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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적 역사관

하나님아들 2013. 9. 1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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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역사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심 창 섭 교수

 

I. 서론

 

역사철학에 대한 정의는 너무 다양하고 많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한권의 책에 다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G.M. Young)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 많은 역사철학이 존재한다. 그 모든 것은 인류 역사에 아직도 해명된 논쟁이 너무나 단편적이고 적으며 여전히 대부분의 논쟁이 불완전하게 알려져 있다는 사실 그리고 타당한 추론을 내리기 위한 자료가 없다는 사실에 의해 파괴되어야 하리라”(천진성, 김진석, 역. p. 26) 그리고 또한 역사에 대한 공정한 객관성을 가지고 정의하는 것도 역사가의 능력의 밖의 일임을 미국의 사학자 베커(Carl Becker)는 표현하고 있다. “객관적이 되고자 하는 의지 조차도 그 자체가 빈번히 열정으로 변하고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사실을 창조해 내는 하나의 목적 의식이다.”(천진성, 김진석, 역, p. 26) 이러한 다양성과 객관성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통속적으로 인정되고 알려진 대표적인 유형에는 5 섯가지가 있다. 첫째는 순환론적인 역사관이고, 두 번째는 기독교적 역사관이며, 세 번째는 진보적인 역사관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역사주의적인 관점이고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사관으로 분류하고 있다. 본 강의는 이러한 제 유형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한 후 기독교의 사관에 대한 견해를 필하고자 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역사관과 기독교사관과의 관계를 비교 검토하므로 기독교인의 올바른 역사의식과 세계관을 확립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II. 비기독교사관의 발전과 유형들

 

1.순환론적 사관

 

순환론적인 역사 이해는 그리스-로마세계와 중국, 인도 그리고 중동 등에 널리 알려져 있던 사관이다. 이 견해는 역사는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수레바퀴 처럼 반복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계절의 주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듯이 인간세계의 역사도 계절의 주기처럼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는 농업사회에서 역사를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는 형태였다. 역사는 발생, 성장, 둔화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조 순환론과 우주 순환론 등의 다양한 형태로 인식되었다. 왕조 순환론의 개념은 중국의 역사 서술에서 볼 수 있다. 중국은 신왕조의 등장과 유지, 그리고 몰락의 진행과정에 대한 방대한 역사를 남겼다. 그런데 그 핵심된 개념은 천명사상이었다...그리고 이러한 역사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신화시대에도 존재하였다.

 

베빙톤(David Bebbington)은 "역사관의 유형들"(Patterns in history)에서 순환적인 역사관을 논하면서 그리스, 로마 철학들의 견해와 역사가들의 견해를 구분하여 순환사관에 대한 정의를 시도했다. 그의 주장은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은 인도나 중국같은 동양의 순환론에 익숙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헬라철학자들에게 있던 희년 사상이었다. 그리스의 문헌속에는 6세기 중엽에 피타고라스가 페르시아의 현인과 조로아스터 자신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피타고라스주의 자들은 희년을 역사과정의 한 순환의 도식으로 받아 들였으며 이 사상은 헤라크리투스 그리고 플라톤에게로 전승되었다. 즉 역사의 순환론적인 이해는 고대 철학자들이 가진 역사 개념의 근간이었다. 주기적인 파괴와 재생의 과정에 대한 신념은 또한 스토아학파의 원색적인 교리형태로 계승되었다. 이 사상이 바로 스토아인으로서 로마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가 새로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신념을 가진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것은 스토아학파들이 자아포기가 극기의 정신이라는 철학적인 태도를 잉태시켰다. 이런 극기 정신은 인도의 관점과 유사함을 나타낸다. 스토아학파의 보고인 세네카(Seneca)가 바벨론의 전기를 인용하여 순환론을 설명하는 경우도 동양의 순환사관의 영향을 시사하고 있다.(천진석, 김진형, p.40-42)

 

베빙톤은 그리스, 로마의 역사가들의 사관을 논하면서 철학자들보다는 사건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과정의 순환론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가들은 철학자들의 입장처럼 세상을 별 의미가 없는 관점과는 달리 광범위한 역사진행의 발전과정을 연구 서술하려 했다.

 

특히 “히스토리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여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헤로도투스(Herodotus, 484?-430B.C.)가 신화적인 개념의 순환사상을 극복하려는 노력하면서 역사에 있어서 순환적인 유형의 표시를 나타내지 아니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집필의 목적은 역사에 대한 연구결과를 서술하고 문화적인 업적을 설명하며, 왜 페르샤의 전쟁을 야기시켰는가를 보여주는데 있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가 직접적으로 순환사상을 파괴하는 시도는 보이지 아니했다. 단순히 체계적인 역사연구의 개혁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헤로도투스는 신이 역사의 동인이 된다는 개념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고, 신권적인 역사 개념을 인간 중심의 역사 개념으로 전환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신권적이고 신화적인 역사 서술에서 인본주의적인 역사 서술로 전환시켰다.

 

헤로도투스가 사용한 인간의 행한 일들의 전말에 의의를 파악하는데 역점을 두고 역사를 기록하는 과학적인 역사방법을 더욱 발전시킨 사람은 투기디데스(Thucydides, 460?-398B.C.)였다. 헤로도투스는 과학적인 역사 이론을 설파했지만 여전히 “불변하는 것만이 인식이 가능하다는 회랍적 로고스철학, 형이상학적 역사인식론”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반하여 투키다데스는 역사의 원인을 제 1원인과 제 2원인으로 구별하고 신적인 원인을 제 1원인으로 보고 제 2원인은 인간에게 있다고 보았다. 제 1원인에서 역사의 법칙들을 찾기 보다는 제 2원인의 규명에 역점을 두는 역사인식을 발달 시켰다. 그래서 그는 신화적인 로고스 개념에서 떠나 인간들사이의 복합적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을 역사의 과제라고 보았다. 복합적인 원인들을 규명하면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나 앞으로 일어날 사건 등 많은 점에서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사건들을 분명하게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시도하였다. 이는 고도로 발달된 순환론적인 사관이었다.(천진석, 김진영, p.42-43)로마시대에 와서는 복고주의적인 역사서술의 영향이 짙었다.

 

라비우스(Livius,B.C.59-A.D.17)와 타키투스(Tacitus)는 영구불변한 로마의 영광은 역사적으로 처음부터 영속적이었음을 인식하였다. 바로 이 사상은 본체의 영구불변성을 뜻하는 희랍의 본체철학(Substantialism)이며 곧 로고스 철학의 관념주의와 이상주의 개념이었다. 결론적으로 신화적인 이야기로 시작된 순환사관은 본체론이라는 관념론적인 체계를 견지하면서 영구불변한 실체의 정신적 작용의 범주내에서 모든 정치적 문화적 사건들을 이해하려는 역사의식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관념론적 사관은 국수주의나 국가주의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독일의 민족주의 그리고 일본의 황국주의의 배후에 잠재한 힘이기도 하였다.(이장식, p.142)

 

순환사관은 근대에 와서도 지속적으로 보존되었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인 라조(Emst von Lasaulx)는 그의 저서 [역사철학]에서 서양 오늘날의 서양 문명은 마지막 순환주기에 도달했다고 했다. 니체(Friedrich Nietzche)는 [짜라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영겁 사상에 대한 신념을 필했고, 이것은 기독교의 관점을 거부하는 순환 개념이었다. 그리고 짜라스투라가 바로 페르샤의 순환론의 근원인 조로아스터를 암시하는 표현이었다. 니체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였던 스펭글러(Oswald Apengler)는 창조의 시기인 문화시대와 쇠퇴의 시기인 문명시대를 나누어 농촌문화와 도시문화의 등식으로 19세기 서구사회의 문명을 마지막 단계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그는 1918년에 [서구의 몰락]을 간행하였다. 영국에서의 순환론의 주창자로 근대에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사람은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Anold Toynbee)이다. 그는 1950년에 [역사연구]라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는 한 국가의 운명을 논했던 이전의 순환사상가와는 달리 전 사회의 운명에 관심을 가졌으며 보다 세밀하게 검토하였으며 21세기에 예견되는 문명의 생성, 몰락의 순환에 만족한 것이 아니라, 각 순환들이 어떻게 연계되는 가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순환의 유형과 연관성을 검토하면서 인간의 역사가 단순한 순환논리에 의해 영원히 회전한다는 개념에 만족할 수 가 없었다. 그는 모든 순환이 독창적인 특징이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각 문명의 변동 시기에 바퀴가 차로 하여금 목적지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게 해 준다면, 영원히 돌아가는 바퀴는 결코 헛된 반복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A.J. Toynbee, A Study of History, 1. London,1934, pp. 324 재인용, 천진석, 김진영, p.50) 토인비는 각 문명의 순환사이에 간격을 메꾸는 제 3의 차륜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보편교회로 보았다. 1954년 그는 문명의 하양 곡선 단계에서 종교가 발생하며 그것은 영혼의 발전은 고난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문명의 생성, 몰락과 더불어 신에 대한 지식도 증식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주장을 통하여 기독교와 순환론을 병합하는 이론을 전개하여 순환론의 비관주의 사관을 극복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 목표지향적임을 인식케 하였고, 순환은 이제 그 자체의 힘으로 지탱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 진보론적 사관

 

진보적인 사관은 역사에 하나님의 개입을 몰라내었던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에서 부터 일어났다. 진보론적 사관은 인간의 역사는 발전되어 왔다는 것이며 미래에도 발전되어 간다는 개념이었다. 동일 혹은 유사한 과정을 밟아 역사가 흥하고 쇠퇴하는 순환개념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역사는 발전한다는 사상이다. 그것은 기술이나 물질적인 조건의 발전 뿐만 아니라, 지적 도덕적 면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 과정에서 퇴보의 순간이 있음을 인정하지만(중세시대) 인류의 발전은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론의 발생은 17세기 있었던 고대인과 현대인에 대한 논쟁에서 발생하였다. 논쟁점은 근대의 학자들이 고대의 학자들보다 우수한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고대인들이 더욱 우수하다고 믿었다. 옥스퍼드 대학에 임용되는 교수들은 대부분 이러한 신념 때문에 처음에는 강의를 하지 아니하고 고대학자들의 작품에 주석을 다는 일로 일정한 기간을 수련하는 의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도 시간에 감에 따라 축적된 유산이라는 점을 간파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페로(Perrault)은 [고대인과 현대인의 비교]에서 그리고 퐁드넬(Fontenelle)은 [고대인과 현대인의 차이]에서 이런 주장을 하였으며 이 주장은 곧 문명이 발전한다는 18세기 진보사상의 길을 예비하였다. 17세기의 기독교 사상도 진보주의 사관에 기여하였다. 17세기에 천년왕국의 개념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역사내에 축복받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증폭되었다. 이것은 바로 발전을 통해 진보되는 역사관을 잉태시키는데 일조를 하였다. 진보사관의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과학주의였다. 과학의 속성이 그렇듯이 역사를 낙관적이고 발전으로 보는 견해를 발달시켰다. 과학주의가 진보주의 사관을 한단계 더 깊게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3. 역사주의적 사관(historicism)

 

역사주의의 사관은 서구사상에 진보주의 사관 만큼이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사상의 중심은 문화가 역사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집단의 관습과 신념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분리시켜서 역사를 해석할 수 없다. 어떤 사상이라도 당시의 콘테스트를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 이 사상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일어난 진보사관에 대한 반대극복의 개념이었다. 역사주의는 역사가 직선적인 아니라 역사의 중심은 각 민족이 각자 가지고 있는 특유의 문화를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한 민족의 문화는 타 민족과는 분리되어 있지만 타문화를 감정 이입이라는 채널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역사가의 일이다. 이 사상은 18세기 초 이태리의 비코(Giambattista Vico)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완성은 독일에서 낭만주의가 왕성할 때 이루어졌다. 최초의 유명한 역사주의 대변가는 헤르더(Herder)였다. 랑케는 이 방법론으로 그의 학술 활동을 하여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주의자들은 역사를 관념적이거나 신화적인 방법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철처히 사실에 근거하여 검토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실제로 발생한 일들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연구는 사실의 수집가로 전락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역사가는 치밀한 조사를 신뢰하지만 과거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직관의 유용성을 즉 일반적인 역사주의적 신념을 떠나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역사주의는 지적 다원론과 역사적 상대주의를 잉태시켰다. 이런 결과로 가치판단에 대한 기준이 상실되고 역사과정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도 불확실하게 되었다. 20세기 들어와서 베르린 대학의 교수였던 트뢸취(Ernst Troeltsch)는 역사주의 사관의 위기론을 제기 했던 것이다.

 

4. 마르크스주의 사관

 

마르크스주의 사관은 역사의 과정은 노동자들의 기본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유물론적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유물론이란 용어는 엥겔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 말은 물질적인 조건이 인간의 역사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사관은 계몽주의와 역사주의의 사상을 조화시킨 헤겔의 관점을 공유하였다. 마르크스주의 사관은 역사변동의 핵심을 인간이 생존수단을 생산해 내는데 있다고 보았다. 고로 인간이 역사형성의 주체라는 확신을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주의 발전은 인간론의 이해결핍으로 연결되었다. 인간은 유물적인 것만 만족시킨다면 역사는 성공적으로 진행된다고 보았다. 여기에 도덕적인 판단 가치등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론은 노동자에 대한 계급억압의 수단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완전히 도래하기 전에는 역사에 있어서 도덕적인 판단은 비객관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 진리에 대한 부정론에 이르렀고, 역사평가에 있어서 도덕적인 기준은 남기지 아니했다. 역사진보의 특징은 생산의 달성정도에 의해 측정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절대정신은 존재하지 아니했고 이는 서양기독교의 신인식을 유배시켰다.

 

III. 기독교적인 역사관

 

인본주의적인 역사관으로부터 탈피하여 기독교적인 역사관에 대한 고찰의 두드러진 연구는 19세기부터였다. 그 동안 서구를 지배 해 온 문화의 유형들과 점차적으로 결별하면서 교회와의 관계에서 역사 이해를 추구했던 것이다. 기독교 저술가들은 이때부터 일반적인 역사서술과 분리되어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인식되는 분야의 역사연구에 자신들을 헌신하였다. 미국의 필립 샤프(Philip Schaff)가 대표적인 인물이며, 이들은 기독교적 역사 서술은 곧 교회사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적 역사를 일반역사서술과 분리하지 아니하고 기독교적인 역사서술을 시도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교회사나 역사신학에만 한정 시키지 아니하고 일반적인 역사의 저작들을 통해서도 일반적 역사 서술과는 명백하게 구별되는 기독교적인 역사서술의 통찰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보았다. 이중의 대표적인 학자는 하바드대학의 도슨(Christopher Dawson), 켐브릿지대학의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 등이었다.(홍치모 역, 1992, p.77-83) 그리고 예일대학의 라토렛(Kenneth S. Latourette), 유니온의 니버(Reinhold Niebuhr), 독일의 불트만(Rudolf Bultman)등은 나름대로의 신학적인 전 이해속에서 기독교적인 역사관을 주장하였다.

도슨은 기독교적 역사관에 대한 긍정적인 주장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역사철학이나 19세기 관념론적인 기반 위에서 전개된 역사관의 영향에서 벗어나 기독교 역사의 출발을 순수한 히브리적임을 밝혔다. 기독교 역사의 이해는 전제를 가지며 그것은 신앙이다. 그리고 신적계시의 인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럽지만 기독교사관의 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도슨은 보편교회가 “역사의 비밀과 인류의 구속을 걸머쥐고 있다” 보았다.(이석우편저, 1992, p.158) 그는 종교와 문화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동서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연구하였으며 1950년 하바드 대학의 기포드 강의였던 [서구문명의 발흥과 종교, Religion and the Rise of Western Culture], 그리고 1965년 [기독교 세계의 분열, The Dividing of Christendom]에서 이 문제를 취급하였다. 그는 이 강연에서 기독교적인 역사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을 반드시 먼저 받아들여야 함을 주장한다.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의 전모야 말로 기독교적 역사관의 기초라고 하였다.

 

“기독교 역사관이란 단 지 역사가 신의 섭리에 의하여 인도 된다는 것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인류의 삶 속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 교리인 성육신 교리는 동시에 역사의 중심교리이기도 하다. 때문에 우리의 전통적인 기독교 역사가 성육신 사건이 일어난 해를 기점으로 우리의 연대를 결정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하겠다”(이석유편저, p.161)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축으로 형성된 기독교적인 역사관은 순환사관이 진보사관과는 다른 시작과 종말을 분명한 직선상(straight line)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것은 초자연적인 신의 간섭과 섭리를 전제로 전개되는 역사이다. 베빙톤은 기독교적인 사관의 3가지 전제론적 신념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직접 역사에 관여한다는 사실, 둘째는 역사를 일직선으로 이끈다는 것, 마지막으로 역사는 계획된 종점으로 행한다는 것이었다. 즉 기독교적 역사관은 시작과 진행 그리고 종말로 된 단선적 역사라는 것이다.(천진석, 김진영, 옮김, p.57)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의 파나로마를 형성하는 구도(scheme)이다. 이러한 구조속에서 전개되는 기독교적인 역사의 내용과 전개는 라토? 교수에 의해 잘 정리되었다. 그는 1948년 미국역사학회의 기조연설에서 기독교적인 역사관의 중요한 중심되는 요소들을 지적하였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의 성육신, 기독교의 보편성, 사랑의 동기,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교제”들이다. 그는 세계속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기독교적인 진리성을 두 개의 방대한 역작속에서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확장사, the 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Vol. 7]과 [혁명기의 기독교, Christianity in a Revolutionary Age, Vol. 5)이다. 그는 기독교적 역사관점의 특징을 4가지로 압축하였다. 첫째는 기독교의 역사관점은 일반 사람들이 가진 관점과 전혀 다른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 신앙은 개인을 존중하는 그리스도의 인간이해로 표현되고 있다. 셋째 인간의 사회구조를 무시하지 않는다. 넷째, 기독교적인 역사관은 영원에 의해 그것의 역사와 시간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러한 라토?의 기독교 역사의 구조해석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개념속에서 기독교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는 당위성을 시사하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역사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역사와 하나님

 

기독교적 역사는 곧 하나님의 나라 역사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역사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기독교적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성경적인 개념은 통치(Reign)와 영역(Realm)의 이중개념을 가지고 있다.(G.E. Ladd, 1962, pp.230-238)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basileia tou theou)를 간구 하였고(마태 6:10) 이때의 의미는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 통치를 의미하였다.(눅 19:12, 15; 요 18:36)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역사전체에 대한 통치로 인식되었다. 구약에서 다스린다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함의를 포함하고 있었다. 구약에 나타나는 왕국의 개념은 말쿠트(malkuth)의 의미였다. 말쿠트는 제왕의 통치권을 나타내며 그 통치권은 제왕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을 포함한 의미였다.(대하 20:30; 단 1:20; 9:1; tm 1:1; 느 9:35 etc)(Ladd, 1962, p.236)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로서 그의 주권적 통치(Sovereignty)가 미치는 역사의 전영역을 포함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 자신이 세우신 목적 달성을 위해서 행해지는 역사의 전 과정이다.

 

2. 창조와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

 

창조의 개념에서 역사를 조명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그 영역이 우주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우주적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천지 창조야 말로 하나님 나라의 기초와 시작이며 하나님 나라 자체이다. 그리고 곧 그것은 기독교적인 역사요 시작이다. 창조의 세계는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통치에 속하므로 이는 곧 세상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통치이며 동시에 우주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했을 뿐 아니라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바로 창조된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의 통치에 절대 복종 하도록 창조된 창조세계는 타락(The Fall)으로 인해 파괴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세력의 역사가 형성되었다. 타락의 영향은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구원을 고대할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도달하였다.(롬 8:21) 그리스도는 이렇게 타락한 불복종하는 세력의 역사로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을 회복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타락한 피조 세계와 역사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Hendrikus Berkhof, 1979, pp.37-39) 바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회복 성취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은혜로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켜 이루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세워놓으셨던 계획대로 되 것으로서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엡 1:9, 10)

 

기독교적인 역사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 회복의 역사이다. 초대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구원의 역사를 확인하고 하나님 나라 역사의 성취를 위한 투쟁을 하였다. 가이사라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a)는 Historia Ecclesiastica에서 예수 이전의 역사를 그의 왕국 성취의 준비 기간으로 보았으며 예수의 메시야적인 사역으로 실제적인 왕국이 임했음을 시사하고 있다.(Berkhof, 1979, p.22)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역은 세상의 타락한 역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세상과 자신을 화목케 하신 것이다.(고후 5:19)

 

그런데 이러한 구원 사역의 역사에 그리스도는 창조시 부터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역사회복의 열쇠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 전 우주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그리스도 자신이 파괴된 창조 질서의 회복을 위해 성육신(Incarnation)하신 것이다.(요 1:14) 그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나라역사의 회복을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역사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역사에 참여 하므로서(히 2:17) 하나님 나라 역사의 회복의 기초와 규범이 되었다. 그로 인하여 오염되었던 역사의 재창조의 의미를 분명히 인식케 되었다. 그가 바로 역사의 지혜(Logos of history)이며, 역사의 처음(Alpha)이요 마지막(Omega)이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심부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와의 관계를 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역사인식과 세계관이 형성 될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가 성취하려던 하나님의 나라는 타락한 역사속의 훼손된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를 회복 시키는데 있다. 죄악에 물던 역사를 종식시키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선한 역사를 완성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역사의 의미이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미래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성을 포함한 전 역사의 과정을 의미한다. 신약학자들은 성경의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에 역점을 두지만(come, and not yet) 과거성은 결여되어 있다. J. Weiss나 A. Schweitzer등의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개념이든, C.H. Dodd와 G. Ladd의 등의 Realized Eschaton이든, A. Ritschl의 Ethical Kingdom이든, 하나님 나라의 과거성은 결여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로부터 창조 이래로 존재하는 역사의 실체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선포는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화였다.

 

셋째,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지리적으로 단순히 피안적인 것이 아니라, 이땅의 현세에도 동일하게 성취되어야 할 하나님의 통치의 역사이다. 기독교인들은 매 주일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도 기도하는 자신은 피안의 세계를 향해가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땅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무관한 자처럼 사는 아이러니한 삶의 현장을 노출시키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차세의 것을 획득하겠다는 왜곡된 종교적인 습관을 지니고 있다.(김재준 역, 1989, pp. 52-61) 그리스도의 주장은 땅을 포기하고 저주하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담 안에서 상실했던 땅의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오셨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신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했다.(마 6:10) 그에게는 땅과 하늘이 영원한 역사적 과정(Permanent historical process)에서 연합되어 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영원한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역사의 새로운 유대를 위해 두 역사의 화목(Reconciliation)의 주로 오셨다.

 

넷째, 그리스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Spiritual Kingdom)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자연계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개인 구원과 영적인 변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극 좁은 의미의 역사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모든 영역에 개입되는 신적인 주권의 통치와 그로 인한 창조세계 질서의 역사를 의미한다. 칼빈의 창조세계에 대한 견해도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모세는 지구를 개발하라는 조건으로 인간에게 자구가 제공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일을 하도록 창조된 것이지, 활동하지 않고 게으름 속에 빠져 있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상 이 노동은 즐거운 것이었다. 그것은 온갖 걱정과 싫증은 커녕 즐거움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땅을 경작하도록 명령하셨으므로 인간이 게으르게 퍼져 있는 모습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아무일도 하지 않은 채 먹고, 마시고, 잠자면서 일생을 소모하는 것보다 더 자연의 질서에 위배되는 일은 없다. 모세는 계속해서 덧 붙이기를 , 정원을 감독하는 작업이 아담에게 위탁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조물들을 맡기실 때 그것들을 검소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우리에게 맡겨진 것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조건을 첨부하셨음을 보여준다. 밭을 소유한 사람은 그 밭의 열매를 거두되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땅이 고통을 받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땅을 물려받은 모습 그대로, 오히려 더 개선된 상태로 후손들에게 인계해 주어야 한다. 그 땅의 열매를 먹되 사치스러움이나 게으름에 의해 상하거나 황폐화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이 같은 검약과 근면이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사용하는 우리들 사이에서 보편화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소유한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청지기의 위치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때 그는 방탕하게 행동 할 수 없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보존하도록 요구하는 것들을 남용함으로써 더럽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는 창조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는 창조 이래로 하나님의 나라의 경험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경험 자체가 역사의 핵을 이루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경험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기독교적인 역사관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죄악 된 역사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과 통치를 신앙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역사관은 과학적인 방법이라 순환론적인 사관이나 진보적 혹은 역사주의로 해석되고 설명되지 못하는 것들을 믿고 기대하는 신앙의 문제이다. 그리고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종말론) 인간의 현세에서의 비극적인 딜레마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of God)이다. 교회사를 통해 이런 기독교의 역사관을 어떻게 이해되고 실현되었는가를 연구하므로 그것의 실체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IV. 교회역사와 기독교적인 역사관

 

1. 초대교회

 

그리스도를 통한 역사의 회복과 실현의 사관을 받아들인 사도들의 전승을 따라 초대교회의 교부들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개입과 통치를 변증하였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96년경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서신에서 당시 유행하던 역사패턴이었던 희랍의 순환설을 거부하고 구원의 역사의 종말 등 직선상의 역사관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역사저편에 서 계신분이 아니라 인간이 만드는 역사에 정의와 불의의 잣대로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신적 통치의 사관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역사적 행위들은 하나님의 현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ANT, Vol. 1, p. 12, The First Epistle of Clement, ch. 23)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역사관은 클레멘트 이후에 변증가들에 의해 지속되었다. 50년 후에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플라톤과 같은 희랍철학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하늘나라 역사 운동의 주체는 예수그리스도임을 변증하였다. 그는 도리어 플라톤의 세계 창조론은 모세에게서 빌려왔고, 스토아학파의 불에 의한 세계종말사상은 구약의 신명기의 경우를 모방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종전의 로마-그리스 문화권에서 주장하던 이방인들의 역사개념을 반대하면서 창조 신앙에 입각한 우주적인 세계관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의 사역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지며 인류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역사적 성취로 인식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의 실상들이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그림자이거나 허상은 아니었고 신적 의미를 가진 그릇이었다.(ANT, Vol. 1, p.169-170, The First Apology of Justin)

 

구약의 전통으로부터 출발하여 형성된 기독교적 역사를 이방의 역사에 접근시키면서 연대기(Chronography)를 기술하였던 사람은 리비아의 철학자였던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라는 크리스챤이었다.(3세기초)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세계사적인 역사의 안목을 열어준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17장 26절의 말씀인 “그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셨다...”는 구절을 근거로 이방역사의 기독교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클레멘트의 사관처럼 그의 사관은 이방역사를 기독교의 역사와 분리내지 배제시키려는 경향보다는 서로 관련지어려는 통전적인 역사 개념을 갖고 있었다. 이는 바로 기독교를 세속사와 분리해서 다루려는 오늘날의 일부사가들의 태도와는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즉 교회사의 사건들과 로마제국의 사건들을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총체적인 구도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이장식, p. 149-150)

 

기독교적 역사관의 이해에 있어서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Origen)이었다. 그는 특히 구약의 성서안에서의 해석상의 난제들을 변증하기 위해서 우의적인 성서해석법을 그의 스승 필로(Philo)로부터 빌려왔지만, 성서를 단순한 사건들의 카탈로그가 아니라 숨겨진 신적 역사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그는 성서의 역사는 산의 숲과 같기 때문에 그 숲을 전부로 알면 그 숲속을 간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성서의 많은 자료들을 통해 역사의 의미를 캐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단순한 인간적인 우발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이며 이 사건들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보았다. 인간의 역사는 단순한 인간의 이야기로 취급하는 희랍의 인간주의 사관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이해는 신앙의 눈으로 가능하다고 하였다. 신앙의 눈이 아니고서는 “역사를 섭리하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경륜 곧 구원의 역사를 통찰” 할 수 없다는 것이다.(이장식, p. 150-153)

 

오리겐 다음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토대를 놓은 사람을 최초로 [교회사](Historia ecclesia)를 기술한 가이사라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a)였다. 그는 46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이중에서 역사관에 관한 저작은 [연대기]와 [교회사]이다. 그는 이런 저서를 통해 기독교의 역사와 로마제국의 역사의 관계를 추적하였다. 즉 기독교의 연대를 가지고 로마제국의 역사와 병행해서 단일연대기를 만들었다. 연대기 통합은 세계사와 기독교사를 분리해서 이해하지 아니하는 동일사관으로 인식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그는 일반 세계사를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역사로 간주하여 세계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경륜과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의 연대기는 오늘날 서양의 연대기의 중심이 된 그리스도의 탄생을 정점으로 구분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역사속에는 구약속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이방의 모든 민족의 역사를 포함하며 이 시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다리 역사라는 사상을 피력하였다. 곧 그의 사관은 인간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경륜하에서 진행되며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임을 인식하는 데 있었다. 신적역사에 대한 통전적인 의미는 점점 그의 주장 이후로 더욱 활발하게 서양 크리스챤들에게 수용되었다.(이장식, p.155-162)

 

그러나 기독교 사관을 확립시킨 사람은 히포의 어거스틴(Augustine)이었다. 그의 [신국론]에 나타난 이상을 실현하려는 왕자적인 역할을 했던 사르마뉴 대제도 황제 자신이 [신국론]을 탐독한 이후였다. [신국론]에 나타난 이상에 고취되어 이룬 신성로마제국이 중세 정치판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국론은 기독교의 역사의식을 체계화 했다고 볼 수 있다. 초대교부들의 역사관에 대한 총괄적인 결산이었고 특히 기독교의 신념이 역사진행의 동력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어거스틴은 역사를 해석하는데 3가지 기본점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성경기록에 대한 충실한 태도요, 둘째는 목적을 향해가는 역사의 진행에 대한 확신이며, 셋째는 신의 행위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를 기초로 그의 역사관을 구성하는 4가지의 요소가 있었다. 첫째는 천지 창조와 종말의 문제, 둘째는 원죄와 악의 문제, 셋째는 인간의 선택적 행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자유 의지와 예정론, 넷째는 그의 시간관이었다.(이석우, p.41, 54)

 

이러한 요소들을 가지고 설명하는 그의 신국론은 하나님의 나라로 지상의 나라 두 개의 영역으로 대비하여 표현된다. 신국론의 발원은 410년 야만족에 의해 영원한 로마가 멸망당하는 비극을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절대보호 아해 영원한 존재로 인식되어온 로마가 무참하게 파괴되자 로마 시민들은 심각한 실망과 고민에 차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다. 이런 정황에서 어거스틴은 로마시를 지상의 나라로 상징적인 표현을 했고,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묘사한 것이었다. 어거시틴은 로마와 같은 지상의 나라는 망할 수 도 있음을 역설하고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하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 두 개의 나라는 하나의 현실과 역사에 합류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성서적인 구속의 역사와 세속의 역사가 합류하는 유세비우스 보다 발전적인 역사관을 만들었다. 그는 로마도시의 멸망과 같은 이러한 사건이 구속사와 이관된 것이 아니라 서로 혼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의 역사가 로마제국의 정치,문화, 사회에 분리될수 없도록 합류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바다의 한류와 난류가 뚜렷이 분리되지 아니하지만 두 줄기가 하나의 바다를 이루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대변되지만 완전하지 아니했다.(이장식, pp.180-181)

 

어거스틴은 역사 전체를 말할 때 역사의 시작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역사의 시작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로 보았다. 그는 무형의 질료에서 유형의 세계로 창조되었다고 하였고, 우리의 시간은 바로 유형의 세계가 나타날 때부터라고 하였다. 창조의 시작과 섭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며, 창조자와 섭리자를 떠나서는 역사의 의미와 목적이 없음을 주자하였다. 그의 창조적인 역사관은 영지주의 유출설을 극복하였으며 특히 영지주의의 세계관인 이 세상을 금욕주의적 투쟁의 장소로 보았던 견해를 일축하였다. 그는 영지주의의 사관에서 역사의 텔로스(telos)를 볼 수 없었다. 결국 어거스틴은 성서와 그기에 나오는 역사를 세계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는 기준을 삼는데 기여하였다. 어거스틴의 신국의 절정은 바로 역사의 종말에 있었다. 그는 신국의 제 20-22권에서 종말론을 설명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종말론도 창조론이나 시간의 시작과 같이 신구약 성서의 내용에 대한 주석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 그리고 죽은자들의 부활과 영생 등을 종말의 주된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종말의 마지막은 바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이장식, pp. 167-186)

 

초대교회의 교부들에게 나타난 기독교적인 사관은 바로 역사의 이중성 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의 총체적인 섭리와 구원의 역사라는 대 전제속에서 해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역사는 신의 섭리와 목적을 따라 의미있는 진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중세교회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하나의 신적역사속에 같이 흘러가면서도 연합적인 동일체로서 신정역사를 이룰수 없었던 것이 어거스틴의 사관이었다. 어거스틴은 두 개의 현세적인 실체의 인정과 그리고 병행의 관계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로마제국과의 밀착된 관계속에서 몸과 영혼이 연합체가 되어 사람이 되듯이 국가와 교회가 연합체로서의 한 역사를 이루려는 경향이 로마제국의 기독교 후대부터 나타나서 중세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가시화 되었다. 이러한 역사관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성립되었다. 8백년경 프랑크 왕국의 사르마뉴 대제는 자신의 왕국을 로마교회와 실질적인 연합관계를 만들었다. 물론 둘은 서로의 이해관계속에서 이루어졌다. 교회는 국가의 도덕적 정신적 도움과 지지를 약속하였고, 국가는 교회의 위상을 군사적 정치적으로 보호해 준다는 명목에서였다. 이것이 중세 중 후반에 오토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정교관계를 정립한 역사관이었다.

 

이러한 정교 일치의 사관은 교회의 영적권위가 국가의 세속적 권위보다 우월하다는 종교지도자들의 의식으로 인해 언제나 부자연스럽게 유지되거나 부식되어 갔다. 암브로스 감독때부터 이런 의식은 교회에 실질적으로 부각되었다. 그는 영혼이 몸보다는 우월한 영적 존재인 것처럼 영적 존재인 교회가 국가보다는 우월하다고 보았다. 중세교회의 기틀을 놓았던 교황 그레고리 1세는 바로 이러한 신앙의 개념을 바탕으로 교권을 확립하고 중세 교황정치의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이 사상의 구체화를 시도한 교황 고레고리 7세는 독일 황제 헨리 4세와 투쟁의 역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교황 인노센트 3세의 해와 달의 대비설을 잉태시켰고, 보니페이스 8세는 교황은 세상과 교회를 다스릴 두 자루의 칼을 손에 다 쥐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세의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와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토마스 아쿠나스였다. 즉 교회가 국가를 지배해야 한다는 교권의 우월적인 사관은 세상 역사를 치유하는 은총의 매개자인 교회가 구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론화 하였다. 역사는 하나님이 섭리하는 초자연적 은혜의 경륜 아래서만 진보하며 역사의 목적을 성취 할 수 있게 된다는 이론이 바로 중세의 l중세의 신적정치의 기초가 된 것이다. 그의 역사이론의 주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인 존재의 본체가 내재한다는 사상구도에 기인하였다. 플라톤의 우주이론을 결별한 그는 우주에 있는 무수한 실체들과 그것들의 관계성을 인정하였다. 실체들은 원물질(materia prima)이며 이것들은 상승하는 우주적인 운동을 하면서 만물의 근원으로 나아가는 잠재력과 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자연적인 존재의 이러한 상승운동에 신적인 은혜의 주입(infusio gratio)이 가미될 때에 상승운동의 완성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은혜의 주입은 바로 교회와 거룩한 의식과 성직자들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피조물과는 본성적으로나 존재양식으로나 전혀 다른 초월자로서 인간 세상과 그 역사에 대해서도 초월자로서 간접적인 개입을 한다는 주장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와서 그에게로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 역사적인 과정에서 이 운동을 돕고 인도해야 할 하나님의 대역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역이 바로 교회이며 성직계급의 신분들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신분의 최고의 군위자가 교황이라고 하였다. 교황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이며 실재로 하나님의 대리자로 인식되었다. 고로 교황이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총체적인 책임자이며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교황은 현세의 정치, 사회, 문화 영역 등 인간의역사의 전 영역에 있어서 초월자 하나님의 대리자로 다스리며 이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역사 개입으로 인식하였다. 교황은 실질적인 신수권을 지니고 있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열쇠를 쥔 지상과 영적인 세계의 지배권한도 부여 받은 것으로 인정되었다.(이장식, pp.187-199)

 

3. 16세기 이후의 교회

 

중세교회의 역사관은 지나친 교권주의의 개입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상실한 교회지상주의적인 사관이었다. 지상교회의 위상과 권위가 역사를 지배하다 보니 하나님의 나라가 곧 교회와 일치되는 사관을 형성하였다. 사람들은 중세사회(Christendom)가 곧 하나님의 나라 역사인양 왜곡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교회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견해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탄생 시키기 위한 준비의 역사였다. 토인비는 이런 맥락에서 중세역사를 정의하였다.

 

“악마의 도전에 대응하여 하나님은 참으로 그의 창조된 역사를 잠시 위험속에 던져 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무엇을 창조키 위한 기회를 획득하기 위해서였다.”(Shankel, 1972, p.186)

 

종교 개혁시대에 접어 들면서 하나님의 나라역사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 개혁이야 말로 역사상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충분히 경험한 시대였다.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을 직접적으로 이해하고 경험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하에 있었고, 또한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임을 인정하였다. 개혁자들의 개혁의 원천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절대 복종하는 하나님 중심(Theocentric)의 신앙을 기초로 시작되었다. 칼빈의 개혁의 목적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대 Gloria)을 위한 다는 슬로건을 내건 것도 이러한 의도에서였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이 제정치 아니한 권세는 존재치 아니한다고 [기독교 강요] 단호하게 선포하였다.(Inst. 4.20.4) 하나님이 국가 체제와 위정자를 세운 것은 인간 사회의 번영과 평화와 정의의 구현을 위한 외적 구원의 수단(extra media salutis)으로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 절대 주권사상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역사를 성취하기 위한 어떤 방해도 용납하지 아니하는 신정국 이론을 낳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 영역은 바로 일반 은총의 카테고리속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자연세계든지 은총의 세계든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소원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영적인 양식인 성경연구와 설교 그리고 성례전의 개혁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사회발전의 참여해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는 병원과 학교를 세웠으며 제네바에 몰려온 프랑스의 개신교 피난민들의 주택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환자와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이 그의 구빈원 사역이었다.(Graham, 1978, p.65-173)

 

총체적인 역사관을 가진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의 정신은 계몽주의 이후 근대서구의 이성을 중심으로한 합리주의 등장과 과학주의 방법의 역사이해를 통해 본고의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서구의 기독교적 사관은 인본주의 역사관으로 변화하였다. 한편으로 이성주의자와는 달리 경건주의자들은 지나친 내적 신앙의 강조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사회성을 간과하는 사관을 전승시켰다. 이들은 모두 주관적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창조와 섭리와 종말적인 기독교적인 사관을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V. 결론

 

기독교적 역사관은 창조와 진행과 종말이라는 삼각관계속에서 시작과 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사람들의 통속적인 개념인 역사라는 표현 보다는 칼 발트(karl Barth)의 묘사처럼 하나님의 나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세속역사와 교회의 역사를 이원화하지 하니 아니한다. 오직 두 개의 축이 다른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도 타락한 후에 파생된 기현상이며 타락 이전에는 이러한 구분이 없이 전체의 창조역사가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타락이후의 창조세계의 전부도 하나님의 나라에 포한된다. 바로 그리스도는 이러한 전체의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회복키 위해 오셨다. 고로 그의 구속은 기독교적 역사관의 중심을 이루며 피조세계와 인간의 모든 영역 미치는 구원의 사역이었다. 기독교적 역사관에는 이런 의미에서 이원론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은 분명히 환상적이고 피안적인 소망에서만 그것의 시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현 역사 속에서도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총체적인 기독교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관을 외면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구속의 의미를 많은 사람들이 극히 좁은 의미로 이해해 왔다. 그리고 이원론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세속역사의 구속에는 관심이 결여되어 있었고, 세속역사란 단순히 크리스챤이라는 순례자가 하늘나라로 가는 무대로만 간주하였다. 그리고 속죄의 개념을 개인의 영혼에만 제한 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개인 구원 이상의 큰 사역이었다. 인류 역사의 전부를 구속하는 사역이었다. 기독교적인 사관은 바로 이러한 총체적인 구원의 완성을 위해 섭리하시는 하나님 나라 회복의 역사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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