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소문난 교회의 성도(살전 1:2-10)

하나님아들 2013. 3. 22. 11:57

소문난 교회의 성도 (살전 1 : 2 - 10)

할렐루야~ 서로 인사 나누는 시간 갖겠습니다.

할렐루야~

행복한 안식일입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십니까? (대답하셔야지요...^^)

 

저는 우리 안양교회에서 성도님들과 함께 이렇게 안식일을 맞이하고 같이 예배를 드린다는 게 참으로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그러십니까?

저는 지난 주 영은회 때에 다른 것보다도 우리 안양교회 성도님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렇게 훌륭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는 힘이 바로 우리 안양교회의 힘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어요.

더욱이 감사한 것은 우리 안양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이 우리 북부의 각 교회에 넘친다는 것입니다.

열정있는 교회, 뜨거운 교회, 행복한 교회, 사랑이 있는 교회...

우리 영은회 때에 받은 말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 소문이 사실이 되고, 그 사실이 능력이 되어 나타나는 안양교회 되기를 소원합니다.

 

신약에 많은 교회 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등장을 해요. 그런데 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면 바로 주위에 좋은 소문이 난 교회였습니다.

 

여기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때 약3주간 동안 전도하는 가운데 많은 이방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물론 어려움도 많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바울은 베뢰아를 거쳐 아덴까지 피신하지 않으면 안 도리 형편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디모데의 보고를 받고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해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디모데를 다시 보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베뢰아로 갔던 실라와 데살로니가로 갔던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그들로부터 자세한 교회 소식을 보고 받았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성도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곧 바로 붓을 들어 데살로니가교회에 칭찬과 권면을 겸한 편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에 보낸 첫 번째 편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후에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이들이 계속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어 많이 자라났고 데살로니가교회의 역사는 비록 그 지방에서 작은 교회 중에 하나였지만 모든 면으로 다른 교회의 본이 되었고 좋은 소문이 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예배당이 좇아서, 재벌, 학자, 권력가, 성도들의 삶이 훌륭해서)

 

물론 이 말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아무런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데살로니가교회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왜냐 하면 저희들에게는 좋지 않은 것보다 좋은 점이 더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저희의 잘못을 책망하기 보다고 좋은 점, 훌륭한 점을 아낌없이 칭찬하고 격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양 교회를 세워 주시고 여러 가지 방면으로 말할 수 없는 축복을 하셨습니다.

이번 영은회를 마치고 밑에 슈퍼에 갔더니 사장님이 ‘행사는 잘 맞쳤어요?’하고 묻더라구요?

우리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관심은 말할 것도 없고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우리 교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안양교회의 사명은 정말 중차대한 것입니다.

지난 일 년간 우리 안양교회는 개척이 되었습니다. 안양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들이 많이 나있는 상황입니다.

이번 영은회를 기점으로 그 소문은 더욱 확실한 것으로 여겨졌구요.

어느 교회와 비교해서 빠지지 않는 교회라는 인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욱 성장하기를 갈망하는 이유

아직 우리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이런 기도는 필수적인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오, 하나님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좋은 소문난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의 신앙 생활이 어떠했으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1. 믿음으로 일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없는 생활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네가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네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과 역사는 사실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노라하고 행함(역사)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서에 밝히 지적하였습니다.

믿음이 귀합니다. 그러나 죽은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대로 축복하십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일하고, 적게 믿으면 적게 일하고, 아무것도 안 믿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과 역사는 정비례합니다.

우리 안양교회성도님들은 크게 믿으셔서 큰 일 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믿음이 적은 사람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서워 떨고 근심과 걱정 속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을 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고 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반면에 큰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한번은 가나안 여인이 자기 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그렇게 쫓아오며 간청했지만 처음에는 예수님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무시하듯이 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가나안 여인은 화를 내지도 아니하고, 낙심하지도 아니하고, 포기하지도 아니하고 계속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믿음은 쉬지 않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일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가나안 여인을 향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큰 믿음이 안양교회 성도님들의 믿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가버나움 지방에 가셨는데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여들게 되었고 거기서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고 계셨습니다.

 

그 때 중풍병이 들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해서 예수님은 무슨 병이든 고치신다는 소문을 믿고 사람들이 이 중풍병 환자를 들것에 메고 왔습니다.

무슨 이론이 정연한 믿음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무리 어려운 형편에 있는 환자라고 하더라도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나으리라는 단순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다고 믿는 믿음이 귀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히 역사가 따릅니다.

그들에게 이런 훌륭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불쌍한 환자를 메고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정문은 말할 것도 없고 창문으로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가로막힐 때가 있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지만 홍해가 가로막히는 절망적인 상황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중풍병 환자를 메고 온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기 어렵게 되니까 포기하고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지붕이라도 뜯자. 남의 집 지붕을 뜯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지붕에 구멍을 내고 환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 앞에 내려보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믿음의 역사입니다.

이 청년들의 믿음의 역사가 안양교회 성도님들의 믿음의 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때 환자를 보신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먼저 환자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 심령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환자가 누워 온 들것을 메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환자의 육신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항상 일합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충성스럽게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일합니다.

칭찬 듣는 일만이 아니라 비난을 들어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질 때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 이하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하지 아니하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던지 그것이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얼마의 돈을 벌기 위한 것뿐이라면 그에게는 어떤 사명감이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의식주를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겠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고, 그 일을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도 달게 참아야 한다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이것이 하나밖에 없는 나의 생명을 온전히 불사를 수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믿을 때 어려움 속에서도 보람과 기쁨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하는 일이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으로 믿으시고 나의 몸과 마음을 그것을 위해 쏟으시고 생명을 불사를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믿음으로 일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던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창의력을 살려서 보다 더 잘 해 보려고 심혈을 기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연히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일하고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믿고 일하십니까? 믿는 분은 ‘아멘’하시기를 바랍니다.

 

2. 좋은 소문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사랑으로 수고했습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릅니다. 수고가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실상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처럼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복음 전파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그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와 같이 수고를 감수한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너무 강하게 이끄시기 때문에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자연히 하게 됩니다.

 

요한 1서 5장 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행할 수 있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한번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었고 또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율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네 대답이 옳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이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굽니까?”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불한당을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도와 준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칼빈의 말대로 많은 사랑은 혀끝에 있고 참 사랑은 손끝에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 형제나 자매 중에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우리가 말하기를 평안히 하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면서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행함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올해 구제헌금을 위해서 돼지 저금통을 모으고 있습니다. 살이 많이 쩠지요? 이 구제헌금을 위한 돼지 저금통은 내년에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귀한 일에 우리가 얼마나 참여합니까?

가난한 이웃을 대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이 성립될 수 있습니까?

 

우리 안양교회 성도님들의 사랑의 마음이 사랑의 수고로 이어지는 귀한 자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소문난 교회의 성도들은 소망 중에 인내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한다.

 

고 했습니다.

(벧전 1:3-4)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의 소망이 아니라 하늘에 간직한 소망입니다.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망입니다. 썩어지는 소망이 아니라 썩지 않는 산 소망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루어지는 경우보다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장사해서 돈벌기를 원한다고 해서 다 재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눈물이 있고 한숨이 있습니다.

 

더구나 세상의 소망은 이루어진다고 해도 거기에 참 만족이 없습니다. 재벌이 되었다고 만족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권력도 그렇습니다. 혹시 만족이 있다고 하더라도 얼마 오래 가지 못합니다. 지나갑니다. 사라집니다.

그 빛이 바랩니다. 절망의 식은 재로 화해 버리고 맙니다.

 

그 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 1서 2장 15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은 지나갑니다. 부귀와 영화도 꿈처럼 지나갑니다.

여러분, 고궁에 가 보시면 느끼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찬란하게 꾸며 놓고 권세를 누리며 살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갔는가?’하는 허무한 생각이 먼저 듭니다. 이렇게 허무한 것이 세상입니다. 솔로몬의 말대로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이 세상입니다.

 

우리 육신을 보십시오. 10대 30대 청년 때는 아름답고 힘이 있고 무엇이나 다할 것 같은 용기와 의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이는 잠깐 들어 60, 70이 되면 말하자면 인생의 석양이 되어 옵니다.

그렇습니다. 이 겉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후패해집니다. 어떤 신문광고를 보니까 “인생은 60부터”라고 했는데 그 광고를 보면 나이 드신 분이 다소 위로를 받을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이 육신 장막 집은 낡아갑니다. 우리의 눈은 점점 멀어집니다. 세상을 좀 멀리 하라는 신호입니다. 귀가 점점 어두워져 웬만한 소리는 들리지 아니합니다. 세상 소리에는 관심을 덜 가지고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을 ‘연세가 지긋하다’고 하는데 저는 그 말을 ‘지’자는 따지(地) 가까울 근(近)으로 땅이 가까워진다는 말로 듣습니다.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질 날이 가까워 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의 소망은 영원합니다. 보이는 소망이 참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의지하고 바라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소망에는 인내가 따릅니다. 로마서 8장 24-25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오늘 주신 말씀 5절에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옛 사람이 깨어지고 새 사람을 힘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좋은 소문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처럼 믿음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수고하고, 소망 가운데 인내해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하나님의 종 바나바의 자료
글쓴이 : 끝장보는 신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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