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 필요성

하나님아들 2013. 1. 19. 14:23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 필요성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읽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교회들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천리 만리 주님 앞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자신 이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가짜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 서로들 헐뜯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가 목사가 부패하였다하며 나름대로 하나님의 정의를 세워야 된다고 말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들을 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이런 저런 이유를 빌미삼아 비판적인 시각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정작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있는 신자들 까지도, 부패하고 무능한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러한 부패하고 무능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부패하고 무능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다루실 때, 철저하게 이런 부분에 대하여 자기성찰 하도록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이 저를 가르치셨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저의 모습을 보게 하심을 통해 주님이 가지신 의도와 뜻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저를 가르치실 때,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가 보이고 그것이 내 마음에 정죄되는 마음이 생기면, 바로 내 속에 똑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즉, 내가 비판하는 그 사람의 죄와 허물이, 나는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지 않았지만, 내 속에 그런 모든 죄와 허물이 도사리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하셨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 있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있으며, 하나님 그분을 그리워하고 갈망하고 애타게 찾지 않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이런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기준을, 하나님의 기준이라 착각한다.

 

우리 가운데 영적인 것에 대한 무지는,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가 말한 것처럼 심각합니다. 영적인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성경과 유사하지만, 성경적인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이라 함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기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되는 하나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인용하였지만, 하나님의 기준과 전혀 관계없는 그런 하나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고, 하나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다림줄)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신다.

 

성경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암7:7-8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말씀하셨습니다.

 

7 주께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주셨다. 다림줄을 드리우고 쌓은 성벽 곁에 주께서 서 계시는데 손에 다림줄이 들려 있었다.

8 주께서 나에게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다림줄입니다" 하니, 주께서 선언하신다.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다림줄을 드리워 놓겠다. 내가 이스라엘을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표준새번역 암7:7-8)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환상가운데 다림줄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다림줄은 건축업자가 건물을 세울 때, 건물이나 담이 지상으로부터 바로 직각으로 세워져야 하는데, 비뚤게 세워지지 않도록 정확한 각도를 지속적으로 체크하는 기구입니다. 하나님이 그 다림줄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정확하게 건물이 지어졌는지 점검 하십니다. 그리고는 주님이 이스라엘백성이 그 다림줄에서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건물을 세웠다는 것을 보여주며,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다림줄 앞에 우리가 제대로 잘 서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다림줄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림줄에 의해 세워지지 않으면, 아무리 우리 생각에 좋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이라 생각하여도,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진노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 은혜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헌신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결국 그곳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실 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기준(다림줄)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십자가 - 하나님의 다림줄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다림줄의 진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시대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수많은 죄수들이 있습니다. 채찍에 맞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죽을 곳 까지 운반한 다음, 십자가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간 사람은 수 없이 많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십자가가 왜? 의미가 있습니까? 객관적으로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의미를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어린양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그에게 맡기시고, 십자가상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인류가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길로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매일 매일, 순간순간 내 삶 속에 십자가가 실제가 되어,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수많은 십자가상에서 죽은 죄인들이 다 구세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십자가에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 우리를 대신해 모든 죄를 감당케하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곧 법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의중이 곧 기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많은 십자가상에서 죽은 죄인들이 있는데, 왜 예수 그리스도만 의미를 부여하셨나? 우리가 속은 것이 아닌가? 이건 허구야!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세상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그 권능과 권세가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크십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볼 수조차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우리의 공의와 차원이 다른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한량없이 많으셔서, 우리가 다른 차원의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향해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럴 자격이 있으십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 속해있고, 그분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심이 없으시기 때문에 완전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바로 십자가에 있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대한 정의

 

성경 66권을 정경이라 합니다. 그것을 캐논(Canon)이라고도 불립니다. 한국말로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확한 선을 긋기 위해 우리는 자를 사용하듯이,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삶과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준이란?

 

“하나님의 기준인 다림줄을 볼 수 있는 성령이 주시는 분별력”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음,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성령의 비추심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령이 비춰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발견하고, 또 우리 삶 가운데 실제가 되게 적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볼 수 있기 위해 성경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적 지식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기준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성경박사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철저하게 영적 장님으로 대하셨습니다. 기준을 아는 것이 중요하나, 지식 자체가 하나님의 기준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실제가 될 때 아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아는 것과 행동하고 실제가 되는 것을 뜻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을 번역할 때, “안다”라는 말로 통일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 실제가 되는 것까지 포함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다림줄만 통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권자이십니다. 그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의미 없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밤마다 철야하고 생각나는 죄 모두 다 회개하고, 모든 재산 팔아 구원해 달라고 헌금합니다. 성경 읽고 교회에 모든 봉사와 충성을 다합니다. 그래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기도도 하나님의 길을 따라 기도할 해야 합니다. 아무리 오래, 많이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든 것(기도, 하나님을 아는 것, 사랑하는 것, 사역)이 하나님의 기준을 따하 행할 때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편에서 아무리 큰 희생을 드려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의 순수한 동기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 순수한 동기는 무척 소중합니다. 나눠진 마음은 우상이기 때문에, 그러나 순수한 동기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기준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항상 2가지를 구하였습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과 “주의 길”.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합니다.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기준이나 생각이나 조건이나 의견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큰 희생이나 헌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합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다림줄만 통하기 때문에, 우리의 아무리 큰 희생이나 헌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 계시록 3:1,2의 사대교회는 사람의 평가로는 “살았다”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죽었다”였습니다. 사대교회는 잘나가는 교회였을 것입니다. 활동력이 강하고, 많은 프로그램이 있었을 것입니다. 침체되어 있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좋은 교회로 공인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평가 는 “실상은 죽었다”라고 평가하십니다. 우리의 과점과 하나님의 관점 다릅니다.

 

그럼 왜? 사대교회가 죽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나면, 그들이 배운 대로, 들은 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다림줄) 가운데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처방이 3절에 나옵니다.

 

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즉 받고 들은 것을 기억하고 순종하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서라는 겁니다.

 

에베소교회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한 사람의 평가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부요하다”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한 사람의 평가는 “부족함이 없다”였습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가난하고 가련하고 헐벗고 굶주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관점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는 관점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야 바른 신앙생활인 하나님의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의 관점은 엄청 소중히 여기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전혀 관심밖에 있습니다. 과거 저는 목회하면서 성도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 볼까에는 엄청 신경을 쓰면서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보실까 고민하지 않았던 것을 고백합니다.

 

사람 앞에 잘 보이는 것에 대하여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전혀 관심 밖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관점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잘 봐주시겠지 하며 은근슬쩍 자신을 정당화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에 대하여서도 ‘너희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가는 소중히 여기지 않고 서로 칭찬만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바로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로 돌아가서, 바리새인들에게 물어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십니까? 아님 사람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시나요? 뭐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긴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긴다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자신까지 그렇게 믿고 있지만, 사람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실로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겨,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위하여 몸부림치느냐의 문제입니다.

 

고전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3:10-15)

 

10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와 같이 터를 닦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이가 그 위에다가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각각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닦아 놓은 터 곧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터를 놓을 수 없습니다.

12 누가 이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13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 날은 불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14 어떤 사람이 지은 작품(세워 놓은 )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삯을 받을 것이요,

15 어떤 사람의 작품(일)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마치 불 속을 거쳐서 살아나오듯 할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고전3:10-15)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세울 때 하나님의 기준은 금, 은, 보석으로 세우는 것인데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어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구원은 받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다는 겁니다. 즉 우리의 신앙이 다른 사람이 볼 때 아무리 화려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함께하니 성장하지 하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것은 그들의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 에베소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니 사람들이 볼 때는 훌륭한 교회였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가리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다림줄이며, 성경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 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지면, 절대 올바른 신앙은 불가능하며, 절대 회복이 안 됩니다.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교회와 사회를 회복하실 때 가장 먼저 회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다림줄)을 회복시키십니다. 교회회복, 영적회복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2000년동안 교회를 회복시키셨던 모든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인, 하나님의 기준이 바르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부흥때마다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보여야,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이 천리 만리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통곡하고 애통해하며, 심지어 기절하고 떨기까지 하였습니다. 경찰서에 찾아가 자신을 벌해 달라고 경찰서마다 사람들이 달려가 울며 회개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죽어 마땅하다며, 교인들에게 자신의 모든 죄를 드러내서 고백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덮으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이런 일이 오늘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지면,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의중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그 시대를 어떻게 보셨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성경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우리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한 의도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사야1:4, 10-15절과 같은 구절을 읽을 때 단순하게 “이사야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멸시한 자들이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호세아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떠났으니 하나님을 버렸으니 당연히 심판이 왔지. 하지만 우리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일날 예배드리고, 헌금도하고, 수많은 충성 봉사 희생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으므로, 나는 안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호세아 시대에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버렸다고 그러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들에게, 하나님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여기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지면 성경을 읽어도 내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도, 버렸다는 의미도 전혀 모릅니다.

 

또 6절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율법을 잊었다”고 하니, 그 당시에는 성경공부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심판이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잊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데 우리의 삶의 처지를 한번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여러분의 왕이 십니까? 여러분과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까? 교회의 주인이십니까?”라고 질문하면, 우리는 당연히 “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내면을 깊이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실제의 삶은 주님이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나의 주인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말씀을 잊었다. 나(하나님)를 버렸다는 겁니다. 이제 조금 보이세요?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지면, 과거는 보아도 현재는 보지 못합니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개역개정, 마태복음 23:29-31)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사야시대, 호세아시대 자기들의 조상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호세아 시대 사람들은 이사야를 톱으로 켜 죽였습니다. 자기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사야가 와서 이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을 못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관점으로 생각하니, 자기들이 옳고 이사야가 틀린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톱으로 켜 죽였습니다.

그로부터 무려 600년이 지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조상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틀린 것을 대단히 잘 알았을 것입니다.

바리세인들은 조상들의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기의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새로 단장하고 비석을 꾸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 때에 살았었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잘못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들은 못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은 문제가 있는데 자기들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호세아 시대의 백성들이 어떻게 해서 틀린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들은 그렇게 성경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사야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고 또 이사야가 성경인 것을 믿었기에 성경이 저들에 대해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요,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그래서 심판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새인시대에 자기들에 대하여 기록한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화있을 찐저....하면서 너희가 그 조상의 그 자손임을 스스로 증거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바리새인들은 칭찬은 못해줄 망정 너무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니 우리가 스스로 증거 하다니요, 이해가 안 되었을 겁니다. 지금비석을 새롭게 꾸미고 있는데...

 

문제는 자기 조상들과 똑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들은 못 보았습니다. 자기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조상들은 이사야를 죽였지만 자기들은 이사야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왔는데 죽였습니다.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00년이 지나갔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제 우리시대에 기록되어지고 있는 성경이 있나요?

 

없습니다. 이미 정경화 되어서 더 이상 기록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과 똑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호세아 시대에 무엇을 두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심판하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알았다면, 자기들의 삶을 비춰보고 돌이켜야 했습니다.

오늘날 문제가 뭐냐 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다 성경을 믿기 때문에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없이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 분별력이 잃어버린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과거 성경을 통해 이야기한 것을 알고 있지만, 현제 자신이 그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지 못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 되지 못합니다.

 

육신적인 시각장애자는, 자신이 시각장애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영적 시각장애자는 자신이 영적인 시각장애자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육신의 시각장애자보다 영적인 시작장애자가 훨씬 심각합니다.

육신의 시각장애자는 삶의 불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시각장애자는 심각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이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의 3가지 시대 때(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남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 후 로마에 의해 멸망하는 이스라엘)는, 하나님의 심판이 코앞에까지 닥쳐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자신이 몰랐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정당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지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기준을 몰랐다는 것이 전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처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저는 이 말씀 때문에 내 마음이 녹아져서, 쓰러져 기절상태까지 갔었습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적용되고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저는 말을 잊었고, 눈물로 한 달을 살았습니다. 꿈을 꾸어도 내가 주님의 기준 앞에 천리 만리 떨어져서 주님을 멸시하고 있는 것이 생각나서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밥을 먹어도 내 눈물과 밥을 함께 먹었습니다. 반찬이 필요 없었습니다. 화장실에 앉아서도 울었습니다. TV나 다른 것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멸시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가운데, 나의 죄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 때문에 그 어떤 유희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떤 맛있는 것을 먹어도 그것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지옥에 떨어지는 나를 매일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기준이 내 삶가운데 세워지기 시작된지 어언 4년. 지금은 그 때보다 약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이 죽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만이 이 고뇌에서 희망을 주고, 생명을 주고,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가 내 삶 가운데 함께하심을 경험합니다. 이 고뇌가 없다면, 십자가는 과거에 한번 일어난 단순한 구원의 문제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 고뇌가 있다면, 현제도 십자가는 하루하루 순간순간 내 삶 가운데 실제가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내 속에 사시며,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실제가 시작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기준이 내 마음에 자리 잡히면서 한 가지 결심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책을 버릴 결심을 하였습니다. 모두 헛되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없이, 성경에 대한 지식만 쌓아간 내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해보였습니다. 3천만원짜리 전셋집에 살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책값을 다 합해보았더니 1억원 정도 되더군요. 박사과정까지 공부하면서 내가 쓴 돈은 더 많았습니다. 학위 논문을 마치자마자, 저의 책 일부를 기증하거나 주변사람에게 나누어주었고, 고물상에 모두 넘겨버렸습니다.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학위도 아무 쓸데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박사까지 되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을 모르고, 지식을 구하는 공부하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지식은 바로 성경이라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나의 지식을 내 마음속에서 지우고, 다시 하나님의 기준을 세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저를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카페 회원들이 하나님의 기준위에 영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유익한 일을 하는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또한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기준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좋은 충고와 가르침이 이 글을 더욱 알차게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을 통해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조금씩 내용이 발전하고 다듬어 질 것을 소망합니다

 

 

 

김바울 선교사 // 다음카페 // 빛과 흑암의 역사 http://cafe.daum.net/aspire7

 

 

 

 
출처 :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글쓴이 : 샤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