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부활의 의의(意義)
누가복음 23:1~6
서론
오늘 부활절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부활신앙으로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부활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일반 종교인들이 기독교를 부러워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사랑과 기적과 은사, 구제… 이런 것들은 그들 종교에도 모두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기독교의 많은 것들을 모방합니다. 어린이불교학교, 찬불가…
그러나 부활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모두 모방해도 부활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그들 교주는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교리를 만들어 내지도 못하고 모방할 수도 없습니다.
공자님의 제자가 물었습니다. 하늘의 일을 알려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합니다. 땅의 이치도 모르겠거늘 어떻게 하늘의 이치를 알려 달라하느냐?
한 여인이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졌다가 석가모니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위로를 받기위해 찾아왔습니다. 제 아들이 죽었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을에 내려가서 집안에 죽은 이가 하나도 없다는 사람이 있으면 내게 말하라. 그러면 아들을 살려주겠노라. 여인이 마을로 달려가 집집마다 뒤졌지만 모두들 가족 중의 누구 하나는 죽었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리자 석가는 말했습니다.
“그것 봐라. 네 아들만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슬픔을 견디도록 하라.”
예수님께서 나인성이라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혼자된 여인이 외아들을 키웠는데 그 청년이 죽었습니다. 관을 앞세우고 성밖으로 나오다가 예수님의 일행과 마주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관을 세우면서“청년아 일어나라!” 했을 때 청년은 죽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이 청년 외에도 12살짜리 소녀를, 베다니의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마저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의“불루오션”입니다,
아침에 새벽기도회를 나오는데 우장산 역 한쪽으로 불탄일 축하연등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교도 입장에서는 흐뭇한 광경이겠지만 제 눈에는 초라하게만 보였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분을 찬양하고 있는데 저들은 이미 죽어버린 석가의 출생을 축하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타잔 앞에서 팬티를 자랑하는 일이요 한국전력 앞에서 촛불 켜놓고 폼잡는 일과 같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경쟁력이자 차별화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무덤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윤리와 가르침을 중심한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과 가르침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인격 자체에 중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살아계신 그 예수님을 믿으며 그 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을 충분히 누리고 있을까요? 오늘은 부활의 의미에 대해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었음을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난 목요일에 체포당하시고 금요일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유대 종교가들과 대적자들은 무슨 명목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예수님이 왕(王)이라고 자칭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로마의 반역자로 내세워야 처형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라고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라고 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말은, 두 가지 심각성이 있습니다. 육신의 몸을 지닌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것은 신령하신 하나님의 거룩성을 크게 훼손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성모독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면 사람이고 원숭이 새끼라면 원숭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이 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놀랠 노자였습니다. 이런 망령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더군다나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는 짓을 했습니다.“소자야 네 죄가 사해졌느니라”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했습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에게 죄사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유대 역사에 이처럼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라고 나선 인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가들은 유대종교의 정통성 확보와 신성모독은 돌로 쳐 죽이라는 그들의 율법에 충실하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부활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주장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 모든 것이 진짜이고 그가 부활하지 못하면 산상수훈의 윤리적인 교훈들조차 거짓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의 내용들이 얼마나 좋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남을 비판하지 말라,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대라, 겉옷을 달라 하거든 속옷까지 내주라… 얼마나 좋은 교훈들입니까? 이런 교훈대로만 살면 참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해도 이런 교훈이 남아있고 그 교훈을 좇는 종교가 있다면 그 나름대로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종교적 사기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분은 살아생전에 자신의 부활을 여러 차례 공언(公言)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교훈을 전해도 부활하지 못하면 그는 거짓말쟁입니다. 거짓말쟁이의 교훈이 좋다고 해서 그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3일 동안 온 세상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언하신대로 부활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가짜이고 예수님이 부활하시면 유대종교가들이 가짜입니다.
오늘 아침 이른 새벽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고전 15:20).
예수님께서 이처럼 부활하심으로 그분은 사실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예수님에게 해당된 미스터리들-동정녀 탄생, 예언대로 오셨다는 것,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였다는 것,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교리들… 이 모든 것이 참(眞)이었음을 부활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모든 종교생활이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사랑, 헌신, 구제, 교훈들… 부활이 없다면 사기꾼의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던지, 아니면 모든 것을 버리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양심적인 것입니다. 부활의 증거들이 너무 역력한데 우리가 바보가 아니라면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도 가려느냐” 할 때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느냐?”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대답이 우리의 대답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2. 부활은 우리가 의인(義人)이 되었음을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자원하는 죽음입니다. 얼마든지 도망갈 수도, 기적을 행해서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열두 영이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너희들을 없앨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 처형을 자처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가들이나 로마관리들의 눈에는 종교적인 교권 다툼에서 예수님이 패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개혁하려다 역부족해서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의 총독권을 유지하려는 빌라도의 처세술 때문에 희생당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을 자처하셨습니다.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없애려 한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의 피 흘림, 그 피 흘림을 통해 죄사함의 은총이 인류에게 시작된다는 것-그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없애려고 죄와 함께 죽으셨던 것입니다.
1센티미터의 암 덩어리에는 무려 10억 개나 되는 암세포가 있습니다. 평균 체중 70킬로그램인 사람의 혈액 속에 백혈구가 기껏해야 5천 6백밖에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의학적으로 볼 때는 1억 개도 안 되는 백혈구로는 10억 개의 암세포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10억 개의 암(癌) 세포를 한곳으로 모아서 박살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그런 일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을 인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십자가로 모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 예수님은 죄는 모두 무덤에서 처리하시고 의인의 몸으로 나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의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역시도 의인의 신분이 되었음을 증거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 죄를 없애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의인이심과 우리 역시도 하나님께서 의인의 신분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롭다칭함(칭의)을 받게 되는 것이고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수님 개인에 해당되는 놀라운 사건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건은 내게 해당되는 놀라운 사건이고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절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3. 부활은 우리가 새사람이 되었음을 증명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40일 함께 하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셨고 원래의 자리, 제2위의 성자 하나님의 자리로 복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을까? 거룩한 성체였기에 세상에서 살기가 거북하셨을 텐데… 이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부활에 대한 의문점들은 말끔히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두고 말이 많았습니다.
*도난설-예수님의 제자들이 훔쳐간 다음에 부활했다고 헛소문을 터트렸다는 것입니다, 무덤 문을 군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어떻게 제자들이 훔쳐갈 수 있습니까?
*기절설-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해 있다가 깨어나서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돌문을 어떻게 밀고 나갈 수 있으며 무덤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눈도 귀도 없다는 것입니까?
*환상설-제자들이 너무 슬픔에 빠져서 환상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헛소문들이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있음으로, 제자들이 있는 현장에 나타남으로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점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40일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이식(移植)시키는 수술 기간일 것입니다.
이 날 이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역동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겁쟁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무식한 사람들이 지혜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육신 속에 하나님의 심장이 이식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예수처럼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평범한 축구선수가 경기 도중에 상대방 선수와 충돌하여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어난 그는 기억상실증을 보였습니다.
“내가 누군가요?”
얼마 후 그 선수가 퇴원하며 시합에 복귀하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운동장을 펄펄 날며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변한 것입니다. 기자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감독에게 물었습니다. 감독이 대답했습니다.
“저 놈이 왜 저렇게 날뛰는지 나도 잘 모르겠소. 다만 기억상실증에 걸린 저 녀석이 내가 누구냐고 자꾸 물으니까 귀찮아서 너 축구 황제 펠러잖아 하고 대답했더니 저 모양입니다. 자기가 펠러인 줄 아는가 봐요.”
바로 이것입니다. 무명의 축구선수는 자기가 축구황제인 펠러인 줄 압니다. 그래서 펠러처럼 날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의 심장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말씀의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분신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초대교회는 태동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사람들의 성화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사람들에게 들어가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자기 속에 예수님이 거주하심을 알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전의식을 갖게된 것입니다.
골초 아가씨들도 아기를 임신하게 되면 담배를 끊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감기에 걸려도 약을 먹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신비한 생명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통해 내 안에 내재하시는 예수님을 강하게 의식했습니다. 마음이 거룩한 장소-성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심했고 그만큼 그들은 점점 성화되어 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을 능력자로 만들뿐만 아니라 성자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장기를 이식(移植)받은 사람이 어떤 자세로 살겠습니까?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그 분의 메시지가 아닙니까? 그런 마음으로 살게 되면 또 하나의 김수환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결론
“줄탁동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란이 21동안 어미 품에서 있다가 부화의 때가 되어 이제는 충분히 자라 밖으로 나가게 되었음을 병아리가 알 속에서 톡톡 치며 어미 닭에게 알립니다. 이것을 “줄”이리고 합니다, 바로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어미 닭은 밖에서 알을 쪼아 껍질을 깨뜨려 주는 것이 “탁”입니다. 줄과 탁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부화가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3일이 되었을 때 안에서 무덤 톡톡 치셨고 밖에서 하나님께서 죽은 시체를 치셨고 무덤 문을 치심으로 부활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줄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음과 같은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일으켜 세워주심을 기대하며 때를 기다렸다가“줄”했을 때 하나님께서“탁”하시며 어둠의 돌문들을 열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더 이상 부활은 교리가 아닙니다. 내 안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증명은 이제 우리 몫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더욱 열정적이고 성스러운 삶을 살 때 세상은 우리의 부활을 통해 주님의 부활 가까이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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