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축복을 주소서.
에스겔 36장 24~38절 2004년 07월 11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변화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회복 불가능한 사람도 주님을 만나면 회복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죽고 나흘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죽은지 나흘이 되었으니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죽은지 나흘이 된 나사로가 살아나서 무덤 속에서 나왔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셨습니다.
에스겔 당시의 유대인들은 영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국가는 이미 망해서 바벨론의 정복을 받았으며, 백성들은 열방으로 흩어진 상태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유대인들이 회복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모습을 에스겔24장에서는 녹슨 가마솥에 비유하고 있다. 너무나 심하게 녹이 슬어있어서 아무리 삶아도 시뻘건 녹물이 나옵니다. 거기에 물을 붓고 고기를 넣고 삶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기만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 불가능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런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벨론에 포로된지 70년만에 히브리민족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에스겔 당시의 유대인들을 보면서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 병사가 사막에서 생활하는 어느 수도사를 찾아가 하나님이 자신의 회개를 받아 주실지 물었습니다. 수도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친구여, 자네는 옷이 찢어졌을 때 그것을 버리는가” 그 병사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을 다시 수권漫?입습니다” 그러자 늙은 수도사가 그에게 반문했습니다. “자네가 옷에도 그렇게 신경을 쓰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겠는가?”라고 대답했습니다.
회복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하쉬브"라고 하는데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시고 잘못된 것으로부터 본래적인 것으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유대인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서 우리들의 어떤 부분이 회복되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말씀으로 정결함이 회복됩니다(25절).
25절에 보면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맑은 물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엡5:26에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5:3에서도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주님 앞에서 이미 깨끗함을 받았는데 무엇으로 깨끗함을 받았습니까? 주님이 일러주신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은 것입니다. 더러워진 몸을 물로 씻듯이, 이미 사용한 그릇을 물로 씻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자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119편을 쓴 시인은 말씀의 능력을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9절에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청년기에는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습니까? 청년들 가운데는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많은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는 비결이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또 11절에보면 자신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이것은 시인의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은 경험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말씀을 마음에 두었더니 범죄하지 않았던 경험을 했습4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에 말씀을 두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기독교인 중에는 삶이 거룩하지 못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거룩한 삶은 고민만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그 사람 속에 거하면 그 말씀이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고민한다고 배가 불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어야 배가 부르듯이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고, 묵상하고, 암송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나를 거룩하는 것입니다.
2.거듭난 영으로 부드러운 마음이 회복됩니다.
26절에 보면“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을 보면 돌 같은 굳은 마음을 살갗처럼 부드럽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은 밭과 같습니다. 밭은 흙이 부드러워야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마음도 부드러워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단단한 마음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돌짝 밭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서 무슨 열매를 기대하겠습니까?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드러운 마음이 회복될 수 있습니까? 새 영을 가져야 합니다. 새 영을 가진다는 말은 영이 거듭난다는 말입니다. 영이 거듭난다는 말은 없던 영이 생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몸 안에 영이 있습니다. 몸 안에 영이 있는데 하나님과 연결된 영이 있고 하나님과 단절된 영이 있습니다. 영 자체는 살아 있으나 하나님과 연결된 영은 살아있는 영이라고 하고 하나님과 단절된 영은 죽은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마치 밧데리가 방전된 자동차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가 밧데리를 고체하거나 충전시켜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동차가 다시 움직일 수 있듯이 사람의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의 영은 다 죽어 있습니다. 죽어있는 영을 살리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고 에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께서 사람의 속에 들어가셔서 그 영을 살리시며 영이 살아나면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것만으로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부드러운 마음을 갖을 수 있습니다. 거듭났어도 육체가 영을 지배하고 있다면 돌 같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이 육체를 지배해야 살갗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에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사람은 난폭운전사고 한 사람은 모범운전사입니다. 모범운전사가 자동차에 타고 있어도 난폭운전사가 운전을 하면 자동차는 난폭하게 운행되는 것입니다. 모범운전사가 핸들을 잡아야 안전운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육체가 주도권을 잡고 있기에 마음의 상태가 돌 같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이 주도권을 잡으면 마음의 상태가 살갗 같이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고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3.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지켜 행하는 생활이 회복됩니다.
27절에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내 신’은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슥4:6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 영성생활, 능력생활, 승리생활은 성령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통로를 내어드리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를 통하여 이루십니다. 성령님을 인정해 드리고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순종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항상 말씀을 실천하면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은혜는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이 되어도 행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보약이 있어도 먹어야 효험이 있는 것처럼 말씀도 행할 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말씀을 행할 때 주시는 복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땅을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을 말씀과 상관없이 살다가 빼앗겼습니다. 다시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분깃이 있습니다. 그 분깃도 말씀대로 살 때회복이되는 것입니다. 29절에서는 곡식으로풍성하게 하시고 기근이 임하지 않게 하신다고 하는데 이는 졍제적인 회복의 약속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실은 국가 경제도 영적인 회복에 달린 것입니다. 그 회복이 얼마나 확실한지 35절에 보면 황무하던 곳이 에덴 동산 같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6절에서는 그 회복을 통하여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37절과 38절에 보면 숫적인 회복도 허락하십니다.(이 말씀은 제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에 우리 교회를 향해서 주신 응답입니다) 그들의 인수로 많아지게 하는데 예루살렘 정할 절기에 양떼 같이 사람의 떼로 채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1년 3차 절기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은 제사드릴 양떼로 가득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양의 울음소리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의 떼로 가득 채우시겠다는 말씀은 놀라운 회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그런 그런 회복을 말씀을 지킬 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복을 위해서라도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누림이 있어 늘 행복하고 성령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건강의 축복도 받아 누리기를 바랍니다. 또한 경제적인 누림도 있어서 부족함이 없이 주의 일도 하고 생활도 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4.그래도 기도해야 회복됩니다.
37절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고 말씀하십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어도 기도해야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일을 번거롭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놓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그 약속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번거로울만큼 기도회가 많습니다. 또 기도를 할 때는 사력을 다해서 기도하기 때문에 목소리가 굵어진 여자분들도 많습니다. 주로 저는 중보기도 시간에 사무실에서 설교준비를 합니다. 설교 준비하는 시간은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이 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은 설교 준비에 상당히 방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반대로 시끄러운 기도소리를 듣고 있다보면 영감이 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부흥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해집니다.
1805년 윌리암스 대학에서 소그룹 기도모임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폭우가 쏟아져서 사람들이 흩어지고 다섯명의 청년들이 건초더미 속에 들어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이후 건초더미 기도회가 생기게 되었고 그 기도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선교사들이 파송되었고 윌리암스 대학은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는 대학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부흥을 갈망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건초더미 기도회를 통하여 일어났던 부흥을 기대하게 됩니다. 몇 명의 중보기도 사역자들의 기도 사역으로 우간다에 영적인 부흥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세계적인 부흥을 허락하실 것을 믿습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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