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나타난 묵시문학으로본
포스트 모던신학과 종교 다원주의.
기독교 교육과
김 영 한
목 차
Ⅰ 서 론 1
Ⅱ 본 론 2
1.구원관의 비교 2
(1)전통적 구원관 2
(2)다원주의상황에서의 구원관 3
2.포스트모던신학과 종교 다원주의 6
3.성서에나타난 묵시문학으로본
포스트모던신학과종교 다원주의 7
(1)묵시문학이란 무엇인가? 7
(2)상호 관계성 9
Ⅲ 결론10
Ⅳ 참고문헌11
제 목: 성서에 나타난 묵시문학으로본 포스트 모던신학과 종교 다원주의.
기독교 교육과
김 영 한
Ⅰ. 서 론
20세기에 들어와서 이 사회는 물질 문명과 과학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발전에 뒷면에는 많은 문제 즉 공해, 전쟁, 기아등과 같은 전 인류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주는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고 최근에 들어서 그것에 대한 문제들이 대두되게 되었다. 파괴되어 가고 있는 자연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파괴와 그것에 대한 회복하려는 노력과 현대사회의 가치들을 재 조명하게 되었다. 기독교에서도 이와 같이 현 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위치에 비해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실천의 미약함과 기독교자체의 무력함이 사회개혁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회의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리고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한 방법적인 면에서의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기존의 기독교적 신학에 도전이 되고 있고 어느정도 수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세가지 문제들을 중심으로 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를 고찰하겠는데 첫째는 지금까지의 기존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구원관에 대한 재조명이고 둘째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 한계성에 대해서 볼 것이며 셋째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가 성경에 나타난 묵시문학과의 관게성을 검토하여 그 한계성을 극복하여 보겠다.
Ⅱ. 본 론.
1.구원관의 비교
(1) 전통적 구원관
기독교에서의 구원관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되어 진다데 첫째가 예정론이다 일반적으로 예정론은 신론에서 다루는 것이 최근의 추세이다 예정이 하나님의 예정이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 성서적 근거는 대표적으로 요15;16에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너희로 가서과실을 맺게하고 ...” 라고하였고 엡1;4/5에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고 하였다 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 곧 선민이라는 사상이 있는데 이것이 신약의 선택사상의 원천이라고 할수있다 둘째는 칭의론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중생이다 그런데 중생은 주관적인 내면상태의 변화를 표현한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족관계에 비추어서 양자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나의 사건을 어떠한 방법으로 설명하느냐에 따라 여러가지로 표현 할수있다 의인, 득의. 또는 선의 라고 하는데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공로를 받아 들이는 신자에게 선언하시는 것이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성화론이 있다. 이것은 예수믿는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요구요, 동시에 우리의 영적 소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기가 어렵고 또한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또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같이 기독교의 구원관이 있는데 이 세가지의 공통적인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다시말해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필연적으로 예수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2)다원주의 상황에서의 구원관
왜 현재나 미래에 오직 한 분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인 오직 한분 그리스도가 있는가 ? 라는 물음을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라는 게으른 사변으로 잊어버리려 하는 것은 오늘날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근대 인간들에게 있어서 화육의 사건이 오직 한 번만 일어나야 했다는 견해를 가치 있는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더 이상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왜 신-인(God-Manhood)의 사건은 일반적이지 않은가 ? 나아가서 위격적 연합(unio hypostatica) 사건이 엄격한 의미에서 단 한 번만 발생했다는 것을 ‘요구’해야(은총과 영생에 관하여)하는가?
이 문제는 비록 그 때마다 상황들이 바뀌기는 하였지만, 참으로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질문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계이전 시대에 있었던 그 두 가지의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소위 기독교계 시대에는 이러한 유형의 문제가 교회 당국에게 매혹적일 수 없었고 그래서 묵살당해 왔기 때문이다.
만일 이 문제에 관하여 바울과 어거스틴 사이에 있는 뚜렷한 유사성을 인식한다면,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스스로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있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 의하여 수태한 리브가의 두 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드리 아직 나기도 전이요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택의 경륜이 사람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그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나타내시려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하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 하나님은 불공정하십니까 ?(롬 9:10 - 12, 1)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결국에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 따라서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차별이 없고, 한 주께서 만민의 주가 되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리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지에 비추어 볼 때 인간존재들 사이에는 몇몇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1)구원에 관계되는 한, 유대인이 먼저요 그 다음이 이방인이다.(2)유대인은 ‘야곱’의 후손이요 경작한 올리브나무이며 ,선택된 자이다. 이방인은 ‘에서’의 후손이요 직접적으로 선택되지 않은야생 올리브나무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업은 역사적으로 오직 유대인, 특별히 역사적 예수를 통하여서만 이방인에게 중개된다. 비록하나님 앞에서 결코 차이가 없다고 할지라도, 유대인은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범사에 많은”이익을 가진다. 그렇다면 그러한 역사적 매개체를 향유하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이 불공정하시다고 말할 수 있지않겠는가? 이것은 바울이 로마에서 대답하려고 했던 질문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불공정하신가? 결코 그렇지 않다”.왜 불공정하지않는가? 어떠한 방법으로 바울은 그 자신의 문제에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는가? 그는 자신이 제기한 문제자채를 해소시킴으로써 가장 단순하고도 전형적인 대답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려는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완악하게 하시려는 사람에게는 완악하게하십니다....‘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특별히 이방인들) 의 잘못을 책망하시는가? 누가 능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있겠는가?’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오, 인간이여,그대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게 말대꾸를 하는 것입닊?”(롬 9:18-19) 이것으로써 그는 그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한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의지에 대항하여 질문할 수 있는가?”-이러한 바울적인 대답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포르피리의 질문에 대답하는 내용에서 어거스틴은 결정적으로 바울을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포르피리는 이렇게 질문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가 자신을 구원과 은총과 진리의 길이라고 천명하고,자신과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있다고 단언하면, 그리스도가 오기 이전 수 세기 동안에 살았던 인간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왜 그는 세게의 그 많은 기간들을 자신에게서 제외시켰는가?”
간단히 말해서, “왜 그렇게 늦었는가?”라고 질문하였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두 가지방식으로대답하였다: “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요,그에 의해서 만물이형성되었으며, 그는 성자이심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말씀’이시며,과거에 한때 선포된 과거에 속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불변하신 아버지와 영원토록 함께하는 말씀이시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말씀)는 여러시간과 장소에 가장 적합하도록 변용될 수 있게 되어있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그는 히브리 민족에게 주어지기 전과 그시대, 그리고 그 이후 현재로부터 세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오고오는 시대 속에서 한결같이 하나님의 동일한 아들이며, 아버지와 동등하게 영원하시다. 그(말씀)에게 참여함으로써 모든 이성적인 인간은 복(구원)을 받게 된다 ”
또는
“인류가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그(말씀)는 그의 예언자들을 통해, 어느 때에는 희미하게 또 어느 때에는 분명하게, 말씀하기를 끊이지 않았다... 일찌기 아담에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물론이요 다른 민족들에게 있어서도 그를 믿는 사람들이 없었던 때는 없다.” .
이와같은 논거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1)구원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 또는 “그리스도밖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가능성과 현실성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2)그런데 이 맥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철저히 역사적 측면에서 고려되고 있지않다. (3)결국 어거스틴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원칙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는점에서 바울과 다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말씀은 다른시대와 다른 장소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변용되어 언제나 작용해 왔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가 유대인과 예수 외에 어떤 다른 ‘역사적’매개체의 존재를 염두해 두었었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 하나님의 말씀의 ‘변용’이라는 어거스틴의사상은 이러한 가능성을 암시하기에 충분하지만, 한편 기독교신앙의 ‘합리성’ 이라는 그의또다른 논거는 역사적 매개제를 요구하지않는다. 그런데 어거스틴에 따르면 포리피리가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은 이 점이다 :“원리(구원의 근원과 능력)는그리스도의 육체도 인성도 아니며 모든 사물을 만든 말씀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포리피리에 응답하면서, 그는전 역사를 통하여 기독교 신앙의 ‘원리’가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하였다 이상의 간략한 분석에서 우리는 우리의 질문이 사실상 이미 고대 교회에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단순히 종교적 다원주의 현상만이 아니라 역사적 사유 방식의 출현으로 인하여 이 문제가 보다 심각하게 되었다. 비록 이런 새로운 도전은 이미 이신론과 함께 나타나기는
했지만 , 역사의식의 부각과 오늘날의 일반 종교들에 대한 연구의 성과들이 기독교의
유일성 주장을 첨예한 문제로 만들었다.
2.포스트모던 신학과 종교다원주의 의한계와 오류.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를 유일한 참 종교가 아닌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점과 결정적인 오류는 무엇인가? 종교 다원주의는 비성서적인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인 동시에 오류이다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이성적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 끝에 그리스도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비성서적 결론에 도달했다.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면 세계 인구의 70-80%에 달하는비 기독교인의 운명은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 인도주의적 관심에서 종교 다원주의 가 일언났다 이것은 한스 퀑이나 감신대의 변선환, 홍정수의 글에서도 입증된다. 퀑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기독교 민족이 서구의 기독교 민족을 수적으로 훨씬 앞질러 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통계를 생각할때도 당신들은 여전히 교회 밖에는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라고 반문했다 변교수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면 이류의 대 다수는 신의 저주를 받고 영훤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함으로,기독교인만 구원 받는다는 기독교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큉의 주장을 너무나도 자명하다고 했다. 홍교수는 “우리의 신은 제 자식만을 사랑하는 편협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신인가?아니면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고 자비를 베푸는 가엾은 은총의 신인가?...하나님께서 만일 무신론자나 이교도까지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와 같이 종교 다원주의적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와 다른 종교 문제에 접근하여 합리적으로 구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진리에 배채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오도하는 것이다. 첫째, 모든 종교의 신이 이름만 다를 뿐이지 실제로 동일한 신이라는 주장은 비성서적이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곤 한 성경 말씀이 이를 입증한다(출 20:3, 23:24-25, 시 96:5, 사44:6-8). 둘째, 종교 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계시 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인도주의에 근거했다. 인간의 구운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원주의자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성경은 세상적인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다(고전1:21). 셋째, 종교 다원주의는 영생의 이르는 유일한 길과 좁은 문을 넓히려는 인간적인 시도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영생에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하였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는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고 이르르 다는 복음으로 대치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성서에 나타난 묵시문학으로본 포 트 모던신학과 종교 다원주의
(1) 묵시문학이란 무엇인가?
묵시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헬라세계 전체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응답 했는가를 알아 보는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하겠다 헬라세계의 현저한 특징 중에 하나는 급속한 변화의 시대라는 점이다. 삶의 여러 국면에서 전환기를 맞이했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적인 권위주의가 붕괴되고, 인간의 자유와 새로운 경험이 확대되었다. 변화가 많은 세상 일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위기를 적절히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마련이다.변화가 많은 세상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불안한 심리를보완하기 위해 철학과 종교는 응답하게 되어 있다.또한 윤리적인 면에서 도덕의 기준이 상실되고 전통적 윤리규범은 이미 그 권위를 잃게된다. 기존 세계관은 도전을 받게되며 새로운 세계관,가치관에도 의식은 전환된다. 헬라세계에서는 심각한 개인주의 경향때문에 생기는 소속감의 상실 또한 문제가된다. 거기에 따라서 종교도 소속감을 강화시킬 때만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와 전환기의 시대에서 헬라 종교들은 혼합주의와 신비주의적인 색체를 띠게되었다.스토아 철학, 플라톤철학을 비롯한 철학들과 이시스 미드라등의 신종교들이이를 설명해준다. 또한 전통주의가 붕괴되면서 종교도 권위주의적인 면이 사라지고 대신에 선교적 성격을 띠게된다 이제는 더이상 과거의 논리나 종교적 권위의 힘으로 사람을 누룰수 없었다.종교는 시장바닥에 나와서 경쟁적으로 선교하게된다. 각자 자기의 종교를 설득하고 변증하고 주장하게된다 (우리는 이러한 특색을 바울 서신에서 분명히볼 수 있다).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할때 종교적인 전통적 권위가 아닌 종교가 가지고 있는 내적 자질에 의해서 판단하게된다.
묵시적 사상의 가장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이원론이다. 지금까지 유대인의 시학은 유일신론에 의해서 고착 되어 왔는대 이제는 그들의 세계경험이 새로운 신학,즉 악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을따르고 믿으면 잘살고 번영한다는 믿음은 너무도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선한 자가 핍박받고, 의로운자가 가난할수도 있다 악의문제는 이 땅에서 뿐 안이라 세계의 구조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 종말론적 윤리는 따라서 악과의 싸움이다. 묵시문학에는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있다. 묵은 세계관을 극복하고 새로운세계를 바라보기 위해서 기존 가치관을 부순다. 전통적인 세계관의 틀에서는 바라볼 수 없는 악을 새로운 세계관에서는 바라본다. 새로운 눈, 새로운 구조는 묵시문학의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2) 상호 관계성
“POST" 라는 낱말의 개념은 ‘후의’ ‘다음의’ ‘뒤의’ 라는 뜻을 가지고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시대적 상황을 반영 하고있는 이 단어가“ MDDERN”과 합성될때 우리말로는 “탈 근대” “탈 현재”식으로 번역된다. 이단어의 의미는 근대적인것을벗어난 어떠한 새로운 것,새로운 가치를 추구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POST MODERN신학과 종교 다원주의와 묵시문학과의 일치점을 발견 할수있다. 어떠한 새로운 가치,새로운 사회를 추구하고 그 내일에 대한 깊은 희망과 소망을 갖고 있다. 위에서 진술한 바와같이 POST MODERN신학과 종교 다원주의의 한계성에 대하여 말한바 있드시 절대가치의 불 확실성에 대한 비판왜에 아무런 방향제시를 못해주 는것이 사실이다.여기서 포스트 모던니즘신학의 한계점을 극복 할수있는 방법을 발견 할수있다.그것은 바로 현실참여인 것이다. 새 하늘과 새땅 바로 이것이 묵시문학의 주제요 포스트 모던신학과 종교 다원주의와 묵시문학과의 일치 점이며 또한 한계를 극복할수있는 방향인 것이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특성,곧 기존의 체재에 대한 반발이긴 하지만 그것은,곧 하나님 중심이요 예수님 중심인것이다. 이와같이 포스트 모던시학과 종교 다원주의는 반 성경적이라면 묵시문학은 성경적이다.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많은 면에서 일치점을 보여준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포스트 모던신학과 종교다원주의의 한계성과 오류를 묵시문학적 관점으로 극복할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고있다.
Ⅲ 결 론
논의한 바와같이 종교 다원주의와 POST MODERN신학은 그 자체 내부적 모순과 성경적인 면에서의 문제에서 그한계성을 들어 내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신학적 입장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될것인가? 그방법은 바로 묵시문학적 방법인 것이다. 좀더 새롭고 올바른 행동 방식으로 오직 주님을 향하여 행동적인 삶을 살아 가는곶받게 없는 것이다. 묵시운동은 기독교로 하여금 새로운 힘을 가지고 세계를 변화 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추진력을 우리에게 부여해준다. 어떻게 새시대를열며, 새 시대를 재 구성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해준다. 기독교로 하여금 자기 만족을 위해 존재하지 않도록 책임성을 갖게해준다.
하지만 기존의 가지고 있는 가치와 체재가 비록 올바르지 못함을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비판이 성경을 버서났을때 그것이 올바른 비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잘못된 비판이 되는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지금의 기독교가 모든것이 올바르다는 것은 안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타난 묵시문학적인 태도, 즉 하나님에 대한 바램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행동이 현사회의 모순을 극복할수 있는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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