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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너의 십자가를 지라. / 윌터 챈트리

하나님아들 2013. 8. 7. 17:54

너의 십자가를 지라. (윌터 챈트리)청교도 목사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3-24)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생명의 길 입구에는 좁은 문이 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4). 어느 누구도 우쭐해진 자아를 가지고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학생)가 되는 일만을 위해서도 자기소멸, 자기거절,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자기 부인을 명시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밝히셨다. 그리고 나서 그는 사람이 자기의 자아를 포기함에 관한 생생한 예화를 사용함으로써 이 점을 재차 강조하셨다. 그런데 이 예화는 얼마 안가서 그가 자신의 피로 인치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씀이었다.

 

 우리의 위대한 선지자께서는 복음서 속에서 여섯 번에 걸쳐서 그의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질 것을 언급하신다. 이것은 그가 즐겨 사용하시던 자기 부인의 예화의 하나였다. 다른 곳에서는 그는 모든 것을 파하는 것 혹은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잃는 것으로 말씀하시기도 했다.

 

“십자가”라는 말은 가장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갈보리의 우리 주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가하기 위하여 고안된 형틀에 묶여서 피를 흘리고 계신 그분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돌에 맞아서 죽는 스데반이나 매를 맞고 옥에 갇힌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지금까지 존재했던 다른 순교자들을 생각함으로서 십자가를 진다는 관념을 확대시키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용감한 신체적 고통에 비추어 보면서 편안한 상태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스스로에게 “나에게는 져야할 십자가가 없군”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반복되는 그리스도의 요구는 당신이 그것을 성경에서 거듭거듭 읽음에 따라서 당신의 의식 속에 경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는 한 번도 그들의 십자가를 진 일이 없다. 자기 처형, 자기 부인의 경험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외인일 수밖에 없다. 우리 주님 자신도 그런 사람들에 대한 경고를 더욱 심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예화를 들며, 이런 요구를 제시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당신의 상태라면,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것 외에는 죄의식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면서도 우리 주님의 요구에 대한 오해 때문에 일종의 낙심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미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 때에는 우리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일이 용기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중의 어느 경우이든지 이 주제는 당신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 주님의 삶은 십자가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그는 당신을 또한 십자가와 함께하는 생명에로 부르셨다.

 

 이 분명한 복음의 어조가 활기 없는 서구 사회에서는 망각되기가 매우 쉽다. 관습과 광고와 유혹의 대 합창을 가지고 이 세상은 당신을 자아도취의 삶으로 유인하고 있다. 당신의 육체는 그 호소에 이끌리며 세상의 제안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광의 주님은 당신의 자기 부인의 삶으로, 십자가로 부르고 계신다.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는 보편적인 것이다. 이 요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주어진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와 보다 가까이 동행하는 선택된 소수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하셨다.

 

 마가복음 8:34은 이 명령이 12명에게 대해서만 발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말씀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말해진 것이다. 십자가는 그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든지”요구된다. 이 필요조건을 면제받을 수 있는 특별한 경우란 없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그의 제자로 인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반복해서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8)고 강조하셨다.

 

 또 다시 누가복음 14:27에서도 우리 구주께서는 그를 따르는 군중에게도 돌아서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는 자도 능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강조하셨다.

 

 자기 부인이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이 기독교적인 지역에 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문화 속에서 살든지 당신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 

 

십자가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세상을 따라서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누가복음 9:24의 설명과 같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여기의 “왜냐하면”(for, 한글 개역에는 없음 -역자 주)이라는 말은 이 귀절이 앞의 말과 연결되어 있음을 표시한다. 자기 부인이 없는 신앙은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의 가장 명백한 이 측면이 바로 현대의 복음주의에 의하여 망각되거나 무시되고 있다. 죄인을 주님 안에 있는 생명과 평안과 기쁨으로 데려오는 일에 열중한 나머지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자기 부인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 주님의 요구를 전하지 않으며 또한 자기 자신이 그것을 잊어버림으로써 복음주의 자들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들 “개종자들”이 과연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인지에 대한 의문 조차도 가져본 적이 없다. 

 

 성경 교사들은 사람이 방종하게 행하면서도 천국을 향하여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고서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더 높은 영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어떤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 부인은 은혜의 이차적인 사역을 위하여 요구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은 사람이 자기 부인의 삶을 살지 않으면 그는 은혜의 일차적인 사역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십자가를 요구하는 본문을 “더욱 깊은 삶”을 위한 구절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전도 집회에서 청중을 속이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없이는 생명 자체도 있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넓은 문을 통하여 생명에 들오는 것 같은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어오고 있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이 보다 깊은 영적 봉사를 위하여 십자가의 좁은 문을 통과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 부인이 없는 넓은 길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 구원을 얻은 모든 사람은 십자가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갔다. 

 

 십자가를 향한 그리스도의 설교는 부단한 것이다. 자기 부인은 한번 지불하고서 영원히 잊어버리는 가입금이 아니다. 새로운 개종자뿐 아니라 오래된 그리스도인들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 어떤 사람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속에서 처분해 버릴 수 있는 어떤 사항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일생 동안 져야하는 짐이다. 

 

 이 대화는 가이샤랴 빌립보 사건 이후에 있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 때는 우리 주님의 지상 사역의 거의 마지막 시기였다 거의 삼 년 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다. 우리는 누가복음 5장에서 그 부르심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을 접할 수 있다. 그들이 메시야를 따르기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는 견뎌내야 할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값이 있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그것은 사랑하는 부친을 떠나며, 조용한 마을에서의 좋은 고기잡이업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마태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가 주재하고 있던 수입이 좋은 세무서를 뒤로 하고 떠나는 것이었다. 주님을 따르던 그 2년 이상의 기간은 가난과 혼란과 수치의 고통스러운 체험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훈련이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에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앞으로의 십자가를 말씀하신다. 당신이 그리스도와 일 년을 동행했던 사십년을 동행했던, 당신은 여전히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당신은 그 분문이 “매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참된 신자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어디에나 있으며 또한 일생에 걸쳐서 있으며, 매일 져야 하는 짐이다.

 

 십자가를 벗어버릴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군데 있는데 그곳은 바로 묘지이다. 우리는 자기 부인의 고통을 천상으로까지 가지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생에서 십자가의 고통이 끝나리라는 어떤 희망도 주시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아무든지” 있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나는 오늘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미 설명했듯이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만약 무서운 고통의 요소가 제거 된다면 “십자가”라는 말은 모든 의미을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인간에게 주어졌던 가장 잔인한 고통을 견디셨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는 외적인 고통뿐 아니라 내적인 고통까지도 대표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완전하신 우리 주님에게는 외적인 고통보다도 십자가의 내적인 고통이 훨씬 컸던 것이다.

 

 히브리서 12:2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의 몸에 박힌 못이나 흘리신 피의 고통보다도, 수치는 그의 거룩한 존엄에 대한 더욱 큰 고통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가 그에게 어떤 것이었는지를 올바로 평가하지 못했다. 성부 앞에서 자신이 죄가 된다는 사실의 당황과 의로우신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대적들 앞에서 공공연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의 당혹감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과 천사들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더러운 불법과 공개적으로 동일시된다는 수치가 민감한 그의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 구절에서의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의 초점은 내적인 고통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십자가는 단순한 신체적 고통만이 아니다. 스데반은 “매일” 돌에 맞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시지 않는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사도들은 “매일” 감옥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가장 어려운 시기뿐 아니라 가장 좋은 때에도 져야 할 십자가는 있는 법이다. 베드로는 투쟁의 시기뿐 아니라 국가적 평화가 지속되던 기간에도 십자가를 지고 갔다. 

 

 내적인 고통이야말로 십자가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의 결핍이 어떤 신자들로 하여금 매일 십자가를 지라는 우리 주님의 요구를 오해하게 한다. 참된 성도가 우리 주님의 이 요구를 읽을 때에 불필요한 경고의 낙담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오해 때문이다.

 

 당신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오직 천부께서만 아시는 십자가를 지고 있을 수도 있다. 얼마나 자주 목사는 회중의 몇몇 지체들이 목사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던 고난을 통한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알고 놀라는가. 십자가의 가장 깊은 고통은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의도적인 행위이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모든 구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것을 지라”고 명령하신다. 주님께서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그의 뜻을 거스리고 강제로 십자가를 지우시지는 않는다. 그는 십자가를 사람의 등에 붙들어 매어 놓는 일은 없다.

 

 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큰 고통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어쩔 수 없은 고통들은 징계의 손이거나 혹은 연단시키는 자비의 손일 수가 있다. 이런 것들은 환란이지 십자가는 아니다. 십자가는 자아가 고통스럽게 부인되는 사람에 의해서만 지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갈보리로 가게 한 것은 그리스도 편에서의 자발적인 복종이었다 “이를 네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 무장한 군인들도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스스로 그들의 감금에 넘겨주셨다.

 

 그의 제자들의 매일의 십자가도 바로 이것과 똑같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의하여 고통스러운 편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일이다. 그 선택 이전에는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느끼셨던 것과 유사한 내적인 고투가 선행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적인 결정이다.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는 일은 죽는 것이다. 그것은 치명적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서서히 찾아 올 수는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한 가지 목적은 자아를 죽이고자 하는 무자비한 의도이다.

 

 23절과 24절의 두 개의 병행적인 사상은 우리 주님께서 위와 같은 생각을 품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존심, 자만심, 자기 도취, 자기 진보, 자기 신뢰를 죽이라.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며,”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는 이유로 인하여 자기 이익을 죽이라! 심지어 사람들이 합법적인 이익이라고 부르는 것들까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포기하라! 

 

 십자가를 진다는 예수님의 비유는 결국 자기를 부인하라는 요구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이 이제 분명해진다. 십자를 진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며, 자아에게 고통을 가하며, 자아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편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단련된 용사뿐 아니라 신병을 위한 교훈이기도 하다.

 

 이것은 신앙심이 깊은 초신자의 엘리트 집단으로의 부르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에 들어오기 위한 요구 조건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을 심화시키는 실마리까지도 쥐고 있다.

 

 성장의 각 단계 있어서도 더욱 많은 자기 부인이 요구되며, 자아에 대한 더욱 고통스러운 공격,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결과로서 주 그리스도를 섬기고자하는 더욱 확고한 결단이 요구된다. 

 

 십자가의 그늘은 진실된 마음을 혼란케 하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그런 모든 치명적인 측면에 까지 드리워진다. 오직 십자가가 이해되기만 했다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많은 불평들이 잠잠해졌을 것이다. 목사들의 공부에 있어서의 많은 카운셀링 수업이 십자가의 의미를 적용시킴에 의하여 짧아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도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데, 그것도 얄팍한 것이 아니라 심오한 것을 제공한다.

 

 만약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노력한 적이 있다면, 당신은 십자가 없이는 지고의 하나님과의 만족할 만한 교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아버지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날이 밝기 훨씬 전에 일어나셨다. 아무런 난방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이른 아침 아직 몸의 신진대사가 완만한 때에 그가 몸을 후들후들 떨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의 확대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일 종야에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고, 반박하는 자들을 설득하며, 병든 자를 치료하신 그는 새벽에 눈을 뜨는 데에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은밀한 경배의 시간을 가지기 전에는 편하게 잠을 주무시지도 않았다. 어쩌면 잠이 들지 않기 위하여 서서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런 투쟁이 그로 하여금 동산에서의 그의 제자들에 대하여 동정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들이 기도는 하지 않고 자고 있을 때에 그는 부드럽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말씀하셨다. 오, 그는 인간의 육신의 연약함을 느끼셨던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을 맞이한다. 그것은 자명종 시계와 함께 시작된다. 자아는 여전히 더 자기를 원한다. 지난밤에 아기가 두 번이나 잠에서 깨어났었기 때문에 더 누워서 자는 것이 백 번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만약 그리스도의 사랑이 당신 속에서 불타고 있다면, 가정과 직장의 업무의 요구에 빠져 들어가서 당신이 그와 전혀 함께하지 않았다는 슬픈 깨달음 속에서 하루를 끝마치기 보다는 차라리 당신의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는, 대개 늦은 시간까지 지속되는 즐거운 저녁 시간을 갖고자 하는 자아를 당신은 부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애를 써서 당신이 경건의 시간을 시작하더라도 이 완고한 자아는 여전히 간섭한다. 당신의 사업에 대한 생각이 당신의 관심을 끌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진실된 묵상이 흐려진다. 수많은 이기적인 이익들이 처음부터 참된 기도를 방해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외칠 때에 기도가 시작된다고 가르치셨다. 당신의 잇몸에서 이가 빠지듯이 당신의 영혼에서 자기 이익이 무자비하게 제거될 때까지는 이 말이 나올 수 없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괴로운 일이다. 

 

 설교자들은 “시들어 가는 나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경건에 관한 좋은 책을 추천해 주기를 원하는 슬픈 눈의 성도들을 만난다.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은 무미건조해지고 무익하게 되어 왔다. 가끔 그런 요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궁전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새로운 비법, 하나님과 그 어린양과의 즐거운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간단한 방책이나 손쉬운 수단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런 서적이나 방책은 없다. 당신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 당신은 자아를 겨냥하라. 자아를 죽이는 일에 시선을 고정하라! 자아를 부인하라! 금식하라! 일찍 일어나라!

 

주님을 알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에너지를 새롭게 모아가지고 부르짖으라. 그러면 내일은 어떠한가? 거기에도 역시 십자가는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자아에 고통을 가하지 않기로 작정한다면 당신은 다시 싸늘한 상태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다.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후퇴할 것이다. 

 

 어떤 불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기를 중지해 왔다. 어쩌면 당신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당신에게 보여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는 자신을 당신에게 알리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은밀한 처소의 입구에는 십자가가 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로 들어 오려면 당신은 자아를 서서히 다가오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내어 던져야 한다. 

 

십자가의 긴 그늘은 당신의 가정으로부터 주님을 위한 당신의 봉사 영역까지 당신을 따를 것이다.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증거하는 일에는 무서운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

 

 당신이 당신의 일터에 도착하면 동료 일군들이 안쪽 구석에 모여서 어깨를 툭툭 치면서 낄낄 거릴지도 모른다. 당신은 자신이 거기에 용감하게 가담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훌륭한 유우머의 주제라는 것이 고작해야 추잡한 이야기뿐이다.

 

 하루 중에 심각한 견해가 토론될 때에는 죄와 의, 혹은 삶의 목적과 같은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제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러나 매번 당신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당신의 견해와 함께 배척당하는 것을 보아왔다. 진리를 증거할 때마다 당신은 더욱 환영을 받지 못한다. 당신은 오늘날 진리에 대하여 담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예민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애정을 받으며, 그들에게 받아드려지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화평하게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의 동료들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 우리의 바램이다.

 

 어떤 맹목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를 가지고 증거한다. 이런 태도는 은혜스러운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냉담한 반응을 얻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 주면 공손한 감각이 고양되며 친절과 온화함을 갈망하는 마음이 증대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과 함께 그 토론에서는 주님의 영광이 관심사이다. 인간의 영혼의 영원한 복지는 진리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달려 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증거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면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그 자신의 사회적 의식과 화평을 사랑하는 태도에 대하여 고통을 줄 수 있는 말을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그는 고의적으로 자기와 동료 일군들 사이에 쐐기를 더 깊이 박아야 한다.

 

 증거를 위한 손쉬운 방법은 없다. 고통이 없고, 난관이 없는 방법은 없다. 당신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더러운 죄인들이며 은혜를 위하여 그리스도께로 피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은 거슬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달콤하게 치장할 수는 없다. 

 

 한 젊은 여인이 그의 어머니에게 복음을 설명할 때에, 그녀는 싸늘한 반응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진리가 어떤 방법으로 제시되더라도 그 속에는 어머니의 일생에 걸친 잘못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딸에 의하여 그녀의 종교, 그녀의 견해, 그녀의 삶의 스타일 전체가 부정되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말씀의 검이 어머니의 마음을 쪼갤 때, 예민한 딸도 동시에 자기 자신의 육신을 긴 못으로 찌르기로 결심했다.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하나의 가슴만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마음이 모두 찢기워야 한다. 

 

 예배와 전도 위에 십자가의 그늘이 드리워짐에 따라서, 그 그늘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봉사 위에도 드리워진다. “당신은 주일학교를 가르치겠습니까?"와 같은 질문은 “사무실에서의 격양된 하루 뒤에 따라오는 평온하고 즐거운 저녁시간을 당신은 포기하시겠습니까? 그 학급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 연구를 위하여 여가를 희생하시겠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학생들을 위한 기도에 그나마도 부족한 당신의 시간을 할애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된다.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맡은 각각의 의무는 다른 곳에서의 제한을 부과한다. 

 

 십자가의 형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가 우리 앞에 매일의 십자가를 가져다 놓으실 때에 과장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출처 :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글쓴이 : 박요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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