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시간의 신비에 대하여

하나님아들 2025. 4. 12. 22:07

시간의 신비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시간의 깊이를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아무도 나에게 그것에 관해 묻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안다. 

만약 내가 그것에 관해 묻는 누군가에게 그것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것을 모른다.

시간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시편90편의 전반부를 쓴 기자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인간의 실존의 일시성을 비교한 것은

헛된 사변(思辨)이 아니다.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우울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굉장한 말들을 고백하게 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가장 개인적인 책인 <고백록>에서 인간의 일시성을 꿰뚫어 보려 한 것은

공허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것에 속한 모든 아이들을 데려간다”고 노래하는 것은 추상적인 진술이 아니라

심오한 기독교적 감정에 대한 표현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시간의 흐름 안에 있는

“영원한 지금”을 지적했을 때, 그리고 키에르케고르가 결단의

“찰나”로서의 모든 순간의 무한한 중요성을 지적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기독교적 사건이었다.

 

시간은 삶 자체의 근거로써 다함이 없다. 가장 위대한 영혼들조차 그것의 한 부분만 이해할 뿐이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영혼까지 포함해 모든 사람이 시간의 의미, 즉 자신의 일시성을 이해한다. 

그는 시간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신비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의 삶과 우리들 각자의 삶의 모든 순간과 모든 경험과 모든 표현 안에는 시간의 신비가 스며있다.

시간은 우리의 운명이다. 시간은 우리의 소망이다. 시간의 우리의 절망이다.

시간은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이다. 그리고 시간은 우리가 그 안에서 영원을 보는 거울이다. 

시간의 여러 신비들 중 세 가지를 꼽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간은 자신의 범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힘이 있다. 

둘째, 시간은 자신 안에 있는 영원을 수용하는 힘이 있다. 

셋째, 시간은 궁극적 종말, 즉 새로운 창조를 향해 나아가는 힘이 있다.

 

모든 것을 삼키는 힘


인간은 늘 시간의 흐름 속에는 무언가 두려운 것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것은 우리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며 그 수수께끼의 답을 수용하지 못한다.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로부터 와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로 나아간다. 

과거는 우리가 그것을 ‘여전히’현존하는 것으로 가질 때만 우리의 것이다. 

그리고 미래는 우리가 그것을 ‘이미’ 현존하는 것으로 가질 때만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과거는 “기억”으로만, 그리고 미래는 “기대”로만 소유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는 확장 없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그 점 안에서 미래가 과거가 된다. 

우리가 자신에게 ‘이것이 현재다’라고 말할 때, 그 순간은 이미 과거에 의해 삼켜지고 만다. 

우리는 현재를 붙잡을 수 없다. 그것은 어제나 잡을 수 없는 그림자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인다. 

과거와 미래는 물론이고 현재조차도 말이다. 

시편 기자의 표현대로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것이 우리의 실존인 셈이다.

 

영원을 수용하는 힘 

 

시간이 영원을 수용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에게 설 자리를 제공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의 단순한 흐름 속에는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이 증명하듯이 현재는 실재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재하는 것은 영원이 시간 속으로 뚫고 들어와 

그 시간에게 실재하는 현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원이 그것을 계속해서 흘러가는 시간 위로 들어 올리지 않는다면,

우리는“지금”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영원은 언제나 현존한다. 현재의 무한한 확장이 영원이다.

그리고 그것의 현존이야말로 우리가 현재를 가질 수 있는 원인이다. 

시편90편의 기자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자기에게 유일하게 설 자리를 제공하는 영원, 

즉 무한한 실재와 무한한 의미를 지닌 “지금”으로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이라고 말하는 모든 순간에 순간적인 그 무엇과 영원한 그 무엇이 연합된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영생은 현재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이미 영원을 갖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시간의 내몲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지금은 영원한 지금이 된다. 

그 안에서 현재는 영원한 현재가 된다.

 

새로운 창조를 향해 나아가는 힘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며 그 자체가 되풀이 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새로움을 창조할 뿐이다. 그 안에는 종말을 향한 질주가 있다. 

시간은 영원한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 

이 사실은 시간의 모든 신비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들이 말했던 신비다.

영원은 시간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다.

시간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이다. 

시간은 영원이라는 정거장을 향해가는 쉼 없는 열차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미래를 과거로 보내는 현재에 있다. 

시간은 끝없는 자기 반복을 향해 나아가지도 않고, 태초로 공허한 회귀를 향해 나아가지도 않는다. 

시간의 숨은 의미는 구원이다. 시간의 숨은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시간의 숨은 현실은 새로운 창조이다. 

시간 속에 모든 순간들의 숨은 의미는, 

즉 그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미래와 관련해 결단하고 또한 그것과 관련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 폴 틸리의 <흔들리는 터전>의 책에서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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