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 에베소서

[스크랩] (계6:1-11) - (32) 왜 하나님의 백성인 나에게도 재앙이 임하는가? - 김성수 목사

하나님아들 2014. 1. 21. 22:03

(32) 왜 하나님의 백성인 나에게도 재앙이 임하는가?

(이 일곱 재앙의 부분은 우리 독자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점진적이며 반복적인 기법으로 종말에 일어나는 재앙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번째 인이 떨어질 때 일곱 나팔이 등장하고 일곱 번째 나팔을 불 때 일곱 대접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일곱 인이 일곱 나팔을 물고 있고 일곱 나팔이 일곱 대접을 물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일곱 인을 잘 이해하시면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은 쉽게 이해하실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내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붙들고 있는, 집착하고 있는 것들은 결국 저렇게 하릴없이 물에 잠기고 불타버릴 것들이구나, 이제 하나하나 놓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나를 맡기고 의지 해야겠다’ 하고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계기로 삼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6:1-11)

1      나는 그 어린 양이 그 일곱 봉인 가운데 하나를 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우뢰 같은 소리로  "오너라!"( 또는 '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    그리고 내가 보니, 흰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그는 이기면서 나아가고, 이기려고 나아갔습니다.
3    그 어린 양이 둘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둘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4    그 때에 불빛과 같은 다른 말 한 마리가 뛰어나오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땅에서 평화를 걷어 버리고, 사람들이 서로 죽이게 하는 권세를 받아 가졌고, 또 그는 큰 칼을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5    그 어린 양이 셋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셋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니, 검은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

6    그리고 네 생물 가운데서 나오는 듯한 음성이 들려 왔는데 "밀 한 되도 하루 품삯이요, 보리 석 되도 하루  품삯이다.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불순하게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7    그 어린 양이 넷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이 넷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8    그리고 내가 보니, 청황색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의 이름은 '사망'이고,  지옥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칼과 기근과 죽음과 들짐승으로써 사분의 일에 이르는 땅의 주민들을 멸하는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9    그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또 그들이 말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10    그들은 큰소리로 "거룩하고 참되신 통치자님,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또 우리가 흘린 피의 원수를 갚아 주시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11    그리고 그들은 흰 두루마기를 한 벌씩 받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그들과 같은 동료 종들과 그들의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그들과 같이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아직도 더 쉬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6장 일곱 인으로 들어갑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드시고 드디어 인을 하나하나 떼십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여러분께서 이 일곱 재앙의 부분을 읽으실 때 단순히 역사적, 시간적 순서로 배열이 된 사건으로 보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이야기는 성경 전체의 계시의 내용이 그렇듯이 반복적이며 점진적이며, 점층적으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잘 보시면 인의 재앙에서는 땅의 1/4이 재앙으로 피해를 입고 나팔 재앙에서는 1/3, 대접 재앙에서는 전체가 멸망해 버리는 식으로 그 재앙의 색채와 인상이 점진적으로 더욱 짙어지고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치 바로가 꾼 ‘꿈’이야기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 41장에 보면 애굽의 바로가 꿈을 꾸고 드디어 그 꿈을 해몽하기 위해 요셉이 감옥에서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소와 살진 일곱 소가 꿈에 나타났는데 흉악하고 파리한 소 일곱 마리가 살진 소 일곱 마리를 잡아먹습니다. 그리고 바로 실한 이삭 일곱 개와 세약한 이삭 일곱이 나오는데 그 세약한 이삭이 실한 이삭을 삼킵니다. 이 꿈은 그 내용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곱 해 풍년이 들것이고 일곱 해 흉년이 들것이라는 것을 반복적이며 점진적으로 중복해서 묘사를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일곱 재앙의 부분은 우리 독자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점진적이며 반복적인 기법으로 종말에 일어나는 재앙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번째 인이 떨어질 때 일곱 나팔이 등장하고 일곱 번째 나팔을 불 때 일곱 대접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일곱 인이 일곱 나팔을 물고 있고 일곱 나팔이 일곱 대접을 물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일곱 인을 잘 이해하시면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은 쉽게 이해하실 수가 있습니다.

 

먼저 이 일곱 인에 대한 내용을 분석을 해보면 4+3의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말 탄 자 넷이 나오고 그 다음에 세 개의 인이 붙어 있습니다.

다섯 번째 인부터는 마치 TV화면이 바뀌는 것처럼 다른 장면들이 나옵니다.

나팔 재앙도 마찬가지고 대접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4+3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일곱 인의 재앙 중 처음 네 재앙에는 모두 말 탄 자가 등장합니다.

처음에 백마를 탄자가 등장하고 두 번째 인에서 붉은 말, 세 번째 인에서 검은 말, 네 번째 인에서 청황색 말 탄 자가 등장합니다. 이 말 탄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견이 아주 분분합니다. ‘말 탄자는 예수다, 아니다. 적그리스도다. 천사다’ 여러 가지 의견이 많습니다만 제 견해로는 그 말 탄자들이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말 탄자들이 등장함으로써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이해할 수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요한이 이 말 탄자들이 등장하는 부분을 구약의 어디에서 인용을 했는지를 찾아보면서 차근차근 오늘 본문의 내용을 해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7-12)

7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8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9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10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11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12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여기서 말 탄 자들이 인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 탄 자들이 무엇을 하던 자들이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두루 다니도록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무엇을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걸까요? 이 스가랴서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면 조금 도움이 될 겁니다. 이 스가랴 선지자는 BC520년경 사람입니다. BC931년에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로 갈라지고 BC722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BC586년에 남 유대가 바베론에게 망하고 그들이 포로로 끌려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이 페르시아라는 나라에게 망하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귀향을 명령했습니다. 그들의 성전을 재건하도록 귀향을 시킨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의 총독이 스룹바벨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총독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마리아인으로 불리게 된 북 이스라엘 사람들과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신하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이 10년 만에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독려하며 성전재건을 촉구한 선지자가 바로 스가랴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재앙을 당하던 시기에 그 말 탄 자들이 세상에 보내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메시지를 가지고 땅에 두루 다니며 전 하던 메신저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제 사견입니다만 여러분이 그 말 탄 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천사냐, 선지자냐, 목사냐 이런 것을 궁금해 하시지 말고 그 말 탄 자들이 무엇을 전했는지를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 말 탄자들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시려고 하시기보다는 ‘그 말 탄 자들은 하나님의 재앙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라고 이해를 하시는 편이 훨씬 성경의 이해에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 재창조의 내용이 적힌 책을 여시는데 인을 떼시는 족족 재앙이 이 땅에 내리는지 여러분 궁금하지 않으세요? 복음이 적혀있는 책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재앙만 나옵니까? 그리고 왜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그 재앙 속에 함께 던져져야 하지요? 그 문제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14:12-23)

12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3        인자야 가령 어느 나라가 불법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뢰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서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14        비록 노아, 다니엘, ,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5        가령 내가 사나운 짐승으로 그 땅에 통행하여 적막케 하며 황무케 하여 사람으로 그 짐승을 인하여 능히 통행하지 못하게 한다 하자

16        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겠고 그 땅은 황무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7        가령 내가 칼로 그 땅에 임하게 하고 명하기를 칼아 이 땅에 통행하라 하여 사람과 짐승을 거기서 끊는다 하자

18        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9        가령 내가 그 땅에 온역을 내려 죽임으로 내 분을 그 위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거기서 끊는다 하자

20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2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않겠느냐

22        그러나 그 가운데 면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23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볼 때에 그들로 인하여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무고히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경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나중에 공부를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계시록의 네 가지 인의 재앙의 내용과 같습니다. 칼과 기근과 온역 즉, 질병입니다. 그 재앙이 얼마나 엄중하고 철저한 것인지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일컬은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자식들마저도 거기서 건져지지 못할 것이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2절에 보시면 ‘거기서 나오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남은 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그 재앙을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재앙을 함께 당하는데 그들은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계기가 되고 나머지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재앙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지요.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재앙이 임하는가?

 

(6:1-7)

1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산이더라

2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3          세째 병거는 백마들이, 네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4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6          흑마는 북편 땅으로 나가매 백마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편 땅으로 나가고

7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

 

여기도 똑같이 네 말이 끄는 병거가 등장합니다. 역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재앙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땅에 두루 다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서 나옵니까? 두 산 사이에서 나옵니다. 이게 심판과 저주를 전하는 말 탄 자들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key입니다. 두 산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스가랴서로 가서 밝혀드리겠습니다.

 

(14:1-5)

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2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같이 하시리라

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5          그 산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지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께서 감람산에 서시니 그 감람산이 둘로 갈라지고 그 갈라진 두 산 사이, 골짜기로 모든 백성들이 도망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감람산에 오르시는 모습을 4 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메시아적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들이 일부러 그 곳의 지명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감람산에서 마지막 종말 때에 관한 강화를 하시기도 하고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주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22:39)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예수님께서 습관처럼 가시던 곳입니다. 그 감람산의 그리스도 앞으로 오는 자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구원이 이루어지는 그 두 산 사이, 골짜기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등장합니다. 솔로몬 성전도 그 입구에 두 기둥이 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자 즉,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갈 수 있는 자들은 반드시 그 두 산 사이를 통과해야 한다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또 두 산이 어디에 나오지요? 신명기 11장으로 갑니다.

 

(11:26-30)

26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두 산이 나오지요? 하나는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 다른 하나는 저주의 산인 에발 산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에발 산에서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더러 그리심 산이 아닌 골짜기로 도망을 하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절대 그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골짜기로 도망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 골짜기는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임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심판과 재앙을 선포하는 메신저들이 그 두 산 사이에서 나온다는 것은 그 재앙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들의 구원의 완성에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1:8)

8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역시 네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골짜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골짜기’‘메쭈라’가 이사야서 4427절에서는 다르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44:27)

27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마쭈라’‘골짜기’가 바다의 깊은 곳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 탄 자가 골짜기에 서 있고 그들이 거기서 나온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바다의 깊은 곳’에서 나온다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바다의 깊은 곳’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죽음 저주, 심판을 상징하지요? 그래서 요나가 바다 깊은 곳에 빠졌을 때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라고 그 곳을 ‘음부’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의 군대가 바다에 빠져 수장 될 때도 그 ‘깊음’ ‘마쭈라’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15:3-5)

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4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5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그들이 돌처럼 음부로, 죽음으로 가라앉았다는 표현입니다.

그 죽음과 저주와 심판에서 건져 올려 내는 것이 바로 구원이요, 재창조인 것입니다.

 

(68:22)

2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재창조해 내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옛 사람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심판으로 저주로 재앙으로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사람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31:32-33)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어서 손을 잡고 끌고 가는데도 변하지 않는 것이 타락한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너희를 죽이고 다시 새롭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에는 반드시 심판과 저주와 재앙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 때도 그러한 힌트가 나오지요?

 

(1:2)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조의 보증으로 서 계신 성령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십니까? 깊음 위, 수면 위에 운행하십니다. 새 창조는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7:20-23)

20        물이 불어서 십 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21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새 언약, 재창조는 이렇게 죽음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8:15-19)

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17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19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다 죽고 그 재앙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남은 자만 건져졌습니다. 죽음에서 재앙에서 , 바다 깊은 곳에서 건져졌습니다. 다시 시작되는 이 모습을 보세요. 창세기의 첫 창조 때와 흡사하지요? 이렇게 구원을 받는 자들은 심판과 저주의 산인 에발 산과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 사이의 골짜기로 피하여 거기서 살게 되는 자들입니다. 그 곳은 재앙과 심판이 여전히 있는 곳이지만 그 모든 것은 새 창조, 재창조의 한 과정이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옛 성품, 경향, 사륵스, 집착, 중독, 통제 성향, 자기 방어들을 죽여 버리는 역창조의 장소요, 그 과정을 통과하여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완성이, 완전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에도 똑같이 재앙이 있고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시켜 인봉을 떼시는데 그 곳에 재앙만 가득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 끊이지 않는 전쟁과 기근과 자연 재해와 늘 새롭게 나타나는 불치의 전염병들에 악인들과 동일하게 노출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러한 일들을 당하시거나 지켜보시면서 ‘왜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저런 불쌍한 사람들이 생겨?’ 라고 하나님을 원망하셔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휩쓸고 간 뉴올리언즈를 보면서 쓰나미가 휩쓸고 간 인도네시아를 보면서 순례 행진을 하다가 수천 명이 압사를 당한 이라크를 보면서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나는 재앙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심판은 정말 무시무시한 것이구나.’ ‘정말 마지막 최후의 심판이 닥치게 되면 저런 모든 재앙을 다 더한 것의 수 억 만 배 무서운 저주가 세상을 덮칠 텐데 태풍 하나가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쏟아 질 그 최후의 심판과 저주는 얼마나 무서울까? 정말 성경에 기록 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는 진행되어져 가는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는 종국의 그 무시무시한 심판과 저주 속으로 급격히 빨려 들어가고 있구나.’ 그리고 ‘우리도 마땅히 그러한 저주 속에 떨어져야 하는 자들인데 어떻게 우리는 예수를 믿고 거기서 건짐을 받게 되었나? 우리는 얼마나 복 받은 자들인가? 더욱 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잘 살아내야겠다. 내가 내 인생의, 내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붙들고 있는, 집착하고 있는 것들은 결국 저렇게 하릴없이 물에 잠기고 불타버릴 것들이구나, 이제 하나하나 놓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나를 맡기고 의지 해야겠다’ 하고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계기로 삼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내리는 재난은 이렇게 두 가지 이중성이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중한 경고로 믿는 자들에게는 그들을 정결케 하는 성화의 수단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13:4-5)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실로암에 있는 망대가 무너져서 사람이 열여덟 명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보다 죄가 많아서가 아니다. 그러한 재앙을 너희에게 보여주는 것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처럼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이제 clear해 지셨습니까?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절대 놓치지 마셔야 할 것은 그 인봉을 누가 떼시는가를 확실하게 기억하십시오. 그 책의 인봉을 여러분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떼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 분이 주어입니다. 그 분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것은, 그것이 재앙일지라도 우리의 유익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전도서를 언제 썼습니까? 자기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인 줄 착각하고 살았는데 나중에 여러 첩을 거느리고 그 첩들의 우상에게 절하고 하는 자기를 보면서 다윗의 시편에 나오는 ‘상한 심령’이 되어 ‘모든 것은 헛되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다윗이 된 것은 물맷돌로 골리앗을 부수었을 때가 아닙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통과하며 다윗은 다윗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닥치는 고통과 재앙은 여러분을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죽으십시오.

 

우리는 죽어야 살 수 있습니다. 죽어야 부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장정 60만 명이 나와서 광야에서 다 죽고 새 사람 60만 명이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여러분의 옛 사람을 반드시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죽여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어디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무엇에 의해 구원을 받았으며 무엇을 위해 구원을 받으셨는지 만 명확하게 인식하고 계신다면 오늘 이 설교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saved from what? 하나님의 진노 saved by what? only by grace, saved for what? 이사야서 473절을 보시면 ‘이 백성은 내가 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했다’라고 명기가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여러분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호의호식이나 여러분의 만사형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자가 되어 그 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예수 믿고 잘 먹고 잘 살 생각 마시고 예수 믿고 환난과 고난을 맞서서 이겨내시며 옛 사망의 몸을 죽이고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셔야 하는 분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거기가 우리의 목표지점입니다.

 

 

고..김성수목사..글 옮긴이..서성필.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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