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악!! 불신앙의 요소!!

[스크랩] 사단의 덫(Traps of Satan)

하나님아들 2014. 3. 8. 13:48
성경은 사단의 정체를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내 쫓김을 받은 천사로 묘사한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이다(유6절, 벧후2:4, 사14:12-15, 겔28:12-16). 사단은 본성상 부단히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람들을 미혹해 범죄케 함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일에 혈안이 돼 있다(고후11:15, 엡6:12). 그 결국은 파멸과 영원한 불 못에 처해 질 것으로 이미 선고돼 있다(마25:41). 우리가 사단의 미혹의 덫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덫의 속성을 파악해 현명하게 대처하는 일이 최선의 방책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단은 우는 사자같이 우리 주위를 맴돌며 삼킬 자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벧전5:8).

1. 교만과 명예와 권세의 덫

사단은 교만과 명예와 권세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파멸을 자초한 타락한 천사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교만과 몰락을 사단의 축출 동기에 빗대어 기술한다(사14:12-15). 에스겔 선지자는 두로 왕의 자긍과 멸망을 사단의 배도와 배역에 견주어 묘사한다(겔28:12-16). 이로 보건대 사단의 정체는 자기의 높은 지위를 빙자해 하나님의 권좌에 도전하려다 실패해 내 쫓긴 배신자(betrayer)의 우두머리와 그 동조 세력들임을 추정하게 된다(유6절, 벧후2:4).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분명히 선언한다(잠16:18). 하나님을 신앙하며 섬기는 일에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나 서열이 아니다. 단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보다 온전하게 세워나가는 일에 필요한 청지기 직일뿐이다. 교회직분을 세속적인 신분과 동일시 여겨 과시용으로 착각하거나 오남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교단의 총회장과 임원직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종 된 직임일 뿐이다.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위해 부르심에 합당히 사용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자칫 하나님의 거룩한 직임을 오해해 세속적인 명예와 권세로 오남용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과 자긍의 심정이 싹 터 필연적으로 멸망과 수치의 길로 전락될 수 있다.

특별히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아합 왕과 그의 주변에 포진했던 일단의 거짓 어용 선지자들의 실상이 그랬다(왕상22장). 이스라엘의 왕은 신정왕국의 정체성 속에서 하나님의 대리적인 통치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들어 행사해야 한다. 거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성립된다. 선지자 또한 마찬가지다. 선지자란 신정왕국의 경호자로서 하나님의 신탁을 받는 자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말씀을 통해 바르게 전달돼야 한다. 말씀이 바르게 시행되는 지를 확인해야 한다. 사태의 정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합 왕은 권세를 남용했다. 이익의 재료로 삼았다. 그에게 부속된 어용 선지자들도 자신들의 안일과 출세를 위해 왕의 귀를 즐겁게 하는 일에 몰두했다.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켰다. 그 결국이 멸망과 파멸을 자초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나친 명예욕과 권세욕에 눈이 멀고 귀가 닫히고 양심이 화인 맞은 결과다. 사단은 이런 식으로 영혼들을 거짓으로 인도해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일에 총력을 경주한다.

2. 거짓과 왜곡 및 속임수의 덫

거짓과 왜곡은 사단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할 때 사용했던 덫이다(요8:44하). 이로 보건대 이들 덫은 사단이 평소 즐겨 사용하는 고전적인 수법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사단은 뱀을 하수인으로 삼하 사주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어두운 인격의 소유자들이 사단의 미혹에 도구로 악용되기 일쑤다.

사단은 먼저 ‘하나님이 동산나무의 실과를 참으로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고 묻는다(창3:1). 이는 ‘선악과를 제외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어도 된다’(창2:16)는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시킨 거짓말이다. 선악과 금령과 관련해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얼마나 바르게 숙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려는 사단의 간교한 술책인 것이다. 하와는 자기 생각을 첨언해 왜곡되게 답변한다(창3:2-3). 사단의 미혹의 덫에 걸려든 셈이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단이 재차 거짓말로 공격한다.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을 뿐 아니라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말이다(창3:5). 이미 사단의 거짓과 왜곡의 덫에 걸려든 하와는 욕심의 발동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린다. 욕심에 사로잡힌 하와에게 선악과는 더 이상 금단의 열매가 아니다. 자신의 왜곡된 욕심을 충분히 충족시켜 줄 매력의 열매로 비쳐질 뿐이다. 기대에 부푼 심정으로 하와는 마침내 선악과를 따 먹는다. 아담이 이 일에 동조한다(창3:6). 이 사건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뒤따른다(롬5:12). 원죄사상의 기원이 된 셈이다. 이후부터 말씀의 왜곡과 거짓증거는 사람을 미혹하는 사단의 고전적인 수법으로 정착된다.

후에 광야에서 예수님을 직접 시험할 때도 동일한 방법이 동원되었음을 마태는 기술한다(마4:5-7). 말씀의 왜곡으로 말미암는 자의적 해석과 편의적 적용 말이다. 이때 사단이 인용한 내용이 시91:11-12의 말씀이다. 본문과 관련해 시91편 전체의 핵심 주제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모든 경우에 당신의 자녀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이요, 둘째로 이런 사실의 전제로 하나님은 성도들의 유일한 피난처와 요새가 되신다는 것이다(시18:1-2). 시편 기자는 91편 전체를 통하여 이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시편 기자의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은 특별히 11-12절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함으로 절정에 이른다. 따라서 시91편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실제로 보호하시는 지의 유무를 확인해 보기 위해 어떤 방식이든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전혀 말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절대적 신앙만이 고백되고 있을 뿐이다. 본문을 통해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는 자를 끝까지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와 같은 극적인 기법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본문의 의미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시험하는 자는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그릇되게 적용하는 것을 통해 예수님을 시험코자 했던 것이다. 마귀는 지금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성경의 본의를 벗어났기에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처사로 간주될 뿐이다(롬10:2-3, 마7:21-23).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과 적용만이 바른 신앙관 형성의 준거로 작용한다(롬10:17).

이 뿐만이 아니다. 베드로가 걸려 넘어졌던 사건도 동일한 덫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적인 사역과 관련해 자신의 고난과 죽음 및 부활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강력히 만류한다(마16:21-22). 결코 예수님께서 죽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강한 반발이요 비난조의 만류였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충정어린 만류(?)를 매몰차게 꾸짖으면서 사단의 발상이라고 책망하신다. 사람의 생각을 앞세워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는 망령된 처사라는 지적이다(마16:23). 베드로의 만류가 아무리 충정의 발로라 할지라도 본질과 방향성에서 하나님의 본의를 거스르게 될 때 그것은 사단적 발상에 다름 아님을 위의 예수님의 시험사건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자의적 해석과 편의적 적용은 말씀의 본의를 왜곡시키는 사단의 기만전술일 뿐이다.

사단의 속임수와 관련해서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아람사이의 전쟁과 관련, 승리를 장담했던 거짓 어용선지자들의 승전 예언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당시 남 유다와의 정략적 군사동맹과 연합관계(왕하8:16-19)를 빌미로 유다의 여호사밧을 충동해 아람에게 빼앗겼던 길르앗 라못을 탈환할 것을 제안한다(왕상22:4). 여호사밧이 기꺼이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이 전쟁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본의가 어떤 지를 먼저 선지자들에게 물어 볼 것을 제의한다(5절). 아합이 이 제안을 수용해 사백인 쯤의 어용선지자들에게 전쟁의 정당성과 승패여부를 묻는다. 이들은 한결 같이 전쟁의 당위성을 인정하며 더욱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주께서 보증해 주셨음을 확증한다(왕상22:5-6).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하여금 이 문제를 다시 한번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한다. 아합은 평소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던 미가야 선지자를 불러 올 것을 명한다. 이 사이에 어용 선지자들의 수장 격인 시드기야가 추종자들과 더불어 재차 왕의 승리를 확신하며 여호와께서 아람의 성을 아합 왕에게 붙이실 것을 예언하셨다고 확언한다(왕상22:11-12). 이때 미가야가 도착한다. 아합 왕은 미가야에게 아람과의 전쟁여부를 묻는다. 미가야는 비아냥스럽게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아뢴다. 아합은 사실을 고하라고 채근한다. 그러자 미가야는 정색을 하고 시드기야를 포함한 어용선지자들의 예언의 실상을 소상하게 고한다. 결국 어용선지자들의 예언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속이는 영이 저들을 미혹해 거짓 예언을 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왕상22:21-23).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를 옥에 가둘 것을 명하고 여호사밧과 더불어 시드기야의 거짓예언을 좇아 전쟁에 출정한다. 한편 전쟁에 나선 아합은 아무래도 미가야의 예언이 마음에 걸린 나머지 왕복을 벗고 병졸차림으로 변장한다(왕상22: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람의 군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아합은 부상을 당해 결국 전쟁의 와중에서 전사한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아합의 죽음을 예언하셨던 대로 말이다(왕상21:17-19).

이처럼 사단은 속이는 자요, 미혹하는 자다.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자다. 속임수는 거짓과 왜곡과 더불어 사단이 즐겨 사용되는 덫의 하나다.


3. 시기와 질투의 덫

사단이 사용했던 시기와 질투의 덫은 아벨의 제사만 열납된 데 대한 가인의 앙심에서 그 전형을 찾게 된다. 아벨에 대한 가인의 살인행위는 이처럼 시기와 질투심의 극한 표출의 결과다(창4:5-6).

형 가인과 동생 아우가 동일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제물에 있어서 가인은 땅의 소산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을 뿐, 특별히 외형에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열납 해 주시고 가인의 것은 거절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제사 열납의 근거를 제물의 차이가 아닌 제사자의 적법한 믿음의 여부에서 찾는다(히11:4). 계시의존사색에서 나오는 신령과 진정의 제사의 성격 말이다(요4:23-24). 결국 가인은 하나님의 복음계시(창3:15)와 무관하게 자의적 숭배신앙으로 드렸고, 아벨은 하나님의 구원계시에 깊이 접촉된 데서 나와진 계시의존사색신앙으로 드린 것이다. 이런 제사자의 믿음의 정체성과 차별성이 열납 유무의 결과를 초래했고 이것이 도화선이 돼 가인은 분을 삭이지 못한 나머지 급기야 아벨을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분(憤)이란 다름 아닌 시기와 질투심의 극한 표출을 가리킨다. 이는 격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극한 노여움의 표현이다. 성경도 분노와 관련해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잠16:32)고 경계시킨다. 나아가 절제와 자제의 심정으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과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는 일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지적한다(히10:36).

그러나 본 사건의 근저에는 창3:15에 예언된 인류의 두 계열간의 지속적인 적대적 투쟁의 예언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사단이 가인을 사주해 여자의 후손계열인 아벨을 이런 식으로 살해함으로 여자의 후손의 실체인 구속주의 출현을 초장부터 차단시킬 목적으로 말이다(요8:44). 이런 언약적 구속사의 본질이 시기와 질투심이라는 사단적 속성들을 통해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가인의 경우 외에도 시기와 질투의 덫에 걸렸던 사례는 고라와 그 일당들의 경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민16장에는 레위 자손 중 고라와 그를 추종하는 일당들이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다가 멸망당하는 사건이 소개된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위임되었거늘 고라와 그 일당들은 이를 사사롭게 받아들여 이들 권위에 도전했던 것이다. 이는 본질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셈이 되기에 하나님은 국지적인 지진을 일으켜 고라당원들을 일시에 매장시킴으로 심판에 처하셨다(민16:31-33). 이들 고라당원들이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한 원인은 다름 아닌 시기와 질투였다. 왜 같은 레위지파인데 모세와 아론만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직분을 차별적으로 수행하느냐는 것이다. 특혜라는 것이다. 자신들도 행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강력한 요구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저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역적인 처사요 월권에 다름 아니다. 성전봉사라는 거룩한 직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배역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은사의 수여자가 하나님이시며 은사의 다양성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이런 경우는 현대 교회 속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4. 참소(讒訴)와 무고(誣告)의 덫

참소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헐뜯어 없는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서 고해바치는 행위’로, 무고는 ‘없는 일을 거짓으로 꾸며 고발하거나 고소함’으로 정의한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집요하게 욥을 참소하는 사단의 송사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향해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두 번에 걸쳐 욥을 칭찬하시며 선한 평가를 내리신다(욥1:8, 2:3). 마치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돌아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의 이문을 남긴 종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마25:14-23). 이런 하나님의 평가에 사단은 필유곡절(必有曲折)의 의미를 부정적인 관점으로 악용해 하나님의 평가에 이의를 제기한다(욥1:9). 다시 말해 풍성한 재물과 많은 소유물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반문이다. 그러니 재물을 빼앗고 소유물을 취하게 되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우리는 이런 사단의 참소에서 악의적인 그의 속성을 엿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참소를 수락하신다. 그러자 사단은 세 차례에 걸쳐 욥의 소유를 빼앗고, 종들을 살해하며, 급기야 욥의 열 자녀들마저 돌풍에 집이 무너져 압사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케 한다. 이런 비보를 접했음에도 욥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토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다“고 욥기서 저자는 기술한다(욥1:21-22).

사단은 재차 참소한다. 이번에는 욥의 몸에 직접 위해(危害)를 가해보라는 것이다(욥2:5). 그러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사단의 참소는 단순히 하나님의 친 백성들을 미혹해 넘어뜨리려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참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불신케 하고 거역케 함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훼손케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사단의 속성이 본질상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도전적인 악심을 품고 있는 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한 단면이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생명을 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를 허락하신다. 욥은 마침내 온 몸이 악창으로 만신창이가 된다(욥2:7-8).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든지 욥의 아내마저도 ‘믿음의 정절과 순결을 지키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한다(9절). 욥은 이런 아내를 나무라며 어리석은 여자의 말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욥기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않았다”고 기술한다(10절).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사상에 깊이 접촉된 데서 나온 적극적인 신앙고백인 셈이다.

무고(誣告)의 경우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려다 실패하자 자신의 범죄를 은폐코자 적반하장 격으로 요셉을 고소하는 과정을 통해 극명하게 확인된다(창39:7-20). 내용은 이렇다. 요셉은 아비 야곱의 편애로 형들의 시기와 질투의 희생양이 된다. 유다의 제안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했으나 이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긴다(창37:26-28). 저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데려가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아버린다(36절).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보디발의 가정총무가 되게 하신다(창39:1-4). 보디발은 소유를 다 요셉에게 위임한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그러자 주인의 처가 요셉과 동침하기를 요구한다. 요셉은 ‘악을 행해 하나님께 득죄할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한다(창39:9). 어느 날 업무수행 차 보디발의 집에 들렀다가 주인의 처로부터 강한 유혹을 받게 된다. 이를 완강하게 뿌리치고 나오는 길에 옷자락이 잡혀 벗겨진다. 요셉은 황급히 주인의 집을 빠져나왔으나 벗겨진 옷을 빙자해 주인의 처가 요셉을 무고죄로 고소한다. 이로 인해 요셉은 보디발에 의해 왕의 죄수들만 가두는 옥사에 갇히게 된다.

요셉이 무고죄로 애매히 옥고를 치르게 되지만 이는 본질에서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을 방해하려는 사단의 책략이요 계략인 셈이다. 당시 요셉의 생애는 아브라함 언약(창15장의 횃불언약식의 내용)을 성취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운반하는 자로 선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보디발의 처의 어두운 인격을 이용해 이처럼 요셉을 구속(拘束)해 하나님의 뜻을 와해시키려고 음해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고는 참소와 더불어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덫의 일종이다.


5. 물질의 덫

사단의 덫에는 물질도 포함된다. 물질에 대한 욕심의 발로는 사단의 미혹의 일종이다.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인 유다의 경우가 물질의 덫에 걸린 대표적인 사례다(마26:14-16).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눅22:3상, 행1:16-17). 돈 궤를 맡은 자이기도 하다(요12:6).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의 때가 차매 사단이 가룟인 유다를 충동해 예수님을 팔도록 강권한다(눅22:3하). 이에 유다는 달려가 대제사장과 군관들을 만나 예수님을 흥정한다. 저들은 돈을 줄 것을 확약한다(4-6절, 마26:14-16). 이렇게 유다는 은 삼십에 미혹돼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역자로 낙인찍힌다. 그 결국은 참혹한 죽음으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마27:6, 행1:18).

가룟인 유다의 경우는 이 뿐만이 아니다. 그가 주님과 동행하던 때에 회계업무를 관장한 듯하다(요12:6). 한 번은 베다니 지역에 살고 있던 나사로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위한 감사의 잔치인 듯싶다(요12:1-2). 이 때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는 사건이 일어났다(3절). 당시 한 데나리온이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인 것을 감안하면(마20:2) 삼백 데나리온은 거의 일 년 치의 품삯과 맞먹는 거액임에 틀림없다. 제자들이 분하여 이구동성으로 그런 행동은 낭비요 허비라고 마리아를 비난했다(마26:8).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비로 전용했다면 얼마나 유용했겠느냐는 얘기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런 헌신적 행동이 자신의 죽음과 장사(葬事)를 예비하는 의미가 있다고 해명하시며 그녀의 행동에 대한 주위의 만류를 오히려 책망하신다(요12:7). 당시 유대인들의 장사 풍습은 먼저 죽은 시신의 온 몸에 향유를 바른 후 세마포로 감쌌던 것이다. 앞으로 일 주일 후 예수님은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담당하셔야 할 것을 미리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요12:1, 11:23, 눅22:7-8, 고전11:23). 물론 당시 마리아가 임박한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를 위해 이런 행동을 했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아마도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사례하는 심정이 더욱 컸을 것이다(요11장).

문제는 이런 마리아의 헌신적 행동에 제자 중 하나인 가룟인 유다가 앞서서 이를 비난하고 선동한 사실이다(요12:4, 마26:8-9, 막14:4). 사도 요한은 이런 유다의 행동을 정작 가난한 자의 구제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착복을 위한 도적의 심보의 발로였음을 시사한다(요12:6). 사도 요한의 이런 표현을 통해 가룟인 유다는 회계를 빙자해 얼마간의 돈을 지속적으로 착복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마태는 이 사건에 이어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판 유다의 배도사건을 소개한다(마26:14-16). 이런 사실을 통해 평소 물질에 깊이 착념해 있던 유다의 어두운 인격을 사단이 적절하게 이용한 사실을 간파하게 된다(눅22:3-6). 이런 식으로 물질에 대한 욕심은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덫임에 틀림없다.

6. 음란과 우상숭배의 덫

성경역사는 사단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혹할 때 때때로 육신의 정욕으로 말미암는 음란과 우상숭배를 덫으로 이용했던 경우를 소개한다. 위에서 잠시 살펴본 대로 요셉을 미혹했던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의 경우가 그렇다. 당시 요셉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운반하는 중요한 인물로 대두된다. 아브라함의 언약 중 횃불언약식에 따른 자손언약이 요셉의 사역을 통해 성취될 수 있도록 섭리적으로 그의 삶을 주관하고 계셨다.

이 과정에서 요셉은 비록 종으로 팔려온 신세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등용된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젊고 준수한 용모와 인품에 반해 그를 흠모한 나머지 수차례에 걸쳐 동침할 것을 요구한다. 이때마다 요셉은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와 관련해 분명한 선을 긋는다. 더욱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여 득죄할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한다(창39:9).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순수성과 믿음의 정절을 지키려는 요셉의 정한 마음(시51:10)이 이런 식으로 표출된다. 하나님은 요셉의 마음을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가운데 이런 위기를 극복하게 하신다. 여인은 자신의 욕심이 충족되지 않자 요셉을 무고죄로 고발해 감옥에 투옥시킨다. 하나님은 요셉의 이런 위기를 자손언약 성취를 위한 과정으로 적극 선용하신다. 사단은 여인의 음란을 이용해 요셉을 넘어뜨리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막아 주시고 선용해 주심으로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어 가신다. 미인계는 사단의 덫의 일종인 사실을 보게 된다.

사도요한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출처가 세상, 곧 사단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확증한다(요일2:15-16). 이와 관련해 탐심이 우상숭배라는 성경의 진술을 고려하면(골3:5) 우상숭배 또한 사단이 사람들을 미혹하는 덫인 사실이 분명히 확인된다. 모압의 발락 왕이 이스라엘의 강성함을 두려워한 나머지 거짓선지자 발람을 매수해 이스라엘을 범죄케 한 것이 다름 아닌 음란을 동반한 우상숭배였음을 성경은 증언한다(민22:1-6, 25:1-3).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호와의 신앙이 우리의 일신상의 행복과 안일과 성공을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기능하게 된다면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김에 다름 아니다. 성경은 이를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신앙으로 정죄한다(롬10:2-3, 마7:21-23). 소위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경계시키는 내용이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계2:14-15).

음란과 우상숭배는 근본이 탐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본질상 동질성을 띤다. 성경은 이것의 기원을 세상 임금인 사단에게서 찾는다. 성도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세상은 불사르기 위해 심판의 날까지 간수되고 있을 뿐이다(벧후3:7).

이상 성경 속에 기술된 몇 몇 사건을 통해 사단의 속성이 어떤 모습으로 표출되고 있는 지를 살펴봤다. 사단은 그의 속성상 부단히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를 미혹하고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자로 묘사된다. 오늘도 사단은 다양한 덫과 올무를 놓아 우리를 미혹하며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일에 혈안이 돼 있다. 그의 결국이 이미 불못에 들어 갈 것이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회개할 줄 모른다. 그럼에도 사단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은혜 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영광되게 하는 일에 기여하게 될 뿐이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쓰임받기 위해 지음을 받았기에 말이다(잠16:4). 적을 알고 나를 알면 각양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미연에 대비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자. 성령의 검으로 단단히 무장하자. 바르게 해석된 진리의 말씀은 모든 사단의 화전을 넉넉히 이기는 최선의 무기로 기능할 것을 확신한다. 경성하지 못할 때 누구를 불문하고 사단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음을 간과하지 말자.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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