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9:2) (1절에 포함되어 있음)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9: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롬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일제 시대의 뛰어난 기독교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인 김교신은 인간 개인의 삶이나 민족과 인류의 역사적 삶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움직인다는 섭리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민족의 흥망성쇠는 다른 무엇이 아닌 한 민족의 신앙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김교신은 구약 성서를 해석하면서 느헤미야가 가진 망국민의 애국심을 논의한 후 그가 예루살렘성의 황폐화 소식을 듣고 동포들의 무능을 탓하거나, 이웃의 적대국들을 원망하며, 어떤 정치적인 책략을 짜기 전에 먼저 회개하였음을 강조했습니다. 즉 "나라의 흥망성쇠가 그 나라의 병거(兵車)의 수의 다소와 외교 책략의 우열에 있지 아니함을 알기 때문에 저는 근본 문제에 착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애국은 진정한 애국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국가나 민족 문제의 근본은 정치경제적인 어떤 요소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사회와 국가의 융성은 모두 건전한 도덕 생활의 기초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건실한 도덕만 확립되면 난마와 같은 민족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도덕이란 한 두 가지 행위의 과오 실책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근본 방침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태도, 곧 신앙이 도덕입니다. <.......>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것이 도덕의 총화요, 갱생 융성의 원동력"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정도로 신앙과 민족애가 결합된 투철한 의식을 지닌 김교신은 그의 <성서 조선의 해(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 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으나 인력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혹자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혹자는 문학을 주며, 혹자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근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 <.......> 과학 지식의 토대 위에 새 조선을 건설하려는 과학 조선의 운동이 시대에 적절하지 않음이요, 그 인구의 팔 할 이상을 차지한 농민으로 하여금 덴마아크식 농업 조선을 중흥하려는 기도가 시의에 부합함이 아니며, 기타 신흥 도시를 위주한 상공(商工) 조선이나 사조에 파도치는 공산(共産) 조선 등이 다 그 진심 성의로만 나온 것일진대 해로울 것도 없겠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들은 모두 풀의 꽃과 같고 아침 이슬과 같아서 오늘 있었으나 내일에는 그 자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모래 위의 건축이라 풍우를 당하여 파괴됨이 심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형적(具形的) 조선 밑에 영구한 기반을 넣어야 할 것이니 그 지하의 기초공사가 곧 성서적 진리를 이 백성에게 소유시키는 일이다. 넓게 깊게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라. 그러므로 조선을 성서 위에."
일본의 내촌감삼은 "내게는 두 개의 제이(J)자가 있다. 하나는 Japan(일본)이요 다른 하나는 Jesus(예수)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내촌은 일본의 참 애국자인데 그 애국의 근원이 다름아닌 불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라고 했습니다. 그런점에서 우리에게도 두 개의 씨(C)자가 있어야 겠습니다. 하나는 Coree(불어로 Korea란 뜻)요 다른 하나는 Christ(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민족을 위해 늘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않는 고통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본문1,2절). 그가 비록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이기는 하지만 인류의 참된 살 길인 복음이 그 누구에게보다도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전파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딤전 5:8에 말하기를,"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3절의 "친척"은 동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 민족만 사랑하지말고 다른 민족을 또한 귀하게 볼 것을 요구하십니다.
요나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 니느웨, 유대인을 가장 괴롭힌, 유대인이 가장 증오하는 니느웨에 가서 그 민족이 살 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신본주의(神本主義)에 입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혈통만을 사랑하는 동족애는 교만의 죄를 범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자기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본문 4,5절)
바울이 이스라엘 동포를 사랑한 이유는 그 민족이 일찌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 제일주의, 신본주의에 따른 애국 사상이었지 민족 지상주의(民族 至上主義)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민족과 국가는 다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먼저 민족 지상주의를 부르짖은 자와 부르짖는 민족의 마지막은 다 같은 운명에 빠집니다.
이태리의 뭇솔리니는 일찌기 일어나서 이태리 청년들에게 하는 말이 이태리 사람들이 제일 먼저 구할 것은 옛날 한 번 없어진 로마 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가가 지상이라고 하며 이태리인들은 먼저 국가를 구하자고 외쳤습니다.
많은 이태리 청년들이 그 부름을 따라서 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먼저 국가를 찾으면 이와 같이 동일한 운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9:26-28 의 말씀을 보더라도 모세는 민족을 위하여 민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민족을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한 번은 미국 대사를 만나서 하는 말이, "당신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이 북미에 왔다가 하나님도 찾았을 뿐아니라 금도 찾고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그러나 우리 아르헨티나의 경우 우리 조상의 대부분이 금을 찾아 돈을 모으기 위해서 아르헨티나에 이주해 왔는데 지금 보니 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찾지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민족 국가가 잘 사는 길은 어떤 정치제도나 경제 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것이 아닙니다. 제도나 구조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변화가 더욱 더 중요한 민족 국가 번영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민족이 살 길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만민을 사랑하는 길은 예수 복음을 전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진정한 민족을 사랑하는 방법은 복음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크게 근심한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지않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찢어진 가슴의 날카로운 슬픔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척하는 죄를 미워한 것이지 자기 동족을 미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미워한 것이지 죄인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노함으로 채찍맞을 백성으로 본 것이 아니라 갈망하는 사랑으로 동정해야 할 백성으로 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제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저주(아나테마,anathema)라도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애중에 가장 귀한 것은 아무것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롬8:31-39). 그러나 만약 그것이 자기 골육 지친을 구원하는데 어떤 도움이 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아나테마, anathema)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잠시도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유대인의 지위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문4-5절에 유대인들이 지닌 특권을 여러가지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 이스라엘이란 이름 자체가 복입니다(창32:28). 이 말은 '하나님의 왕자'라는 복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신14:1,32:6,출4:22,호11:1 참조).
보어햄(Boreham)이란 소년이 어디에선가 그가 소년 시절에 어떻게 아는 친구의 집을 방문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들어가서는 안될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그 방 건너 편에 앉아 있었는데 그 때 그 방문이 열리며 그 안에 자기 나이의 한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무서운 백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 소년의 어머니가 그 소년 곁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틀림없이 어린 보어햄이 건장하고 온전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아들을 보고는 비교를 함으로써 그 가슴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는 그 어머니가 그 백치 소년의 곁에 무릎을 꿇고 고통스럽게 대성 통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너를 먹이고 입히고 사랑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이렇게도 몰라 주는구나."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셨을 말씀일 것입니다.ㅍ이 경우에는 다만 더 심한 것 뿐입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의 예수 배척은 고의적이고 의식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마21:33-46 참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왕자란 특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예수를 모르고 배척하는 자기 동족에 대해 가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영광"-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보러 내려 오실 때 내려 온 하나님의 웅장한 빛을 말합니다.(출16:10,24:16,17,29:43,33:18-22).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하나님을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여러가지 이적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지만 오히려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세상 길을 택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마21:39-41).
셋째, "언약"-이스라엘은 언약을 소유했습니다. 그 첫번째 언약은 홍수 후에 노아와 맺어진 것입니다. 그 언약의 표징으로 하늘에 있는 무지개로써 다시는 이 땅에 홍수가 나지 아니한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두번째 언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입니다. 그 표는 할례였다. 세번째 언약은 시내산에서 한 민족과 맺은 언약으로써 그 근거는 율법이었습니다. 네번째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입니다(고전11:23-26).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반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셨고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축복의 관계들을 거절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접근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의지의 무서운 책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넷째, "율법을 세우신것과"-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고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 삶의 모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범죄했으면 그들은 모르고서가 아니라 알고서 범죄한 것이었습니다. 알고서 지은 죄는 모든 죄악 중 가장 큰 죄악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죄입니다.
다섯째, "예배"- 성막 혹은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길로써 예수를 보내주셨건만(요4:20-26) 그들은 거절했던 것입니다.
여섯째, "언약" - 이스라엘은 그 민족의 운명을 모른다고 절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안에 그들을 위해 쌓아 둔 임무와 특권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그들이 크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신28:1-14). 그러나 크게 되고 머리가 되는 기준이 되는 말씀이신 예수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일곱째,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 유대인들은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 즉 아브라함(4:1-3), 이삭(7절), 야곱(13절), 다윗(1:3,4:6-8) 등이 그들의 조상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실 때 유대인의 혈통을 택하셨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를 그들은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절당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뒤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찢어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처럼 많은 특권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救贖歷史)의 주역이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길은 바울이 그토록 갈망했던 민족 복음화를 통해 세계 구원의 주역이되는 것입니다.
진정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면 바울이 가진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희생과 그치지않는 고통을 가슴에 안고 이 땅에 예수를 줄기차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분단된 조국을 통일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저 북녁 땅에 복음화가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뜻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역사의 완성은 이 천국 복음을 통한 세계 복음화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복음화하여 세계 복음화의 주역이 되게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소원은 민족 복음화를 통한 세계 복음화입니다.
1895년에 일어난 민비 살해 사건(을미사변)의 발단은 이렇습니다.(프레데릭 맥켄지가 쓴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미우라 코로오는 직업 청부 깡패 둘을 은밀히 불러 거사를 설명했습니다. 이번 거사를 위하여 벌써 군과 경찰도 동원 계획을 세운 터였습니다. 두 깡패 아다찌 겐조와 구리토모 시게아리카는 불량배 24명을 모아 행동대를 조직했습니다. 살해 특공대였습니다. 미우라 코로오는 약 한 달전에 조선의 공사로 부임한 자며 구리토모 시게아리카는 황성신문사 주필이었습니다. 일등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가 코로오 공사와 대원군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에서 기울어가는 일본의 영향력를 회복하려는 코로오와 민비를 꺾고 집권하려는 대원군이 손을 잡았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3시쯤 대원군의 집이 있던 시골, 오늘의 마포 공덕동에서 대원군과 일본인들이 출발했습니다. 행동대는 그날 새벽에 쉽게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본군이 궁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일본 정규군은 궁을 차단하여 지켰습니다. 살해조 깡패들이 왕의 침소가 있는 곳의 담을 넘었습니다. 곧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약간의 조선인 수비대는 사살됨으로써 곧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깡패들 일부는 고종의 침소로 들이닥쳐 고종을 위협했습니다. 민비와 이혼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민비 살해조는 왕비의 침소로 뛰어들었습니다. 깡패들은 도망치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두들겨 패면서 왕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르겠다고 말하며 애원하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옆방으로 가던 살해조는 방 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살해조 조장인 일본군 고문 오카모도 류노스케가 그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제끼면서 왕비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이를 부인하면서 몸을 홱 뿌리치며 비명을 지르며 낭하로 도망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세자가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는 모후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살해조가 민비를 덮쳤습니다. 여러 명이 쓰러진 작은 여인을 난자했습니다. 칼에 피가 튀었습니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살해조는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왕비를 이불에 둘둘 말아 멀지 않은 정원 마당으로 옮겨 던졌습니다. 그 위에 석유를 붓고 준비한 나무를 주위에 쌓았습니다. 타오르는 불에 계속 석유를 부어댔습니다.
"모든 것이 다 타고, 그리고는 몇 조각의 뼈만 남았다."
기울어 가는 나라, 그 슬픈 나라의 '국모'는 이렇게 죽었습니다.
민비가 살해되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고종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밖에 기독교인 누구 없느냐!"
기독교는 그 때 그 가련한 왕이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위기의 때에 왕은 기독교가 필요했습니다.
고종의 외침은 1800년대의 마지막 15년 동안에 한국 사람이 기독교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당시에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 앞잡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 나라는 기독교를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벌써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침략국이 일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통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교회로 들어왔는데, 그 까닭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도 기독교를 '어렵고 위험한 때에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로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삼류 정치, 정권의 비호 아래 커왔고 아직도 정치와 밀착해 있는 경제, 경제 규모가 커지기는 했어도 아직 그렇게까지 흥청망청 쓸 때가 아닌데도 돈을 물쓰듯하는 부자들, 이것을 부추기는 소비지향적 문화와 향락주의, 그리고 이런 가운데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의 절망감, 여러 종교들이 나름대로 진리를 외치기는 하지만 그렇게 큰 영향은 없는 듯한 상황, 아니 진리를 말한다고 하는 종교들도 '성장 경쟁식 사고'를 더 부추기고 있는 상황.... 이런 전반적인 문제점은 결코 우리들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윤리 도덕적 타락과 가치관이 뒤집힌 상황을 교회가 과연 해결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니 교회는 도덕 윤리적으로 바르다고 볼 수 있는가? 경제의 부조리를 보면서, 그래도 예수 믿는 경제인들이 부정 부패에서 깨끗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그 지긋지긋한 도당 정치 현상을 보면서, 그래도 기독교인 정치가들이 바른 정치 철학과 믿는 사람다운 정치 도의를 지녔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과연 이 사회가 교회를 필요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교회는 타락과 부패와 혼돈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해왔습니다. 복음이 들어간 곳에는 또 언제나 윤리 도덕의 차원이 높아졌습니다. 바른 가치관과 건전한 문화와 문명의 꽃이 피었습니다.
시대가 어두워지고 도덕 가치가 땅에 떨어질 때, 사람들의 눈에 먼저 띄는 것은 교회가 지닌 높은 도덕 윤리적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그 사회를 구원할 희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교회 자신이 타락할 때 이런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주어진 사명을 망각하고 사명을 다하지 못했을 때 회개하고 갱신하므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밖에 누구 사명자 없느냐?"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복음으로 민족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복음으로 전 세계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이 사는 길, 세계가 구원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교회는 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 속에 그 존재 의미가 있으며, 이 사회의 필요한 존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나라 민족, 사회가 제 2의 광복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주님과 우리 교회의 소원은 이 땅을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아버지(부모)의 마음을 갖자 (0) | 2013.01.19 |
|---|---|
| [스크랩] 자신을 깨끗케 하자 (0) | 2013.01.19 |
| [스크랩] 너희는 거룩하라 (0) | 2013.01.19 |
| [스크랩] 개혁자(改革者)의 삶 (0) | 2013.01.19 |
| [스크랩] 감사와 축복(신26:7-19) (0) | 2013.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