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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

하나님아들 2024. 9. 29. 22:54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

 

 




진지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이라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혹시 내 마음대로 결정한 것이어서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을 갖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비밀을 알려 주어서 우리가 그대로 따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성공이 보장된 것이겠지요.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원합니다. 우선 한국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하여 취하는 방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를 "통속적 견해"라 부르기로 합니다. 우선 통속적 견해를 설명하고, 비판한 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것입니다.

1. 통속적 견해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고 할 때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위하여 이상적(理想的)인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이를 알고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이에서 벗어난 삶을 살면, 불행하게 인생을 끝마치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불완전한 삶을 살뿐입니다. 대학의 학과목을 선택하거나 사업을 시작할 때, 결혼을 앞두고 하나님이 "만세 전에 예비하신" 작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사한 후 교회를 정하는 것, '주의 종'의 길을 가려할 때, 헌금의 액수를 정할 때 하나님의 정해진 뜻을 찾습니다. 통속적 견해의 근거는 이렇습니다. 각 사람에 대하여 계획을 가지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행하려 하는 사람에게 그 뜻을 알려 주십니다. 아모스3:7 말씀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귀가 열려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여러 방법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고,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지 못한 사람은 모른 채 지나칠 것입니다. 수많은 성경의 그리고 역사상의 위인들이 젊었을 때에 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잠언3:6 말씀에도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



나의 잘못된 결정



그러면 그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 번째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에 많은 말씀들이 있지만 그 중에 특히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혹은 설교를 듣는 가운데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음성을 듣고 깨달을 수 있다고 합니다. 몇 년 전 한동대 김영길 총장 사모님의 간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카이스트의 교수로서, 세계 100대 과학자 중 한 분으로서 아무 부족함 없이 연구에만 전념하고 있었는데, 신설 한동대의 총장으로 부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심하고 있는 중에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본문이 창세기 12:1-3,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아브라함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설교를 듣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한동대로 가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군대에 가야 하느냐 아니면 좀 늦게 가더라도 청년부에서 활동을 해야 하느냐로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몇 달을 기도하였습니다. 한 번은 철야 기도를 마치고 새벽기도회를 하는 도중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마태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등에서 땀이 쭉 났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지금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인 줄 믿었고, 이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더 좋은 결과를 주신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또한 두 번째로 하나님은 환경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보여 주십니다. 엘리야에게 나타났던 손바닥만한 구름 조각이 그에게는 하나님이 비를 주시겠다는 표징이었습니다. 헌금을 해야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마침 돈이 생겼다든지, A자매와 B자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는데 A자매를 하루에 세 번이나 만났다든지 하는 것 등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표징입니다. 세 번째는 소위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 성령님의 말을 거스르면 내내 마음이 무거운데, 그 음성에 항복하고 그 뜻을 따르기로 하는 순간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최초 한국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인 언더우드가 미국에서 한국 선교를 호소하는 설교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 계속 마음이 편치 않고 한국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한국으로 가라고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몇 날을 고민하다가 드디어 한국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작정을 하고 나니 마음에 평안이 넘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넷째는 영적인 지도자와의 상담입니다. 목사님이나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면, 그는 그 성도를 위하여 많이 기도할 것이요, 기도하는 중에 깨달음이 있어서 가르쳐 줄 것입니다. 다섯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개인적인 욕구와 성향입니다. 아이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고 혐오하는 사람이 학교 교사를 직업으로 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섯째, 하나님은 때로 초자연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그 뜻을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기도 중 환상을 본다든지, 잊혀지지 않는 선명한 꿈을 꾼다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든지,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임한다든지 하는 때에는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많은 신앙인들이 일이 안 풀리고 답답할 때, "기도 받으러" 가자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이 대체로 한국 교회에 유행하는 통속적인 방법들입니다. 저는 통속적인 견해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이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위의 방법들은 모두 개인의 느낌에 의한 결정일 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없습니다. 느낌이 우리의 신앙에서 중요하기는 하지만 객관적인 근거가 없으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① 성경: 성경에 있는 많은 말씀 중 어떤 것이 과연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란 말입니까? 눈을 감고 무작정 성경의 한 곳을 짚어서 나오는 말씀이 나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아니겠지요. 읽다가 참 좋은 구절을 만나면 무릎을 탁 치면서,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주는 하나님의 뜻이겠거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믿을 만한 방법은 되지 못합니다. 어떤 구절에 눈이 가겠습니까? 나에게 복을 주신다는 말씀, 표현이 멋진 곳, 몇 주일 전에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강조하였던 본문, 작년에 읽다가 줄을 쳐 놓았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② 환경: 하나님이 그 환경을 통하여 나에게 뜻을 보여주시는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A자매와 세 번 만난 것은, A자매가 나를 좋아해서 만날 기회를 만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B자매와는 다섯 번 마주쳤는데, 더 예쁜 A자매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마주친 것만을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해석하는 것이요, 또한 심지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③ '성령의 내적 증거': 사실은 '성령의 내적 증거'(Internal Testimony of the Holy Spirit)라는 말은 이런 때에 쓰는 말은 아닙니다. 이 용어는 특수한 신학 용어로서, 성경이 믿을만한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 '증명'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주시는 확신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을 설명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뭐 어쨌든 사용해도 무방하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내 속에서 속삭이는 세미한 음성이 성령의 음성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마음의 '평안'을 통해 알 수 있다고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에 그 마음에 평안이 있었을까요, 번민이 있었을까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하나님이 속이는 분이라고 항변까지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까지 하지 않았던가요? 또 어떤 사람이 건축 헌금을 정하려 한다고 합시다. 가난한 사람이 무리하게 가진 돈 전부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 기쁨으로 인색함 없이 드리긴 하였습니다만, 그 마음에는 걱정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큰 것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는 마음 때문에 감사하지만, 기도를 끝내고 나면 후회하는 마음도 듭니다. 어떤 부자가 구제 헌금을 천 만원 할까, 십만 원 할까 고민하다가, 십만 원으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큰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일까요? ④ 영적 지도자와의 상담: 내 속에서 들리는 성령의 음성도 분간을 못하는데, 남에게 주어지는 것에 어떻게 신뢰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내 문제에 대하여 나만큼 절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영적 지도자들도 감정을 가진 분들입니다. 어떻게 그의 지도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⑤ 개인적인 욕구와 성향: 개인적인 성향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니면 성향을 거스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개인적인 성향을 따르자면, 새벽 기도회에 나올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낮은 문화권으로 선교하러 가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집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고 싶은 사람 없습니다. (그다지 예쁘지 않은) 신앙 좋은 자매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⑥ 초자연적이며 직접적인 '계시': 저는 하나님이 역사하는 방법을 제한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초자연적으로 일하시고, 그 뜻을 사람에게 알려 줄 수도 있습니다. 방언과 예언, 꿈과 환상도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보이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초자연적인 '계시'(신학에서는 보통 '조명' 이라는 용어를 쓰긴 합니다만...)도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 합니다(고전14:32). 초자연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과 섞여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그 자세한 과정은 후일로 미룹시다. 단지 초자연적이며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단이 나온다는 사실만을 기억하면 되겠습니다. 요약하면 통속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고 생각할 뿐이지,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통속적인 견해의 두 번째 오류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통속적인 견해는 하나님이 정해 미리 정해 놓은 길이 있는데, 이를 발견한 사람은 올바른 궤도에 올라선 것이고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탈선한 삶을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견해의 난점은 숙명론에 빠져 현재보다 과거에 매달린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①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의 경우: 어떤 사람은 자신이 과거에 선택한 길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음으로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힙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과거 자신이 소명 받았을 때, 사람의 방법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방법으로 신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과도하게 강조합니다. 이런 분들은 십중팔구 현재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비하지 못하고, 성도들 위에 군림하고, 목회를 게을리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이렇게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기 자신과 교인들에게 심어줌으로써 현재의 잘못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듭니다. 또 어떤 남자들은 아내를 무시하고 학대하면서도 아내를 붙들어 두는 수단으로서, 자신 부부가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뜻을 들이댑니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들이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확신'이라는 좋은 말을 붙이기는 아깝고, 고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고집 위에 하나님의 뜻을 얹음으로 해서 고집이 더 강화되는 아주 나쁜 경우가 되겠습니다. ② 우유부단한 사람의 경우: 세상에는 고집이 센 사람보다 성격이 우유부단해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통속적인 견해를 믿는다면,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길이 아니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 때문에 말입니다. 또한 결정을 일단 해 놓고서도 감사보다는 의심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 놓고 과연 바른 결정을 내린 것일까 생각하며 고민하느라고 사업을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일이 잘 안 되었을 때입니다. 한 일 년 장사를 하다가 안 되면(1년 투자해서 되는 장사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혼 3년 후 아내와의 사이에서 틈이 보이기 시작하면(결혼 3년 후 틈이 벌어지지 않는 부부가 어디 흔한가요?), '그 때 내 마음속에서는 이게 아니라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이 있었는데 그것을 무시한 내가 잘못이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이 이혼은 할 수 없고,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요. 이 둘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많은 피해를 줄 것 같습니까? 확신범이 우유부단한 사람보다 더 할 것이라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사람의 피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은 대다수의 경우 한 사람이 이 두 가지의 성향을 가집니다. 속으로는 의심하면서 겉으로 확신이 있는 체 하는 것이지요. 어쨌든 이런 식의 통속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보다는 과거에 얽매입니다.


2. 윤리주의적 견해

통속적 견해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돌이켜 봅시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뜻이 있어 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지요.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 바로 "하나님의 뜻"(Will of God)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의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될 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성경의 용법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입니다. 이 둘을 혼동함으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① 첫째, "하나님의 작정적 뜻"(Decretive Will of God)입니다. 칼빈주의의 교리 가운데 "신적 작정"(Divine Decrees)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어날 모든 일을 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흔히 '예정'(Predestination)이라고 말할 때는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신적 작정이 예정보다 범위가 큰 것입니다. 전능하고 지혜로우신 우주의 주권자가 우리 개인의 삶에 대한 계획을 포함하여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결정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심지어 악까지 포함하여) 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잠언16:33 말씀에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나 죄를 통하여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롬11:33-36) "아,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깊은 줄 몰랐습니다!"라고 말입니다. ② 둘째는 하나님의 규율적(Preceptive Will of God)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롬2:18) 등의 말씀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규율적 뜻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주기도문의 구절도 하나님의 규율적인 뜻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작정적인 뜻의 특징은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작정적인 뜻을 알아서 그에 대처한다는 말이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알건 모르건, 아니 아는 것과 모르는 것까지를 포함하여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또한 작정적 뜻은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속적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작정적인 뜻을 찾고자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찾을 필요도 없고, 찾아서도 안 되고,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알려 주지도 않습니다. 작정적 뜻은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 위하여, 일이 다 이루어진 후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개념일 뿐입니다. 그 대신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규율적인 뜻입니다.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만드시고 법을 제정하셔서 그 법에 따라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 객관적인 법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그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규율적인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윤리주의적 견해라고 이름 붙이겠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규율적인 뜻은 우리가 알고 순종할 수 있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 뜻은 우리의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물론 모든 객관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언급된 영역에 관하여는 그 규율적인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아무런 명령이나 원리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영역(윤리와 무관한 영역: 이를 '아디아포라'라고 부릅니다. 고린도전서 8장의 우상제물 같은 것 말입니다.)에서는 우리가 우리 행동을 선택할 자유와 책임이 있고 합니다. 하나님의 윤리적인 뜻 안에서 결정된 것은 어떤 것도 다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자유

규율적 뜻

저는 윤리주의적 견해가 옳다고 믿습니다. 이 견해가 개혁주의의 오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찾느라 애를 쓰는 것은 점쟁이나 지관(地官)의 숙명론적 철학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인격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다루시는 하나님입니다. 자매와 결혼할 것인가 B자매와 결혼할 것인가 고민할 때, 그 자매가 성경에 말한 대로 함께 멍에를 멜 만한 신자라고 하면 둘 중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택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이지요. 사업을 할 때에도 술을 파는 직업이라든가, 남의 돈을 거저 먹자는 직업이 아니면 자유롭게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로를 선택할 때에도 자신의 성품과 실력 등을 고려하여 지혜롭게 선택하면 되는 것이고, 일단 선택한 후에는 열심히 그것에 매진하면 됩니다. 죄를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한 선택인가 잘못한 선택인가를 염려하지 말고 열심히 삽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규율을 정해 주고 마음껏 선택하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적 뜻이 무엇인지를 걱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규율적 뜻을 분별하도록 애를 쓰자는 말입니다. 앞서 말한 통속적 견해가 우리의 느낌에 의하여 결정을 내린다면, 이 견해는 객관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는 순종하라고 합니다.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은 영역에 대하여는 우리의 자유에 맡겨져 있습니다. 이 견해를 취하게 되면 과거의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미래 지향적이 됩니다. 과거에 한번 선택을 잘 했다고 해서 그것이 평생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지금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규율적) 뜻이 무엇인가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께 헌신하고 주의 종이 되었다고 해서 평생 가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잘못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규율적인 뜻에 맞지 않는 결혼을 했다고 합시다. 즉 불신 남자와 결혼하였다는 말입니다. 살다 보니 잘못된 결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윤리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우선 이렇게 세속적인 남자를 주신 하나님의 작정적인 뜻이 있음을 감사하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하나님의 뜻인지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불신 남편을 나의 선행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 견해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느낌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규율적 뜻을 찾는 데 사용되는 방법은 앞서 말했던, 통속적 견해의 여섯 가지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도 보고, 환경도 고려하고, 상담도 하고, 개인적인 사정도 참작하고, 심지어 초자연적 '계시'에 의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도 역시 객관적인 하나님의 규율적 뜻에 비추어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21장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행동을 주의 깊게 보십시다. 그는 예루살렘에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하여 가려 합니다. 단순한 헌금 전달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교회간에 벌어진 골을 메우는 매우 중요한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무섭고도 위험한 길입니다. 예루살렘에는 그를 죽이려는 사람이 우글거립니다. 바울이 가이사랴 빌립 집사의 집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였습니다. 예언자로 정평이 나 있는 '아가보'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가지고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행21:11) 만일 이와 똑같은 일이 지금 벌어진다면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무슨 소리야? 성령이 이렇게까지 초자연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이 말을 안 믿으면 어떤 말을 들을 것인가?" 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행동은 우리 기대와는 다릅니다. 그는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 라고 대답하고는, 예루살렘으로의 길을 강행하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골을 메우는 것이 하나님의 (규율적인) 뜻이라고 분명히 믿은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보여 주신대로 그는 결박을 당하였고,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선택을 통하여 복음이 더욱 왕성하게 전파되었고,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사이의 오해가 풀렸습니다.


3. 윤리주의적 견해의 단점과 보충

저는 기본적으로는 윤리주의적 견해에 동의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규율적 뜻을 성경에 기록하였고,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따르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나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윤리주의적 견해에도 심각한 단점이 있어 이를 보충하려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찾기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첫째, 윤리주의적 견해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경에 명백히 나와 있는 규율이 과연 있을까요? "도적질하지 말라!" 명백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럴까요? 물론 남의 돈을 훔치는 행위의 경우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대 경제 사범의 경우 대부분 그 수법이 교묘하고, 도적질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을 때도 많습니다. 비상장 주식을 이용해 상속세를 물지 않고 자식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재벌은 자기 재산을 보호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국가의 재산을 도적질하는 것입니까? 무단으로 윈도우즈를 복제하는 사람이 도적질입니까, 아니면 윈도우즈에 익스플로러를 끼워 파는 것이 도적질입니까? 로또 복권을 사는 것이 요행을 바라는 죄입니까? 주식에 투자하는 것은요? 사실은 성경에 명백히 나와 있는 규율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각 개인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단순히 성경 한 두 구절 보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도 숙지하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좁게는 나의 특수한 상황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아디아포라'의 문제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만나는 문제들에서 모두 규율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성경에도 우상 제물의 문제에 대하여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물이라 해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질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므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다른 형제가 실족하게 되면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늘 윤리적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자유가 많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A자매를 택할 것인가 B자매를 택할 것인가? 둘 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잘 다니는 사람입니다. 윤리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둘 중 아무를 택하여도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과연 윤리적 선택이 아닌, 자유에 맡겨진 선택일까요? A자매는 아주 헌신적인 신앙을 가진 훈련된 자매입니다. 인간성 좋고 신앙의 체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쁘지 않고 학력이 다소 떨어집니다. B자매는 아버지가 안수집사요 어머니는 권사입니다. 어려서부터 곱게 자라났는데 청년부나 주일학교에서 봉사하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말이 많은 곳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면 수렁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신앙 좋은 형제가 이 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데, 이 선택이 과연 '아디아포라'의 문제일까요? (물론 모든 형제들이 외모나 학력과 같은 것을 보지 말고 신앙만 보고 아내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셋째, 윤리주의적 견해는 우리의 현실과 다소 동떨어져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죄를 짓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성도가 사업을 시작하려 합니다. 별 기술이 없는 사람이 적은 자본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고민합니다. 슈퍼마켓은 이미 이 동네에 많이 있습니다. 음식점을 열자니 술을 팔지 않으면 장사가 안 되어 곧 문을 닫을 것이 뻔합니다. 요즈음 잘 나가는 직종이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PC방을 하는 것이 어떤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PC방은 청소년들을 불러내어 밤을 새워 게임하고 놀게 하는 비교육적인 것입니다. 내 자식이 PC방에 가서 밤새우면 가슴이 아플 텐데 남의 자식 밤새우게 하며 돈을 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노래방이나 DVD방은 더 불건전한 사업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직종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유가 많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것들 중 최선(最善)을 택하는 고민이 아니라, 택하지 말아야 할 것들 중에서 차악(次惡)을 택해야 할 지경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으로는 윤리주의적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하긴 이 견해를 강하게 주장하는 개혁주의자들의 경우, 중산층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나 전문 신학교육을 받고, 외국에서 유학도 할 정도이니, 자유가 많이 주어져 있을 법도 합니다. 모든 개혁주의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하여 만들어 놓은 물질적 번영 위에서 자유를 구가하면서, 그 불운한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서 위선의 냄새가 납니다.


자유 규율적 뜻

규율적 뜻
자유


윤리주의적 견해의 단점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세상을 너무 쉽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을 하는 '나'의 순수함을 소박하게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기는 하지만 선택의 폭이 그렇게 넓지는 않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선택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그 선택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규율적인 뜻을 알아야 하니까 성경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해 못할 책이 아닙니다. 보통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 쉽게 읽고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도록 일상 언어로 쓰여졌습니다. 또한 우리의 현실적 상황도 알아야 하는데, 이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이니까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이런 것들을 다 안다고 하여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려는 마음을 제거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규율적 뜻을 찾기 위하여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윤리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별로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그 뜻대로 행하면 되고, 하나님의 뜻이 명백히 규정하고 있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는 자유롭게 행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복잡하고,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에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작정적 뜻을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주신 자유를 가지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규율적인 뜻을 찾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려는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