괴와 폐허의 흔적들만 남았다.

   *고대 동방의 경제

 식료품 생산은 고대 경제의 기초가 되었다. 음식물은 단조로웠고 오늘의 종류보다 단순하였다. 각 지역은 그 지방 토산물에 주로 의존하였다. 곡식과 기타 식료품이 매매되던 장소들이 있긴 했으나 이와 같은 교역의 범위는 제한되어 있었다.

 고대 동방에서 곡물생산은 강 유역에서 이루어졌다. 중심에서 벗어난 불모지와 사막과 북부 평지에서는 목양이 성행했고 어떤 지역에서는 목축, 말 사육이 흔하였다. 낙타 사육이 주로 아라비아 사막에서 대규모적으로 행하여지기는 B. C. 2,000년 말기 이후였다.

 고대 동방의 또 다른 주요 경제종목은 금속용해와 조업이었다. 금의주요 산지는 푼트(PUNT)땅이었으며 애굽 납부에까지 있었다.

 레바논 산맥과 반레바논(Anti-Lebanon: 시룐)에는 백향목과 기타 종류의 나무들이 서 있었는데 이 나무들은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뿐만아니라 애굽과 메소보타미아를 위한 주요 건축자재였다.

 해안 도시들은 직조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도시들이 값진 직조물을 위해 염색한 “두로산 자주빛 직물”을 만드는 데에 사용된 뿔고동 껍질(분비물은 자주빛 염료로 씀)의 산지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가나안에서 하나의 잘 발달된 예술은 상아 조각으로서 부자와 황실에서 건축과 가구장식에 사용한 사치품이었다. 상아들이 북쪽 수리아의 쿠쉬(누비아)와 니(Ni) 땅에서 수입되었다.

   *중동의 초기 문명

 인류 문명은 식료품 생산의 발달과 도시의 건설, 그리고 조직화된 정착에서 싹이 텄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흔적들은 약 1만년 전의 중석기 시대에서도 발견된다. 현재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여리고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데 여리고는  B.C. 7천년경에 이미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B.C. 5천년에서 B.C. 4천년 어간에 비옥한 초생달지대에서 인류문명이 크게 발전했던 흔적이 뚜렷이 발견된다. 이 시대에 메소포타미아에서만 아니라 이짚트에서도 이에 필적하는 문명이 꽃을 피웠고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사이에 있는 여러 지역에서도 역시 그러하였다.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네 강

 성경이 말하는 인류 최초 문명의 중심지는 어디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에덴동산에서 발원하는 네 강에 대한 서술에 암시되어 있다. 고대 사람들이 에덴에서 발원한 강들이 물이 가장 풍부한 땅으로 흘렀으리라 생각하고 그 중에 으뜸가는 강이 바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티그리스(Tigris)와 유브라데(Euphrates)라고 믿은 것은 당연하다.

   *팔레스타인의 고고학적 발굴

 20세기에 들어와서 주로 지난 40년 어간에 대규모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행하여졌는데 발굴의 대상은 이전 도시들의 잔재 위에 계속 세워졌다가 다시 무너져서 폐허가 된 수 많은 텔들이었다. “텔”은 히브리말로서 셈어와 깊은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중동 지방의 평지 곳곳에서 발견되는 위가 평평한 언덕을 의미한다.

 각 지층의 연대는 그 해당 층에서 나온 도자기의 유형을 기초로 하고 그것을 다른 비문들과 문서 혹은 기타 자료들과 대조분석하여 추정한다. 이러한 연대측정 방법을 유형학이라고 한다.

 팔레스타인 문화발달사에 있어서 혈거생활시대로부터 도시생활시대로 갑자기 발전했던 흔적을 우리는 여리고 성의 발굴에서 잘 알 수가 있는데 여리고는 건축기술과 그 규모에 있어서 그 당시의 뛰어난 성읍들 중 하나였다. 여리고는 쉽게 경작할 수 있는 땅 가까이에 여기 저기 산재하여 있던 개방된 일반 성읍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바사와 헬라와 로마 시대

 고대 동방에 최초로 거대한 제국들이 나타난 것은 B.C. 3천년 초기였다. 남부 메소포타미아에는 강대한 도시 왕국들이 기스와 라락과 라가쉬와 움마와 에렉과 우르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땅은 후에 가서 성경에 시날 땅이라 기록되었는데 처음에는 수메르라 불리웠다. 수메르 문화는 중동에 문명의 기초들을 놓았고 그 영향력은 “서방 땅”(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넘어 이짚트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 당시의 이짚트는 제1왕조의 최조 몇몇 왕들에 의해서 통일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이 때로부터 줄곧 이짚트는 가장 강대한 왕국 중에 하나가 되었고 초기 몇 세기 동안은 그 영향을 북방의 여러 왕국에까지 미치기도 했다.

 B.C. 24세기에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적 중심지는 남쪽의 수메르에서 북쪽의 셈족이 사는 악갓으로 옮겨졌는데 악갓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악갓에서 사르곤 1세가 일어나 악갓 제국을 세우고 남쪽의 수메르와 딜문을 다스렸고 앗수르 북쪽 수발투도 정복하였으며 더 나아가서 아마누스 산맥과 “상해”(지중해)까지 그 세력을 미쳤다.

 B.C. 3천년 경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짚트는 수많은 사료들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으나 동시대의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그 “원시 역사”에 속해 있다. 지금까지 이 시대의 팔레스타인 역사를 밝혀줄만한 자료는 별로 발견된 일이 없다. 앞으로 이곳에서 발굴되는 비문들이 빛을 발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차례의 발굴에서 B. C. 3천년과 B. C. 2천년 어간의 조기 청동기 시대에 문화가 발달된 부강한 도시들이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페피(Pepi) 1세의 출정(B.C. 2,350)

 페피 1세 시대(B.C. 24세기 중엽)의 다섯 번데 걸친 군사출정을 말해주는 이짚트의 한 비문은 초기 청동기 시대로부터 내려온 팔레스타인에 관한 유일의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페피 1세의 군사원정은 “사막 거민들의 땅”에 대한 것이었는데 고대 이짚트 사람들은 이짚트 동쪽 땅을 그렇게 불렀다.

  *저주문에 언급된 팔레스타인 (B.C. 20세기-19세기)

 B. C. 3처년대의 마지막 몇세기 어간에 서부 셈어를 사용하는 유목민들의 큰 무리가 비옥한초생달지대의 중심부를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악갓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이 무리들이 “아무루 백성”으로 기록되었는데 성경에는 아모리족으로 나와 있다. B. C. 2천년대의 처음 몇세기 어간에 아모리 족의 지배하에서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되었다. 이 때에 일어났던 나라들은 바벨론 왕조 초기의 가장 강력한 왕이었던 함무라비에게 B. C.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모두 흡수되고 말았다.

 이짚트에서는 B.C. 20세기와 B. C. 19세기 어간에 제12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다. 이짚트 왕국은 이때에 그 세력과 영화가 극에 달하였고 당시 이짚트의 통치권은 팔레스타인 일부와 페니키아 해안까지 확장되었다. 팔레스타인에 관해서 바르게 취급한 최초의 기록들이 이 당시로부터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 가운데 인형과 토판에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짚트에 대한 반역자들과 원수들의 이름이 있고 여기에 저주와 악담이 덧붙여져 있다. 그리고 이외에 이짚트가 미치고 있는 영향과 통치권 안에 있는 도시들과 종족들에 대한 언급도 있다. 이러한 저주문은 두 종류의 것이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B. C. 20세기 중엽 때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B. C. 19세기 말엽 때의 것이다.

 

     북방왕들의 출정

 성경 역사상 최초의 큰 사건은 네 북방 왕들이 사해 골짜기의 여러 왕들과 충돌한 전쟁이었다. 이 기록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오랜 옛날부터 구전이나 어떤 기록으로 내려오던 것을 성경저자가 채용한 것이 틀림없는데 이 전투기록에 나오는 많은 지명은 후대의 이스라엘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것들이다.

   *아브라함의 방랑의 전기(B.C. 2000년의 초기)

 족장들의 방랑생활을 말해주는 성경의 기사는 B. C. 2처년 전반기의 동방 실정을 잘 반영시켜준다.

 아브라함의 기원은 우르에 관련되어 있는데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는 수메르 땅의 중요한 중심지로 잘 알려져 있다. 우르는 제3우르 왕조의 여러 왕들 치하에서 그 영화가 극에 달하였는데 이러한 왕들은 B.C. 2060-B.C. 1950년 어간에 고대에 찬란했던 수메르 문화를 최후로 부흥시켰었다. 몇몇 아브라함의 친척들의 이름은 우리에게 알려진 몇몇 도시들의 이름과 일치되는데 아브라함의 아버지, 스룩의 손자요 나홀의 아들인 데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이사와서 살았고 아브라함은 거기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나홀 출신이었고 야곱의 장인 라반은 밧단 아람의 하란 출신이었다. 나홀과 하란은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발리 강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나안 땅에서의 야곱의 여행(B.C. 2000년 중엽)

 야곱에 관한 기사는 길르앗의 중심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당시 이러한 지역에는 정착민들이 드문드문 산재하여 있었기 때문에 숲 지대와 외곽 건조지대에 광활한 목초지들이 많이 있었다.

  *힉소스 왕국(B.C. 1720년에서 1570년까지)

 우리는 힉소스 왕 재위 기간이나 힉소스 왕조 치리 어간에 대해서는 상세한 점들을 모르고 있다. 이짚트 내의 그들의 수도는 북동쪽 나일 델타지역의 소안에 있었으며 그들의 통치는 이러 저러한 형태에 따라 팔레스타인과 수리아를 넘어 유브라데 강 유역에까지 확대되었다. 최초의 몇몇 힉소스 족장들은 셈족 계통의 이름을 가졌었다. 이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의 통치자들 사이에 후루족의 요소가 나타나게 되었다.

 힉소스 통치자들은 B. C. 1570년 경의 18대 왕조의 창건자인 아모세 1세에 의하여 애굽에서 축출되었다. 이 사건을 말해주는 유일한 문서는, 애굽인들이 소안을 정복한 후에 힉소스 군을 추격하여 팔레스타인으로 진주하였으며 3년간 공성한 후에 사루헨을 점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애굽의 새 왕국은 이짚트 제국주의 시기였던 19대 왕조의 발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 기간에 이짚트 왕들은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에 있던 이전 힉소스 제국의 경계지역을 얻으려고 애를 썼다.

  *둣모세(Thutmose) 3세의 출정(B.C. 1468년)

 이짚트 왕 둣모세 3세는 여러차례의 출정과 더불어 레테누 땅에 대한 이짚트의 통치를 공고히 했다. 둣모세는 그의 첫 출정 때에 므깃도 근처의 전투에서 가나안 열왕들의 동맹군을 꺾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역사상 전투에 관한 기사가 그처럼 상세히 기록되기는 이 전투가 처음이다.

 이짚트에 대해서 반기를 든 가나안 동맹군의 선두에는 오론테스 강 상류에 위치한 게데스 왕과 므깃도 왕이 서 있었다. 이짚트의 왕들은 출정에서 승리할 때마다 신전 벽에 그들이 정복한 도시들의 지형적 목록들을 새겨두었는데 그것은 포로된 왕들이 열을 지어 바로 왕 앞에 끌려오는 모습을 하고 있고 그 밑에 도시 이름이 새겨 있다. 둣모세 3세의 명단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팔레스타인 성읍들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그 명단에는 도시이름 116개가 나오는데 그 중 66개가 확인되었고 지도 34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아멘호텦(Amenhotep) 2세의 제 1 차 출정(B.C. 1431년)

 둣모세 3세의 승리 이후 3세기 동안 팔레스타인은 이짚트의 한 도가 되었다. 가사에 이어 욥바, 벧. 스안, 울라사, 추물과 같은 다른 도시들도 깨가 되자 이짚트의 권위를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고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는 통로를 제공하고 전차와 원군과 군량미와 그들을 위한 기타 물품을 공급하여 주는 한 다른 가나안 도시 왕국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둣모세 3세의 아들 아멘호텦 시대에 이짚트 제국에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왕은 가나안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2차에 걸쳐 계속해서 출정을 강요당하였다. 아멘호텦은 다른 어느 왕 보다는 자기의 용맹을 자랑하기 위해 여러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그의 출정 중 크긴 해도 보다 덜 완성적인 사건들의 일부, 특히 그의 패배는 생략해 버리고 넘어갔다.

  *아마르나(Amarna) 시대의 가나안왕들(B.C. 1400년에서 1350년까지)

 엘.아마르나(El.Amarna) 편지들은 가나안 따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여 주는 가장 유력한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이 편지들은 이짚트 왕 아멘호텦 3세와 그의 아들 아멘호텦 4세의 왕실 공문서의 일부로서 아멘호텦 4세 통치시대의 이짚트 수도였던 엘.아마르나(El.Amarna)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모두 350개의 토판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토판들 위에 당시 세계통용어였던 악갓어로 새겨져 있다. 이 편지들의 절반가량이 가나안 통치자들부터 이짚트 왕들에게 보내어진 것이다.

  *아마르나 편지들에 나타나 있는 세겜왕국과 그 주변 국가들(B.C. 1400년-1350년 까지)

 세겜왕 라바유의 통치는 에브라임산 전체로 확대되어 사론과 이스르엘 뿐아니라 예루살렘과 게셀 땅까지 확대되었다. 한 편지에는 라바유가 수넴을 파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짚트 당국은 그의 활동에 끝장을 내고 그를 이짚트로 송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는 배로 이송하기 위하여 므깃도에서 악고로 수송되는 동안 한나돈에서 탈출했으나 도주하는 사이에 기나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아마르나 편지에 기재된 예루살렘과 세벨라의 제도시(B.C. 1400년-1350년까지)

 비교적 넓은 지역에 산재해 있던 여러 도시왕국들은 정착이 희박했던 산지에서 특히 번영하였다. 이러한 왕국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면 그들은 당시 팔레스타인을 위협하고 있던 반 유목민들인 아피루-하비루 족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세티(Seti) 1세의 벧 스안 지역 출정 일부(B.C. 1303년)

 가나안 따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려는 대대적인 노력이 이짚트 제19왕조의 바로 왕 세티 1세와 라암셋 2세와 메르넾타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세는 그의 통치 제1년에 멀리 가나안 북부 레바논의 중요한 해안도시 울라사에 이르렀다. 벧-스안에서 발견된 한 승전기념비에 그곳의 이짚트 기지 주변지역에서 있었던 세티 1세의 출정 일부가 서술되어 있다.

 

     *라암셋(Rameses) 2세의 게데스 원정(B.C. 1286년)

 라암셋 2세 재위 제 5년에 수리아 통치건을 놓고 이짚트와 헷간에 결정적인 전쟁이 일어났다. 헷 군은 오론테스 강의 게데스의 텔 뒤에 매복해 있었다. 그러나 라암셋 2세는 헷 군이 멀리 북방 알레포 지역에 나타나리라는 두 베두 사람의 거짓 정보를 믿었다. 헷 군은 전열을 가다듬은 후 1개 보병사단과 함께 전차대군 제2사단을 급습하게 했다. 그때 라암셋의 나머지 2개 사단은 강 저편에 있었다. 헷 군은 즉시 이짚트의 진지를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왕과 그의 친위대는 강을 뒤에 두고 완강하게 방어하였다. 패색이 짙어갈 무렵에 아무루에서 편성된 “의용군” 형태의 뜻하지 않던 이짚트 원군이 도착하여 약탈에 여념이 없던 헷 군을 기습하였다. 헷 군은 진지에서 쫓겨나갔고 이렇게 해서 라암셋은 그의 군대를 재편성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라암셋(Rameses) 2세 시대의 가나안 땅(B.C. 1280년 이전)

 후기 전쟁들은 이짚트와 헷 양국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라암셋 제 21년(B. C. 1270년경)에는 양국이 게데스 남쪽 중부 수리아에 경계선을 설정하는데 합의를 보고 양국간에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메르넾타(Merneptah) 출정(B.C. 1220년)

 라암셋 2세 통치어간의 팔레스타인에 관한 지식은 비록 이 기간 중에 그의 왕자 메르넾타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출정을 떠났던 일이 있긴 했으나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꼭 한번 이짚트 기념비에 새겨진 한 승전시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나올 뿐이다.

 

     *이짚트로 팔려가는 요셉. (B. C. 18세기)

  성경은 요셉의 개인생활이 계기가 되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으로 매려가게 되었다고 말해준다. 당시에 흔히 기근을 만나면 유목민들이 목초를 찾아 가축을 끌고 이동하는 일이 있었다. 애굽 지방에서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그러한 움직임이 술 광야(출15:22)에 있는 애굽의 국경요새들을 통하여 일어났음을 말해준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니”(출1:8)하는 구절은 둣모세 3세(1501-1447B. C.)를 가리키는 것이며 아멘호텦 2세(1447-1420 B. C.) 통치 제 3년 (1445 B. C.)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 제1차적으로 시내 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바로의 군대의 추적을 벗어나 안심하고 시내 산을 향하여 광야길을 진행해 나아갔다. 이스라엘이 광야길을 가는 도중에 들렸던 곳(민33:8-34)도 정확하게 그 위치를 정할 수 없으며 지도에 나타난 것도 추상적인 것이다. 다만 가나안 땅 최남단에 있는 가데스-바네아만은 확정적이다. 이곳은 샘이 많은 오아시스였고 이스라엘은 광야생활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가졌으며 공통된 영적목적을 가진 단일민족으로서 단결하며 훈련을 받았다.

 

     *이랏 전투. (B. C. 13세기 초기)

 이스라엘 민족은 처음에 남쪽에서부터 뚫고 들어오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아랏 왕의 강력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실패하였는데 아랏 왕은 동쪽 네겝을 지나 유대 산지로 항라려는 이스라엘 민족의 북상진로를 봉쇄하였다.

 

     정탐군들의 노정과 가나안 땅의 경계(B. C. 13세기 초기)

 가나안 따응로 들어가려는 시도는 가데스-바네아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에서모세는 열두 정탐군을 택하여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보냈다. 정탐군들은 신 광야에서부터 북쪽 끝의 르보-하맛에 이르는 지역을 탐지하였다.

 

     *트랜스욜단 침투(B. C. 13세기 중엽)

 이스라엘의 정복활동은 가나안 땅 경계 이편의 트랜스욜단에서 시작되었다. 트랜스욜단(요단 동쪽)에 산재하여 있는 정착지역에는 목축에 적합한 광대한 땅이 있었다. (민수기32: 1-4). 일찍이 이스라엘 민족과 조상 때에 관련이 맺어진 백성들이 이미 트랜스욜단 지역에 정착하여 소 왕국의 기틀을 잡고 있었는데그들은 곧 에돔과 모압과 암몬 족속들이었다. 헤스본의 아모리 왕국은 모압과 암몬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아모리인의 왕 시혼은 모압 초대 왕을 치고 그 모든 땅을 아르논 강에 이르기까지 그 손에서 탈취했었다.

 

     *느보 산에서 본 전망

 모세의 활동은 모압 평지에서 종말을 고한다.

 

     *가나안 땅 정복에 관한 기사

 가나안 땅의 정복에 관한 기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이적적으로 건너는 일로 시작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맨 먼저 도착한 곳은 여리고 동편 길갈이었다.(수4:19). 길갈은 가나안 땅에서 최초로 성별된 곳으로서 한동안 이스라엘 지파들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는데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여기서 왕으로 세움을 받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삼상11:15).

 여리고와 아이 성이 정복에 관한 기사가 길갈과 연결되어 있다. 여리고의 정복은 이적적인 승리로 장식되었고 가나안 땅에서의 첫 개선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사기가 충천하게 해주었다.

    *세겜의 종교

 계속되는 정복기사는 여호수아가 에발산에 한 단을 쌓은 사실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단은 세겜 근처 모레 상수리 수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이스라엘이 산지를 정복한 뒤로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브온 전투(B. C. 13세기 중엽)

 이스라엘의 정복사실을 재생함에 있어서 성경은 몇 가지 큰 사건들만을 선택해서 서술하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 특별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건들이 훨씬 많이 있었음에 틀림없겠다.

 정복의 기록과 관련된 가장 정밀한 고고학적 증거는 라기스에서 발견되었다. 이 가나안 도시들의 파괴상을 보여주는 지층에서 이짚트의 비문이 있는 사발이 발견되었는데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어떤 바로의 재위 4년의 날자표시가 되어 있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가장 가까운 바로 왕은 메르넾타(Merneptah: B. C. 1224년에서 B. C. 1214년까지 통치함)이며 이렇게 해서 라기스가 B. C. 1220년 이전에는 이스라엘에게 함락되지 아니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할 것 같다.

 1. 기브온 전투.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 주위에 모여들어 네 기브온 도시들을 도와주었다. 이 네 도시는 예루살렘이 앞장선 다섯 가나안 남부 도시 연합군에게 공격을 받았었다.

 2. 남방 족속의 침입은 전술한 승리의 결과였다. 유다가 북쪽에서 접근하여 베섹 가까이에서 승리한 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유다 족속은 예루살렘을 점유하지 않고 유다 산지와 세벨라를 향하여 남쪽으로 진행하여 나아갔다.

 3. 남부 세벨라의 도시들의 정복은 그 중심에 라기스가 있었다. 남방 족속들이 정착에 있어 맨 마지막 단계가 되었다. 게센 왕의 도움마저도 이스라엘의 맹공격에서 라기스를 구할 수 없었다. 라기스 지역은 확인되지 않은 한 도시 막게다도 이 때에 정복되었다.

 

     *메롬 물가(Watars of rom)의 전투

 성경은 이스라엘이 성지 북뽁에서 가나안인들을 격파한 두 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곧 메롬 물가에서의 전투와 드보라의 전쟁이다. 이 두 전쟁에서 하솔 왕 야빈은 가나안 왕들의 연맹군을 지휘하였다. 이와같이 전통적 견해는 두 전쟁을 동일한 시기에 연관시키고 있다. 드보라의 승리는 가나안 왕 야빈의 세력의 쇠퇴만을 초래하였고(사사기 4:24) 하솔이 파괴된 것은 메롬 물가의 전투와 관련되어 있다.(여호수아11:10-11).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드보라의 승리가 메롬 물가 전투 보다 앞서 있으며 후자만 여호수아서에 나타나 있는 까닭은 이 전투가 후기 여호수아서에 속하는 것으로 돌려지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드보라의 전쟁은 세밀한 점까지 소상하게 재생시킬 수 있는 성경의 몇몇 기록 중 하나이며 산문과 시 형식으로 되어 있는 데 이 둘은 그 내용을 서로 보충해주고 있다.이 전투는 아낫의 아들 삼갈의 행동에 뒤이어 있는 것으로 그는 겐 사람 헤벨의 처 야엘에게 감동되어 블레셋을 쳤다.(사사기 3:31)

 메롬 물가에서의 전투에는 가나안 도시의 이름 네 개가 기록되어 있다. 알려져 있지 않은 마돈 대신 70인역의 헬라어를 따라 메롬으로 읽어야 한다. 메롬(메롬 물가)은 가나안인들이 집결했던 곳이다. 실제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는데 이 전투는 하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장소에서 벌어졌다. 이 싸움은 고지 갈릴리를 방어하기 위한 가나안인의 최후의 시도였던 것 같다.

 

     *므낫세의 아들 마길(B. C. 12세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이 북쪽 길르앗 땅으로 이도했던 일이 므낫세의 족보에 명백히 나타나 있는 경우를 들 수가 있다. 드보라 시대에 마길은 다시 돌아와 북쪽 에브라임 산지에 거주하였고(삿5:14) 후에 그는 길르앗의 조상 곧 길르앗 주민의 조상이 되었다.

 

     *가나안 왕들의 명단(B. C. 12세기)

 정복당한 가나안 왕들의 명단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에 담겨 있는 정복에 관한 기사들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이 명단은 북방 왕들 외에도 에브라임 산지의 몇몇 성읍들과 사론의 성읍들과 세벨라의 아둘라모가 “길갈의 고임 왕”을 포함하고 있는데 “길갈의 고임 왕”은 70인경에“갈릴리의 고임 왕”으로 되어 있다.

 

     *해양민족들의 발흥(B. C. 1168년)

 12세기 어간에 성지 역사상 상호 관계가 있는 두가지 사건의 결정적 진전이 있었다. 곧 해양민족의 도착과 이짚트인의 통치의 종식이 그것이다. 해양민족에게 섬들과 소아시아에서 온 인도-유럽인들이었다. 그들은 도리스 헬라인들의 압박을 받아 동쪽으로 길을 떠났다. 그들의 압박은 이미 B. C. 13세기에도 있었던 감이 있으나 고대 동방의 왕국들을 쓰러 뜨린 본격적 침입은 12대 왕조의 제2대왕인 라암셋 3세 재위 8년에 절정을 이루었다.(B. C. 1168).

 

     *이스라엘의 통치권(B. C. 12세기)

 12세기에 있어서 팔레스타인의 주요 적대민족은 각기 그들의 영역에 기초를 잘 잡고 있었다. 곧 이스라엘은 산지에, 가나안은 북쪽 골짜기와 평지에, 블레셋은 남쪽 해안평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후자는 이렇게 해서 블레셋으로 알려졌는데 훨씬 후에 이 이름은 팔레스타인의 형태로 되어 그 지역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성경의 몇몇 구절들은 이스라엘 족속이 강한 요새로 된 평지의 가나안 성읍들을 정복할 수 없었던 사실들을 확고히 해 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철병거를 가졌고... 강하기”때문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땅

 이스라엘 지파의 기업에 포함되어 있던 가나안 지역 이외에도 우리는 성경에서 “아직 남아있는 땅”이란 용어를 발견한다(여호수아13:1-6, 사사기3:1-3). 이 용어는 남쪽 블레셋과, 북쪽 비블로스까지의 페니키아-시돈 해안과 레바논에서 아모리 변경에 있는 아벡까지와, 헐몬 산 밑 바알갓에서 르보하맛에 이르는 레바논 골짜기를 포함한다. 그 용어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한번도 침입해 들어간 적이 없는 가나안 땅의 여러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

 

     *갈릴리 지파들의 경계(B. C. 12세기에서 B. C. 11세기까지)

  여호수아:13:19에 나오는 지파들의 기업에 관한 기사는 서로 다른 두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지파 간의 경계에 관한 서술과 그 경계 안에 있는 각 지파들의 성읍목록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성읍목록이 이스라엘 왕국이 여러 행정이 같은 사실은 지형학적으로 명백히 구분된 유다 성읍들의 목록에서 확실해진다고 본다. 한편 경계에 대한 서술은 가나안 정복이 마무리되어가는 사사시대에 구체화되었고,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지파 간의 경계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되었다.

 여호수아서의 경계는 다윗 왕국 시대에 이르러서 실현을 보게 되었는데 다윗은 블레셋과 두로의 경계까지 나라를 확장시켰었다 (삼하24:5-7 및 지도 106과 비교해보라). 이러한 경계들은 다른 경계에 관한 서술들을 보충하여 준다.

 

     *아비멜렉 왕국(B. C. 12세기)

 이스라엘 지파들이 각기 그들에게 주어진 기업의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 정착하는 일은 B. C. 12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지파들 간의 유대관계는 비교적 조용한 상태 하에서 점차 해이 해져 갔다. 아무리 강한 원수라도 이스라엘 농부들의 안전과 그들의 기업을 위협하지 못하였다.

 성경에 서술되어 있는 전쟁들은 대부분의 경우 주변에 있는 나라들과 틈만 있으면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던 사막의 침략자들과의 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이 위기에 차하게 될 때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사들이 일어나서 백성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하여 냈다. 대체적으로 사사들은 백성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해낸 후에도 계속해서 통솔권을 가졌다. 사사들은 일반적으로 적은 무리의 군사들을 거느렸고 병사들 대부분이 사사 자신의 지파나 그 이웃 지파 출신이었다. 담대한 지도자 밑에 이삼백의 군사로 뭉쳐진 이스라엘은 조직화되지 못한 원수들을 불시에 기습하여 물리칠 수가 있었다.

 3년간 지속된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의 통치는 사사 시대의 특이한 전통을 남겼는데 그 전통이란 사사의 영도권을 세습적으로 물려주려했던 시도를 말한다. 아비멜렉은 세겜에 살고 있던 가나안 족속의 도움을 힘입어 이러한 전통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모계혈통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비멜렉을 세겜 사람 중에 하나로 생각하였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게 “바알브릿 묘에서 은 70개를” 내어주었다. 그러나 열마 안가서 세겜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게 되었고 이 때문에 아비멜렉은 세겜을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살9:28). 세겜을 짓밟은 아비멜렉은 더 나아가서 에브라임 산지의 므낫세 지파 기업 안에 남아 있던 나머지 가나안 사람들의 성읍들에까지도 그의 통치ㅜ건을 확장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기브아의 첩 사건에 관한 기사(B. C. 12-11세기)

 사사기는 한 레위인의 첩이 기브아의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죽은 사건 뒤에 나오는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 간의 전쟁에 관한 기사로 끝을 맺는다. 이 기사는 사사 시대의 전반적인 상황을 반영하여 주고 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올은대로 행하였다” (삿 21:25)

 

     *삼손의 공적(B. C. 11세기 초기)

 이스라엘의 가장 강한 적수 블레셋과의 싸움은 삼손 기사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블레셋이 가나안에 온 것은 이스라엘이 도착한지 몇 세대가 지난 뒤인 B. C. 12세기였다.(지도66). 그들은 남쪽 해안을 따라 북으로 메얄곤 지역에 이르는 곳까지 정착하였다.

 유다와 블레셋 사이의 경계지역은 세벨라 중심부를 가로질러있었다. 두 백성이 전쟁과 평화시에 마주친 곳이 바로 여기였다. 삼손의 기사에서 우리는 소렉 골짜기 북부 세벨라의 생활이 서술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건들은 이스라엘의 소라와 에그론의 딸 도시들 중 하나인 딤나 사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자는 구능 위에 높이 있었고 후자는 골짜기 아래에 있었다. 단 지파는 전에 이 지역에 정착하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다. 삼손은 거기에 남아있던 단 지파 사람 중 하나였다. 삼손 시대에 블레셋 사람들은 이미 이스라엘 보다 우세하여 유다 여러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다.(삿15:11). 압제자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복을 가한 이 강한 영웅 이야기들이 이스라엘 고을마다 인기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각 지파별로 본 사사들(B. C. 12-11세기)

 사사기는 구원을 베푼 대 사사들 외에도 몇몇 소 사사들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각기 그들의 본래 성읍에서 다스렸다.(삿10:1-5, 12:8-15).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사들의 생활은 풍족하였고 이들이 이방 족속들과 전쟁을 했던 기록은 별로 없다. 이스라엘 지파 간의 동맹은 이들 사사에 의해서 유지되었고 사사는 매 지파마다 돌아가면서 세웠는데 평화시에는 이들의 권한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에벤에셀 전투(B. C. 1050년)

  11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은 가나안 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이스라엘과 블레셋간의 결정적인 전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블레셋 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생명은 잠시 동안뿐이었고 뒤에 가서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이스라엘 왕국이 출현하게 되었다.

 

     *언약궤의 배회(B.C. 1050년)

 실로에서 전쟁터로 가져왔던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언약궤의 배회와 반환에 대한 놀라운 기사는 북부 블레셋의 중심도시들과 그 변경지역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언약궤는 블레셋의 에그론에서 유다의 벧세메스로 돌아왔는데 때마침 이곳 백성들은 골짜기에서 밀을 수확하고 있었다.

 성경은 사무엘 시대의 또 다른 전쟁의 기록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격파하였고 이 전쟁역시 에벤에셀과 돤련되어 있다.(삼상7:7-14).

 이스라엘 지파들의 연맹은 B. C. 11세기 후반에 와서 없어졌고 이 때는 왕에 의한 통치 무르익고 있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블레셋의 압제하에서 일어났다. 그는 예루살렘 근처 기브아 출신이었는데 그후 기브아는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가 되었다. 사울은 에브라임과 베냐민 사이의 변경에 있는 중부 에브라임 산에서 잃어버린 나귀를 찾던 중에 왕으로 잭함을 받게 되었다.

 

     *야베스-길르앗의 구원(B.C. 1025년)

 사울이 왕위에 오른 일은 구원의 사사들이 일어난 거소가 흡사했다. 야베스. 길르앗은 암몬왕 나하스에게 압박을 받고 있었고 이에 사울은 베섹에서 돌격하여 암몬 사람들을 불시에 공격함으로써 그 이스라엘 성읍을 구원하였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후 사울은 그의 주위에 모였던 군대를 해산시키지 않았고 길갈로 가서 하나님 앞에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사울 왕국이 가나안 땅의 최초 이스라엘 중심지였던 길갈에서 창건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울의 왕국(B.C. 1025-1006년)

 

 사울은 사사중에 맨 마지막 사람이자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었다. 그는 수도를 그의 고향 동리인 “사울기브아로”정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정착지 전역을 다스렸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명에에서 구원했을 뿐아니라 기타 주위의 모든 대적들에게 전쟁을 일으켰다.(삼상14:48).

 

     *다윗과 골리앗 싸움(B.C. 1010년)

 다윗은 유다 중심부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유다 베들레헴 출신이었다. 그의 강한 정신과 신체는 사울의 조정에서 쉽게 승진하고 “천부장”(삼상18:13)과 왕의 사위(삼상18:17-30)가 될 수 있게 해주었다. 사울은 이 결혼을 통하여 유다와 보다 견고한 유대를 모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사울의 통치기간 내내 계속되었던 블레셋과의 장기적인 갈등의 일부였다.

 

     *다윗의 방랑기(B.C. 1008)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이내 팽팽히 긴장되었고 두 강한 인물 사이에 잦은 충돌이 일어났다. 다윗은 처음 유다 광야로 도망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사막의 절벽 사이에 있는 굴과 요새에 은거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 떼의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였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광야 끝의 유다 정착지들을 떨게 하였다.

 

     *시글락의 다윗(B.C. 1007년)

 아기스는 다윗을 환영했을 뿐 아니라 남방에 있는 시므온 지파의 변경 성읍 중에 하나인 시글락을 그에게 맡겼다.

 다윗과 그의 무리는 멀리 남쪽 사막을 휩쓸었다. 다윗은 이렇게 여러 차례에 걸친 정복과 아말렉 족속에게서 탈취한 노획물들을 풍부하게 분배하여 줌으로써 남쪽 지파들을 자기 편에 끌어넣었다.(삼상30:26-31).

 

     *다윗의 용맹스런 부하들의 혈통(B.C. 1008-1007년)

 다윗의 주위에는 용맹스런 부하들이 모여들었는데 일부는 그가 사막 요새에 있을 때 모여들었고(대상12:8), 일부는 시글락에 있을 때 모여들었다. 그들은 다윗 군대의 핵으로서 봉사하였고 불평 한마디 없이 충성했으며 언제라도 용감하게 공훈을 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길보아 전투를 위한 병력전개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전쟁은 길보아 산에서 사울이 전사함으로써 종식되었다. 사울은 그의 마지막 싸움을 이스르엘 교차로에서 맞이했다.

 블레셋의 승리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이스르엘의 중요한 성읍이 그들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의 경고로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스안 성벽에 매달았고 그들의 무기는 아스다롯 신전에 두었는데 이 신전은 아마 당시 두 신전 중 하나였다고 믿어지며 그 잔재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들어났다. 야베스-길르앗 사람들은 사울이 생전에 그들의 성읍을 암몬 사람들의 손에서 구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야음을 이용하여 당돌하게 가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스안 벽에서 내려다가 야베스에 정중히 장사지냈다.

 

     *다위과 에스바알 왕국(B.C.1006-1004)

 사울의 군장 넬의 아들 아브넬은 길보아 전투에서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는 이스라엘의 수도를 마하나임으로 옮겼고 요단당을 건너가 사울의 남은 아들 중 하나인 에스바알을 왕으로 삼았다.(삼하2:8. 대하8:33). 성경에는 비하적인 표현으로서 이스보셋(“치욕의 사람”)으로 언급되어 있다.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유다의 장로들을 설득하여 헤브론에서 그를 유다왕으로 기름붓게 하였다. 이리하여 왕국은 분열되었다. 다윗이 유다에서 통치하고 있는 동안 에스바알은 사울 왕국위 나머지 다섯 지파의 지역을 통치하였다.(삼하2:9-10).

 

     *예루살렘 정복과 다윗과 블레셋 간의 전쟁(B.C. 1000년)

 아브넬과 에스바알의 싸움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들을 모두 정복하고 유다와 이스라엘을 그의 수중에 넣고 통치하도록 해주었다. 다윗의 첫 활약은 여부스 족속이 수도로 삼고 있던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윗의 업적 가운데 가장 지략적인 것 중 하나였다.

이 때로부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역사상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윗 편에서 볼 때 이것은 그의 새 정책의 한 단계로서 가나안 전지역을 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땅 안에 있는 이방족속의 성읍들을 이스라엘에 귀속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람-소바와 다메섹 정복(B.C. 990년)

 다윗은 즉시 새 정복의 길에 나섰다. 성경은 트랜스욜단과 수리아에서의 전승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만 다윗이 먼저 성지를 요단 서편까지 정복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을 격파하고 “그들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았다”(삼하8:1). 그는 블레셋 군사력을 약화시켜 이스라엘에 더 이상 위협을 못하게 만들었다. 다윗은 세벨라와 사론과 성지 북쪽 골짜기에 남아있던 가나안 성읍들을 정복하였다. 그 땅들의 일부는 왕실재산이 되어 특별히 임명을 받은 “다윗 왕의 청지기”들의 감독을 받았다.(대상27:25-31)

 다윗은 그 때 트랜스욜단 동편으로 그의 정복의 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다윗은 먼저 모압으로 향했던 것처럼 보인다. 다윗의 찬란한 승리는 다메섹을 정복하고 아람소바를 굴복시켰다.

 

     *다윗의 왕국(B.C. 990-968년)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의 치하에서 군사력과 정치세력의 절정에 이르렀다. 고대 동방의 대국들은 “비옥한 반달” 서편을 진공상태로 남겨 둠으로써 침체기에 처해있었다. 다윗에게서 이스라엘은 뛰어나고 선견지명이 있는 한 군사 및 정치 지도자를 발견하였는데 실로 그는 우세한 상황을 이용할줄 아는 자였다. 아람-소바와 교전한 뒤로 이스라엘은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요압의 인구조사(B.C. 980년)

 이스라엘의 정착지역은 인구조사기간 동안에 요압이 행한 노정에 대한 기사에 반영되어 있다. 이때의 인구조사는 세금징수와 징병을 목적으로 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모압경계에 있는 아로엘에서 출발하여 시돈과 “두로의 견고한 성”에 이르렀다(삼하24:6-7).

 

     *단 지파의 성읍들(B.C. 980년)

 단지파의 성읍 목록(수19:40-46)은 다윗 시대에만 적용된다. 왜냐하면 다윗 시대 이전에는 이 지역의 대부분이 이스라엘 영토밖에 있었고 뒤에는 그곳이 부분적으로 블레셋의 관할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다윗 시대의 블레셋 경계는 소렉 계곡을 따라 에그론 성읍 경계로 이어졌던 것이 분명하다.

   *레위 지파의 성읍들(B.C. 980년)

 레위 지파 성읍들의 목록 역시 다윗 시대로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목록에 포함된 모든 성읍들이 이스라엘 영토로 귀속된 때는 이 시대 밖에 없기 때문이다. 레위 성읍들은 모두 마흔 여덟 개로서 여러 지파에 산재하여 있었고 그것은 매 지파에 네 성읍씩 해당하였다.

 헤스론과 세겜은 도피성의 목록으로부터 이 목록에 참가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유다와 에브라임에 그 두 성읍 말고도 네 개의 레위 성읍들이 있었던 것으로 봐서 분명하다.

 

     *솔로몬의 성전건축 계획(B.C. 10세기 중엽)

 다윗은 이스라엘을 소국에서 강국으로 만들었고 솔로몬은 좁은 시계의 빈약한 나라를 국제적 중심국가로 만들었다. 이때에 이스라엘 성읍과 그 동리들마다 생활의 혁명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급작스럽게 그 당시의 최고 문화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국고가 크게 부해졌고 솔로몬은 성지역사상 위대했던 건축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솔로몬 치하의 행정구역

 열왕기상 4장에 솔로몬이 열두 장관 명단이 나와 있는데 그들의 임무 가운데는 왕실을 위한 식료품을 공급하는 일도 있었다. “온 이스라엘의 열 두 행정구역은 유다를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왕실의 행정상 유다와 이스라엘이 두개의 분리된 구역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평지에 있던 이전 가나안 성읍들이 이제는 독립 행정구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성읍들은 어는 모로 보나 이스라엘 성읍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구역에는 그 중심되는 성읍 이름에 따라 그 이름이 붙여졌던 반면에 다른 곳들은 지파이름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예루살렘 성 건축 및 확장공사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의 범위를 확장하였고 대국의 수도답게 견고하고 아름답게 꾸몄다. 그의 으뜸가는 업적은 예루살렘 성전건축이었다. 솔로몬은 자신의 대국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을 통과하는 중요한 무역통로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가 이 통로들을 지나는 교역활동을 지배한 덕분에 그의 국고가 크게 부하였다. 솔로몬은 상당수의 전차대를 두었는데 이들은 “병거성”에 그 기지를 두고 있었고 그곳은 수익이 큰 말과 병거부역의 주요 중개소가 되었다.(왕상10:28-29)

 

     *두로의 무역(B.C. 10-7세기)

 이스라엘 왕국은 대규모적인 해상무역의 발전에 필요한 기술적인 지식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의 “다시스의 배들”을 보낼 때에 두로 왕 히람의 노련한 선원들의 도움을 청하였다. 지중해의 다시스(욘1:3과 비교해보라)는 사르디나였을 가능성이 짙다. “다시스의 배들”은 장기항해에 적합한 일종의 대형선박들이었다.

 두로는 이 시대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지중해 무역의 절대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두로의 상고들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식민지와 항구들을 얻었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항구는 칼타고였다.

 

     *왕국의 분열(B.C. 928년)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쟁은 다윗과 솔로몬의 치하에서도 해소되지 않았는데 북방 지파들은 다윗 집의 통치를 유다의 군주 정도로 생각하였다. 솔로몬 통치하에 계속 증가된 내부의 긴장은 그의 사후에 왕국의 분열을 가져왔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이스라엘에 크게 양보하는 길만이 통일왕국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실정을 파악하는데 실패하였다. 북방 지파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르호보암은 이것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북방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오직 베냐민 지파만이 유다와 다윗 집에 가담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르호보암의 요새(B.C. 928-920년)

 요새화된 르호보암의 유다 성읍목록이 시삭의 침입 이전의 시기와 관련이 되어 있는지의 여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르호보암은 이 출정에 앞서 이 성읍들을 요새화하는 축성작업을 착수하였다가 후에 그 일을 끝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방어를 위한 성벽은 서쪽으로 블레셋 경계를 따라 세워졌고 유다 남방과 그 산지는 제외 되었다.

 

     *시삭의 출정(B.C. 924년)

 이짚트 바로 왕들은 솔로본 시대의 이스라엘을 약화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다.  이짚트 왕 시삭은 르호보암 재위 5년에 기회를 틈타서 정복과 약탈을 위한 출정의 길에 올랐다. 성경에는 시삭의 출정에 관해 매우 간략히 길록되어 있는데 그나마 금 방패를 그에게 조공으로 바친 일에 관한 것 뿐이다.

 

     *아비야의 정복(B.C. 911년)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불화는 유다 왕 르호보암과 아비야와 아사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과 바아사로 내려오면서 계속되었다. 이 양국 사이의 싸움은 어느 한 편이 이기는 일이 없이 양국의 세력을 서서히 약화시켰다. 국경에서의 사소한 싸움들은 주로 베냐민 지파에서 있었다고 이스라엘이 주장하였다.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상당한 군대를 일으켜서 벧엘과 에브론과 여사나의 여러 성읍들을 포함한 벧엘 산지들을 유다에 병합시켰다. 그러나 아사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더 강해졌고 바아사는 잃었던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유다 왕 아사의 장기 통치기간 중에 이 나라의 질서가 잡혔고 번영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그 열매는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거두게 되었다. 아사는 구스(에디오피아)사람 세라를 격퇴 시킴에 있어서 군사적으로 의의가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세라는 구스와 룹 군대와 더불어 유다에 왔었다.(대하16:8)

 

     *오므리 발흥(B.C. 882년)

 이스라엘 왕 나답의 때로부터 레위 성읍 깁브돈은 블레셋 에그론 경계의 분쟁지역 안에 있었다. 바아사의 아들 엘라의 통치 말년에 시므리의 반란 소식이 깁브돈을 향해서 진치고 있던 이스라엘 군에 이르자 무리들은 그들의 지휘자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시므리의 소재지인 디르사로 달려가 그 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오므리는 한 차례 내란을 치룬 뒤에야 스스로 나라를 안정시킬 수가 있었다.

 

     *아합과 아람 간의 전쟁(B.C. 855-850)

 아합은 선왕 오므리의 정책들을 계속 밀고 나갔다. 이스라엘 왕국 도처에서 발굴된 아합 통치시대의 유물을 보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당시의 이스라엘은 경제적인 안정을 누렸고 군사력도 막강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성경은 이 시대에 아합이 건축했던 “상아 궁”과 그 외에 여려 성읍들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왕상22:39).

 

     *갈갈 전투(B.C. 853년)

 고대 동방의 서부지역 왕들은 그들의 사소한 전쟁에 깊이 얽혀들어서 점증해가고 있는 앗수르의 세력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앗수르 왕 디글랏 밀레셀 1세는 B. C. 1,100년 경에 이미 상해에 도달하였으나 그이 후계자들에 이르러 앗수르는 다시 소국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9세기 초에 앗슈르나시르발 2세는 앗수르의 북부 수리아와 페니키아의 해안 성읍들 곧 아르왓, 비블로스, 두로, 시돈 등에 이르러 조공을 거둬들였다. 그의 아들 살만에셀 3세는 선왕의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 그의 재위 1년에 이미 아마누스 산맥에 도달하였다.

 살만에셀은 재위 6년 (853B.C)에 니느웨에서 출발하여 수리아 중부지역에 도착하였다.

 

     *엘리야의 배회(B.C. 9세기  중엽)

 대선지 중 첫 선지가 이스라엘 왕국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 길르앗의 엘리야와 요단 골짜기의 엘리사였다. 이스라엘은 외국의 영향들에 대해 문호가 개방 되었고 오므리의 지보가 두로 간의 유대관계는 페니키아 사람들의 우상숭배를 퍼트리는 도구가 되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약과 사역은 이스라엘의 경계 너머까지 확대되었고 여러 이방 백성들과 관계를 맺었다.

 

     *여호사밧 시대의 유다 행정구역(B.C. 860)

 아합과 동시대 사람인 여호사밧은 지혜 있고 공평한 통치자로 부각되었다. 그의 치하에서, 아마도 그의 부친 아사의 치하 때부터 이미 유다는 에돔에 대한 통치를 재개하였고 여러차례에 걸친 에시온게벨의 해상무역을 회복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왕상22:48, 50, 대하20:35-37). 여호사밧은 요새와 국고성들을 건축함으로써 자기 나라를 강화시켰다(대하17:12,참조:애상21:3). 또한 그는 왕실행정을 재편성하여 나라를 솔로몬 치하의 이스라엘 행정구역과 유사하게 여러 구역으로 분할하고 각 구역에 총독을 임명하였다(대하17:2)

 

     *모압 왕 메사(Mesha)의 정복

 아람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은 모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일어나 이스라엘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었다. 이 사실은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기념비 중위 하나인 모압 왕 메사의 석비에서 확인되었는데 1868년 그 석비는 디본의 폐허에서 발견되었다.

 

     *이스라엘의 대 모압 출정(B.C. 850)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은 반란을 일으킨 영지를 다시 정복하 징벌하기 위하여 대 모압 출정을 개시하였다. 그는 그의 동뱅자 여호사밧과 합세하였는데 여호사밧은 당시 여호람과 함께 공동섭정의 관계에 있었다.

 

     모압 사람들과 그들의 동맹국들이 엔게디를 지나서 출격하다(B. C. 850)

 여호사밧의 통치 말기에 모압 연합군이 엔게디를 거쳐서 유다로 침입하였다. 이 침입은 격퇴되었고 결과적으로 마사다와 엔게디 사이의 고지들 위에 요새들만 여러개 세워지게 되었다.

 

     *예후의 반역(B.C. 842년)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의 전쟁은 아합이 죽은 후에도 그치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여호람의 시대에 두 왕국의 군대가 라못-길르앗에서 다시 맞서게 되었다. 선지자들의 후원을 받은 예후의 맹열한 반역은 옴릿 왕조의 종말을 초래하였다.

 

     *살만에셀 3세의 출정(B.C. 841년)

살만에셀 3세는 B. C. 849년과 B. C. 848년에 수리아 출정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목적을 성취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매번 출정 때마다 그는 아람-다메섹 왕 하닷에셀(하닷의 아들)의 지휘하에 있는 수리아 왕들의 연합군과 싸웠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예후가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에 하사엘이 벤하닷에게 반란을 일으켜 다메섹에서 새 왕조를 일으켰다. 살만에셀은 B. C. 841년에 다시 수리아로 왔는데 이번에는 스닐 산에서 하사엘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어서 다메섹을 공격하였다.

 살만에셀은 갈멜에서 북쪽으로 베니게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나르 엘칼브 강 하구에 앗수르와 이짚트의 전승비들과 나란히 또 하나의 전승비를 추가해서 세웠다.

 

     *하사엘의 출정(B.C. 815-810)

 그 후 몇 년이 못가서 앗수르인들은 그들의 제국 서부지역과 아주 먼 사건에 말려들게 되었고 최후로 다메0섹이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을 지배할 수 있었다. 예후의 통치 말기와 그의 아들 여호사밧 시대의 이스라엘은 사실상 다메섹의 속국이 되었다.

 

     *사마리아 패각으로 미루어 본 에브라임 산(B.C. 8세기 초기)

 사마리아 패각은 동시대인 B. C. 8세기의 유물이다. 이 파편들은 사마리아 땅에서 발굴되었다. 이것은 예후 왕조의 한 왕 혹은 두 왕(틀림없이 요아스와 여로보암 2세)의 재위 9년, 10년, 17년에 다량의 술과 기름수납에 대한 영수증으로 사용되었다. 이 팩각들은 에브라임 산 중앙에 있는 부족들의 개인 명칭과 그들의 소유지 명칭들을 담고 있다. 부족들의 명칭은 므낫세 지파의 족보로도 알 수 있다(민26:28-34, 수17:2-3, 대상7:14-19).

 

     *아닷-니라리 3세의 다메섹원정(B.C. 806년)

 아람 다메섹으로부터 앗수르를 통하여 이스라엘로 구원의 손길이 뻗혀 왔는데 앗수르는 아닷- 니라리 3세의 등극과 동시에 수리아에 압력을 다시 가하게 되었다. 앗수르 군대는 B. C. 806년경 다메섹에 이르렀다. 다메섹은 항복하고 막중한 조공을 바쳤다. 아닷 -니라리도 아람-다메섹의 속국이었던 블레셋과 이스라엘(“오므리의 집”)과 에돔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아람다메섹은 항복과 더불어 앗수르의 지배를 강요당하였다.

 

     *아마샤와 요아스의 전쟁(B.C. 786년)

 유다 왕 아마샤가 염곡에서 에돔 사람들을 치고 B. C. 786년경 셀라를 정복하였다. 이 정복은 아람-다메섹의 몰락과 관련되어 있다. 아람-다메섹의 몰락은 유다로 하여금 에돔과 아라바에 대한 지배를 재개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요아스와 여로보암 2세의 정복(B.C. 790-770년)

 아마샤와 요아스가 죽은 후 웃시야가 유다 왕으로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 왕으로 각각 등극하였다. 두 나라의 경계선은 흡사 다윗 왕국 절정기의 경계선에 이르도록 확장되었다. 이스라엘 나라가 더 우세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는 했으나 웃시야는 유다를 강력하고 번영한 나라로 만들 수 있었다. 아람 다메섹과의 결정적인 전투는 요아스 재위 시에 아합 때처럼 아벡 지역에서 있었는데 아람이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다.(왕하 13:17).

 

     *웃시야의 정복과 건설계획(B.C. 8세기 중엽)

 웃시야는 블레셋을 향해 일방적으로 우세한 출정을 개시하여 가드가 몰라되고 그 대신에 블레셋의 수도가 되었던 아스돗에 도착하였다. 웃시야가 아스돗의 경계를 축소시키고 이전에 아스돗에 속해있던 땅에 도시들을 건설함으로써 그의 정복을 확고히 가긴 했으나 아스돗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리하여 웃시야는 얍네에서 얄곤 강 어구에 이르기까지 바다에 접근하여 이 지역의 다윗 왕국 시대 국경을 회복하였다.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 때의 이스라엘과 유다(B.C .8세기 중엽)

 B. C. 8세기 중엽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중요한 국제 무역통로를 계속 지배하였고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당분간 다시 한번 비옥한 초생달 서부 지역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대는 정치와 군사력 및 경제적 번영에 있어서 다시 한번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그런데 평온과 안정감이 아모스 선지의 거친 예언으로 산산히 부서졌다.(암6:1-4, 12-14).

 

     *아하스 시대의 블레셋 사람들의 정복(B.C.734년)

 이스라엘 왕국은 B. C. 8세기 중엽에 그 번영의 절정에 달하였고 그 붕괴는 번영만큼이나 돌연적으로 닥쳐왔다. 여로보암 2세가 죽고 그이 아들 사가랴가 B. C. 748년에 tf해되자 예후 왕조는 일백 여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후에 그 최후를 맞게 되었다. 왕국의 돌연한 몰락은 이렇게 시작되어 디글랏 빌레셀 3세 때 앗수르에 항복함으로써 그 종말을 고했다.

     *디글랏 빌레셀 3세의 출정(B.C. 734-732)

 디글랏 빌레셀의 행동은 민첩하고 효력이 있었다. 그가 B. C. 734년에 블레셋 출정을 개시하여 가사를 정복한 사실이 앗수르 비문을 통하여 알려졌다. 가사 왕 하눈은 이짚트로 도망갔고 디글랏 빌레셀은 이짚트 국경에 상주 수비대를 두어 팔레스타인 왕들과 그들의 남쪽 동맹들을 단절시켰는데 그곳은 아마도 이짚트 시내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2년만에 대 이스라엘과 다메섹 출정이 있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며 이스라엘 출정은 B. C. 733년에 있었던 것 같다. 일년 뒤 (B. C. 732)에 앗수르의 승리는 다메섹을 정복하고 그 영토를 지배함으로써 완결짓게 되었다.

 

     *디글랏 빌레셀 3세 시대의 앗수르 행정구역(B.C.732년)

 새로 정복된 앗수르의 도들은 앗수르의 총독이 거주하던 성읍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아람 다메섹은 다섯 도로 나뉘어졌는데 앞서 설정된 여러 하맛 도들 남쪽에 있었다. 정복당한 이스라엘 왕국의 지역들은 세 도로 분할되어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서 돌, 므깃도, 길르앗이라 명명되었다. 이사야(사9:1)는 이 도들을 고풍이 깃든 시적 명칭으로 말했다. 곧 해변 길, 갈릴하고임, 트랜스욜단이 바로 그것이다.

 

     *살만에셀 4세와 사르곤 2세의 팔레스타인 원정(B.C. 724-712년)

 호세아는 디글랏 빌레셀이 죽은 뒤로 자극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B. C. 724년 살만에셀 4세는 사마리아를 공격하였다. 호세아 자신은 항복하였으나 공성은 계속되었고 3년 뒤에 사마리아는 정복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 왕국의 주민들 다수가 앗수르 제국의 변경과 정복한지 얼마 안되는 메대의 성읍으로 추바오디었다. 그 대신 바벨론과 하맛에서 온 다른 백성들이 사마리아에 정착하였다. B. C. 716년에는 아라비아 사람들도 역시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유다는 앗수르에 굴복함으로써 그와 같은 운명은 모면하였지만 성지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B. C. 713-712년에는 앗수르가 아스돗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반란을 진압해야만 했다.

 

     *히스기야의 앗수르에 대한 반역준비(B.C. 705-701년)

 히스기야는 자기가 초래한 위험의 크기를 인식하고 임박한 싸움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예루살렘의 실로암 수로를 가설한 일이었다.(왕하20:20, 대하32:30, 지도114). 그는 예루살렘의 요새도 강화하였고 유다의 중심 성읍들을 요새화하고 식량을 공급하였다. 이 나라의 국경은 이 음모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나라들을 쳐서 확장시켰는데 주로 가사와 에돔 지역에서 확장되었다.(왕하18:8, 대상4:42-43).

 

     *산헤립의 시돈 땅 출정(B.C. 701녀)

 산헤립이 메소보다미아와 그의 나라 동편에서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한 후에 B. C. 701년 팔레스타인을 공격하였다. 그는 베니게 해안을 따라 전진하여 두로 왕(“시돈 사람들의 왕”)을 폐위시키고 엘데게론의 항복을 받은 뒤에 유다로 향하였다.

 라기스의 정복은 니느웨에서 발견된부조에 서술되어 있다. 이 부조는 공성퇴로 이중으로 된 성벽을 뚫고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므낫세 시대의 유다와 그 인접국가들(B.C. 7세기 초엽)

 북으로 유다는 앗수르가 직접 통치하는 성읍들과 경계를 이루었고 동과 서로는 블레셋 왕국과 트랜스욜단의 작은 세 나라 암몬과 모압과 에돔을 면하고 있었다.

 

     *에살핫돈의 이짚트 정복(B.C. 669년)

 B. C. 669년에 에살핫돈이 하 이짚트를 정복하였고 그의 놉 입성은 고래의 앗수르 꿈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2년 후에 에살핫돈은 딜가가의 저항에 대처하기 위하여 재차 이짚트로 출정해야만 했다. 그는 도중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아들 앗슈르바니발이 반란을 진압하고 B. C. 663년에 앗수르 정부를 상 이짚트에 두고 관할하였다.

 

     *앗수르 왕국의 멸망(B.C. 7세기 말엽)

 B. C. 614년에 메대의 군대가 앗수르 성읍들을 정복하였고 2년 뒤에는 니느웨가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 공격 앞에 무너졌고 B. C. 610년에 하란도 역시 함락당하고 말았다. 하란의 함락과 함께 앗수르 왕국은 그 종말을 고하였다.

 

     *요시야 왕국(B.C. 628-609년)

 유다 역사상 마지막 흥왕기는 요시야의 통치시대였다. 그는 앗수르의 쇠퇴를 이용하여 팔레스타인 전지역에 다윗 집의 왕국을 부활시키려 하였다. 그의 시대의 정치적 국가적 부흥은 대규모적인 종교개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방의 산당들과 제단들이 파괴되어 짓밟혀졌고 이 때로부터 이스라엘의 참 예배가 전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집중되었다.

 

     *느브갓네살의 제 1차 출정(B.C. 605-604년)

 요시야가 므깃도 근처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자 그의 왕국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성경에 간략히 기록되어 있고 이 전투를 유발시킨 여러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바벨론의 자료들에서 발견되었다. “바로 느고”는 B. C. 609년에 유브라데 강 유역의 갈그미스로 올라갔는데 하란을 다시 정복하려는 목적으로 앗수르의 마지막 왕 올라갔는데 하란을 다시 정복하려는 목적으로 앗수르의 마지막 왕 앗슈루발릿을 돕기 위함이었다.

 앗수르 및 이짚트의 시도가 실패로 끝타기는 했으나 느고는 팔레스타인과 수리아를 수년간 통치하였다. 유다는 다시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고 바벨론과 이짚트 간의 수차례에 걸쳐 계속된 전쟁으로 시달림을 받았다.

 

     *베벨론 왕국(B.C. 6세기 초기)

 베벨론 왕국은 앗수르 제국의 대부분을 물려받았고 느브갓네살 치하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 왕국은 동쪽과 북쪽에서 메대 제국과 접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대적 이짚트와 대하고 있었다. 이 시대는 유다와 같은 소국은 므낫세 같은 왕이 필요했다. 그는 강국에 굴복하고 그 멍에를 메었고 그에게 부여된 작은 역할로 만족하였다.

 

     *유다로부터의 추방(B.C. 579-582년)

 느브갓네살은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를 왕위에 앉혔는데 그는 나약한 인물로서 난국을 수습하기에 부적격한 왕이었다. 그는 B.C. 589년에 이짚트의 빈약한 도움을 받아 바벨론에 대해 다시 반역을 일으켰는데 팔레스타인의 여러 나라들의 협의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느브갓네살의 징벌군이 가까이 이르자 유다는 홀로 강력한 갈대아 군과 맞서도록 버림당하고 말았으며 에돔인들은 이러한 기회를 틈타서 다시 유다에 침입하였다. 이번에는 바벨론의 보복이 사정없이 가혹하였으며 유다의 성읍들은 차례로 모두 짓밟혔다. B.C.587년 여름에 예루살렘 성벽이 돌파되었다. 한달 뒤에 바벨론 사람들은 성전을 포함해서 성읍을 모두 불태웠고 수 많은 주민들이 다시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다. 포로되어 끌려간 백성들이 대부분은 닙불과 바벨론 근처 그발 강가의 여러 동리에 정착하였다.

     *이집트로의 도피(B.C.586년)

 바벨론 사람들은 유다의 내정을 아히감의 아들 그달랴의 손에 맡겼는데 그는 미스바에서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격파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를 살해한 일로 바벨론이 보복할 것을 두려워하여 많은 가족들이 이짚트로 도피하였다.(왕하25:22-26, 렘40-44).

     *베벨론 치하의 유다(B.C. 6세기 초기)

 유다의 중부 고지에서는 주민들이 사라졌으나 바벨론 사람들이 새 주민들을 데려다가 이 그 공백을 메꾸지는 아니하였다. 이 지역은 점차 에돔 사람들이 장악하였는데 그들은 아랍 족속의 압력 때문에 군집하여 살았다. 그리고 남부 유다 산지로부터 오늘의 벧-술 지역까지는 “이두매”가 되었다.

     *에스겔의 환상 중에 나타난 팔레스타인

 여기 저기 곳곳에 흩어져 농경사회를 이루며 정착해 있던 바벨론 포로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유산을 보존하여 “약속의 땅으로 귀환”의 꿈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에스겔의 환상에 나타났는데 에스겔은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왔었다.

     *바벨론의 몰락(B.C. 539년)

 포로들의 소망은 단명했던 바벨론 왕국의 붕괴와 함께 머리를 들었다. B.C 562년에 느브갓네살의 후계자 세명이 7년간 왕국을 유지해 나갔다. 첫 번째 후계자는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풀어 자유를 준 에윌므로닥이었다.(왕하25:27-30). 하란의 나보니두스는 B.C.556년에 바벨론의 왕권을 장악하였다. 바벨론의 종말은 속히 다가왔다. B.C. 550년에 안산 왕 고레스는 악메다를 정복하고 바벨론의 적국인 메대를 물려받았다.

     *바사 제국(B.C. 538-332년)

 고레스는 고대 동방 최대의 제국을 창건하였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짚트를 정복하였고 그의 후계자 다리오 1세는 인도에까지 이르렀다. 거대한 바사제국은 여러 도로 나뉘어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127도(에 8:9)를 유대인과 대신들과 방백들과 관원들”이 다스렸다. 제 5관할구역은 유브라데 강 저편에 있었고 그 땅의 한 도가 “예훗”곡 유다였다.

     *시온으로의 귀환(B.C. 538-445년)

 고레스는 그의 재위 1년에 예루살렘의 여호와 예배를 부활시킬 것과 포로들의 이스라엘 귀환에 관한 조서를 내렸다. B.C. 537년에 유다 목백 세스바살의 인도를 받아 포로 중 제 1진이 유다로 귀환하였다. 이 사람은 유다 왕 여호야긴의 아들 세낫살(대상3:18)인 듯 하다.

     *귀환시대의 예루살렘(B.C. 440년)

제2성전 건축기간에 부활된 유다 왕국의 기초는 귀환 포로들의 지도자였던 이 두사람의 열성을 다한 사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제사장 겸 학사였던 에스라는 영적인 신아의 영역을 담당하였고 총독이었던 느헤미야는 정치 및 군사적인 영역을 맡았다. 느헤미야는 이웃 도들의 극단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의 요새들을 수축하였다.

     *귀환시대의 유다 땅(B.C. 440년)

 귀환한 포로들의 명단(tm2:1-34, 7:6-38)에는 예훗-유다의 주요 정착지들의 명단도 나온다. 성벽 수축자들의 명단에는 지방 총독들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저장용 항아리에 찍힌 인장자국은 제 1성전 시대의 왕의 인장과 유사한 것으로서 제사장이나 총독의 상징 또는 이름이 함께 붙어다니는 수가 많았는데 이것은 유다 왕국의 크기를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바사 제국은B.C. 5세기에 해변에 정착했던 헬라제국과 싸웠다. 바사가 두 번에 걸쳐 감행한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자(B.C.490년과 480년) 헬라인들은 공세를 취하여 동부 지중해에서 바사의 세력을 차단하였다. 강력한 두 헬라국경인 아덴과 스팔타 사이의 분쟁은 또 다시 바사 “대왕”의 손을 강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B.C. 제 4세기 중엽에 마게도냐의 빌립이 헬라를 자기 수하에 합병시킨 후에 바사 원정의 발판을 굳혔는데 이 원정은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이 수행하였다.

     *두로 공성을 위한 알렉산더의 출정(B.C. 334-332)

 B.C. 334년에 마게도냐 왕 빌립 2세의 아들 알렉산더는 35000의 군대를 인솔하여 바사로 원정을 떠났다. 그는 B.C. 480년에 아하수에로 왕이 취했던 길을 택하였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방향으로 행하였다. 알렉산더는 엘레유스에서 다아다넬즈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를 통치했던 바사 총독들과 최초의 전투를 벌여 그들의 군대를 그라니쿠스 강 뚝에서 궤멸시켰다.

그 후 브루기아의 옛 수도인 골디움에 도착하였고 다시 안퀴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결국 두로의 함대는 파괴되었고 두로 성은 B.C. 332년 7월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알렉산더의 놀라운 성공은 그의 군대의 전술적 우월성 곧 주로 마게도냐 기병대의 우월성과 그의 전략적인 지략에 기인한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그의 초기 정복 과정에서 바사 총독들을 마게도냐 총독으로 대치시키는 일을 제하고는 바사식 행정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바사 토착민들을 고관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알렉산더(B.C. 332-331년)

 알렉산더는 두로의 항복을 받고 해안을 따라 이짚트로 진격하였다. 아직 두로를 공성하고 있을 때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대표단이 도착하여 무혈항복을 제의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과 그의 군대 8,000명이 알렉산더와 합세하였다. 알렉산더의 이짚트 원정의 마지막 장애물은 가사와 함께 무너진 셈이 되었다. 그는 가사에서 B.C. 332-331년의 겨울을 났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다시 한번 가로질러서 두로에 되돌아 갔다. 마게도냐인들은 여리고까지 내륙에 깊이 침투하여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군대와 왕까지도 내륙 지역에 약탈해들어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군대들은 주력부대에 다시 합류하여 해안길을 따라 올라가 악고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대 제사장 얏두아와 만났다는 이야기는 더욱 전설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요세푸스는 이것을 가사 공성시대로 돌리고 있다.

     *알렉산더의 후기 출정(B.C. 331-323년)

 알렉산더는 두로와 다메섹으로부터 닾사쿠스로 진격하여 거기서 유브라데 강을 건넜다. 그는 알메니아 산맥 기슭으로 가는 길에 티글리스 강을 지나 가우가멜라에 도착하였다. 이 마을과 알벨라 사이에는 다리오의 마지막 남은 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B.C. 331년에 결정적인 전투가 있었다. 알렉산더는 이미 퍼시아의 행정중심지인 바벨론과 수사와 펠세폴리스를 점령했었다. 다리오가 죽은 후에 알렉산더는 동부 퍼시아를 지나 원정을 계속하였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초원을 지나 힌두쿠스 산맥을 넘어서 인더스 골짜기로 들어갔다. B.C. 323년 6월에 알렉산더는 32세의 나이로 바벨론에서 죽었다.

     팔레스타인의 톨레미 1세 (B.C. 320년)

 알렉산더의 후계자는 얼빠진 동생 빌립과 그의 유복자로서 후의 알렉산더 4세였다. 실권은 그의 휘하 장군들에게 넘어갔는데 그들은 곧 왕의 상속자들을 제쳐놓고 자기네들 끼리 싸움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큰 싸움이 제국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측이나 안티고누스 모높탈무스등과 제국을 분할하자는 각 도릐 총독사이에서 맹열하였다.

     *디아도키의 팔레스타인 전투(B.C. 315-306년)

 페르디카스(Perdiccas) 사후에 알렉산더 제국의 중심세력은 안티고누스 모높달무스가 잡았는데 그는 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 폴리올케테스의 유력한 도움을 받았다. 바벨론 왕 셀레우코스는 이짚트의 치리자 톨레미에게 피했는데 왕국을 분할하자고 주장하던 무리의 주모자였다. B.C. 315-306년에 안티고누스와 톨레미의 군대는 이짚트를 향하여 동쪽으로 접근하는 싸움에서 팽팽히 맞서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톨레미(Ptolemy)는 안티고누스를 격파한 후에 승승장구하였고 팔레스타인은 제국의 복잡한 행정체제로 흡수되어 로마시대까지 존속 되었으며 제2성전의 파괴 때까지 유지 된 것도 많았다.

  *제3차 수리아 전쟁(B.C. 246-240)

 잎수스 전투 후에 톨레미 3세는 팔레스타인과 페니키아를 독점하여 전투에 앞서 셀레우코스 니카돌과 합의했던 조약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제1-2차 전쟁에서 톨레미는 공세를 취하였다. B.C. 255년에는 잠정적으로 평화가 회복되기도 하였다.

 안티오쿠스 2세 사후에 베르니케의 퇴위 및 그녀가 라오디케의 손에 죽은 사건은 수리아와 이짚트 간의 전쟁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B.C.223-222년에 두 젊은 통치자가 수리아와 이짚트에서 거의 동시에 등극하여 안티오쿠스 3세는 안디옥에서, 톨레미 4세는 알렉사드리아에서 통치하였다.

  *안티오쿠스 3세에 의한 팔레스타인 최종정복(B.C. 201-198년)

 안티오쿠스와 그의 군대는 바타네아와 아빌라와 가다라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유대인들은 그를 환영하여 군대에 물자를 공급했으며 적들과 함께 싸웠다. 안티오쿠스는 그들에게 많은 호의를 보여주었다. 유다는 31년간 셀레우키드 통치 하에서 평정을 유지하였다.

한편 서방에서는 로마가 이태리를 통합시키고 B.C197년에 마케도냐 군주국을 쳐부순 다음 셀레우키드를 향하였다.

  *팔레스타인 내의 헬라 도시들(B.C. 312-167년)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도시는 개명된 백성에게 알맞은 유일의 정치기구형태였다. 새로운 도시들의 건설은 헬라 문화를 확산시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안티오쿠스오하 그의 상속자들은 도시들에게 왕조의 이름을 붙여주고 헬라식으로 집정관과 의회와 민중으로 조직할 자유를 주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와 알시노이테 지역에 집거했으며 테베스, 상이짚트를 비롯 이짚트 전역에 걸쳐 살았으며 B.C. 2세기에 폐위당한 대제사장 오니아스가 델타 지역의 레온토폴리스에 세운 성전은 주목을 끈다.

   *막카비 반란의 시초(B.C. 167년)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하였고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강요하였다. 종교 박해는 일련의 반란을 유발시켜 모디인의 제사장 마타디아스와 그의 아들들은 이방 신전을 뒤엎고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셀레우키드 군의 보호 아래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헬라화된 유대인들과 싸우게 만들었다. 유다 막카비우스는 아버지가 죽자 새지휘관이 되어 왕의 군대를 공격하여 르보나 비탈길에서 그들을 격파하여 아폴로니우스는 전사하였고 유다스는 그의 칼을 빼앗아 “그 후로는 그 칼로 싸웠다.”(막카비전서3:12)

  *엠마오 전투(B.C. 165), 성전재봉헌

 새벽에 유다스와 그의 군대 3천은 수리아 군 진지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셀레우키드 군대는 패하여 가사라까지 추격당했으나 유다스는 추격을 멈추고 엠마오로 돌아왔다.

 B.C. 165년 막카비의 부하들은 루시아스의 군대를 벧술에서 격퇴하고 예루살렘의 성전산은 유대인들의 손에 돌아왔다. B.C. 165년 기슬렙월 25일 하눅카 절기를 처음으로 지키게 되었다.

   *유다스 막카비의 초기출정(B.C 163년)

 유다스는 예루살렘 회복 후에 유대인들을 압제하던 아크라베테네의 이두메인들과 요단 건너편의 브온족들을 보복 공격하였으며 유다스의 부하들은 돕 땅의 카락스, 에브론, 야셀 등을 점령하였다.

 유다스의 길르앗 출정 중 그의 형제 시몬은 3천의 부하들과 갈릴리 원정길에 올랐다. 시몬은 원수들을 쫓아버리고 나서 톨레마이스 성문까지 추격하였다.

유다스가 길르앗에서 돌아온 후에 친히 이두메로 향하였다. 그는 헤브론과 마리사를 공격하였고 아소도 성문까지 이르러 이방 신전을 파괴하였으며 욥바항을 파괴하고 선박들을 불살랐다.

   *엘르아사 전투 및 유다스의 전사(B.C 161년)

 박키데스는 고프나 산지의 반군을 전멸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출전하였다. 박키데스가 진을 움직였을 때 유다스는 그를 그의 진에서 격리시키기 위하여 동쪽에서 공격하였다. 전투는 엘르아사 근처에서 전개되었는데 박키데스는 그의 우익 정예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유다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그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시몬과 요나단은 그의 시체를 모디인에 있는 가족묘실에 매장하였다. 엘르아사 참패 후 막카비 무리들은 요나단을 지도자로 선출하여 유대 사막에 있는 드고아 광야에서 아스팔 우물 근처에 아지트를 확보하였다.

   *요나단 시대의 유대의 흥왕(B.C. 152-142년)

 요나단은 셀레우키드 왕국의 몰락을 잘 이용하여 아크라와 벧-술을 제외하고 전 유대의 통치지가 되었다. 요나단은 B.C. 152년 초막절에 처음으로 대제사장의 제복을 입었으며 B.C.150년 수리아 왕 톨레미 4세는 그에게 유대의 사령관 및 총독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막카비 무리들의 예루살렘(B.C. 164-141년)

 B.C. 141년 마침내 아크라를 정복한 유대인들은 성전이 내려다 보이는 요새의 일부를 파괴하였다. 시의 주인이 된 막카비 무리들은 서쪽 언덕 주위에 성벽을 쌓고 아크라 자리에 그들을 위한 궁전을 건축하였다.

 *트리폰의 대 요나단 출정(B.C. 143-142년)

 트리폰의 공격으로 요나단은 포로가 되었으며 트리폰은 유다로 쳐들어갔다. 트리폰은 유대 사막을 지나 예루살렘을 향해 강행군을 했으나 눈보라에 쫓겨 요단 골짜기로 물러났다. 트리폰은 바스카마에서 요나단을 죽이고 길르앗으로 돌아갔다. 시몬은 형 대신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시몬의 정복활동(B.C. 142-135년)

 데메트리우스는 B.C. 142년 유대의 독립을 허락하였다. B.C. 137년 안티오쿠스 7세는 왕위를 노리는 트리폰을 도라에서 축출하고 유대의 여러지역을 시몬에게서 빼앗으려하였다. 이에 시몬의 아들 요한 훌카누스는 밤중에 모디인을 지나서 셀레우키드 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훌카누스의 요단 저편에서의 정복활동(B.C. 128년)

 B.C. 129년 안티오쿠스 7세는 팔디아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강성했던 셀레우키드 왕조의 세력은 끝장이 났고 유대는 수리아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훌카누스의 초기 정복활동은 베레아 근처의 요단강 저편이 무대가 되었다. 훌카누스는 이어서 이두메를 정복하여 아도라, 엔게디까지 얻었으며 점령지 주민들은 유대교로 개종 되어 유대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B.C. 126-104년 훌카누스는 사마리아로 향하여 세겜을 점령하고 그리심산의 성전도 빼앗았으나 사마리아인들은 유대교를 배척하고 그들 특유의 종교를 보존하였다.

  *유딧서에 의한 유다 국경(B.C. 108-107년)

 유딧서는 사마리아 공성 때쯤 저작된 것으로서 히브리 원서는 상실되었고 헬라어 번역서만 남아있다. 홀로퍼네스(퍼시아 총독)는 유대 영웅 유딧에게 살해당했고 그후 그의 수하 군대는 혼란 속에 흩어졌다. 이 이야기에 서술된 경계들은 역사상 사마리아 공성과 스그도볼리 정복 이전 곧 B.C. 108-107년까지의 것들을 말해준다.

  *아리스토불루스의 갈릴리 정복(B.C. 104-103년)

 요한 훌카누스는 천수를 누려 죽었고 그의 사후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간에 불화로 유대의 불길한 앞날을 예고했으나 번영한 나라를 남기고 죽었다. 그의 아들 유다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1년간 위에 있었지만 갈릴리 정복을 성공리에 마쳤으며 그를 계승한 그의 형제 알렉산더 얀네우스(B.C. 103-76)는 이스라엘 영토를 거의 회복시키는 일을 완결지었다.

 훌카누스 치하에서 시작된 바리새인들은 얀네우스 치하에서 세력이 커져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막카비집의 나라는 얀네우스 치하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폼페이의 팔레스타인 출정(B.C. 63년)

 얀네우스 사후 그의 처 알렉산드라가 남편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렸다. 그녀가 죽자 두 아들 훌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사이에 내란이 벌어져 훌카누스는 세력이 약하여 이두메 사람 안티파텔의 도움을 받아 나바티아 왕 아레타스에게 원조를 청하였다. 침입자들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왔는데 로마가 개입하였다. 폼페이는 훌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를 자기 앞에 출두시켜 두 인물 중 더 약한 훌카누스를 택하여 유대를 통치하게 하였다.

 폼페이는 훌카누스 시대 이후로 유대인들에게 정복당한 헬라 도시 및 헬라화된 도시들을 해방시켜 농업 인구를 헬라 도시에 종속시킴으로 자치구역이 수리아의 로마 총독의 감독하에 유지되었다. 훌카누스 2세가 다시 예루살렘에서 제사장이 되었으나 행정권은 안티파텔이 맡았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그의 가족들은 로마로 추방되었다. 안티파텔은 유대의 사실상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장자 바사엘은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차자 헤롯은 갈릴리의 총독이 되었다.

  *헤롯의 발흥(B.C. 40-37년)

 헤롯은 로마에서 큰 영광을 받았다.옥타비안과 마크 안토니는 원로원을 설득하여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하였으며 서부 이두매와 사마리아 땅을 유대에 첨가시켜 주었다. 그러나 헤롯은 모든 땅을 싸워서 얻어야만했다. 예루살렘은 B.C. 37년 여름에 함락되었고 다수의 시민이 살육을 당하였다. 헤롯은 이제 명실공히 유대의 통치자가 되었다. 헤롯은 자기 왕국에 확고한 위치를 구축했고 B.C. 30년 아구스도는 헤롯 왕국에 가다라와 힢푸스 지방을 추가시켜 주었다. 헤롯의 야심은 그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철저히 요새화하고 아름답게 장식하게 만들었으며 가이사랴 항구 도시를 건설하였고 사마리아를 재건하여 아구스도에게 경의를 표하여 ‘세바스테’라 명명하였다. 그는 또 헤로디움과 여리고 근처에 요새를 건축하였고 사해 양편 해변에 마케루스와 마사다를 재건하였다.

  *헤롯 왕국의 분할(B.C. 4-A.D. 6년)

 B.C. 4년 헤롯의 사후에 아켈라오는 유대, 이두매, 사마리아의 분봉왕이 되었으며 둘째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맡았으며 셋째 빌립은 가이사랴 파니아스, 가울라니티스, 바타네아, 드라고닛, 아우라니티스를 할당받았다. 헤롯의 누이 살로메는 얌니아와 아소도와 요단 골짜기의 바사엘리스를 받았다.

 아켈라오는 과격한 통치를 하다가 추방당하였다.(A.D. 6년) 헤롯 안디바는 A.D. 39년까지 위에 머물러있었으며 빌립만 A.D. 34년에 그의 왕국을 소유한 채로 죽었다.

  *유대의 경제(B.C. 4세기-A.D. 1세기)

 유대는 풍부한 농산물 덕택으로 제2성전 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예루살렘은 성전과 도시인들의 생활에 관계된 산업이 흥하였다. 도기제조는 주요 산업이었으며 기타 방적, 편물은 수공업 중심이었으며 어업이 갈릴리 호수와 바다에서 활기를 띄었고 자주빛 염료로 쓰이는 뿔고동 속이 수집되어 가공 처리 되었고 아바라 산 동과 길르앗 산지 산철과 지중해 산 역청은 이 지역의 천연자원이었고 벨라, 가다라 디베랴 근처, 갈릴로에, 바아라스 등에 온천이 있었다.

 *사해종파와 그 소장물들

 킬밧 쿰란은 그당시에 메삿하시딤 곧 “경건한 자들의 산성”으로 불리워졌다. 이 종파는 ‘의의 선생’이라고 불리던 한 선지자에 의해서 얀네우스 시대에 창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가르침 가운데 일부가 지도층의 비위를 거스려 얀네우스는 “의의 선생”을 처형했으며 이 종파는 사해 부근의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들의 연중축제와 절기는 전통적인 유대주의와 충돌하였고 예루살렘 성전예배를 배격하였다. 헤롯 때에는 이 종파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으나 아켈라오 때는 사막으로 되돌아가서 A.D. 68년까지 살았다. 이 종파를 엣센파나 그 분파의 하나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예수의 탄생과 이집트로의 피신, 예수의 세례와 사막체류

 예수에 관한 기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담겨져있으며 처음의 세복음서는 공관복음이라고 불리운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헤롯 왕 시대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는데 예수의 탄생은 B.C. 5년 12월로 추정된다. 아기 예수는 성전에서 주께 드려졌다. 꿈에 천사의 지시를 받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짚트로 피신하였다.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15년에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는데 이와 동시에 세례 요한도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요한의 활동은 요단 골짜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세례 받으러 온 무리 중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예수도 있었다.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40일간 머물러계셨다.

  *나사렛에서 가나와 가버나움으로

 누가복음 3:23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 30세쯤 되셨다. 나사렛에서의 최초의 설교는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주님은 고향 동리를 떠나 가버나움에 정주하셨다.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인 어부 시몬 베드로, 안드레를 부르신 곳이 바로 이 마을이었다. 베드로 형제는 벳세다 근처 사람들이었으며 주님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셨고 여기에서 총 12사도를 임명하셨다.

 복음서는 예수의 가르침이 갈릴리와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 땅과 시돈과 두로 등지의 무리들을 끌어들였다고 말해준다. 마가복음은 갈릴리 바다 주변에서 있었던 예수의 행적 가운데 나사렛 방문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곳 회당에서 설교하셨다. 예수께서 가나를 두 번째로 방문하신 것은 나사렛 방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 4:46에 의하면 그가 나사렛 방문 때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셨다. 또 예수께서는 나인 성에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다.

  *갈릴리 바다 주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으로 떠나시기 전의 활동은 몇몇 전도여행을 제외하고는 갈릴리 바다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갈릴리 바다는 폭풍이 자주 일어났다.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으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주무셨다. 주님은 잠에서 깨어 바다를 잔잔케 하셨다. 예수께서 성지의 경계를 벗어나신 것은 두로와 시돈으로 여행하신 때뿐이다. 이 여행에서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쳐주셨다.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로 돌아오신 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높은 산으로 올라가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그가 변형되셨다. 변화산 사건이 있은 후 가버나움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들 둘을 위해 성전세를 바치게 하셨는데 이는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마17:24-27).

 

          참고도서-아가페성서지도((서울: 아가페, 2009) 

 

 

 

 

 

 

출처 : 한국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Ez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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