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마음을 지켜야 할 것인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오래 남는 것보다 쉬 사라지는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진정한 미(美)는 내면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외면적인 것에 우리가 얼마나 잘 속는가.
하나님의 평가 방법을 우리가 채택하는 일에는 또 얼마나 느린지 모른다.
신체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에 끌리기보다는 도덕적인 자질과 영적 은혜를 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몸을 치장하는 데에 그처럼 많은 관심과 시간과 돈을 들이기보다는 우리 영혼의 기능을 발전시키고 조절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슬프게도 인간들의 대부분은 마치 영혼이 그들에게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으며 입으로만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신다.”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보시며 그 욕구와 계획을 아시며 그 동기와 움직임을 보시며 그에 따라서 우리를 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어떤 성질이 있으며 어떤 거룩함과 의로움이 존재하며 어떤 지혜와 분별력이 담겨져 있으며 어떤 공의와 순수함이 있으며 어떤 긍휼과 자비를 품고 있는지 다 분별하신다. 이러한 성품을 주시는 은혜들이 살아서 우리에게 부은바 될 때 다음의 말씀은 성취되는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아 6:2)
거룩한 믿음과 다함없는 사랑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보다 하나님께 더 높이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이 가장 “값진 것”(벧전 3:4)이다.
우리의 신앙 고백이 진정한 것이냐 하는 여부는 주로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깊은 관심과 양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좋은 예가 열왕기하 10:31에 있다.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이 말씀은 그 앞의 구절에서 예후에 관해 말씀한 구절에 비추어볼 때 더 준엄하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 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4대를 지나리라 하시니라.”
예후는 부분적인 개혁만을 이루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르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아합이 장려하였던 바알 숭배는 미워하였지만 여로보암이 만들었던 황금 송아지는 그대로 용납하였다. 예후는 모든 악을 다 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독자여, 참된 회심은 추한 죄에서 돌이키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죄를 마음에서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우상도 용납하지 않으시며 또 우리가 용납해서도 안되므로 악을 버리는 데 어떤 주저도 있어서는 안된다. 예후는 부분적으로 성공하였으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멈추었다. 악은 제하였으나 선한 것을 행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율법 안에서 “전심을 다하여” 행하라고 하는 명령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삼가지 않는 자들이 곧 은혜가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크게 두려워하여야 한다. 성결의 원리가 마음속에 심어지게 되면 그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심중히 갈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노예의 두려움이 아닌 감사의 사랑으로, 억지가 아닌 자유로움으로, 경우에 따라서가 아니라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려고 소원하는 것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당신에게 마음을 주신 이가 거하시는 장소인 마음을 열심히 지켜야 한다. 최선의 경계 상태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어느 곳이든 뚫고 들어오려고 하는 원수가 있을 뿐 아니라 다스리는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내부의 반역자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 히브리어의 문자적 의미는 “무엇보다도”라고 하는 뜻이다. 제 아무리 주의한다고 하여도 외면적인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그 무엇보다도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외면적인 삶은 사람의 목적에 나타나지만 마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시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판이나 몸이나 토지나 돈이나 그 무엇보다도 마음을 더 힘써 “지키고” 보존하여야 한다.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나 교만하게 하는 것이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모두 피하여야 하며 그대로 품고 있으면 전갈이 되어 깨어 나올 악한 것들은 발견하는 즉시 파괴하여 열심과 기도로 어떤 악한 욕망도 마음을 지배하거나 마음 안에 남지 못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환경과 상황에 크게 기대를 거는 일이 많다.
얼마간이라도 부유하여지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도 하며 가난과 곤궁이 주는 연단의 과정을 마치면 잘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내서 은퇴하여 홀로 조용히 있을 수 있다면 자기의 영성이 더 계발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며 서로 모여 조직을 만들고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더 많이 가지게 될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독자여, 하나님을 보다 더 잘 섬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지금 당신에게 허락하신 자리에 만족하며 현실 속에서 “더 나은 마음을 가지는” 일이다.
상황의 이점을 취한다든지 불합리함을 극복한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뿌리박고 있는 바탕을 굳게 하며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라.”(마 12:33) 마음을 바르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곧 모든 환경 위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는가? 에디오피아인이 그 피부색을 변하게 할 수 있으며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마음과 본래의 성품을 혼동함으로서 스스로 어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키고 있는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두 성품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보니 그리스도인은 두 성품의 바탕위에 존재하는 한 인격임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이 두가지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지키라고 명하신다(롬 10:10).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성품을 “찢으라”(욜 2:13)고 말씀하시지 않고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신 10:10)고 말씀하시며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명하신다.
다른 것 아닌 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마음은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핵심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음을 개선하고 지켜야 할 책임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그 상태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차라리 행성의 항로를 바꾸는 편이 쉬울 것이라고 설득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사단이다.
인간의 속에 있는 육은 이 거짓말에 쉽게 동의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거듭나서 자기 앞에 성경의 말씀을 놓고 있는 사람은 그같은 거짓말에 개의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큰 일을 얼마나 게을리하여 왔는가를 슬퍼하면서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마땅히 자키지 못한 비참한 실패를 애통해 하면서 그러면서도 더 잘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자기의 임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그 임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날마다 은혜를 간구하게 되며 요구받은 일이 어렵고 중하다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더욱 열심히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신 사명을 다하려는 사람은 자원하는 마음(출 35:5)을 가지도록 힘써야 하며 이 마음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해서가 아닌 기쁘게 행동하도록 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성심의 마음이며(대상 29:9), 진실되고 진정한 곧은 마음이며(대하 34:26), 굳고 완악한 마음이 아닌 순종하는 부드러운 마음이다. “상한” 마음이며(시 34:18) 모든 실패와 죄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이다.
“일심”의 마음이며(시 86:11) 모든 사모함의 중심이 하나님께만 있는 마음이다.
“넓혀진” 마음이며(시 119:32) 성경의 모든 부분 부분을 다 기뻐하며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건강한” 마음이며(잠 14:30) 교훈을 듣고 행함에 있어서 빠른 마음이다.
“즐거운” 마음이며(잠 15:15) 항상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마음이다. “청결한” 마음이며(마 5:8) 모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착하고 좋은” 마음이며(눅 8:15) 죄악과 위선에서 벗어나 말씀에 의하여 자기를 깊이 살펴보기 원하는 마음이다. “성실한” 마음이며(엡 6:5)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참” 마음이며(히 10:22) 하나님께 관한 모든 일에 있어서 진실된 마음이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마음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항상 요구되는 임무이다. 이 일을 회피할 수 있는 시간이나 삶의 상황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마음의 경계를 요구하는 특별한 때와 심각한 시간이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신 이 일을 올바르게 성취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도움이 어떤 것인가를 지적할 수 있도록 위로부터의 도움을 간구하면서 앞서 말한 특별한 경우 몇 가지를 깊이 생각하고자 한다. 일반적인 원리는 언제나 필요하고 도움이 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그 원리를 어떻게 적용하여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 더 깊고 세밀한 생각이 필요하다. 오늘날 수많은 사역에서 심각한 결함을 초래하는 이유는 이처럼 일반적인 원리 이상의 분명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1. 성공할 때.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일시적으로 풍성한 축복의 은혜를 받을 때, 그 때 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마음을 더욱 부지런히 지켜야 할 시급한 이유가 있다. 성공하고 번성할 때 인간은 점차 부주의하고 교만하고 세상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경고를 받았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신 6:11-12)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은 이 훈계의 말씀을 삼가지 아니하였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이 많이 들어 있다. 성경은 웃시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대하 26:16) 두로의 왕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5) 또 이스라엘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저희가 견고한 성들과 기름진 땅을 취하고 모든 아름다운 물건을 채운 집과 파서 만든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허다한 과목을 차지하여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의 큰 복을 즐겼사오나 저희가 오히려 순종치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뒤에 두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크게 교만하게 행하였나이다.”(느 9:25-26) 또 다시 말씀하신다.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호 8:4)
위의 구절들을 읽을 때 참으로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보다 더 슬픈 것은 이 말씀들이 오늘날에도 비극적으로 되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 심지어는 “좋은 시절”을 구가하며 입으로만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세상적인 것으로 가득찬 마음, 육의 탐닉, 무절제한 죄 이런 것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경건을 실천하는 자들은 점점 사라져 버리고 자기를 부정하는 자들도 사라져 가며 탐욕과 쾌락과 방탕함이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대다수에게도 편만하여 있다.
이들의 죄가 크다고 하기 보다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의 죄가 더욱 크다.
이 설교자들은 경고하고 경책하고 책망하여 자기가 맡은 양들에게 절제와 검약의 본보기를 보여 주기는 커녕 자기 청중들의 방치할 수 없는 죄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는 죄를 범하고 있으며 스스로 무분별한 금전의 낭비와 세상 정욕의 탐닉을 장려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성공의 시기에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 마음을 지킬 수 있겠는가?
첫째로, 번영의 때에 따라오는 위험하고 올무를 놓는 유혹을 심각하게 살펴야 한다. 세상적 성공과 쾌락 가운데 사는 사람중에 영원한 파멸에서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 불과 소수의 사람들의 고난의 막대기를 통해 천국의 배에 오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부와 안일의 방석이 깔린 편안한 마차를 타고 지옥으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분명히 기억할 것은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세상적인 성공의 때에 타락하고 있다는 슬픈 사실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곤경에 처하였을 때는 “여호와의 성물”(렘 2:3)이 되었으나 가나안의 기름진 것을 먹을 때에는 “우리는 놓였으니 주께로 가지 않겠다”(렘 2:31)고 교만하였다.
둘째로,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치심치 말지어다”(시 62:10)하신 말씀을 삼갈 수 있는 은혜를 부지런히 구하여야 한다. 이같은 재물은 당신을 시험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재물은 가장 불확실한 것이며 종종 스스로 날개를 달고 휙 달아나 버리기도 하며 아무리 잘 해도 영혼의 만족을 줄 수 없으며 사용하여 없어질 뿐이다.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은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내적 은혜로 우리를 평가하신는 것이지 외적인 소유로 평가하시지는 않는다. “각 나라 사람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신다.”(행 10:35)
셋째로, 두려운 회계의 날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 때 우리가 받은 은혜에 따라서 회계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2. 역경의 때.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오랫동안 계획들을 틀어 버리고 우리의 외면적인 편안함을 날려 보낼 때, 그 때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각의 마음을 살피고 마음을 부지런히 지켜서 하나님께 원망의 대답을 하거나 그의 손아래에서 낙심하지 않도록 할 시급한 이유가 있다.
욥은 인내의 본보기이지만 그의 마음은 고난으로 인해 안정을 잃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시련을 당할 때 마음이 어그러졌다. 광야에서 식량이 떨어지자 홍해에서 기적적으로 애굽 군대에서 구원을 받아 그토록 전심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던 이스라엘은 마침내 불평하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폭풍 가운데서 마음의 평온을 지키며 육체의 고통이 많을 때 영혼을 아름답게 지키며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많은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동료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당할 때 그를 도울 수 있는 길은 먼저 이같은 상반된 섭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성실하게 자기 백성의 영혼위에 예정하신 사랑을 베풀고 계신 것과 위대한 계획을 수행하고 계신 것과 궁극적으로는 성화케 하시는 수단으로서 바로 이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예정을 입어 이루어 진다(엡 1:11).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 8:28)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이같은 복된 사실에 의존할 때 고통받는 당신의 가슴은 놀랍게도 평온을 찾으며 낙심하던 마음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속한 가련한 인생은 “모든 것이 바탕부터 허물어져 버렸다”고 탄식하지만 성도는 그와 반대가 된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이시며, “영원히 붙드시는 팔”을 여전히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아래에 있으면서도 그토록 조급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에 무지하거나 이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믿음이 작용하게 되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도 “온전히 기쁘게 여기게”(약 1:12) 된다. 왜 그런가? 시험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헛된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이 떠나게 하고 교만과 육신적 평안을 깨뜨려 우리를 정련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 대하여 사랑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면 어떻게 그분에게 화를 내겠는가? 지금 당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토록 쓰라린 실망이 결국은 감추어진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찬양을 발하게 될 것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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