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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지주의

하나님아들 2013. 12. 10. 16:12

영지주의

 

1. 서 론

기독교는 발생 초기부터 외부적 박해를 받아 왔으며, 2세기에 와서는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이단들이 일어나서 교회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2세기 교회를 위협한 이단들로서는 유대교와 또 유대교적 요소와 기독교적 교리 그리고 이교 사상의 신비적인 것들을 혼합시킨 영지주의가 교회의 가장 큰 위협이었으며, 율법 배격을 들고 나와 교회에 분파를 일으킨 말시온주의와, 그리고 교회 세속주의를 들고 나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몬타누스주의 분파들이었다. 교회는 이단에 대처하기 위하여 정경, 신경, 감독의 권위를 확립하고 신학의 기초를 닦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이단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남으로 정통과 이단과의 갈등이 심해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이 때부터 교회 분리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초기 교회 이단은 교회에 큰 부정적 역할을 한면과 또한 이단의 역기능으로 교회를 강화시킨 면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본 리포트는 초기 교회 이단중 영지주의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초기 교회 이단들이 미친 영향을 그 긍정적 기능과 부정적 기능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영지주의

A. 영지주의 정의와 기원

(1) 영지주의 정의

영지주의는 페르샤의 물질적 이원론과 플라톤적인 정신적인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이원론에 입각한 것으로서 혼합주의 종교 운동을 일으킨 기독교로 자처하는 이단이다. 영지주의의 창시자는 시몬 마구스로서 그가 만들어 낸 이 혼합 절충주의 사상 속에는 우주론적 신화, 희랍과 동양의 철학 사상, 기독교의 애매한 진리 등이 혼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종교적 혼합주의를 추구하던 영지주의는 혼합 종교에다 기독교를 한 요소로 첨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기독교에 의도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종교적 혼합주의 경향을 나타내던 당시의 지배적인 풍조에 의해서 단연 지지를 받게 되어 3세기 초에는 로마제국 전역에 있는 대부분의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혹은 적게 이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고, 결국 영지주의는 여러 가지 우주론적 신화, 희랍과 동양의 이교적 철학 사상, 기독교의 진리 등이 혼합된 종교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신적 구원관, 기독교적 전통, 인간 역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중심됨 등 기독교와 공통된 여러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지로는 심히 왜곡되어 있었으며, 대체로 기독교적인 것보다는 이교적 사상이 더 우세하였던 것이다.

영지주의에 있어서 영지란 본래 헬라어로 “지식” 또는 “인식”을 의미하는 말이며, 이 말은 신약 성서에 상당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그노시스란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이 은밀히 계시되는 신적인 매우 깊은 의미의 인식을 말한다. 그리고 이와같은 그노시스위에 그 객관화로서 형성된 종교 사상을 영지주의라고 부른다. 영지주의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이레네우스에서 하르낙에 이르기까지 영지주의를 기독교 이단으로 보았는데 이것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이들은 “영지주의는 헬라 철학의 더러운 물에 신앙이 오염된 결과”라고 보았다. 19세기말과 20세기 과정에서는 다른 견해가 유행했는데, 이 견해는 라이첸스타인, 부세트, 불트만과 그의 제자들로부터 주장되었다. 그들에 의하면 “영지주의는 단지 기독교로부터 이탈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의 라이벌과 경쟁자로서 서방에 침입한 고대 동양 종교의 재발과 부활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어를 사용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정의에 따르고 있다.

 

(2) 영지주의 기원

영지주의 기원에 대해서는 현대에 주로 4가지를 설명한다. 1) 헬라 철학 2)동양 종교 3)기독교 4)또는 이단적인 유대교로부터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 4가지 요소가 영지주의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나 상호 관련성 때문에 그 정확한 기원은 찾기 어렵다. 또한 영지주의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따라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약시대를 불문하고 지중해 연안 여러 지역, 인도와 이란 세계, 또는 중국에까지도 인정할 수 있는 세계적인 종교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의 고전적인 종교 현상을 기독교 영지주의와 구별하여 원영지주의(PROTO-GNOSTICISM)이라고 부른다. 원영지주의의 일반적인 기원은 종교사적으로 끌어내어 정확할 수는 없다. 다만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영지주의의 기원은 기독교 이전설과 기독교 이후 발생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가 완전히 드러난 것은 트라쟌 황제 때 안디옥에서 가르친 사투니너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원영지주의의 두 기원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기독교 이후의 발생설

기독교 이후 영지주의 기원설을 가장 활발하게 주장한 학자는 시몬느 페트레멘트이다. 이 여류학자는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기생충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또한 영지주의의 비 기독교적 다양성은 기독교의 점진적인 이교화의 결과되었고 그것이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었다고 보았다. 시몬느 페트레멘트의 입장에 서면 영지주의가 에집트, 이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되었던 것이 아니고 이러한 지역으로 확산되었다고 보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에서 원영지주의 발달은 증명할 수 없고 다양한 지역적인 요소들이 있을 뿐이다. 밀레 페트레멘트는 영지주의와 동시대의 사람들인 기독교 교부들이 영지주의는 기독교 이후의 현상이었다는 견해를 갖는 것은 기독교 이전의 영지주의 문헌을 단 하나도 갖고 있지 않는 현재를 설명하고 이것은 영지주의가 점차로 1세기에 발전되었고 제2세기까지도 전성기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b. 기독교 이전 발생설

전통에 의해 오랫동안 받아들여진 기독교 이후 발생설에 반대하여 안즈는 1897년에 영지주의 기독교 이전 기원설을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이 견해는 종교사학파의 구성원에 의하여 널리 확대되었다. 두 사람의 탁월한 대변인은 헬라적 유대주의 현상으로 기독교를 연구하는 부세트이고 헬레니즘에 있어서 신비주의를 연구하여 영지주의 기원을 이란과 만데안 전통에서 추적하는 철학자 라이첸스타인이다. 부세트교부들에 의해 보고된 그노시스의 교훈들을 헬라 철학에 의한 비교적 오래된 동양 신화의 변형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그는 그노시스의 구원자의 이교적 증거로서 필로, 헤르케틱문학과 갈대안 신학을 인용한다. 특히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전통을 강조한다. 라이첸스타인은 그의 처음 중요한 작품 포이만드레스에서 원인간에 대한 그노시스 신화를 기독교 이전 기원으로 설명한다. 그는 헤르메틱 소책자인 포이만드레스에서 원인간 교리는 기독교 이전에 있었으며, 이 소 책자는 가장 오래된 그노시스 문헌이라고 한다.

포이만드레스에서 인간은 하늘로부터 타락하고, 구원하는 계시가 주어지고, 다시 천체계 영역으로 승귀한다. 리츠바르스키는 만데안의 기독교 이전 기원을 믿었다. 부세트, 리츠바르스키, 라이첸스타인의 연구로부터 불트만은 구원자 신화가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헬라주의 시대보다 오래 전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1950-1960년에는 불트만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의 영향 아래 바울에 대한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다. 그들은 보른캄, 하엔첼, 쉬미롱 등이다. 1946년 쿰란에서 사해사본과 나그함마디에서 콥틱어 영지주의 고사본의 발굴은 기독교 이전 영지주의 논의에 대한 중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3) 영지주의자들

영지주의자들로서는 그 첫째가 시몬 마구스와 시몬주의자들이 있었으며, 시몬은 영지주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교회의 교부들은 시몬을 모든 이단의 아버지로 간주하였다. 그는 사도들과 동시대 사람이었고,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는 종교문제의 무법 지대로 소문나 있었고 정통파에 있어서 의심을 받았다. 그는 사도행전 8장에 나타나 있는 역사적 인물로서 처음에는 마술사였으나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고, 나중에는 이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단들의 아버지인 시몬은 하나님처럼 경배되었는데 시몬의 체계는 몇 가지 기독교 요소가 가미된 혼합주의적 조직이 형성되었다. 시몬의 체계는 단지 기독교 교리를 불완전하게 이해하여 근본적으로 이교도적인 조직에 흡수하였던 것이다. 어떤 것은 스토아 철학에 기인되고 어떤 것은 동양에 기인되고, 어떤 것은 기독교 요소로부터 기인되나 기독교적인 요소들은 대체로 적은 부분에 활용된다. 시몬주의자들의 분파는 3세기까지 계속되었는데, 시몬 마구스의 이름을 취하여 시몬을 구원하는 신으로 숭배하였다.

둘째로 니콜라주의자들도 영지주의에 속했었다. 니콜라주의자들은 요한 계시록 2장에 있는 방탕주의 분파로 말하여진다. 니골라는 안디옥의 개종자이며 행 6:5의 예루살렘 일곱 집사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니골라는 참 신앙으로부터 변절되었고 육체는 남용되어져야 된다는 위험한 원리를 가르쳤다. 즉 기독교는 이미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다. 그러므로 율법을 행하는 일과 생활은 이미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노시스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모든 종교의식은 인간에 의하여 참된 숭배로 변형되었다. 그들은 이교의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았다.

셋째로 세린더스는 1세기 끝날 무렵에 소아시아에 나타나서 늙은 사도 요한과 투쟁하였다. 그는 출생 또는 개종으로 에집트인이며 유대인이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바울에 반대하는 거짓 사도들 중의 하나였으며 할례를 주장하였다. 그는 팔레스틴과 갈라디아를 여행하였고 에베소에도 간 적이 있었다. 그는 마태복음서를 일부 삭제한 것 외에는 모든 복음서를 거부하였고 모세 율법의 정당성과 천년 왕국을 가르쳤다. 특히 그는 종교적인 철학적 사상의 경향을 나타내었는데 인간 예수와 더 높은 영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구별하여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 높은 영이 강림하였다가 그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에게서 다시 떠났다는 것이다.

넷째로 영지주의의 체계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 있는 사람중의 하나가 바실리데스이다. 바실리데스는 발렌티누스와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고 하드리안과 안토니누스피누스의 통치 동안에 성장하였다. 바실리데스는 서기 125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하였고 발렌티누스는 140년에 로마에 왔다. 바실리데스는 그노시스의 첫 번째로 잘 발달된 체계를 세웠다. 그러나 그의 체계는 너무 형이상학적이고 복잡하여 대중적이지 못했다. 그는 사도 맛디아의 제자이며 사도 베드로의 동역자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초기 젊은 시절은 기독교인들의 제 2세대에 속하였고 이러한 사실은 그에게 신약성서의 문헌을 인용하는 것의 신중한 변증법적 사용을 부여한다. 그의 체계는 에집트의 천문학, 피타고라스의 숫자적인 상징주의에 근거하였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드러내는 것이나 플라톤주의 유출설, 이원론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섯째로 발렌티누스는 영지주의 체계에서 가장 영향있고 심오하며 화려한 작가였다. 발렌티누스는 큰 학교를 세웠고 그의 교리를 서방에서 전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생도인 디도로부터 그의 체계를 이끌어 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환상으로 로고스로부터 계시들을 받은 것처럼 가장한다. 그는 아마 에집트계 유대인이며,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다. 발렌티누스는 로마에서 가르친 첫 번째 영지주의자였다. 그의 체계는 교묘한 신론과 우주 발생 서사시이다. 그는 창조, 타락, 구원이란 세 가지를 묘사하였는데 그 자신의 풍부한 상상과 동양적이고 헬라적인 사색과 기독교 사상으로부터 자료를 이끌어 냈다. 그는 요한복음의 강화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폭넓게 주석하므로 자신의 범신론적이고 신화적인 공상을 사도들의 말들 즉, 로고스, 독생자, 진리, 삶, 플레로마, 에클레시아 등에 넣었다.

여섯째로 사토루니러스는 하드리안 통치하의 바실리데스와 동시대에 안디옥에 있었으며, 그는 시리아 그노시스파의 창시자로서 시몬과 메난더의 제자였다. 그의 체계는 하나님과 사탄의 두 가지 대립 사이에 엄격한 이원론과 금욕적인 인격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결혼과 자손은 사탄으로부터 왔으며 예언들은 세상을 만든 천사들에 의해 말해졌고 사탄도 하나의 천사로서 세상을 만든자의 적이며 유대인 하나님의 적으로서 예언을 말하였다. 즉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은 천사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하나님을 제하고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세상에 왔으며, 그리스도의 몸은 육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모양만 있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 구원은 금욕하는데 있다고 보았으며 육식은 금물이었다.

 

B. 주요 사상

(1) 이원론적 사고

한스 요나스는 영지주의 이론을 ‘이원론’이라고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이론으로부터 하나님과 세계, 인간과 세게와의 관계를 다룬다. 신은 절대적으로 우월한 자이며, 본질에 있어서는 우주의 본질과 다르다. 신은 창조하지도 않았고 통치하지도 아니하였다. 세상은 어두움의 영역이다. 세상은 하위의 세력들의 작품이다. 이 하위의 세력들은 비록 신으로부터 나왔으나 참신을 알지 못하고 그들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신에 대한 지식을 방해한다. 이러한 하위 세력들 곧 아르곤들은 영지주의의 사색의 중요한 주제이다. 초월자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감추어져 있고 자연적인 계시와 조명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이원론에는 유대교적인 형태와 이방종교적 형태가 있다. 그 첫째가 현상 세계를 전적으로 악한 것으로 보는 관념이다. 즉 이데아의 세계와 보이는 현상 세계를 대조시킨 플라톤 이원론이다. 그 다음 하나는 페르샤의 이원론 개념이다. 즉 한 쪽을 인간이 항상 돌아가려 하는 선한 세계로 보고 다른 한 쪽을 인간이 갇혀 있는 전적으로 악한 세계로 보는 관념으로 해석하여 부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지주의적 이원론은 신화로서 그 기본 형태를 묘사하고 있다. 즉 빛의 세계와 어두움의 한 인간이 창조되지만 빛의 세계로부터 받은 영은 어두움의 세계에 속한 육체속에 감금되어 그 속에서 유하게 되었다. 인간의 영적 존재는 이 세상 즉 어두움의 세계에 대해 이질적인 존재이며 이 이질적인 생명은 존재로서 다양하게 명령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적 이원론은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원론이다.

 

(2) 구원관

구원은 보이는 세계와 그 통치자인 혹성계의 성령에서 구속된 상대로부터의 자유이며, 자유를 얻는 길은 영적 실체의 참된 세계와의 합일을 가져다주는 지식으로 보았다. 이들은 인간을 세 계급으로 분류하며 영적 계급, 보통 교인들로 구성된 정신적인 계급이며, 셋째는 물질적 계급으로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이 구원의 지식은 완전한 자에게 주어지며 영적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소수인들에게만 그 지식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이 가능한 영적인 인간과 사상의 전수가 불가능한 물질적 인간으로 인간을 구분하였으나 후기 영지주의 특히 발렌티누스 학파는 이에 한 부류를 더 첨가하여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영적인간과 구원이 가능한 정신적 인간과 구원의 가망이 없는 물질적 인간으로 삼분하였다. 첫째 계급에 속한 자들만이 보다 높은 지식을 가질 수 있으며, 최고의 축복을 받는다. 둘째 계급은 신앙과 행위로 구원얻을 수 있으나 보다 낮은 축복을 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적 구속자 신화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배경으로 갖는다. 즉 물질 세계에 감금된 인간의 신적인 본래의 자아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신적 세계로부터 그노시스가 전수되어야 한다. 인간은 이 그노시스를 전주 받으므로 자기의 참자아를 발견하게 되고 자기가 신적인 존재임을 알게 될 때 구원의 단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구원이란 암흑의 물질로부터의 해방과 최고신으로의 복귀를 말한다.

 

(3)신 관

영지주의자들은 신을 여러 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자존하는 지고의 존재는 제 1원리로서 그들이 비토스라고 부르는 지고신이다. 지고신을 정점으로 30여 개에 달하는 영적인 광명계의 서열 체계를 수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순수무구한 지고신은 악한 물질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 세계는 악하며 이 보이는 세계의 창조주와 통치자가 되는 에온은 높고 선한 신이 아니라 열등 불완전한 하위신 데미우르고스로서 유대인들이 섬긴 하나님 야훼라는 것이다. 세계와 인간을 창조한 에온은 최하위신 데미우르고스로서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의 중간적 입장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되었으며 이 하위신은 인간을 구속할 계획도 능력도 없었다. 그러므로 최고의 에온이 완전한 해탈을 확보해 줄 구속자로서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데 그 구속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노스틱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최고의 에온으로서 높이 평가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의 교리를 부인하였다. 그 이유는 절대적 존재는 유한한 존재와 진정한 결합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며, 물질은 악하고 영적 세계는 항상 물질과 충돌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현설을 주장하여 구속자에게서 참 인간성을 모두 박탈해 버렸으며 그리스도의 역사적 인격성을 파괴해 버렸던 것이다.

 

(4) 윤리관

그노시스 윤리는 두 형태를 취한다. 하나는 지나친 금욕주의이고 다른 것은 자유 분방주의이다. 다수파는 육체에 고행을 하고 결혼을 금하는 금욕주의를 요구하여 신적인 영혼이 각종 감각적 굴레와 육체적 정욕으로부터 해방받아 좀 더 고상한 상태를 갈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어떤 분파는 부도덕적인 성적 난행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유다서는 신적인 사랑이나 사랑의 축제를 악용하여 성적 문란을 야기했던 것을 경고한 것이다. 이런 종류의 윤리관 속에서 어떤 때는 금욕주의와 방종이 동시에 섞여져 있었다. 몇몇 노스틱파들은 자기들이 본질적으로 매우 영적이기 때문에 부패할 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교도들의 제전이나 검투사의 시합 장소에 거리낌없이 갔었으며, 심지어 그들의 교리를 받아들인 여자들과의 불규칙적인 연합을 서슴치 않았다.

 

 

3. 결 론

A. 긍정적 기능과 부정적 기능

(1) 긍정적 기능

영지주의가 그 긍정적 기능이 있었다고 하면 영지주의에 대처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의 대답이 삼중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들 수 있다. 1) 정경을 고정시켰으며, 2)전통의 보장자로서의 감독직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자극이 되었으며, 3)기독교 교리를 누구든지 쉽게 암송할 수 있는 신조 형식의 기독교 근본적 교리를 요약하였다는 점이다. 교리를 요약하므로 교리의 발전과 신학적 체계를 세우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 교리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지주의의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는 다르다는 사상에 반대하여 창조주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동일한 신임을 밝히게 되었으며, 기독교의 신관은 그노시스주의의 신화적 추리에서 구출되어 교회는 하나님이 최고의 존재요,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신구약의 동일신이라는 진리를 의식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또 창조주와 그의 창조적 행동에 대한 잘못된 교리가 제거되었으며, 또 물질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만 생각하는 잘못된 이원론이 정복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단순히 영체속의 한 인간으로 보려는 그노시스주의에 대항하여 신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특성이 강조되었으며, 동시에 그의 인간성이 옹호되었던 것이다. 즉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다 갖춘 분임을 밝히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저들의 가현설에 대항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동정녀 탄생, 수난, 죽음, 부활 등의 위대한 사실을 모두 명백하게 설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기독교회는 그들의 속죄론에 반대하여 속죄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통하여서만 이루어진다는 교뢰를 제창하였으며 또 그들의 편협주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 동의 복음은 전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역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영지주의의 사색이 기독교 안에서 지적 요소를 강조하게 되었고 이것이 교리 발전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그 외에도 영지주의는 결국에 가서는 실패하였지만 신비주의를 어느 정도 교회에 전해 주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영지주의는 2세기에 풍부한 문학을 산출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 예로서는 교회의 전승 및 신약문서의 본문과 내용, 교의학과 윤리학등에 관한 비판적 저작들을 만들어 낸 선구자적 사업은 그들에 대항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 부정적 기능

영지주의의 부정적 기능을 살펴보면 그 첫째가 이원론을 주장하여 물질을 죄악시한 점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에 입각하여 물질계와 영계로 존재를 나누고 물질을 죄악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은 영계를 다스리시고, 데미우르고스가 물질계를 만들어 다스리는 것으로 말함으로 참하나님과 창조주를 분리시키는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그 두 번째가 기독교의 역사적인 요소들을 과소 평가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현설을 주장하며 예수의 육체 탄생을 부인하여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생애, 행위, 교훈, 죽음 및 부활로부터 신앙을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또 어떤 파에서는 예수는 육체를 입었으나 그것은 메시야로서 공적 사역을 하는 동안 잠정적으로 빌어 쓴 것으로 보았으며, 또 다른 파에서는 그리스도는 결코 육체와 관련이 없었으나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며 사실 순수 정신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며, 또 다른 체계는 그리스도를 하나의 ‘에온’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견해로 그리스도는 예수에게서 분리시켰으며, 또한 영지주의는 예수와는 다른 사람이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서 사람들의 구주로 보냄을 받았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 견해들로 예수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하여 기독교의 역사성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원리에서 그들은 인간의 부활과 심판을 부인했으며, 신비의식이 성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을 배격하고 반 유태주의로 나가던 저들의 사상은 기독교에 들어와서도 구약성서를 완전히 부인하였으며, 혹은 노스틱 체계를 위해서 성서를 우의적으로 해석하였는데 대부분의 그노시스주의자들은 일체의 역사적 문학적 요소를 배제해 버리고 심리적인 경험으로 재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또한 저들의 구원의 방도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지식을 통해서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지식이란 그노시스 혹은 ‘보다 높은 지식’으로서 초자연적 지식을 의미했으며 이것은 소수 영적인 지식인에게만 국한된다고 보았으므로 구원이 극소수의 특정인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보아 기독교를 편협한 종교로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지주의는 기독교를 혼합주의 종교로 만들려고 했다는 점이다. 영지주의는 유대적 요소, 헬라적 요소, 이런 여러 근원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이용해서 기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하나의 우주적인 종교가 되게 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하였으며, 기독교를 당시의 종교 풍토에 적응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부우세트는 노스틱주의를 본질적으로 기독교를 벗어난 후퇴적 운동, 즉 보편적 종교의 발흥에 대한 혼합 종교의 반발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유대교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면서 나중에는 유대교적 요소와 기독교적 교리 그리고 이교 사상의 신비주의적인 것들을 혼합시킨 것으로 영지주의는 이 혼합을 시도하기 위해서 생략과 해석에 의해 적응을 시도하려다 복음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영지주의는 3세기까지는 번창하였으나 얼마 못가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영지주의 이단을 결속하여 대치하지 않고 저들과 제휴하였던들 오늘의 기독교 역사도 저들과 함께 사라졌을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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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진혜 “요한의 신학 사상과 만데안 문서의 영지주의 비교” 미간행 석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1984

8. 김헌태 “영지주의와 신약성서에 나타난 그노시스” 미간행 석사학위논문 ,

장로회신학대학대학원, 1984.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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