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폐허 위에 핀 자유 시대] 서울을 피바다로 만든 1950년 인민군 점령기
일러스트=한상엽
1950년 6월 28일, 인민군은 남침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한 남로당 이인자이자 북한 내각 사법상 이승엽은 중앙방송을 통해 담화를 발표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공화국) 깃발과 우리 민족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 영웅이신 공화국 내각 수상 김일성 장군의 영도 아래 통일되어 해방된 영광스러운 공화국 공민으로서 자유롭고 행복한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김일성은 영원히 자기 땅이 된 줄만 알았던 남한 점령 지역에 인민위원회 구성, 토지개혁 등 북한의 국가 시스템을 서둘러 구축했다. 다른 한편으로 ‘과거 공화국 주권에 적대 행동을 한 자들’(반동분자)의 색출과 처단에 열을 올렸다.
인민군의 잔혹한 동족(同族) 학살은 서울 점령과 동시에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에서 시작됐다. 소련제T-34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개전 직후 동두천·포천·의정부·수유·길음·미아·돈암 등지에서 국군과 격렬한 교전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3200여 명의 국군 전상자(戰傷者)가 발생했다. 국군 병원의 수용 능력을 초과한 전상자들은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시내 5개 종합병원에 분산 수용됐다. 서울대병원 800여 개 병상은 물론 복도까지 밀려드는 부상병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점령 직후 서울시청 앞에서 연설하는 서울시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승엽. 박헌영에 이은 남로당 이인자였고, 북한 초대 사법상이었지만, 6‧25전쟁 기간 체포돼 1953년 휴전 직후 미제의 고정간첩으로서 공화국 전복 쿠데타를 계획한 혐의로 처형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로 진입한 인민군은 자기편 부상병을 수용하기 위해 1개 대대 병력을 투입해 서울대병원을 공격했다. 육군본부 병참학교 소속 조용일 소령과 소대장 남 소위는 20여 명 경비소대 병력과 움직일 수 있는 전상자 80여 명을 이끌고 병원 뒷산으로 올라가 인민군에 저항하다가 전원 전사했다.
서울대병원을 점령한 28일 오후, 인민군 중좌가 “원쑤놈들의 앞잡이들이 여기 누워 있다”고 선동했다. 따발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인민군 병사 50여 명이 병실을 찾아다니며 150여 명의 부상병을 학살했다. 이튿날에는 걸을 수 있는 환자 180여 명을 병원 뒷산으로 끌고 가 집단 처형했다. 수류탄을 던져 살해하기도 했고, 완전히 죽지 않은 환자는 권총으로 확인 사살했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시체안치실, 쓰레기 소각장, 병원 뒷산 등지에 방치됐다. 180여 구의 시체는 트럭에 실려 한강변에 유기됐다. 부상병뿐만 아니라 민간인 환자도 희생됐고, 서울대 학생들과 간병하던 환자 가족 다수도 목숨을 잃었다. 같은 날 세브란스병원에서도 국군 부상병 100여 명이 북한 인민군에 의해 공개 총살됐다.
2025년 4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서울대병원 집단 학살 사건’이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세력에 의한 학살’임을 공식 확인했다. 위원회는 330여 명의 희생자를 확인했지만, 800여 병상에 가득 찼던 부상병을 고려할 때 1000여 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정치보위부와 인민군은 점령 지역 노동자와 좌익 인사를 앞세워 반동분자를 숙청하는 인민재판을 열었다. 서울에서만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본관), 대학로, 서대문, 명동, 돈화문 등 번화가 6곳에 인민재판소가 설치됐다. 노동자·농민에게 검사·판사 역할을 맡겨 서툰 역할극처럼 진행된 인민재판은 북한의 형사소송법에도 근거가 없는 초법적 숙청 수단이었다.
1950년 7월 2일 부민관 앞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있는 김팔봉(가운데 양복 입은 남성). 김팔봉은 사형을 선고받고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아 정신을 잃었지만, 나흘 후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깨어났다. 북한 점령군이 그를 왜 살려뒀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인민재판 사진을 확보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유족 제공 일제강점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설립을 주도했던 사회주의 문학가 김팔봉은 해방 후 전향하고 을지로에서 인쇄소를 경영했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 이후 사흘 동안 집에서 칩거하던 김팔봉은 7월 1일 밤 11시 소총을 둘러맨 청년들에게 체포돼 북창동 남로당 임시사무소로 연행됐다. 김팔봉은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은 채 이튿날 인민재판에 회부됐다. ‘인민재판소’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 뒤로 김팔봉을 세우고 450여 명의 군중이 뒤따르며 서울 도심을 행진했다. 메가폰을 든 사람이 “인민재판소!”라고 선창하면 나머지 군중이 “인민재판소!”를 복창하며 대한문, 서울시청, 부민관, 광화문 사이를 3차례 오가며 행진했다. 군중이 500~600명으로 불어나자, 젊은 청년이 부민관 앞에 ‘인민재판소’ 플래카드를 세우고 “지금부터 인민재판을 개정한다”고 선언했다.
남로당 출판 노조원인 인쇄소 직공이 검사로 나서 김팔봉의 범죄 사실을 열거했다. “김팔봉은 일제 때 공산당을 하다가 변절했고, 이승만 정권 경찰의 스파이로 다수 노동자를 투옥시켰으며, 노동자를 착취했다.” 터무니없는 모함이었다. 증인으로 불려 나온 십대 청년은 자신이 김팔봉의 인쇄소에서 직공으로 일했으며 그의 밀고로 경찰에 체포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증언했다. 이 역시 김팔봉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조작된 증인이었다. 피고인에게 변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판사 역할을 맡은 인쇄소 직공이 “인민의 적 김팔봉을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한다”고 선고했다.
즉석에서 건장한 청년이 철사로 둘둘 말고 쇠꼬챙이가 달린 몽둥이로 김팔봉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군중은 “인민재판소!”를 외치며 피를 철철 흘리는 김팔봉을 부민관에서 남대문, 서소문파출소까지 끌고 다녔다. 나흘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던 김팔봉은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깨어났다. 그가 어떻게 목숨을 건지고 유치장에 수감됐는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인민재판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북한 점령군은 의용군 자원(自願) 독려 군중대회를 열어 청년들을 강제 징집했다. 6·25전쟁 발발 전 남한의 농지개혁이 거의 끝난 상태였음에도 점령지에 대한 ‘무상 몰수, 무상 분배’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7월 말 서울에 잔류한 국회의원 48명은 북한 점령군의 강요로 ‘공화국 지지 집회’를 열었고, 김규식·조소앙·안재홍 등 중도파 정치 지도자는 미제의 무력 침공에 반대하는 ‘조선 인민 성명서’에 서명했다. 8월 초 북한 점령군은 서울·경기 지역에서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했다. 노동당이 지명한 후보에 대해 공개적으로 손을 들어 찬반을 묻는 방식의 선택권이 박탈된 ‘선거’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의 퇴각이 시작되면서 노동당과 정치보위부는 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던 반동분자를 분류해 북한에 도움이 될 인사는 납북하고, 나머지는 즉결 처형했다. 1955년 대한민국 통계연감에 따르면, 서울에서만 8800여 명이 학살되고, 2만여 명이 납치됐다. ‘행복한 새 생활의 시작’이라는 김일성과 이승엽의 약속과 달리, 대다수 서울 시민에게 인민군 점령기는 생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