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11일까지 네덜란드 쾨켄호프에서 열리고 있는 꽃 축제를 수년 전에 직접 구경한 적이 있다. 정말 천국이 이럴까 싶었다. 형형색색 튤립에다 수선화, 히아신스, 백합이 어우러지는 파라다이스였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곳이 없을까 부러워했다.
지금 돌아보면 자조(自嘲)가 심했다. 사실 대한민국 만큼 계절마다 다양한 꽃이 피는 나라도 드물다. 잘 살펴보면 쾨켄호프에 필적하는 아름다운 장소가 적지 않다. 다만 제대로 꽃을 감상하겠다면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다. 특히 진달래나 철쭉 같은 봄꽃들은 살짝 땀이 나는 등산을 통해 정상 부근에 있는 군락지를 찾아야 제 맛이다.
십여 년 등산을 다니면서 보통의 체력을 지닌 한국인에게 꼭 권하고 싶은 두 곳의 '버킷 리스트' 장소가 생겼다. 물론 등산 난이도가 높지 않아야 한다. 첫째는 가을에 단풍과 기암괴석이 총천연색으로 버무러진 설악산 천불동계곡이다. 설악산 소공원주차장에서 천당폭포까지 6.5km구간은 단풍 시즌에는 '묻지마' 가야 한다.
둘째는 봄에 철쭉 바다를 이루는 전남 보성 일림산(日林山)이다. 둘 다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절경이 펼쳐지며, 모두 천국의 초입에 들어온 듯한 황홀한 경험을 선사한다. 흔히 보성이라면 녹차 밭의 명성이 자자하지만, 녹차 밭과 붙어 있는 일림산에 4월말부터 5월초까지 눈이 뒤집어지는 철쭉 파티가 벌어진다는 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다지 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깜짝 놀랄 정도로 연분홍 철쭉바다가 산 정상과 등산로 곳곳에 총 150ha(45만여 평) 규모로 펼쳐져 있다. 만일 당신이 직장인이라면 주말에 꼭 방문하거나 아니면 평일에 휴가라도 내어 가보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해발 667.5m인 일림산은 북에서 뻗어 온 호남정맥(湖南正脈)이 끝자락에 있는 남해를 품으며 기운차게 솟았다. 백두의 정기를 다시 북으로 되돌리는 남도의 명산이다. 숲이 울창해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해를 볼 수 없다고 하여 일림산이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두 개의 큰 계곡이 있는 일림산은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빼어나다. 북서쪽으로 제암산(779m)에서 사자산(666m)으로 뻗은 산 줄기를 비롯, 장흥군 천관산(723m)과 멀리 광주 무등산(1187m)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일림산의 남동쪽 아래로는 득량만에서 율포해수욕장을 거쳐 장흥군 안양면 해안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와 보성만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바다와 철쭉을 배경으로 인생 샷을 찍기에 그만이다.
전남 보성 일림산에서 철쭉을 찍고 있는 등산객들photo뉴시스
물론 국내에는 일림산 말고도 철쭉 명소가 많다. 경남 합천과 산청에 걸쳐 있는 황매산은 정상 일대에 마치 분화구처럼 펼쳐진 평원이 있고, 5월초에는 축구장 70개 정도 규모의 철쭉 바다가 출렁인다. 특히 차로 정상 부근 주차장까지 올라간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다만 넓은 고원 지대에 철쭉 밭이 조성되어 일림산에 비하면 아기자기한 재미는 부족한 편이다.
한때 철쭉 1위로 유명했던 소백산은 조선시대 퇴계 이황이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서 "축융(祝融·전설 속 불의 신)의 잔치에 취한 것같이 매우 즐거웠다"라고 철쭉의 존재를 언급했을 정도다. 다만 지구 온난화와 환경 오염 때문에 요즘은 기세가 약해졌다. 5월 하순이 되면 연화봉·비로봉·국망봉 부근에 드문드문 피어날 뿐 예전의 명성은 많이 바랬다.
지리산도 5월 중순 바래봉에서 팔랑치에 이르는 1.5km구간의 철쭉 생태계가 화사함으로 유명하다. 다만 최근들어 소백산과 마찬가지로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비해 일림산은 갈수록 풍성한 철쭉꽃 레파토리를 자랑하면서 방문객도 늘고 있다. 비록 2024년에는 때아닌 냉해로 미처 피지 못한 철쭉이 많았지만, 2025년은 기대가 되는 상황이다.
흔히 진달래와 철쭉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4월을 수놓던 진달래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면 그제서야 철쭉이 모습을 드러낸다. 철쭉은 진달래에 이어 핀다고 해서 연달래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달래는 잎보다 꽃이 먼저 나오지만, 철쭉은 꽃과 잎이 반반 정도로 같이 나온다. 잎 모양도 진달래는 둥글지만, 철쭉은 진달래에 비해 뾰쪽한 것이 특징이다. 감촉이 매끄러운 진달래 꽃잎과 달리, 철쭉은 꽃받침을 만지면 손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편이며 곤충을 유인하여 꿀을 분비하는 역할을 하는 반점이 짙게 그려져 있다.
어떤 시인은 진분홍인 진달래를 10대 소녀의 고움에 비유한 반면, 철쭉은 연분홍에서부터 색깔이 다양해 20~30대 보다 원숙하고 우아한 여인의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래서 진달래를'Azalea',철쭉을'RoyalAzalea'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우리 조상들은 진달래를 따서 전을 부쳐 먹거나 술을 만들어 먹기도 했으나 철쭉은 잘 먹지 않았다. 철쭉은 그레이아노톡신이라는 신경 독소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예전부터 먹을 수 있는 진달래는 참꽃, 먹을 수 없는 철쭉은 개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철쭉은 세계적으로 동북아권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양들이 독 있는 철쭉을 보기만 해도 제자리걸음을 하며 머뭇거린다고 하여 척촉(躑躅)이라고 부른다. 한자로 머뭇거릴 척, 머뭇거릴 촉이다. 일본에서도 똑같은 한자를 사용하며 '츠츠지'라고 부른다.
삼국유사를 보면, 한 노인이 벼랑 끝에 핀 연분홍 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헌화가(獻花歌)와 함께 바쳤다고 나온다. 그 꽃이 바로 철쭉으로 추정된다. 수로부인도 못 지나칠 정도로 매력적인 철쭉이 5월에는 전국 곳곳에서 꽃망울을 터트린다.
전남 보성군은 매년 일림산 철쭉제를 열고 있다. 올해 제21회 일림산 철쭉문화행사는 5월 3일부터 5일까지 사흘간 등산로 입구인 용추계곡 주차장 일원에서 열린다. 보성군 관계자는 "기후가 따뜻하고 생육 조건이 좋아 올해 철쭉이 예년보다 색감이 선명하고 개화 시기도 적절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일림산에서 멋진 봄 추억을 선사하겠다"고 말했다.
좀더 등산과 체력에 자신있는 사람이라면 일림산에 버금가는 철쭉 명소인 사자산과 제암산을 하루에 등반하기도 한다. 제암산~사자산~일림산으로 연결되는 철쭉 군락지의 길이는 10㎞가 넘어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다.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된 일림산 산철쭉은 도심이나 아파트 단지에 울긋불긋 요란하게 피어있는 영산홍이나 자산홍 같은 품종이 아니다. 매서운 해풍(海風)을 맞고 자라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꽃이 유독 붉고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또 키가 커서 철쭉 군락지 사이를 걸어가면 마치 꽃 터널을 걷는 듯한 환상적인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전남 보성 일림산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에 철쭉이 만개해 있다.photo뉴시스
일림산은 부드러운 형태를 띠고 있어 등산 길도 대체로 완만하다. 등산코스는 여럿 있으나, 용추계곡 출발 코스가 가장 인기가 많다. 용추계곡의 들머리에 들어서면 폭포의 물소리가 들리고 곧 빽빽한 편백나무 숲과 맞닥뜨린다. 강렬한 피톤치드(숲속의 식물들이 만들어 내는 살균성을 가진 모든 물질)를 뿜는 편백나무 숲을 따라 삼림욕을 하며 오른쪽으로 쉬엄쉬엄 경사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느닷없이 야생화 천지인 평지가 나타나며 이윽고 골치재에 이른다.
골치재는 보성군 웅치면의 기름진 쌀과 장흥군 안양면 해안에서 잡은 수산물이 오고 가던 고개라고 한다. 1970년대까지 네 가구가 목장지를 조성하여 거주했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예전 의병들의 훈련 장소이기도 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공출미를 가지고 장흥 수문포구까지 지게에 지고 날라야 했던 한(恨)이 서린 '골치 아픈 고개'라는 의미에서 골치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쨌든 골치재부터 진분홍과 연분홍 철쭉이 하나 둘 고개를 내밀며 인사한다. 그리 짧지 않은 깔딱고개 양쪽으로 피어 있는 철쭉을 바라보면서 약간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면 이윽고 골치산 작은봉우리에 도착한다.
거기에서 다시 비교적 완만한 산길을 걸어 골치산 큰봉우리에 오르면 마침내 멀리 일림산 정상까지 600m 구간에 물감을 퍼부은 듯한 핑크 쇼가 펼쳐진다. 사람 키가 넘는 철쭉 터널을 지나갈 때는 잠시 천국의 입구에 왔나 싶다. 가수 정훈희의 명곡 '꽃밭에서'는 이런 곳에서만 불러야 할 것 같다. 정상에서 시간을 보낸 뒤 하산은 다양한 길을 택하는데, 곳곳에 철쭉 군락지가 많아 어디로 내려와도 만족스럽다.
보성군 측이 제시하는 등산 소요시간을 보면 △용추폭포~골치재~정상(3.2㎞, 1시간40분 소요) △용추폭포~절터~정상(2.7㎞, 1시간20분 소요) △용추폭포~보성강 발원지~정상(3.2㎞, 1시간35분 소요) △한치~정상(5㎞, 2시간30분 소요) △제암산 휴양림~곰재~사자산~정상(8.17㎞, 4시간 소요) △봉수대~정상(3.6㎞, 1시간50분 소요) 등이라고 한다.
5월초 연휴 기간이나 주말에 일림산을 방문할 경우, 용추계곡 입구에서 치열한 주차전쟁은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일림산을 오르면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되니 너무 서러워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