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Leonhard Goppelt)
1) 고펠트는 철저한 역사 비평적 방법만 사용하지만 복음서 전승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의 진정성과 관련하여 원칙적으로 훨씬 더 회의적이었다. 그는 주어진 전승이 진정한 것으로 입증될 때까지는 비진정한 것으로 생각하는 불트만식의 주먹구구식 추정을 좋아하지 않았고 주로 그 반대의 입장을 취했지만, 예수 전승의 신빙성에 관한 전제가 전체로서의 예수의 사역과 복음 선포 속에서의 그것의 실질적인 의미라는 더 큰 신학적 문제들로 통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결론이라고 생각하였다.
2) 그는 흔히 신학적 우파의 단순한 보수주의자로 자처하고 일반적으로 구원사학파와 관련되지만(Von Hoffmann. T. Zahn. A. Schlatter. J.Schniewind. O. Cullmann) 독자성(신학적 무인도)을 유지하고 있다.
3) 예수의 부활이 그의 사고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4) 그는 오늘날의 세계에서의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실제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활동한 교회의 사람, 대화의 사람이었다.
서문
1) 신약신학의 목표는 신약의 개개 저작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예수의 사역 또는 가장 초기의 교회에서의 선포와 가르침에 관한 서로 관련된 모습들을 주제별로 수집하여 정리하는 것이다.
2) 신약신학은 주석을 통한 신학적 결론들을 수집할 뿐만 아니라 주석을 촉진시키고 주석을 가능케 하는 개관 또는 전체적인 안목을 제공해 준다.
3) 신약과 오늘날의 사람들이 서로 진지하게 대화하는데, 특히 주석학과 조직 신학간에 있어야 한다.
제 1 부 예수의 사역과 그 신학적 의의
제 1 장 역사적, 신학적 위치의 정립
1. 신약 신학의 출발점에 대한 문제
1) 성경 주해의 답변
(1) 교회가 부활절 케리그마를 토대로 세워졌고 지탱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최초로 확실하게 말한 것이 (고전 15:1-55; 언어적 특징들이 아람어로 된 원형으로부터 유래했음을 보여 준다. 그 원형은 두번째 전승들 안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두 전승의 차이는 사도행전이 선교 목적의 케리그마였고 고린도전서가 교리학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수난 설화를 전혀 담고있지 않은 어록 자료는, 부활절의 빛 안에서 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래에 오실 인자 / 세상의 심판자의 말씀으로서의 예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았던 어떤 회중을 전제한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1> 바울 서신들에서 팔레스타인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의 회중들 사이에 그러한 결정적 차이를 갖고 있다는 지표를 읽을 수 없다는 점, 2> 어록 자료가 마가 전승과 경쟁적인 독립적 예수 전승으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다고 가정함 - 이 두가지로서 반박된다. 초기 기독교 전승들에 따라 부활절 케리그마만이 기독교 회중의 창립 및 예수 사역의 계승에 책임이 있었고, 이것이 신약 신학의 출발점이다.
(3) 바울 서신은 예수의 사역으로부터 나온 말씀들에 대해서는 드물게 산발적으로만 언급하고 있지만, 부활절 케리그마를 포함하고 있으며 예수 전승 자체는 선교 또는 교리 학습을 위한 선포의 직접적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 토대를 구성하고 있다.
(4) 교회 회중과 기독교 선교라는 상황 아래서 예수 전승이 종합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이 되려면 부활절 케리그마는 두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① 부활절 케리그마는 지상적 예수의 견지에서 회고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복음 전승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의 지상사역과 케리그마를 통합함으로써 전자가 후자를 받쳐 주는 토대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바울 이후 시대에서 이러한 복음서들은 바울의 복음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지만 케리그마를 위한 토대로서의 기능을 우선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② 케리그마를 회중의 상황에 맟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로써 부활절 케리그마에 대한 상세한 해석이 신약 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신약 신학을 그 내재적 구조에 맞추어 서술하려면 지상적 예수의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순전히 역사적인" 예수상은 알 수 없으며 이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이다(고후 5:16). 신약 신학은 예수가 지상의 생애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었는가 하는 것을 묻는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사역하신 분은 바로 이러한 예수인 것이다. 하지만 성경 주해의 측면에서 확인한 모든 것은 우리가 순전히 역사적 인식이라는 안경을 쓸 때 근본적으로 의문 투성이가 된다.
2) 역사적 문제점
F. C. Bauer는 역사적 발전-기독교의 출현-을 이적<부활, 십자가에 못박힌 개인의 승리>에서 이끌어 내는 것을 역사적 이성에 배치된다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단지 두 가지 사항-예수의 역사적 활동; 제자들의 부활절 신앙-만을 고찰할 수 있는데, 이 둘은 시계추처럼 그 강조점이 진동하였다.
(1)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종교 사학파도 가담)는 그 출발점을 "역사적 예수"에서 찾았다.
J. Weiss; W.Bousset; H.Braun - 신화적 사고 분리 주장
(2) Bultmann과 Bauer는 위의 견해를 역사적 허구로 규정하였다. 역사적 출발점은 부활절 신앙이다. 부활절 신앙과 기독론은 단순히 지상적 예수를 신화적으로 변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 속에서는 지상적 예수의 삶에서 오직 이 발달의 형태로만 작용했던 한 차원의 모습(Bauer - 기독교의 종교적 관념; Bultmann - 결단으로서의 하나님의 종말론적 부르심)을 드러낸다. 바울은 이러한 요소를 신학적으로 해석 발전시켰다. - 바울 신학의 중요성
(3) 1960년경 Bultmann의 제자들조차도 이러한 결단으로의 종말론적 부르심이 전 세계적인 신자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것이 진정 가능했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어떤 이들은 회중의 신앙고백 혹은 "신앙에 대한 이해"가 출발점이라 생각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지상적 예수의 말씀들을 케리그마의 근거이자 시금석이라 하는등, 역사적 문제점은 논의가 되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예수가 자기 스스로 되고 싶어 했던 그런 분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될까?
3) 예수의 계속된 사역에 대한 유비들
몇몇 유사한 유비들은 부활절 케리그마가 예수 당시의 유대적 환경 속에서 전혀 전례가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상 사역이 실제로 부활절 케리그마의 본질적 토대인가 하는 점이다. 예수의 사역은 그 본질적 구조의 견지에서 볼 때 수난과 부활로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신약 신학을 서술할 때 예수의 사역과 생애로부터 시작하는 것의 적절성이 밑받침된다고 하겠다.
2. 자료들
부활절 케리그마의 관점에서 쓰여진 자료들로부터 부활절 케리그마 이전의 예수의 사역에 대한 믿을만한 묘사를 얻어내는 것이 가능할까?
1) 공관복음서
(1) 공관복음서 자료들에 대한 문헌 비평적 연구는 두 자료 가설(마가복음과 유사한 어떤 복음서, 마가에는 없고 마태와 누가에 공통적으로 있는 내용을 어록 자료)이라는 잠적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문헌 비평은 또 누가복음이 제 3의 자료를 사용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자료들은 구전형태로 형성되어 전해진 단어들을 문자화하여 편집한 것 들이다.
(2) 1918년 이후 구전에 대한 탐구에 관심이 집중되었으며,"양식사"의 견지에서 연구되었는데, M.Dibelius와 R.Bultmann(`공관 복음 전승사')에 의해 발전되었다. Bultmann은 "우리는 예수의 생애와 개성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예수에 관해 남아 있는 모든 것은 결단으로서의 종말론적 부르심이다."라고 주장하며 전승에 대한 급진적 역사적 비평을 가하였다. G.Bornkamm은 부활절이라는 지평은 잊혀져서는 안되며,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역사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나사렛 예수'에서 Bultmann을 반박하였다. Kasemann은 Bultmann이 발전시킨 급진적 비평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수 많은 세월동안 시험을 거친 구체적 역사성 특질의 판별 기준에 따라 어떤 것이 예수에게 고유한 것이냐 하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유대교, 헬레니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관념들과 구별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Roloff는 이 비평적 연구가 아직 적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것은 확고부동한 견해들이 이 연구계획을 계속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고전적 양식 비평의 가설(회중이 복음서들에 남겨있는 전승을 만들어 내었으며 이것은 주로 그 회중의 삶을 조건짓는 관계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이 확고부동하여, 우리가 이미 복음 전승의 출현에 관해 확인했던 것과 모순된다.
(3) 독자적인 전승 비평적 분석의 발판
① 이차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 배제. ② 진정한 자료의 핵들로 부터 나오는 여러 부분들을 취합하여 합리적 해석을 통하여 단일하고 전체적인 상을 만든다. 진정한 자료의 핵은 종교사적 특징이라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판별 기준을 그 환경 및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결부시켜 적용함으로써 분리해 낼 수 있다. 공관복음서의 자료는 신약 신학에서 관점을 달리하여 서너번 등장할 것이다 : 예수에 대한 묘사 ; 초기 공동체의 신학; 복음서 기자들의 신학.
2) 요한복음의 공헌
(1) 요한복음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묘사로서 공관복음서와 전혀 다른 개념의 언어를 사용하므로, 공관복음서의 개념어로 변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의 사역에 대한 구도와 문학적 구조의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한복음의 강화들은 믿을 만한 예수의 전승을 강해와 해석을 통하여 발전시킨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2) 부활절 이후의 상황에 적용하고 있다.
(3)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 보다 복음서 기자의 복음을 훨씬 더 많이 내포하고 있지만, 예수의 지상사역을 말해주는 전거를 양적으로는 적지만 핵심적인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4) 요한복음 기자는 공관 전승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① 요한은 공동체가 공관복음서로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지만 공관 복음서를 사용하지 않았다. ② 공관 복음서를 대신하기를 원치 않았다. ③ 공관복음서 옆에 예수에 관한 독자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한 예수의 모습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전달하고자 한 자신의 묘사를 병치시키려 하였다.
3) 정경복음서 이외의 기독교적 예수 전승
(1) Jeremias에 의하면 이삼백 개의 agrapa(예수의 개별 말씀들) 가운데 20여개 만이 공관복음서의 예수 말씀에 비견될 수 있으므로, 공관 복음서의 예수 전승을 아그라파를 통해 보충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
(2) 위경 전승은 주로 공관복음서들에 의존하고 있으며, 전승사적 견지에서는 비교적 거의 완전히 이차적임이 드러났다.
4) 비기독교적 예수 전승
표면적으로 편견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기독교적 정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1, 2세기에 나온 예수에 관한 정보를 담고있는 소수의 현존하는 비기독교적 자료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편견을 제공함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의 지상 사역의 신학적 내용을 본질적으로 공관 복음서 전승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시사를 받는다.
3. 역사적 구도
1) 예수에 관한 연대에 대하여
(1) 눅 3:1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티베리우스 15년, 즉 주후 27년 10월 1일과 주후 28년 9월 30일 사이의 어느 시기에 공적인 사역을 개시했다고 한다.
(2) 이 전거는 본디오 빌라도가 공직을 맡았던 해에(요세푸스에 의하면 주후 26-36) 예수가 사역을 했다는 믿을 만한 전승과 일치한다.
(3) 예수가 죽은 해는 바울의 회심(주후 33-35년 사이)이전이어야 한다. 니산월 15일이 주후 30년 또는 31년 성 금요일에 해당되었다. 요한의 연대기에 언급된 날짜인 니산월 14일은 주후 30-33년의 성금요일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니산월 14일(또는 15일)인 주후 30년 4월 7일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2) 예수의 조상들
(1) 갈릴리 나사렛: 유대인들이 나사렛 예수 호칭만을 사용한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나사렛이라는 마을은 구약의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예수와 유대교의 갈등을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에서 그 해결점을 찾는 것은 잘못이다.
(2) 베들레헴 : 베들레헴 탄생은 단 두곳(마 2:1, 눅 2:4)에서만 말한다. 전승사적 배경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이 묘사 속에는 두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즉 예수는 다윗의 혈통에 속함과 동시에 성령에 속했다. 이러한 전승사적 요소들의 결합으로부터 탄생 설화는 예수의 역사적 조상들에 관하여 두 가지 점에서 세부적인 내용을 제공해 준다. 예수는 역사 안에서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해 내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왔으며, 약속의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국외자들에게 예수의 신적 또는 메시야적 성격을 확신시킬 수 있는 증거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3) 공적 사역의 경과와 구도
(1) 개요 :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의 사역은 대부분 팔레스타인 유대교 안에서 일어났다. 불트만도 동감하는 벨하우젠의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유대인 이었다"는 진술은 예수가 실질적인 의미에서조차 이러한 틀의 경계를 뛰어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잘못이 있지만, 외관상으로는 타당하다. 예수의 사역은 서기관의 사역에 비교할 수 있지만, 직접적인 예언자적 발언 및 이적 행위들로 인해 평범한 서기관 상과는 구별되었다.
(2) 지리적으로 : 예수의 목표는 이스라엘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예루살렘과의 만남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예수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유대 백성들이 정착해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안에서 행해졌다.
(3)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한 선교 : 예수는 이스라엘에게 이전에 알지 못했던 신을 선포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조상들의 하나님의 오심을 알렸다.
(4) 예수와 종교 분파들 : 유대 공동체의 신정체제 안에서 종교적 분파라는 성격도 띄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들은 소수였지만 이스라엘의 정치-종교적 생활을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복음서 기사들에서 열심당과 에세네파는 언급되지 않고; 사두개파는 편집에 의한 증보를 제외한다면 오직 한번 논쟁에 등장하며: 바리새파는 편집에 의한 증보를 제외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예수의 적대자들로 등장한다. 이는 예수와 유대교의 대표인 바리새파 모두가 율법에 관한 문제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다.
(5) 예수의 사역의 길 : 예수의 배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네가지 관계 - 열심당, 갈릴리 형제단, 묵시론적 배경, 유대의 세례파들, 에세네파 - 들을 살펴볼 때, 예수의 직접적인 제자 집단의 선구와 관련한 공관 전승의 얼핏 스쳐가는 언급과 정확히 일치한다. 예수의 종교사적 선구에 대한 고찰에서 다음을 요약해 낼 수 있다. ① 예수는 어느 특정한 유대교의 분파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다양한 유대의 전통들을 취사 선택하여 자신의 선포를 발전시켰다. ② 예수가 바리새파와 대결했던 것은 예수가 기존의 반바리새파를 대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는 모든 이스라엘을 회개로 불렀고 이 부르심에는 다른 어느 분파보다도 율법을 자신의 영역으로 생각했던 바리새파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③ 예수가 분명하고 긍정적으로 동조했던 유일한 분파는 세례 요한이라는 인물에 의해 대표되는 운동이었다.
(6)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 : 예수는 요한의 세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였으며, 그에게 세례를 받았고, 오직 요한만이 그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지칭하였다. 예수는 구원사적 관점에서 세례 요한과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다. 신약의 진술을 공정하게 다루려면 두 고찰 방법 - 역사적 및 구원사적 - 을 모두 진지하게 고려하여 상호간에 치열한 대화를 전개하도록 해야 한다. 세례요한에 관한 신약의 진술들을 역사적 상황앞에 맞세워 놓음으로써 예수의 직접적인 배경을 분명히 밝히
고자 하는 시도로부터 이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예수의 자기 이해 뿐 아니라 예수의 구원사역을 이해하기 위한 종교사적 전제인 유대의 구원론이라는 문제를 이끌어 들일 것이다.
4. 구원사의 출발점 : 세례 요한
1) 역사적 위치를 결정하는 문제에 대하여
(1) 쿰란과의 지리적 근접성에 걸맞게 사해 두루마기를 통해 에세네파와 요한 사이에는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회개로의 급진적인 부름; 결례; 위로부터 임박한 개입에 대한 기대; 광야에 있는 것을 구원사적으로 이해.
(2)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은 세가지 전승층으로 되어있다. ① 마가전승은 세례 요한의 사역의 개시와 죽음에 대해 들려준다. 이는 마가에서 편집적 성격을 띄어 마태, 누가에 의해 한층 개작된다. ② Q에 나오는 세례자에 관한 말씀들은 사슬 형태로 전해 내려온 것으로 아마 아람어로된 정형 어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듯 하다. ③ 세번째 층(눅 3:10-14의 소위 본문 설교에 관한 누가의 특수 전승과 눅 1장의 탄생 설화)은 거의 역사적 신빙성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2) 세례 요한의 설교 : 네 가지 신학적 주제들은 유대 구원론의 주요한 주제들이다.
(1) 임박한 진노의 심판 : 임박한 진노는 열매와 관련되는데, 그 누구도 열매를 보일 수 없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의 손을 빌어 요한의 입속에 넣어진 말들이 아니다. 쿰란 사본들도 진노 아래 모든 사람들의 멸망을 전제하고 있다. 곧 지금 제안되는 회개를 바탕으로 행하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2) 회개로의 부름 : metanoia는 히브리어 shub(돌이키는 것)의 헬라어 대응어로서, 전 인격이 방향을 바꾸는 것,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는 방식, 견해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행위의 변화를 의미한다. 바리새파 유대교는 매일 회개하라고 권면하였고 용서를 수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매일의 부분적 회개를 요구한 반면 요한은 단번의 총체적인 회개, 즉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가 열매 맺는 나무로 변하는 회개로 나아가도록 가르쳤다. 회개에 대한 세례요한의 요구는 에세네파의 요구와 흡사하다. 에세네파는 회개를 보이는 것은 언역 곧 자기 분파로 입회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서 하나님과 자신의 공동체와의 새롭게 된 교제가 제공된다고 하였다. 세례 요한은 주위에 특별한 공동체를 모으지 않았고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모든 이스라엘을 회개로 불러 재난을 예비하라고 하였다. 요한의 회개의 부름은 하나님과의 최후의 종말론적 대면을 예기하였다.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된 변화를 실현시키는 것은 오실자의 세례 - 성령과 불 - 라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실현을 미리 나타내 보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약속으로 남아있는 표시이다.
(3) 요한의 세례 :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은 모두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세례는 죄의 고백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죄사함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반면에 모든 유대의 결례는 자기 정화였다. 요한의 세례는 그 작용 양식상, 바리새파에서 발전된 개종자들의 세례와 마찬가지로 단 한번의 침례였다. 그러나 결례가 회개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요한의 세례는 에세네파의 개념에 더 가깝다. 바리새파에게서 죄를 깨끗게 하는것은 예배 의식이었다. 물론 에세네파의 회개는 결례에 의해 보완되는 것인 반면, 요한에게 회개는 세례를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종교사적 관심에서 요한의 세례는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의 종교적 결례들에서 자라왔다. 하지만 그 핵심적인 의도에서 그것은 물뿌림과 성령의 부여주심을 통한 종말론적 정화라는 구약 예언과 맥을 같이한다. 그는 이 세례가 마지막 날의 입구에서 은혜의 최후 수단이자 죄 사함과 회개의 매개가 되도록 했지만 장차 올 어떤 것을 약속하는 표지라는 의미에서만 은혜였다. 성령을 통한 인류의 새로워짐은 오실 자에 의해서만 현실로 될 것이다.
(4) 오실자 : Q전승(눅 3:16), 마가; 전승(막 1:7),들을 결합하는 마 3:11이하를 연구함으로써 세가지 사항을 알수 있다. ① 요한은 메시야적 인물을 기대했지만, 종말에 구원을 가져다 주는 자에 대한 관례적인 유대적 호칭들(메시야, 다윗의 자손, 인자)을 사용하지 않았다. "내 뒤에 오시는 이",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라 불렀다. ② 요한은 오실 자를 심판자이자 새롭게 하시는 자로, 따라서 마 3:7에 따라 임박한 진노로 선포했다. ③ 오실 자가 심판자로 등장한다면,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으리라. 성령의 세례를 선포함으로써 요한은 자신의 사역의 한계를 인정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역사의 완성은 자기가 예언의 전체 증언을 따라 예상했던 방식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였다.
3) 세례 요한의 의의
(1) 세례 운동 : 종교사적 분석은 요한이 유대의 세례 운동의 흐름 안에 있었음을 자주 반복해서 보여 주지만, 그 운동과도 구별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세례 운동보다 구약 예언의 주요한 흐름에 더 중점적으로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디벨리우스에 의하면, 요한은 유대 백성들 속에서 종말론적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예수도 이에 감명을 받았고, 그 흐름을 타고 그 정점에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요한이 예언을 넘어 시행했던 세례 조차도 회개를 가져올 수 없었다. 요한은 예언을 대표했지만 또한 그 자신이 예언의 한계에 대한 증인이기도 했다. 요한의 인격과 사역은 자신만이 아닌 구약 예언의 막다른 골목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은 예기치 않았던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오실 자는 세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스스로 세례를 받으러 왔다. 오실 자는 역사의 피날레로서가 아니라 역사 안으로 들어 왔다. 요한의 주요한 사명은 예수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는 것이다.
(2) 예수의 수세 : 막1:9-11 및 병행구에 나오는 예수의 수세는 두부분으로 나뉜다. ① 첫번째는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예수가 요한에게로 온 것은 구약에 대한 그의 이해 및 기독교적 이해를 회당의 이해와 구별한다는 것을 전제하며, 그 때 이후로 예수는 회개로 부르심 받은 자들과 같이 했다. ② 예수는 결코 하나님의 부르심 또는 명령을 자신의 사역을 위한 밑받침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예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권위를 토대로 하여 말하고 행동했다. 예수의 공적 사억은 어떠한 예비 단계도 거치지 않고 수세시에 개시되었고 이삼년 후에 소멸되었다. 이는 예수의 사역에 관한 이후의 기사에 대한 해석적인 서론 역할을 하는 기독론적 요약의 성격을 띤다.
'신약신학! 신약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정경의 근거 (0) | 2012.10.17 |
---|---|
[스크랩] 신약 정경원리 (0) | 2012.10.17 |
[스크랩] 신약신학 (0) | 2012.10.17 |
[스크랩] 바울 사상과 칼빈 사상의 비교 연구...(교회론을 중심으로) (0) | 2012.10.09 |
[스크랩] 칼뱅주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일고찰 (0) | 2012.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