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상식 이야기!!

어떻게 성경을 읽을 것인가

하나님아들 2024. 7. 2. 19:16

어떻게 성경을 읽을 것인가

 

 

성경을 읽을 때 도움이 될만한 몇 가지 실제적인 제안을 드립니다.

 

1. 규칙적으로 읽는다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보통 하루에 세끼를 먹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은 얼마나 자주 먹을까요? 우리는 이런 말을 늘 듣곤 합니다. "오늘 너무 바빠서 밥 먹을 시간이 없어."

아마도 당신은 매일 성경을 읽기에는 시간이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위대한 복음전도자인 무디에게 이같은 변명을 늘어놓았더니 무디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친구여, 당신이 매일 성경을 읽지 못할 만큼 바쁘다면 전능하신 하느님보다 더 바쁜 셈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정해 놓으셨지요. 그러니 몇 가지 다른 일을 뒤로하고서라도 성경 읽을 시간을 확보해 두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 하루 중 특정한 시간을 할애해 놓는 것이 좋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침을 가장 좋은 시간대로 꼽는데, 이는 하루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은 저녁시간이나 하루 중 조용한 시간에 성경을 읽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성경 읽을 시간을 갖습니다. 어쨌든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시간대를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천천히 읽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말씀을 읽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 얼마가 당신의 마음에 들어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 장을 읽고서 그 내용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것보다 한 절을 읽어도 제대로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즉, 읽는 양이 조금이더라도 이해하면서 읽는 것이 서둘러 읽는 것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1코린14,19의 말씀을 준 사도 바오로 역시 수천 단어를 읽고도 아무런 얻는 것이 없는 것보다 다섯 마디를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며 보내는 35분의 시간보다 느긋하게 보내는 5분의 짧은 시간에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체계적으로 읽는다

성경을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 지 막막해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아무 데나 걸리는 대로 읽는"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주님, 오늘 읽어야 할 곳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나서 마음대로 성경을 펼치고서 아무 데나 읽기 시작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이런 방법을 통해 역사하실 수도 있지만 대개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여기 "아무 데나 읽는" 방법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 예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이 방법을 사용한 한 사람의 얘기입니다. 이 사람이 성경을 펼쳐들자 먼저 잡힌 곳은 마태27,5인데, 여기에는 가리옷 유다가 "떠나가서 목을 매단" 사건이 있었습니다. 과연 이것을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은 이 남자는 성경을 닫고 다시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루카10,37에는 예수님께서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는 매우 당황해 했습니다. 어떻게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다시 성경을 열어보았습니다. 이제 그의 손가락은 막 떨립니다. 그런데 이번에 펼친 요한13,27 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네가 하려는 것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방법은 독자로 하여금 문맥과 전혀 상관없이 성경을 읽게 만들므로 성경을 이상하게 이해하도록 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보통 처음부터 읽기 시작하여 결말에 이릅니다. 저자가 그런 순서로 썼기에 읽을 때도 그렇게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편지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쓴 사도 바오로는 처음에 13장을 쓰고 그 다음 8장을 쓰고 하는 순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장부터 시작하여 2장, 3장 차례대로 기록하였습니다. 기록이 이렇다면 읽는 것도 이런 순으로 이루어져야하지 않을까요?

성경 통독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많은 믿는 이들이 성경 통독에서 오는 커다란 축복을 누렸습니다. 성경 통독을 돕기 위해 '성경 읽기표'라는 것이 나와있습니다. 하루에 30분씩 1년이면 대부분 성경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 읽기표'는 하루에 얼마를 읽어야 할 지 보여줍니다.

3. 유심히 읽는다.

단어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냥 슬쩍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중요한 것을 찾고 있는 탐정처럼 되십시오. 종종 우리는 눈앞에 있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놓쳐버리곤 합니다. 그리고 눈은 성경에 가 있지만 마음은 딴 곳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늘 이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면 어떨까요? "방금 내가 뭘 읽었지?"

4. 탐구정신을 갖고 읽는다

성경을 읽을 때 늘 이같은 질문을 품고 계십시오. 누구의 기록(말)인가? 대상은 누구인가? 주제는 무엇인가? 각 대명사("그" "그녀" "그들" "그것" "너희"등)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외에도 구절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순종해야할 명령이 있는가?

믿음을 요하는 약속이 있는가?

따를 만한 모범이 있는가?

피해야할 죄가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가?

사람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가?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은 없는가?

이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 말씀이 실제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마티슨(J.G. Mathieson)은 주일마다 복음의 말씀을 듣는 한 소년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그 소년이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자기 방에 가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머니는 위층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고 자기 아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너무 조용하다 싶어 어머니는 아이가 무슨 엉뚱한 장난을 치고 있지 않나 해서 소년을 불렀습니다. "뭐하고 있니?" 그러나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나자로를 살리는 장면을 보고 있어요!"

소년은 요한복음 11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읽기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마치 자신이 그 기적의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꼈던 것입니다. 말씀이 모두 그에게는 실제와 같았습니다.

5.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약혼한 몸으로 그 약혼자는 지금 수마일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약혼자가 보낸 편지를 받아보는 순간 그녀가 어떻게 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편함에 편지가 도착하자마자 얼른 뜯어 열어봅니다. 그리고 단 숨에 편지를 읽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또 읽습니다. 이번엔 아주 천천히. 단어 하나 하나를 떠올리며, 그가 쓴 문장들을 되씹어 봅니다. "그이가 왜 이 말을 썼을까?" 편지를 다 읽은 다음에도 그녀는 편지의 대부분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온 종일 그 편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성경도 이같이 읽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보내신 하느님의 사랑의 편지가 아닙니까?

6.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당신을 가르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읽기 전에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시편 119,18은 그런 기도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것은 지각을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2 디모테오 2,7).

성경을 읽는 것은 영적인 연습의 시작입니다. 이제 나가서 읽은 진리대로 실천하는 것만이 남았습니다. 챕만(J. Wilbur Chapman)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몇 가지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꾸준히 공부하라 - 성경 한 구절을 읽고 익힌 다음 하루를 시작하라.

마음판에 새기도록 기도하라 - 공부한 말씀이 당신의 일부가 되기 전에는 성경을 놓지 말라

써놓아라 -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내용을 성경의 여백이나 공책에 적으라.

실천하라 - 아침마다 받은 진리에 따라 살라.

전하라 -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부지런히 말해주어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늘 당신의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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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1장. 서론. 해석의 필요성.
 
성경은 평범한 사람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데, 오히려 설교자들이나 교사들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는 것을 어렵고, 모호하게 만들 때도 있다. 물론 성경은 모호한 책이 아니다. 성경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성경에 나타나는 수많은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이다. 그것은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또 좋은 해석의 목표는 독특함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만함이나 신령함에 대한 잘못된 이해나, 편향적인 관심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특한 해석들은 잘못된 것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른 해석이 지향하는 목표는 '본문의 명확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와 함께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식이다.

그러나 명확한 의미를 얻는 것이 해석의 전부라면, 어째서 해석을 하려고 하는가?
단지 읽기만 하면 안되는가? 이 질문은 독자의 본질과 성경의 본질이라는 두 가지 문제 때문에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독자도 해석 자이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배워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싫든 좋든 모든 독자는 동시에 해석 자가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읽은 것을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이해한 것이 성경의 저자의 의도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선입관 등 때문에 - 물론 고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 우리는 엉뚱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예)십자가 - †가 아니라 'T'자 형이었을 것이다.
예)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 육신이라는 말은 '육체적인 욕망'을 의미하지 않고, 죄악된 본성을 지칭한다.

또 성경을 읽는 독자는 이미 해석에 동참한다는 사실이다. 번역 그 자체가 해석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번역자들은 언어상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점을 충분히 고려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모든 '명확한 의미'가 모두에게 똑같이 명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전14:34-35을 근거로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동일한 문맥에서 나오는 방언과 예언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고전11:2-16에 근거하여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기도하고 예언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할 때에는 반드시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간에 인정할 수 있는 이런 견해들 외에도 온갖 이상한 이론들이 성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요한삼서 1장 2절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의 명확한 뜻이 '금전적이며, 물질적인 번영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실제적인 의미와 전혀 반대되는 내용을 명확한 의미라고 하고, 더구나 그 해석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도대체 명확한 의미를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석이 필요없이 그냥 읽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역시 무리이다.
그러므로 상식적인 지침에 근거한 건전한 해석을 해야만 한다.
이 책은 각 장르에 본래적으로 있는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 독자들이 감각을 높여 주며, 또한 어째서 다른 견해들이 나타나는지, 상식적인 판단은 어떻게 하는지를 알게 하며, 특별히 건전한 해석과 불건전한 해석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며, 어떤 해석을 건전하게 혹은 불건전하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려는 것일 뿐이다.

성경의 본질.
해석이 필요한 의미 심장한 이유는 바로 성경 자체의 본질에 있다. 성경은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인 것이다. 성경의 이러한 이중적인 성격 때문에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영원한 타당성을 지닌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또한 순종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은 역사 속의 인간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말씀을 하기로 하셨기에, 성경의 각 책들은 또한 역사적 특수성을 갖는다. 즉 각 책들은 그것이 본래 기록된 어어와 시간과 문화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 이처럼 성경의 영원한 타당성과 그 역사적 특수성이 서로 '긴장'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하나님이 인간의 실제적인 역사의 맥락 속에서 말씀하시기로 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바로 그 동일한 말씀이 교회의 전역사를 통해서 해 온 것처럼 우리들 자신의 '실제적인'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성경에 인간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동시에, 우리에게 도전을 주며, 또한 해석을 해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2가지 사항을 주지해야 한다.
1)근 1500년에 걸쳐서 여러 다양한 상황에 처했던 실존 인물들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들의 어휘나 사고방식을 통해서 표현되며, 또 그 시대의 문화와 당시의 상황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려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해서나 사건을 통해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시대적으로, 사상적으로도 그들과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실이 성경을 해석하기를 배워야 하는 주된 이유다.
이렇게 해서 독자들은 두가지 점에서 해석의 과제에 연루된다.
첫째. 과거에 그들이 들었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둘째. 그 동일한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듣기를 배워야 한다.

2)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모든 인간적인 상황들에 맞게 전달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전달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적절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에 적용되는 일반 법칙을 알아야 하고, 각각의 문학양식(쟝르)에 적용되는 특별 법칙도 배워 두어야 한다.

첫 번째 과제 : 석의.
해석자의 첫 번째 과제는 석의라고 불리운다. 석의란 본래의 의도된 의미를 찾는 신중하고도 조직적인 성경 연구 방법이다. 이 과제는 기본적으로 역사적인 과제이다.
하나님 말씀을 그 말씀의 본래 처음 들었던 자들이 들은 바대로 듣고, 그리하여 성경 말씀의 본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밝히는 일이다.

1. 모든 사람들이 때때로 석의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고, 또한 그런 석의가 아주 건전한 것일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 본문과 현대의 문화적 상황 사이에 확실한 괴리가 있을 경우에만, 석의적 방법을 사용하는 경향이 짙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석의는 모든 본문을 읽을 때에 첫 번째로 거처야 할 단계이다. 석의적으로 사고하게 하게되면, 본문에 대한 이해력이 풍부해지고, 따라서 굳이 성경연구까지는 언급하지 않아도 성경 읽기에 있어서만이라도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첫단계에 불과하다.
살전 5:22(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은 예언에 관해서 하는 말이다. 즉 예언을 시험해 보아서 그것이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면, 그 예언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 본문을 통해 의도하시는 바와 전혀 다른 의미를 그 본문에 부여하는 행위는 그 본문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을 악용하고 있다.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석의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즉 모든 분문에 있어서 과거 그 당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2) 처음부터 '전문가'에게 의뢰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 더 나은 자료를 참조하고 사용해야 한다.

석의의 방법.
어떻게 하면 오류를 범하지 않고, 건전한 석의를 할 수 있는가?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이 없더라도, 우리는 건전한 석의를 할 수 있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첫째,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야 하고, 둘째, 다른 사람들의 자료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건전한 석의의 비결은, 본문을 주의 깊게 읽는 것과 본문에 대한 바른 질문을 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모든 성경 구절에서 반드시 해야 할 질문에는 기본적으로 2가지가 있다.
즉 문맥에 대한 질문과 내용에 대한 질문이다. 다시 문맥에 대한 질문에는 역사적인 질문과 문학적인 질문 두가지가 있다.

역사적 문맥.
역사적 문맥은 책마다 달라지는 것으로 여러 가지 요인과 관련을 맺는다. 저자와 당대 독자들의 시대와 문화와 배경 등이다. 이런 모든 문제가 그 본문을 이해하는 데 특별히 중요하다.

역사적 문맥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성경의 각 책과, 그 책들의 각 부분들의 배경과 목적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스라엘 혹은 교회 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그러한 책이 나오게 되었는가? 또 저자가 어떤 상황에 있었기에 그런 책을 기록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 등은 중요한 탐구 영역이다.

문학적 문맥.
문학적 문맥이란 본질적으로 단어는 문장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성경의 문장의 경우, 대부분이 앞 뒤 문장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모든 문장과 단락에 대해 우리가 늘 묻고, 또한 반복해서 계속 물어야 할 문맥상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주제가 무엇이냐?'이다.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왜 여기서 그 말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언제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석의의 목표는 원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과제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운문과 단락을 잘 알아볼 수 있는 번역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용의 문제.
내용은 단어들의 의미와 문장의 문법적인 관계, 그리고 사본에 따라 진술하는 바가 다를 경우, 원본을 택하는 문제 등과 관련을 맺는다. 고후5:16에서 바울은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라는 말씀을 하였는데, 여기서 '육체대로'란 누구를 꾸미는 말인가? 그리스도인가?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인가?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더 이상 그리스도를 '세상적인 안목으로' 알지 않는다는 말이다.

석의를 위한 참고서들.

두 번째 과제 : 해석학.
해석학이란 보통 석의를 포함해서 해석의 전 분야를 통틀어 지칭하는 것이지만, 고대의 본문에 대한 현대적 타당성을 찾는 것을 뜻하는 좁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우리가 성경을 접하게 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 처한 '지금 여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우리의 경건한 묵상을 올바로 이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절한 '해석학'은 반드시 든든한 '석의'와 함께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 연구에서 '지금 여기'의 문제부터 출발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해석학이 성경 본문 자체의 본래의 의미에 의해서 철저하게 통제를 받는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본문의 '명확한 의미'이다.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라, 객관적인 해석의 원리에 따라 본문의 의미가 결정되어야 한다.

또 우리를 향한 성경 본문의 참된 의미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처음 말씀하셨을 때에 본래 의도하셨던 바의 의미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출발점이다.

제2장. 기본 참고서 - 좋은 번역 성경.
성경 66권은 원래 2가지 언어로 기록된 것이다. 히브리어(구약의 대부분)와 아람어(히브리어와 동족어로서 다니엘서의 절반과 에스라서 몇 장에서 사용됨), 그리고 헬라어(신약 전체)이다.

번역본으로 읽는다는 것은 곧 그 독자가 이미 해석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번역본으로 읽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피할 수 없는 일일 뿐이다. 그런데 번역본이 올바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릇된 것일 수도 있다.

첫째, 정말로 좋은 번역 성경이라면, 그 번역 성경 하나를 주로 사용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고자 할 때에는 적어도 서너가지의 역본들을 잘 선택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역본들을 선택하며, 또 선택해 놓은 서너가지 역본들 중에 어떤 역본을 중심으로 연구해야 할까?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이렇다, 저렇다 확실히 답변해 줄 수가 없다.

정말로 좋은 역본을 신중하기 잘 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번역학을 알아야 한다.

번역학에 관하여.
번역자는 번역할 때 반드시 두가지 문제에 대해 취사 선택을 하여야만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은 원문에 관한 문제와 언어에 관한 문제이다.
원문에 관한 문제란 원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과 관련된 문제이고, 언어에 관한 문제란 곧 번역자의 번역 이론과 관련된 문제이다.

원문의 문제.
1) 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2) 현존하는 것은 다만 수천 가지의 사본들로서 모두 손으로 쓴 것이며 또한 대략 1400년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손으로 베껴 쓴 것이다.
3) 필사본들은 대부분이 서로 매우 흡사하지만, 후기의 필사본들은 초기의 사본 및 역본들과 적잖이 다르다.
사실 신약에 대한 헬라어 필사본은 5천 가지 이상이나 있는데, 그 중에 어느 하나도 다른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용 가능한 자료들을 골라내어서 필사본들끼리 서로 다른 부분들을 비교하여 과연 어느 문장이 실수를 한 것이고, 또 어느 문장이 원문을 잘 반영한 것인지를 결정지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본문 비평이다. 여기서는 본문 비평에 대한 몇가지 기초사항만 아는 것이 좋을 것 같고, 또 성경 난외주에 종종 나타나는 '다른 고대의 문헌에는 ... 이 추가되어 있다' 또 '어떤 필사본에는 ... 없다' 등의 문구의 의미를 좀더 잘 이해하도록 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이 장의 목적상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다음 3가지이다.
1. 본문 비평은 매우 신중하게 행해지는 학문이다. 번역자는 원문을 결정할 때 반드시 두가지 증거를 고려한다. 외적 증거(필사본의 성격과 질에 관한 증거)와 내적 증거(필사자가 범한 실수의 종류에 관한 증거)이다.
강한 외적 증거와 강한 내적 증거가 함께 나타나면 대부분의 경우, 원문을 쉽게 결정할 수 있다는데 동의한다.

2. 본문 비평은 하나의 학문이지만, 정확한 학문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변수들을 너무도 많이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요지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3. 흠정역(KJV)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역본일 뿐 아니라, 영어권의 고전에 속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약의 경우, 1611년 KJV 번역자들은 천여년에 걸친 필사의 과정에서 생긴 오류들을 집성해 놓은 후대의 헬라어 사본들을 근거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용 가능한 사본이라고는 그런 것들밖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오류들 가운데 교리적인 차이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특정한 본문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차이를 가져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연구를 위해서라면 흠정역보다는 기타의 다른 현대의 번역들을 사용해야 한다.

언어의 문제.
번역이란 곧 단어들과 관념들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원어 : 번역의 대상이 되는 언어로서 우리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아람어 또는 헬라어가 여기에 해당된다.
수용 언어 : 번역하고자 하는 언어, 즉 번역의 결과로서 만들어지는 작품의 언어로서 우리의 경우에는 한국어나 영어가 이에 해당한다.
역사적 간격 : 원어와 수용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지칭. 여기에는 문화와 역사의 차이는 물론 단어나 문법, 숙어 등의 차이도 포함된다.
번역 이론 : 두 언어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번역자가 추구하는 변형의 정도에 관한 것이다.
문자적 번역 : 원어의 단어나 어구를 가능한 한 그대로 지키면서 번역하되 수용 언어에서도 의미를 잃지 않도록 하는 번역, 문자적인 번역은 모든 면에서 역사적인 간격을 고스란히 그대로 남겨 둔다.
자유 번역 : 원어의 단어를 그대로 나타내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덜 기울인다. 가능하한 역사적 간격을 없애고자 한다.
역동적 대응 번역 : 원어의 단어나 숙어, 문법적 구문들을 수용 언어의 정확한 대응어로 번역하고자 하는 시도, 이 번역은 역사적인 문제와 대부분의 사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적 간격을 그대로 남겨두되, 언어나 문법 또는 문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가장 좋은 번역 이론은 역시 역동적 대응 번역이다.

제3장. 서신서 - 문맥에 따른 사고.
서신서는 비교적 해석이 용이하다. 그러나 해석이 용이하다는 점이 오히려 큰 함정이 될 수도 있다. 특히 해석학의 문제에서 더욱 그러하다. 고전 5장에서 악한 자를 내어 쫓으라는 바울의 말씀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가?
이처럼 서신서는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면서도 아주 중요한 해석학적인 문제들을 수없이 야기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신서에 대한 논의를 가장 먼저 해 둠으로써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제기할 석의와 해석학의 문제들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 삼고자 한다.

서신서의 본질.
서선서 전체에 해당되는 일반적인 사항을 몇가지 이야기해보자.
1)서신서 자체는 도무 동질의 것이 아니다. 아돌프 다이스만은 편지와 서신을 구분하였다. 편지는 수신할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만을 위해 씌어졌다. 반면 서신은 예술적인 문학의 한 형태로 일반 회중을 대상으로 한다.
이런 구분은 타당하다. 로마서와 빌레몬서는 내용 뿐 아니라, 대상에 있어서도 서로 판이하게 다르다.
이런 구분의 타당성은 고대 편지들의 형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신약 편지들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①발신인의 이름(예컨대, 바울)
②수신인의 이름(예컨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③인사(예컨대,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④기도와 감사(내가 항상 ... 감사하노니 등).
⑤본문
⑥끝인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있을지어다 등)

이 형식 가운데 가변적인 것은 4번 기도와 감사의 부분이다.

야고보서와 베드로후서는 모두 편지 형식으로 씌어졌지만, 모두 마지막 인사가 없으며, 또한 특정한 수신인에 대한 언급과 저자의 개인적인 소재도 없다. 수신인이 언급되지만 매우 추상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것이야 말로, 신약의 서신서들 가운데 가장 '서신' - 전교회를 대상으로 쓴 회람용 글 - 에 가깝다. 그러나 벧후의 경우, 사적인 편지의 경우처럼 씌어진 동기가 있다(3:1-7).

이처럼 서신서들의 성격이 각양 각색이지만, 서신의 전체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곧 서신서는 모두 특정한 일 때문에 씌어졌고, 또한 그 일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문서라는 사실과, 또한 A.D. 1세기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서신들의 특정한 일을 배경으로 한 면(occasional nature)은 아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서신들은 독자편의 상황이든, 저자편의 상황이든,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 그것을 근거로 씌어졌다. 신약의 서신서는 대부분은 독자들의 상황에서 기록되어졌다. 보통 그 상황이란 시정해 주어야 할 어떤 행위가 있었다든지, 교리적인 실수가 있었다든지, 좀더 깊은 가르침을 요할 만큼 잘못된 인식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또 한가지, 서신서는 신학적인 논리 전개를 주목적으로 기록된 신학적인 논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신학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신학은 언제나 '과제 신학'이다. 즉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혹은 그러한 과제 때문에 기록되고 있는 그러한 신학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고자 계속해서 서신서를 찾는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서신들의 목적이 기독교 신학을 진술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서신서의 신학은 특정한 필요의 충족을 위해 생긴 것이다.

중요한 예비적 상황을 알았으므로, 서신서에 대한 석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린도전서를 본보기로 살펴보자.

역사적 문맥.
서신서를 대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상황을 가상적으로, 그러면서도 근거 있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고린도에 어떤 상황이 있었기에 바울이 고전을 기록하게 되었을까?
이런 유의 질문을 해결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성경 사전이나 주석의 서론 부분에서 고린도라는 도시와 그 주민들에 대한 사항들을 가능한 많이 찾아내는 것이다.
둘째. 특별히 연구를 위해서는 서신 전체를 단번에 완독하는 습관을 기를 필요가 있다.
읽으면서 각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먼저 필요한 것은 거시적인 안목이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똑바로 뜨고서 읽고 또 읽으라.
서신 전체를 통독하는 동안 간단한 참고 사항을 메모해 두면 아주 도움이 된다.
그러면 어떤 것을 메모해야 할까?
①수신자들에 대해 눈에 띄는 내용. 예컨대, 그들이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등.
②바울의 태도에 대한 언급.
③편지의 배경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것.
④편지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논리적인 내용 구분.

배경을 이루는 것에 대한 피상적인 것에서 이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의 상황들의 정확한 성격을 알아보아야 한다.

서신서의 소단락들을 연구할 때에도 지금까지 해온 방식을 대체로 반복하는 것이 좋다.
매 과목마다 독자들이 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고린도전서를 최소한 2회 통독하라(읽을 때마다 다른 번역본을 사용하면 더욱 좋다).이 때 고전의 대강의 줄거리, 전체적인 주제에 대한 '대상'을 잡으라.
②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수신자와 그들이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으면 모두 기록하라.
③바울의 회신의 주제를 암시해 주는 주요 낱말이나 반복되는 문구들도 기록해 놓으라.

문학적인 문맥.
다음 단계는 바울의 논증을 앞에서 가상적으로 세운 문제점들에 대한 해답으로 생각하고서 그것을 추적해 나가는 일이다.

문단을 단순히 사상 전개상 자연스럽게 나뉘어지는 하나의 단위로서가 아니라, 전체의 줄거리를 이해하는 절대적인 필수 요소로서 인식하고서 그 문단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계속 해 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두가지 사항에 착안점을 두는 것이 좋다.
①각 문단의 내용을 간단히 진술하고서 거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물어본다.
②바울이 왜 바로 거기서 그 말씀을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한 두 문장으로 설명해 보자. 그리고, 그 문단이 전체의 내용의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다음 사항을 주의하자. ⓐ요점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을 떠나서는 안된다. ⓑ줄거리에 맞지 않는 내용은 본문에 없다. ⓒ이 모든 사실은 모든 책에 그대로 적용된다.

문제 구절들.
1)본문들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그 본문이 직접 우리들을 위해 씌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라는 바울의 말이나 "저로 하여금 .....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라는 말씀을 대할 때에(살후2:5-6),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족하기를 배울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반드시 알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둘 수는 있지만, 그것이 확실하지 않으므로 그것에 대한 독단은 피해야 한다.
2)그러나 어떤 세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완전한 이해를 할 수 없을 경우에도, 그 전체의 구절의 요점은 여전히 파악할 수가 있다.
3)어떤 정확한 세부 사실에 대해서 분명치 않은 것이 있을 때에도, 우리는 그 본문에 대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확실치 않아도 가능한 해석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를 배워야 한다.
고전15:29을 예로 들어보자.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여기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일부는 실제로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고 있었다. 더욱이 바울은 그들의 행위를 책망하지도 용인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그 사실을 언급하기만 하였다.
이는 그런 행위 자체를 문제 삼기 위해서 그것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행한 사람이 누군지, 누구를 위해 그 일을 행했는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는 결코, 영원히 알 수 없다.
4)그런 구절에 대해서는 좋은 주석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좋은 주석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구절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5)학자들이라도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완벽하게 주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살핀 여러 본문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살펴보자.

제 4 장. 서신서-해석학적인 문제.
해석학적 문제는 과연 이 본문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더 어렵다. 석의적인 문제는 비록 어떤 특정한 점들에 대해 의견들이 일치되지 않는 면이 있지만, 최소한 본문의 의미를 결정 짓는 요인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해석학의 경우,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결정 요인들이 존재하는 것 같지가 않다. 모든 사람이 다 해석학을 시행하고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제기되는 주요 논제는 문화적 상대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어떤 것이 문화적인 문제여서 1세기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어떤 것이 문화를 초월하는 문제여서 시대를 넘어 서서 온 인류에게 해당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통상적인 해석학.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언제나 해석학에 연루되어 있다.
즉 좀 개화된 우리의 상식을 본문에 접목시켜서 그것을 할 수 있는대로 우리의 상황에 적용시킨다. 그리고, 적용할 수 없을 듯이 보이는 것은 그저 A.D.1세기에 해당되는 말씀으로 간주해 버린다.
예를 들어, 딤후4:13에서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들 중에서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서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드로아까지 가야 한다고 느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환난에 처할 때에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는 똑같은 서신에 있는 말씀(딤후2:3)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본문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그 본문을 그대로 지켜야 하느냐 아니면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나게하여 서로서로를 일깨우느냐'(벧후1:13) 하는 것이 더욱 문제가 된다.
즉 난제는 위의 두 본문들의 중간에 해당되는 그런 유의 본문들이다. 이런 본문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없고, 따라서 특정한 본문들만을 선호하거나, 혹은 '회피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관성있는 해석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지침들이 필요한가?

기본 법칙.
어떤 본문은 그 본문의 저자나 그의 첫독자들에게 의미하지 않는 바를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석의가 우선이 된다. 이 법칙은 본문이 의미할 수 없는 바를 규정하는 한계를 설정하는 데에는 반드시 도움을 준다.

예)고전13:10절(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온전한 것이 신약 성경이라는 형태로 이미 왔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하던 것(예언과 방언)은 교회에서 그 기능이 이미 정지된 것이라는 해석.
그러나 이 해석은 본문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런 의미로 그 말씀을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의 첫 독자들은 신약성경이라는 것이 생겨날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바울로 하여금 그 독자들이 전혀 깨달을 수 없는 그런 내용을 쓰도록 허락하셨을 리는 더더욱 없다.

두 번째 법칙.
우리의 처지(즉 삶의 정황)가 1세기의 정황과 유사할 때에는 언제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1세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모두 지금까지 불변하는 진리이다.

확대 적용의 문제.
오늘날의 교회에 유사한 정황이나 비슷한 사정이 있을 경우, 본문의 적용을 오늘날의 다른 사정에로 확대하는 것이 합당한가? 아니면 본문을 1세기의 정황과 전혀 다른 오늘날의 사정에 곧바로 적용시키는 것이 합당한가?
여기에는 명백한 석의가 따라야 한다.
..(정리 곤란)
..

유사성이 없는 특수 상황의 문제.
20세기에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1세기만의 문제를 다루는 본문과, 또한 어쩌면 20세기에도 일어날 수 있으나, 그럴 가능성이 희박한 그런 문제를 다루는 본문이 그것이다.
그런 본문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에서 적절한 해석학은 다음과 같은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 특별히 조심스럽게 석의를 함으로써 그들(A.D.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대개 확실한 하나의 원리가 도출되는데, 그 원리는 역사적 특수성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둘째, 그 원리는 아직 어떠한 상황에라도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마구 적용할 수 있을 만큼 무시간적인 것이 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반드시 참으로 유사한 상황에 적용해야만 한다.

예1) 바울은 '거치는 것'의 원리를 근거로 우상 축제에 참예하여 먹고 마시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여기의 '거치는 것'이 단순히 다른 신자들을 실족케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치는 것'의 원리란 한 신자가 자신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능히 행할 수 있다고 느끼는 그 무엇에 대해서 자신의 행동으로나 말로 하는 부추김으로, 선한 양심으로 그런 일을 도무지 행할 수 없는 다른 신자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만드는 그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원리는 참으로 유사한 상황에만 적용시킬 수 있다.
예2)바울은 우상의 축제에 참예하여 먹고 마시는 일을 절대적으로 금하고 있다. 그것은 곧 귀신에 참예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형태의 심령술, 사술, 점성술 등을 금하게 하는 하나의 규범적인 금령인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사도가 없지만,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9:14)는 원리가 오늘날의 교역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원리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확실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이처럼 무시해 버릴 문제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를 어떻게 서로 구별하느냐 하는 것이다.
곧 문화에 따라서 변하고, 기독교 집단들에 따라서 달라지는 그런 것을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가? 과연 무시해 버릴 문제는 어떤 것들인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시할 수 있다.
①서신서에서 확실하게 무시할 문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 곧, 먹는 것, 마시는 것, 날을 지키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②무시할 문제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다 - 종교적인 문화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므로 문화에 따라서 변하는 경향이 있는 문제들은 보통 무시할 문제로 여길 수 있다.
③서신서에 기록된 죄의 목록들에는 위에 열거한 내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무시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제시한 사항에 대해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과시해서는 안되며, 그런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 확신을 갖고서 행하는 사람 역시 그 문제로 남을 비방해서는 안된다.

문화적인 상대성의 문제.
①서신서들은 특별한 사정을 배경으로 한 A.D. 1세기의 문서로서 1세기 교회의 특정한 상황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1세기의 언어와 문화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
②서신서에 나타나는 많은 특정한 상황들은 1세기의 정황에 철저하게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개별적으로 현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되는 일이 거의 또는 전혀 없음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③그 밖의 본문들 역시 1세기의 정황에 철저하게 제한을 받으나, 그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그러나 유사한 정황에로 옮아갈 수도 있다.
④그러므로, 또 다른 본문들 역시 1세기의 정황에 의해 제한을 받으면서 새로운 정황에로 옮아가거나 그냥 그대로 1세기의 정황 속에 남아있거나 하는 일은 가능하다.

문화들은 사실상 서로 다른 것이다. 비단 1세기와 20세기의 문화만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20세기 문화 자체 안에서도 상당히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문화적 상대성을 배경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그 점을 인정하는 것이 정당한 해석학적 과정이며,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서신서의 성격을 보아서도 불가피한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동시에, 해석학이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인정할 만한 지침 이내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사항과 그 본래의 정황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규범이 되는 사항을 구별하는 지침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1)먼저 성경의 중심이 되는 핵심적인 메시지와 그것에 종속되거나 그 주변에 해당되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따라서 인류의 타락성, 그리스도의 죽음이나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활동인 구속,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그 구속 사역의 완성 등은 분명히 핵심에 속하는 내용이다.

2)신약성경 자체가 본래적으로 도덕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항과 그렇지 않은 사항을 구별하여야 한다. 본래적으로 도덕적인 사항들은 절대적이며, 모든 문화에 다 해당된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도덕적이지 않은 사항들은 문화적인 표현에 속하며, 문화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죄에 대한 바울의 목록에는 결코 문화적인 사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발 씻는 문제, 거룩한 입맞춤을 나누는 것, 시장터의 우상 제물을 먹는 일, 여자가 기도나 예언할 때에 머리에 쓰는 일, 바울이 개인적으로 독신을 선호한 사실, 또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 등은 본래적으로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다. 이 문제들은 다만 그 특정한 정황 가운데서 행하거나 악용되어서(불순종이나, 사랑의 결핍에 오는 것을 경우) 도덕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 뿐이다.

3)신약 성경 자체가 시종 일관성 있는 증거를 하는 사항과 좀 다르게 증거하는 사항을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통일된 증거를 보여주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처신으로서의 사랑, 보복하지 않는 개인 윤리, 싸움, 증오, 모든 종류의 성적 부도덕 등의 그릇됨.
반면,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은 일관성 있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교회에서의 여자의 사역(롬16:1-2, 롬16:7, 롬16:3, 고전14;34-35, 딤전2:12). 로마에 대한 정치적인 평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 등.

4)신약성경 내에서 원리와 특정적인 적용 내용을 서로 분간하는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신약성경 기자에게는 어떤 절대적인 원리로써 어떤 상대적인 적용 내용을 뒷받침하며, 그러면서도 그 적용 내용을 절대화시키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5)할 수 있는 대로, 성경 기자들이 선택한 문화적 상황을 신중하게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단 하나밖에는 선택할 여지가 없는 그런 문화적 상황에 대해 신약성경 기자가 동의하는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런 입장이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를 들면, 동성애에 대해 신약성경은 반대라는 하나의 입장만을 취한다.
노예 제도나 여자의 지위나 역할에 대해서 고대의 저작자들 어느 누구도 노예제도를 악한 것으로 보거나, 여자가 근본적으로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기자들 역시 노예제도를 악한 것으로 비난하지 않았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자기들이 당시의 주도적인 문화적 태도를 반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주위 세계의 유일한 문화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6)1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20세기 교회에서의 여자의 역할에 대해서 결정하자면, 1세기에는 여자들이 교육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이 롬13:1-7에서 논하는 국가도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악법이 고쳐지고, 악한 관리가 축출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7)마지막으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다운 관용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차이점들을 인정하고 서로서로 의사를 소통하여야 하며, 어떤 원리를 규정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당면 과제 중심의 신학의 문제.
당시의 정황을 근거로하고 있는 서신서의 성격 때문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유의 사항들을 제시하자.
1)서신서가 당시의 정황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신학적인 이해에 몇가지 제약이 생기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경우도 있다.
예)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 형제가 재판을 받기 위하여 이방인의 법정에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세상과 천사를 판단하게 되리라고 말씀한다(고전6:2-3). 본문에는 이 이상의 설명이 없다.
그래서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그 일이 어떻게 실행될지 전혀 모른다.

고전10:16-17절. 거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자신의 주의 만찬에 참예하였음을 근거로, 그들이 우상의 집에서 음식 먹는 일에 참예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변론한다.
그렇다면 '참예'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로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들 모두는 알고 싶어하지만, 우리들의 지식은 그 진술이 당시의 정황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본문 그 자체가 드러내는 바를 넘어서는 해석이 확실한 석의를 근거한 해석과 동등한 성경적 또는 해석학적 가치를 지닐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 속에 주셨지만, 반드싱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따름이다.

2)서신서의 본분들은 정황을 근거로 한 것이어서 오로지 당시의 사람들의 문제에만 답변해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들에게 특수한 문제를 그 본문들에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때로 그 본문이 답변해 줄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우리들의 문제(예, 낙태, 재혼, 유아 세례 등)는 그 당시에는 제기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곧 창조의 타락, 구속, 그리고 마지막 완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포함한 전체적인 성경적 신학을 근거로 하는 것뿐이다.
즉 일종의 성경적인 세계관을 그 문제에 적용시켜 보는 일이다.

제5장 구약의 설화들 - 그 적절한 사용.
성경에는 설화(이야기, 역사 서술)들이 많다. 구약의 40%가 설화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이 성경 전체 부피의 3/4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성경 전체에서 가장 흔한 문학 형태가 바로 설화라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께서는 성경의 그렇게 많은 부분을 설화의 형태로 영감하셨을 때에 분명히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으리라는 사실을 전제로 삼는다. 설화체가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에 잘 어울린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설화의 본질.
설화란 무엇인가?
설화는 곧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설화라는 낱말이 더 좋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지어낸 어떤 것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고, 또 이야기는 등장 인물도 구성도 단순한 단 하나의 이야기를 뜻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야기라 불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사실이며,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가끔 복잡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 형태의 이 위대한 신적 이야기의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설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경의 설화는 일어난 사실을 다루지만, 일어난 모든 사실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설화들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세계에서, 또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데 있다. 설화들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우리로 하여금 그를 깨닫고 인식하도록 도와주며, 또한 그의 섭리와 보호하심의 면면을 보게 해 준다.

설화의 세가지 차원.
구약의 설화는 세가지 차원에서 씌어지고 있다.
고급 설화 - 창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전우주적인 계획을 다룬다. 주요 구성들은 창조 자체, 인간의 타락, 죄의 능력과 편재, 구속의 필요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희생이다.
중급 설화 - 주로 이스라엘에 관심을 둔다.
하급 설화 - 수백가지의 개별적인 설화. 이것들이 모여서 다른 두 종류의 설화(고급과 중급)를 구성한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했다는 설화 등이 이에 속한다.

예수님은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7-39)라고 가르치셨다. 이때 그는 구약 성경의 개개의 모든 구절을 다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메시야적이거나 아니면 달리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인정된 그러한 개개의 구절들 - 설화까지 포함해서 - 은 구약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체 계시의 아주 적은 분량만을 차지한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바로 궁극적인 고급의 설화를 염두에 두고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 설화는 곧 예수의 속죄가 중심 활동이 되며, 절정을 이룬다. 이렇게 해서 주께서는 성경이 전체적으로 자신을 증거하며, 그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되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개별 설화를 모두 그 자체로서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가장 완전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지막으로 그 개별 설화 하나하나를 보다 큰 문맥 속에서 보는 일이 수반되어야 한다.

설화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
1.구약의 설화를 단순히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만 생각함. 그러나 구약의 설화는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보여주는 첫 이야기들이며,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성경은 신적인 설화들로 구성되어있다.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설화에서 '최고의 주인공'이시오, 결정적인 인물이 되신다.
2.구약의 설화들을 숨은 의미가 가득한 풍유나 이야기로 생각함. 잘못된 생각이다. 설화는 어떤 주어진 문제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모두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설화는 그 초점이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일의 전체적인 면모 중 단지 한 부분만을 보여 줄 따름이다. 그러므로 호기심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 찾을 수 있고, 의미를 부과하여 읽게 되고, 결국은 역사적인 기술에 불과한 내용을 풍유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3.구약의 설화는 반드시 직접적으로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관념.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설화는 율법적인 부분이나 교리적인 부분들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본성과 계시를 강조해 준다.
설화는 우리로 하여금 사건과 경험들을 통하여 대신 살아보도록 해 준다. 구약의 설화의 진행을 따라가노라면, 그 설화 속의 인물이 아무리 독자들과 거리가 멀고, 또한 그들의 처한 환경이 아무리 다르다 할지라도, 이야기를 읽을 때에 늘 그렇게 되듯이 그 속에 대신 자동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책의 독자가 그리스도인인 이상, 구약성경은 여러분의 영적 역사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은 곧 여러분을 향한 역사적 약속과 부르심이다.

구약의 설화는 직접적으로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다른 곳에서 직접적으로 또한 단언적으로 교훈한 내용을 실제적인 예로써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일종의 암시적인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다는 설화에는 '다윗이 간음의 잘못을 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설화는 간음이 다윗 왕 개인의 삶과 그의 통치력에 얼마나 해악을 끼쳤는지를 실례를 보여 줄 따름이다.
다윗의 간음은 하나의 특정한 경우에 발생한 간음의 효과를 보여주는 한가지 사례이다. 이런 사례를 통해 독자들의 마음에 단단히 새겨질 수 있는 아주 강한 메시지를 준다.

4.각각의 개별 설화나 에피소드가 전부 그 나름대로의 교훈을 담고 있다는 관념. 그러나 마치 모든 사건과 묘사가 독자들에게 각각 특별한 메시지를 주는 것으로 설화를 분산시켜서 해석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긴 설화에서조차도 그 설화의 모든 부분 부분들이 함께 협력하여 독자들에게 한 가지 주요 사항에 대해 인상을 심어 줄 수가 있다.
설화 속에 나타난 자료 하나하나에서, 또는 매 사건에서 어떤 의의를 찾으려는 시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설화를 하나하나 해부하지 말고, 하나의 전체적인 통일체로서 평가해야 한다.

설화의 해석을 위한 원리들.
설화들을 석의하고자 할 때마다 명백한 해석상의 오류를 피하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10가지 원리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①구약의 설화는 직접적으로 어떤 교의(교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②구약의 설화는 다른 곳에서 명시적으로 교훈한 어떤 교의나 교의들을 실례들로써 제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③설화는 일어난 일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일어났어야 할 일을, 또는 어느 때든 일어나야만 하는 일을 반드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모든 설화가 거기에서 진술하는 사건들과 동일한 것을 교훈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④설화 속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행동이 반드시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도 많다.
⑤구약의 설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며, 그들의 행동 또한 그러하다.
⑥설화의 끝머리에 가서 그 설화에서 되어진 일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하는 언급이 반드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들 스스로 하나님이 이미 성경에서 직설적으로 단언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을 근거로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⑦설화는 모두가 다 선별적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필요한 구체적인 내용이 반드시 모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화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영감된 저자가 우리에게 알려진 만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 것들이다.
⑧설화는 우리의 모든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답변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다. 설화는 제각기 특정한 구체적인 제한된 목적을 갖고서 특정한 문제들을 다룬다. 그밖의 문제들을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지도록 내버려 둔다.
⑨설화는 명시적으로(무엇을 분명히 진술함으로써) 가르칠 수도 있고, 또는 암시적으로(실제로 진술하지는 않으면서도 분명히 무엇을 암시해 주는 식, 이야기 속에 분명히 내재하고 있으면서도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은 그런 가르침) 가르칠 수도 있다.
⑩마지막으로, 성경의 모든 설화의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설화 해석의 예.
요셉 설화.
요셉의 설화에서 주인공이 누구이며, 이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하나님이 바로 주인공이시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다는 것이 교훈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요셉의 됨됨이나 그가 행한 어떤 것을 찾아내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요셉처럼 복을 받기 위해서는 그런 것을 그대로 모방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 설화는 그런 것을 교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설화의 내용은 하나님이 도저히 격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사람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행하셨는가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요셉 설화 전체를 구성하는 작은 설화들의 여러 가지 상세한 내용들은 사실상 요셉이 날 때부터 지닌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도, 그의 행동에서 모범이 될 만한 어떤 것을 지적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 자체가 제시하는 한 가지 교훈,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이외의 다른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심지어 형제들이 요셉에게 품었던 악의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었다.
요셉의 삶의 양식이나, 그의 인격이나 그의 행동 등은 일반적인 도덕적 원리들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어떤 것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다.

요셉 자신도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요셉 설화의 모든 사람들을 보다 큰 목적을 위하여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초점은 하나님께 있다. 그는 자신이 뜻하시는 바를 성취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그의 가족과 바로 등 전혀 격에 어울리지 않는 매개체를 이용하사 많은 백성들을 보존하시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나의 특별한 백성을 창조하기 시작하신다.

룻의 설화.
룻의 설화에서는 암시적인 내용들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믿음으로 회심하였음을 보여준다.
룻이 회심하였다고 말하지 않지만, '(룻1:16) .....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룻의 고백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2)룻 설화는 보아스는 많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모세의 율법을 지켰던 의로운 이스라엘 사람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2:3-13, 3:10-12, 4:9-10.
보아스는 레위기 19:9-10에서 명한 대로 이삭을 남겨두라는 율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리고 레위기 25:23-24에서 명한 대로 기업을 무르는 일에 대한 율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는 사실.
3)이 설화는 이 이야기가 다윗 왕의 혈통의 배경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롯은 다윗의 증조 할머니이고 예수님의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닌가! 이 점은 룻 설화 전체의 교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4)룻 설화는 베들레헴이 그 거민들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사사시대에 아주 예외적인 성읍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말해준다. 그 증거는 2:22을 빼고 모든 구절에 다 나타난다.
2;22은 이삭을 남겨두라는 율법을 모든 베들레헴 사람들이 다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 아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큰 환란을 당할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나, 그녀는 여호와의 뜻을 깨달으며 그 뜻에 순종한다. 또 보아스는 여호와를 섬기며 그를 따르는 자다운 그의 말과, 그 말을 확증시켜 주는 행동들을 보여 줌으로써 자신의 참다운 면모를 시종일관 드러내고 있다.

5)저자가 영감을 받아 중요한 사건들을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1:6, 4:13).
설화는 실제로 그 어느 곳에서도 '베들레헴은 그 때에 그 경건함이 뛰어난 성읍이었다'고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설화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것(베들레헴은 그 때에 그 경건함이 뛰어난 성읍이었다)는 것이다.

경고.
암시적인 것이 비밀스러운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암시적이란 비록 여러 말로 진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거기 진술된 내용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설화가 실제로 말해주는 직, 간접적인 내용 전부를 우리 것으로 하는 것이다.

몇가지 주의 사항.
사람들이 성경 설화 속에서 거기에 있지도 않은 것들을 찾아내는 일이 - 하나님께서 알려 주고자 하시는 것을 성경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관념을 가지고 성경을 파헤쳐 들어가는 일이 - 그렇게도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주된 이유는 3가지이다.
1)그들은 어떤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2)참을성이 없다는 것이다.
3)성경의 모든 내용이 그들 자신의 개별적인 삶에 대한 교훈으로 곧바로 적용된다는 그릇된 기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하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답변들이 언제나 그 책에 다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경 전체에서 찾지를 않기 때문에 실수를 범하게 된다.

여기에 보통 범하기 쉬운 6가지의 해석상의 오류를 열거하고자 한다.
①풍유화 : 명확한 의미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본문을 단순히 그 본문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의미를 반영하는 것으로만 취급해 버리는 것. 성경의 풍유들이 단순히 설화 형태로만 되어 있는 경우는 없다.
②탈문맥화 : 전체적인 역사적 문학적 문맥을 때로는 개별 설화까지도 무시하고, 작은 부분들에만 주의를 집중시켜서 결국 해석의 실마리들을 놓치는 것.
③선별성 : 탈문맥화와 유사한 것으로서, 특정한 단어나 어구를 취사 선택하여 그것들에 대해서만 주의를 집중시키고 다른 것들을 무시하며, 또 전체적인 흐름도 무시하는 것이다.
④잘못된 연결 : 구절 자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결된 것에서 어떤 내용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⑤재정의 : 본문의 확실한 의미를 다시 새롭게 정의하여 무언가 다른 의미를 가진 것처럼 만들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⑥정경 이외의 권위에 의존함 : 성경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외적인 자료를 사용함으로써 성경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 성경을 특별한 지식이 있어야 풀 수 있는 일종의 수수께끼의 집합과 유사한 것으로 취급.

설화를 읽고 교훈을 얻는 문제에 대해서 가장 유용한 한가지 충고가 있다면, '본대로 무엇이나 그대로 따라 하는 원숭이와 같은 성경 독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의 설화는 직접 우리들에 대해서 다루는 설화가 아니다. 설화로부터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지만, 하나님이 성경의 인물들이 행한 일들을 여러분이 그대로 행하기를 기대하신다거나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똑같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것을 생각하신다거나 하는 식의 생각은 결코 가져서는 안된다.

독자가 할 일은 성경에서 행해진 모든 일을 그대로 행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관한 설화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이다.
설화가 우리에게 귀중한 것은 그것들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관여하심을 그렇게 생생하게 증거해 주며, 또한 하나님의 원리들과 명령을 그렇게도 뚜렷이 실례로써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화는 개인의 윤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제시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제6장. 사도행전 - 역사적 선례의 문제.
구약의 설화들을 읽을 때 우리는 도덕적인 교훈을 얻거나 풍유화시키거나 또는 본문 이면에 숨겨진 뜻을 알려고 하는 등등의 경향이 있다.
또 구약의 설화들이 우리들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의 성경적인 선례가 된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을 때에는 거의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하나의 성경적 선례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된다.
즉 행전은 단순히 초대교회의 역사를 말씀하는 것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들에 대하여 규범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본다.
바로 이 점이 행전이 안고 있는 해석학적 난점이다.
대개의 복음주의자들은 행전의 교회를 회복해야 할 표준으로, 이상으로 가르친다.

사실, 교회 안에서 수많은 분파가 생기게 된 것도 행전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석학적인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언을 동반한 성령 세례, 재판을 팔아 모든 물건을 공유하는 행위, 등이 행전을 근거로하여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온 것이다.

사도행전의 석의.
사도행전은 읽기에는 좋은 책이지만, 그룹 성경 공부를 하기에는 힘든 책이다. 이유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을 대하고 공부를 하게 되는 이유가 저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대한 특별한 저마다의 관심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 책을 읽고 공부할 때에 그 내용들을 상당히 취사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독자들이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읽고 공부하도록 도와주고, 누가의 관심사를 통해서 그 책을 보도록 도와 주며, 또한 여러분이 읽어가면서 갖게 될 몇가지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고자 한다.

역사로서의 사도행전.
헬라의 역사는 단순히 기록을 보존하거나 혹은 과거의 연대를 기록해 두기 위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역사는 사기를 진작시키고 즐기려는(즉, 좋은 독서감이 되게 하려는) 목적을 위해서, 또한 사실을 알리고 교훈을 주고, 때로는 변증을 하기 위해서도 기록되었다.
누가의 두 권의 책(누가복음과 사도행전)도 이런 유의 역사와 잘 부합된다. 그 책들은 특별히 읽기에 좋다.
그러나 행전의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와 같은 순전히 역사적인 문제만 석의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는 과연 어떤 목적으로 그 자료를 이런 식으로 선별하고 구성해 놓았는가와 같은 신학적인 문제도 포함된다.

누가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그 문제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해석학에 결정적인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가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하여 하나의 패턴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갖고서 행전을 기록했다면, 그 패턴은 반드시 규범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학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누가의 의도나 목적은 해석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행전을 읽고 석의를 해 나갈 때에 언제나 이 문제를 염두에 두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

첫단계.
책 전체를 한 번에 통독해 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읽어가면서 관찰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습득하라.
⑴한 번 또는 두 번 사도행전을 통독하라. ⑵읽으면서 주요 인물과 장소, 계속 반복되는 주제(누가가 참으로 관심 둔 것이 무엇인지?), 그 책의 자연스러운 구분 등에 대해 주목하라. ⑶이제 다시 처음부터 대충 읽으면서 앞에서 관찰한 사항들을 간략하게 메모하여 참고하도록 하라. ⑷누가가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라.

사도행전의 개관.
먼저 행전의 자연스러운 구분들을 살펴보자. 행전은 베드로(1-12장)와 바울(13-28장)으로 나누거나 복음의 지리적인 확장(1-7장, 예루살렘;8-10장, 사마리아와 유다;11-28장, 땅끝)으로 구분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행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가 자신이 제시한 또 하나의 해결방법이 있다.
그것이 전체 내용을 더 잘 연결시켜 주는 것 같다.
①(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②(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③(행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④(행16:4)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행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⑤(행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야기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될 때마다 이런 요약적인 진술들을 하고 있다. 이런 실마리를 근거로 해서 살펴보면, 행전은 6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①1:1-6:7.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에 대한 묘사로, 초기의 복음 전파와 일상적인 삶의 모습, 교회의 확장과 그에 대한 최초의 반대 등을 그리고 있다. 이 부분이 얼마나 유대적인지를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신자와 아람어를 사용하는 신자들간의 분열이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②6:8-9:31. 헬라파 사람들(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또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최초의 복음의 지리적인 확장에 대하여 묘사한다. 바울의 회심을 말하는데, 그는 ⑴헬라파 사람이었고 ⑵유대인 반대자였고 ⑶특별히 이방에 대한 복음과 확장을 담당한 사람이었다.
스데반의 순교가 이 최초 복음 확장에 열쇠가 된다.
③9:32-12:24. 최초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확장된 사실에 대한 묘사. 열쇠는 고넬료의 회심. 고넬료 회심의 의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인정받는 지도자였던 베드로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였다는 점. 안디옥 교회의 이야기가 포함, 거기서는 이방인의 회심이 이제는 의도적으로 헬라파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④12:25-16:5. 바울이 지도적 위치를 담당한다. 복음이 이방인들까지 포용하게 되었으므로 유대인들이 복음을 공공연히 배척하게 된다.
⑤16:6-19:20. 복음이 서방의 이방 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 복음이 유럽으로까지 확장된다.
⑥19:21-28:30. 바울과 복음을 로마로 가게 하는 사건들에 대한 묘사로, 특별히 바울의 재판 과정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는데, 그 재판에서 바울은 3번이나 무죄한 것으로 선포된다.

여기에 결정적인 요인이 빠졌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매 주요 전환점마다 매 주요 인물마다 성령께서 절대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누가에 의하면, 이런 진행은 모두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뜻을 두셨고, 성령께서 그 뜻을 이루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누가의 목적.
1.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열쇠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처음 유대교에 근거한 예루살렘 중심의 상황으로부터 이방인을 중심한 전세계적인 확장에로 진행해 나간다는 사실에 대해 누가가 관심을 가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2.누가는 복음의 진행에 관심이 있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사람의 생애, 즉 사도들의 전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야고보의 최후에 대해서만 기록하였다. 이방으로 복음이 퍼자게 되면 베드로로 전면에서 사라져버린다.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다. 바울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만, 이는 다분히 이방 선교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 누가는 교회의 조직이나 형태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관심이 없다. 행6장의 일곱 사람에 대해서도 집사라고 부르지 않으며, 더욱이 그들이 곧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교회들이 어떤 형태로, 누구의 지도를 받아 어떻게 조직되었는지에 대해 그저 '장로들을 택했다'(14:23)는 말만 할 뿐, 그 이상의 언급은 전혀 하지 않는다.
셋째.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의 한 방면 외에는 다른 지리적인 확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레데, 본도, 갑바도기아, 비두니아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으며,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남쪽으로 애굽으로 교회가 확장된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다. 이는 누가의 사도행전 기록 목적이 단순히 교회 역사 자체를 기록하는 데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님을 말해준다.
3.누가는 어떤 일들을 규격화시키는 일, 즉 모든 일을 획일화시키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개별적인 회심 사건들을 다룰 때, 보통 두가지 요소를 첨가시키곤 하였다. 곧 물 세례와 성령의 강림이다. 그러나 이 두 요소의 순서가 때로는 바뀌기도 하고, 방언에 대한 언급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회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점도 나타나기도 한다.
또 누가는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행했던 것과 유사한 공동체적인 생활을 그대로 따랐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고, 암시도 하지 않는다.
이같은 다양성은 어떤 특정한 초대교회의 실례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나 교회 생활에 규범적인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는 그의 첫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이다.
4. 그럼에도 우리는 사도행전의 많은 부분들이 누가에 의해서 하나의 모델로 제시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모델은 어떤 특정한 사항들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면모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누가를 통하여 행전을 기록하게 하신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활기있게, 승리를 거두면서 앞으로 뻗어 나감으로써 사람이 변화되고 지역 사회가 변화되는 사실이 곧 그 이후 계속 이어지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어떠한 것, 즉 산헤드린이나 회당, 편협한 마음, 감옥도 음모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석의의 한 가지 실례.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부분을 읽어서 그 직접적인 전후의 문맥을 살피는 것이다. 서신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문맥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설화 또는 설교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 부분은 사도행전의 설화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누가가 이 부분을 설화에 포함시킨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먼저 6:1-7을 살펴보자.
이 단락은 전체적인 흐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이에 대해 2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이 단락은 사도행전의 첫부분(1:1-6:7)을 결론 짓는 역할을 한다.
둘째. 이 단락은 둘째 부분(6:8-9:31)으로 옮아가는 하나의 전환의 역할을 한다.

또 이 부분은 공동체 내의 첫 갈등에 대해서도 암시를 주고 있다.
당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1)헬라파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 즉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와서 현재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이다.
2)그런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만년에 시온산에서 죽어 거기에 묻히고 싶어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토박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죽게 되면 그 미망인들은 삶을 영위할 수단이 끊어지게 되어 있었다.
3)이 과부들은 매일매일 구호품을 받아 생활했는데, 그 구호품을 주는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경제가 아주 압박을 받게 되었다.
4)6:9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헬라어를 사용하는 회당을 갖고 있었고, 그 회당에 스데반과 다소(헬라어를 사용하는 길리기아에 위치함, 9절)에서 온 사울이 소속되어 있었음이 분명히 나타난다.
5)초대교회가 이 회당 내로 상당히 잠식해 들어가 있었음이 6장에 나타난다. 자기의 과부들이라고 하는 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택된 7사람의 이름이 모두 헬라어식이라는 사실과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강한 반대가 나왔다는 사실.
6)7사람을 집사라고 부른 적은 없다. 그들은 그저 '일곱 사람'(21:8, 개역에는 '집사'로 되어 있지만, 다른 역에는 '사람'으로 되어있다)이라고만 불리워지며, 헬라어를 사용하는 과부들을 위한 매일매일의 구호사업을 감독하는 직무를 맡는 자들이었고, 동시에 말씀의 사역자들(스데반, 빌립)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6:8-8:1에 보면, 그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예루살렘 밖으로 복음을 확장시키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부각시키고 있다.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가 그런 복음의 확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8:1-4).

그러므로 행6:1-7의 설화는 우리들에게 초대교회가 어떻게 성직자와 평신도 집사들을 조직하게 되었는지를 알리려는 데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이 구절은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하였던 교회의 첫 확장의 계기가 된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8:5-25.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첫 번 파급으로 알려진 실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여기서 설화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설화를 여러분 자신의 말로 기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음은 우리가 관찰한 것을 요약한 것이다.
8:5-25의 이야기는 차서있게 진행된다.
*여기서 빌립의 최초 사마리아 사역에 대한 보고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 들린 자들을 낫게 하는 기사가 부수적으로 실려있다(8:5-7).
*사마리아인들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런 기이한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게 되었고, 그때에 비로소 사마리아인들은 성령을 받게 되었다(8:14-17).

여기서 누가의 관심은 2가지이다.
-사마리아인들의 회심과 시몬 사건이다.
사마리아의 회심에 대해 두가지 사실들이 그에게는 의미심장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복음의 첫 번째 지역적 확장인 사마리아 선교가 사도들의 계획이나 프로그램과 상관없이 헬라파 중 한 사람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과 (2)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독자들이 사마리아 선교가 신적 승인과 사도적 승인을 모두 받은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을 위해 누가는 성령 강림을 사도들이 안수할 때까지 보류해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실은 비록 그것이 교회 성장에 대한 사도의 회의를 거치지 않고 일어난 것이긴 해도, 헬라인들의 선교 사역은 사도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이단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누가의 전체 의도와 일치한다.

이런 해석을 하는 이유는 3가지이다.
①베드로와 요한이 당도하기 전에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설명된 모든 것들이 사도행전 다른 속에서 초신자들의 경험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도 실은 기독교인의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②사도행전의 다른 곳에서도 여기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임재가 기독교인 생활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그렇다면, 이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없이 그들이 과연 어떻게 기독교인의 삶을 시작할 수가 있었을까?
③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성령의 임재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1:8, 6:8, 10:38). 그 임재는 종종 어떤 가시적 증거로 명시된다. 그러므로, 누가가 성령의 '임함', 또는 성령을 '받음'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 성령 임재의 이러한 능력적, 가시적 현시가 사마리아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설화에서 시몬의 역할이 복잡하다. 시몬이 초대교회의 박해자로 널리 알려졌다는 증거는 경외전에서 풍부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누가는 시몬과 기독교 공동체간의 미묘한 관계를 설명하여, 그의 독자들에게 시몬은 신적인 또한 사도적 승인도 받지 않은 인물임을 알리기 위하여 이 자료를 포함시켰음 직하다.
누가의 전체 설화는 시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베드로의 말은 누가가 시몬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에 내린 판단을 반영한다. 그것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누가의 설화를 석의함에 있어, 그 내용이 무엇이며, 무슨 까닭에 이것을 기록하였는지를 탐구한다는 것이 경건적인 면에 흥미를 가지고 성경을 읽는 분들에게는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작업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절히 경청하기 위해 마땅히 내딛어야 할 첫걸음인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해석.
행전은 초대교회를 묘사해 줄 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친 교회에 규범을 제시하는 말씀도 포함하고 있는가? 만일 그러한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일반적인 원리들.
여기서 핵심적인 해석학적 문제는 곧 초대교회에 일어난 것을 설명하는 성경의 설화들은 또한 앞으로 올 교회에 반드시 일어날 것을 묘사하는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사도행전의 여러 예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하여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든지 또는 '우리가 이것을 해도 될까'라고 의견을 타진해야만 할 어떤 규범적인 예들이 과연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주장은 이렇다.
성경이 우리가 어떤 것을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명백하게 서술하지 않는 한 단순히 기술되었거나 묘사된 것은 결코 규범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통상적으로, 성경에서 인출해 낸 교리적 서술은 다음의 세가지 유형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1)기독교 신학(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2)기독교 윤리학(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3)기독교 경험 또는 실천신학(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하는가?).
이런 유형들은 다시 두 종류의 진술들로 구별된다. 그것은 원초적인 진술과 부차적인 진술이다.
원초적인 진술은 성경의 분명한 명제들 또는 명령들로부터 유추한 교리적 진술들이 있고, 부차적인 진술에는 단지 부수적으로 암시나 선례에 의해 유추한 진술들이 있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감되었다는 것이 원초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영감의 세부적인 특성은 부차적이다. 부차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부차적 진술이 지닌 궁극적인 신학적 가치는, 그 진술이 원초적 진술과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인들이 선례라는 명목으로 성경에서 유추해 내는 거의 모든 것은 바로 우리가 제시한 세 번째 유형인 기독교 경험 또는 실천신학 분야에 속하는 것이며, 언제나 부차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성만찬은 교회 내에서 계속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행사이다. 그것은 원초적인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그것을 명하셨고, 바울서신과 행전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성만찬 준수의 횟수나 그것을 실행한 장소는 다르며, 이것은 전통과 선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단지 그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명하지 않고 있다.
세례의 필요성은 원초적이나 그 양태는 부수적이다.

이런 논의와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서 의도성에 대한 문제가 있다.
단지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해석학의 일반 원칙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이렇다고 분명히 의도된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히 역사적 설화를 해설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되는 문제이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전체 의도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누가는 예루살렘에 거점을 둔, 유대주의 본위의 유대인 신자들에게 그 기원을 둔 교회 어떠한 연유로 범세계적 현상인 주로 이방인들의 교회로 부각되었는지, 또한 성령께서 이 보편적인 구원 현상을 어떻게 은혜에만 기초를 두면서 주도하시고 계신지를 보여 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성령의 능력을 받은 교회의 이와 같은 전진 운동을 저지할 수 없다}는 반복된 주제를 보면서 우리는 누가가 그의 독자들에게도 이러한 것이 그들 실존의 모델로 간주하기를 의도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누가의 전체적인 의도를 간파하는 데 도움을 줄 목적으로만 제시된 설화 내의 세부적인 사항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세부 사항들도 동일한 교훈을 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가? 이것들도 설화의 모델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러한 세부 사항들은 설화의 주요 요점에 부수되는 것들이라는 사실과 설화마다 그 세부 사항들이 불명료하다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면 행6:1-7은 누가의 전체 구조에서 행전의 첫부분의 결론이요, 동시에 헬라인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게된다. 또 이 구절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일고 있던 첫 번째 긴장 관계를 어떻게 평화적으로 해결하였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행6:1-7에서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교회 내의 소수 그룹을 돕기 위한 최선의 방안은 그들로 하여금 직접 선출한 지도자를 갖게 하는 것 등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누가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누가가 이 설화를 기록할 당시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고 우리가 믿을 만한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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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누가복은10:25-28, 고린도전서10:1-12, 갈라디아서3:15-16, 4:24

 

―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10:26

 

신앙생활의 기준이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에 근거하여 소위 신앙의 행위들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성경」이라는 답을 못할 기독교인들은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알았고 성경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을, 기도와 예배를, 봉사와 구제를 알았다.

성령이 계시다는 것도,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신다는 것도 성경에 근거해서 아는 것이지 꿈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만으로 아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계시도 성경을 통하여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간음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간음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계시를 통하여 간음하지 말라고 일러주신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과연 무엇이라고 하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하고 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가 참 하나님과 예수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가 그 단어의 모습이 같다고「참」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당위성이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발생하게 되는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성경은 하나인데 그것을 보는 인간은 수십억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들(심지어 보수정통교단에서 이단이라고 하는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들까지도) 이 성경을 통하여 신앙생활의 근거와 기준을 삼는다고 말들은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천지차이가 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천년 전에도 같은 문제였다.

즉 바리새인도 성경(구약)을 가지고 그 기준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했고 예수그리스도께서도 그 성경의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하셨는데 왜 서로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났으며 결국 그것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 왜 발생하게 되는 것인가? 심지어 사탄도 성경을 인용하여(마4:6) 예수를 시험하는데‥‥ 그러면 사탄이 인용한 말씀도 성경말씀일 수 있는가?

 

 

종교개혁을 선도한 마르틴 루터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외침대로 오늘의 기독교는 과연 성경 위에 서 있는가? 그것도 예수나 바울이 생각하고 말씀하던 그 성경인가? 아니면 바리새인이나 사탄을 인용하던 그 성경인가?

 

 

무조건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에 급급할 일이 아니라 나의 기도와 예배가「예수의 성경」혹은「바울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것들인가 아니면「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성경」이 주장하는 기도와 예배인가를 먼저 앉아 생각해 보아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았다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적 기도와 서기관적 예배를「했다」는 것을 책망하시기 때문이다.(롬10:1-3)

 

 

문제는 하나밖에 없는 성경이 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정통이란 것은 무엇이고 소위 이단이란 것은 무엇인가?

결코 이단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성경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소위 정통이라고 하는 교단이나 교파에 대하여「틀렸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보기에 이단인 셈이다.

내가 천주교에「먼저」나갔기 때문에 천주교가 정통이고 나머지는 다 이단인가? 내가 장로교 서적을「먼저」봤기 때문에 장로교는 정통이고 나머지는 이단인가? 과연 성경의 기준으로 판단하는가 아니면 천주교나 장로교,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스스로들 가지고 있는 교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가. 우리는 다분히 자기가 먼저 소속된 곳이 맞다 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아니 그러기를 바란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먼저 본 시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할 수는 없는가?

마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정통적, 전통적 성경 관이 틀렸던 것처럼‥‥.

성경 관이 틀리면 그 틀린 눈의 기준으로 아무리 신앙의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헛수고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구의 관(觀)이 맞는가? 누구의 눈이 올바른가?

손으로 일하기 전에 발로 걷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갈 것인가부터 올바르게 보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고 있는 곳이 과연 성경 적인지‥?

 

그런 면에서 우리 믿음의 주(主)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는 성경을 어떻게 봤으며 신약성경의 태반을 기록한 바울은 그 점을 어떻게 생각했나를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1.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

본문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다. 그런데 그 답변이 평서문으로 끝나지 않고 의문문으로 끝나느냐하는 점이다.

사실 질문을 한 사람은 율법사로서 율법을 환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요 그 율법을 온전히 행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했던 것인데 예수는 율법에 기록되어있는「이러이러한 것들」을 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대답치 않고 도리어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는 반문으로 대답을 대신하신다.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가? 그런데 너는 그것을「어떻게」읽느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읽느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율법사가 보고 있는 율법에 대한 시각을 책망하는 말씀인 것이다.

율법은 분명히 율법이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읽더라도 율법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율법을「어떻게」읽느냐는 질문이 가당한 질문인가?

만일 우리더러 “당신은 성경을 어떻게 읽습니까”물어 온다면 우리는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소리 내어 읽습니다” 할 것인가 아니면 “영어로 읽습니다”할 것인가?

 

 

율법은 분명히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주 예수를 믿으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또 기독교인들 중에 본문의 율법사처럼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이것을 모르면서 기독교인이라면 그는 간첩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는 왜 그처럼 다 아는 사실을 “너는 그것을「어떻게」읽느냐”고 되 질문을 하시는가?

질문하시는 이유는 간단하다.

즉 그것을 읽는 방법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진다는 말씀이다.

소리 내어 읽느냐, 영어로 읽느냐 의 방법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시각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말씀이다.

 

과연 그런가?

본문의 율법사는 율법이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가에 가히 일백 점을 받을 만 하였다. 적어도 그 답변을 예수께서 옳다고 인정하셨으니까….

그러면 그 율법사가 그 율법의 내용대로 마음, 뜻, 목숨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했던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살았다면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예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할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예수의 시각으로는 그 율법사는 율법을 행치 못했고 그래서 죽어있다는 진단이다.

평신도도 아닌 대 율법사를 향하여 이런 진단을 내린 것은 율법사가 비록 율법에 무엇이 기록되어있는가를 정확히 말했지마는(사실 율법사 역시 자기가 읽는 율법을 따라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는가?

 

이것이 문제다.

자기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고(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생각하고 열심히 이런저런 사랑을 했는데 그「이웃」이란 성경이 말하는 즉 예수께서 옳다고 인정하는「이웃」이 아니라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일 것인가?

이것이 바로 "너는「이웃」을「어떻게」읽느냐"는 질문이 필요한 이유이다.

 

여기서 다룰 문제는 아니나, 독자여러분은 과연「이웃」이 누구라고 생각하시는가?

이웃사랑하기를 내 몸처럼 했느냐 아니했느냐를 논하기 전에 내 이웃이 누구인가부터 알아야한다. 그래야 헛수고를 안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웃이 누구인지는 다 안다고 생각하고 얼마나 사랑했느냐만 따지는 것이다. 착각이다.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오늘날 우리를 향한 질문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사랑이 없이도 자기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심지어 몸을 던져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만용(蠻勇)으로 신앙생활 할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보신 이웃에 대한 시각을 소개한다기보다는 성경을 보는 시각이 이처럼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선에서 그칠까 한다.

 

2.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1)

 

지금부터는 구약을 보는 사도바울의 시각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도바울이 자신의 글을 통하여 구약을 인용하며 설명할 때 그는 구약을「어떻게」읽었었던가?

「바울」과「사울」의 차이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결국「구약성경」을 읽는 시각의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나 마음에 있어서는 사울이었을 때나 바울이었을 때나 전혀 차이가 없다. 즉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께 대한 마음과 열심히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과 열심히 곧 신앙이라고는 할 수 없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결국 다메섹도상에서 사울이 하나님을 만나고 달라진 점은 바울이라는 이름과 구약을 보는 눈밖에 없다. 전에는 바리새인적 눈으로 구약을 보다가 이제는 그리스도적 눈으로 구약을 본다는 점뿐이다.(이것을 성경은 계시라고 한다. 즉 바울이 그렇게 본 것은 계시로 말미암아서이다.)

 

 

고린도전서10장을 통하여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출애굽역사(이것은 역사적 사실〈史實〉이다)에 등장하는 홍해며 「만나」며 바위덩어리를 보는 사도바울의 시각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 받은 것으로,

 

「만나」를 신령한( 프뉴마티콘: 영적인) 양식으로,

 

반석을 그리스도로 설명하고 있는데

 

과연 이런 역사적 사실(史實)을 이렇게 영적으로 해석해도 괜찮은가?

사도바울의 설명이니까 무조건 옳은 것인가?

만일 고린도전서가 성경이 아니라면, 즉 이 글이 아직 성경으로 형성되기 전에 우리가 살았다면 우리는 바울의 이 글에 대하여 무엇이라 논평할 것인가?

유대교에서 보는 성경으로는 사도바울의 이 설명은 틀림없이 「이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영적으로만 설명할 일이 아니라고 우겼을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로서 우리는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어떻게 모세가 지팡이로 쳐서 물을 낸 반석이 그리스도일 수가 있느냐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의 글을 성경으로 모으시고 오늘날 우리의 손에까지 전달하셨지, 그 반대편의 주장들을 성경화하지 않으셨다.

 

그러면 오늘날은 그 사도바울 -즉 출애굽 사건의 전체적인 모형뿐만 아니라 그 소도구들까지 영적인 의미로 설명을 한- 의 글을「어떻게」읽는가?

과연 오늘날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영적인 거울과 경계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간음, 시험,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교훈에 그치는가? 거울은 그것을 보고 있는「바로 그 사람」을 반영하는 것이다. 즉 과거의「역사」가 주는 교훈이 아니라 우리들 개개인이 그 역사를「산다」는 말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사도바울이 인용한 출애굽 사건만 영적인 의미와 말세를 당한 우리의 경계이고 그렇지 않은 구약의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의 정복이라든지 사사시대 이후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단순히 역사로서 그치는가?

즉 홍해를 건넌 것이 세례 받은 것을「의미」하는 것이라는 사도바울의 말이 맞다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무슨 영적인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는 지적이다.

이것이 홍해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있으나 요단강에 대한 설명은 없는데 이렇게 바울이 영적으로 설명한 것들만 영적인 것이냐 하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

사실 사도바울이 인용하고 설명한 구약성경은 극히 일부분이다.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구약을 보는 그 시각 그 눈을 알아야하는 것이다.

그 바울의 시각만 있으면 그것으로 성경을 보면 되니까, 시력을 자랑하지 말고 나의 시각이 바울의 그것과 같은지, 주 예수의 그것과 같은지를 확인해 볼일이다.

 

3. 여럿을 가리켜 네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계속해서 바울이 구약을「어떻게」읽었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 주실 때 아브라함이 어떤 율법의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이며, 또한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것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창세기의 기록을 사도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그 자손이 누구냐」하는 것인데 그 자손은 그리스도라는 지적을 하는 근거로 창세기 기록에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이「자손들」이 아니라「자손」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 성경에 쓰고 있는 단어의 단수와 복수가 이처럼 중요한 것인가?

사실 우리말은 단수와 복수를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다.(그만큼 애매모호하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단수 복수뿐만 아니라 格, 性, 인칭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구분 표기되는데 사도바울은 창세기 기록의「자손」이란 단어를 통하여 그것이 복수로 표시되지 않고 단수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 자손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나치다 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러나 어쩔 것인가? 상대는 통일교인이 아니라 사도바울인 것을, 설사 교황청에서 그렇게 주장한다면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무시할 수 없는 바울의 지적이요 그것이 곧 성경말씀 아닌가!

그만큼 단수와 복수에까지 성경을 써서 구약을 읽은 사도바울이(물론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자기가 쓴 글(지금은 성경)에서는 단수와 복수를 무시하고 썼을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바울의 글을 읽을 떼에 단수와 복수(뿐만 아니라 격, 성, 인칭에 이르기까지)에까지 마음을 두고 읽는가?

그렇지 않다면 백번 읽어 달달 성경을 왼다할지라도 눅10장의 율법사처럼 아무 소용이 없다.

꿈을 깨자.

바울의 시력을 가질 일이 아니라 바울의 시각을 갖자.

단수와 복수의 차이점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목청을 높여 외치는 사도바울의 시각을….

 

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역시 계속되는 갈라디아서의 말씀이다.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 사라와 하갈을 들어서 두 언약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 여자들이 두 언약의 비유일 수 있느냐는 점이다.

창세기가 어디 한두 장인가? 사건과 등장인물이 어디 하나 둘인가?

전기했지만 사도바울이 이렇게 뽑아서 설명한 것들은 비유로서 영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그렇지 않은 말씀들은 단순한 역사인가? 아닐 것이다.

만일 다른 사건들이 단순한 사실(史實)들이라면 사도바울이 사라와 하갈을 두 언약의 비유라고 설명한 갈라디아서가 틀린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을 바울에게 적용한다면 창세기를 이렇게 볼 수 있는「시각」, 그것이 곧 ‘마음으로 믿어’에 해당하는 것이고, 즉 예수께서 사라와 하갈에 대하여 설명했다고 하더라도「바울의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다.

예수의 시각과 바울의 시각의 일치- 이것이 시인이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맞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요 선물이며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사람이 믿어서」구원 얻을 수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내가 믿어서」얻는 구원은 은혜요, 선물이 아니라 삯이요, 대가이기 때문이다. 「믿어서」-이것은 율법이다.

논지가 좀 빗나갔지만 아무튼「두 여자」「두 언약」「두 예루살렘」을 모두 하나의 등식(等式)으로 연결한 바울적 시각 ― 이것이 믿음이다.

 

 

성경을「어떻게」읽는가?

「무엇을」읽어야 하는가는 대부분 다 안다.

그러나「어떻게」읽을 것인가?

하갈에서 옛 언약이, 옛 언약에서 시내산이, 시내산에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을 추출(抽出)해 낼 수 있는 눈이 있는가?

사라에서 새 언약을, 새 언약에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을 우리 어머니를 비유로 알 수 있는가?

바울이 이렇게 구약을 인용한 것은―그가 구약을 인용치 않더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었지만―그 내용뿐만이 아니라 구약을 보는 자신의 시각을 함께 소개하고자 해서였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쓰여졌다.

즉 하나님의 시각으로 쓰여졌다는 말이다.

결코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도 자랑일 수 없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성경저자의 시각으로 성경을 본다는 것을….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눅11:34-35)

여기서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는 번역에 조금 문제가 있다.

간단히 언급한다면 이것은 네 속에 있는 빛의 조도(照度)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즉 형광등이 60W냐 100W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네 빛이「어두움」이 아닌가 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어두움」의 시각으로 온 몸을 보지 말고「빛」의 시각으로 보라는 말씀이다.

 

 

보는 양(量)의 문제가 아니라 보는 질(質)의 문제이다.

어떻게 볼 것인가?

「성한 눈」으로,

「빛의 시각」으로,

즉,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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