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신약개론!!

[스크랩] 신약개론 연구

하나님아들 2014. 3. 8. 19:09

 

 

신약개론 연구

 

 

01. 신약개론

02. 신약에 사용된 구약

03. 복음서개론

04. 신약서신개론

 

01. 신약개론

 

 

기독교 경전에서 신약과 구약의 관계는 매우 독특하다. 힌두교 경전에는 고대의 다양한 전승들이 아무런 구별 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은, 예수(이사)를 포함하여,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회교도들은 성경을 거룩한 책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현재 형태의 성경에 어떠한 권위도 부여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신약과 구약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다양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성경의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한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역사의 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이전에 행하신 일과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에 신약은 구약의 인용으로 가득 차 있고 또 구약을 근거로 쓴 것으로 보이는 구절로 가득 차 있다.

 

다른 한편,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초기 기독교 교회의 삶을 기록한 책들이 구약보다 더 높은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새롭게 이루어진 언약(또는 계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전에 맺은 언약을 "옛" 것으로 만든다(히 9:11-15).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구약을 뜻했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을 그리스도에 비추어 연구하고 이해하였다(행 17:11; 눅 24:44-45).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할 때 구약의 언어를 빌려 썼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최고 정점을 이룬 하나님의 목적을 구약에서 추적하였다.

 

구약과 신약의 비교

 

구약과 신약이 기독교 경전에서는 한 권으로 묶여 있으나, 사실 서로 굉장히 다른 책이다. 구약은 히브리어(아람어로 쓰인 부분도 있으나 얼마 되지 않는다)로 기록되어 있고, 신약은 다양한 문체의 그리스어로 쓰여 있는데 신약의 그리스어는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이 쓰던 평민적인 그리스어였다. 그렇지만 70인역본에서 쓰여진 그리스어가 사용된 흔적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구약의 여러 부분들은 최소한 천 년 이상을 걸치면서 기록되었다. 그러나 신약은 단기간에 기록되었다. 신약이 기록된 과정은 시간적으로 볼 때 「데살로니가전서」가 쓰여진 주후 50여년 경에 시작해서 70여년 정도가 걸렸다. 예수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사상과 행동이 놀라울 정도로 빨리 발전하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신약에서 추적해 볼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이 기록된 시간은 양적으로 서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에서 구약과 같은 다양한 문헌을 기대할 수도, 찾아볼 수도 없다. 신약에는 시로 된 구절이 드물다. 그 중 몇 개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찬양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구약의 시편이나 예언서에 나오는 시와 같은 부분은 전혀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약의 복음서와 같은 것을 구약이나 다른 고대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신약의 본문은 구약의 본문 상태와는 다르게 우리에게 전승되었다. 달리 말해, 구약의 본문은 정형화된(표준화된)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 전달 과정은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들의 주된 관심은 자신들이 전승받은 본문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승받은 본문이 이미 이해할 수 없게 되었거나, 본문 가운데 탈락된 곳이 있더라도 그대로 보존하였던 것이다. 신약은, 또는 그 가운데 일부가, 다양한 시대와 질(質)로 이루어진 약 4천여 개의 필사본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 가운데 약 2백여 개의 필사본은 대체로 완벽하다. 가장 오래된 신약 필사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작성되었고, 전문적인 필사가들이 작성한 경우는 드물다. 이 필사본들을 다른 필사본들과 세심하게 비교해 봄으로써 원문에 매우 근접하게 접근하는 일이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들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며, 아울러 다른 본문 전승들 간에 일치되는 본문 형태에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필사본의 수는 필사본의 나이와 질보다 덜 중요하다.

 

신약의 세계

 

신약이 쓰여진 기간은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때였다. 로마제국은 주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로마는 때로 권한을 해당 지역의 지배자들에게 위임하였는데, 특별히 헤롯 왕가에 위임한 것은 주목받을 만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팔레스틴에서는 로마 관리가 다스렸다. 본디오 빌라도(유대 총독 주후 26-36년), 벨릭스(총독 주후 52-60년; 행 23:23-24:27을 보라) 그리고 그의 후계자 베스도(행 25-26장) 등이 로마가 파송한 관리였다.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사이의 긴장이 헤롯 왕가와 로마 관리들의 잔학성으로 증폭되었다. 그리고 유대인의 전통과 신앙을 이교국인 로마가 제대로 이해하거나 존중하지 못함으로 인해서도 갈등은 증폭되었다. 열심당과 같은 저항운동이 활동을 강화하였고, 마침내 주후 66년에 반란이 일어났고, 주후 70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주후 70년에 로마군인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함으로써 반란은 평정되었다. 이와 같은 파국은 유대교에 전환점이 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을 떠나 디아스포라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유대교의 중심이 성전에서 회당으로 바뀌었고, 그와 동시에 유대인들은 이제 경전의 백성이 되었다(히브리어 성경이 정경으로 최종 확정된 것은 주후 1세기 말 경이었다). 신약의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환난의 때에 기독교에 대한 주요 위협이 로마보다는 유대교로부터 왔음을 느끼고 있었다. 행 8:1-2를 보면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을 이곳 저곳으로 흩어버린 핍박이 로마인들보다는 유대교인들에게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누가와 바울은 기독교를, 공감을 나타내는 로마인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애쓴다(「요한계시록」의 저자와는 반대되는 경우이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에게 있어서 로마는, 당시 유대교 저술가들의 글에도 나타나 있듯이, 악의 화신이었다). 로마 관리들이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한 때는 신약이 쓰여지던 끝 무렵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인들과는 달리 "합법화된 종교"에 부여되는 로마법의 특별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였다. 신약 가운데 일부, 특별히 「요한복음」은 반 셈족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신약이 마무리되기 오래 전에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분열이 완전히 이루어졌고, 그 분열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신약은 대체로 기독교 유대인들에 의해 쓰여졌다. 이들은 예수를 거부한 유대인들을 자연히 "그들"로 생각했고 자신들을 "우리"로 불렀다. 물론 예수와 그의 첫 제자들이 유대인들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셈족에 대한 핍박이 끝날 무렵, 신약 시대에는 기독교인들이 희생자가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엄청난 시련에 맞서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했다. 그러한 상황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서로 긴밀하게 단결하였고, 그리스도를 더욱 굳건히 붙들게 되었다.

 

정경이 된 신약

 

신약의 책들이 쓰여진 기간은 비교적 짧다. 그러나 신약이 정경으로서, 즉 참된 기독교를 가늠할 수 있는 규범이나 규칙을 제공하는 정경으로서 인정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정경화의 과정은 바울 서신의 수집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바울 서신 가운데 몇 개는 한 교회 이상에서 읽혀지고 있었다(골 4:16; 살전 5:27; 「에베소서」에 대한 개론도 보라). 공관복음서, 「요한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다른 서신들과 「요한계시록」이 지중해 지역의 동쪽과 서쪽에 있던 교회들로부터 점차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주후 4세기 후반에 신약이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이 오랜 동안 기독교 교회는 안과 밖의 압력에 시달렸다. 로마 당국이, 예수를 주로 믿는 기독교인들은 황제에게 충성할 수 없다며, 교회를 핍박하였다. 다른 한편 수많은 글들이 유포되고 있었는데 저마다 예수와 기독교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나타냈다. 따라서 어느 것이 권위가 있는가를 결정함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야 했다. 예를 들어 사도가 저자인 것, 기독교 교회 안에서 널리 인정된 것 등이 고려 대상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공통된 믿음을 가장 잘 대표하고 그 믿음을 가장 잘 양육해 주었다고 여겨지는 저작들과 성령의 권위로 자신들에게 말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저작들을 엄선하였다.

 

신약의 구분

 

신약 안에서는 사복음서가 으뜸을 차지한다. 물론 사복음서가 신약에서 가장 오래된 저작은 아니다. 그러나 사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비롯된 기독교의 기원을 증언하고 있다(복음서 개론은 공관복음서 사이의 관계를 논하며, 「요한복음」에 대한 개론은 요한복음의 특수한 성격을 기술한다).

 

누가의 두 번째 저작인 「사도행전」은 예수의 승천으로부터 바울의 로마 도착까지의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종파로부터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포용하는 교회로 발전해 간 단계들을 기술한다. 이 놀라운 변화와 그로 인해 발생된 긴장은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 그리고 다른 서신에서 중요한 주제이다(특히 롬 9:1-5를 보라). 이 서신들은 신약에서 가장 일찍 쓰여진 것들(「데살로니가전서」)과 가장 나중에 쓰여진 것들(「베드로후서」)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것들은 몇 명의 다른 저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다. 세 권의 책은 특별한 경우이다. 「요한1서」는 편지 형식을 취하지 않고, 「야고보서」는 다른 편지처럼 끝나지 않으며 「히브리서」는 편지에 보통 들어 있는 인사말이 빠져 있다.

 

구약에서 「에스겔」, 「스가랴」, 「다니엘」로 대표되는 묵시문학 전통이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전개된다. 그것은 기독교가 우주적인 전쟁 한가운데 참여하고 있음을 묘사한다. 이 전쟁의 끝에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은 승리하며 악은 파멸되고,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된다. 이런 다양한 신약 책들이 쓰여진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간략히 말해 본다면, 이런 책들이 쓰여진 목적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서이며, 핍박받는 기독교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기독교인들 사이의 불협화음을 해결하고, 기독교를 이웃에게 전하며, 예수와 기독교에 대해 잘못되거나 옳지 않은 생각들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신약의 책들은 오늘날도 여전히 이 목적을 완수하고 있다.

 

 

02. 신약에 사용된 구약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1세기 기독교인들이 채택해서 쓴 성경이 유대교 안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유대교 문헌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못 된다. 2세기에 접어들자 점차로 기독교인들도 자신들의 글 가운데 몇 개는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글들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의 첫 성경은 유대교 문헌이었다.

 

그런데 유대교 문헌 가운데 어떤 것들이 초기 기독교 성경에 포함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확신 있게 말하기가 어렵다. *율법, 곧 모세 오경(「창세기」 - 「신명기」)은 모든 유대인들이 인정하였다. *예언서는 대다수의 유대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사마리아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만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만이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세 번째 문서군(群)인 *성문서("성경책 각 권의 이름과 순서"를 보라)도 널리 인정되었다. 그러나 권위를 인정받는 책들의 정확한 수는 기독교 교회가 별개의 집단으로 등장했을 때에도 공식적으로 결정된 바 없었다.

 

구약의 그리스어 역본인 *70인역본은 *그리스도 탄생 200여년 전에 이집트에서 만들어졌다. 70인역본에는 히브리어 성경에 없는 책도 들어 있다. 이 책들은, 오늘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경에 있는 *외경과 대부분 일치하며, 동방교회에서도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70인역본이 신약 저자들에 의해 폭넓게 이용된 번역본임에도 불구하고, 신약 저자들은 어디에서도 외경을 성경으로 인용하지 않는다.

 

최초의 기독교인들의 대다수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교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새로운 관점과 시각으로 읽었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교 성경을 *메시야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약속의 성취, 그리고 교회의 탄생이라는 관점에서 읽었다. 우리는 구약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신약의 책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바울 서신은 구약의 메아리로 가득 차 있다. 뿐만 아니라 거의 백 개나 되는 직접 인용구가 들어 있는데, 이 사실은 바울 서신을 직접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구약 인용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을 인용할 경우 "기록된 바" 또는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일어났다"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자신들이 구약을 인용하고 있음을 종종 나타냈다. 그러나 때로 그들은 인용구 앞에 그러한 표현을 쓰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원래의 독자들이 인용구임을 알아차릴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70인역본 인용

 

대다수의 1세기 기독교인들은 구약을 70인역본으로 읽었으며, 신약 저자들 대다수가 이 역본에서 인용하거나 쉽게 풀어 썼다. 때로 70인역본은 구약 표준 히브리어 본문(*마소라 본문)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70인역본을 번역했던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본문을 상당히 자유롭게 번역하였고, 그 결과 그리스어 번역본은 마소라 본문과 현격한 차이가 난다. 신약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70인역본에서 인용하였다. 결과적으로 구약의 인용구가 구약에 있는 상응하는 구절과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때에는 신약 저자들이 기억에 의지해 부정확하게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로 70인역본에서 인용을 하였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본문과 다르게 쓰여 있는 곳이 있다.

 

예를 들어 보면, 한 주석가는 바울이 「로마서」에 58개의 구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가운데 히브리어 구약과 70인역본이 일치하는 구절은 25개이다. 나머지 33개 가운데 바울이 70인역본과 정확하게 일치되게 인용한 것은 9개이고, 18개의 다른 구절에서는 바울의 인용구가 히브리어 본문보다는 그리스어 역본에 더 가깝게 되어 있다.

 

행 15:16-18과 히 10:15의 두 가지 예를 들어 그 문제를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행 15장에 보면 초기 교회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만나 유대교의 정결법을 기독교인이 된 *이방인이 지켜야 하는지의 문제를 논한다. 야고보는 구약 암 9:11-12(70인역본)를 인용해서 하나님이 이방인을 *불러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음을 증명한다. 70인역본의 암 9:11-12는 다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다윗 왕국을 다시 회복시키고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다시 강성케 할 것이며 … '그러므로 열방이 나에게 올 것이요, 내가 나의 백성으로 부른 모든 이방인도 올 것이라.'"

 

히브리어 본문 암 9:11-12는 70인역본과 다르게 되어 있다.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히브리어 본문에 따르면, 아모스는 사실 이방인들이 기꺼이 하나님께 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선언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이 다윗 왕의 시대처럼 다시 강성케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스라엘은 *에돔 땅을 다시 정복할 것이며 전에 다윗 왕국에 속했던 주변 국가도 다시 정복할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에 보면, "에돔은 회복된 이스라엘 왕국이 다시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70인역본의 번역자는 이 구절에서 "에돔"을 "아담"(=사람)으로 읽었고, 따라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올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또 다른 예로 히 10:5가 있다. 이 구절은 70인역본을 인용한 것인데 히브리어 본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시 40:6을 인용하여 예수의 말씀으로 바꾼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몸을 예비하셨도다.

 

시 40:6의 히브리어 본문은 다르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러므로 신약을 읽는 독자들이 70인역본의 인용구, 쉽게 풀어 쓴 구절, 70인역본 구약에 있는 구절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 등을 알게 하고, 또 히브리어 본문과 차이가 있는 곳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본문 아래에 설명을 두었다.

 

마소라 본문 인용

 

신약 저자들이 마소라 본문에서 직접 인용을 하였을 때에도, 그들은 항상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물론 그들이 사용한 해석 방법은 당시에 쓰이던 방법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은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마 2:15)는 구절을 예수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 인용한다. 예수는 *헤롯 왕이 죽자 부모와 함께 애굽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호 11:1에 보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구원하였던 것이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구약의 본문을 새롭게 해석했는데, 곧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의 빛으로 본문을 비추었던 것이다.

 

신약 저자들은 때로 구약을 한 곳에서만 인용하지 않고 여러 곳에서 인용해 쓰기도 하였다(예를 들어, 롬 3:10-18에는 여러 곳에서 인용한 구약 구절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쓰이고 있다). 그들은 또 구약을 한 곳에서만 인용한 것처럼 쓰기도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여러 곳에서 인용해 쓴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막 1:2-3을 보라. 2절과 3절 모두 「이사야」의 글로 인용하고 있으나, 사실 2절은 「말라기」를 인용한 것이고 3절만이 「이사야」에서 인용한 것이다).

 

구약이 신약에 끼친 일반적 영향

 

구약이 신약에 끼친 영향은 직접인용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다. 신약에는 구약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닐지라도 구약에서 발췌된 것으로 추측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히 11:36을 보면 구약 본문을 토대로 쓴 것이 분명하다. 요일 3:12에서 가인과 아벨은 창 4장을 암시한다. 구약은 1세기 기독교 교회가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하나님의 본성, 죄, *구원, 용서, 메시야 등과 같은 개념들은 모두 구약에 근거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구약은 특별히 예수의 생애와 죽음이 지닌 의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예를 들어, 막 12:35에 인용된 시 110:1; 행 2:34-35; 고전 15:25; 히 1:13; 신약에 자주 나오는 사 53장 등).

 

「히브리서」의 전체 주제도 구약에 있는 희생제도의 배경을 알 때에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신약의 윤리적 가르침도 대개가 구약의 영향을 받고 있다(예를 들어, 롬 12:16,19-20; 엡 4:25-26; 6:2-3). 우리는 하나님을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막 12:30-31)도 신 6:4-5와 레 19:18에 근거한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바울 서신(롬 13:9; 갈 5:14)과 약 2:8에서도 나타난다.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이 예수의 탄생과 교회의 등장으로 성취되었다고 믿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옛적에 주신 언약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구약이 쓰여진 것도 사실은 기독교인들을 위해 쓰여진 것이었다고 한다(롬 15:4; 딤후 3:16; 히 3:13과 벧전 1:1-12를 보라). 그들은, *성령이 그랬던 것처럼(히 10:15-17을 보라), 구약의 선지자들과 저자들이 예수에 대해 예언을 하였고(롬 1:2를 보라), 구약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예수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믿었다(히 1:5-13을 보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유대교의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고후 3:12-18을 보라).

 

 

03. 복음서개론

 

 

"복음"이라는 단어는 "기쁜 소식"을 뜻하는 그리스어 낱말을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때로는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의 승리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신약에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을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는 분이다. 이 구원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예수는 고향인 나사렛의 회당에서 사 61:1-2를 읽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종을 택한 후에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 종을 파송한다는 내용이다(눅 4:18-19).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로 시작된다(막 1:1).

 

기쁜 소식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진 메시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그 출발점부터 역동적이었다. 사도들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디든지 가서 이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제인가부터 "복음"이라는 단어는 신약에 있는 사복음서의 제목으로 쓰이게 되었다. 사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르침, 행위, 죽음, 부활에 대해 말한다. 복음서는 예수가 사역하면서 말하고 행한 것을 목격한 증인처럼 말하고 있지 않다. 예수의 사역은 기껏해야 1년 반이나 3년이었다. 다시 말해 복음서는 예수가 행한 사건들의 정확한 시간이나 장소에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아울러 복음서는 예수가 말한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기록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복음서를 읽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복음서 가운데 두 세 권만 읽어 보면 동일한 사건인데도 예수의 행위와 말씀이 서로 다르게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예를 들어, 백부장 하인의 치유 사건을 비교해 보라. 마 8:5-13과 눅 7:1-10)

 

이런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행위와 가르침은 한 번에 완성된 형태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형과 부활은 주후 33년 경에 일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이 지금의 형태로 쓰여졌을 때는 이미 35년여 세월이 경과하였던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를 기록한 자료들은 「마가복음」보다 먼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자료들은 나중에 복음서로 흡수되었다. 예수의 행적을 수록한 자료들은 적어도 한 세대 동안 구전으로 전승되었다.

 

이 기간에 자료의 선별작업이 이루어졌다. 전승자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선별하고 편집하였고, 초기 교회 공동체도 그러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모두 아람어로 가르쳤다(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도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록된 문서 자료는 모두 그리스어로 되어 있고, 아람어에서 번역된 흔적이 있다.

 

복음서의 형성 과정

 

복음서는 기독교 교회의 신앙의 산물이며 독자의 신앙을 굳세게 하고 감화를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요 20:30-31). 복음의 첫 선포로부터 오늘날의 기록된 복음서로 발전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적해 볼 수 있다.

 

· 사도들과 목격자들은 로마 제국을 이곳 저곳 다니면서 기쁜 소식을 입으로 전하였다.

 

· 별개의 사건들과 이야기들이 다양한 형태로 모아졌고,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수집한 글들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유포되기 시작했다.

 

· 이 수집록은 곧 보존되었으며(우리는 그 시기를 알지 못한다), 문서 형태로 전승되었다. 이 시기는 특히 목격자들이 사망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사복음서가 만들어지기 전에, 최소한 한 개 정도의 기록된 문서가 널리 유포되고 있었고, 결국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저자들에 의해 일차 자료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 쓰인 언어는 그리스어였다. 이 문서의 사본은 전하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사이에 있는 유사점들(또는 "병행구", 여기서는 / 표시로 병행구를 나타낸다)을 설명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 문서가 존재했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문서는 보통 "Q"라고 불린다. Q는 독일어 단어 'Quelle'의 첫 글자에서 따온 것이며, "자료"를 뜻하는 낱말이다(뒤에 나오는 "공관복음서" 설명 부분을 보라). 마침내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이 주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쓰여졌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80년대에, 그리고 「요한복음」은 주후 95년 경에 쓰여졌다. (어떤 학자들은 기록 연대를 다르게 잡는다).

 

복음서의 메시지

 

복음서의 저자들은 단순히 글을 베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자료를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일관되고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만들어 낸 재능 있는 저자들이었다. 물론 메시지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들은 각기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자료를 선택하고 각색해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복음서는 품격 있는 고전 그리스어로 쓰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코이네'라 불리는 그리스어, 즉 평민들이 당시에 쓰던 언어로 기록되었다. '코이네' 그리스어는 1세기의 로마 제국에서 누구나 이해하는 언어였다. 복음서의 언어는 또한 히브리어 문장 구조와 70인역본(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초기 기독교인들의 성경으로 쓰였다)에 있는 표현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전기를 쓰고자 하지 않았다(단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이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한 사건을 몇 개 기록하고 있다). 사복음서는 예수의 공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의 경우 본문의 3분의 1 이상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11:1-11)과 부활(16:1-8)이 이루어진 마지막 한 주간을 다룬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지닌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복음서에 있어서 그 외의 내용은 다 이차적일 뿐이다.

 

공관복음서

 

신약의 첫 세 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서"로 불린다. 왜냐하면 이 세 복음서는 모두 동일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의 관점을 보려면 「요한복음」의 개론을 보라).

 

사복음서의 모든 자료를 100이라는 숫자로 표시할 경우, 다음 목록은 복음서들 간의 일치점과 차이점이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낸다. A란은 최소한 다른 한 복음서와 일치되는 자료의 비율을 나타내고, B란은 각 복음서에만 나오는 자료의 비율을 나타낸다.

 

            A     B

마가복음 93    7

마태복음 58   42

누가복음 41   59

요한복음  8   92

 

 

사복음서 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졌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을 폭넓게 사용했다. 「마가복음」의 총 661절 가운데 31절만이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의 55절 내지 60절을 제외한 모든 절을 쓰고 있다.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을 더 적게 사용하여 마가복음의 반도 못 되는 320절을 쓰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들은 「마가복음」 외에 'Q'문서도 이용하였다. 이 'Q'문서는 「누가복음」 안의 약 245절의 자료로 쓰였다. 'Q'문서는 주로 예수의 가르침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특별히 예수와 종교지도자들 간의 불화(마 12:28-42/눅 11:29-32; 마 12:43-45/눅 11:24-26을 보라) 가운데 나오는 가르침과 '제자도'에 관한 가르침(마 6:19-21/눅 12:33-34; 마 6:25-33/눅 16:13; 12:22-31을 보라)이 주요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Q'문서에는 또한 이야기 자료가 들어 있는데, 예를 들어 예수의 시험 사건(마 4:1-11/눅 4:1-13)과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한 이야기(마 8:5-13/눅 7:1-10) 등이다.

 

저자와 기록 시기

 

복음서에는 저자의 이름이 실제로 들어 있지 않다. 물론 복음서를 처음 받아 본 최초의 독자들은 저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2세기에 복음서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2세기 말에 이 사복음서가 정경으로서의 권위가 있는 것으로 판정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복음서마다 처음에 개론이 실려 있다. 이 개론을 보면 각 복음서의 저자, 기록 시기 및 기록 장소를 자세히 알 수 있다.

 

본 문

 

최초로 쓰여진 사복음서의 원본들은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 어느 한 부분도 남아 있지 않다. 가장 오래된 복음서 필사본 조각은 파피루스에 쓰여진 것으로 주후 125년 경에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요 18:31-33과 18:37-38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주 잘 보존된 복음서 필사본들이 많이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표준 그리스어 본문의 기초가 되었고, 이 표준 그리스어 본문은 거의 원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상 문제가 있는 곳도 있다. 예를 들어 마 6:13; 막 11:25; 눅 9:55; 요 8:1-11과 이 구절들에 대한 설명을 보라.

 

 

04. 신약서신개론

 

 

서신(편지)은 초기 교회의 삶과 신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도들과 기독교인들은 신약에 수록되어 있는 서신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서신들을 썼다. 그 가운데 많은 서신들이 잃어버렸거나 없어졌거나, 어떤 다른 이유로 신약에 수록되지 못하였다. 바울 서신 자체도 바울이 신약에 없는 다른 서신들을 썼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고전 5:9; 고후 3:2-4; 골 4:16을 보라).

 

신약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나 오늘날까지도 알려져 있는 서신들이 주후 1세기 말과 2세기 후반에 쓰였다. 「클레멘트 일서」, 「바나바 서신」, 그리고 이그나티우스와 폴리캅이 쓴 서신들은 기독교인들 사이에 널리 읽혀져 영향력이 있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클레멘트 일서」와 「바나바 서신」을 성경으로 여겼고, 그런 이유로 두 서신이 신약의 초기 필사본들 가운데 수록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1세기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처음에는 신학적인 일치와 통일성이 있었으나, 곧 이단과 불일치로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신약에 있는 대다수의 서신들은 열띤 신학적 논쟁 속에서 기록되었다. 서신을 읽어 보면, 논쟁에 참여하여 어느 편을 들고 있는 인물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약에 보존되어 있는 서신들은 사도적 권위를 인정받았던 저자들(물론 이 가운데는 오랜 주저 끝에 포함된 경우도 있다)의 관점과 신학을 대변한다. 우리에게 전해진 초기 교회의 서신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관습에 대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거나 전혀 모르는 부분들이 많다. 예를 들어,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성만찬을 기념하는 문제로 갈등하지 않았었다면, 우리는 바울에 의해 교회에서 시작된 성만찬에 대해 전혀 몰랐을 것이다(고전 11:17-34를 보라).

 

신약 시대의 서신 양식

 

그리스-로마 시대의 서신들은 표준 양식에 따라 작성되었다. 우선 보내는 사람의 이름, 받는 사람의 이름, 그리고 인사로 시작된다. 건강을 기원하는 것이나 신에 대한 감사가 뒤따라 온다. 그리고 나서 서신의 본론이 이어진 후 작별 인사로 끝나며 가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문안 인사 목록이 덧붙여진 후 끝이 난다. 간혹 개인적인 부분이 상당히 길게 쓰인 예도 있으나(롬 1:1-6을 보라), 신약의 서신들은 대체로 이 표준 형식을 따른다. 이 형식에서 벗어날 때는 무엇인가 뜻이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매우 강한 비판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그는 자신의 편지에 늘 쓰던 감사 부분을 뺐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신약 세계의 가독률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의 비율에 대한 연구 통계는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의 서구 세계와 비교해 볼 때 그 비율이 낮았다는 점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읽고 쓸 줄을 몰랐다. 읽고 쓸 줄 안다 해도 대개가 너무도 가난해서 교회에서 받아 읽는 편지의 사본을 사 볼 수가 없었다. 하나의 편지를 베껴 사본으로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손으로 한 권의 책을 베껴 쓰려면 시간도 많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재료값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신약을 보통 크기의 양피지(곱고 깨끗이 처리된 가죽) 필사본 한 권으로 만들려면 최소한 50마리의 양이나 염소 가죽이 필요하다.

 

서신은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읽혔다. 심지어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까지도 공개적으로 읽혔다(몬 1-2를 보라). 특정 도시에 있는 교회로 보내진 편지들이 있는가 하면(바울 서신의 대다수), 도시에서 도시로 전해진 편지도 있다(벧전 1:1을 보라). 바울의 서신도 예외가 아니다. 로마, 고린도,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들은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전해지며 읽혔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교인들은 예배를 드릴 때 큰 건물로 된 교회가 아니라 개인 집에서 모였기 때문이다(롬 16:1-16에 대한 설명을 보라). 그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도시에 있던 교회들은 서신을 교환해서 읽기도 하였다(골 4:16을 보라).

 

서신이 쓰여진 목적

 

신약의 서신들은 여러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다.

 

제자들을 만들기 위하여

 

일차적인 목적은 새로 입교한 교인들을 제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서신의 저자들은 신입교인들에게 예수를 본받고(롬 15:5; 벧전 2:21), 저자를 본받거나(고전 4:16; 빌 3:17) 교회의 지도자들을 본받고(고전 4:6), 돌보아야 할 다른 기독교인들의 본이 될 것을 권면한다(딤전 4:12; 벧전 5:3). 기독교인들은 죄 된 삶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에 합당한 삶의 길로 나아갈 것이 요구된다(롬 12:1-2; 고전 6장; 골 3:5-17; 살전 4:1-8; 벧전 4:2-5). 서신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불신자의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히 10:32-36; 약 1:2-3; 벧전 1:6-7; 4:12-13), 거짓된 가르침에 맞서 경고를 하는 수단으로도 쓰였다(롬 16:17-20상반; 갈 1:6-10; 골 2:16-23; 요일 2:26; 4:1; 벧후 3장; 유 4).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서신들이 쓰인 또 다른 목적 하나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답변하기 위한 것이다. 성과 결혼(고전 7:1),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고전 8:1), 성령의 은사(고전 12:1), 죽은 자의 부활(고전 15장), 그리스도 재림 이전에 죽은 신자들의 운명(살전 4:13-18) 등과 같은 여러 문제들이 있었다.

 

추천서로

 

위에 말한 목적 외에도 서신들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다니며 전도하는 기독교인들을 추천하고(롬 16:1-2; 고전 16:10-11; 고후 3:1-2를 보라), 재정적 도움을 호소하며(고전 16:1-4; 고후 8-9장을 보라), 여행 계획을 밝히고(롬 15:22-29; 고전 16:5-9; 몬 22),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서(고전 5:9-11; 고후 1:12-2:4) 쓰였다. 서신들은 저자들이 교회에 있지 않을 때에 교인들의 신앙심을 북돋기 위해, 그리고 수신자들과의 돈독한 관계를 위해 쓰였는데 이것이 좀 더 일반적인 목적이었다.

 

신약 서신 안의 남성과 여성

 

1세기 그리스-로마는 남성들이 정치적 생활을 지배하고, 경제와 가정 문제에 주도권을 행사하던 세계였다. 여성들은 미신적이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남성보다 뒤떨어진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신약 서신들이 전달된 초기 교회에는 여성들과 남성들이 있었다. 서신의 저자들은 흔히 남성과 여성을 포함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형제들"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뜻은 "기독교인 동료들"이며 이 책에는 "형제 자매들"이라는 설명이 실려 있다. 그러나 저자들이 남성들에게만 쓸 때도 있다(예를 들어 살전 4:4-8을 보라). 바울은 특별히 남성 지배 사회에서 형성된 관점들을 계속 드러내는데(예를 들어 고전 11:7-10을 보라), 남성 중심 사상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들에게 동일하게 퍼져 있었다. 바울의 권면은 때로 남성의 필요에만 관심을 보인다(고전 7:36-38을 보라). 어떤 때엔 그도 여성들의 필요에 민감하며, 남편과 부인의 관계가 주종이 아니라 상호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고전 7:1-15; 11:11-12를 보라).

 

바울의 서신들

 

신약에 있는 서신들은 보통 바울 서신과 공동서신 두 부분으로 나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약 서신이라 하면 대체로 사도 바울이 쓴 서신을 생각한다. 그 이유는 바울 서신이 신약에서 다른 서신보다 앞서 실려 있고,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바울 서신이 기독교 신학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오늘날 독자들은 종종 바울 서신을 교리에 대해 체계적으로 쓴 논문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추상적인 기독교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서신을 쓰지 않았다. 그의 서신들은 무엇보다 특정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한 목회적 대응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그의 서신을 읽고 활용할 때에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이 기독교의 깊은 진리를 들어 교인들에게 호소한 것은 바로 이런 실제적인 상황에서였다. 그의 서신은 사적으로 보낸 개인 서신이 아니라 교회의 회중이 모두 읽도록 쓴 편지였다.

 

바울 서신 가운데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바울의 이야기만을 듣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의 예를 들어 보겠다. 한 예는 「고린도전서」에서, 다른 한 예는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뽑은 것이다.

 

고린도전서

 

바울은 7:1에서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만일 바울이 받아 본 편지를 우리가 읽어 볼 수만 있다면, 그의 권면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고전 7장을 읽고 바울이 결혼과 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결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부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그는 교회가 자신에게 묻는 문제에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 가운데 일부가 기독교인들은 결혼을 해서는 안 되며,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성관계를 삼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바울은 그들보다 결혼과 성의 역할에 대해 훨씬 더 긍정적이었다.

 

데살로니가전서

 

이 서신에서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후에, 죽은 교인들에 관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물음에 답하고 있다. 어떤 신자들은 죽은 교인들이 그리스도가 다시 올 때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다시 올 때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며, 그 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도 그러할 것이라고 서신을 통해 확신을 준다(살전 4:13-18을 보라).

 

살전 4장에 있는 바울의 설명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일으키게 한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을까? 비기독교인들은 죽어서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신학적 논문을 쓰고 있지 않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특정 관심사에 답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의 글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권위적으로 비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어느 한 교회에 준 권면은 그 교회 교인들의 특정한 필요에 따른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권면을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불문하고 적용하려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바울이 쓴 서신은 어느 것인가?

 

열세 개의 서신들이 바울을 저자로 내세우나, 많은 학자들은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거의 모든 학자들은 바울이 다음 일곱 개의 서신을 썼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그러나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학자들 가운데 「고린도후서」와 「빌립보서」가 각각 원래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바울 서신이 합쳐져 만들어졌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쓴 것으로 보이는 서신들이 정말로 바울이 쓴 것이냐에 대해서도 어떤 일치된 견해가 없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에 대한 개론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학자들은 바울이 이 서신들을 썼는지에 대해서 서로 견해를 달리한다. 아울러 바울이 사망한 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교회에 다가온 새로운 상황 앞에서 바울이라면 이렇게 대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바울의 이름으로 쓴 것인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견해가 나뉜다.

 

바울 서신이 쓰여진 순서는?

 

이 물음에 대한 확실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가 가장 먼저 쓰여진 것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그것은 바울의 후기 서신에 속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가 「고린도후서」 이전에 기록되었으며 이 두 서신은 「로마서」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알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위해 모은 헌금을 자신이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고전 16:1-4를 보라). 그 뒤에 그는 곧 「고린도후서」를 썼다.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위해 아가야 지방에 있는 교회로부터 모금하고 있었다(고후 8-9장). 그러나 「로마서」를 쓸 당시, 그는 모금된 연보를 가지고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롬 15:22-33을 보라). 바울에게 있어서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간의 일치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했다. 연보도 일치를 위한 표현이었다. 일치를 위한 일은 다른 어떤 계획보다 우선되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그렇게 열망하던 서바나에서의 새로운 선교사역도 뒤로 미루었던 것이다. 이 세 서신들을 쓰여진 순서대로 읽어보면,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그의 계획이 어떻게 해서 세워졌는지, 그리고 이 여행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바울의 사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려면, 우선 바울 서신들을 연대순으로 정확하게 배치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 작업은 부분적으로밖에 이루어질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재림 시간에 대한 바울의 사상이 세월이 흐르면서 발전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져 왔다. 그렇지만 그런 시도들은 설득력 있는 결과를 낳을 수 없다. 단지 그것이 기록된 서신의 연대 순서를 재구성해 볼 뿐이다.

 

일반서신

 

여기에 포함되는 서신들은 다음과 같다.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요한 1,2,3서」, 그리고 「유다서」이다. 「히브리서」는 전통적으로 바울 서신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느 누구도 바울이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후 4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이 서신들은 "공동서신" 또는 "일반서신"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런 명칭이 붙은 이유는 바울 서신처럼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교회를 두고 쓴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두고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요한2서」는 특정한 교회에 보내진 것이고, 「요한3서」는 특정한 개인에게 보내진 서신이다. 「베드로전서」도 소아시아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만을 위해 쓰였다. "서신"이라 불리지만, 「야고보서」는 서신 형식으로 끝맺음이 되어 있지 않고, 「히브리서」는 서신 같지 않게 시작된다. 「요한1서」는 시작도 끝도 서신 형식이 아니다. 이 서신들은 편지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록된 설교문에 더 가깝다.

 

열세 개의 바울 서신은 신약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많은 부분이 바울의 활동을 담고 있다. 이런 사실은 바울이 초기 교회에서 유일한 중요한 지도자라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 일반서신이 바울 서신 뒤에, 그것도 신약 끝부분 가까이 배치되어 있는 상황도 그런 인상을 주는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신약 각 책의 제목을 적은 고대의 많은 목록들, 그리고 몇 개의 필사본에는 일반서신이 바울 서신 앞에 실려 있다. 어떤 경우이든, 신약에 들어 있는 서신들은, 초기 교회가 수십 년 동안 어려움을 뚫고 존재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중해 전체 세계로 퍼져, 신생 공동체로서 힘겹게 몸부림치고 있는 기독교 교회의 영적 생활과 안녕을 염려하던 창조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언자로 서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소리를 내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의 증언이 온전하게 되는 데 공헌하고 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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