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얻는 영성
(방성규, 한영신대 교수)
기독교 영성은 몸에서 시작해서 몸과 함께 가는 영성이다. 이렇게 말하면 당장에 이런 오해가 생긴다. "인도의 요가나 요즈음 한창 유행하는 기와 어떻게 다른가? 그들도 특히 육체의 수련을 강조하지 않는가?" 이들 수련방법에 의하면 육체의 어떤 일정한 자세가 깊은 호흡을 하게 하고 그래서 정신이 집중되게 도와준다고 한다. 이들은 육체를 강조하면서 육체의 건강이 정신의 건강을 증진시켜 준다고 한다. 이들의 말은 사실이다. '심신의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의 정보들이 축적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성에서 몸을 중요시하는 것은 육체를 건강하게 하는 훈련의 한 방법으로써가 아니다. 더 더욱이 어느 특정 육체의 자세가 영적 결과를 만들어 준다고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 영성에서 몸을 중요시해도 몸의 어느 특정한 자세나 훈련이 기독교 영성의 근원인 성령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깊은 호흡이 우리 몸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지만 이런 특정한 호흡을 해야 성령의 호흡과 합쳐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혹 이러 저런 신체적 방법을 기도의 자세에 도입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한계는 분명해야 한다. 어떤 육체적 자세도 성령을 마음대로 조정(manipulation)할 수 없다. 그래서 기독교는 그 오랜 영성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다 하게 내놓을 육체적 수행방법이 없다. 인간을 영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분은 오직 성령 자신의 의지이지 인간적 수행방법이 아니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몸으로 얻는 영성이라 하면 위와는 정반대로 오해하기도 한다. '영성'이라면 '비육체적,' '비현실적,' '초자연적' 현상으로 간주한다. 이런 오해 배후에는 영과 육의 이분법적 사고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즉 영성을 강조하는 것은 오직 영적인 것만 강조하고 육체나 사회는 무시하고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성을 초자연적인 신비현상쯤으로 간주해 버린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는 그 오랜 역사에서 영과 육의 이분법적 사고로 인해 고통을 받아왔다. 무엇보다도 초대 교회는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와 싸움에서 기독교는 결코 영과 육의 이분법 구조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2세기 중반 교회가 로마 정부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영지주의는 육체적 순교는 무지의 소치라고 비난하였다. 육체적으로 순교한다고 무슨 영적인 각성이 되느냐는 것이다. 1940년대에 발견된 영지주의의 나그함마디 문서 중 [진리의 증언]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깨달음 없이 단지 육체적 죽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다고 비난한다. 반면 교회의 감독이던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신앙의 문제로 순교한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 영적인 것만 강조하고 육체적 어려움은 피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신앙을 단지 영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한 것이 아니다. 또한 육체적 고통을 가하면 영적 성숙을 가져온다고 가르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신앙은 육체적 차원과 영적인 차원이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 이야기를 보다 현장감 있게 들어보자. 신앙적인 문제로 체포 구금되어 고문 받고 배교를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영지주의의 말은 참으로 미혹적이었다. 영지주의의 설명에 의하면 영적인 깨달음 없이 미련하게 순교를 택하느니 훗날 영적인 깨달음을 위하여 오늘 배교하라는 것이다. 어차피 신앙이란 마음으로 믿는 일이니 육체가 무슨 행동을 하든 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더 영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당장에 당해야 할 육체적 고통과 두려움을 감안한다면 이 것처럼 솔깃한 유혹은 없었다. 그래 지금 예수 모른다고 하고 나중에 더 큰 일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나 하나 여기서 죽는 것보다는 나중에 더 많은 사람을 예수 믿게 하면 하나님 편에서 보아도 더 이익이 되지 않겠는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입으로 소리 내어 고백하는 일이 요즈음 상황에서는 큰 의미 없이 오히려 소음으로 들릴지 모르나 순교의 상황에서는 정말 믿는지 아닌지가 판가름 나는 일이었다. 육체가 따라오지 않는 마음은 많은 경우 거짓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막 수도사들 이야기 혹은 수도원 이야기하면 비사회적, 비육체적 영성을 추구한다는 선입관을 가진다. 수도원적 영성을 영과 육의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수도사들이란 세상살이에 염증을 낸 사람들이나 육체적 삶에 싫증은 낸 사람들이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 이들이 영적으로 사는지는 모르지만 자신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가정을 포기한 비현실적 이기주의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럼으로 이들이 아무리 영적이라 할지라도 결코 우리 현실에 사는 사람에게 주는 교훈은 없다고 단정한다.
틀린 생각만은 아니다. 수도원 역사에서 때로 비난받을만한 생각을 가진 적이 있고 행동도 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 당시의 마틴 루터가 목격한 수도원 훈련이 마치 구원이 인간적 훈련에 의해서 얻어지는 양 가르치고 있었다. 금식을 하고, 철야를 하는 일들이 중세기에는 참회(penance)의 방법으로 처방되고 있었다. 마치 체벌 받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글의 목적은 기독교 영성의 뿌리가 되는 수도원의 영성이 무엇보다도 몸으로 시작하고 마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우선 수도원에 대한 간략한 이해를 해보자. 3세기 후반 아직 순교가 마지막 극에 달할 때 몇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신앙 생활을 이집트 사막에서 독신이나 집단적으로 한 것이 사막 수도원의 시작이었다. 독신적인 삶을 살았던 안토니와 공동체 생활의 수도원을 만들었던 파코미우스가 효시였다. 사막이 수도사들로 붐비게 된 것은 4세기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참된 기독인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순교에다 두었던 그 신앙적 힘과 의식이 희미해지는 시점에서 살아있는 순교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성서의 가르침, 하나님의 온전함과 같이 온전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실생활에서 이루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들의 열망은 기독교 영성의 역사에서 아주 근본적인 뿌리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들의 영성을 배우게 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존되어 내려온 저서들 때문에 가능하였다. 우선 알렉산드리아 감독이었던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의 생애]가 있는데 후에 직전 라틴어로 번역된 이 책을 읽고 크게 감명 받았다고 어거스틴의 자신의 [고백록]에서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책은 [사막교부들의 금언]이라는 책이다. 원래 이 책은 어느 한 수도사가 쓴 책이 아니고 200-300년을 걸쳐서 모아진 내용들을 누군가가 편집한 책이다. 그 내용은 유명했던 수도사들의 단편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거나 이들이 했던 짧은 말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는 Apophthegmata Patrum(교부들의 짧은 경구 모음)이라는 제목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 책은 단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교부들의 이름에 따라 배열한 모음집도 있고, 주제별로 배열한 모음집, 또는 무명으로 순서 없이 배열된 모음집도 있다. 이 책을 읽는 우리의 한계는 이 책이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도사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남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애쓰지 않았기에 이 책은 수도사들이 가지고 있었던 많은 것들 가운데 지극히 일부만 내려져 오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사막에서 어떤 영적 훈련을 하고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것만 가지고도 오늘 우리 시대의 삶을 재조명하고 변화시키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 책에는 초대 교회의 기독교적 영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내용들이 무한히 담겨져 있다. 이 글에서는 육체와 관련해 어떤 영적 이해를 하였고 훈련을 하였는지 살펴본다.
[사막교부들의 금언]이라는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 영성은 몸을 통해서 얻는 영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몸이란 한 개인의 육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 현실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후에 사막에서 큰 영적 스승으로 추앙을 받던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육체적으로는 난장이었던 그가 후에 큰 영적 스승으로 성장하기까지에는 많은 훈련이 요구되었지만 특히 초기 시절에 한 깨달음이 그를 도왔다. 요한은 천사처럼 살고 싶어서 수도원에 들어와 오직 말씀만 읽고 기도하고 예배만 참석하고 싶어했다. 우리 이해와는 달리 수도원에서는 노동이 권장되고 있다. 그런데 요한은 오직 영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고 그렇게 살고 싶어했던 것이다. 한 주일을 그렇게 보내고 하루는 공동체의 같은 선배 수도사를 찾아가 불러도 영 대꾸를 안 하는 것이었다. 분명 안에 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했다. 그 선배 수도사는 요한에게 "요한은 천사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들이 모여 사는 여기 공동체에 없노라"고 대답해 주었다. 또 어는 수도사는 여행 중에 이런 저런 수도원 공동체에 들러 훈련의 방법을 비교하고 자기 나름대로 비평도 하였다. 한번은 어느 수도원에 갔더니 낮에 전부 노동을 하고 신앙의 훈련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약간은 비난조로 왜 신앙적인 훈련을 안 하느냐고 물었지만 그 공동체 사람들은 대답이 없었다. 그 날 저녁 식사시간이 지났는데도 부르지 않아 참다 참다못해 저녁식사 안 하냐고 물었다. 공동체의 한 형제가 천사 같은 말만 하셔서 인간의 식사는 안 하시는지 알고 자기들끼리만 먹었다는 것이었다. 수도원 영성은 인간의 삶으로부터 시작하고 마감한다.
수도원 영성을 다음의 실제적인 육체적 습관과 본능과 연관하여 어떻게 훈련하였는가를 살펴보자.
1. 잠: 수도사들마다 자신의 건강 상태에 따라 잠자는 시간을 조절하였다. 로마 황실의 자제를 가르치다가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와 수도 생활을 하던 알세니우스는 하루 1시간 잠이면 족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어떤 수도사는 14일 동안 서서 기도하면서 졸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서있던 둘레에 가시나무를 쳤다지만 모든 이들이 다 이렇게 생활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는 잠을 즐기지 못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본능이 귀한 것이지만 죄에 빠진 인간에게는 늘 유혹의 근원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잠으로 인해 하나님 섬기는 일이 소홀히 되지 않도록 경계를 하였다. 단순히 장수하고 건강하기 위해 수면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내 의지가 원할 때 내 몸이 온전하게 드려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2. 식사: 대부분 금식을 많이 하였다. 어떤 이는 이틀에 빵 하나로 한끼만 식사를 하는데 너무 힘이 들어 늘 고통 가운데 있었다. 그래서 하루는 자기 스승(남자는 abba, 여자는 amma라고 불렀다)에게 자기 고통을 말하였다. 스승은 하루에 빵 반쪽으로 한끼만 식사하도록 처방을 하였다. 오늘 우리에게는 너무 웃기는 일이다. 이틀에 빵 한 개를 먹는 것이나 매일 반 개를 먹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훈련 가운데 있던 수도사에게는 너무 중요한 일이었다. 그 수도사는 이 새로운 처방에 평안을 얻었다. 어느 수도사는 음식에 소금을 쳐 먹지 않는 전통의 공동체에서 병이 나서 빵에 소금을 쳐서 먹다가 스승에게 들켰다. 스승은 다른 수도사들을 부르며 당사자에게 소금을 먹고 싶으면 도시로 가라고 한다. 그들에게는 소금 한 톨도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영과 무관한 육체적 음식이 아니다. 탐식이 초대 교회에서 큰 죄악으로 여기는 이유는 식욕이란 본능에 숨겨져 오는 영적 훈련을 파괴하는 사탄의 유혹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음식과 우리 신앙과는 별로 중요하게 연관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잘 먹는 일에 신경 쓴다. 문화적으로 잘 대접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라 목회자들이 본의 아니게 미식가들이 되어간다. 분명 여기저기 아직 굶는 이들이 많은데 예수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비싼 음식으로 입이 고급이 되어 가고 있다.
3. 의복: 성경에 큰 죄인도 아니면서 정말 큰 죄인으로 여겨진 사람이 있다. 여리고 성을 함락한 후에 전리품을 숨긴 아간이다. 숨긴 품목 가운데 옷이 있었다. 문둥병을 고침 받고 고마워하던 나만 장군에게 가 거짓으로 속여 옷을 받아온 게하시도 있다. 이들에게 옷은 부끄러움을 가리는 기능이나 추위나 더위를 피하는 기능으로의 의복이 아니라 자기과시와 허영이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너무 고급스러운 옷들이 있다. 부자동네 교회에 가보면 고급 옷으로 치장한 교인들이 참 많다. 우리는 부끄럽게도 모든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교회의 여인네들이 청문회에 나가 옷 때문에 거짓말하는 모습도 보았다. 값진 옷을 탐하는 것이 죄이다. 수도사들이 입는 옷을 어떤 아바는 이렇게 정의한다. 시장에 나가 버려서 3일 동안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옷이 수도사가 입을 옷이라 한다. 이 옷이 이 세상 하직할 때 그들이 이 땅에 남겨놓은 유일한 유산이었다. 이들은 좋은 옷을 입은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입을 세마포는 가격이나 미적 감각과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가 단정히, 깨끗이 옷을 입을 필요가 있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사치나 허영으로 비쳐지는 옷을 기독교인들이 입어서 되겠는가? 옷도 신앙적인 의미가 충분히 지니고 있다. 단순히 외적인 멋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영을 담는 옷이어야 한다.
기독교 영성, 구체적으로 수도원 영성은 몸을 통해, 몸과 함께 시작하고 맺게 되는 그런 영성이다. 의식주라는 현실적인 삶에서 신앙이 우러나오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잘못된 영성이 되 버린다. 그러기에 아바 엘리야스의 "영이 몸과 함께 이중창을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은 헛될 것이다"라는 말은 우리 시대에 더 필요한 교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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