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성전!! 하나님의 집!!!

[스크랩] 화목문, 좁은 문, 거룩한 서문, 여아킴문, 제물문

하나님아들 2014. 1. 21. 20:44
성전 설계도 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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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1장 20-21절

요약
우리는 화목문에서 우리 심령을 쪼개고 불태울 신령한 말씀을 사모함을, 좁은 문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을, 거룩한 서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해서는 안되는 경건을 배우고, 여아킴문을 통하여 근신하므로 자신을 지킴과, 제물문에서 이제 우리 자신들이 제물이 되어지는 비밀을 배우게 된다.


26번은 화목문입니다.

이 문은 성전에서 쓰여지는 나무들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나무는 서쪽 숲에서 공급되었지만 서쪽 문은 좁기에 이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여인의 뜰의 나무광의 나무들도 이 문을 통하여 들어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무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문을 통하여 들어온 나무는 불태움을 받습니다. 이는 구속사역을 향한 그리스도의 열심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성전에서 화목문은 심령의 제단불을 지피는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입니다. 나무가 인성의 상징이듯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의 쪼개는 기능이 나무를 그냥 쓰지 않고 쪼개서 씀과도 어울립니다. 그리고 나무는 쪼갠 후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처럼 심령과 골수를 쪼개는 말씀이 아니고는 심령을 불태울 수가 없습니다. 눅24:32에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했습니다. 여기 풀어주실 때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잘 풀어주어야 심령을 불태웁니다.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살라지는 때가 옵니다(벧후3:7). 그런데 이 말씀은 문자적인 의미와 아울러 심령을 말씀으로 불태움으로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 창조하실 것에 대한 원리도 됩니다.
이렇게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화목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 저자의 의도대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여러 성경 해석법이 있고 모두 적절한 분야와 사명에 쓰임받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좀 더 온전한 성전으로 지어지려면 신령한 의미의 해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관념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말씀이 아니라 심령에 와 닿는 말씀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성경을 보면서 이 말씀이 나의 신앙에 어떤 의미를 던져 주는지 정확한 배경 해석과 아울러 성령이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화목이 공급될 때 바른 신앙생활이 가능합니다.

27번은 윗문입니다.

이 윗문은 남쪽 벽에서 맨 서쪽에 있는 문입니다. 이 문은 아주 좁은 문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윗문이라고 한 이유는 번제단 쪽에서 볼 때 맨 위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제물이나 물이나 나무나 다른 문들은 큰데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은 좁게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성전은 어느 한 가지라도 의미없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숨겨 있습니다.
여기 윗문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하셨습니다. 여기 좁은 문에 대해서 주석을 참고하면 이는 회개와 같은 신앙적 결단을 의미하며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는 의로운 길이라고 했습니다. 즉 나와 세상을 내려 놓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교훈대로 이 좁은 문은 찾는 이가 적습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심리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감이 최고 소원이어야 하는데 마지 못해서 합니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이 문이 있는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좁은 문 대신 세상을 향한 넓은 문이 존재하고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들어가기를 원치 않아 폐쇄된 문이거나 연단의 강약에 따라 유동적으로 개폐되는 문이라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심령의 문은 마치 열두 진주의 문과 같이 연단의 고통을 통해 세상을 향해서는 닫혀지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활짝 열린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28번은 서문입니다.

성전의 서쪽 벽에는 두 문이 있었습니다. 남북으로 하나씩 낸 문인데 이 문은 특별한 이름도 없었습니다. 이름이 없다 함은 사용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실재로 이 두 문은 문만 있을 뿐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서쪽은 지성소가 있는 가장 경건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문을 내지 말지 왜 문을 내야 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그 곳이 가장 경건한 장소였다라는 것 외에는 다른 답이 없습니다. 이 문은 지성소를 출입하는 문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곳은 지성소의 출입을 상징하는 문이라는 사실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서문의 출입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성소와 지성소는 하나되었고 누구든지 예수의 피를 의지하고 그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에서 이는 침범해서는 안될 신성불가침의 신앙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예배와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경배를 받고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행10:26) 했고, 바울도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가 낫는 이적을 본 사람들이 제우스와 허메신으로 여기고 경배할 때 옷을 찢으며 금지시켰습니다(행14:8-18).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차지한 헤롯은 벌레에 먹혀 죽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탐하였던 마술사 시몬도 사도의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혹시 이런 상황이 비록 작게라도 재현될 때 철저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지 점검합시다. 그런데 알지 못하고 이것이 우리가 통행할 문인줄 알고 통행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혹은 성령을 훼방하는 일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마12:31-32에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교훈하셨습니다. 이 본문은 난해한 부분인데 전후문맥을 볼 때 이 경고는 예수님의 사역을 평가하여 귀신들린 자라고 훼방할 때 하신 말씀입니다. 성령의 가장 귀한 임무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증거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령께서 온갖 표적으로 예수를 증거하시는 그 일들을 보면서도 그들은 예수를 훼방했습니다. 즉 성령의 일을 훼방놓은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쓰심이 확실한 동역자들을 깊이 파악해 보지도 않은채 함부로 이단 정죄하는 일도 주의해야 합니다. 다윗에게도 이 거룩한 서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원수 사울왕을 기름부음 받은 자라하여 도리어 보호했습니다. 바울에게도 이 서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정죄하고 치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인줄 몰랐기에 그를 책망했으나 안 후에는 말하기를 중단하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행23:2-5). 이 서문이 없어서 큰 결과를 당하는 사람들을 간혹 봅니다. 광야에서도 고라당의 무리 역시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 곧 경건이요 경외이며 거기서 주님과 동행하는 동기가 생깁니다.

29번은 여아킴문 혹은 불꽃문입니다.

이 문이 여아킴문이라고 부른 것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쳐들어와서 당시 여아킴 왕을 이 문으로 잡아갔기 때문에 비통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후에 이 문은 불꽃문으로 개명되었습니다. 이 문 밖의 조그만 뜰이 있는데 레위인들이 불을 피워놓고 성전을 지켰고, 이 문 앞에는 언제나 숯불을 피워놓아 성전 제사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기둥돌이 있었는데 아침에 해가 뜨면 기둥 사이로 했살이 강하게 빛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곳이 왜 유난히 햇살과 관계될까요? 이 문은 불을 지피면서 일출의 여명을 기다리며 파수하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두움과 싸웠습니다. 즉 이 곳은 잡혀가고 지켜지고 그런 곳입니다.
이처럼 여아킴문은 신령한 의미에서 근신의 신앙을 교훈합니다. 여아킴은 유다왕인데 유다왕들은 다윗의 후예로서 넓게는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좁게는 우리에게 주신 영적권세를 예표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시련이요, 어둔 밤은 세상의 죄악입니다. 여아킴은 성경에 여호야김인데 그는 애굽과 동맹을 맺는 등 애굽을 가까이 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가까이 하면 왕권을 빼앗기고 시련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권이 무엇입니까? 나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는 것입니다. 즉 이김이란 계시록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 하늘에 속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최정상을 달리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세속에서 자기를 지키지 못하면 그 귀한 능력을 잃게 됩니다.
제단 숯불은 죄악을 태우는 성화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성전 안 번제단 곁에 제단 숯불이 보관되고 있는가 하면 성전 밖인 이 곳에 제단 숯불이 보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의 죄악과 아울러 세속의 미혹에서 자기를 지켜져야 함을 암시합니다. 갈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즉 성도는 세상에 대해 안팎으로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속에게 영적인 능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근신과 신앙의 불을 지피면서 지켜야 합니다.

30번은 제물문입니다.

성전에서 쓰이는 제물들은 이 문을 통하여 들어와서 그 앞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성전에서 북쪽은 대개 슬픔과 관계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여야킴문은 이스라엘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고, 제물문 역시 죄를 대신하여 죽는 짐승들의 행렬을 볼 때 그러하며, 31번의 여인의 문 역시 여인들이 자기가 드린 제물이 타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짓던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객관적 구속사로 보면 이 제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신령한 성전에서도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롬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산제사로 드려질 수 있을까요? 바로 다음 절인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즉 그 방법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변화시키면 육체는 그냥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은사와 섭리적인 하나님의 손길과 연단을 통하여 계속하여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아직도 장난감 가지고 놀고 딱지를 치고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으로 어린입니다. 그러나 성장하면 가치관의 변화로 장난감 가지고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성장하면 세상과 육신의 가치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가장 고상한 가치로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내가 변화 성숙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관제로 비유한 적이 있었습니다(빌2:17, 딤후4:6). 즉 예수님만이 제물이 아니요 이제 우리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물이란 희생을 통하여 드려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희생을 당할 때 억울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는 박해 속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희생적인 환경을 방치하실 때가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참으면 아름다운 제물이 됩니다(벧전2:19). 그러나 그냥 슬퍼하고 억울해 하면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반드시 삼위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자녀를 통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있으면 그 자체가 아름다운 제물입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환경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참고 감사하며 찬송하십시다. 어떤 이에게는 불편한 가운데 버려두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곳에서 고난의 주님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얼마나 불평하며 충성하지 못했는지 무지의 죄가 크다는 생각뿐입니다. 이것이 희생이 가져다 주는 제물의 교훈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모실 수 있는 신령한 성전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얼마나 귀합니까? 오늘 우리는 성전의 다섯 부분의 건축을 이해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심령을 찔러 쪼개는 말씀들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합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갑시다. 조심하여 하나님만의 성역을 침범하지 맙시다. 또한 근신하여 세속에게서 자기를 지키십시다. 그리고 희생 속에서 온전히 삼위 하나님을 기억하므로 향기로운 제물들이 되어지십시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운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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