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막4:35-41,“위기를 극복하는 믿음”
4: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4: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1912년 4월 10일, 2,224명의 승객을 태우고 영국 사우스앰프턴을 출발하여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을 향해 가던 배가 있었습니다. 첫 출항이었던 이 배는 출항일로부터 5일이 지난 4월 15일, 자정을 넘긴 시간에 빙산을 들이받고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1,513명의 희생자를 내고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로 기록된 이 배의 이름은 “타이타닉호”입니다. 영화로도 제작이 되어 우리들의 가슴 속에 진한 감동을 선사했던 타이타닉호는 “신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는 영예로운 호칭과는 달리, “빙산”이라는 위기를 만나 맥없이 좌초되어 대서양 바다 깊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 속에서 바다 한 복판을 힘겹게 항해하는 몇 척의 배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 일행을 태운 이 배들은, 갈릴리 바다 한 복판에서, 큰 광풍을 만나 힘겨운 사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광풍으로 인한 세찬 파도가 배안까지 넘쳐 들어와 배는 침몰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이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왔기에, 그들을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최소한 3분의 1이 갈릴리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갈리리 바다를 삶의 무대로 삼아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던 그들에게 바다 한가운데서 만나는 폭풍과 심한 풍랑은 사실 늘 겪게 되는 일상사였습니다.
그들은 웬만해서는 두려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위기의 순간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평소 잘 훈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부들이었던 제자들조차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고 힘든 그런 절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하곤 합니다. 만일 인생이 항해라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교회”라는 한 배를 탄 선원들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꽃동산호”라는 배를 타고 인생이라는 긴 바다를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선지는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곳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때, 결코 순탄한 항해만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수많은 위험과 위기의 암초가 곳곳에서 모습을 숨긴 채, 우리의 항해를 방해하려고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가을 하늘처럼 항상 청명한 날씨가 보장된 천국 같은 삶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도 거친 바람과 폭우가 얼마든지 쏟아질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나 심각한 질병으로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갈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 번창하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돈을 믿고 맡겼던 은행들이 하루아침에 부실은행이 되어 영업정지를 당하는 바람에 평생 땀 흘려 모았던 재산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버리면 한강에 뛰어들 것이라며 애교스럽게 협박하던 애인이, 어느 날 길거리에서 만난 남자와 눈이 맞아 헌 고무신짝 버리듯 날 버리고 도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반드시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만 일어나라는 법은 없습니다. 몇 가지 매우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이와 비슷한 일들은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얼마든지 경험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실례를 구약의 의인 욥의 삶을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 의인 욥은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을 잃었을 뿐 아니라 사랑하던 10명의 자녀를 불의의 사고로 동시에 모두 잃는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몸마저 몹쓸 병에 들어 심한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이러한 일을 겪는 당사자가 된다면, 그것은 정말 감당하기 벅찬 삶의 위기일 것입니다. 혹시,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다 갑자기 광풍을 만나 급작스러운 위기에 직면해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인생의 위기와 고난은 결코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문제는 삶의 위기가 찾아올 때, 어떤 자세와 태도로 그 상황에 직면하고 대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은 그 위기의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었습니까?
37절과 3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일단 제자들은 배의 고물에서 쿠션을 베고 주무시고 계셨던 예수님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기 전에, 나름대로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그 상황을 헤쳐 나가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을 것입니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큰 소리를 질러 대며 뭐라고 다급하게 지시를 했을 겁니다. 어부가 아닌 다른 제자들은 바가지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배안까지 들어온 물을 퍼내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노를 젓는 제자들의 손놀림도 필사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헛수고였습니다. 상황은 조금도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 나빠지기만 합니다. 이러다 배는 파선되거나 침몰되어 모두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들이 최후에 택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까?
성경본문을 피상적으로 대충 읽어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도움의 손길을 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앞뒤 문맥을 고려하면서 주의깊게 살펴보면, 사실 결론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게 전혀 아닙니다. 도리어 그들은 예수님을 심하게 원망하고 야속하게 생각했습니다.
만약 성경이 글자가 아니라 음성으로 녹음되었다면, 38절에 제자들이 잠든 예수님을 깨우면서 한 말은 대강 이런 뉘앙스를 풍기었을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가 다 죽게 됐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잠이 오냐구요?”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사느냐, 죽느냐의 상황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꼴사납게 보였을 것입니다. 제자 된 그들에게 스승의 그와 같은 모습은 너무도 무책임하고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닌 이제까지의 시간들이 후회스럽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잠든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는 시편 121편 4절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 따지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쯤 되면 인간적으로, 제자들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자들의 입장이었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와 같은 제자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대해 깊은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3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께서는 일단 그 위기에서 제자들을 구출해 주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난폭해진 바람을 꾸짖으시고 성난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말씀하시니까, 바람과 바다가 고분하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한순간에 다시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과 사의 갈림길에 고군분투했던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능력에 모두가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얘들아,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피곤해서 깊이 잠든 바람에 너희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몰라봤구나! 얼마나 깜짝 놀랐니? 얼마나 무서웠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셔야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이셨다면,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을 하셨을 것 같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오히려 제자들을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4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궁금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 그럼 제자들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안 무서워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서워하는 감정,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며 말씀하신 이 “믿음”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급박한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했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해답이, 본문 35절 말씀에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4: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헬라어 원문으로 다섯 단어밖에 안 되는 예수님의 이 짤막한 몇 마디 말씀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시겠다고 말씀하셨으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바다가 넘쳐나도 반드시 건너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오늘 제자들의 마음 한 가운데 있었더라면, 그들은 아무리 광풍이 불고 파도가 넘쳐나는 위기의 순간에서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참 어렵게 구출해서 애굽을 탈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다 보니까 앞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습니까? 홍해였습니다.
때마침 뒤에는 바로가 보낸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앞은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를 향해, 애굽에서 자기들을 데리고 나온 걸 원망하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광야에서 죽느니, 차라리 애굽 사람을 섬기는 편이 더 낫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모세를 향한 것이 아니라,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께 대한 것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말 냉정하고 차분하게 생각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홍해 앞에서 애굽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게 하시려고, 그 10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까지 출애굽을 시키셨을까?”
여러분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이 질문에 자연스레 뭐라고 답을 하시겠습니까?
물론 “결코 아닙니다!”라고 답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리라는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그런데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 애굽 군사가 칼과 창을 들고 달려온다 해서 하나님의 그 약속과 계획이 좌절될 것 같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시면 반드시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 하나님은 아무도 못 말리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3절에서,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으며 후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한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어떻게 됐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위기의 순간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홍해 앞에서 느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려움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상실했을 때, 찾아온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광풍을 만나자 그들은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망각하고 무서워하며 주님을 불평하며 원망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기대하시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진심을 다해 말을 했는데, 상대방이 전혀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그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무척 불쾌하고 서운하지 않습니까?
뭐, 사람이야 워낙 믿을만한 대상이 못되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신뢰하지 못한다면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언짢으시겠습니까?
우리 꽃동산교회 성도님들은 아무리 하찮게 보이고 들리는 주님의 말씀일지라도 그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 인생의 위기는 우리의 외부 환경이 악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위기는 우리의 환경이 악화될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망각과 불신 이것이 우리 삶의 진짜 위기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인생의 절박한 위기라고 판단하는 순간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위기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41절에서, 예수님께서 광풍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자,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41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분명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41절에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그들은 아직도 자기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천지만물을 지으셨던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전혀 몰랐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주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아는 지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우리가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깊어지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음은 서로 함께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은 굉장히 좋은데, 주님을 아는 지식은 부족하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아는 지식은 깊은데,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지식과 정보의 사회”입니다. 정말 중요한 지식과 정보를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지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식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이스라엘의 최고 랍비의 제자로 율법을 배웠던 사도 바울은 자타가 공인하는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이후에 했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진정한 위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에 대해 잘 모르며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깊이 아는 지식과 믿음이 있으면 어떤 인생의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우리가 아는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로 인하여 그 위기를 슬기롭게, 능력 있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위기가 찾아올까봐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주님에 대해 많이 알기를 간구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고되지 않은 삶의 위기는 얼마든지 찾아옵니다. 그것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갈 때까지, 우리를 단련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믿음의 시련입니다.
그때에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면서 주님을 원망하기보다는 주님의 신실하신 약속과 말씀을 신뢰하며, 우리가 섬기고 믿는 주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알고 굳게 믿음으로 그와 같은 위기의 순간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슬기롭게 극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