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입니까? 신앙인입니까?
롬 4:1~12
여러분 신앙생활이 행복하십니까? 주일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꼬박꼬박 소득의 십일조를 하고, 주일마다 봉사하고, 새벽기도회도 거의 빠지지 않는데도 마음에 기쁨보다는 의무감으로 신앙생활 합니까? 종교인이 그렇습니다.
예배당 오는 길이 즐겁고, 예배당 문턱만 넘어서도 눈물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고, 가진 것 없어 넉넉히 드리지 못해도 정성어린 헌금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찬송만 불러도 감격이 넘치고, 말씀을 들을 때면 내게만 주신 말씀으로 들려 회개하고 결단하고, 그래서 무엇을 주님께 드려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마음의 사모함으로 가득 찬 신앙생활을 합니까? 참 신앙인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신앙생활의 행복을 누리는 비결은 종교인의 껍데기를 벗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그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종교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인 반면 신앙인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1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대단한 특권으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의로운 행위는 자자손손 그 영향력이 있음을 믿고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선한 행동, 남다른 공로 때문에 하나님이 의로 여겨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만일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선한 일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느냐, 예배드리는 것과 구원이 무관하다면 왜 예배를 드리는가, 십일조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면 십일조를 드릴 이유가 어디 있으며, 도덕성이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면 음란,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고 묻습니다.
이는 은혜에 대한 아주 극단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그 은혜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낳습니다. 은혜는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을 불어넣는 법이 없습니다. 은혜를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결코 그 은혜를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순종 때문에 축복을 받은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3절에서 “여기다”는 말은 돈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 많이 쓰이는 말입니다. NIV성경에는 ‘credited’란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에만 이 단어가 10회나 나옵니다. 지불해야 할 돈을 지불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얼마나 좋겠어요?
신용카드를 많이 쓰고 나면 그달 결제청구서가 날아올 때 뻔히 많이 나올 것을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습니다. 한쪽부터 서서히 금액을 쳐다봅니다. 그리고 이내 실망합니다. 이렇게는 많이 나오지 않길 바랐는데 “이번 달에도 마이너스다.”하고 보는 순간 결제금액 “0”입니다. 깜짝 놀라 은행으로 전화를 해보니 은행원의 대답이 “어떤 분이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갚아야 할 빚, 아니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죄의 빚을 대신 갚아주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그 죄의 대가를 다 지불하셨습니다. 우리는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자 신용카드를 하나 만들어 주었습니다. “꼭 필요한 때 사용해라.”는 당부와 함께 말입니다.
어느 날 아들이 차를 타고 가다가 접촉 사고를 냈습니다.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당장 그 자리에서 10만원을 주면 합의하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카드를 이용할 수 있는 현금출입기가 있어 카드로 현금을 빼서 합의를 보았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내가 실수한 것보다 아버지의 사랑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카드를 만들어주면서 그런 실수를 하기를 바랐겠습니까? 차를 타면서 사고 내라고 그렇게 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언젠가 자기 아들이 은혜를 필요로 하는 날이 오리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가운데 빠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죄를 저지르라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기 자녀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자기 자녀들에게 언젠가는 은혜가 필요로 하는 날이 있을 것임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무엇보다 먼저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 그 사건보다 은혜는 먼저 있습니다.
너무 큰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용서를 도무지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는 은혜를 베푸실지 모르지만 제게는 아닙니다. 저는 이제껏 실패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저는 그냥 죄인이 아닙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로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신용으로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용은 곧 믿음입니다.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만 잘 된 것이 있으면 다 자기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만일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아무것도 없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지 않으시고 오직 선물로, 은혜로 거저 주신 것입니다.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2. 종교인은 대가를 지불하지만 신앙인은 죄임임을 알고 은혜에 호소합니다.
(4~5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종교인은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다고 떵떵거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감사와 은혜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거저 받은 의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감사와 은혜가 충만합니다.
전도하면서 선물을 주면 “요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하면서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받은 만큼 주는 것, 'give & take', 세상 논리로는 맞습니다. 요즘은 “받지도 말고 주지도 말자”는 문화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은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받은 것입니다. 그 한 예를 다윗으로 들었습니다.
(6~8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본문은 시편32:1-2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시32:3 말씀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다윗은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의 고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뼈가 녹는 것과 같은 아픔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죄를 깊이 인식했던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내가 얼마나 엄청난 죄인인가를 느끼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 왕은 우리의 세종대왕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이 간음죄, 살인죄, 거짓말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죄를 고백했습니다. 죄는 끌어안고 있으면 왕이라도 괴로운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왕의 권력, 돈, 부귀, 명예, 음악가 시인에 있지 않습니다. 죄를 깨닫고 고백한 데 있습니다.
고백하면 그 죄로 인한 형벌은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죄를 고백한 자의 행복입니다.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가 받은 의만 자랑할 뿐입니다.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젊은이가 실수로 살인을 했습니다. 그 주에서는 주지사가 사면권을 쥐고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탄원을 받아들여 주지사는 사면장을 가지고 감옥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주지사를 목사로 오인하여 자기에게 접근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돌아가세요. 무슨 말 할지 뻔히 압니다. 됐어요. 가세요.”
사면장을 전하지도 못한 주지사는 그냥 나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 청년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 사람이 죽은 것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사면장을 받지 않아서 죽은 것입니다. 왜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 지옥에 갑니까?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 영접하지 않아서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사면장을 들이밀고 있는데도, “됐어. 됐다니까. 저리가요.”하면서 거부합니다.
무엇이 부럽고 무엇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까? 돈 있는 사람이 부럽습니까?
병원과 집만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는 의사를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오자마자, 다음 학기에 예정된 교단에 서기도 전에 갑자기 쓰러지더니 죽은 시간강사를 보았습니다.
길거리에서 손수레에 과일을 파시느라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계신 아주머니 한분이 어느 날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세상을 뜨셨다고 합니다.
무엇이 행복입니까? 돈, 명예, 지식,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는 것이 행복입니다.
사형수가 석방되면 햇빛만 봐도, 들꽃만 봐도 감사하게 됩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오신 분들은 인생이 달리 보입니다. 신앙인은 주님 안에서 행복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공로 세우지 말고 죄인으로서 죄사함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살기 바랍니다.
3. 종교인은 의식에 치중하지만 신앙인은 내면의 충실을 중시합니다.
(9절)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유대인들은 할례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10절)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아브라함은 우리로 말하자면 이순신 장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도 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 했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여종을 통해 아들을 낳았지요. 첩을 거느렸지요. 도무지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거룩하고 모범적인 행실은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그의 믿음 때문에 의롭게 여겨주셨습니다.
의식을 지킴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 받기 14년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어떤 의식을 지키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행함이나 의식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인의 속성입니다. 종교인들은 외형적인 껍데기는 있어도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예배는 있어도 감격은 없습니다. 봉사는 있어도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육체에 신뢰할 것이 없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지할 것이라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으시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 대개 두 종류의 타입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모의 수고를 내세우며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고생 했는지 아느냐?”고 말하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너를 키우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단다. 난 이미 너에게서 받을 효도를 다 받았단다.” 라고 말하는 유형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수고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녀가 부모의 은혜를 다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자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부모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내가 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함으로서 너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빚이 아니야. 네가 갚으려고 한다면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겠니? 그것은 빚이 아니야. 왜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해서 한 일이기 때문이지.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리고 너를 사랑하면서 나는 이미 너무나 큰 기쁨을 맛보았어.”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기꺼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빚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빚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가 갚아야 할 짐이 아니라, 누려야 할 은혜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응답할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살겠습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종교인의 옷을 벗으십시오. 자랑을 버리십시오. 무엇인가 대가를 지불하려는 공로 의식을 버리십시오. 대신 “주님 저는 죄인일 뿐입니다. 아무리 갚아도 주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참회하며 그분의 자비를 구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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