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요약정리)
서론 :
지난 2세기 동안 세계 사조, 특별히 기독교 사상은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격변의 변천 과정을 거쳐왔다. 서구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종교를 시대적 역사적 산물로 보려는 움직임이 기독교계 일각에서 일어나 종교 진화론과 종교 사학파의 영향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유럽 기독교 지성사의 변천이 19세기 중반부터 미국 기독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청교도 개혁주의가 지배하던 미국 기독교가 유럽으로부터 밀려오는 고등비평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등 현대사조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 특히 19세기 후반 남북전쟁 이후부터 미국 사회는 농업중심의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산업화로 인한 도시집중화 현상이 발생하고 그와 같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일대 변혁을 맞기 시작하였다.
1870년부터 1925년까지의 기간동안 미국의 기독교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고수하려는 공동체와 현대사조와 보조를 맞추려는 공동체로 뚜렷이 이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전자를 가리켜 근본주의라고 칭하고 후자를 현대주의라고 부른다.
미국기독교 지성과 사회가 변혁을 맞던 19세기후반과 20세기 초엽 격변의 시대에 한국 선교는 시작되었다. 1884년 9월 20일 알렌이 입국하고 그 이듬해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시작한 이래 1910년까지 한국에서는 수많은 다양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다양한 개신교 유산들을 한국교회에 남겨주었다.
한국 개신교 역사가 한 세기를 넘어선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교회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한국 개신교 역사의 사상적인 맥은 뚜렷이 1930년이전, 1930년부터 1960년까지 그리고 1960년이후부터 현재까지 세단계로 뚜렷이 대별해 볼 수 있다. 1930년 즉 1934년 한국개신교 회년을 맞는 그때까지 한국교회를 주도한 중심세력은 역시 선교사들이었고, 1930년 이후부터 한국개신교는 선교 1세대들이 선교지를 떠나서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의 신학자들과 교계 지도자들이 한국교계를 이끌면서 한국개신교는 한국인들이 주도하는 교회로 리더쉽이 전환되었다.그리고 1950년대 일련의 분열을 맞았다. 6.25이후 사회 및 경제적 정치적 불안정이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되면서 한국기독교는 신사참배, 성경관, 교권문제등의 문제로부터 분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대 미국 교회가 안고 있는 똑 같은 분열현상이 한국교회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 분열 특별히 1950년대에 장로교 안에서 발생한 분열은 전통적인 신학을 고수하려는 자들과 현대사조에 한국 기독교를 조정하려고 하는 공동체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보수주의 대 진보주의 논쟁의 결과이다.
한국교회는 1960년이후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나갈 방향을 진중하게 고민하면서 정체성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교파를 막론하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자신들이 걸어온길 , 그리고 걷고 있는 길을 반추해 보면서 제 삼의 길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움직임은 대체로 전통적인 보수주의 신앙을 계승하려는 전통주의, 한국적 신학을 추구하려는 자유주의 토착화 신학, 그리고 이 시대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려는 복음주의 세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개신교는 교파를 초월해 토착화운동, 근본주의 운동, 복음주의 운동으로 대별되어 한국교회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복음주의 공통체는 한편으로는 토착화 신학을 경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단으로 흐르는 근본주의자들을 동시에 경계하는 것이다. 복음주의 한편으로는 양 극단을 극복하려는 움직임, 영미에서 일고 있던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 그리고 한국 복음주의 협회,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생명의 말씀사를 비롯한 초교파적 복음주의 출판사, 그리고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으로 한국교회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신학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사회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는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운동이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2. 서양 문화와의 접촉 :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진 한국입국 서양인들로는 1627년 경주 앞바다에서 표류해 입국한 벨트브레(박연) , 1653년 제주두에 표착한 헨드릭 하멜, 1816년 군함을 이끌고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하기 위해 입국한 영국 해군 대령 머리 멕스웰과 바질 홀,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입국한 칼 구출라프 선교사, 그리고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를 들수 있다.
벨트브레는 병자호란도 참전한 기록도 있으며, 자신과 같이 표류하다 조선에 입국한 하멜과 그 일행의 통역도 맡아보았다. 하멜은 제주도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제주도에 도착했다. 그후 13년간 그는 조선에서 있었으며, 탈출후 표류기를 기술하여 조선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영국해군 대령 맥스웰과 홀은 1816년 군함을 이끌고 서해안에 입항해 해도를 작성하고 한문성경도 전해주었다.
칼 구출라프선교사는 상업이나 정치적이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사람과는 달리 최초로 한국선교를 타진한 사람이다. 당시는 제국주의 정책의 붐을 타고 동양과의 통상확대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면서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 두가지 이유 즉, 상업과 선교의 목적으로 동양에 대한 유럽과 북미인들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구출라프는 서해인을 세차례 항해하며 주민을 만나 감자씨를 전해주었으며 또한 성경도 주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에 제너랄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황해도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입국했으나 순교를 하였다.
3. 개신교 선교준비 :
c19세기 중엽 특히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나서 한국 국내의 최대의 이슈는 개항이었다. 우리가 개항을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하는 문제를 두고 개항을 반대하는 세력과 개항을 찬성하는 세력이 국내에서 끊임없이 논쟁과 세력 다툼을 벌여왔다. 개항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위정척사파로 알려졌다. 이와는 달리 국제 질서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문호를 열고 개화를 해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개화파로 알려졌다. 이 개화파는 크게 방법론을 두고 온건하게 개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동도서기파와 급진적으로 개화하자고 하는 개화당 둘로 나뉜다.
위정척사파는 보수적인 민족주의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갖고 있던 모토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서구의 문화와 비교해서 결코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개항할 필요가 없고 , 개항을 하면 전통문화가 파괴되어 버린다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기독교를 위험한 종교로 보고 기독교를 배척하였다.
동도서기파는 온건한 개화를 주장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모델로 삼은 것은 중국식 개화이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서구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즉 온건한 개화를 추진한 결과 자신들이 고유한 전통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경제적인 여유를 갖는 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급진 개화당은 일본을 모델로 하여 개화를 하자는 것이다. 일본이 명치유신을 모델로 철저한 개화를 추진하기 이해서는 먼저 봉건질서의 재편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봉건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 빠른 시일 내에 서구의 기술문명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서구 문화의 근간이 된 기독교 마저도 주저할 것 없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주에서의 개신교 준비에서는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사람과 존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서 성서번역을 착수하였다. 이 네명의 사람들은 성서번역을 위해서 성경을 읽고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예수스리스도를 영접하고 1876년 로스의 동료 선교사 존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성경번역을 한후 이들은 전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들에 의해서 국내의 복음전도가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가 되고 있었다. 율전 박사가 안천양이라는 일본 목사를 이수정에게 소개해 12월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되었고,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일본에 건너간지 9개월만에 노월정 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존 낙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은 당시 일본주재 미국성서 공회 헨리 루미스선교사로부터 한글 성서번역을 의뢰받자 주저하지 않고 성경번역에 착수했으며 자신이 만나는 일본주재 미국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하였다.
이수정의 한국선교의 공헌은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받고 감리교 요리문답도 번역하여 1천부가 출판되어 국내에 널리 유포되어 한국선교의 효율을 높일수 있었다. 요코하마에서 그의 마가 복음성경 1천권이 출판되었다.
이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첫째 한국선교는 성서번역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한국인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4. 한국선교를 위한 준비 : 19세기 한국의 고위층 위정자들이 기독교를 반대했던 것은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문화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고 그로 인해 한국의 전통문화를 파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조선의 고위 정치인들 중에는 천주교와는 달리 개신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한국왕실이 공식적으로 개신교선교를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개신교 선교를 묵인하고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볼수 있다. 이런 요인들은 한국의 복음수용과 확장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선교는 개항과 함께 시작하였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개항을 이루어냈다. 미국과의 수교도 이홍장과 슈펠트 사이에서 1882년 5월 제물포 해안에 마련된 장막에서 조미수호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과의 조약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이었으나 이것이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선교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견미사절단이 파견되었고 견미사절단은 가우쳐 목사를 만나 한국선교를 타진하기에 이르렸다.
감리교에서는 가우쳐와 매클레이가 장로교에서는 엘린우드가 조선선교를 준비하였고 만주에서는 존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조선선교를 백방으로 모색하였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일본주재 조지낙스 선교사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길버트 리드 선교사도 조선 선교의 즉각적인 점유를 선교본분에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 조선선교를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나섰다. 특히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지낙스 선교사는 조선선교에 장을 여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런 일련의 노력으로 장로교 선교사 알렌과 언더우드가 입국하였고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의 입국이 이루어졌다.
5. 각국 선교사들의 입국 : 미장로교와 감리교에서 교단적인 차원에서 한국선교를 위한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던 북장로교 파송 의료 선교사 알렌이 전혀 예기치 않게 한국으로 선교방향을 돌렸다. 알렌은 갑신정변 때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였고 이것을 개기로 알렌은 고종에게 재가를 얻어 정2품에 해당하는 참판 벼술까지 얻게 되었다. 알렌은 이것을 계기로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설립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광혜원이 제중원으로 개명되고 왕실과의 유대도 더욱 강화되었다. 광혜원은 자연스럽게 한국개신교 선교의 거점이 되어 선교의 효과를 극대화 시킬수 있었다.
알렌 이후 개신교를 대표할 만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한국어를 배우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동시에 마기복음의 번역과 사전편찬을 착수했다. 경신학교의 전신인 존 디 웰즈 학교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887년 아펜젤러와 함께 상임성서번역위원회을 발족해 성경번역을 시작한 언더우드는 성경번역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1910년에 신구약 번역을 끝내고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개정작업에 물두하다 그만 건강을 잃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언더우드는 개신교 최초의 세례를 베푼 인물이며 남장로교 선교회와 카나다 선교회의 대 한국선교의 문을 열어준 인물이며, 연합선교의 이상을 통해 한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선교의 개척자였다.
언더우드와 함께 아펜젤러는 한국선교에 초석을 놓는 금세기 최고의 선교사였다. 이둘은 신앙도 유사했다. 복음에 대한 열정,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인 사랑, 한국선교에 대한 비젼에서 어느 누구와도 견줄수 없는 놀라운 공헌을 했다. 1902년 목포로 가는 작은배를 타고 가다 난파되어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국선교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한국의 이들을 통해 시작되었고 1898년까지 한국에서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카나다 장로교등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입국해 한국 장로교 선교를 가속화시켰다. 한국에 입국한 네 개의 선교회는 1893년에 결성된 장로교공의회의 구성원이 되어 교단별로 한국 선교를 추진하기보다 범장로교 연합을 통해 선교의 효율을 증대시켜 나갔다. 또한 빅토리아 선교회, 미 감리교 선교단, 남 감리교 선교단. 러시아 선교회, 동아기독교, 동양선교회, 안식교 선교회, 플리머스 형제단, 등이 차례로 한국선교를 시작함으로써 1910년까지 다양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였다.
우리의 한국선교와 관련하여 다음 몇가지 사실을 발견할수 있다. 첫째, 거의 같은 시기에 다양한 선교회가 동시에 입국하여 한국개신교 선교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장로교 네 개의 선교회가 감리교는 두 개의 선교회가 거의 같은 시기에 입국함으로써 장.감 선교회가 거의 한국개신교 선교를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들의 연합은 선교지의 난관을 극복하고 상당한 선교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6. 하나님 호칭논쟁 : 처음 전래되고 성경이 번역될 당시, 19세기 말과 20세기초에는 천주냐 ,여호와냐 ,하나님이냐 아니면 하느님이냐를 놓고 선교사들 간에 적지 않은 마찰과 갈등과 논란이 있었다 예를 들어 언더우드와 기포드 선교사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천주로 호칭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게일과 마펫 선교사는 하나님으로 호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 호칭논쟁은 우리말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여러신들을 여러 신들을 의미하는 신(god)과 대비되는 유일신 하나님(GOD)의 명칭이 있으나 대개 비슷한 한자를 쓰고 있는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일반적인 자연신들을 뜻하는 여러 잡신들과 구별되는 유일신을 뜻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호칭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호칭 문제를 놓고 선교사들사에는 세가지 의견들이 있었다.
첫째, 하늘의 으뜸신이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하되,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한국 사람들이 통념적으로 경배하는 신과 구별하여 유일신의 성격과 특징을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둘째 상위 신 신개면이라 하더라도 이교도들이 갖고 있는 신 명칭을 빌어 인격적이고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호칭으로 사용해서는 안되며 결국 그것은 기독교의 본래정신이나 성경의 유일신 개념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도저히 신앙 양심으로 허용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셋째는 상당수의 선교사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견해로 여호와를 뜻하는 이름으로 하님을 사용하자는 주장이다.
선교사 언더우드는 비록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언더우드 당시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상위 신개념인 하늘+님의 의미이지만 그 개념 속에는 유일신의 개념도 담겨있기 때문에 기독교 유일신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하여 바로 가르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7. 한국교회의 조상숭배 문제 : 조상숭배는 보편적인 인간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특히 동양 ,특히 중국과 한국에서 조상숭배는 단순히 조상에 대한 효를 표하는 예식의 수준을 넘어 종교적인 성격이 강하게 띠게 되었다. 따라서 유일신아에 기초한 기독교가 조선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과 논란의 대상이 바로 조상제사문제였다.
천주교의 입장은 마태오 리치의 입장에서와 같이 신앙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조화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의 선교방법은 문화위의 복음의 2층 집을 짓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의 제사제도를 인정하는 적응식 선교방법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트 11세가 1715년과 1742년 두차례에 걸쳐 유교적 조상숭배는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기 때문에 카톨릭교회에서는 용납 할 수 없다며 조상숭배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1791년 한국에서는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천주교신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조상제사를 철저하게 거부하여 무려 10000명의 순교자를 냈다. 그러나 이런 입장도 선교 한세기 반 만에 1939년 조상숭배를 허용하였다. 2차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일본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정치적인 이류로 신사참배와 제사문제를 허락한 것이다.
개신교의 입장은 선교초기부터 현재까지 조상숭배에 대해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정면돌파 작전을 취했다. 중국에서 중국 중앙선교 협의회가 조상숭배와 기독교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조상숭배 대신 추도식으로 대치하기로 합의를 보면서 이것이 자연스럽게 한국 개신교에 영향을 주어 오늘날 추도식으로 정착되었다. 제사를 죽은 부모에 대한 단순한 효정으로 볼것이냐 아니면 죽은 영혼을 신격화하는 종교적인 것이냐가 선교초기부터 제기되어 왔던 문제의 핵심이고, 지금도 제사자체를 어떻게 볼것이냐 하는 것이 판단의 중요한 관건이다.
기독교는 제사는 조상숭배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바알신을 금지하는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에서 볼 때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연옥설을 믿기 때문에 죽은자를 위한 기도나 미사를 허용한다. 기도와 미사를 통해 죽은 부모나 조상을 연옥에서 해방시킬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죽은자나 조상을 위한 미사를 제도화시키고 있다.
8. 영아소동사건 : 1888년 개신교 선교 초에 발생한 소위 영아소동이다.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지 불과 4년 밖에 되지 않았던 그해 항간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유아들을 유괴해 잡아 먹는다는 소문이 나돌아 드디어는 폭동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영아 소동의 배경은 1888년 4월 갑자기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이 내려진것과 연관이 있다. 금교령은 천주교에 내려졌지만 개신교 단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전도금지령이 내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표면화되지 않았으나 천주교가 건축을 하는 과정에서 조정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1888년 5월부터 9월까지 아침예배, 주일예배에 대한 일체의 종교활동이 금지 되었고 지방에서는 기독교 문헌들이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조선정부만 아니라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도 여러모로 선교사들에 대한 온갖 루머가 난무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인 악질분자를 돈으로 매수하고는 아이들을 꾀어다가 잡아먹고, 눈알을 빼서는 약용이나 사진현상재료로 사용한다는 음흉한 소문이 항간에 나돌았다. 이 때문에 선교사와 상종하던 관원까지 9명이나 처형받은 일이 있었다.
영아소동은 선교사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영아소동이 국가 질서를 어지럽히고 근거없는 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진화에 나셨다. 이 사건은 당시 왕실과 가까운 선교사들은 영아소동이 민비를 획책하는 적들이 고의로 일으킨 사건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고종과 민비는 외국인들에게 우호적이어서 궁궐에서 열리는 연회나 식사에 초청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교사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대원군을 위시한 위정척사파가들이 서민들을 선동해 민비와 그 가족을 파멸시키려는 음모였던 것이다.
금교령과 영아소동은 한국선교에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 정부가 갖고 있던 편견이 해소되어 두 사건은 오히려 개신교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정부뿐만 아니라 민중과의 관계도 더욱 밀접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선교사업에 냉소적이던 한국인들은 이제 전적으로 선교사들을 믿기 시작하였다.
9. 하나의 조선교회 설립논쟁 :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한국의 국권을 유린 당하는 엄청난 치욕을 겪던 1905년 , 장로교와 감리교가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기독교회를 선교지 한국에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제기 되었다.
북감리교와 남감리교가 한국선교를 시작하면서 장로교 공의회와 감리교 선교회는 교계예양이라는 선교지 분할협정을 맺는등 장로교선교회와 감리교 선교회는 연합적으로 한국선교를 위해 노력하였다
장감연합공의회는 선교사역을 상호협력하고 궁극적으로 한국에 하나의 복음주의 민족교회를 설립하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장감연합선교회는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선교부에 의견을 타진했다. 그러나 선교부는 신학적인 이유와 교단적인 입장, 칼빈주의 체계에 어떻게 알미니안주의의 감리교가 하나의 독립된 교단을 한국에 설립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에 부딪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장감연합선교회는 성서번역, 기독교교육, 문서선교, 의료선교등 여러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평양숭실대학을 공동으로 운영하였고,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를 공동으로 설립해 운영했다. 코리아 미션필드를 발간하고 연합찬송가를 발간하였다. 그리스도 신문을 발간하였고, 주일학교 공과도 공동으로 만들었다. 이들의 연합의 중심에서는 언더우드가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10. 개신교 선교정책 : 한국의 개신교에 대한 놀라운 결실은 그들이 사용한 선교정책과 무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치된 견해이다. 대체로 초기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선교정책은 의료 및 교육선교, 성경번역, 연합사업, 그리고 선교지 분할정책으로 대별할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들이 사용한 선교정책 중에 하나는 의료선교였다. 의료선교 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한 선교에 선교사들은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고아원 설립과 여러학교를 설립하여 서양교육을 시작하였다 . 성서번역은 중국과 일본, 국내선교사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한글 성서번역이 한글 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한글성경은 한글을 대중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선교가 처음 크게 성공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연합하여 활동했다는 점이다. 연합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언더우드의 역할이었다.
선교지 분할 협정은 지방색을 나타내는 단점을 드러냈으나,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협정의 중심내용은 첫째, 5천명 이상의 도시는 공동으로 선교하고, 둘째는 5천명 미만의 도시는 이미 선교를 시작한 선교단체가 기득권을 가지며 6개월 동안 공석일 때는 타 선교회가 선교를 시작해도 좋다. 셋째, 가능하면 선교가 시작되지 않는 지역에 선교를 착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넷째, 감리교나 장로교나 서로 다른 교회를 존중하며, 다섯째 다른 선교지역으로 교인들이 이동할 경우 자유의사대로 이동하되 반드시 목사의 추천서를 받는다. 여섯째 조사들에 대해서는 선교회가 직접적으로 보조금을 지불하지 말 것, 그리고 일곱 번째는 모든 문서의 규격은 통일한다는 내용이었다. 교계예양을 체결한 후 감리교에서는 우리가 그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천명하기는 했지만 , 한국의 선교지 분할 협정은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의 복음수용과 확장의 과정에서 우리는 다음 몇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한국선교는 다양한 선교단체가 거의 동시에 한국선교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둘째, 천주교와 개신교는 선교방법이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사실이다. 셋째,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한국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넷째, 한국선교의 과정에서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다리가 딱 맞아 떨어지는 경우는 너무도 많이 발견된다. 하나님의 섭리의 개입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11. 선교사들의 사상과 삶 :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한국인과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과연 무슨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우리가 바로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무엘 마펫과 마포삼열과 소안론 곽안련은 맥코믹 출신의 선교사들이다. 특히 소안론 선교사는 성경통신 강좌를 최초로 한국에서 시작하여 성서연구를 저변화시키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에도 뛰어나 몇편의 찬송가를 저술하기도 했다. 신학적인 면에서도 보수적인 선교사였다. 관안련 선교사는 그의 시카고 대학 논문인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해외 선교연구의 하나의 모델로 평가받은 작품이다. 표준성경을 비롯 성경주석, 평양신학교 교재, 그리고 신학지남에 남긴 주옥같은 여러편의 논문들은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의 맥을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유니온 신학교 출신 중 한국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레이놀즈와 크레인 선교사이다. 레이놀즈는 남장로교 선교의 개척자였고 남장로교 헌법을 번역해서 한국에 소개해 장로교 정치의 틀을 잡아주었으며, 성서번역과 신학교육을 통해서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평양신학교의 최초의 조직신학 교수로 수십년을 봉사하면서 한국의 신학적 틀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크레인 선교사는 레이놀즈와 신학적인 보수성에서 맥을 같이한다. 한국최초로 무천년서을 가르쳤던 사람이며 무천년을 가르치며 역사적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이나 개혁주의에서 다 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외친 사람이다.
프린스톤 출신들 중 한국선교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로버트, 어드만 ,헤밀톤 선교사이다. 라부열로 알려진 로버트 선교사는 1925년 평양신학교 교장에 올랐다. 상당히 보수적인 성경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드만 선교사와 헤밀톤 선교사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면, 성경이 구원이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역사 과학 지리 모든면에서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변호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간과해야 할 사실은 처음 50년간은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장로교 신학을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처럼 보수적인 선교사들이 지배적이었지만 진보적인 선교사들도 처음부터 한국선교지에 와 있었다는 사실이다.
12. 네비우스 선교정책 : 1884년부터 1930까지 교인의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이렇게 급성장하게 된 요인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관안련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성장요인들을 여러 가지 열거하고 있다. 한국 전통종교들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촉진시켰다는 점, 한국인의 유순성, 리더쉽에 잘 따르는 한국인의 국민성, 평안함에 대한 한국인의 갈구, 국왕의 호의, 여성의 지위향상, 한국인의 애국심, 참되고 신비한 종교에 대한 한국인의 갈망, 서양교육, 높은 문자 해독률, 시대적인 상황, 그리고 한국인의 종교 심성등을 들수 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성장의 요인은 역시 1890년에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정책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지금까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핵심은 자립, 자치, 자전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 핵심은 성경공부에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10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순회전도한다. ② 모든 선교사역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게 한다. ③ 한국인 스스로가 전도하게 한다. ④ 한국인 스스로가 교회를 치리한다. ⑤ 경제적으로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한다. ⑥ 모든 신자는 그룹의 영수와 순회조사 아래서 조직적으로 성경공부 한다. ⑦ 성경적인 권징을 엄격히 실시한다. ⑧ 다른 선교 단체들과 연합하고 협력한다. ⑨ 법정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는 간섭하지 않는다. ⑩ 가능한 민중의 경제문제에 도움을 준다. 이 열가지 선교정책을 요약한다면 성경중심의 선교정책과 정교분리의 철저한 실시 두가지로 나눌수 있다. 또한 네빈우스 선교정책은 교회의 성장외에도 엄격한 주일성수, 교리주의 신앙, 반자유주의 신앙관을 한국교회에 뿌리내려 주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런 네비우스 정책은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는 부정적인 면도 만들게 되었다.
13. 1907년 부흥운동과 영계 길선주 : 길선주는 막힘없이 줄줄 암송하는 성경귀절 , 선교사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 무엇보다도 주권상실의 울분을 신앙으로 스스럼없이 승화시키는 탁월한 리더쉽, 이 모두는 길선주를 명실상부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1907년 한국 최초의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최초의 일곱명의 장로교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평양 장대현 교회를 무려 20년간 담임했고, 1907년 평양부흥운동의 불꽃을 점화, 확신시킨 대각성 운동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2만번 이상 설교를 했고 3백 80만명 이상이 그의 설교를 들었으며, 3000명 이상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무려 60개의 교회를 설립했던 한국 개신교의 살아있는 증인이었다. 길선주는 평서노회 사경회 마지막 새벽기도를 인도하다. 1935년 11월 18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4.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 초창기 한국의 지성인 중 춘원 이광수 만큼 관심을 가지고 민족계몽이라는 측면에서 기독교를 관찰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춘원은 기독교야 말로 “ 금일 조선 사상계에 가장 조직적이요, 위대한 세력을 가진자며 , 실로 암흑하던 조선에 신문명의 서광을 전하여 준 최초의 은인이며 겸하여 최대의 은인이라고 예찬을 서슴없이 토로한 적이 있다. 그러던 그가 5개월후 같은 잡지에서 야소교회의 결점을 강도높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조선교회는 계급적이고 교회지상주의적이며, 교역자가 무식하고 미신적이라는 4가지 결점을 지적했다. 이중에서 그가 현금 조선교회가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은 교회지상주의였다. 춘원의 이러한 비판은 일찍이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나 존칼빈이 외쳤던 개혁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춘원의 기독교 비판의 핵심은 한마디로 교회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내향화시켜 자기들만 천국가고 잘 살겠다는 개인주의 신앙을 태동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한 지성인의 기독교 비판은 몇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기독교를 비판했던 장본인이 한국의 지성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그의 비판이 근거가 전혀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셋째, 기독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생겨났음을 반영하여 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한가지의 의의를 찾을수 있다.
15. 김장호 자유주의 논쟁 : 1910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한일합방이 체결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한국교회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였다.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적 슬픔속에서도 1912년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고 1916과 1918년에 신학세계와 신학지남을 창간되고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남으로써 한국교회는 선교사반세기 만에 비로서 민족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독립의 틀을 형성하는 듯 했다. 한일합방후에 발생한 105인 사건과 얼마후에 발생한 김장호 자유주의 사건으로 한국개신교는 한차례의 위기를 맞았다. 현대주의를 외친 김장호목사가 당대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 평양신학교 출신인데다. 그가 소속한 노회가 가장 일찍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가장 역사가 깊은 황해노회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김장호는 신원교회를 사임하고 사리원 남쪽에 있는 홍수원 역전의 홍수원 교회를 담임하고부터 자신의 자유주의 사상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외국에 유학하지 못한 김장호가 현대주의와 진화론의 사상과 일치된 현대사상을 접할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소속된 황해지역의 공위량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김장호는 다년간 공위량 선교사 밑에서 조사로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공위량 선교사로부터 진화론, 성경의 고등비평을 비롯한 현대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김장호는 단순히 현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 그 이상이었다. 그는 전투적으로 그런 현대사상을 한국교회에 가르치고 확신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노회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은 김장호는 1818년 12월 6일 황해노회로부터 이단자로 낙인되 면직당하고 제명되기 전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며 민족주의자적 조선 기독교를 표방하며 소위 조선 기독교회를 설립하고 만주 길림에 교단 신학교,길림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반서구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고 민족적 기독교를 주창했던 조선 기독교가 처음으로 친일적인 색깔로 가득찼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며 하나의 비극이었다.
16. 자유주의 노선 : 1930년대는 한마디로 새로운 신학이 역사에 등장하는 종교적 다원화시대였다.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신학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신학적 방향이 몇가지로 뚜렷이 대표되어 진행되기 시작했다. 박형룡 박사를 통해서 소위 정통주의가, 김재준 목사를 통하여 소위 진보주의가 , 정경옥 교수를 통해서 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한국의 자유주의 문제는 미국의 자유주의 논쟁의 축소판이었다. 1920년대는 미국에서 소위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이 정점에 달한 시대였다. 논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23년 구 프린스턴 신학자 그레샴 메이첸이 자유주의를 논박하는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메이첸 박사는 로마 카톨릭이 기독교의 변형인지 몰라도 자유주의는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아니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어반선언으로 응징했다.
소위 북장로교 선교사중 유니온 출신의 선교사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자유주의 원천이었다. 전통종교와 기독교를 조화시키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이 최병헌이다. 그는 좀더 넓은 감리교 신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감리교 신학을 좀더 자유주의 방향으로 확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정경옥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외국에 유학을 갔다 돌아온 한국의 젊은이들이 서구나 일본의 진보적인 신학을 소개하는등 한국인에 의해 좀더 본격적으로 확신되어 갔던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역시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등이다. 이들을 통해 한국의 진보주의 사상은 뿌리를 내리고 그 동기를 제공한 사람은 남궁혁 박사이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몇가지로 압축시킬수 있을 것같다. 첫째 자유주의 사상이 1930년대에 발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선교 초창기부터 한국에는 자유주의의 세력들이 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소위 총회가 자유주의 도전을 교권을 이용해서 압도했으나 자유주의 새력이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했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 번째, 박형룡 박사가 한국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인물로 부상했듯이 김재준 교수 역시 진보주의를 대변하는 인물로 그리고 정경옥교수는 좀 더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자유주의자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한국 기독교에는 박형룡 박사의 보수주의, 김재준 박사의 진보주의, 정경옥 교수의 자유주의가 하나의 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17. 신학지남 논쟁 : 1930년대 신학논쟁이 한국교회에 발생했을 때 그 논쟁의 점화시킨 신학지가 신학지남이었다. 신학지남은 1918년에 창간된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에서 발행하는 신학잡지로 1916년에 창간된 감리교의 신학세계, 1922년에 출간된 성결교의 활천지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지였다. 신학지남은 교단내 목회자들에게 신학기본지식, 설교, 강해주석,을 제공하여 현장목회를 돕고 이름 그대로 신학적 방향을 지도하자는데 발행목적이 있었다.
처음 10년간 서양 선교사들이 맡아오던 편집을 1928년 정월부터 평양신학교 교수, 한국인 남궁혁 목사가 맡으면서 신학지남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신학적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에게 대단히 관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송창근, 김재준, 채필근 세사람의 글을 신학지남 특별기고자로 끌어들여 개재하였다.
김재준은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성경교사로 있으면서 신학지남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기 시작하였고 ,자각, 정돈, 건설이라는 1935년 1월 권두언에서 마침내 문제를 제기하였다. 채필근은 비교종교학에 관한 글을 여러 편 게재되어 신학지남의 폭을 넓혔다. 채필근은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를 강조하고 여전히 비교종교학적 접근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의 입장을 나타내지 않고 숨겨오던 채필근은 노골적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이 너무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정통을 기준으로 진보적인 이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교단의 행위가 신앙인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교계를 향한 비판의 화살을 가했다. 한국정통주의자들은 후대 데이비드 비일이 비교종교학이 독일로부터의 고등비평과 찰스다윈의 진화론과 더불어 미국의 현대주의를 태동시킨 주된 요인이라고 지적했던 것을 이미 반세기 전에 간파하고 있었다.
송창근은 기독교 윤리문제라는 제목으로 신학지남에 기고하였다. 그가 볼 때 조선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윤리문제였다. 그는 한교회의 교인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하여 목회자 전체, 더나아가 조선교회 전체를 향한 비판으로 확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송창근의 비판은 단순한 비판의 성격을 넘어 교계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한국교회의 정통주의를 가리켜 “위선자요, 형식주의자요 , 이십세기 바리새교인”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들의 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예리하게 간파한 사람은 박형룡 박사였다. 신학지남의 신학적 변천을 처음부터 목도한 박형룡은 반현대주의 변증적인 논문들을 발표했던 것이다. 현대주의대 근본주의 논쟁을 피부로 체험한 그는 미국에서 일고 있는 신학논쟁, 현대주의자들의 전투적인 도전 앞에 정통주의 신앙을 변호해야 할 의무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표면화된 신학논쟁, 특별히 신학지남을 중심으로 벌어진 논쟁은 우리에게 적지않은 교훈을 제시해 준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어디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신학적인 입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 1930년대 진보주의 진영이나 정통주의 진영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전투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앙의 순수성을 외치는 이들은 분리주의로 흐르기 쉬웠고, 반면 신앙의 포용을 외치며 신학적 관용을 주창한 이들은 자유주의로 흘러왔던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도 편협하지 않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할수 있는 기독교 공동체 ,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과제인 것이다.
18. 아빙돈 단권 주석 논쟁 : 아빙돈 단권주석의 출판은 한국교회에 적지않는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감리교에서는 대단한 환영이었지만 장로교에서는 교단적인 차원에서 그 주석을 장로교 내의 목회자들은 절대 구매하지 말 것을 결정하였고, 그 주석의 번역에 참여한 장로교 목회자들이 총회에서 문제시되어 아빙돈 단권주석의 파장은 한국교회 전체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왜 이주석이 논쟁거리가 되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먼저 그 이유를 밝혀두는 것이 필요하다. 선교 50주년이 되도록 사실, 한국인들에 의해 기술된 주석은 고사하고 번역주석하나 없었다. 이런 국내의 현실을 잘 알고 감리교에서 선교 50주년을 맞아 감리교 유형기 목사가 책임하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미국 아빙돈 출판사에서 출판한 단권주석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던 것이다. 막상 출판하고 보니 주석의 신학적 입장이 지금까지 한국장로교회가 지켜오던 신학적인 방향과 너무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거기에는 이미 벨하우젠의 문서비평, 궁겔의 구전, 알브라이트의 성서 고고학, 역사, 신학, 그리고 전승사 등이 채용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아빙돈 성경의 신학적 입장은 분명해 졌다.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된 오류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 프린스톤의 입장을 떠나 성경이 오류가 있지만 권위가 있다는 새로운 신학조류에 맞추어 기술된 주석인 것이다.
이문제가 1935년 제24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 정식안건으로 상정되었다. 채필근은 주석에 참여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다시는 집필하지 않을 것과 재판시 자신의 글을 빼겠다는 약속을 한 반면, 김재준, 송창근,한경직 세사람은 신학지남에 성명서를 내었다. 이 사과문은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이 없으며, 이문제로 교계에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는 것이다.
아빙돈 주석문제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신학적인 면에서 동질감을 형성했던 장로교도 이제 서구의 신학적 조류의 변천에 따라 변천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한국교회에 유익을 주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선교 희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신학이 선교사 중심에서 한국인에게로 전이되어 오면서 한국교회는 성숙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단순히 답습하는 신학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찾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장로교 총회가 표준 성경주석을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런 시대적 조류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총회차원에서 이것을 결의하고 박형룡 박사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19. 창세기 저작 문제와 여권논쟁 : 전통적으로 모세 저작권을 인정해 오던 미국기독교가 19세기 말엽부터 독일로부터 일어난 성경고등비평의 영향을 받아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보수적 입장에서 후퇴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선교 50주년을 맞는 1930년대 초에 한국 장로교에서도 창세기 저작권 부인 문제와 여권문제가 제기되어 총회적인 차원에서 두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라는 것은 기독교 이 천년의 고백이었다. 김영주 목사는 창세기 저작에 관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일본의 자유주의 신학교 관서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년동안 평양신학교에서 신학 재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김영주 목사보다 모세 저작권 부인문제보도 더 노골적으로 총회의 보수적인 입장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김춘배 목사였다. 그는 급변하는 현시대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고 있는 이 현시대에 교회도 여성들의 지위를 현실화시켜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두 문제는 총회적인 차원에서 다룰 정도로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 두 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1934년 제 23차 총회 때 연구위원회가 조직되어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연구위원회는 모세 저작에 관해서 오경의 모세 저작권 부인은 성경의 권위를 심각하게 손상하는 것이며 오경의 모세 저작을 인정한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일대도전이며, 오경이 모세의 저작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한 진리라는 것이다. 여성안수의 문제도 바울의 말은 당대에만 진리가 아니라 시간을 넘어 영원한 진리라는 것이다. 만약 성경의 진리가 당대의 시대적 배경에 국한된 현상이라면 성경의 모든 진리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에 불과하며 그런 변할 수 있는 진리는 성경의 권위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는 행위라는 입장을 단호히 하였다.
이 사건은 현대 우리에게 적지 않는 교훈을 안겨다 주었다. 먼저 감리교와 장로교의 입장차이다. 또 하나는 총회가 두문제를 단호하게 결정함으로써 신학적인 입장을 확고하게 내렸지만 그것이 곧 이 두 문제에 있어서 장로교회 내에 통일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김영주 목사와 김춘배 목사가 자신의 주장을 번복한 것은 자신들의 신학적 잘못을 깨닫고 방향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총회의 압력으로 목사직이 면직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총회는 여권문제가 단순한 해석상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관과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함고 , 총회적인 차원에서 그 문제를 진정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 그렇다면 여성이 교회에서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하고,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방향에서 지도해야 할것인지에 대한 대안은 제시하지 못했다. 이것이 교파나 교단이 해야 할 몫이다.
20. 적극신앙단 논쟁 : 적극 신앙단 논쟁은 1930년대초 당시 Y.M.C.A 총무로 있던 신흥우를 중심으로 결성된 적극 신앙단이라는 단체와 관련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1883년 3월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한 신흥우는 일찍이 배재학당에 다니면서 신학문에 눈을 뜨고 진보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1927년 신흥우가 Y.M.C.A 총무직에 있으면서 기독교 연구회라는 반선교사, 반보수주의의 기치를 내건 새로운 운동을 전개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 연구회는 선교사가 주도하는 조선 기독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순수하게 조선 사람들이 주도하는 조선 기독교 설립을 추구하였다.
조선적 기독교를 표방하는 신흥우가 자신의 이상을 좀더 구체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1928년 예루살렘 선교대회였다. 이 대회의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기독교의 토착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토착화로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가 외친 토착화란 탈선교사, 탈보수주의, 탈서구화, 탈전통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내건 토착화란 복음을 본질을 떠난 토착화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수 있을 것인가 하는 선교방법에 대한 토착화였다. 신흥우가 외친 토착화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는 5개의 적극신앙단의 선언를 하였으나 삶의 부도덕(여자와 문제)과 독선으로 감리교부터 1934년 가입불가와 교직자 가입금의 방침이 내려졌고 장로교에서는 1935년 평신고 가입금지 권고와 위험한 단체로 규정되어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 당하였다. 또한 적극신앙단은 조선적 기독교와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친일파화된 단체로 변질되고 말았다. 기독교의 토착화를 내건 민족주의적 조선 기독교는 없어지고 신사참배의 강요에 동참하는 친일파가 되어버린 것이다. 장로교 선교회의 지도자들이 미션스쿨을 폐교하면서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 제국주의에 단연히 맞섰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역사는 그래서 흥미있는 것이다.
21. 김재준의 신학사상 : 한인간의 사상을 평가하는 작업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영향이 깊게 드러워진 인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교단적으로 장로교 목사였던 김재준의 사상과 생애는 자연히 장로교사에서 박형룡 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재준 역시 보는 시각에 따라 예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김재준은 신학을 하면서 신학을 학문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먼저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이런 김재준의 사상은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면 개방적인 사고방식이었고, 개방적인 사고는 김재준으로 하여금 어떤 특정 신학서적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신학서적들은 섭렵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김재준이 공부하고 있던 시절의 일본과 그가 재학하고 있던 청산학원은 상당히 진보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신학하는 동안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식견을 가질수있게 되었다. 미국으로 다시 공부하며 미국4년간 그는 일본에서의 자유주의를 중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청산학원의 급진주의가 프린스턴과 웨스턴을 거치면서 진보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로 전향되었던 것이다.
김재준의 사상의 원동력은 부분적으로 청산에서 받은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인생관과 귀국후 소선지서를 탐독하면서 체득한 예언자적 의식에서 발원하였다. 그의 사상은 역사의 주인공으로서의 인식이다. 이런 인식은 그를 반선교사상과 반정통주의 , 신학교의 설립과 교육, 그리고 세계조류의 합류라는 세가지 방향으로 이끌었다. 김재준의 예언자적 외침은 반선교사상으로 표출되었다. 김재준은 선교사의 신학사상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몹시 못마땅했다. 김재준은 프린스톤 출신들과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장로교를 주도하면서 한국교회를 지나치게 보수적인 교회로 만들어 벼렸다고 보았다.
신학지남 사건으로 김재준은 평양을 떠나 간도 용정 진흥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김재준이 평양을 떠날 쯔음 한국의 국내 교계는 신사참배의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이 문제로 해외 선교부는 한국의 선교지 철수를 결정하기에 이르렀고 한국의 보수주의 산실 평양 신학교는 폐교되었다. 신학지남도 폐간되었다.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한국을 떠남으로 한국은 신학교 부재와 보수주의 지도력의 부재상태가 되었다. 이런 보수주의 지도력의 공백상태에서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김재준, 채필근, 송창근은 김대현 장로의 거액의 희사금으로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30년대 교권적으로는 몰렸던 김재준이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지지를 얻었고 자신이 개방과 진보주의 이상이 승리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신학은 단순히 학문의 영역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김재준의 사상은 철학적으로 실존주의 철학에 신학적으로는 실존주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김재준과 이들 사상가들과의 연계성은 이들 모두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형룡이 서투른 자신의 작업을 추구하기보다는 완성된 서구의 신학사상을 소개하는 것을 철학으로 삼았다면 , 김재준은 완성된 서구의 것보다는 서투르지만 자신의 신학세계를 만들러 가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 결과 김재준은 박형룡의 정통주의나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대비되는 진보주의 사조를 한국교회레 뿌리내리는 역사의 주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2. 정경옥의 신학사상 : 송길섭 교수는 정경옥을 가르켜 한국교회의 신학초기 자유주의 신학을 확립한 신학자라고 예찬하였다. 정경옥은 기독교의 역사적 경험을 존중하고 그리스도의 도덕적 인격성과 기독교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주창했다는 면에서 전형적인 감리교 신학자였다.
그는 게렛신학교에서 받은 신학교육은 정경옥의 신학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의 스승의 영향을 받아 종교심리학과 종교신비주의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정경옥은 경험론적 기독교를 추구하였고 체험의 신학자였다. 정경옥은 기독교가 인간이 갖고 있는 신앙체험의 역사적 표현이며 기독교 신학은 이런 종교적 경험들을 편견없이 실제적 가치를 찾는데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정경옥은 당대의 장로교 신학교 교수들과 비교할 때 기독교를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앞서 보았듯이 신비주의에 상당한 매력을 가졌다. 이런 신비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은 그의 경험론적 종교관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었고 , 귀국후 형성된 감리교 신비주의 부흥운동은 그의 신비주의적이고 경험론적인 신앙관의 토양을 제공하였다.
정경옥의 신비주의 사상을 정의하면 종교적 신비주의는 이지, 감정, 직관, 의지 여하를 물론하고 사회전체로서나 혹은 개인의 자아의 인격적 총체로서 우주의 객관적 실재와 직접적 관계 즉 합일적 융합을 의식하며 이와 같은 합일의 경험에서는 인격이 근본가치와 우주의 절대목적을 이루고 지식의 객관적 확실성을 얻는다고 보는 종교사상이라 정의할 수 있다.
정경옥의 신학은 일관성이 있다. 경험론적 신학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신비주의적이 하나님과의 교통, 현대신학자 중에서는 바르트보다는 슐라이어마허나 리츌의 노선에 서 있었다는 점, 그리고 기독교 사상의 전통에서는 라틴의 전통에서보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었다는 점에서 정경옥의 신학은 적어도 일관성이 있었다.
그는 또한 온건한 현대주의자였다. 현대주의란 결국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종교경험에 기초하여야 할 것 ”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오랫동안 주장하는 바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는 명제를 정당시하고 있다. 그가 현대주의에 상당히 긍정하고 있지만 정경옥은 오늘날의 극단적인 현대주의자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분명하다. 그는 친히 잣니을 현대주의 맥락속에 분류하고 있으면서도 현대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 즉 1)인간의 이성과 직관인 양심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점 2)경험일반을 종교화함으로써 종교행동을 혼동한점 3)역사적 기독교의 특수성을 망각하고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인한 것 4)기독교의 구속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경향을 조심스럽게 경계하고 있다.
감리교 신학자들은 정경옥의 신학사상을 택하였고 현대자유주의의 급진적인 특징을 간과하고 말았다. 그 결과 감리교 신학교는 서구와 같은 현대주의의 길을 그대로 걸을 수 밖에 없었고 더 나아가 전통적인 기독교를 평가절하시키는 종교다원주의와 민중신학이라는 급진적인 노선을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택하고 말았다.
23. 이용도목사와 이단성문제 : 이용도목사가 말년 원산 예언자들과의 접속관계에서 악령에게 미혹을 당하였는가는 문제는 그의 이단성 시비와 관련하여 즐기차게 제기된 문제였다. 이문제의 규명은 이용도 목사의 신앙적 건전성 여부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이용도 목사가 교계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은 그의 사역말기였다. 그는 장로교로부터 특히 부흥회와 관련하여 많은 파란을 겪은 후 마침내 1933년 9월 평북 선천읍 남예배당에서 개최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 22회 총회로부터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황국주와 함께 이단으로간주할수 있는 단체의 일원으로 지목을 받았다.
용도의 막역한 친구이자 용도를 곁에서 가까이 지켜보았던 미국인 선교사 피도수목사는 이 예언 운동의 기원이 용도의 사역과 무관하였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32년 2월 신학교 학생들이었던 젊은 여성들이 이른바 입신의 상태에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몇 개월후 용도는 이들과 교제를 나누게 되었으며 함께 모여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용도 목사는 신탁을 하는 이들 예언자들을 하나님의 예언자들로 믿고 그들의 신탁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용도 목사가 신탁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인 부분적인 이유는 자신이 받은 감리교의 체험신학의 전통과 교리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예언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이들 가운데 한사람은 김인서였다. 두말할 것 없이 그는 이들이 예언이 악령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김인서에 의하면 영계 길선주 목사도 이 운동을 강신술의 일종이자 마귀의 역사로 보았다. 특별히 피도수 선교사의 논술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는 원산 예언자들의 예언운동을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에게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용도의 이단성 문제는 현대교회사가들 사이에 엄청난 시각차를 가지고 있다. 이용도의 예언운동이 성령의 역사라기 보다는 신탁이나 접신과 같은 악령적 성격을 띠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용도는 이를 거부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인다. 이용도 목사는 지나친 교리적인 틀속에 기독교의 복음을 가두어두는 교리적인시각 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총속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햇고 이런 시각속에서 예언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용도를 비판하는 이들이 주장하듯이 이용도가 이단의 주창자는 아닌듯하며 예언자들에게 미혹되었다고 보인다.
24. 김교신과 무교회주의 : 1930년대 한국교회가 일제의 회유와 압력으로 흔들리며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합류하던 그 때 민족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준 인물이 바로 김교신이었다. 일본에 유학하면서 친일로 전향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조선사람으로 남았던 민족주의자, 그러면서 교회의 제도와 가견적인 교회관을 거부하고 불가견적인 교회를 유일한 교회로 주창하며 기성교회를 주저하지 않고 공격했던 예리한 비평가, 때문에 그는 마치 초대교회 교부 오리겐처럼 예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은 인물이었다.
무교회주의는 1930년 한국 장로교 총회가 자유주의와 아빙돈 성경주석 여권문제 창세기 저작권 문제처럼 총회적인 차원에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전국교회에 적지 않은 파란을 일으켰던 문제였다.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1920년 6월 김교신은 동경에서 노방전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후 성결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담임목사가 교인에게 쫓겨나는 것을 보고 기성교회에 회의를 느낀 그는 우찌무라 문하에 들어가 거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귀국후 우찌무라 문하의 동료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만든다.
성서조선이란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기독교 정신이었고 민족의 독립을 기원하는 소탈한 민족애였으며, 또 민족해방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따라서 조선을 성서의 기초 위에 세우겠다는 희망은 곧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처음부터 일관되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 어느 어간에 상당한 변환을 맞았다. 그의 무교회주의는 별다른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였다. 무교회주의의 핵심은 그가 말하는데로 성서에 있던 교회의 본질적 부정에 있던, 일본에 대한 보이지 않는 무언의 항거에 있던 분명한 사실은 그의 글과 사상 속에는 한국의 기성교회에 대한 공격이 하나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조선적 기독교를 외쳐야 했고 선교사들로부터 독립과 서구의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쳐야 했고 또 기성교회를 비판해야만 했다. 그는 이런 주장속에서 성경신학의 맥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제시하거나 이해하는데 실패하였다. 또한 한주 한믿음 한세례를 거부함으로 그는 스스로 비판을 자초했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김교신은 기성교회가 갖기 쉬운 지나친 교권주의, 물량주의를 경계하고 순수한 조선의 기독교를 조창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를 통해 교회가 무엇인가를 고찰하게 하였고, 단순한 예배당을 중시하는 사고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임자체를 교회의 신성한 본질로 고찰해야할 필요성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25. 보수주의 응전과 박형룡 : 진보주의 측과 보수주의 측 모두 박형룡 박사의 평가는 근본주의자라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입장은 분명 근본주의라고 볼수 있다. 그는 근본주의를 기독교 자체라고 보았는데 그것은 근본주의야 말로 정통주의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박형룡 박사의 사상을 지배한느 메이첸의 이상 즉 [기독교와 자유주의] 에 나타난 것과 같이 같은 정통신앙의 변호와 전수에 대한 열망이 곧 박형룡박사의 일생을 지배했다. 때문에 주재용 교수는 박형룡 박사의 사상은 반현대주의, 반신정통주의, 반신복음주의로 함축시키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끊임없이 성경의 권위를 변호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박형룡이 프린스톤에서 유학하던 1923년부터 1926년은 미국에서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의 논쟁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은 자연히 박형룡의 신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박형룡은 변증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박형룡은 수년후 미국에서 경험한 똑같은 신학적 대립과 논쟁을 한국에서도 목격하게 되었다. 결국 박박사는 제2의 메이첸으로 한국의 보수주의를 변호해야한다는 사명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박형룡박사를 이해할수 없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어떤 새로운 신학을 설정하거나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한국의 신학이 따로 있고 미국의 신학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았다. 구 프린스톤의 신학을 그대로 계승발전시키는 것이 신학자의 소명이며 그것에서 벗어나는 자야말로 신학을 변질시키는 인물로 이해했던 것이다. 워필드나 메이첸이 강력하게 변호했던 성경의 영감 특별히 완전유기적 축자영감은 박형룡 박사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1930년대 현대주의 도전앞에서 보수주의의 대변자가 되었다. 격변의 시대 정통주의를 보수사고 소위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성서 기독교 신앙을 한국에 뿌리를 내려주었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면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객관성에 대한 강조가 말씀의 순종과 실천에 대한 강조와 균형을 상실할 때 그 말씀에 대한 강조가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맴돈 나머지 실존적인 차원에서의 살아있는 역사가 결여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듯이 박형룡 박사의 사상은 본의아니게 한국교회에 반문화주의, 반사회주의 사상을 심화시켜주었다. 그 결과 한국 장로교 안에는 문화를 보는 부정적인 견해, 사회를 보는 부정적인 견해들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와함께 간하배 교수가 지적하듯이 한국의 신학적 보수주의가 신학적 폐쇄주의로 치닫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런 원인중의 하나는 역사의식의 결여에서 비롯되었고 ,이런 역사의식의 결여는 복음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이어졌다. 또한 변증학적인 접근방법을 한국 조직신학의 기준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신학자체를 신학의 독특성으로 평가하지 않고 현대주의 변화라는 방향에서 접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박형룡박사의 위치를 평가절하 해서는 안된다. 그는 1920년대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시대 1930년대 자유주의 도전과 보수주의 응전의 시대 1940년와 1950년대 분열과 혼돈의 시대 속에서 그가 그런 신학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인 상황들로 박형룡 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는 역사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박형룡 박사의 긍정적인 것을 평가하고 부정적인 것은 성숙과 발전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26. 신사참배 논쟁 : 일제시대 한국교회가 만난 가장 큰 박해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있었던 신사참배 강요였다. 신사는 종교적 요소가 없는 국가에 대한 예의문제라고 하지만 신사가 종교라는 것에 이의를 둔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사참배의 목적은 일본신들에 대한 숭배와 민족정신의 말살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신앙의 선배들은 신사참배는 곧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배도라고 확신했다.
국내의 여러 교단과 천주교는 타협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남장로교 선교부의 총무 풀톤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이며 기독교학교가 폐교되고 선교지를 철수 한이 있더라도 신사에 참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감리교와 장로교 총회가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신학생에서부터 박관준 장로, 주기철 목사의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또한 한국인들만 신사참배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남,북 장로교 선교회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60년이 지난 오늘날 신사참배 논쟁의 문제점이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첫째 신사참배는 종교라는 점이다. 둘째 신앙과 신사참배의 연관성에서 신사참배는 성경이 행위의 절대적인 표준이 되는지를 알게 해 준 사건이었다. 셋째 신사참배를 결정하거나 신사에 참배한 이들에 관련된 문제이다. 총회는 39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하고 회개하였다. 이것을 거울삼아 몰역사적이고 비신앙적인 행위가 다시는 이 땅에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27. 소양 주기철 목사 : 1930년대 자유주의 도전과 신사참배라는 두가지 도전으로 기로에 선 한국교회의 신앙을 지켜주고 삶을 통해 그 진실을 전달한 인물이 바로 소양 주기철 목사였다. 일제의 한국지배는 소양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고 , 그것이 그의 생애의 한 방향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급작스럽게 달라지는 국내의 정치 경제 , 사회의 변화, 일제의 노골적인 조선의 침략, 그리고 국내의 경제적 파탄을 목도하면서 소양은 어떤 형태로던 이 시대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더 결정적으로 소양의 생애와 신앙을 지배하게된 원동력은 그의 회심과 평양신학교에서의 보수주의 신학교육이었다.
소양은 김익두의 집회를 통해 영적각성 체험후 주의 종으로 일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정치적인 독립의 소망이 종교적 소망으로 대치되어 이 민족이 진정으로 살길은 복음화되는 길이며, 전민족이 자신들의 위치에서 기독교적 이상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소양은 처음 초량교회에 부임하였고 , 마산 문창교회 목회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산실인 된 산정현교회로 마지막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의 일사각오의 정신은 일제의 4차례나 되는 검속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고있다.
소양의 생애를 통해 역사적인 교훈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민족에 대한 사랑은 당시의 정치적 민족주의자들과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의 바른 신앙은 그가 어릴 때부터 받았던 신앙교육과 평신도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생애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그의 신앙과 삶이 당대 뿐아니라 이시대의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사실이다.
28. 민족의 희망과 시련 : 1935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에는 종말론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했다. 이시대 종말론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하게 된 원인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에 하나는 선교사들의 종말론 때문이다. 또 하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일제의 한국통치는 한국의 종말론을 자연스럽게 고취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한국교회의 사상을 이끌어온 사람들은 박형룡과 박윤선을 제외하고는 거의다 세대주의 종말론을 갖고 있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종말론의 지류가 아니라 장로교 종말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세대주의 종말론은 길선주나 김익두와 같은 초기 한국지도자들의 종말론의 원형을 형성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세대주의와 역사적 전천년설을 구분할려는 시도를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한사람이다. 그는 한국교회의 전천년설을 구분하면서 소위 역사적 전천년설이라고 하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세대주의와 역사적 전천년설에 대한 구분의 시도는 박윤선 박사에 의해 진행되었다. 조직신학적인 틀이 아닌 성경신학적 틀을 가지고 천년설을 논했다는 점에서 박윤선 목사는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35년부터 1945년 사이 전천년설을 전국적인 현상으로 확대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신사참배였다. 신사참배는 정통신앙을 판단하는 중요한 시금석이었다. 또한 이 시기는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1940년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다. 1940년대 이후 급속히 자유주의화 되었지만 해방과 함께 해외로 망명했던 보수주의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귀국하면서 한국 장로교는 이들과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과의 신학적인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29. 분열과 대립의 시대 :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는 한마디로 대립과 분열의 시대였다. 혹자는 이 시대를 성경에 대한 논쟁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논쟁의 중심에 성경관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공통적인 특징은 신학적 자유주의 세력과 신학적 보수주의 세력이 일련의 갈등을 경험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1940년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어지고 조선신학교는 세계의 조류에 부응하는 신학교를 설립이념으로 내세웠다. 세계조류라는 것은 그 당시 팽배해 있던 신정통주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한다는것이었다. 이런 현대조류와 현대사상의 수용이 곧 자유주의 신앙을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학문적인 면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수용하면서 신앙적인 면에서는 얼마든지 보수성을 견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조선신학교의 진보적인 입장은 정통주의자로부터 반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한상동 목사와 미국 웨스트 민스터의 메이첸 문하에서 구프린스톤의 보수주의 교육을 받은 박윤선 목사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고려신학교는 조선신학교의 진보주의 신학교육에 대한 강한 반동이었다. 이들이 내건 신앙과 신학의 준수는 조선 신학교가 주창하는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라는 이원론에 대한 거부였다. 조선신학교가 평양신학교와의 역사적 단절을 추구했다면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와의 역사적 단절이 아니라 계승을 모토로 내걸었다.
고려신학교만의 외로운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조선신학교에 다니는 재학생중 51명이 총회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조사위원들의 조사와 박형룡의 귀국으로 김재준교수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하게되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박형룡에게만 유리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두 석학인 존 맥케이와 에밀 부르너의 한국방문은 자유주의를 확대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박형룡박사가 귀국하고 고려신학교에서 1년도 있지 못하고 떠나 1948년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1949년 총회에서는 3가지 색깔을 띠게 되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고려파, 조선신학교를 중심한 기장파, 장로회 신학교를 중심한 박형룡 중심의 세력이었다. 1952년 고려파가 분립하였고 1953년에는 기장이 분열해 나갔다. 1959년에는 W.C.C를 찬성하는 쪽은 통합, 반대하는 쪽은 합동으로 분열하였다.
분열과 연합을 반복하면서도 교단적인 연합을 추구했던 미국장로교회와는 달리 우리의 장로교는 연합의 희망을 포기한 것 같다. 그 원인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막론하고 신학을 이데올로기와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간하배 교수의 지적과 같이 한국교회의 신학은 반동주의로 흐르고 말았다. 이제 건전한 신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동주의를 탈피하고 총체적으로 균형잡힌 신학적 발전을 모색해야 할 때가 왔다.
30. 조선 신학교와 성경관 논쟁 : 1947년 조선 신학교 재학생 51명의 학생들은 그들이 받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교육에 반대하여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고 서양 자유주의가 한국교회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들의 핵심은 성경관에 대한 문제였다. 김재준 교수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고백하지만 성경이 역사적 과학적, 그리고 연대기적 문제에서도 무오하다는 것은 거부한다. 그는 성경은 구속의 진리라는 점에서만 무오한 것이지 결코 자연, 역사, 과학에서까지 무오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신앙과 행위에 제한시켰다.
박형룡박사는 귀국후 김재준 교수의 문제를 두가지 측면 첫째 현대비평학을 따라 김재준교수가 모세오경의 모세저작권 부인하여 성경의 권위를 파괴시켰다는 사실 둘째 김재준 교수는 성경의 무오를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성경무오사상과 그가 수용한 고등비평은 서로 양립할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51명의 학생들이 진정한 진성서로 시작된 조선신학교의 신학을 둘러싼 수년간의 총회내의 대립과 논쟁과 갈등은 1953년 6월 조선신학교와 그 학교를 지지하는 장로교회들이 총회를 탈퇴하고 한국신학대학(조선신학교 후신) 강당에 모여 소위 법통 38차 총회를 개최하면서 결말이 지어졌다.
31. 에큐메니칼(W.C.C) 논쟁 : 한국 장로교회는 1954년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 총회에 명신홍과 김현정 두사람을 대표로 파송하여 W.C.C.의 신학적 입장과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 후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둘은 상반된 보고를 하였는데 이것은 두사람의 견해차라기 보다는 한국 장로교 안에 있는 두조류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W.C.C.를 찬성하는 이들은 한국교회가 이제는 세계조류와 맥을 같이하고 보조를 같이하기 위해서라도 세계교회들의 협의체인 W.C.C.에 적극 참여하여 배워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W.C.C.반대하는 이들은 이 단체가 교회의 일치가 아니라 교회의 연합을 꾀하고 있는 단체이며 이를 위해서 신학적인 선을 철폐하여 새로운 신학조류를 받아들였고 심지어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용공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1956년 9월 제41회 총회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찬반논란을 벌인 끝에 이 운동을 좀더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보고할 에큐메니칼 연구위원 8명을 발족하였다. 이들은 42회 총회에서 첫보고를 가졌다. 첫째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은 단일교회를 목표로 하는 이들과 교회의 친선과 연합만을 목표로하는 이들 둘로 대별되며 둘째 친선과 협조만을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 참여 하기로 하지만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것 셋째 각교회에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바른 교육을 위해 필요한 팜프렛 제작, 인돈, 마삼락 명신홍, 김형모 네사람을 추가로 에큐메니칼 연구위원에 위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W.C.C.를 찬성하는 쪽과 찬성하지 않는 쪽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총회의 화해노력에도 불구하고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에서 각각모여 통합과 합동으로 다시 장로교가 분열되는 아픈 결과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32. 정체성 파악의 시기 : 50년대 세차례의 분열을 맞은 한국장로교회는 1960년대 이후 자신들이 걸어온 신학의 길을 반추하며 “우리가 어떻게 나가야 할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체성 파악 문제로 고민하던 한국교회는 지금까지의 교파주의에서 과감하게 탈피해 교파를 초월하여 근본주의 성향의 정통주의, 토착화신학, 그리고 복음주의 공동체로 뚜렷이 대별되기 시작하였다.
근본주의 성향의 정통주의는 고신, 합동, 백파, 성서침례교회, 감신의 일부 보수주의, 예성, 매킨타이어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한국화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은 김신대의 문화-자유주의 ,한신대의 진보주의, 연세대 신학대학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다. 토착화 신학운동의 요인은 첫째 한국에 뿌리내린 전통주의 가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선교사 및 수입신학을 주창하면서 경직된 정통주의를 고수하려는데에 대한 반동이었다. 둘째, 당시 해방신학등 남미의 토착화 신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한국의 시대적 배경 즉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이 토착화 신학은 성의신학, 문화신학, 민중신학으로 나타났다.
이런 토착화 운동은 한국의 자유주의 토착화 운동은 한국기독교 발전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두가지 면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지만 한국의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긍정적인 인상보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더 강하게 가져댜 준 것이 사실이다. 토착화의 긍정적인 면은 신학함의 필요성과 과제, 학문성에 있다. 또한 기독교와 문화를 진지하게 고찰 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민족주체성 확립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에서는 복음의 지나친 상황화를 만들어 내고 , 기독교와 전혀 이질적인 민족종교와 전통을 접목시키려고 시도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본질을 변질, 왜곡시키고 말았다. 한국자유주의 신학이 반동주의로 흐른다는점과 칸텍스트를 극대화한 나머지 텍스트를 약화시키고 말았다. 종교혼합주의 현상도 나타났다.
1960년대 정체서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생성된 또 다른 신학운동은 복음주의 운동이다. 신학적 보수주의를 계승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문화적인 책임을 완수하려는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이후 복음주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교단을 초월해서 복음주의라는 이름하에 한데 연합하였다.
한국사
원시사회와 고조선>
인류사의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원시시대의 역사는 고고학적 유적 유물들을 통하여 알아볼 수 있다. 인류가 만들어 썼던 도구와 살았던 흔적들에서 원시시대의 자연환경과 원시인들의 생활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원시시대는 인간이 사용했던 도구에 따라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로 구분한다.
구석기 유적을 찾아보려면 가장 손쉬운 곳이 연천 전곡리이다. 구석기시대에는 맹수를 피하기 위해 동굴에서 많이 살았는데, 제천 점말동굴이나 수양개동굴 등이 대표적이다. 전곡리는 적어도 20만년 전 한탄강변에 구석기인들이 간단한 움집을 짓고 산 곳인데 상당히 발전된 주먹도끼가 발굴되어 유명해졌으며 현재 움집을 복원하고 유적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구석기인은 어떤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신석기 유적으로는 암사동이 잘 남아있다. 일제시기 대홍수가 났을 때 움집터가 드러나면서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불에 탄 나무조각 등이 많이 묻혀 있어서 이 시기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이 곳은 한꺼번에 많은 움집을 짓고 산 흔적이 발견되어 구석기 시대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았음을 보여준다. 토기는 간석기와 함께 농경을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청동기시대 현장은 복원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찾기가 쉽지 않다. 박물관을 통해 찾아봐야 할 것이다. 청동기 전시관을 찾아가 보면 먼저 농업생산도구가 많이 전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농경이 발전하면서 농사에 적절한 지역에 취락이 형성되고, 집터의 크기가 다양하다든가, 창고 소공업장 등도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지배자의 의식용으로 사용되었던 다양한 청동기들이 보인다. 청동의 소유여부가 당시 부와 힘을 나타내는 기준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보다 큰 정치체를 형성해 나갔다.
청동기시대에는 농업이 본격화되었고 농업생산력이 늘어나면서 원시 공동체사회는 해체되어 사유재산이 발생하고 계급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것은 고대국가의 성립으로 이어진다. 농경과 청동기문화에 바탕을 두고 성립한 최초의 고대국가가 고조선이다.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유적은 찾아가기가 어렵다. 남한에는 고조선 관련 유적이 없기 때문에 단군을 제사지내는 제단으로 만들어진 참성단을 택하여 찾아가게 된다. 중국에는 지배자와 함께 수많은 노예들이 순장된 무덤으로 유명한 강상, 누상무덤이 있지만 발굴 뒤 덮어버렸고, 다만 중국 요녕성에 있는 고인돌이 가장 찾기 좋은 유적이 아닐까 한다. 고조선은 지속적인 발전을 하면서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기구, 정치제도를 만들어냈다. 고조선과 한의 전쟁상황을 살펴보면 대신, 재상, 장군 등의 직책으로 보아 상당히 중앙 중심으로 집중되어 나갔음을 볼 수 있지만, 전쟁의 양상에서 왕검성 중심으로만 전쟁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는 지방세력과의 결합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라고 보인다.
<삼국>
고조선을 이어 만주와 한반도지역에 여러 소국이 등장하였다. 청동기에 이어 철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철제농기구와 생산도구를 사용하여 농경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생산이 늘어나게 되었다. 또 철제무기로는 전쟁을 벌여 영토를 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력과 경제력을 가진 강력한 지배층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굳건히 하기 위한 지배기구도 조직하였다.
삼국의 형성은 대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였다. 삼국은 4세기에서 6세기 경에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통치체제와 율령, 여러 제도를 갖추면서 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서울시 성동구 한강변에는 초기 백제의 도읍이라고 일컬어지는 풍납토성이 있다. 최근 많은 유적이 발굴되면서 매우 주목받은 곳이었다. 인근 몽촌토성보다도 시기적으로 앞선 백제왕성으로 보인다. 한강 북쪽에 위치한 아차산은 삼국 세 나라의 유적이 모두 보이는 곳인데 삼국은 국경을 마주한 뒤 더욱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으며 한강유역은 가장 중심적인 지역이었다. 이로써 고대국가에서 어떤 곳이 요충지인지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농민들의 처지와 삶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김제 벽골제를 택할 수 있다. 이 시기 농업발달에는 농기구와 우경의 실시, 그리고 수리시설이다. 벽골제는 삼국시대 수리시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수리시설로 인해 산이나 구릉에서 강가로 경지가 확장되었는데, 이러한 대규모 저수지는 삼국의 체제가 발전하면서 주민 동원이 가능하였음을 보여준다. 농업기술이 고대사회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은 삼년산성은 삼국시대 산성 가운데 대표적이다. 이 시기 수많은 산성이 남아있어 전쟁이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산성은 기본적으로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지방 통치의 거점 역할도 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의 삶을 설명하는데도 유용하였다. 농민들은 농사일이 끝나면 수시로 성을 비롯하여, 궁궐, 수리시설 등을 쌓는 일에 끌려나갔다. 성을 통해서도 전쟁만이 아니라 농민의 삶을 생각할 수 있다.
<통일신라>
삼국이 정립한 뒤 계속되었던 삼국 간의 전쟁은 신라의 삼국통합으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한반도의 남쪽을 차지하는데 그친 불완전한 통일이었으나 신라로서는 큰 발전이었다. 또 백제?고구려 유민들과 힘을 합쳐 당군을 몰아내는 전쟁 과정에서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도 생겨나게 되었다. 통일된 사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신라는 고대사회로부터 한 걸음 나아갔다.
경기도 성남시에는 토지박물관이 있는데 여기에는 지방통치의 가장 하부 단계라고 할 수 있는 통일신라의 자연촌락의 모형이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청주지방의 신라시기 장적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이 자료에는 촌락의 지형과 넓이, 연령별 인구와 호수, 가축과 나무의 수, 관청과 촌장, 농민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면적 등이 파악되어 있다. 민에 대한 파악이 더욱 치밀해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늘어난 영토와 인구를 다스리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제도와 조직을 다시 정비하였다.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토지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지배층은 대규모의 토지소유를 세력기반으로 하였다. 이들은 이전과 다른 봉건지배층이 되어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매개로 그 땅을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농민의 노동력까지 마음대로 부리며 세력을 누렸다.
경주 반월궁 옆에는 신라궁궐의 정원에 해당되는 안압지가 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이 곳에 못을 파고 여러 가지 시설을 갖추어서 귀족들이 국정을 논하기도 하고 때로는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이처럼 신라의 왕족, 귀족뿐만 아니라 경주 일대의 주민들도 여유로운 삶을 누렸다.
반면 지방 농민들은 많은 부세를 부담시켰는데, 신라말기에는 그 부담이 더욱 늘어났다. 이에 농민들은 견디다 못해서 유망하게 되었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초적이 되었다. 그 초적들은 국가기구라든가 귀족의 집, 사찰들을 습격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해인사 내의 묘길상탑 속의 탑기에서 발견된 최치원의 글에는 당시 참혹했던 사회상과 이 때문에 초적들이 해인사를 습격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려>
1.
고려는 신라말의 사회적 모순과 후삼국의 분립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옛 터전에 자리잡고 있던 발해가 멸망하자 그 유민들도 받아들였다. 고려의 건국자는 송악지방의 호족출신인 왕건이었다. 그는 먼저 농민봉기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수취체제를 정비하고 노비로 전락한 양인을 본래의 신분으로 되돌려 민심을 수습하였다. 또 지방호족들을 널리 연합하여 신라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를 격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의 후삼국 통합은 분열되었던 사회를 다시 통합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신라 진골귀족을 대신해서 지방 세력에 의해 처음으로 국가를 세웠는데 이제 고려는 새롭게 체제를 정비해야할 단계였다. 고려의 성립을 다룰 수 있는 곳은 충남 개태사이다. 왕건이 후백제 지역을 장악하고는 이 지역을 위무하고 한편으로는 고려의 권위를 보이기 위해 지었다.
고려는 호족 연합정권이라고 할 정도로 호족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라 말 고려 초 혼란한 사회에서 호족들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지방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고려 건국 후도 실질적으로 지방을 통치를 했다. 안동에 있는 삼태사묘는 이 지역의 토호였던 권행, 김선평, 장길을 모신 곳이다. 호족들에게 성과 본관을 주어서 지방지배를 하도록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백성들은 국가와 지방세력 사이에서 어떻게 지배당하며 살았을까. 미흡하나마 당시 백성들의 삶을 유추해보기 위해 예천 개심사 5층석탑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석탑은 예천지역백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탑에는 탑을 만들게 된 과정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군현단위로 이루어지는 백성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농민들은 조, 포, 역 등 세를 내었는데 이와같이 군현단위로 이루어졌다.
2.
12세기부터 고려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과 대립이 터져 나왔다. 왕실의 외척인 이자겸이 전횡을 부린 이자겸란, 또 서경세력이 중앙 정치에 진출하여 개경귀족과 대립하였던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뒤이은 무신란과 무신집권으로 인해 문벌귀족 사회는 무너지고 고려사회는 전반적으로 크게 동요하였다. 무신들의 권력 다툼이 계속되고 토지 겸병과 농민들에 대한 과중한 수탈이 계속되자 농민들은 각 지방에서 봉기하였고 노비들의 신분해방 움직임도 있었다.
고려의 부세는 속현이라든가 부곡민들에게 많이 부과가 되었다. 이들이 유망하게 되면 남아있던 다른 지역에 또 세를 부과하게 되고 그래서 또 이들이 유망하고 그렇게 되다보면 주현까지도 상당히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적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토지를 닥치는 대로 모아나갔다. 그렇게 되면서 농민들은 이중 삼중으로 수탈을 당하게 되고 국가의 수입은 줄어들고, 결국 국가의 재정이 상당히 열악한 지경에 놓였다. 이 때문에 농민들이 선택한 길은 바로 저항이었다.
농민항쟁 규모와 배경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가장 좋은 현장 중 하나가 청도 운문사이다. 당시 농민항쟁은 거의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특히 이 운문 일대에서 일어난 항쟁이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민항쟁은 이곳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서북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고 충청, 전라도를 거쳐서 경상도까지도 퍼져나가 그야말로 전국적인 농민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농민항쟁이 일어난 배경은 정치적으로 본다면 당시 지배체제 내부의 분열을 들 수 있다. 또 중앙이 이와 같이 분열하게 되자 지방관들의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심화되었다. 또 신분제의 해이에 따라서 농민들의 사회의식이 상승된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신분이 낮은 무신들이 집권하게 됨에 따라서 이와 같은 사회의식이 싹텄다.
몽고 침략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강화도에 가볼 필요가 있다. 침략을 받으면서 고려는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 이 곳으로 궁궐을 옮겼다. 고려는 몽고침략을 받기 훨씬 이전인 12세기 후반부터 정치적으로 지배체제가 이완되고 전시과 체제가 무너지는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런 속에서 몽고의 침략을 받았고 결국 그들의 간섭을 받는 시기가 닥쳐왔다.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옮긴 의도와 그들의 활동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이라는 외세에 간섭받으면서 내부적으로도 사회문제가 심각하게 진행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권문세가들의 농장문제를 들 수 있다. 민통선 안 파주 진동면 서곡리에서 고려 고분벽화가 발견되었다. 이 묘의 주인공은 원 간섭기의 권문세가라고 할 수 있는 권준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대단한 권세와 부귀를 누렸다. 이들의 경제적 기반은 토지였는데 산천을 경계로 했다고 할 정도로 넓은 농장을 보유했다. 당시 불안한 사회적 정세, 수취구조 속에서 소농민들은 몰락을 하게 되고 이들의 경우는 토지와 노동력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토지와 노동력을 기반으로 해서 농장은 훨씬 규모를 키워나갔다. 토지와 농민들이 농장으로 불법 탈점되자 이를 개혁하려는 노력으로 공민왕 때는 신돈이라는 승려를 등용했는데 그는 ‘전민변정사업’을 벌여나갔다. 이는 실패하였으나 성리학을 받아들인 신흥사대부들은 개혁의 기치를 계속 높이 쳐들었고 그 결과 조선의 건국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조선>
1
고려말에는 농민의 경제생활, 촌락의 내부구성, 계층?계급구조의 변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회변동이 일어났다. 조선건국은 이러한 사회변동을 바탕으로 하여 신흥사대부 계층과 신흥무장 세력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결집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조선사회는 서울이 중심 무대로 바뀌었으며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 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사회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고, 집권적 관료제를 정비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어나갔다. 중앙관제와 함께 지방제도도 정비해 고려시대 지방행정 단위가 다원적이고 중층적으로 편성되었던 문제점을 해소했다.
건국 전후 개혁에 앞장선 인물을 찾으려면 경기도 평택에 있는 정도전의 문헌사에 가볼 수 있다. 그는 여말선초의 학자이자 탁월한 정치가이다. 왕조를 개창하기 전에 이미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고려 지배층의 경제기반을 빼앗고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토지분급의 주된 대상은 중앙 관인층과 지방의 유력자층이었다. 이들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전세를 걷는 수조권을 행사할 수 있는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조선조 양반들은 중앙에서 관료로서 지방에서 지배세력이었다. 지금은 경주에 포함된 양동마을은 유명한 양반 마을이다. 조선의 지방사회는 여말선초의 광범한 인구이동과 촌락의 변화를 바탕으로 재편되었다. 조선은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여 각 촌락을 면리제로 편제하고 각 촌락을 국가가 직접 파악하는 단일한 지방통치체제를 갖추었다. 지방사회의 지배자는 촌락에 자리잡은 사족들이었다. 이들은 촌락 내에서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전호농민 또는 자신의 노비를 지배하였지만, 촌락을 넘어서 군현단위로 유향소를 결성하고 이러한 기구를 통해 촌락민의 의사를 대변하기도 하였으며 촌락민을 대신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는 권한을 행사하였다.
당시 사회운영과 농민들의 삶을 알아보기 위해 평택에 있는 대동법시행기념비를 찾으면 좋을 듯 하다.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곡물로 바치던 폐단을 없애고 미곡으로 환산해 바치게 하는 제도였다. 대동법은 대토지소유자 및 방납에서 이득을 얻는 무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납제의 개혁을 바라는 농민층의 요구에 따라서 시행될 수 있었다. 신분에 따른 부과, 지역별 독자적인 부과, 현물과 노동력을 직접 거두는 형태의 중세적인 조세운영의 원리가 무너져 나가게 된 것이다.
2
조선전기를 벗어나면서 모든 분야에서 산업이 새롭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농업에서는 경지면적이 늘어나고 이앙법과 견종법의 확대로 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수공업은 관청수공업에서 벗어나 전문수공업자의 마을이 생겨났고 공업의 원료를 대는 광업도 함께 발달하였다. 이러한 산업의 발전에 힘입어 생산한 물건을 팔고사는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였다.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은 모든 산업에 상품 생산을 확대하도록 자극하여 분업화, 전문화를 통한 생산력 발전을 앞당겼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변화를 알아보려면 안성 유기공방이 괜찮을 듯하다. 16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특히 17세기 이후 조선사회는 급격한 변동을 보였다. 지배층을 중심으로 개간이 널리 진행되었고, 경작농민층은 농업기술을 발달시켰다. 이와 함께 수공업과 광업도 발전했다. 유기점과 같은 전문수공업자의 마을이나 광산마을이 생겼다. 농업, 수공업, 광업 등 각 분야에서 생산력이 발전하다보니 생산한 물건을 사고 파는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였다. 안성에서도 큰 장시가 있는데, 당시 전국 곳곳에 장시가 생기고 이를 연결하여 전국을 무대로 하는 상인이 생겼다.
양반의 향촌지배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전라남도 영암 구림마을이 도움이 된다. 월출산 자락의 이 곳은 16세기 사족들의 대동계가 만들어졌던 곳이다. 재지사족의 농업경영으로 촌락이 발달하였는데, 이러한 기술이 일반 농민층에게도 보급되어, 16세기 후반 이후 사족의 거주 지역뿐 아니라 하층민의 거주촌락도 집촌으로 나아갔고, 특히 임란 이후 농민 주도하에 토지의 개간과 복구가 이루어졌다. 재지사족의 이주와 개척으로 적극 개발되기 시작한 향촌은 이들의 성장과 더불어 점차 읍치지역을 지배하고 나아가 조선사회를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하층민의 성장에 따라 양반이 더 이상 지배의 위치에 있지 못하게 되었다. 이들은 경제적인 특권을 유지하기 어렵게 됐을 뿐 아니라 하층민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이에 사족들은 수취체계의 하부단위인 동계를 통해 연합하게 되었다.
3
조선후기에 들어와 양반 지배층 내부의 권력 다툼은 더욱 심해졌다. 붕당간에 당쟁이 격화되었으며 특히 숙종대에는 권력이 뒤바뀌는 이른바 환국(換局)이 여러차례 일어났다. 영조, 정조는 탕평책을 통해 강화된 왕권을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정치세력의 참여는 더 제한되었고 점차 보수화되어 세도정치로 넘어가게 되었다.
수원 화성은 조선후기 정치변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붕당정치가 진행되고 노론들이 계속 권력을 장악하자 정조가 그에 맞서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려는 계획으로 화성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김조순이 외척이 되어 왕권을 압도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세도정치는 종래의 일당전제마저 청산하고 특정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형태였는데 외척이라는 소수의 정치집단에서 정치세력이 집결되고 그들의 권력의 핵심부를 형성하게 됨으로써 정치기강이 문란하게 되었다. 이들은 비변사를 주도함으로써 국정 일반을 장악하기도 했다
전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고창읍성에는 동헌, 객사, 작청, 향청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이를 통해 지방사회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면서 국가의 지방통치는 지방사족의 조직을 배제하고 국가의 공적 행정체계를 통해 이루어져 갔다. 그러나 그같은 공적인 행정체계가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수령을 비롯한 소수의 지배층에게 맡겨져 도리어 수탈이 심해졌다. 수령과 향임층, 향리층이 권한을 장악하고 향청, 작청, 면리제라는 공식적인 체계를 통해 지방행정이 이루어졌다. 반면 일반민들은 촌계를 만들어서 결속을 다졌으며, 두레와 같은 공동노동조직을 만들었다.
이 시기 농민들의 동향은 19세기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을 통해 알 수 있다. 토지를 둘러싼 양극분화가 심화된 데다가 삼정수탈이 강화되면서 농민층이 최소한의 재생산기반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농민들은 합법적인 등소나 시위 등의 방법을 통해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실력행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난 항쟁은 삼남 일대로 확대되었다. 충청도 공주에서도 현재 백제대교 아래 나루터에서 농민들이 모여서 공주목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부세문제 해결을 위해 수령이나 이서층을 공격했고, 또 읍내 사대부, 지주가를 공격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이정청을 설치해 관료와 유생, 농민들에게도 의견을 물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농민항쟁은 삼정제도에 대한 저항이자 새로운 부세체제를 요구하는 반봉건운동의 과정이었다.
<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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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들어 서구제국주의 열강은 동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서구열강은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여 자국의 상품시장과 함께 천연자원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서구열강의 침략 속에 마침내 중국?일본 등 주변 나라들은 강제로 개항을 하게 되었다. 조선에도 서구열강의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과 개항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이제 밖으로는 서구열강의 침략 위기를 극복하고, 안으로 봉건체제의 모순을 타파하여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외세의 침략과 관련한 흔적은 한강어귀를 지키는 강화도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식민지 개척에 나선 서구 열강들은 19세기 중엽 동아시아 쪽으로 손길을 뻗쳤는데, 당시 대원군 정권은 내부적으로는 왕권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하고, 외부적으로는 서구열강의 군사침략에 대비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이런 속에서도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이 일어났는데(병인양요?신미양요), 전투가 일어났던 문수산성?초지진?광성진 등과, 약탈이 자행되었던 외규장각(고려궁터내. 최근 새롭게 복원됨) 등에서 침략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원군정권은 10년만에 무너지고 민씨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전 정책을 모두 바꾸었고, 특히 대원군의 국방설비마저 흐트러졌는데 이같은 상황에서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결국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고 불평등한 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그 곳도 강화부 내 연무대라는 곳이었다.
개항이 되면서 우리 사회와 경제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기 위해 침략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던, 개항장과 조계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산, 원산과 함께 개항하였던 인천 제물포항에는 개항 후 일본이 설치하였던 은행 등 건물이 남아 있다. 당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역구조였다. 이전까지 청과 일본과의 대외교역이 있었지만 규모가 크지 못하고 통제되었는데 이제 무역규모가 급증하였다. 이 시기 무역품은 수입은 섬유제품(특히 면제품), 반면 수출품은 쌀?콩?소가죽을 중심으로 한 농축산물이었다. 이를 미면교환체제라고 하였다. 이는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일부 계층에게는 성장의 기회였지만, 대다수(농민, 수공업자, 소상인 등)에게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일반 민중들은 개항에 대해 반대하였고, 일본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졌다.
한말 시기의 중간에 자리잡은 농민전쟁은 그 비중으로 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농민전쟁은 당시 삼남을 비롯한 거의 전국을 무대로 발발하였지만 시발지는 전북일대였다. 농민전쟁의 배경은 이전의 농민항쟁에서 보았던 내부적인 문제에다가 개항 뒤 불평등 무역구조가 확대되면서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 개항 뒤에도 농민항쟁은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 보급되었던 동학은 농민항쟁이 군현단위의 한계를 벗어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부군(현재 정읍시에 포함)에서는 고부농민항쟁의 흔적을 찾을 수 있고, 바로 그 직후 일어났던 1차농민전쟁의 집결지인 백산, 감영군을 격파하였던 황토현, 그리고 중앙군을 격파하였던 장성 황룡촌에는 기념탑 또는 기념관이 남아 있으며, 농민군이 입성한 전주에는 역사박물관에 농민전쟁 전시관이 있어서 이해를 돕는다. 그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이어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농민군은 재봉기하여 2차농민전쟁이 벌어졌다. 농민군은 북상하였으나 패배하였고, 그 흔적을 공주 우금치고개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농민들의 뜻은 좌절되었으나 농민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도 일부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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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열강이 계속 경제침탈을 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개혁운동의 전개과정, 그리고 농민전쟁 이후의 민중의 저항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보고자 한다.
우리 힘으로 근대화하려는 노력은 없었는가? 미흡하지만 대한제국을 들 수 있다. 고종은 원구단(현 조선호텔자리-지금은 현재 부속건물인 황궁우만 남아 있다)에서 황제즉위를 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옛 법과 새로운 법을 절충하는 방향에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전제군주권을 강화하는 데 역점을 두어 왕실이 중심이 되어 개혁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04년을 전후하여 러?일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광무개혁은 결국 좌초하였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자주외교와 부국강병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의 침략을 막지 못하여 국권을 잃고 말았다.
경부선과 경인선은 한말에 이권침탈을 당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장악하여 건설한 산물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우리는 제국주의 열강에게 주요한 경제이권을 많이 넘겨주었는데, 이는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열강으로부터 기술과 자본의 도입이 필요하였고 한편으로는 왕실을 보호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열강들이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권침탈은 우리 나라의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자원을 부족하게 하였고, 광산업 등 비슷한 분야에서 성장하고 있던 조선 산업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뿐만아니라 광산개발에서처럼 부근의 논밭을 아무런 보상없이 무단점거하거나 망가뜨려 농사를 지을 수 없게 하는 등 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였다.
대한제국기 개혁은 민중들에게는 어떠했을까? 왕실은 개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민중에게 각종 세금을 부과하여 민중의 저항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농민전쟁이 좌절된 뒤에도 반봉건 반침략운동은 계속되었다. 제주에서는 1901년 이재수의 난을 찾을 수 있다. 목포 부두는 당시 부두 노동자들도 일본인 자본가에 맞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종로거리는 만민공동회가 열려서 민중이 스스로 나서서 정치현안을 토의하고 뜻을 모아가는 정치토론의 현장이 되었다. 따라서 민중의 정치적 각성과 정치참여를 어느 정도 실현한 반봉건, 반침략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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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이 체결된 뒤로부터는 이른바 통감정치를 통해서 식민체제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과 여기에 대한 우리의 저항으로서 두 계열, 곧 문화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을 중요하게 다룰 수 있다.
덕수궁 내 중명전은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던 곳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조약을 강탈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했다. 해외에 있던 우리의 공관이라든가 외교관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실질적인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은행은 1909년 한국 최초의 중앙발권은행으로 설립되었는데, 통감부 시기 동안 조선을 식민지사회로 개편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정책을 실시했다. 그 하나가 화폐정리 사업인데 일본화폐만을 사용하게 해서 조선의 화폐금융 체제를 일본경제에 예속시켜 나갔다. 재정정리사업의 경우도 징세체제를 근대적으로 바꾸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호구조사사업도 이 시기에 실시했는데 역시 마찬가지로 징세의 대상을 늘렸다. 그리고 주민세, 가옥세, 연초세 등 새로운 세금도 많이 늘려 나갔다. 이 시기 몇 년 사이의 재정규모를 비교해 보면 세 배 정도로 늘어났다고 할 정도로 식민지 경영을 위한 비용을 마련해 나갔던 것이다.
이 시기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으로는 계몽운동을 들 수 있는데 가장 적극적인 단체로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과 같은 언론과, 인물로서는 신채호를 들 수 있다. 일본에 대한 또 하나의 커다란 반대의 흐름은 의병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을사조약이 맺어진 뒤 많은 사람들, 다양한 계층들이 의병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특히 1907년 군대가 해산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는데, 해산된 군인들이 참여하면서 새로운 신식무기를 활용할 수 있었고 또 의병의 전술에 있어서도 유격전이라든가 다양한 형태의 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의병전쟁이 상당히 치열했던 것은 이것이 단순히 민족적 감정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따라 많은 민중들이 몰락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이 때 의병전쟁의 성격은 민족전쟁이자 농민전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호남지역을 들 수 있는데 이 지역이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다. 그것은 이 지역이 일본침탈에 따라서 농민들이 가장 많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장성에는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기삼연이 활동하였는데 읍내 공원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일본은 이러한 의병전쟁을 탄압하기 위해서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해서 의병들을 진압해 나갔다.
<일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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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지배를 받기 시작한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통치와 식민지체제, 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와 농민층의 몰락, 무단통치하의 민족운동, 특히 1919년 3.1운동 등이 중요한 문제이다.
한일합병 후 식민지가 되고 무단통치가 시작된다. 남산 일대에는 식민통치를 위한 기구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남산 위에는 합병초기 총독부가 있어서 천황 직속으로 모든 권한을 장악하였고, 현재 남산한옥마을의 위치에는 헌병대사령부가 있었는데, 특히 헌병경찰은 헌병과 보통경찰을 결합한 형태로서 치안뿐 아니라 행정상 역할, 범죄의 즉결처형, 민사소송 조종, 검열사업까지 도맡았으며, 우리 민족의 일상적인 생활까지 억눌렀다. 총독부 예하에는 억압, 수탈, 홍보 등 각종의 목적과 관련된 기구들이 있었고, 모든 실권은 일본인들이 장악했다.
일제는 폭압적인 무단통치와 더불어 조선인을 말잘듣는 식민지 노예로 만들려고 노예교육과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의 선전을 강화했다. 반면,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신문은 모두 폐간하고 조선인이 발행하는 출판물은 엄격히 검열해 출판물 역시 발행과 판매를 금지했다. 대신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같은 관제 어용신문을 발행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미화했다. 또 일제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실시해 조선인을 천황에게 충량한 신민으로 양성하고 일본 국민다운 품성을 함양하는 것을 식민교육의 목표로 내세웠다.
식민통치의 첫 경제정책은 식민지 경제구조를 형성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목포에는 아직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 남아 있어서 이 시기 경제정책을 엿볼 수 있다. 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는데, 토지를 정확히 조사하여 공정한 지세 부담, 소유권 보호, 토지 생산력 증진 등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국유지는 총독부토지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실질적인 농민토지들도 많이 편입되었고, 이러한 토지들은 일본인에게 싼값에 불하되었다. 그 결과 지주의 권한은 강화되었으나 농민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식민지시기 최대의 반일운동인 3.1운동은 탑골공원에 가면 최초의 함성을 들을 수 있다. 학생과 시민에 의해 폭발된 시위는 곧 전국으로 번져갔다. 가장 크게 일어난 지역 가운데 하나인 안성군 양성면에는 3.1운동기념비와 기념관이 있어서 지역 양상을 알 수 있다. 특히 식민지 농정의 가장 큰 피해자인 농민들은 지방의 군 단위에서 조직적으로 시위를 벌이고 시위양상도 점차 격화되었다. 농촌장시가 시위장소로 이용되었고 농민들도 점차 무장하여 면사무소, 군청, 경찰주재소 등을 공격하였다. 시위는 국외로도 번져나가 만주의 서북간도, 중국의 상해, 소련령의 시베리아와 연해주, 미주지역에서도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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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3.1운동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일제가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여러 가지 정책을 바꾸어나가는 모습과 여기에 저항하는 운동 양상을 다루고 있다.
3.1운동 뒤 일제는 무단통치 대신 문화정치라는 새로운 지배정책을 내놓았다. 문화통치기에 세워진 경성제대는 아직도 방송대 본부 바로 옆에 본관 건물이 남아있다. 당시 신임총독 사이토는 조선인의 자유와 민의를 반영하겠다고 하였으나 실제 식민지배는 강화되었다. 경찰의 숫자는 늘어났고 감시망도 강화되었다. 한편 3.1운동을 계기로 조선인의 민족성을 말살시키지 않고서는 식민지배가 어렵다고 판단한 일제는 민족분열정책을 조직적으로 획책하여 조선인 대지주와 자본가 등 상층계급을 식민지배 체제 안으로 끌어들여 민중과 분리하였다. 이에 개량주의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식민정책은 당연히 식민지모국을 위해 이루어졌다는 사례는 바로 산미증식계획에서 찾을 수 있다. 만경강 상류의 대아저수지는 그에 따라 건설되었다. 식민지에서의 쌀의 증산과 수타을 통해 저임금에 기초한 일본자본주의를 위해 값싼 쌀을 공급하고자 했던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의 결과 일본인 대지주의 수가 늘어난 사실은 만경강 주변의 일본인농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조선인 지주와 자작농의 수는 감소, 소작농의 수는 증가하였다. 증산된 쌀보다 더 많은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조선인들은 오히려 쌀 소비량이 줄어들고 값싼 이국쌀이나 만주산 좁쌀을 먹게 되었다.
목포 앞바다의 암태도소작쟁의는 농민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시 농민처지는 열악하였다. 소작료는 높아만 가고, 각종 공과금은 소작인에게 전가되었다. 농민들의 자구책으로서 농민단체가 출현하고, 소작쟁의, 수리조합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소작료 인하, 소작권 이동 반대, 동척이민 반대 등을 요구하였다. 암태도에서는 소작회를 결성하여 대지주를 상대로 비싼 소작료를 낮추는 싸움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지주를 두둔하는 일본경찰에 맞서 1년 가까이 싸워 결국 승리하였다. 부산부두에서는 처음으로 연대파업이었던 부산 부두노동자파업(1921)과, 북한땅 원산에서는 한 석유회사에서 발단이 되어 원산총파업(1929)으로 발전하였던 중요한 노동운동을 찾을 수 있다.
종로 YMCA회관에서 결성되었던 신간회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세력이 연합하여 만든 조직이었다. 사회주의사상이 도입되고 보급되었으며 노동, 농민운동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식민지 현실 인식에 따라 민족운동과 연대할 필요성, 그리고 한편으로는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자치운동을 제어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민족협동전선 문제가 논의되고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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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이후는 일제가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침략전쟁을 벌여나가고, 이를 위해 조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해 나가는 모습,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항일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식민지배의 최종단계는 조선민족을 말살하려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독립기념관에는 ‘내선일체’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1929년말부터 세계대공황에 따른 위기가 파급되었는데, 여기서 후발자본주의국가인 일본은 대륙침략과 군국주의 체제의 강화로 나아갔다. 그 결과 1931년 대륙침략(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전시체제의 하나로 후방기지였던 조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고, 마침내 조선민족의 민족성을 아예 없애버려 조선 민중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황국신민화정책을 폈다.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많은 물자와 인적자원을 조선으로부터 징발하였다. 전쟁을 도발?확대하면서 물자와 인적자원이 부족하자 조선으로부터 징발하였다. 전쟁인력을 위하여 특별지원병제, 학도지원병제, 징병제를 실시하였으며, 노동력을 위해 국민징용령으로 강제연행하였다. 심지어 여성들에 대해서도 정신대의 이름으로 동원하여 공장으로, 성노예로서 짓밟았는데 경기도 광주 퇴촌리에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살면서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전시체제 일제의 대륙침략과 함께 수탈과 탄압의 강도를 높여가자 국내 항일운동은 점차 존립기반을 잃고 지하화, 비합법화하거나 변질하였다. 그런 속에서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과 농민조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해외에서는 무장투쟁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중일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임정이 옮아간 중경에서는 광복군을 조직하여 직접 일본군과 싸우고자 하였다. 중국공산당의 해방구가 있던 화북지방에서는 조선독립동맹이 조선의용군을 조직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만주에서는 항일유격대가 활동하였으며 뒤에 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 개편하였는데 여기서도 국내 침공작전 등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해방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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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으로부터 1948년 정부수립까지의 3년간은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사실 해방은 모든 것의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대부분의 민중들은 기쁨에 차 있었지만 일제의 앞잡이나 일제에 협력하면서 성장한 자본가, 지주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속에서 사회혼란을 방지하고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려고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는 가장 활동적인 조직이었으며, 당시 치안과 식량대책 등을 담당하였는데, 얼마전 건국준비위원회가 사용하였던 건물(안국동 소재)이 헐려서 중요한 역사현장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노동자들은 일본인들이 시설을 파괴하고 물자를 빼돌리려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공장관리운동으로 이어져서 자본가들을 대신하여 자발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자치적 성격을 띠었다. 농민들도 일본인 소유의 토지를 접수하고 관리하는 활동을 벌여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소유의 농장에서 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농지를 관리하려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해방후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운동으로 모아져 나갔다. 그것은 무엇보다 식민지잔재의 여러 폐단을 해결하고 자주적 독립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남북한에 외세가 들어오면서 이같은 활동은 제약을 받았다. 또한 국내 정치세력을 극단적인 대립으로 몰고가는 데 기여한 모스크바 3상회의 후, 3상회의 결정의 후속조치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는데 그 현장이 덕수궁 석조전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결렬되고 말았으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주장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한편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트루만선언으로 냉전체제가 시작되면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수립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단선?단정에 대한 반대투쟁이 계속 일어났는데 특히 제주에서 치열하게 일어났다. 이른바 4.3사건은 제주 전역에서 그 비극의 현장을 찾아볼 수 있다. 김구 등은 단정 수립을 끝까지 막으려고 북한과 남북연석회의를 가졌다. 38선을 넘어 북행하는 길마다 민족의 염원이 서려있겠지만 이미 남북분단으로 기운 역사의 물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남북협상파들이 선거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5.10선거를 치르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북에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반도에서는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고 자주적 독립국가의 수립이라는 민족적 과제가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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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정부수립으로부터 시작된 제1공화국은 1960년 4월혁명으로 끝났다. 온 민족이 바랐던 통일된 독립국가 수립이 실패로 끝나고 남과 북에는 체제를 달리하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남북한 정부는 서로 정권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대립함에 따라 이념과 체제를 둘러싼 민족내부의 좌우갈등은 더욱 깊어갔다. 남북한 사이의 군사적 분쟁과 긴장도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1950년에 남한을 무력침략하여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치루는 비극을 낳았다. 한국전쟁은 민족상잔의 비극이자, 2차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자본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이 대결한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의 결과 500만명에 이르는 인명피해와 함께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흔적은 철원에 파괴된 채로 보존되어 있는 노동당사의 건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전쟁전의 경제침체에서 벗어나 세계 최강국으로 등장하였다. 일본은 전쟁과정에서 병참기지 역할을 하면서 경제를 부흥시키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남한은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반공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내부적으로는 전쟁에 따른 남북간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승만정권은 한국전쟁을 통해 더욱 강화된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자신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을 탄압하기도 하였다. 또 이승만정권은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는데, 바로 부산에서 직선제 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킨 발췌개헌(1952)과, 초대대통령에 대한 3선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의 사사오입개헌(1954) 등이 대표적인 예였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농지개혁과 귀속재산 불하 등 여러 경제정책을 단행하였다. 무상몰수?유상분배로 실시된 농지개혁은 봉건적 토지소유제도를 해체하여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시행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서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농촌경제를 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귀속재산 불하도 50년대 한국의 독점기업이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만, 이에 따른 특혜시비를 낳았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원조경제에 의존하여 어려운 경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미국의 원조경제는 한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한국의 경제체제를 대외의존적으로 만드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승만정권에 대해서는 동숭동 이화장에 전시된 자료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승만정권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 미국이 무상원조를 유상차관으로 바꾸면서 경제불황이 덮쳐 기업들이 문을 닫았고, 실업률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정권의 장기집권에 따른 정치적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였다.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운동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이는 4월혁명으로 발전하였다.
4월혁명은 이승만정권의 독재에 저항한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4월혁명은 비록 미완의 혁명이 되고 말았지만,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4월혁명의 참여자와 전개과정은 수유리 국립묘지와 부설기념관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3
1961년 5.16군사쿠데타에서 1979년 유신체제가 무너지는 시기를 또 하나의 시기로서 구분할 수 있다. 1960년 4월혁명에서 분출되었던 사회민주화의 열기는 5.16 군사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등장하면서 가라앉고 말았다. 박정희 군부세력은 등장하면서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 사회단체를 해산하고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등 억압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어 군부세력은 민정을 준비하면서 강력한 대통령중심제 헌법안을 마련하고 공화당을 창당하여 박정희를 대통령후보로 내세웠다. 박정희는 1963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박정희정권은 정치적 억압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을 억누르면서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였다. 박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어려운 경제를 회복하는 측면과 함께 군사쿠데타로 탄생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경제개발정책에 따라 한국은 60년대에 본격적인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지속하게 되었다. 박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미?일을 중심으로 한 국제분업체제에 밀접하게 엮이면서 진행되었다. 곧 60년대 경제개발정책은 한?미?일 삼각 안보체제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관계 속에서 한일국교는 재개되었고, 이는 일본자본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 문래동 공원의 박정희 흉상을 찾아보면서 박정권의 공과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정책은 기록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 시기 한국경제는 한강변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이른바 보릿고개로 불리던 만성적인 빈곤상태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경제성장에 따른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고 있었다. 또 경제개발에 따른 농촌의 이농현상,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부작용도 낳고 있었다. 나아가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독점대기업들은 국가의 보호 아래 차관 및 각종의 금융특혜를 받으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고, 이는 재벌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추풍령의 기념탑은 경제개발의 상징이었던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을 기념한 것이다.
1960년대 경제개발에 따른 급격한 산업화는 한편으로 대중들의 정치적 자각과 사회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생존권 옹호차원에서 시작된 대중들의 사회운동은 70년대 들어 점차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박정희정권은 독재와 장기집권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유신체제를 선포하여 억누르려고 하였다. 박정권은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국민들의 비판을 봉쇄하였지만,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박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은 더욱 확대되었고, 마침내 유신체제는 안으로부터 무너지기에 이르렀다.
4
1980년 이후 현대사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자. 한국사회는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 나라 안팎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였다. 국내적으로는 무엇보다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요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유신체제가 붕괴한 이후 ‘서울의 봄’으로 분출된 민주화의 열기는 신군부의 등장으로 한 때 가라앉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제5공화국 정권의 억압적인 통치 아래서도 계속 이어졌고, 이는 마침내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국민들은 6월민주항쟁에서 그 동안 줄기차게 요구하였던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보장받음으로써 사회민주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국제적으로 1980년대는 냉전체제의 해체라는 세계사적 전환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을 시작으로 사회주의권이 점차 붕괴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각축하던 세계질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6공화국 정권은 새로이 재편되는 국제정세를 활용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는 북방정책을 추진하였다. 냉전체제의 붕괴는 또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하고, 북한과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게 되었다. 광주 망월동과 자유공원의 기념관, 그리고 87년 6월민주항쟁의 중심지였던 명동성당 등을 통해서 이 시기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향한 염원을 찾을 수 있다.
1980년대 들어 국제질서가 재편되면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대립구도가 붕괴됨에 따라 경제가 국제문제의 중심이 되었다. 세계는 이제 경제문제를 놓고 국경없는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80년대에는 세계경제의 중심이 미국에서 일본, 독일 등으로 다극화하는 현상과 함께 산업의 고도화에 따라 정보통신 등 새로운 상품이 나타났다. 이에 지금까지 자유무역체제를 지탱해 온 가트체제로는 무역마찰을 해결하기 어렵게 되자, 우르과이 라운드가 등장하였다. 우르과이 라운드의 등장으로 한국경제는 개방화의 압력을 거세게 받게 되었다. 한국경제는 1986년에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의 ‘3저호황’을 맞이하여, 88년까지 3년 동안 연 12%가 넘는 고도성장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89년을 기점으로 다시 침체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한국사회는 군부 권위주의 독재와 민주화운동세력이 충돌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우리 사회는 민주화 사회로 이행해 왔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수많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질서가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했으며, 지역감정에 따른 대립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고도성장에 따른 부의 분배문제, 사회복지문제, 그리고 환경오염 문제도 충분히 해결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와 함께 최근 IMF 체제는 새로운 세기를 맞는 우리 사회의 커다란 과제로 짊어지게 되었다. 현대사에 관해서는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이 우리 현대사교육의 어려움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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