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에서 내리는 육의 양식을 거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창16:21)
구약은 신양의 그림자요, 모형,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취하여야 하는 영적 생명양식의 모형이요, 그림자이지요.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아침마다 나가서 각기 식량을 거두었듯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매일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매일의 생수, 곧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적어도 성령의 세례를 받고 영적인 누림이 무엇인지를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루, 이틀 기도와 말씀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영적 곤고와 목마름을 느끼게 되지요. 그렇지 아니하면 영이 잠들어 있거나 심하면 죽어 있는 경우이지요.
그렇게 하루 매일의 일상처럼 영적인 목마름으로 말씀을 읽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할 때 고요함도 좋지만 은혜로운 찬송이 흘러나오면 도움이 되곤 하지요. 그래서 전 늘 찬양을 들으며 함께 찬양하거나 기도하곤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찬양하니 육의 뜰을 지나고 혼의 성소를 지나고 영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곧 성령의 임재하심이 있는 지성소로 들어가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에 기뻐 노래하고, 감사하여 눈물짓고 그렇게 주님과 영 안에서 교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 안에서 저의 의식 속에 문득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현장이 떠올랐습니다. 성령께서 그 현장으로 저의 마음을 이끄셨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기도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7절 이하을 보면 게세마네 기도를 드리시기 전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표현이 나오지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심히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게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지요.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44절에는 예수님의 기도하시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지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성령님은 저의 의식을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데리고 가셔서 진정한 ‘자기 부인’이 무엇임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전 죽음 자체는 별로 두렵지도 어쩌면 싫지도 않습니다. 물론 믿음 안에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믿지만, 누구인들 이 땅에 사랑하고 돌보아주어야 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그래도 생에 애착을 느끼게끔 창조된 혼을 지닌 사람으로 어찌 죽음이 좋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얼마 전에 행복전도사로 알려졌던 어떤 분이, “500-600가지의 육체적인 아픔에 시달려본 사람은 저의 마음을 넉넉히 이해하실 겁니다”라고 마음을 글로 남겨놓고 스스로 생을 접었듯이, 살아온 하 세월이 육적으로나 심적으로나 고통과 아픔의 세월을 보낸 분들은 죽음 자체가 두렵거나 어쩌면 싫지도 않다는 저의 마음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전 한편 죽음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안식임을 압니다. 왜냐하면 영생이 좋지만 만약에 고통과 슬픔과 눈물이 많은 생이라면 영생은 축복이 아니요, 영원한 형벌이지요. 아픈데 영원히 아파야 하고 괴로운데 영원히 괴로워야 하니 얼마나 무서운 형벌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구속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한편 수고와 눈물이 많은 이 땅의 생을 마감하고, 다시는 저는 것이나 아픈 것이나 우는 것이나 슬픈 것이나 아픈 것들이 없고, 사망도 없는 당신의 나라로 부르시는 죽음은 한편 주님이 주시는 안식의 시작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 자체를 별로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부모님의 자녀로써나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가장으로써 힘들고 아픈 시간들도 많으나, 나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생의 시간을 주시면 싶은 마음, 그리고 지나온 날을 돌아보면 주님 앞에 별스레 보여드릴 것이 없이 살아온 듯하여, 어린아이가 바닷가에서 종일 놀다가 해질녘 집으로 돌아와서 예쁜 조약돌을 하나 주머니에서 꺼내서 부모님께 “선물이야”라고 내밀 듯이, 주님께 보여드릴 그러한 아름답고 가치로운 신앙의 삶, 작은 조약돌 하나쯤은 가져갈 수 있도록 생의 시간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러나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죽음 자체가 아닌 죽음에 이르는 생물학적인 아픔의 과정입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연약한 체질 탓에 수없이 앓아본 이러저러한 육신의 고통들, 그 고통들이 때로는 얼마나 전율스럽도록 아프기도 한 것을 알기에 생물학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고통은 실상 두렵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때때로 주님이 부르시는 날이 이르면 육신의 큰 고통 없이 불러주시길 간절히 기도해 보기도 합니다.
가령 소화기 계통에 병이 생겨서 음식을 먹지 못해서 서서히 생명이 시들어 간다면 그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가령 폐에 이상이 생겨서 조금씩 호흡의 답답함을 느끼며 죽어가야 한다면 그 또한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울까요? 가령 뇌에 이상이 생겨서 조금씩 생각이 희미해져가고 이상해져가는 자신을 보면서 뉘엿한 황혼의 해처럼 생이 저물어 간다면 그 또한 얼마나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울까요?
그러나 이 모든 고통, 어떠한 육체의 생물학적인 고통을 통한 죽음도, 주님이 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고통에 비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당신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언제쯤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셨으니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결국은 또한 혈과 육을 지니셨던 사람이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때때로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그리고 결국 그 형을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 임박하게 다가왔습니다. 결국은 사람이셨기에 잠시 후면 다가올 무섭고 전율스러울 죽음에 이르는 생물학적인 십자가형의 고통, 가장 사람을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죽이게 인간의 포악한 본성이 고안해 낸 십자가의 극형, 그 두려운 고통 앞에 사람 예수님, 인간 예수님의 고뇌는 얼마나 크셨을까요?
그래서 성경은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지요.
도대체 얼마나 간절히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하셨기에 땀방울이 피 방울처럼 되었을까요? 실제로 의학적으로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극도로 감정이 과로한 상태에서는 모세혈관이 땀샘근처에서 파괴되면 그러한 현상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성령님은 저의 의식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끌고 가셔서 진정한 “자기 부인”이 무엇임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십자가 극형을 앞에 두고서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거두소서, 지나가게 하소서” 기도하시고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밤새도록 기도하시던 예수님,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뜻을 죽기까지 쳐서 복종하신 “진정한 자기 부인”이 무엇임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에, 저의 두 눈에 그리고 가슴에 한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는 주님이 “사랑하라”이르시면 얼마나 누구를 사랑하였던가? 나는 주님이 누구를 “용서하라”이르시면 얼마나 순종하며 애썼던가? “깨어 있어 기도하라” 명하시면 얼마나 나를 부인하며 애썼던가, 겟세마네 동산 그리고 십자가에 오르신 진정한 자기부인의 예수님의 모습 앞에 너무도 초라한 나의 모습에 또한 한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소리없이도 울고 다 큰 어른이 엉엉! 소리내어서도 울었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두 눈에 어리고 양볼에 흐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진정한 자기부인이란 무엇일까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정한 자기부인이란,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이라도 죽어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이라도 실상 죽기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진정한 자기부인의 모습 앞에, 우리가 주 앞에서 보인 ‘자기부인’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일까요?
한 참을 소리 없이도 울고 소리 내어서도 울다가 주님 앞에 물었습니다. “자기 부인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간단히 응답하시길, “자기 부인은 생명의 참된 연합, 곧 하나됨의 비밀이니라” 이르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치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또한 영적으로나 맞는 말씀이더군요. 내가 주님과 생명의 하나됨을 이루려면 나의 마음과 뜻을 주님께 온전히 맞추고 나를 부인해야지 내가 살아서야 어떻게 생명의 하나됨을 이루겠습니까?
주님은 요한복음 15장 9절 이하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이르시고 계시지요.
또한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주님은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말씀대로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만 행하셨습니다. 죽어도 하기 싫은 것도 죽기까지 순종하시며, 오직 당신의 원대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만 행하시다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 생명의 연합, 곧 하나됨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계셨고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빌립에게 이르신 말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이 가시는 걸음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당신 스스로의 진정한 자기부인의 삶을 통하여서도 하나님과 생명의 하나됨을 이루며 사시다,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 사랑으로 오르시고 죽으시고, 영원한 성부 하나님과의 생명의 하나됨의 비밀 속에서 또한 권능과 능력으로 사망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시고 승천 하셔서 권능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영광과 찬송 가운데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온 족속을 심판하려 재림의 주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얼마나 우리 자신을 매일 쳐서 복종시키며, 우리의 원대로 살지 아니하고 주의 뜻을 좇아 살아왔을까요? 온 생을 통하여, 겟세마네 기도와 십자가에 스스로 오르심을 통하여 진정한 자기부인의 모습을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 앞에 우리 자신을 한번 비추어 보는 시간을 가져야 되지 않을런지요?
주님께서 온전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성부 하나님과 영적 생명의 하나됨을 또한 온전히 이루어 놀라운 하나님께로 흘러나오는 능력과 권능을 삶을 사시다 보좌의 우편에 앉으셨듯이,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쳐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진정한 자기부인의 삶을 산다면 우리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놀라운 생명의 능력과 권능이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주님의 보좌 앞에 이르는 날,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뭇 천사들과 수정 같은 유리바다와 황금 길을 날고 걸으며 높으신 사랑의 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5: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