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들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샤르니(Charney)라 하는 한 프랑스인이 나폴레옹의 노여움을 사서 토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곳에서 세월이 흘러갔다. 그는 친구들에게서 버림받고 바깥 세상으로부터는 완전히 잊혀진 듯이 보였다. 고독과 절망에 빠진 그는 작은 돌 조각 하나를 들어 그 쓸쓸한 독방 벽에다가 이렇게 새겼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토굴 감옥 바닥에 깔려 있던 돌들 틈에서 푸른 새싹이 돋아났다. 그것은 벽 위에 뚫린 작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향해 뻗어가기 시작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넣어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 그 푸른 잎사귀에 부어 주곤 했다. 새싹이 마침내 아들다운 파란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될 때까지 자라났다. 꽃나무가 탐스러운 꽃송이를 터뜨리자 그 고독한 죄수는 전에 벽 위에 새겼던 글귀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하나님이 돌보신다”라고 새겨 넣었다. 이 죄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샤르니가 갇혀 있는 독방 옆에는 또 한 사람의 죄수가 갇혀 있었는데, 그에게는 감방 면회가 허락된 어린 딸이 하나 있었다. 그 어린 소녀는 아버지를 면회 왔다가 샤르니의 감방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소녀는 물론 그 토굴 감옥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꽃나무를 보았고, 이 소식은 곧 조세핀(Josephine) 왕비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는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은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상냥하고 진실한 여인이었으므로 그녀는 곧 황제에게 샤르니를 석방하도록 설득했다. 샤르니는 그의 꽃나무를 집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그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꽃나무를 소중하게 돌봐 주었다 한다. 토굴 감옥에서 피어난 그 꽃나무는 샤르니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요절:“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아마 형통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만사형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일이 척척 잘 진행되는 그런 형통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요셉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이 언제나 일방통행 형식의 축복은 아니었습니다. 복잡다단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인정해야 합니다. 열림과 닫힘을 함께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전도서 본문에서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담힘은 열림을 위한 길입니다. 요셉에게 아버지의 집은 닫혔지만 보디발의 집은 열렸습니다. 보디발의 집이 닫히는 날 감옥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감옥의 문이 닫히는 날 드디어 애굽 총리의 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종종 닫힌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통곡하며 기도하지만 닫힌 문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다른 열린 문을 마련해두셨다는 기대를 가지십시오. 그것이 바라봄이요 주를 향한 기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앞에 무릎 끓을 수 있는 자는 합력하여 언제나 선을 이룬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대로 다 응답된다면 그것은 형통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아름다울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십시오. 우리의 기도 제목을 도구로 하여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토기장이로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최고의 걸작품이 되기를 기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주무를 것입니다. 이유는 부드러운 황토로 우리를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붙이고 자르고 돌리며 계속 만지실 것입니다. 또 우리를 뜨거운 불가마에 넣어 견고하게 구울 것입니다. 그래야 세계적인 명품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학교에 입학하여 그분의 커리큘럼 속에서 열심히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학생이 커리큘럼을 짜는 학교는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할 수 있는 학교는 없습니다. 오늘도 내 안에 하나님의 섭리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대하면서 산다면 우리의 삶은 값지고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먼 훗날 분명히 간증거리가 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운 섭리 안에서 기쁨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 젊은 의사가 알프스 몽블랑 정상을 정복했다. 알프스 등산로의 출발 지점 샤모니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환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의사는 정상에 깃발을 꽂고 하산하던 중 베이스 캠프에 도착하자 마음의 긴장을 풀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안전을 위해 감았던 로프마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로프를 풀어 버리고 안내원의 도움 없이 자기가 앞장서겠다고 했다. 안내원은 위험하다고 만류했다. “선생님, 아직 몽블랑 정복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샤모니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의사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그들은 하산하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못해서 앞서 가던 의사는 급경사에서 미끄러져 굴러 떨어졌다. 그를 도와 줄 장비가 없었으며, 더구나 그가 스스로 로프를 풀어 버렸기 때문에 안내원은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보아야만 했다. 앞서 가던 의사의 시체는 비탈 아래 기슭에서 발견되었다. 자기를 환영할 준비로 바쁘던 그 시각, 의사는 자신을 지탱하던 로프에 싫증을 느껴 그것을 풀어 버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정복한 그 산자락에 묻히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로프’처럼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한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에 싫증을 느끼지만 영원한 안식처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 인도를 불편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조선조 태종이 모든 정사를 세종에게 넘기고 풍양궁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두 아전이 서로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논하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갑이 말하였습니다. “부귀와 영달은 모두 임금에게서 나온다”
이에 을은 “아니 그렇지 않다. 한 계급이 오르거나 한 벼슬을 하게 되는 것은 모두 하늘이 정하는 것이다. 비록 임금이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며 서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태종이 그 말을 엿듣고 나서 “지금 이 글을 가지고 가는 아전을 한 직급 올려 주기 바라오”라는 글을 종이에 써서 갑을 시켜 세종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갑이 그 쪽지를 들고 막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복통이 나서 그 쪽지를 을에게 대신 부탁하였습니다. 다음날 인사 발령 내용을 보니 을은 직급이 올랐으나 갑은 그대로였습니다.
태종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태종은 경탄하여 마지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주권자에게 은혜를 받아 성공해 보겠다고 탄원하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잠언 29:26]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역대상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부와 명예도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주님 손에 위대하고 강하게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당사자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의 악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무너지는 예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들의 죄까지 이용하셔서 선을 이끌어내십니다.
믿음의 눈이 있는 사람은 현재의 환경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까지 미리 바라보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결코 우연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비록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찾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존하시며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계를 다스리시며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실 뿐 아니라 개개인도 통치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작정하신 바 모든 것을 이루시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그에 대하여 계획하신 것이 있습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명석하든 그렇지 못하든, 건강하든 연약하든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어떻게 섭리하시는지 지금 이 순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과거 조선이 죽은 이유도 죄 때문이었다. 당시의 실제 사회상을 목격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조선은 나라가 아니었다. 1574년 이율곡이 “조선은 나라가 있어도 나라가 아니옵니다!”라고 하면서 피를 토한 이후로, 이미 나라가 아니었던 조선은 정약용의 표현대로 “임금부터 말단 관직까지 모두 도둑놈”이었다. 민비(명성황후)를 직접 만난 적이 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조선의 양반은 허가받은 흡혈귀”이며 “착취하는 계층과 착취받기 위해 태어난 계층, 오직 두 부류만 존재하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정약용은 “이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1884년 당시 미국 해군 무관으로 조선에 있었던 조지 클레이턴 포크는 백성을 굶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한 관리의 말을 듣고 조선을 “가장 사악한 악”(The Greatest Evil)이라고 규정했다. “공의가 길에 쓰러져 버린 나라”를 지옥이라 부른다면 “헬 조선”이란 말은 아주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죄로 인해 죽듯이, 죄로 더럽혀지고 죄가 가득 찬 땅은 그 나라를 토해 내 버린다. 조선은 이미 자신의 죄로 그 생명을 다한 시체와 같은 나라였다
섭리, 예정에 관한 성경 말씀
0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0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7:13)
0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1- 3)
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3:20)
0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28)
0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0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0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1:9)
0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
0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3:11)
0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빌1:15)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8장28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먼저 아시고 먼저 계획해 놓으시고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채워 주신다.
모든 사물에 집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머물지 않는 곳은 없다.
하나님의 섭리와 반대적 의미: 운명론, 인연론, 우연론
하지만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모든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잘먹고 잘살고 스포트라이트 받고 맘편하게 살고 내 손익을 내가 계산 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나 에스더의 삶처럼 힘들 때 조차도 하나님만 붙들며 나아간 순간들을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신다. 고난 가운데에서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을 느껴야 한다.
한 순간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시고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
내가 엉망진창을 만든 상황속에서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에스더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교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에스더서의 핵심 구절중의 하나는 4:14b “네가 이와 같은 때를 위해 왕국에 들어갔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라.”입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국내적인 정치적 상황들과 사건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랑하기 좋은 왕은 왕비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비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처녀 에스더가 제국 내의 미인 대회에서 왕의 마음을 훔쳐서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연 같은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에스더의 후견인이었던 모르드개가 우연히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엿 듣게 되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이를 고하였고, 음모는 실패하였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기 하루 전 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왕은 모르드개가 자신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는지를 상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모르드개는 왕의 상을 받아 백성들 앞에서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죽이려는 악한 계략이 에스더에 의해 드러났을 때, 하만은 왕비의 침대로 올라가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이를 본 왕은 대노하여, 하만을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준비 된 교수대에 매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 행동들 그리고 일들을,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는 것조차, 그의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 그의 무오한 예지 그리고 그 자신의 의지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계획에 따라, 유지하시고, 관리하시고, 배정하시고, 통치하시며,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공의와 선과 긍휼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연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가장 하찮은 일이나 전혀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의 일이나 사건들에도 관섭하시고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행사를 아시고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당신의 뜻에 따라, 모든 일들을 질서 있게 처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나며,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섭리란 사람들의 삶에 나타나는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통치)을 말한다.
섭리 (providence)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로 Deus povidet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이다. 창 22장에 등장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이삭을 죽이려 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이삭을 드리지 말고 하나님이 준비한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리라는 그 사건에 나타난 여호와 이레 (= 하나님이 준비하신다)에서 생겨난 말이다. 나중에 이 단어 (providentia) 의 의미가 약간 변한 듯 하다. pro (= ahead)+ videre (to see)의 의미로. 그래서 이 단어가 하나님의 전지하심(omniscience)의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섭리라는 말을 역사적으로 적용해왔지만, 선악을 판별하기 어려운 복잡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함부로 적용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들의 동의를 받기 어려워진다. 개인적으로 적용하는데는 무리가 없다. 섭리를 쉽게 설명해주는 구절들인 롬 8:28-29, 창 50:20절을 살펴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롬 8:28-29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선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롬 8:28-29, 우리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는 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그 아들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고통, 슬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등의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셔서 가장 큰 선,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을 갖추어갈 수 있도록 연단하신다는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읽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부분을 일부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들이 우리 자신 안밖으로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수천 가지 질병이 발생할 수 있으며 너무 춥거나 더워도 위험할 수 있으니 얼마나 연약하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인생입니까?
배를 타면 그 순간부터 죽음과 한발자국 거리에 있는 신세가 됩니다. 자동차나 비행기를 타다가 사고가 난다면 생명이 위험해 집니다. 거리를 돌아다닐 때면 지붕위의 기왓조각 숫자만큼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도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으며, 낮에는 집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고 밤에는 집이 우리를 덮치지 않을까 걱정하게 만듭니다.
그 외에도 독이나 강도, 폭력의 위험은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직까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실례를 접하면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우리의 생명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경고를 받으니 우리에게 그런 어려움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움과 공포에 싸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모든 일은 운명에 의하여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작은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선언하시면서 (마 10:29), 곧바로 이어서, 우리는 참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면밀함으로 보살피심으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이를 더 확대시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시는 것을 신뢰하도록 하십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첫째 원인"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일어나며 어떠한 일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없으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스리고 통치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교리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의 가장 주된 목적은 주께서 성도들의 길을 부지런히 보살피셔서 그들이 돌에 걸려 넘어지는 일조차도 없도록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몇 가지 측면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좋은 일 중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합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이 다윗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뻔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때가 오기 전에 미리 그를 깨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삼하 17:7)
이러한 지식을 갖게 되면 반드시 결과들에 대한 마음의 감사와 역경 중의 인내와 미래의 염려들로부터의 놀라운 해방이 뒤따라오게 되는 법입니다.
모든 일이 번창한다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함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은 형들의 배신을 당하고 애굽으로 팔려 갔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믿었기에 형들의 배신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형들의 배신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그 불의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요셉은 형들을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었고 심지어 그들을 위로하기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욥도 갈대아 사람들의 잔인한 행위에 마음을 두었더라면 즉시 보복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그 일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임을 인정하였으므로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다윗도 시므이에게 협박과 모욕을 당하였을 때 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더라면 부하들을 시켜서 보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께서 개입하셨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부하들을 진정시켰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1)
혹시 억울하게 상처를 당하더라도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경륜에 따라 허락된 일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기를 배워야 합니다.
셋째, 부차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경건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을 베풀어준 사람들이 베푼 친절에 대해서도 무시하지 않고 깊은 마음으로부터 그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보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맡은 일에서 부주의나 태만으로 타인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 때도 그런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일어났다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동시에 그는 그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것입니다.
미래의 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경우에는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나 조언을 청하는 일을 꺼리지 않을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정당한 방법들을 기꺼이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방법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온통 기대고 확신 가운데서 안심하거나, 혹은 그런 것이 없을 때에는 그로 인해 불안해 할 정도로 그런 것을 신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재 상황에 대한 이런 저런 궁리로 섭리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고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생각을 고정시킬 것입니다.
요압은 전쟁의 결과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의무를 부지런히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 10:12)
이러한 지식이야말로 우리의 교만과 지나친 자신감을 제거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그를 의지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이상은 기독교강요(크리스챤다이제스트, 원광연 옮김) 상권, 17장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