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를 통해서 본 참 믿음 (창 6:9-12)
이 시간에는 “노아를 통해서 본 참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노아를 가리켜 흔히 인류의 중시조라고 부릅니다. 아담이 우리 인류의 시조이지만 인간이 범죄하여 노아 시대 홍수로 다 멸망하고 노아의 가정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노아와 아담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때 아담만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때 노아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노아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담은 깨끗한 세상에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악인들의 시체가 즐비한 세상에 혼자였습니다. 악인이 가득 찬 죄악 세상에 노아와 그의 기족들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럼 노아가 보여주는 참 믿음은 무엇일까요?
1. 참 믿음은 노아처럼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그랬습니다. 의인이란 죄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가 성경의 선언입니다. 전7:20에도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 하는 자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의인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의인이라는 말인 원어 차디크는 ‘올바르게 행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죄악 많은 세상에 노아는 의롭게 살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유대인의 미드라쉬 기록을 보면 노아 당시 사람들은 이런 불문율이 있었다고 합니다. 1. 진실은 말하지 말아라. 2. 만일 종노릇하거든 주인의 물건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훔쳐라. 3. 될 수 있는 대로 방탕을 즐겨라. 인생의 낙이 그런 것이다. 4. 주인을 미워할 기회가 생기면 지체하지 말고 즉시 미워하라. 5. 서로 사랑하라. 죄를 짓기 위하여 동료끼리 뭉치라. 그래서 누우면 음란하였고 앉으면 술을 마시고 서면 춤을 추는 온갖 범죄를 다하였습니다.
지금 세상도 그렇습니다. 이보다 더한 타락의 불문율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대중을 계몽해야 할 미디어에서도 기자들이 자꾸만 비정상적인 것들만 퍼뜨려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하는데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걱정됩니다. 그렇게 하여 자꾸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바뀌고 있습니다.
죄가 보편화 되면 사람들은 죄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갱글리뉴로파디(ganglineuropathy)라는 병이 있다고 합니다. 아파도 아픔을 모르는 병입니다. 런던에 살고 있는 4살 된 아기가 넘어져서 팔이 부러졌는데도 웃고만 있습니다. 웃으면서 어머니에게 “엄마! 나 팔 부러졌어!”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수술하여도 주사기로 찔러도 아픔을 모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무서운 병은 바로 죄에 대한 무감각증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딤전4:2)이라고 말했습니다.
2. 참 믿음이란 노아처럼 완전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9절에 “당세에 완전한 자라” 했습니다. 여기 노아의 완전이란 하나님의 완전이 아니라 힐난할만한 구석이 없이 완벽하고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창5:32에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했습니다. 미드라쉬 보면 노아는 498세에 결혼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노총각이 노아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죄악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고 산속에 들어가서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산속에서 혼자 사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는 그 모습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뜨거울 때 독신으로 살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이란 날마다 말씀 안에서 새로워져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해야 완전한 자입니다. 다윗이 완전한 것은 완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어디 계실까? 그것이 우리 고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종교의식보다 참 신앙을 원하십니다. 이처럼 더욱 온전한 참 믿음을 갖길 바랍니다.
3. 참 믿음이란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랬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암3:3에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그랬습니다. 뜻이 같아야 동행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노아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았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 음란한 도시가 망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노아시대, 소돔과 고모라, 폼페이 다 불구덩이로 들어갔습니다. 지난 번 필리핀에 화산이 폭발했을 때도 화산재가 그 주변에서 가장 음란한 곳으로만 날아가 폐허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지옥의 불구덩이입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 듣고 열심히 산꼭대기에 배를 만들었습니다. 길이가 300규빗 150M나 되는 축구장보다 더 큰 배를 만들었습니다.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배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순종했습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 어떤 죄악 풍파에도 견딜 수 있는 신앙의 배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로 충만해야 합니다. 지금 저의 날마다 설교가 이 방주 만들자는 것입니다.
4. 의를 전파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벧후2:5에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나 혼자만 선하게 사는 것이 의가 아닙니다. 남을 위해 염려하고 걱정하며 그들의 의를 챙겨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노아가 그랬습니다. 열심히 의를 전파하였습니다.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입니다.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외에는 결과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명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그의 의로움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혼자 의로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했고, 이사야도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6-17) 했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이 회개하고 주 앞에 돌아오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6:8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자기 부족을 알았기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노아처럼 의롭게 살고 완전하게 살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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