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마태복음28장1-10절(부활신앙의 始終) 13.3.31(부활주일)

하나님아들 2013. 9. 28. 13:48

 

마태복음281-10(부활신앙의 始終) 13.3.31(부활주일)

 

. 종려주일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던 예수님은 목요일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나오실 때 가룟유다의 입맞춤의 싸인에 의하여 유대병졸들에게 잡히시게 됩니다. 그길로 유대교 대제사장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신성모독이라는 유죄판결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새벽 로마에서 파견된 유대총독 빌라도의 최종 결제하에 두 손과 두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형에 처하여지게 됩니다. 유대나라 최대의 명절 유월절인 금요일 오전 9(제삼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정오(6)때부터 오후 3(9)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그때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마지막 절규를 하시고 운명하시게 됩니다. 군병들은 해지기전에 주님의 옆구리에 창을 찔러 최종 죽음을 확인한 하였고, 그 후에 주님은 아리마대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안치되십니다. 그리고 사흘 째 되는 주일 새벽에 주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이때부터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위에 우리 기독교가 세워지게 됩니다.

. 주일 새벽에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먼저 만나주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베드로를 위시한 11제자들을 제일 먼저 만나주실 것 같은 데 그리하지 않고, 여자들을 먼저 만나주셨습니다. 순서적으로 나타난 말씀을 들어보시면 막169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도 2016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제자들이 무덤을 향하여 뛰어가서 확인했지만 빈 무덤일 뿐이었고, 주님은 한동안 제자들을 만나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시고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자들과는 전에 미리 말씀하신대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누가복음24장의 엠마로 마을로 가던 두 제자들과도 동행하셨지만 그들의 마을에 들어가서 함께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나누어 주실 때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은 곧 모습을 감추셨습니다. 부활예수께서는 왜 그렇게 사랑하신 제자들을 먼저 만나주지 않으셨을까요?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주께서 원하시는 부활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부활신앙은,

 

1. 마음을 주님께 다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우리 자신의 마음인데도 우리 뜻대로 안될 때가 참 많습니다. 내가 믿는 다는 것은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은 원래 그것이 작성될 때 래틴어로 작성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을 래틴어로 크레도라고 하거든요. 크레짓 카드 할 때의 크레짓과 語源이 같습니다. 그 크레도가 나는 믿습니다입니다. I believe in 하고 시작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입니다. 이 믿습니다가 원래 마음을 드린다 심장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단종된 기아자동차 크레도스도 고객 신뢰라는 뜻입니다. 믿는 다는 것은 마음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갈릴리 해변의 막달라마을 출신 마리아는 그녀의 과거는 7귀신이 들려 황폐하게 살았습니다. 말이 일곱귀신이지 일곱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최악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의 몰골이 아닐 정도로 완전히 망가져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성들이 존중받지 못하던 그 시대 사회에 여자로, 그것도 일곱귀신이 들려 삶도 몰골도 다 망가진 이 마리아를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그 막달라 마리아가 치료를 받고 난 다음부터는 주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얼마나 주님을 쫓아다녔든지 많은 중세시대에는 낭설까지도 생길정도로 그녀는 예수님을 바짝 쫓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그 현장에 그녀는 있었습니다. 2755-56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데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고 합니다. 나중에 마2760-61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바위로 된 무덤에 안치한 그 무덤의 자리에도 거기 막달라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읽으신 281절에도 안식일이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그러니까 부활주일인 오늘 새벽이지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리아는 아예 마음이 예수님께 다 가버린 사람입니다. 그곳이 십자가 현장이던지 그곳이 무덤이던지 그 때가 새벽이든지 그녀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께 다 가버렸습니다. 마음을 다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주님은 자기 제자들을 먼저 만나주시지 않았을까요? 대제사장의 뜰에서 주님이 심문을 받으시게 될 때 멀찍이 쫓아가던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 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셔서 포박을 당하여 죄수의 한사람처럼 심문받으시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데에 그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24장의21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과 합세하여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함께 가시는 분이 부활 주님이신 줄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입니다. 그에게 희망을 걸었었는데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이제는 萬事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고향마을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다른 꿈을 꾸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자신을 부활주님으로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오직 그 마음을 주님께 다 드린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에 산다는 것은 세상으로 가던 마음을 주님께 송두리째 다 드리는 것입니다.

그 같은 신앙의 맥락에서 주님은 아비나 어미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산상복음을 말씀하실 때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성도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왜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됩니까? 마음을 다하여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 즉 마음을 다 하나님사랑에 지출하여 완전적자가 난 상태의 마음, 그것이 가난한 심령입니다. 다른 데에 쓸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그렇게 마음을 주님께 다 드린 자입니다. 그러니 비록 죽은 屍身이지만 주님계신 곳에 그녀의 마음을 두었습니다. 주님은 그 막달라 마리아를 무덤에서 부활하시어 큰 승리를 이루신 역사적인 순간에 맨 먼저 만나주셨습니다.

흔히 마음을 어디다 두고 사는냐 그러지요, 마음을 주님께 다 드린 사람 오늘도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자신을 주시고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믿습니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처럼 마음을 주님께 다 드리는 부활신앙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부활신앙은, 1)마음을 주님께 다 드리는 것이고,

2. 주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어 장사되신 다음날이 안식일이 아니었다면 마리아는 예수께서 안치되었던 그 무덤 앞에서 함께 밤을 새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녀는 계속 그 무덤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신 예수님과 함께 마음이 장사되어버렸습니다. 다른 데에 갈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바로 그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이러한 막달라마리아의 태도를 대하면 바로 로마서 63-5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이미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 장사된 자 자들이라고 합니다. 믿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버렸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죽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몸은 살아있고 이전과 똑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함께 죽은 것을 말한다면 이것은 믿음의 사건이고 마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마음으로 믿는 것이쟎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날마다 살고 있는 현장 또는 보내어진 곳에서 나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어진 우리의 수많은 과제들을 어떻게 날마다 수행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의 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이 있습니다. 그 이삭은 얼마나 아브라함의 마음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이삭이 성인이 될만큼 잘 자랐을 때 하나님은 그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번제로 바쳐라고 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순종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나중에 그 아들에게 손을 대지말라고 하시면서 다시 돌려줍니다.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마음에서 완전히 떼어버린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아들앞에서 죽은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에게서 마음을 떼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함께 살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이삭은 이삭대로 얼마든지 믿음의 조상의 한사람으로 잘 자리잡아가게 됩니다.

2)가끔 텔레비전에서 한국은행의 금리에 관한 뉴스를 전할 때 보면, 조폐공사 거기서 일하는 자들은 만원 권, 오만원 권을 묶은 것을 짐짝처럼 실어 나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장면들을 보면 아휴 저 돈 다발 반만 있어도 떼부자가 되겠다든지, 저런 돈벼락좀 안 떨어지나 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 거기서 일하는 그들에게는 그 돈은 돈이 아니고 그냥 궤짝이고 귀챦은 짐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돈,돈 할 때의 그 돈이 아닙니다. 그 직원들의 돈을 대할 때의 그 마음이 바로 돈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또 은행창구에서 돈을 세는 아가씨들에게는 돈 다루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 많은 돈을 다루면 마음이 불안할 것 같은데 그들에게는 그 일이 아주 일상적 업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게 돈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첫 번째가 바로 우리 자신이 모든 대상에 대하여 죽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삶속에서 애착과 집착, 미련을 가지고 이루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쟎아요. 그러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그 자리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소원을 심으시고 새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하나씩 둘씩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시중 서점에 가면 우리를 부추기면서 3년만에 5천만원 만들기, 우리 자녀 명문대 보내기, 꼴찌에서 일등급되는 비결,,,전부 무엇을 이루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도 덩달아 개척교회 1년만에 200명 만들기,,,, 그런 책들이 나오고 세미나가 나오고, 정말 아주 열받게 만들어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이제 우리에게 이룰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예요. 다 이루신 그것 가지고 우리가 사는 것이지요. )창세기2장에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그 다 이루신 것을 먹고 누리고 그것을 찬양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함께 즐기는 것 이게 인간의 할 일이었습니다. 그 때 아담이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이 주신 하와하고 가정을 이루고, 하나님이 만드신 동물들 이름이나 짓고 그게 전부였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거기서 쫓겨났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천지창조 안에 우리가 누리고 감탄해하고 신기해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렇듯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신 것은 이제 믿는 자들은 무언가를 이루고 사는 것이 과제가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감사하고 놀라고 누리고 나누고 전하며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안으로 들어간 자들의 과제입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게 하시면 필요한 모든 자원은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독자적으로 노심초사하고 머리 싸매고 플랜을 짜고, 설계를 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살려던 나는 바로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새생명 가운데서 역사하십니다.

 

내기도 하는 그 시간 그대가 가장 지겹다? 즐겁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도 싫어한다? 즐거워하나니,,,,. 새생명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부활신앙입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부활신앙은, 1)마음을 주님께 다 드리는 것이고, 2)주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이고,

3. 언제나 예수님이 첫 번째인 신앙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라고 왜 다른 할 일이 없었겠습니까? 얼마든지 중요한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을 뒤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한 막달라 마리아를 주님은 부활하시자마자 제일 먼저 만나주십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제일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일천번제를 드린 것이지요. 나라를 위하여 해야 할 일을 기획하고, 요소마다 사람을 세워 조직을 만들고, 이웃나라와 화친조약을 맺고, 이런 것이 아니고 번제로 드리는 희생제물을 천 번을 드린 것입니다. 일천번제라고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이게 정말 보통일이 아니지요. 이게 무엇을 암시합니까? 왕이 되어 먼저 죽는 것이지요. 왕의 자리에서 죽는 것입니다.

천 번의 제물이란 죽고 또 죽고 철저히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솔로몬아 내가 무엇을 해주랴하고 물으시니까, 하나님 저는 암것두 몰라요, 제가요 참 완전 아이라니까요, 저는 찌질이 같이 출입도 제대로 못합니다. 그런데 이 많은 백성을 어떻게 다스립니까? “저에게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그랬는데 하나님이 그 한마디 기도에 그만 뿅 가셔서그에게 지혜를 주시고, 구하지 않은 長壽榮光도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다 주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귀영화의 상징이라고 할 때는 이짚트의 클레오파트라도 아니고, 로마의 영광을 실현한 씨이저도 아니고, 그 작디 작은 나라의 솔로몬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왕의 자리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솔로몬처럼 힘들이고, 공들여, 천번의 번제제사를 드릴 수고를 할 필요도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께서 다 이루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룰 것이 하나도 없도록 다 이루어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나를 위하여, 나 때문에, 나를 대신하여, 내가 되어 죽어주셨으니 나도 죽은 사실을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보다 주님을 최고로 잘 모시는 것도 없고, 이보다 잘 믿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이 첫 번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예수께서 원하시는 부활신앙은, 1)마음을 주님께 다 드리는 것이고, 2)주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이고, 3)언제나 예수님이 첫 번째인 태도입니다. 한 때 일곱 귀신이 들려 시달리며 고생하며 황폐하게 살았던 막달라 마리아였지만, 그녀는 십자가와 부활신앙으로 시작하는 크리스챤 제 1호입니다. 또 주님의 부할의 소식을 제일먼저 전하는 영광을 누린 가장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예수께서 그녀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알아주지 않아도 예수께서 기억해주시고 알아주시는 것이야말로 귀한 일입니다. 너무 나댄다는 비난을 들어도 개의치 않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사모하는 그 마음이 곧 귀한 믿음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보여진 이 고귀한 신앙자세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사랑하지않으면 죽기
글쓴이 : 롱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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