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칼뱅주의 때문에 세간에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사연인즉 김동호 목사님께서 전병욱 목사의 교회 개척에 대해서 페이스북에 자신의 소감을 올리면서 슬쩍 지나가며 언급한 내용, "그런 면에서 나는 칼빈주의자이다. 예정론은 안 믿지만…"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그래서 전 목사의 문제에 관한 언급이었음에도 칼뱅의 예정론에 관한 논쟁으로 논의가 완전히 전도되어 버린 상황이라는 게 페북을 통한 지인들의 전언이다.

놀랍다! 놀라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떻게 전병욱 목사의 개척 건에 대한 논의가 칼뱅주의 논의로, 그것도 예정론 논쟁으로 옮겨가 버릴 수가 있는가? 그중에서도 더욱 놀라운 건 21세기 초두에, 탈 기독교 시대(Post-Christianity Era)가 도래하고 있는 마당에 칼뱅주의가 이토록 맹렬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침례교 목사로서 칼뱅주의 예정론 논쟁에 뛰어들 생각은 조금도 없고, 제3자의 입장에서 칼뱅주의가 갖는 논리적 구조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간단히 나누고 싶다.

사실 칼뱅주의 논쟁에서 생겨나는 많은 문제는 논쟁에서 다루는 이슈나 내용이 아니라 칼뱅주의 자체의 성격에 있다. 칼뱅주의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고 정교한 논리 체계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물론 칼뱅주의자들은 필자의 첫 번째 전제부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칼뱅주의가 순수한 성서의 가르침이라고 말하기 좋아한다.

옳다! 칼뱅주의의 대부분의 내용은 성서로부터 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칼뱅주의가 성서 자체가 아니라 성서로부터 추출된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서는 칼뱅주의만큼 논리적이지도 않고, 일관성이 있지도 않다. 때로는 모순되어 보이기도 한다. 하여 성서는 필연적으로 해석을 필요로 한다. 사실 성서는 칼뱅주의를 지지하는 본문뿐만 아니라 칼뱅주의를 반대하는 듯한 내용도 대단히 많다.

물론 칼뱅주의자들은 이러한 본문들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쟁이 존재하지만, 필자는 이런 논쟁에 관심이 없다. 어쨌거나 요지는 칼뱅주의자들은 성서의 다양하고, 모순되어 보이는 성서의 계시에서 특정 본문만을 추출한 뒤, 다른 본문을 그 특정 본문에 부속시킴으로써 자신의 논리 체계를 완성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칼뱅주의는 성서로부터 추출된 논리적 체계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1619년 발표된 도르트 신조(The Synod of Dort)에 따르면 칼뱅주의 구원관은 5가지 명제로 구성된다.

Total Depravity : 전적 타락
-> 인간은 '구원에 관한 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Unconditional Election : 무조건적 선택
->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칼뱅주의도 크게 둘로, 즉 타락 전 선택과 타락 후 선택으로 나뉜다)에 구원하실 자와 유기할 자를 택하셨다.

Limited Atonement : 제한 속죄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택자만을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Irresistible Grace : 거부할 수 없는 은총
->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어 은총을 베푸실 때 인간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

Perseverance of the Saints : 성도의 견인
->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위의 5대 교리를 이니셜만 따서 튤립(TULIP) 교리라고 부른다. 이 튤립을 자세히 살펴보면 첫 번째 명제, '전적 타락'으로부터 나머지 모든 명제가 자동적으로 연역되고 추론되어 하나의 일관된 논리적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T :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에 모든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의 주권에 이양된다. 인간은 복음을 듣고도 믿을 수 있는 능력도, 예수를 영접할 능력도 없다(구원 초청을 하거나 영접 기도를 시키는 모든 칼뱅주의자에게 화 있을진저!).

U : 만일 어떤 이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이고, 어떤 이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유기하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이다(택자와 비택자 모두를 예정하셨다 하여 이를 이중 예정이라 한다).

L : 택자와 비택자를 예정하셨으니,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을 때는 택자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 예수 속죄의 피는 비택자를 위해서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셨다. 유기하기로 작정하셔 놓고 속죄의 피를 흘리실 리 있겠는가?

I :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데, 이때 죄인은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택자들뿐이다. 그리고 택함 받은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실 때 이를 받아들일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다.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주권이며, 은총이다. 신자는 그가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믿게 되어서 구원받은 것이고, 불신자는 그가 안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게끔 하지 아니하셔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P: 일단 그렇게 하나님의 은총으로 복음을 믿게 되어 구원에 이른 성도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 구원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으니 구원은 취소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을 끝까지 붙드실 것이다.

이처럼 칼뱅주의는 정교한 논리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칼뱅주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위의 내용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지라도 이를 선택적으로 거부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위의 내용 중 일부를 고치려 할 때 전체 논리 체계는 모순이라는 선고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여 도르트 신조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하나뿐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칼뱅주의에 대해서 다음 세 가지 반응이 가능할 것이다.

1) 아예 거부하거나,
2) 부분만 받아들이거나,
3) 완전히 받아들이거나이다.

첫째의 경우는 이단이라고 낙인찍힐 것이고, 둘째의 경우는 논리적 모순이라고 비웃음을 사거나 교묘한 이단이라고 정죄를 받을 것이다. 오직 세 번째 전적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정통이며, 올바른 구원의 지식을 가졌노라 인정을 받을 것이다. 결국, 압축하면 전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죄와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동호 목사님의 경우는 2)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식의 교리 특성은 제국주의적 인식론의 산물이라고 주장해 왔다. 린드벡(Lindbeck)에 따르면 이러한 유의 자유주의 이전의 정통 교리는 인식-명제적(cognitive-propositional) 교리다. 그리고 이 교리는 성서의 내용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즉 외피는 성서의 내용이지만 그 내적 구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법칙, 즉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원리를 한마디로 요약해서 설명하면, 어떤 사람이 버락 오바마이든지 조지 부시이든지 둘 중 하나이지, 버락 오바마이면서 조지 부시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인식론과 결합하면 칼뱅주의는 맞든지 틀리든지 둘 중 하나고, 칼뱅주의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둘 중 하나다. 이렇게 되면 성서에서 '해석'의 가능성은 사라지며, 심지어 '믿음'의 가능성마저 사라지게 된다. 1+1이 2인 것처럼 칼뱅주의가 절대 진리라면, 믿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통상 근본주의자들이 인식적 제국주의를 행동과 실천의 전략으로 택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만일 성서가 절대 진리면 그것은 종교의 영역뿐만 아니라 과학, 정치, 경제, 문화, 윤리 등 모든 영역에서도 절대 추종해야 하는 진리인 것이다. 만일 이에 대해서 하나라도 거부하면 전부를 거부한 것이나 마찬가지며, 그는 거짓의 아비 마귀에 사로잡혀 있다는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칼 바르트가 프란시스 쉐퍼의 그러한 근본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서신을 잠깐 인용해 본다.

"친애하는 쉐퍼씨, 8월 28일에 보내 주신 편지와 발표문-신현대주의-을 잘 읽었습니다. … 내가 알게 된 것은, 당신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이 대체로, 내가 동일 주제에 대한 반틸의 책에서 발견한 것과 동류라는 것. 또 알게 된 것은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은 일종의 범죄학과 같은 신학 유형을 개발하기로 정했다는 것. 당신네는 지금 당신들의 견해 및 진술과 전적으로(수적으로!) 똑같은 개념을 갖고 있지 않은 동료 피조물을 모조리 반박하고 차별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는 것. 당신네는 실로 '든든한 진리의 반석 위에 걷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불쌍한 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도 그렇지 않습니다. 내 입장은 절망적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배심원이 이미 발표를 했고, 선고는 내려졌으며, 피고가 바로 오늘 아침에 죽을 때까지 목이 매달렸습니다. 글쎄요, 글쎄요! 당신이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일이니까요. …당신이 미국, 네덜란드, 핀란드,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당신의 '형사' 업무를 계속하고, 나를 가장 위험한 이단으로 비난해도 좋습니다. 그러지 말란 법이 있나요? 어쩌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왜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더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십니까? 그 이단은 이미 화형에 처해 영원히 묻혀 버렸습니다(김XX님의 페이스북에서)."

좋다. 위의 입장 중 3)을 취하여 위의 도르트 신조 전부를 동의했다고 쳐보자. 그러면 문제가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질문을 그만두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 칼뱅주의는 또 다른 수많은 질문들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들어 보자.

1)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면 역사는 프로그램된 것이냐?
2)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느냐?
3) 인간의 타락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면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냐? 등등…

이에 대해서는 걸출한 신학자들의 무시무시한 논리 싸움의 역사가 수만 페이지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필자는 역시 이러한 논쟁에 뛰어드는 것에 별 흥미가 없다. 다만 이런 질문들에 대한 칼뱅주의자의 답변 스타일을 지적하고자 한다.

칼뱅주의자의 전형적인 답변은 '네모난 동그라미'식이다. 그래서,
'역사는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으나 되어 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으나 있다.'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가 아니나 맞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본다면,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할 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구원의 은총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주권은 하나님께 100% 있으며, 인간에게는 0%라고. 그런데 죄의 책임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책임은 0%이고, 인간에게 100% 책임을 전가한다. 칼뱅주의자는 이처럼 주권과 책임이라는 사실상의 동의어를 분리하는 놀라운 언어적 기술을 발휘한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너무도 대범하게 범하면서 그 모순의 간극을 온갖 현란한 수사적 기교로 채워 넣는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는 질문자의 무지를 타박한다. 결국, 질문자는 '칼뱅주의를 모른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

좋다. 이 모든 문제가 질문자의 무지로 말미암았다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칼뱅주의는 중요한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바로 위의 5대 명제가 사실은 현실 세계 속에서 사는 인간에게는 별로 유효한 교리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문제의 근원은 두 번째 명제인 '무조건적 선택'에 있다. 하나님께서 타락 전이 되었든 후가 되었던, 만세 전에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다. 예정은 소위 '신비'의 영역 속에 남겨져 있다. 그리고 칼뱅주의는 바로 이 미지의 공간에 모든 논리적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버릴 수 있는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을 숨겨 놓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칼뱅주의자들은 '비택자에게 전도할 필요가 있느냐?'는 물음에 답할 때 이 기계장치의 신을 불러낸다. 만일 하나님께서 택자와 비택자를 선택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만을 위해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고 해 보자. 그리스도께서도 택자만을 위해서 속죄를 피를 흘리셨다면 그의 제자들인 우리도 택자만을 위해서 전도해야 하지 않는가? 비택자를 전도하는 것은 쓸모도 없을뿐더러,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닌가?

형식 논리적으로 보면 우리는 비택자에게 전도할 필요가 없다. 아니 전도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도 그리하셨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택자와 비택자를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다. 바로 이 예정의 신비는 '하나님은 택자만 구원하신다'는 예정의 교리로부터 '택자에게만 전도해야 한다' 혹은 '비택자에게는 전도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의 자동 추론을 막는다. 예정의 신비로 말미암아 그러한 추론을 무효화해 버리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신비'의 무효화 효과라고 부른다.

결국, 예정의 '신비'는 모든 것을 무효화시킨다. 하여 우리는 칼뱅주의로부터 유의미한 명제를 추론해 낼 수 없으며, 이에 관해서 토론하거나 어떤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칼뱅주의는 최종적으로 공격당하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무효화!' 이런 식으로 예정의 신비는 칼뱅주의를 공격하는 논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소해 버린다.

하지만 무효화 효과는 칼뱅주의에 대한 공격을 방어할 때만 나타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신비'라는 구멍은 칼뱅주의 자신을 무효화하게 된다. T -> U -> L -> I -> P로 이어지는 논리 체계 중 U에 '신비'라는 구멍이 생김으로써 L, I, P라는 명제는 사실상 무효화되어야 옳다.

예를 들어보자. 마지막 명제 P, 성도의 견인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한 구원이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은 죄지어도 구원받는가? 물론이다. 견인 교리는 오늘 실패해도, 때로는 죄를 지어도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놀라운 안정감을 신자에게 제공해 주는 복음이다 (물론 어떤 이에게 이것은 저주처럼 들리겠지만…). 그렇다면 신자는 살인해도 구원받는가? 형식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다. 한번 택자는 영원한 택자다. 하여 택자는 살인뿐만 아니라 여하한 죄를 지어도 구원받는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공로보다 크겠는가? 은총 앞에서 죄는 크나 작으나 다 무(無)나 다름없지 않은가? 논리적으로 보면 영화 '밀양'처럼 칼뱅주의 구원관은 살인 면허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다. 그래서 칼뱅주의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U에 나 있는 '신비'라는 구멍에서 기계장치의 신을 불러낸다. 그 신은 질문자에게 이렇게 답해 준다. '우리 자신도 택자인지, 비택자인지 잘 모른다'고.

칼뱅주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과관계를 뒤집는다. '살인한 사람은 처음부터 택자가 아니었음이 증명된 것이다'고. 여기서 살인은 택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식의 논리 전도를 탄핵할 길이 없다. 그리고 반대도 참이다. 만일 우리가 말씀대로 신실하게 산다면 우리는 택자였음이 증명된다고.

칼뱅은 우리가 택자인지, 비택자인지 알 방법에 대해서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를 들어 설명했으나 이러한 이중의 증거가 예정의 신비를 완벽하게 해소할 수 없다. 여전히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천로역정을 마치고 천성문에 들어서서 뒤돌아볼 때까지 우리가 택자인지, 비택자인지 100% 확신할 수 없다.

하여 견인 교리는 효력적으로 무의미하다. 내가 택자인지 비택자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약속이 실제로 어떤 효과를 줄 수 있겠는가? 견인 교리는 자신이 택자라는 사실을 100%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교리이기에 현실 세계에서 이 교리로부터 온전히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칼뱅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막스 베버가 잘 보여 주었듯이, 칼뱅주의에 심취했던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택자인지 비택자인지' 모른다는 것이고, 청교도들은 이를 알기 위해 평생 애를 썼다. 청교도들은 청교도 윤리를 실행함으로써 자신이 택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즉 검소, 검약, 성실 등의 윤리적 행실을 통해 그가 택자로, 즉 구원받은 자로 증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칼뱅주의가 당대 루터주의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예정의 불확실성 때문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 다른 말로 적절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남아 있을 때 칼뱅주의는 살인면허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나아가 높은 윤리를 결과할 수도 있다. 즉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성도의 견인 교리는 그 자체로는 복음일지 몰라도(물론 어떤 이에게는 저주처럼 들리겠지만) 예정의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아 효력적으로 무의미한 교리로 남는다. 그리고 또 그래야 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칼뱅주의를 온전히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칼뱅주의는 논리적으로 완벽한 체계일지 몰라도 효과적으로는 무의미한 교리다. 왜냐하면, 칼뱅주의는 U(예정)이하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교리며, 우리는 이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칼뱅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예정교리와 함께 나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교리로 남아 있어야 한다.

칼뱅주의를 옹호하는 측면에서 보자면,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찬송이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만일 칼뱅주의를 철저한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고 극단으로까지 나아가면 그건 필히 괴물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칼뱅주의 교리를 현실적인 삶 속에서 효과적으로 유효하게 말하려 할 때 그는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언어를 말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사실 튤립(TULIP)교리는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할 때 가능한 교리다.

하지만 다수 칼뱅주의자의 문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들이 뭔가를 말하려고 할 때, 특히 누군가의 논리를 비판할 때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것으로 남의 논리를 틀렸다고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하여, 진정한 칼뱅주의자라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마땅하다!

신광은 / 대전 열음터교회 담임목사·<메가처치 논박>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