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가죽옷과 세마포 옷

하나님아들 2025. 2. 11. 10:54

가죽옷과 세마포 옷

(가죽옷이 부활하여 세마포 옷이 되다)

 

(강문호 목사)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전화선을 자르면 수많은 코일이 합하여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66권 내내 흐르고 있는 전선이 6가닥이 있습니다. 1. 성경은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2. 성경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3. 성경은 죽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4. 성경은 율법과 복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5. 성경은 영적 전쟁이 흐르고 있습니다. 6. 성경은 메시야가 흐르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가면 나체촌이 있습니다. 근처에까지만 가보았습니다.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있다고 합니다. 영국에 갔을 때였습니다. 런던에 햇빛이 쨍쨍 비치는 날이 일년 365일중에 겨우 몇 십일일 정도라고 합니다. 그 나마 겨울에는 옷을 벗을 수 없습니다. 공원에서 옷을 다 벗고 누워있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러웠습니다.

 

독일 목욕탕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남녀 혼탕입니다. 남녀가 모두 벗고 목욕을 같이 하는 데 그렇게 자연스러웠습니다. 오히려 남자인 내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에덴이 그랬습니다. 죄를 모르면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언젠가 우리 강대상에 예배 중에 바지를 벗긴운 아이가 올라와 다녔습니다. 전혀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죄를 모르면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러나 죄를 알면 부끄러움을 알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니라”(창 2:25)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7)

 

옷의 필요성 사람이 옷을 입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피부 보호입니다.

 

옷을 입어야 피부가 보호됩니다. 찢어지지 않고 다치지 않게 하여 줍니다. 추위에서 따뜻하게 하여 주고 더위에서 시원하게 하여 줍니다.

 

 

2. 수치 보호입니다.

 

부끄러움을 막아 주는 것이 옷입니다. 남녀가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고 살면 부끄럽습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겔 18:8)

 

주님이 우리 곁으로 지나며보니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주님의 옷을 벗어서 우리의 벌거벗은 것을 가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수치는 주님이 가려주실 수 밖에 없습니다. 유럽 부흥회를 마치고 이스라엘에 들러서 성막 자료를 사오곤 하였습니다. 종종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이스라엘 비행기만 한 번도 테러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검색이 철저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다니는 40대, 50대 남자는 무조건 밀실에 들어가서 팬티만 입고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나는 이제 그런 일에 익숙합니다. 목사라고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여러 번 다녔다고 하여도 통하지 않습니다. 무조건입니다. 나는 너무나 모욕스러워 물었습니다. “꼭 이렇게 하여야 합니까?” 그 때마다 공항 관리는 말했습니다. “당신의 안전을 위하여서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그렇기 때문입니다. 벗었다는 수치입니다. 나치들은 유대인 여자들을 발가벗겨 남자 죄수 방에 넣기도 하였습니다. 옷을 수치를 가리는 목적도 있습니다.

 

 

3. 신분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었느냐를 보면서 그 사람의 신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경찰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우리는 금방 경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인 복을 입었으면 군인입니다. 육해공군 옷이 다 다릅니다. 학생복을 입었으면 학생입니다. 의사 흰까운을 보면 의사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중은 승복을 입습니다. 목사는 강대상에서 목사 가운을 입습니다. 성가대는 성가대 옷을 입습니다. 옷은 신분입니다.

 

옷이 이 이상의 의미를 넘을 때 인간은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옷이 화려하여졌습니다. 옷에서 빈부의 차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옷이 유혹의 수단이 되면서부터 인간은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옷을 꾸미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은 타락하여졌습니다.

 

 

가죽옷의 가죽은 무슨 가죽일까요?

 

성경은 무슨 가죽인지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가죽인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소가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숨었습니다. 유대인의 전승은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그 날 타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숨어 있는 데 밤이 왔습니다. 자연적인 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미 자기가 타락하기 전에 루시퍼가 하나님에게 반역하다가 타락하여 내쫓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루시퍼와 그의 일당들 타락한 천사들을 흑암에 가두었습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6)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범죄 함으로 하나님이 준 형벌인 줄로 알았습니다. 흑암은 형벌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밤새도록 회개하였습니다. 회개할 때 아침이 왔습니다. 자연적인 아침입니다. 인류 역사상 두 번째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회개하였기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알았습니다.

 

광명 속에서 아담과 하와는 뿔이 하나인 소를 찾았습니다. 뿔 하나를 둘이 붙잡고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우리 속에는 선악이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부터 선과 악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선만 붙들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후 소를 잡아 가죽옷 두 벌을 만들어 같이 입었습니다. 이스라엘에 흘러오는 유대인 전승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가죽옷은 양가죽인 것으로 유추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를 요한 계시록 13장 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 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짐승은 앞으로 세워질 짐승 정부의 대통령입니다. 제3성전이 세워질 때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짐승이라고 성경은 말하기에 그 정부를 짐승정부라고 말합니다. 그 짐승에게 경배한다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 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더라는 말이 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성경은 영국에서 번역하였던 King James Version을 번역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매일 읽고 있는 영어 성경책이 있습니다. 하루 10장씩 영어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NIV 성경입니다. 그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니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 한 자들이라.”

 

“창세 때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 책에...”

 

창세 때부터 어린 양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은 창세 때부터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창세 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가죽옷입니다. 원문 성경인 헬라어 성경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 속에는 죽음이 들어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명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벌금형이 아닙니다. 감옥형도 아닙니다. 사형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100만원 벌금도 아니고 3년 징역도 아닙니다. 죽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나대신 죽어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

 

구약은 소, 양, 염소 그리고 비둘기 중에 흠 없는 숫컷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었습니다. 이것을 대속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대속 물은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에서는 동물이 대속물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대속물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이 들어있지 않은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대신에 대속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죽옷입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이기 때문에 동물 피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지어 입은 옷은 무화과나무 치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들어 입혀주신 옷은 가죽옷이었습니다. 가죽은 짐승이 죽어야 생기는 재료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피 묻은 옷을 입힘으로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죽옷은 양 가죽 옷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막 성전에서 양, 염소 그리고 소는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밍크코트를 입었다면 밍크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물개가죽 코트는 전천후 코트입니다. 겨울이나 여름에도 입습니다. 비오는 날이나 비오지 않는 날도 입습니다. 물개코트를 입었다는 말은 물개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악어 가방이 제일 좋은 가방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악어빽을 가지고 있다면 악어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었다는 말은 짐승이 죄인대신 죽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몇 마리 잡았을까요? 성경은 양을 몇 마리 잡았는지 말하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 마리로 안 되었을 것입니다. 두 명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4마리 정도는 잡아야 두 벌 옷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추측으로 끝냅니다. 상상입니다. 그러나 몇 마리 잡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잡았을까요?

 

지금 아담과 하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잡았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수치를 덮을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덮어 주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 입은 무화과나무 치마를 벗기셨습니다. 그리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주]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이 잡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당시 지구상에는 아담과 하와 외에 사람이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잡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잡아, 하나님이 옷을 지어 하나님이 입히셨습니다. 자기들이 만들어 입은 무화과나무 치마로는 하나님 앞에 수치를 가리 울 수 없었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자기 힘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건져주어야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가슴 아픈 것이 있습니다. 세월호가 사고 나고 2시간 30분 동안 떠있었습니다. 해경들이 일찍 도착하고도 무서워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 하였습니다. 단 한 명도 가라앉고 있는 배 속으로 들어가서 구명조끼를 입고 빨리 나와서 바다 속으로 뛰어 들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배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만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그 때 유리창 가에서 손을 흔들며 구해달라고 몸부림치는 학생들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자기 힘으로 한 명도 나오지 못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구해주어야 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양을 잡고,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하나님이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시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많이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이라”(요 15:16)

 

 

가죽옷은 최초의 제사입니다.

 

어느 분은 원제사(原祭祀)라고 말했습니다. proto-sacrifice라는 말을 썼습니다. 후에 하나님은 시내산 꼭대기로 모세를 불러서 제사 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번제, 소제, 화목,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 5대 제사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첫 제사는 가죽옷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사장의 옷 제사장들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5대 제사를 드립니다. 소제 하나만 빼고 모든 제사는 제물을 잡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고 제물 가죽은 제사장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사람의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 곧 그 제사장은 그 드린 번제물의 가죽을 자기가 얻을 것이며”(레 7:8)

 

제사장들이 가지고 간 제물 가죽은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1. 구두 재료 2. 가방, 지갑 등 장신구 재료 3. 성경을 베끼는 종이 대용 재료 4. 의류 재료 제사장들은 가죽옷을 만들어 입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짐작입니다. 제사장이 생긴 후 제사장들은 제물 가죽을 취하였습니다.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그랬습니다. 가죽옷은 제사장들에 의하여 이어졌을 것입니다. 제사장의 옷 세마포 옷 제사장들은 세마포 옷을 입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흰 옷입니다. 제사장의 유니폼입니다. 예수님의 세마포 옷의 비밀 그런데 예수님도 세마포 옷을 입고 사셨음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3-25)

 

예수님은 입고 있는 옷 모두를 벗김을 당한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모두 벗겼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예수님 당시 옷은 그대로 돈이었습니다. 직조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일일이 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손으로 일일이 한 올 한 올 짜야 합니다. 그래서 옷은 너무나 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부터 아침 9시 정도까지 계속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옷은 찢겨지고 피가 낭자하게 묻었습니다. 그래서 옷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병정은 네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부수입이 생겼다고 좋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다 벗긴 후에 나누어 가지면 술값정도는 나올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을 벗겨서 네 조각으로 나누었습니다. 각각 한 깃씩 가졌다고 한 것을 보면 네 명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옷 조각도 돈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피가 묻었어도 빨면 됩니다.

 

지금 성경학자들은 네 조각으로 예수님의 나눈 것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복음이 퍼져 나갈 것에 대한 예표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겉옷을 벗기고 나서 속옷을 벗기려고 할 때 로마 병정들은 놀랐습니다. 속옷은 보통 옷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원문에는 <키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키톤이라는 말은 놀라운 단어입니다. 직조 술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이지만 모두 한 조각입니다. 한 통으로 짠 옷입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이런 옷은 보통 사람이 입을 수 없는 옷입니다. 제사장들만이 특별히 입는 옷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정교한 옷을 만들고 또 아론을 위한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출 39:1)

 

제사장들은 성소를 섬기기 위하여 <정교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겉옷은 잘라서 나누어 가졌습니다. 정교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쉐라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너무나 정교하여 바느질 자국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제조된 옷입니다. 꿰메지 않은 옷입니다. 천을 잇지 않은 옷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역사가는 요세프스입니다. 요세프스는 이 옷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었다고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성경 기록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옷은 너무나 비싼 옷이라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통 채로 한 사람이 가져야 제 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 가졌습니다. 흔히 겉옷이 비쌉니다. 속옷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겉옷을 잘라서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속옷은 나누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키톤> 이 옷을 입고 계셨음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옷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레위지파가 제사장 지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레위 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복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라틴어로 폰티텍스라고 합니다. 폰티텍스라는 말은 <다리는 놓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예수님의 겉옷을 벗기고 나자 키톤 제사장 옷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 로마 병정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야! 돈이 되겠다.” 일반 사람들은 말하였을 것입니다. “제사장 옷을 입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다.”

 

그래서 로마 병정들이 이 옷을 나눌 때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와 사람들이 있는 성소 사이를 막고 있는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래서 제사장 옷을 입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옷을 입으신 것은 예수님은 제물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제사장 옷은 제물을 다루기 위하여 입는 옷입니다. 키톤은 제물과 관계된 옷입니다. 전투복은 전투하기 위하여 입는 옷입니다. 우주복은 우주와 관계가 있습니다. 우주인들이 끼는 장갑이 있습니다. 우리 목장갑과 똑같이 보이는 데 제조비가 5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자 제물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신비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동물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제사장 예수님은 자기 몸을 제물로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처럼 늘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고 대속 물로 주시며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세례요한도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요 1:29)

 

예수님은 제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제주도의 한라산은 보는 방향에 따라서 다르게 생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무디(Mood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인들은 잔인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범법자로 보았다. 여자들은 슬퍼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보았다. 예수의 어머니는 가슴 아파하면서 그리스도를 아들로 보았다. 제자들은 난처함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꺾인 소망으로 보았다. 병 고침 받은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은인으로 보았다. 백부장은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권세자로 보았다. 제사장들은 조소하면서 그리스도를 협잡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천사들은 놀라며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보았다. 마귀는 당황하면서 그리스도를 여자의 씨로 보았다. 하나님은 사랑을 품으시면서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아들로 보셨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그리스도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았다.

 

 

세마포로 싸신 예수님의 시신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어 있을 때 세마포로 시신을 싸고 있었다고 사복음서는 모두 한 결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27장 59절에서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15장 46절에서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24장 12절에서“베드로가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 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19장 40절에서“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마포 옷으로 싸인 채 묻혀 계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세마포 옷을 잘 세마포가 시신 있던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세마포 옷을 벗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옷은 세마포 옷이었습니다.

 

 

천국의 옷 세마포

 

그런데 우리들이 천국에서 입고 살 옷은 세마포 옷입니다. 그런데 그 옷은 피묻은 옷이라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계 19:8)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1-12)

 

우리는 모두 천국에서 세마포 옷 흰 옷을 입고 살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물이 될 때 입으셨던 옷입니다. 첫 열매되신 예수님을 따라 부활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옷을 입고 천국에서 영원히, 영원히 살 것입니다.

 

창세기의 가죽옷이 요한 계시록에서 세마포 옷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성경의 구원의 역사는 가죽옷에서 시작하여 세마포 옷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올바로 사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벗기시고 세마포 옷으로 갈아 입이신 후 영원토록 천국에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 옷은 내가 해서 입는 옷이 아니고 주님께서 준비하실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외국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옷을 바꾸어 입는다고 합니다. 옷을 보면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옷을 보면 그 사람을 압니다. 우리는 세마포 옷을 입을 것입니다. 지금 말씀의 옳은 행실로 산다면 영적으로 세마포 옷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노니 주님과 같이 세마포 옷을 입고 영원히 살기를 바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