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신앙고백! 구원 경륜!

기독교 신앙.

하나님아들 2024. 6. 6. 23:39

기독교 신앙.

 

1. 1. 신앙의 정의.

 

  신앙<信仰>이란 용어를 종교적 차원에서 정립하면 믿는 것<신뢰하는 것>믿고 의지하는 것, 믿고 인정하는 것, 믿고 따르는 것, 등등으로 정립된다. 한편 현대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따르느냐? 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일보 전진한 것이 교회의 직분자들과 제도에 충성하고 전도하고 선행을 베풀며 하나님 나라를 앙모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 일반개념을 포함하면서도 그와 같은 개념을 초월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차원과 경륜적 개념을 갖는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따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대전제로 하여 출발한다.

 

첫째-자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이시며 우주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어졌고 그리하여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하에 있으며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하여 결론 되어진다.

 

둘째-기독교인들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신적 주권적 작정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았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았고 그리하여 현세의 삶을 마치면 즉시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입국하여 영원무궁한 삶을 산다.

 

  이와 같은 대전제하에서 기독교 신앙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느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주권적 신적 작정 하에서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치심을 받았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느냐?>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이미 그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신적 작정 하에서 이미 창세전부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까 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와 같은 차원의 대전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정립된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신학적 임재에 대한 절대 순종의 영접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찬양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멘의 응답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충성이며 이와 같은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신학을 실천하는 삶 전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정의가 초신자들에게 처음부터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정의가 정립되기까지에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기독교 신앙이 정립되기까지에는 그것을 정립시켜 줄 책임을 맡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수준이 크게 반영된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 성도들의 신앙 형태는 기독교 신앙의 정의와 본질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형태이다. 현대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조차 완전하게 정립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와 같은 오류는 그들을 지도하는 목회자들의 저급한 신학 때문이다. 많은, 아니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초신자나 수십 년 신앙생활한 자에 구별 없이 항상 구원 문제만을 강조한다. 때문에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한 사람도 계속되는 구원에 대한 강조로 인하여 오히려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마땅히 성도들에게 단계적인 신학 교육을 통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신적 작정 하에서 이미 창세전부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고부동한 신앙을 정립시켜 주고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현세에 연연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까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삶을 사는 존재임을 정립시켜 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삶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고 후원했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와 같은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항상 구원받는 문제만 강조해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하고도 오히려 구원에 대한 확신을 정립하지 못하고 불안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의 구원 문제에만 매달린 채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신앙적 삶을 전혀 살지 못했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의 전체적, 개인적 신앙수준이 기독교 본래의 신앙인 고차원적, 형이상학적 신앙이 되지 못하고 3류 일반종교와 같이 열악하고 저급한 신앙으로 퇴조한 것이다.

 

가. 2. 신앙의 본질.

 

  일반 종교의 신앙 본질은 인간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일반 종교가 자신들이 섬기는 존재에 제사하고 위무하는 것은 결국은 그 존재를 위무하고 경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 전선에 이상 기류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거나 또는 흉화<凶禍>는 근절시키고 길복<吉福>만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정의와 같은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도 일반 종교의 범주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경륜과 개념을 갖는다. 기독교 신앙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일 뿐 자신을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마6:31>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명령하며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와 하나님 아버지의 의를 구하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마6:33>고 선포한다.

  이와 같은 신학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단3:18>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신앙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롬14:8>의 바울 신앙과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일없는 주를 위하여 죽으리라>는 폴리갑의 신앙으로 계승되어져 왔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자신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한 신앙이다. 반면에 이와 같은 신앙의 소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선포하신다.

 

나. 3. 신앙의 특성.

 

  일반 종교의 신앙은 섬기는 대상에 대한 제사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고 증명되고 인정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제사<예배>를 통하여 나타나고 증명되고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적 삶을 통하여 나타나고 증명되고 인정된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9:13>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12:7>고 선포하심으로서 진정한 신앙에 대한 원리를 정립시켜 주셨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특성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십계명을 초월하는 새 계명으로 주어진 것에서 더욱 확고하게 증명된다. <마22:39><막12:31><요13:34>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의식이 아니라 순종이고 실천이며 법이 아니라 자비이고 긍휼이며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고 섬기는 것이다.

 

다. 4. 신학이 요구하는 신앙의 열매.

 

  위와 같은 원리에 의하여 신학은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 차원의 신앙적 열매를 요구하는바 성경은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선포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신학이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의 아홉 가지 열매는 하나님의 속성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적 열매는 두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적 신앙의 열매이며 다른 또 하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이루는 실천 신앙적 열매이다. 이때에 하나님을 향한 순종적 신앙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충성, 등등의 네 가지이며 사람과 관계된 실천 신앙적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 절제, 등등의 여덟 가지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 열매에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 절제, 등등이 제한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며 사람과 관계된 실천 신앙적 열매에 충성이 누락되는 것은 성도의 충성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뿐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1) 1)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열매.

 

(1) 사랑.

 

① 자녀로서의 사랑.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서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며 둘째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성은<聖恩>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의 법적 행정적 관계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법적 행정적 차원에서의 관계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성도들을 당신의 섭리적 동반자로 예우하셨다. 그리하여 창조주의 명령에 대한 피조로서의 복종을 요구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의적인 순종을 원하셨으며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기는 것을 요구하시지 아니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것을 원하셨다. 우리는 아담과 함께 에덴동산을 거니시며 그와 자애로운 대화를 나누시는 하나님을 뵈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는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감당할 수 없는 성은<聖恩>이요 자비이며 영광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심을 만족하게 해드리기 위하여라던가 또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차원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요 상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섭리 역사의 동반자로 예우하셨고 자녀로서 사랑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② 순수한 사랑.

 

  성도가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그 사랑은 곧 순수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실 때에 하나님의 그 사랑에는 어떤 조건이나 목적이나 계산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 목적, 계산, 요구, 바램, 등등이 전혀 제외된 사랑으로서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사랑이었다. 따라서 성도들 역시 그와 같은 순전하고 순수한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야 한다.

 

③ 무한한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범위, 기간, 본질, 내용, 분량, 등등에 있어서 전혀 제한이 없는 영원 무한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간상으로 영원 무한하며 장소적으로 영원 무한하고 본질적으로 영원 무한하며 내용과 분량에 있어서도 영원 무한하다. 따라서 성도들 역시 그와 같은 영원 무한한 사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④ 불변의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영원불변, 절대불변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한 적이 없으며 감정에 따라 가감<加減>되지도 않았고 상황에 따라 중단된 일도 없었다. 따라서 성도들 역시 하나님께 그와 같은 절대불변, 영원불변의 사랑을 드려야 한다.

 

(2) 희락.

 

  성도는 자신의 아름다운 신앙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희락<기쁨>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적 삶을 통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은 피조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영광과 권위적인 기쁨이며 자녀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자애와 사랑의 기쁨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아름답고 품위 있는 삶을 살 때에 우선적으로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으시며 그리하여 창조주로서의 영광과 권위의 만족함과 기쁨을 이루신다. 그러나 이때에 하나님께서 갖으시는 기쁨은 창조주로서의 기쁨 보다는 아버지로서의 기쁨이 더욱 크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품위 있는 아름다운 신앙적 삶을 살 때에 아버지로서의 무한하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어 드리는 성도의 신앙적 열매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자녀로서의 효도이다.

 

(3) 화평.

 

  성도는 자신의 아름다운 신앙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과 성도 간의 화평은 성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화평하실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법적 행정적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의 관계로서 하나님께서는 통치주요 명령권자로서 복종과 순종을 받으셔야 할 절대적 주권자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와 명령에 이의 없이 복종하고 순종해야 할 존재였다. 반면에 성도는 자격이나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아담이래의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피조로서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 하에 있으므로 법적 행정적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언급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욕심내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징계 받아 감히 하나님과의 화평을 청구할 자격이 전혀 없다. 성도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있는 법적 행정적 근거는 첫째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한 용서이며 둘째는 하나님께서 화평의 손길을 내밀으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화평하실 것이 아니라 인간을 무서운 심판으로 다스리셔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법적 행정적 관계를 적용하시지 아니하시고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인간과의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시어 그들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신 후 그들에게 화평의 손길을 내밀으시어 그들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성은<聖恩>을 베푸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성도의 화평은 하나님과 성도의 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성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께 불만, 불평, 불순종 등등의 악행을 범하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화평에 오직 감사와 순종으로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4) 충성.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성도들에게 충성을 명령하시며 <마24:45><눅16:10><고전4:2<딤전3:11><딛2:10> 특히 성경의 말미에는 <죽도록 충성하라-계2:10>고 강력하게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죽도록 충성>을 명령하시는 것은 법적 행정적으로는 창조주, 통치주, 섭리주로서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명령하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창조주, 통치주, 섭리주로서의 절대적 주권으로 성도들 위에 군림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성도들에게 자애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다가오신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신학<말씀-로고스-법>으로 성도들에게 임재하시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권위, 명령, 법>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 자비, 긍휼, 온유>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죽도록 충성>을 명령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로서 자녀를 향하신 <사랑, 자비, 긍휼, 온유>에 의한 배려이시며 은총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와 은총은 <충성>의 명령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후속조치에서 증명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충성>을 명령하신 후에 곧 바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지어다-마25:21;눅19:17>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라고 선포하신다. 이와 같이 자녀들에게 요구되어지고 명령되어진 충성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충성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과 권위를 세우시려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충성을 통하여 하나님께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충성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시다 할지라도 성도는 그것을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무한한 사랑을 받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성도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도는 자녀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성도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존하신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이라는 근본적인 대전제를 한시도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를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오직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신앙적 열매를 이루어야 한다.

 

(2) 2) 사람과 관계된 신앙의 열매.

 

(1) 사랑.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는 차원이 다르며 종교적 사랑과도 전혀 다르다. 기독교의 신앙적 사랑은 사랑의 원천이며 원형인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사랑으로서 다음과 같다.

 

① 순수한 사랑.

 

  신학이 요구하는 성도의 사랑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목적, 계산, 요구, 바램, 등등이 전혀 결여된 사랑으로서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사랑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사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사랑을 해야 한다.

 

② 무한한 사랑.

 

  신학이 요구하는 성도의 사랑은 대상, 범위, 기간, 본질, 분량, 등등에 있어서 전혀 제한이 없는 무한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절대 무한한 사랑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사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절대 무한한 사랑을 해야 한다.

 

③ 불변의 사랑.

 

  신학이 요구하는 성도의 사랑은 영원불변, 절대불변의 사랑이다. 기독교 신앙의 사랑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할 수 없으며 감정에 따라 가감<加減>될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 중단될 수 없다.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절대 불변, 영원불변의 사랑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사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절대불변, 영원불변의 사랑을 해야 한다.

 

④ 용서의 사랑.

 

  신학이 요구하는 성도의 사랑은 그 본질과 특성에 의하여 용서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용서가 동반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사랑이 될 수 없다. 한편 기독교 신앙의 사랑에 의한 용서는 기독교 신학의 사랑과 같은 차원에서 다음과 같다.

 

A. 순수한 용서.

 

  기독교 신학의 용서는 조건, 목적, 계산, 요구, 바램, 등등이 전혀 결여된 용서로서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용서이다. 기독교 신학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용서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용서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오직 순전하고 순수한 용서를 해야 한다.

 

B. 무한한 용서.

 

  기독교 신학의 용서는 대상, 범위, 기간, 본질, 분량, 등등에 있어서 전혀 제한이 없는 무한한 용서이다. 기독교 신학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무한한 용서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용서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무한한 용서를 해야 한다.

 

C. 불변의 용서.

 

  기독교 신학의 용서는 영원불변, 절대 불변의 용서이다. 기독교 신학의 용서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할 수 없으며 감정에 따라 가감<加減>될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 중단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절대 불변, 영원불변의 용서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용서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절대불변, 영원불변의 용서를 해야 한다.

 

⑤ 이해와 관용.

 

  기독교 신학의 사랑은 이해와 관용을 동반한다. 진실로 사랑하는 자에게 이해되지 못할 것이 없고 완전히 용서한 자에게 관용하지 못할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관용을 베푸실 때에 그 이해와 관용은 범위와 내용에 있어서 무조건적, 무제한적이었으며 따라서 순수, 순전, 무한적이었고 영원하며 불변적이었다. 기독교의 용서와 이해와 관용은 기독교 신학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부모, 형제, 가족, 친지, 이웃, 등등을 이해하고 관용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해하고 관용하셨던 것과 같은 차원의 순수, 순전, 무한, 영원, 불변적인 이해와 관용을 해야 한다.

 

(2) 희락.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두 번째 열매는 희락이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적 삶을 통하여 희락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물론 기독교인들의 현세적 삶 속에도 수많은 애환이 있으며 그로 인한 고통과 좌절이 있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희락적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희락의 신앙적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며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기쁨의 신앙적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 성경의 요구는 곧 신학<하나님>의 요구이다. 성경<하나님-신학>은 결코 불가능한 신앙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충분히 가능한 신앙을 요구한다. 성경<하나님-신학>이 희락의 신앙적 열매를 맺으라고 했을 때에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언제나 기쁨의 신앙을 고백한다. 그러나 바울과 사도들이 사역할 당시의 상황은 결코 기쁨을 고백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에 그들은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고 매 맞고 추방당하는 등등의 고난적 삶을 살았으며 언제 어떠한 죽음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풍전등화<風前燈火>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기쁨의 신앙적 삶을 살았고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삶을 살라고 권고한다. 그들이 기쁨의 삶을 살수 없는 고난과 고통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박한 상황 하에서도 항상 기쁨의 삶을 살수 있었던 근거는 신학에 의한 신앙이었다. 신앙은 신학에 의하여 형성될 때에 바른 신앙이 형성된다. 그리고 신학에 의하여 형성된 신앙은 확고한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희락적 신앙의 열매를 맺고 그리하여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여러 가지 차원의 신학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중에 가장 큰 것은 두 가지로서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이고 다른 또 하나는 상급과 면류관에 대한 신학이다.

 

① 하나님 나라.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미 모든 애환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하고 자유하는 영광의 하나님 나라 <천국>이 보장되어 있으며 따라서 현세적 삶은 한시적, 잠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는 희락적 신앙의 삶을 살게 해주는 신학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신학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원무궁한 자유와 영광에 대한 소망의 신앙을 갖게 되며, 이 소망의 신앙으로 현세에서의 애환과 고통을 감내<堪耐>할 수 있게 되며 항상 기뻐하는 희락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② 상급과 면류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현세는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과 면류관을 받기 위한 시간적 장소적 기회이며 과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장차 하나님 나라에 입국할 때에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차원에서 사건과 장소와 시간 등등의 기회를 부여하신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 희락적인 것이 아니라 고난적인 것으로서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현세적 삶이 때로는 평탄하지 않고 시련과 애환 속에 고통스러운 것은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이며 배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현세적 고난과 애환들을 신앙으로 극복하여 승리의 열매를 맺음으로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는 희락적 신앙의 삶을 살게 해주는 신학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배려를 오해하여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하시려고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자녀들에게 애환과 고난과 고통의 삶을 주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애환과 고난과 고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평안하고 순탄한 삶을 즐기고 누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불만하고 불평하고 불순종하고 항의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불화하게 하려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애환과 고난과 고통을 준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단의 궤계를 모두 알고 계시지만 그것을 오히려 역<易>으로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에 의하여 발생한 자녀들의 애환과 고난과 고통을 퇴치시키지 않으시고 그것을 허락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허락을 신학적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허용섭리<許容攝理>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결코 방관적이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견딜 수 있을 정도의 한계까지만 사단의 흉계를 허용하시며 그 이상의 상황으로 발전할 때에는 즉시 관여하시어 그 문제를 해결하신다. 때문에 바울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라고 선포한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이와 같은 신학에 근거한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롬8:18>고 선포하였고 <항상 기뻐하라-살전5:16>고 권고하면서 자신들의 희락적 신앙의 삶을 고백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신학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받게 될 상급과 면류관에 대한 소망의 신앙을 갖게 되며 이, 소망의 신앙으로 현세에서의 애환과 고통을 감내<堪耐>할 수 있게 되며 그리하여 항상 기뻐하는 희락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자신에게 어떤 고통과 슬픔이 닥쳐올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 주신 기회요 은혜이며 배려인 것을 깨달아 슬퍼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쁘고 즐거운 희락의 삶을 살아야 한다.

 

③ 감사.

 

  한편 희락의 신앙적 열매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신앙에 기쁨이 있을수 없으며 기쁨이 없는 감사는 진실한 감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들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배려에 감사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의 삶은 애환과 고난과 고통조차도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이며 배려이기 때문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과 배려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신학이다.

 

(3) 화평.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세 번째 열매는 화평이다. 기독교인들의 화평적 신앙 열매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평하신 화평의 신학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의 화목을 유지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불순종을 비롯한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며 인간들이 수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범죄하였어도 그때마다 화목제를 드리게 하시면서 그 화목제를 구실로 하여 그들과의 여전한 화목을 유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는 신앙적 열매를 맺게 하신 후 이어서 사람과의 화평을 이루는 신앙적 열매를 맺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화평과 화목을 기뻐하시는 반면에 불화를 매우 싫어하신다. 성경은 성도의 화목을 여러 차례 강조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형제간에 불화한 자의 예배는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는다고 선포하였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신학에 근거하여 성도간의 화목을 이룰 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어느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고 화평과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 어느 누구와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다투거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지 말아야 하며 차라리 자신이 손해를 봄으로서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는 삶을 살 것이며 타인들 간의 갈등, 반목, 불화, 다툼을 아름답게 중재하여 모든 사람들이 화평하고 화목하게 해야 한다. 만약에 너무나 억울한 경우가 발생하여 그리고 너무나 많은 손해를 보게 되어 도저히 화목할 수 없게 되거든 과연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욱 억울하고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욱 많은 손해를 보았는가?>하는 것을 계산해 본 후에 다음 일을 결정할 것이다.

 

(4) 오래 참음.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네 번째 열매는 오래 참음이다. 오래 참음이란 인내<忍耐>로서 신앙적 연단 과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신앙적 열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인내의 신앙적 열매를 요구하시며 그들이 인내의 신앙적 열매를 이루기까지 다양한 차원의 시련과 고통을 허용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허용은 앞에서 이미 밝힌바 있듯이 사단의 성도를 향한 공격과 훼방에 대한 허용이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허용은 자녀들이 유약하고 나약하여 작은 일에도 넘어짐으로서 신앙적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는 허약한 자녀가 되는 것을 방지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적 은총이시며 배려이시다. 고난과 역경에 대한 경험 부족과 경륜의 미숙은 나약하고 허약한 신앙상태를 형성한다. 그러나 다양한 고난적 경험과 수많은 시련을 극복한 경륜은 상대적으로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형성시킨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을 수없이 겪은 자는 백전노장<百戰老將>이 되어 백절불굴<百折不屈>의 담대함과 강철 같은 의지로 어떠한 상황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영광의 승리를 쟁취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인내의 신앙적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에는 두 가지 차원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 하나는 <자녀에 대한 섭리>이고 다른 또 하나는 <종에 대한 섭리>이다. 앞장에서 이미 밝힌바 있듯이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평안과 희락을 누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때문에 사단은 온갖 흉계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훼방한다. 이때에 물론 성령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켜 주시지만 때때로 사단의 공격으로 인한 환란과 고통을 잠시 허용하실 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려는 의도적 허용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환란과 고통을 철저하게 막아 주시는 과보호<過保護>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대적으로 유약한 자가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지만 그러한 자들에게는 상급이나 면류관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절대적 과보호<過保護>하에서 오직 누리고 즐기는 무위도식<無爲徒食>적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한일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그러한 삶을 살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사단의 공격과 훼방을 일시적으로 허용하시어 그들이 신앙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이기게 하시고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게 하시며 그리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한편 <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더욱 특별한 차원에서 진행된다. 현존하는 모든 역사는 인류 역사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따라서 모든 역사의 흐름은 인류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대로 진행되는 것이며 역사의 주체가 인류인 것 같지만 역사의 실제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역사를 진행하는 핵심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종들>이다. 사단은 완전하지 못하여 항상 실패하지만 이와 같은 원리까지는 알고 있다.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를 진행하실 때에 어느 정도 아는 그 지식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려는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한다. 그중에 사단이 특히 공격하는 영역이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는 핵심자들인 <하나님의 종들>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종들>을 공격할 때에 상황이 다급하고 중대할수록 더욱 강력하고 집요하게 공격한다. 때문에 현재 중요한 임무를 맡거나 또는 앞으로 맡게 될 <하나님의 종들>은 사단의 무차별적 공격 앞에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공격을 일일이 물리쳐 주시지만 상황에 따라서 필요할 때에 잠시 그것을 허용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크고 중대한 일을 맡은 종들일수록 강하고 담대함이 절대 필요하다. 때문에 크고 중대한 일을 맡은 종들일수록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된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을 수없이 겪은 백전노장<百戰老將>이 되어 백절불굴<百折不屈>의 담대함과 강철 같은 의지를 갖춘 종만이 어떠한 상황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영광의 승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겪게 되는 시련, 고난, 고통, 등등은 인간적 삶의 시련, 고난, 고통, 등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이 겪어야 할 연단 과정이며 훈련 과정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연단과 훈련의 과정을 거치는 <하나님의 종들>을 방관하시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신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게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신31:6>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던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수1:9>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그리고 확실하게 지켜졌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 속에서 오래 참음<인내>의 신앙적, 사명적 열매를 맺었고 그리하여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 결국은 승리하는 역사적 쾌거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 확인되는 선배들의 오래 참음<인내>의 신앙적, 사명적 열매를 본받아 자신들도 오래 참음<인내>의 신앙적, 사명적 열매를 맺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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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들은 자신에게 어떤 고난과 불행한 사건이 뜻밖에 발생하였을 때에 절대로 당황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지혜롭게 그 사건에 대처해 나가야 한다. 이때에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그 사건이 자신에게만 주어진 개인적인 사건인가? 아니면 전체적, 또는 공동적인 사건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만약에 그 사건이 자신개인에게만 주어진 사건이라면 그 사건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반면에 그 사건이 전체적, 공동적인 것이라면 그 사건은 전체적, 또는 공동적 차원에서 함께 연합하여 해결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그 사건의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 사건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 가운데 우연 또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건이거나 또는 자신의 부주의로 인하여 발생한 사필귀정<事必歸正>적 사건이거나 또는 천재지변 등등의 불가항력적인 사건이라면 그 사건에 맞는 적절한 해결책을 강구한다. 그러나 그 사건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에 의하여 계획적으로 주어진 사건이라면 기도하는 가운데 그 이유와 사연을 깨달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에 부응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에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에 의하여 계획적으로 주어진 사건은 보편적인 일반 사건들과는 전혀 다른 특별성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는 반드시 절대적인 순종과 적극적인 희생과 강력한 충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특히 명심해야 한다.

 

(5) 자비.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다섯 번째 열매는 자비이다. 자비는 사랑과 연결되는 신앙적 열매로서 사랑에 대한 구체적 실천이다. 많은 종교들이 자비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자비는 3류 종교적인 자비로서 전혀 불가능한 허구적인 자비이거나 위선적인 자비이며 도덕적인 자비로서 자기 자신을 위한 자비에 불과하다. 반면에 기독교의 자비는 하나님의 자비로서 절대 가능한 자비이며 실제적인 자비이고 자신을 위한 자비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자비이다. 현존하는 각종 종교들 중에 <자비>라는 용어를 가장 남발하는 종교는 불교와 이슬람교이다. 그러나 불교의 자비는 전혀 실현 불가능한 억지 자비이며 사기자비<詐欺慈悲>이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구도<求道>의 길을 묻는 제자에게 분명하고 냉정하게 <그것은 오직 네게 달렸느니라> 라고 말함으로서 불교의 구도 원리인 자력구원<自力救援>을 선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의 후예들은 스승의 구도원리를 함부로 변질시켜 석가모니를 대자대비<大慈大悲> 동체대비<同體大悲> 등등으로 편집한 후 석가모니의 자비로 구도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불교 교리를 오류 시켰다. 절대 불가능한 불교의 자비교리를 오류 시켜 허구적인 자비교리, 사기적인 자비 교리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오류와 변태는 이슬람교의 자비 교리에서도 나타난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멧은 본래 교활한 사기꾼으로서 매우 무자비한 자였다. 마호멧은 자신을 추종하지 않는 자들을 무참하게 살해하였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양아들의 부인을 아내로 삼는 무자비까지 행하였다. 마호멧의 무자비함은 그의 후예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들은 이슬람을 거부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살해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2001년 9월 11일의 미국 테러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이슬람교의 자비는 자비를 통한 공덕<公德>을 쌓음으로 사후에 극락 또는 천국에 가기 위한 목적을 전제로 하는 자비이다. 따라서 그들의 자비는 순수한 자비가 아니라 이기적인 자비이다.

  반면에 기독교의 자비는 하나님의 자비로서 실제적인 자비이며 순수한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 것은 실제적인 자비이고 구체적인 자비이며 아무 조건  없는 무조건적 자비이고 장차 요구되는 자비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지고 완성된 현재적 자비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자비는 신앙적 공덕을 목적으로 하는 자비가 아니라 아무 조건없는 순수한 자비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구원을 이루기 위한 자비의 공덕이 필요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상급과 면류관을 받기 위한 공덕을 위한 자비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마6:3>고 명령하시어 목적적 자비가 아닌 순전한 자비, 순수한 자비를 요구하셨으며 공덕을 위한 이기적인 자비를 행사하는 자들에게 <저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라고 선포하시어 그들의 불순한 자비에 아무런 보상이 없음을 천명하셨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자비는 순수한 기독교 사랑이 구체적 실천적으로 이루어지는 순전하고 순수한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자비의 신앙적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것이 기독교의 본분으로서 하나님의 자비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신학적 요구에 순종하여 순전하고 순수한 자비의 신앙적 열매를 필연적으로 맺어야 하는 것이다.

 

(6) 양선.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여섯 번째 열매는 양선이다. 기독교인은 이웃과 사회에 기쁨과 유익을 주는 선량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신 19:18; 마22:39;막 12:31-33;눅10:27;롬13:9;갈5:14;약2:8>고 명령하여 기독교인의 양선을 강조한다.

  한편 성경은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눅10:30-37>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마6:3>를 통하여 기독교의 진정한 양선의 본질을 정립해 준다. 기독교의 양선은 어떤 목적이 전혀 수반되지 않는 순수함과 순전함을 전제로 하며 자신의 양선을 자랑하는 것을 절대 엄금한다. 만약에 기독교의 자비와 양선이 구원이나 상급이나 면류관 등등을 전제로 한다거나 또는 자기과시의 수단과 방편으로 진행된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것으로서 순전하거나 순수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신학적 요구와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자비와 긍휼과 양선에는 하나님의 어떤 것을 과시하거나 나타내려는 어떤 목적이나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자비와 긍휼과 양선은 본래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창조를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궁극적 목적 하에 작정되고 진행되었다는 신학과 배치된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신학적 양립을 이해하는 신학자라면 그러한 오류에 빠질 이유가 전혀 없다. 창조를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궁극적 목적 하에 작정되고 진행되었다는 신학은 <하나님의 공의>를 성립한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자비와 긍휼과 양선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을 성립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인류의 패역함을 용서, 긍휼, 자비, 양선, 등등의 사랑으로 다스리지 아니하시고 준엄하게 법적 행정적으로 다스리시어 본래 세우신 공의대로 <영원한 죽음>에 처하신 후 모든 것을 새로 창조하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된다. 불순종과 패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 이전에 이미 악<惡>이 스며들어간 인류에게 하나님의 용서, 긍휼, 자비, 양선, 등등의 차원 높은 사랑이 하사된다 할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불만하고 배반하는 패역적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라리 그들을 완전히 사멸하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인류를 위하여 반대의 길을 택하심으로 모든 손해를 감수하셨다. 따라서 기독교의 용서, 긍휼, 자비, 양선, 등등의 사랑의 실천은 조건 없는 순수함과 자신을 위한 이기주의적 차원을 초월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모든 기독인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시면서 까지 자신에게 용서, 긍휼, 자비, 양선, 등등의 사랑을 베푸신 은혜에 감사, 감읍하면서 자신의 작은 선함이 하나님의 그, 망극하신 성은에 만분지일이나마 보은이 될 수 있으랴? 하는 겸손하고 순전한 신앙으로 오히려 삼가 조심하면서 양선을 시행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7) 충성.

 

  신학이 요구하는 기독교 신앙의 일곱 번째 열매는 충성이다. 그러나 이 충 성의 열매는 사람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오직 하나님께만 상하<上下>의 수직<垂直>적 관계를 가질 뿐이며 인간 대 인간 사이에는 평등 원칙에 따라 수평<水平>적 관계를 이룬다. 그 누구도 그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충성을 강요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충성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충성에 대한 신앙적 열매를 오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사람에 대한 충성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성도가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충성하거나 또는 교회의 제도에 충성하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섭리에 충성하는 것으로서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없이 또는 하나님의 섭리를 위반하면서 교회의 직분자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와 같은 충성은 충성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고 반역이다. 성도들 중에는 이와 같은 원리를 따르지 않고 목회자를 비롯한 특정인들을 인간적 감정에서 추종하고 섬기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위반하면서까지 그들을 추종하고 섬긴다. 목회자를 비롯한 특정인들이 온갖 불법을 행하고 그리하여 교회가 파탄의 지경에 이르러도 오히려 그러한 불법자들을 추종하고 옹호하여 교회의 분란을 가중시킨다.

같은 원리에 의하여 국민이 국가의 직분자들에게 충성하거나 또는 국가의 제도에 충성하는 것은 모두 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충성이 된다. 그러나 국민이 국가와 민족의 유익에 관계없이 또는 국가와 민족의 법과 질서와 유익을 위반하면서 국가의 직분자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위정자들이 온갖 불법을 행사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감정에서 그들을 추종하고 옹호하는 것은 충성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와 민족에 대한 불순종이고 반역이다.

 

(8) 온유.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여덟 번째 열매는 온유이다. 온유적 신앙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가 평상시에 보여준 실천 신학적 삶의 모습으로서 기독교인들의 인격과 품위를 나타내 준다. 기독교인들의 온유한 인격과 품위는 너그러움과 원만함과 부드러움과 따뜻함 등등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온유의 신앙적 열매는 기독교인들의 전체적인 인격을 대변하는 신앙적 열매이다. 성도의 성품과 인격이 온유하지 않고 과격하면 교회가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분란과 다툼을 일으키게 된다. 성도의 과격함은 교회의 품위와 위상을 하락시키고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리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존귀한 이름을 망령되게 한다. 따라서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분을 내거나 성을 내어서는 안 되며 언제나 부드럽고 온화한 언행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보기만하여도 사랑이 넘치고 듣기만 하여도 평안이 흐르는 온유한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9) 절제.

 

  신학이 요구하는 사람과 관계된 기독교 신앙의 아홉 번째 열매는 절제이다. 기독교인의 절제는 모든 신앙적 삶에 적용된다. 기독교인들은 술, 담배, 도박, 이성교제, 육체적인 쾌락, 등등의 비 진리적인 모든 행위들을 절제하며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되어지는 부귀, 영화, 명예, 권세, 권력, 권위, 등등의 각종 욕심과 욕망과 유혹을 절제하며, 혈기에 대한 절제, 시기, 다툼, 분란에 대한 절제 등등, 실천 신앙적 삶을 사는 과정에 일어나는 불미스럽고 아름답지 못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제해야 한다.

 

5. 신앙의 오류.

 

  현대 기독교인들 중에는 기독교 신앙의 정의와 본질과 특성에 절대 못 미치는 저급하고 오류된 3류 일반 종교의 무속적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너무나 많다. 현대 기독교의 오류된 신앙 형태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 1) 맹신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목사의 말을 무조건 추종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목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유에 근거하여 목사의 말에 무조건 절대 추종한다. 이러한 맹신적 맹종적 신앙은 목사들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목사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절대적 권한을 부여 받았다고 주장하였고 뿐만 아니라 목사의 말은 비록 그것이 잘못되어 성도를 비진리로 인도할 지라도 이의 없이 믿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 저들은 한술 더떠서 목사의 부정은 오직 하나님만이 언급할 수 있으며 성도들이 목사의 부정을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에 대한 불경으로서 곧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라고까지 가르쳤다. 그리고 보이는 목사에게 순종하고 충성하고 대접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고 대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서 성도들의 맹신을 유도하였으며 목사에게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목사가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목사가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고 공갈, 협박하여 성도들에게 맹종을 명령하였다. 저들은 심지어 <신앙은 덮어놓고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조직 신학을 배우면 신앙을 조지게 된다.>고 까지 주장하면서 목사에게 맹종하고 맹신하게 유도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성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명령하며<수7:19-시22:23-마5:16>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추종하려는 자들에게 모든 영광을 성부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였다<요7:18-8:50;54-11:4-12:28-15:8>. 이와 같은 진리를 아는 사도들도 오직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선포하였다<행11:18-고전10:31>.

  성경은 또한 비 진리를 가르치면서 맹종을 요구하는 자들을 향하여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고 경고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들을 향하여 <저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라고 선포하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명령하며 마지막 심판 때에 그들이 풀무 불에 들어가 울며 이를 갈게 된다<마13:42>고 정죄하였다.

 

라. 2) 과신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전혀 오류된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많다. 저들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여 믿음만 있으면 불가능이 없다고 믿는다. 이러한 신앙의 소유자들은 질병에 걸려도 병원이나 약국에 가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신다고 믿는가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의 전제하에 아무런 대책 없이 사업을 시작하거나 확장하는 등등 전혀 비상식적인 일들을 벌린다. 그러나 이들의 잘못된 믿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는 저들은 자신의 믿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자신의 믿음이 약한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심히 비관하거나 좌절하며 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아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포기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문화와 역사적 흐름에 맞추어 당신의 역사를 진행하신다. 물론 21세기 현재에도 때로는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기적과 이적이 일어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상적인 일, 보편적인 일들은 당시의 문화와 현실에 맞게 진행하신다. 과거 문화와 문명이 심히 낙후되어 있을 때에, 그리고 상황이 매우 급박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에 맞추어 각종 기적과 이적을 행사하셨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상고하면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는 것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이 감소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특별한 상황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역사를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진행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병원, 약국, 의사, 약사, 등등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하에 세워진 자들이다.

 

(1) 3) 미신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을 일반 종교적 차원에서 많은 신들 중에 하나로 인식하여 섬기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의 신앙 형태는 대체적으로 전통적인 무속 신앙형태이다. 저들은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면 무속 신앙자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배를 드린다든가 예물을 드림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 받으려 한다. 이러한 자들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예배에 불참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징계를 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심히 불안해하며 예배에 불참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생각하여 즉시 예배를 드리고 속죄의 예물을 드린 후에야 안심한다.

 

  일반 종교, 특히 무속 신앙자들이 섬기는 신들은 본래 자력으로 존재하는 신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 세운 것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속성도 사람과 같은 수준이다. 작은 일에도 섭섭해 하고 노여워하며 항상 위무하고 받들어 섬기지 아니하면 삐지고 토라진다. 반면에 섭섭해 하고 노여워하며 삐지고 토라졌다가도 조금만 받들어 섬기면 즉시 풀어지고 좋아한다. 3류 무속 신앙자들이 섬기는 신들에게는 사실상 아무런 신적 속성이 없다. 그것들은 가공된 존재들로서 하나의 기물<器物>에 불과하다. 저들에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사단이 저들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 역시 매우 수준이 낮기 때문에 저급한 신적 속성을 초월하지 못함으로서 3류 무속 종교의 우상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사단의 속성 또한 매우 저급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오직 유일무이한 지고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잘못을 범할 때마다 노여워하시거나 진노하시거나 하여 즉시즉시 징계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연연하시지 않음은 물론이요 용서할 수 없는 대죄까지도 용서하시며 사랑과 자비, 이해와 관용으로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2) 4) 불신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성경대로 믿지 아니하고 일반 종교적 차원에서 믿는 경우가 있다. 주로 현대 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들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신앙생활을 하거나 또는 심신<心身>을 위무하고 수련하는 차원의 신앙생활을 한다. 이러한 자들은 성경이 과장되게 기록되어 있거나 또는 목회자들이 잘못 해석하여 사실이 왜곡된다고 믿는다. 때문에 이러한 자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현대 과학에 부합되는 상식적 차원에서 성경을 이해하며 그리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의 주장을 모두 수용하지 않고 적당한 상식을 기준으로 하여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간과할 것은 간과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은 다만 절대적 명령이며 따라서 무조건적 순종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결코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상식적, 비논리적이지 않다. 기독교 신학이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상식적,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을 완전무결한 능력의 하나님 차원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유한적 존재인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사람들은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상식적, 비논리적인 어떤 현상이 발생하면 그것을 <기적, 이적, 불가사의, 신비, 초월> 등등의 용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 차원에서의 이해이다. 인간적 차원에서는 그것이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상식적, 비논리적인 것이며 그리하여 <기적, 이적, 불가사의, 신비, 초월> 등등이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께는 다만 신적 능력에 의한 것으로서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문제일 뿐이다.

 

(3) 5) 편파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현세를 속된 것이라 하여 무시하거나 배타<排他>하고 오직 하나님 나라<천국>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 나라만 앙망하면서 현세의 학문, 지식, 지혜, 재물, 직업, 가정, 제도, 질서, 등등을 만홀히 여기거나 아예 무시하고 거부한다. 저들은 심지어 국가와 민족, 부모형제까지도 과감하게 거부하고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의, 식, 주, 까지도 거부한다.

 

  그러나 현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사하신 삶의 현장이며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사명의 현장이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현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면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대비하고 기다리며 자신들의 현세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과 면류관을 준비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현세적 삶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거나 거부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최선을 다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4) 6) 현세중심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편중적인 신앙으로 현세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반대로 현세에 치중하는 신앙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를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는 현세에 매달려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을 꾸준히 계속하면서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현세에 연연하여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섭리, 교회 등등을 버리거나 포기한다. 일제 치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신사 참배한 것과 공산 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배반했던 일들은 모두가 현세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고 배반했던 경우들이다. 이러한 자들은 현세의 삶이 순탄하고 평안하면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하지만 건강, 사업, 재정, 가정, 직장, 등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크게 낙심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며 신앙생활을 포기한다.

 

(5) 7) 이중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 나라와 현세에 대한 이중적인 신앙을 가진자 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도 현세에 연연하여 어중간한 이중적인 신앙적 삶을 산다. 때문에 저들은 어떤 신앙적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매우 고민하며 어떤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고 현세적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중적 신앙자들과 현세 중심 신앙자들의 신앙형태는 대체적으로 대동소이<大同小異>한데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신앙 형태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다. 저들은 모든 것을 현세적 강복과 연관시킨다. 기복 신앙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순복음 교회의 축복 위주 교리와 부흥강사들의 축복 위주 집회를 통하여 형성되었는데 하나님에 대한 축복 교리가 점점 강조되면서 매우 괴이한 기복 신앙들이 양산되었다. 어떤 목회자들은 현세적 강복이 구원의 빙거라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현세적 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또 어떤 목회자는 현세적 강복이 하나님 나라에까지 소급된다고 주장하면서 현세에서 복을 누리는 것에 비례하여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광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기복 신앙들이 점점 강조되면서 드디어는 복 받은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는 성도들도 복을 받지만 목사가 복을 받지 못한 교회는 성도들도 복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목사가 얼마나 풍요롭고 넉넉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에 비례하여 교회 성도들의 삶이 형성된다는 논리 하에 목사들의 삶이 점점 풍요롭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들 때문에 대형 교회들이 선호되는 가운데 개척교회, 작은 교회들이 외면 또는 거부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목사들의 주장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첫째는 신학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무식한 자들에 의한 주장이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목사들에게는 신학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통하여 정립되어진 신학 원리들이 사정없이 무시되고 오류되어 그와 같은 비 진리적 주장들이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교활한 사이비 목사들의 음흉한 흉계에 의하여 그러한 주장들이 제기된 것이다. 저들은 목사라는 직분을 빙자하여 각종 사기와 공갈을 전개하는 가운데 성도들의 재물을 착취하고 갈취하면서 누리고 즐기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6) 8) 기도중심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모든 것을 기도와 연계시키는 신앙의 소유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은 등한시하는 반면에 기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추구한다. 저들은 어떠한 일이든지에 관계없이 오직 기도를 통하여 문제를 풀어나가려 한다. 이러한 자들의 신앙생활은 말씀 중심이 아니라 오직 기도 중심이다. 때문에 저들은 시시때때로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며 기도하기 위하여 기도원을 전전하고 깊은 산, 깊은 계곡, 능력봉, 능력천 등등을 찾아가 며칠씩 밤새워가며 철야기도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들의 입에서는 언제나 <응답>이라는 용어가 튀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의 신앙 형태는 대체적으로 무속 신앙적이며 우상 숭배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성경-신학>에 모든 것을 담아주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말씀<성경-신학>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시고 말씀<성경-신학>으로 우리와 대화하시며 말씀<성경-신학>으로 우리의 문제를 풀어 해결하신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말씀<성경-신학>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받으며 말씀<성경-신학> 속에서 모든 문제를 해답 받고 해결 받는다.

  한편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영적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로서 곧 생활이다. 기독교인들은 말씀<성경-신학>을 통하여 정립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개하는 사명적 삶을 살면서<영적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신앙적 생활인 기도로 그 모든 것을 진행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들에게 말씀<성경-신학>과 기도는 절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연합이지만 우선순위는 말씀<성경-신학>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따라서 기독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에 근거하여 신앙을 정립함으로서 일반 종교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형이상학적 신앙을 정립하는 것이다.

 

  말씀<성경-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능력이 없으므로 사단의 미혹과 유혹에 빠지며 그리하여 비 진리를 진리로 오해한다. 사단은 말씀<성경-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자들이 기도할 때에 그를 미혹시켜 갖가지 이상이나 환상들을 제공하여 그들을 오류와 비 진리에 빠지게 한다. 말씀<성경-신학>이 정립된 자들은 사단의 미혹을 분별하기 때문에 사단의 미혹을 받아도 넘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사단은 그러한 자들을 공격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말씀<성경-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자들은 분별력이 없으므로 사단의 미혹을 하나님의 계시로 안다. 때문에 사단은 그러한 자들을 공격하고 미혹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성경-신학>을 배제한 채 기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말씀<성경-신학>을 배제한 채 기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들의 신앙 형태와 저들의 삶의 결과들이 언제나 비 진리로 끝나는 현실을 통하여 증명된다.

 

(7) 9) 율법적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구약 성경의 모든 율법을 그대로 준수해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의 신앙형태는 다음과 같다.

 

(1) 제사중심 신앙.

 

  율법주의 신앙자들의 예배에 대한 개념은 구약 시대의 제사와 동일한바 저들의 개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배는 곧 제사이다. 따라서 목사는 제사장이고 강단은 제단이며 예물은 제물이다.

② 목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절대적인 권한<강대권>을 부여받았으며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인 목사에게 절대 복종해야한다.

③ 주일은 안식일로서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일해서는 안 되며 물건을 사거나 팔지 말아야 하며 특히 오락적인 것들을 절대 금지해야 하며 T.V 라디오 음악 같은 것을 금지해야 한다.

④ 예배는 반드시 본 교회에서 드려야 하며 특히 주일 대 예배는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본 교회에서 드려야 한다.

 

(2) 제물중심 신앙.

 

  율법주의 신앙자들의 예물<제물>에 대한 개념은 매우 특별한 바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는 반드시 제물을 제단에 드려야 한다.

② 하나님께 회개할 때에는 반드시 회개의 예물을 제단에 드려야 한다.

③ 목사에게 안수 받을 때에는 반드시 제물을 드려야 한다. 이때에 드린 제물은 제사장의 분깃으로서 목사의 것이다.

 

  율법주의 신앙자들은 이와 같은 개념에 의하여 목사와 강단을 매우 신성시한다. 저들은 강단에 장애인, 여자, 어린이들이 올라가는 것을 절대 금한다. 때문에 예배의 대표기도를 할 때에도 여자 권사, 여자 집사, 장애인 집사 등등은 강단에 올라가서 기도하지 않고 강단 아래에서 기도하며 심지어는 청소할 때에도 강단은 남자들이 청소한다.

 

  이와 같은 율법적 신앙은 신학적으로 무식한 목사들이나 또는 비 진리적 사이비 목사들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신학적으로 무식한 목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제사장 제도에 대하여 무식하기 때문에 목사들이 제사장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완성하신 후에 안식일 제도를 비롯한 율법들이 완성되어 차원 높은 신학으로 상향된 것을 모르고 여전히 율법에 얽매여 있다. 한편 사이비 비 진리자들은 목사라는 직분을 이용하여 온갖 자기 유익을 챙기려는 목적 하에 목사의 권위를 제사장적 권위로 주장하면서 율법적 신앙을 조장하고 있다.

 

(10) 자유주의 신앙.

 

  현대 종교학자들은 현대 사조<思潮>중 하나인 자유주의 사상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학을 인본주의 사조로 변질, 오류시켰다. 현대 기독교인들 중에 일부가 이러한 현대 사조에 심취하여 자유주의, 인본주의적인 신앙 형태를 형성하였고 특히 <진리 안에서의 자유-요8:32>를 곡해하여 <기독교인들은 모든 면에서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앙을 형성하였다. 저들의 신앙 형태 중 특별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무교회주의-교회제도에 얽매이지 않으며 따라서 무소속으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예배한다.

② 회개의 거부-하나님께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므로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회개할 이유가 없다.

③ 종교 다원화-구원이 오직 기독교에만 있다는 교리는 오만하고 편협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종교에 구원의 방편을 부여하셨으며 기독교는 그중에 하나이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 신앙은 일제 치하에서부터 존재하였지만 무교회주의는 1920년대의 김교신이 일본인 우찌무라<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아 도입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함석헌 등등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회개 거부주의는 구원파로 알려진 권신찬, 유병언, 박옥수, 이복칠<이요한> 등등에 의하여 운영되는 <기독교 복음 침례회> <대한 예수교 침례회> 등등에 의하여 주장되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종교에 구원의 방편을 부여하셨다는 종교 다원화 주의는 현대 자유주의 종교자들에 의해 주장되며 <세계 교회 협의회-W.C.C.-World Council Church>가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이 주장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앙자들은 기독교를 표방하지만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자들이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을 거부하는 자들이며 <오직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출20:3>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제반 질서를 거부하는 자들로서 기독교와 전혀 관계없는 자들이다.

 

(11) 체험주의 신앙.

 

① 방언 체험.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보다는 체험을 통한 신앙적 확신을 강조하는 자들이 많다. 체험주의 신앙은 거의 대부분 부흥 집회와 기도원 집회들을 통하여 강조되고 형성되었다.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일단의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은 성령체험, 은사 체험을 강조하면서 방언, 예언, 신유, 등등의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였고 나중에는 영서<靈書>까지 강조하였다. 1970-1990년대에 이르러 부흥 강사들은 특히 방언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면서 성도들을 오도<誤導>하였다. 경기도 한얼산 기도원에서는 <한얼산 기도원에서는 개도 방언한다>는 망령된 주장을 하면서 성도들을 끌어 들였고 이에 미혹된 무지한 성도들은 방언을 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방언은 신앙적 자랑이 되었고 방언하지 못하는 성도들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 무렵에 방언을 위한 집회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심지어는 방언 훈련, 방언 연습이 성행하면서 방언 훈련학교까지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사이비 이단자, 사기꾼들에 의한 거짓방언 사기방언 집회들이 전국에 난무하였다.

 

  성경이 증거하는 바에 의하면 방언이란 은사라기보다는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 신앙을 확립시켜 주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다<고전14:22>. 때문에 사도 바울은 방언을 은사 중 가장 마지막에 두었다<고전12:28>.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앙을 정립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가장 최고의 방법은 방언을 비롯한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이다. 체험에 의하여 정립된 신앙은 신앙적 위기가 닥치면 흔들리거나 또는 변질되거나 오류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에 의하여 정립된 신앙은 차원 높은 신앙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거나 변질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분별력이 있어 진리와 비 진리를 구별할 수 있으므로 절대 오류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방언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며 특히 확신 없는 성도들의 신앙 정립에 큰 도움을 준다. 한편 방언은 일반 신자들에게보다 목회자들에게 더욱 중요하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위하여 도고<대도>할 때에 방언으로 기도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게 하여 도고하는 성도의 개인적 인격과 자존심을 보호해 준다.

 

② 성령 체험.

 

  체험 신앙을 강조하는 부흥 집회들이 성행할 때에 발생한 오류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성령 체험 강조였다. 신학을 모르는 무식한 부흥 강사들은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성령의 내주 역사하심 하에 있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외쳤고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 하나님 임재하심<행2:1이하>을 곡해하여 성령 하나님은 곧 <불>이라는 등식을 조작하여 <성령 받으라-성령 세례 받으라> <불 받으라-불 세례 받으라>를 외쳤다. 저들의 무식함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심지어는 성령 하나님이 도깨비불처럼 여기저기 날라 다니는 것으로 표현하여 <불 받으라-불! 불! 불! 불!-저기 불 간다!~불 받으라>고 외쳤다.

  이와 같은 작태들은 신학을 전혀 모르는 무식에서 비롯되어진 오류이며 비 진리일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악행이다.

  성령 체험이란 성령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느끼거나 깨닫는 것을 말한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일률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따라서 본인이 성령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하려고 소망한다거나 또는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신적 작정과 약속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본인이 그것을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였을뿐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첫발을 내딛거나 또는 하나님을 향하여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자체가 곧 성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재, 역사하신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본인이 그것을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였을 뿐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첫 발을 내딛거나 또는 하나님을 향하여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자체가 곧 성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재, 역사하신 것이다. 즉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오려는 마음이 발동한 그 순간 이미 성령의 내주하심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내주하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함께 하시며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하여 영원히 지켜진다.

  따라서 목회자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성령 하나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여 계심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신학 부재의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은 이와 같은 신학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미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 하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계속 <성령 받으라>고 외쳤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라>고 강조함으로서 완전하신 성령 하나님의 임재, 역사하심을 함부로 제한하고 임의로 축소시키는 불경<不敬>까지 범하였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부분적인 임재나 미완전적, 또는 불완전적인 임재하심이 아니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완전하고 충만하게 임재 하신다.

 

(12) 은사위주 신앙.

 

  신학 부재의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이 체험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은사체험이 크게 강조되었다.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은 특히 예언의 은사, 치유의 은사, 신유의 은사를 강조하였고 그로 인하여 은사위주 신앙자들이 전국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예언, 신유, 치유, 등등의 은사를 행사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은 무능한 목회자로 매도되어 거부당하고 무시당하였고 <기도하는 종> <예언하는 종> <치유하는 종> <귀신 쫒는 종>들이 전국 각지를 누비며 부흥 집회를 열었으며 전국 각지의 기도원들도 <예언집회, 치유집회, 신유집회, 귀신 쫒는 집회> 등등을 열었다. 이 무렵<1970년대-1990년대>의 전국 기도원들과 부흥 강사들은 <예언집회, 치유집회, 신유집회, 귀신 쫒는 집회>의 대성황으로 인하여 호황을 누렸고 전국 기도원들에는 <기도하는 종> <예언하는 종> <치유하는 종> <귀신 쫒는 종>들이 장사진을 치면서 성도들을 유혹하고 미혹하였다. 그리고 드디어는 <은사체험 학교> <예언은사 취득학교> <치유은사 취득학교> <신유은사 취득학교>들이 전국 각지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들은 모두 신학 부재의 부흥 강사들과 기도원 집회 인도자들이 은사 체험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 진리들이며 특히 사이비 이단들과 각종 사기꾼들이 끼어들어 활동하는 가운데 오류 되어진 한국 기독교의 안타까운 병폐적 역사였다.

 

(13) 신비주의 신앙.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보다 체험위주의 신앙이 강조되는 과정에서 신비주의 신앙이 발생하였다. 신비주의 신앙은 한국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세계 기독교 역사에 끊임없이 발생하였고 21세기 현대에도 전체 기독교에 여전히 존재한다. 신비주의 사상은 대체적으로 사이비 이단자들에 의하여 발생하고 진행된다. 반면에 신비주의 신앙은 거의 대부분 오래가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한다.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신비주의 신앙자들이 발생하였고 그때마다 기독교로부터 정죄 당하고 퇴출당하였지만 그들이 사멸된 것은 기독교로부터의 정죄와 퇴출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자체적인 분렬과 퇴락에 의하여 붕괴되고 사멸된 것이다.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 신앙이 발생하게 되면 그들은 잠시나마 크게 흥성하고 발전한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존재하는 종교적 특성에 의한 신비주의 선호사상 때문이다. 인간들은 대체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특히 새로운 것들과 신비한 것들에 쉽게 미혹당하는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 기독교에 종말론 주의자들과 김기동, 이초석, 김계화 등등을 비롯한 각종 사이비 이단들이 크게 활개치고 다니는 것은 인간들에게 존재하는 종교적 특성에 의한 신비주의 선호 사상 때문이다. 그러나 종말론주의자들과 김기동, 이초석, 김계화 등등을 비롯한 각종 사이비 이단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은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것이지만 사실은 모두가 이미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정죄되고 퇴출되어진 이단 사상들이다.

  신비주의 신앙이란 대체적으로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하는 각종 현상들을 선호하는 신앙 형태를 말하는데 거의 대부분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각종 교리적인 주장들을 믿고 따르는 것이거나 또는 꿈, 환상, 환청, 등등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성경을 매우 교묘하게 해석하거나 또는 성경에 없는 교리를 매우 그럴듯하게 조작하고 포장하여 내세운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교리들은 참으로 황당한 것들로서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며 이미 기독교 역사에서 정죄되고 퇴출당한 것들이다. 반면에 꿈, 환상, 환청, 등등에 의한 것들은 대부분 실제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꿈, 환상, 환청, 등등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사단이 웅크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하나님께서 꿈, 환상, 환청, 등등을 통하여 임재하실 때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 신앙의 확신을 정립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에게 어떤 것을 계시하실 필요가 있을 때에 꿈, 환상, 환청, 등등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꿈, 환상, 환청, 등등을 통하여 임재하시지 않고 말씀<성경-신학>을 통하여 임재 하신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절대적인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상한 주장, 신기한 주장, 꿈, 환상, 환청, 등등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에 근거한 신앙을 정립해야 한다.

 

(14) 개인주의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는 무교회주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귀속되기를 거부하고 가정에서 가족끼리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또는 몇몇 친지들끼리 모여 각자의 가정을 순회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자들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한다.

 

① 목회자와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은 경우.

 

  성도들 중에 목회자와 교회로부터 여러 차례 상처를 받은 자들은 교회와 목회자를 두려워하거나 불신하게 된다. 이러한 성도들은 이제 더 이상 목회자와 교회로부터 상처받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가족끼리 가정예배를 드리거나 또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 모여 예배를 드리는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한다.

 

② 신학과 신앙의 불일치.

 

  성도들 중에 차원 높은 신학과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있다. 이러한 성도들은 교회나 목회자의 신학과 신앙에 만족하지 못한다. 특히 현대 교회나 목회자들이 하나님 중심이지 않고 목회자 중심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기저기 떠돌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③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

 

  성도들 중에 성격이나 신앙이 매우 특이하여 교회나 목회자에게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자들은 어떤 교회, 어떤 목회자에게도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가정 또는 그룹 위주의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④ 신학 교육을 받은 직분자들.

 

  신학 교육을 받아 목사, 강도사, 전도사의 직분을 임명받은 자들이 여러 가지 형편에 의하여 직분을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에 교회를 통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직분을 밝히기도 곤란하고 감추기도 곤란하여 차라리 가정 중심의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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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의 공통점은. 예배 중심 또는 구제사업 중심이다. 그들은 예배 때에 드린 각종 헌금으로 구제 사업을 하거나 또는 선교를 지원하는 등등의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생활은 분명한 오류이다. 저들이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 배경과 원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용납될 수 없다. 기독교는 예배를 위한 기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기독교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라는 제도와 질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저들의 신앙 형태는 분명한 오류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제도>를 거부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는 것으로서 오류이며 악행이기 때문이다.

 

(15) 떠돌이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 한, 교회에 소속되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떠돌이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있다. 이러한 성도들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경우에 해당되는데 하나는 목회자와 교회로부터 여러 차례 상처를 받은 경우이다. 목회자와 교회로부터 여러 차례 상처를 받은 자들은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두려움과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겠다는 차원에서 대형교회를 전전하면서 예배만 드리는 떠돌이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도들에게는 신앙적 기쁨이 없다. 특히 하나님께 사명 받은 성도들이나 또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 싶은 성도들은 그러한 신앙생활에 만족할 수 없다. 때문에 저들은 항상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떠돌이 신앙생활을 하는 또 하나의 경우는 교회에 소속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이다. 교회에 소속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자들은 교회에 소속되는 것을 교회에 얽매이는 것으로 생각한다. 저들은 교회에 소속되면 직분, 헌금, 봉사, 예배참석, 등등의 문제에 얽매이게 되므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개념에서 심한 부담을 갖는다. 때문에 저들은 대형교회를 전전하면서 예배만 드리는 떠돌이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생활 역시 분명한 오류이다. 특히 교회에 소속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여 떠돌이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당연히 책망 받아야 한다. 저들의 신앙생활은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대속죄제를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모독하는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 통치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만행이며 악행이다.

 

(16) 공의부재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 하나님께만 충성하면 된다는 개념 하에 국가 또는 사회의 제반 법규와 질서를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고의적으로 국가 또는 사회의 제반법규와 질서를 위반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탈세, 병역기피, 교통법규 위반, 등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질서와 제도를 무시, 거부, 위반하면서 각종 불법, 탈법, 편법, 위법 등등을 자행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자랑한다.

 

  기독교 신학은 이와 같은 비 진리를 강력하게 거부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임을 선포하면서도 사회 제도와 질서를 지켰으며<마22:15-21-막12:13-17-눅20:20-26> 사도들도 사회 제도와 질서를 지키라고 선포하였다<골3:22><딛3:1>. 기독교인들은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제반 법규와 질서와 규율과 제도를 준수해야 하며 제도적으로 수립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사회 통념 하에 있는 도덕, 윤리, 상식, 등등에 위배되는 어떠한 언행도 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인들을 <빛과 소금의 전사-마5:13-16>로 선포하시고 그들에게 신앙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라고 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공의적인 신앙이어야 한다는 것을 정립해 주신 것이다.

 

(17) 부흥집회 중심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 교회의 일상적인 정책과 제도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특히 체험주의, 은사주의, 신비주의적 신앙을 소유한 자들은 보편적 교회의 정책이나 제도에 만족하지 못하며 보편적 목회자들의 설교에도 만족하지 못하거나 또는 적응하지 못한다. 때문에 이들은 부흥집회, 기도원 집회를 전전하면서 박수치며 찬양하고 통성기도 하면서 광분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만족한다. 저들은 그러한 신앙생활로 인하여 가정이나 교회 직분에 매우 소홀하며 심지어는 가정파탄까지 일으키기도 하지만 전혀 개념치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 신학은 성도 자신의 희락<기쁨>적 신앙을 요구하지만 그보다도 하나님께 희락<기쁨>을 드리는 신앙의 열매를 요구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락은 물론 성도 자신의 기쁨적 신앙이 포함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의를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 드리는 실천 신앙적 신앙의 열매를 이룰 때에 비로소 진정한 희락을 안겨 드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가정을 매우 중요시하며 교회의 질서와 제도에 순종하는 신앙을 요구한다.

 

(18) 설교중심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 신앙적 열매를 이루는 실천적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설교를 듣고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있다. 이러한 성도들은 유명 목사의 차원 높은 설교를 듣고 만족하기 위하여 원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대형교회들을 찾아다닌다. 설교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설교 취향은 다양하다. 어떤 성도들은 학문적, 논리적, 설교를 선호하는가 하면 어떤 성도는 강복위주 설교를 선호한다. 또 어떤 성도는 웃고 즐길 수 있는 설교를 선호하는가 하면 비판적 정죄적 설교를 즐거워하는 성도가 있고 윤리적 도덕적 설교를 좋아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사랑과 자비의 설교를 좋아하는 성도도 있다. 한편 설교 중심의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듣는 것에는 적극적인 반면에 실천하는 것에는 매우 소극적이다.

  이러한 신앙은 결코 바람직한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들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열매로 결론된다. 신앙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성도들은 듣는 일이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차원 높은 설교를 듣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지만 신앙의 정립이 된 경륜 있는 성도들은 듣는 위주의 신앙적 삶에서 상승 초월하여 전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19) 목회자 추종 신앙.

 

  기독교인들 중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목회자를 섬기고 추종하는 신앙적 삶을 사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실제로는 목사를 섬기고 추종한다. 이러한 자들은 목사가 비 진리와 불법, 편법, 위법, 등등을 행사하며 성도들을 착취하고 갈취하며 심지어는 성도들을 축출하여 교회를 파탄으로 이끌어 가도 오직 목사에게 절대 충성하며 그 목사가 임지를 옮기면 직장을 옮기고 이사하여 따라 가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니며 충성하고 맹종한다. 이러한 일들은 특히 여자 성도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데 저들 중에는 자신이 추종하고 섬기는 목사가 집회하는 부흥회를 따라 다니느라 가정조차 돌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신앙은 분명한 오류이다. 그리고 성도가 이러한 신앙 소유한 것에는 목사의 책임이 크다. 목사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는 신앙을 형성시켜 주어야지 자신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는 신앙을 형성시켜 주면 안 된다.

 

(20) 귀신론자.

 

  한국 기독교 이단 중에 귀신론 주의자들이 있다. 김기동 이초석을 대표로 하는 소위 <베뢰아> 주의자들은 모든 교리를 귀신론에 연결시키어 감기나 몸살 같은 질병도 귀신의 소행으로 주장하는가 하면 자동차에 연료가 떨어진 것까지도 귀신의 소행으로 간주한다. 저들은 아예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자체를 사단과의 전쟁으로 귀결 짖는다. 저들에 의하면 기독교의 본질은 사단과의 전쟁이며 따라서 기독교는 귀신을 박멸하여 사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 이러한 신앙은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 신학을 심히 오류, 변질시킨 것으로서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기독교는 사단과의 전쟁을 위하여 설립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설립되어졌다. 사단의 능력이 대단하고 또한 사단의 공격이 극심할지라도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중 하나에 불과하며 사단과 교회와의 싸움은 애당초부터 성립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교회에 대한 승부를 선포하심에 있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라고 선포하심으로서 일찌감치 교회의 승리를 선포하셨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단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두려워하며 그들과의 전쟁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아예 무시하고 상대조차 할 필요 없으며, 그것들이 공격하거나 접근하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능력으로 사정없이 패퇴시키는 것이다. 사단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두려워하고 신경 쓰면 계속하여 공격하거나 접근한다. 반면에 아예 무시하고 상대조차 안하면 전혀 공격하거나 접근하지 못한다.

 

(21) 종말론적 신앙.

 

  기독교를 표방하는 사이비 이단자들 중에 각종 종말론주의자들이 있다. 종말론주의자들의 출현은 초기 신약 기독교 역사 이래 세계적으로 수없이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기독교 교회 회의와 기독교 신학자들을 통하여 정죄되고 퇴출되었으며 기독교 교회 회의와 기독교 신학자들의 정죄 없이도 스스로 궤멸되고 사멸되었다. 초기 신약 기독교 시대의 종말론은 대체적으로 <마24장>의 예수 그리스도 경고와 <행1:4> <행1:9-11> 등등을 곡해한 것에서 비롯되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곡해로 인한 종말론 사상들은 그 성경 말씀들에 대한 조직신학적 해석이 정립되어짐으로서 정죄되고 퇴출된 후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이비 이단자들에 의하여 종말론들이 다시 등장하였고 신학이 없는 일부 목회자들이 이에 가세함에 따라 크게 성황 하였다. 반면에 종말론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얼마동안 세상을 시끄럽게 하다가 스스로 궤멸, 자멸, 하였고 어리석은 몇몇 추종자들만이 산속 깊이 은거하거나 또는 소단위 그룹을 형성하여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바로 정립한 기독교인들은 각종 종말론이 극성스럽게 난무하여도 전혀 요동하지 않고 정상적인 신앙을 유지한다. 그들은 종말론주의자들의 주장이 매우 허구적인 것을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통하여 이미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의 때가 아직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을 통하여 알고 있는 것이다.

 

(22) 서원.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에 관계없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임의적 서원을 한 후 그 서원을 지키기 위하여 무리하거나 비정상적인 일들을 진행시키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재물, 사업, 자녀, 건강,> 등등을 요구하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시면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드리겠다는 조건적, 임의적, 서원을 한다. 특히 아들 낳기를 소망하는 성도들과 자신의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이 한나의 서원<삼상1장>을 근거로 하여 <첫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드리겠다>는 서원을 한다. 저들은 첫 아들을 낳았을 때에 그 아들이 자신의 서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과 전혀 관계없거나 또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각종 오류를 범한다. 그리하여 저들은 본인의 <신앙, 사명의식, 자질, 능력,> 등등에 전혀 관계없이 그를 목사로 세운다. 서원자들은 본인이 전혀 하나님의 종이 될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질, 능력, 등등이 전혀 목사가 될 수 없는 자이거나 심지어는 기본적인 신앙조차도 정립되지 않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억지로 강제로 밀어붙이어 목사로 만든다. 그리하여 전혀 목사가 아닌 목사,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목사들을 만들기까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드리겠다는 서원이 아무런 조건이나 목적이 없이 다만 하나님의 성은에 감격한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임의로 서원하고 그 서원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관계없이 행동하지 않아야 한다. 한편 어떤 것을 요구하면서 그것이 요구대로 이루어졌을 때에 <무엇을 어떻게> 드리겠다는 서원은 이미 조건과 목적이 전제된 것이므로 불충하고 불순하다. 특히 하나님의 종에 대한 서원은 하나님의 뜻에 관계없이 임의대로 서원한 것이므로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이지 우리의 의지, 욕심, 요청, 등등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오류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서원<맹세>를 절대 금지시켰고<마5:34-36> 하나님께 함부로 서원<맹세>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입다와 그의 딸을 통하여 정립시켜 주셨다.<사11:30-31>

 

마. 6. 신학에 의해 정립된 신앙.

 

  우리는 앞장을 통하여 신앙은 신학에 의하여 정립되어질 때에 바른 신앙이 되며 신학은 신앙의 열매를 요구한다는 것을 정리하였다. 이와 같은 신앙의 원리를 총체적으로 정리하면 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신앙>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어 드리는 신앙>으로 결론되어진다. 이러한 신앙의 원리를 오해하여 신학이 우리들에게 매우 어마어마한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섭리>를 전제로 하여 정립되었다. 따라서 신학이 요구하는 신앙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의하여 <우리가 충분히 행할 수 있는 신앙>을 요구하며 <우리가 충분히 행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지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전제된 신앙>을 요구한다. 신학이 요구하는 이러한 신앙은 자녀로서의 신앙이 있고 하나님 종으로서의 신앙이 있다.

 

(1) 1) 자녀로서의 신앙.

 

(1) 하나님의 나라와 하니님의 의를 이루는 신앙.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명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각각 두 가지로서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나라.

 

A. 천국.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 백성으로서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취득한 천국 시민권자로서 천국 시민의 지위와 인격과 품위에 맞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구하는<세우는> 것이다.

 

B. 현세.

 

  현세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하에 통치되고 운영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따라서 현세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당연히 하나님의 법과 진리에 의하여 통치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세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법과 진리에 의하여 통치되고 운영되지 않는다. 각종 불법, 편법, 위법, 탈법, 불의, 타락, 오류, 등등이 난무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빛과 소금의 특전사>로 임명하시고 그들에게 <빛과 소금의 특전사>적 삶을 살아 현세의 각종 불법, 편법, 위법, 탈법, 불의, 타락, 오류, 등등을 정화하고 개선하라고 명령하신다. 즉, 현세를 하나님의 법과 진리에 의하여 통치되고 운영되는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가정, 직장, 이웃, 사회, 등등의 각 영역에서 <빛과 소금의 특전사>로서 <빛과 소금의 특전사>적 삶을 살아 현세의 각종 불법, 편법, 위법, 탈법, 불의, 타락, 오류, 등등을 정화하고 개선하는 삶을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세우는>것이다.

 

② 하나님의 의.

 

A. 하나님의 의<義-진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의<義-진리>를 구하는<세우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법과 진리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인정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 자녀로서의 지위와 인격과 품위에 맞는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며 <빛과 소금의 특전사>적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러한 신앙적 삶을 살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義-법과 진리-말씀>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러한 신앙적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반대적인 삶을 살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義-법과 진리-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자녀로서의 지위와 인격과 품위에 맞는 신앙적 삶과 <빛과 소금의 특전사>적 삶을 살아 하나님의 의<義-법과 진리-말씀>을 구하는<세우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B. 하나님의 의<意-섭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의<意-섭리>에 절대 순종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의 유익과 평안을 고집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불순종하거나 저항하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의<意-섭리>를 무시하는 악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이 과연 하나님의 섭리인지 알 수 없다고 하거나 또는 왜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항변한다. 초신자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충분한 변명이며 또한 왜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항변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여 주셨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모른다고 하는 것과 또한 왜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항변하는 것은 야단맞아야 하는 불경<不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자신의 유익과 형편에 적용하여 그것이 자신의 유익과 형편에 유익하거나 맞으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고 반대로 그것이 자신의 유익과 형편에 어려움을 주게 되는 경우에는 갈등하면서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섭리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자신의 유익과 형편에 유익하거나 맞으면 열심이 일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자신의 유익과 형편에 어려움을 주게 되는 경우에는 자신이 과연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갈등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意-섭리>를 구하는<세우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8:22>

 

  하나님의 의<意-섭리>를 구하는<세우는> 것은 자신의 유익과 형편을 다 챙긴 후에 남은 것으로 구하는<세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가 하나님의 의<意-섭리>를 구하는<세우는> 자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자기를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것을 크게 세우는 것이며 많이 얻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마6:33>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워주신 십자가는 고난의 십자가, 희생의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어 드리는 신앙.

 

① 하나님의 영광

 

A. 하나님 영광의 정의.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무엇에 의하여 세워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자존하심을 통하여 이미 영원히 세워졌고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은 자체적인 영광이며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다.

 

B. 하나님께서 받으시려는 영광.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통하여 받으시려는 영광은 이미 세워지고 이루어진 영광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고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때문에 받으시는 아픔과 고통과 희생이 계산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려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녀들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며 은총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께 상급과 면류관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일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참으로 작고 보잘 것 없는 결과>들을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매우 대단한 것>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으로 확대하시어 그들의 공로를 칭찬하시고 기뻐하시면서 그들에게 상급과 면류관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까지 칭찬하신 <욥>이 과연 칭찬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인정하신 노아가 과연 의인이었을까?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예쁘고 사랑스럽고 의인이고 지혜롭고 똑똑하고 잘하는 것으로 보이시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는 섭리적 주제 하에 오히려 온갖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시면서 자녀들에게 영광과 기쁨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② 하나님의 기쁨.

 

A. 하나님 기쁨의 정의.

 

  하나님의 기쁨은 인간적 차원의 기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은 이미 자체적으로 세워지고 이루어진 기쁨으로서

 

a. 주권적 차원에서 자존자 하나님으로서의 절대적 기쁨이며

b. 속성적 차원에서 완전무결한 자로서의 영원무궁한 기쁨이며

c. 섭리적 차원에서 통치자 운영자로서의 권위적 기쁨이다.

 

B. 하나님께서 받으시려는 기쁨.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통하여 받으시려는 기쁨은 이미 세워지고 이루어진 기쁨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고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를 통하여 기쁨을 받으시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 때문에 받으시는 아픔과 고통과 희생이 계산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통하여 기뻐하시려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녀들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며 은총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기대하신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순종하여 살라고 계속하여 명령하시는 것은 자녀들의 순종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족하시려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녀들이 그러한 삶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자녀로서의 <지위와 인격과 품위에 맞는 신앙적 삶>과 <빛과 소금의 특전사적 삶>을 살면 사람들은 그들을 인정하고 존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자녀들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중 받기를 기뻐하시어 그들의 신앙적 삶을 재촉하시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께 상급과 면류관 받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께 상급과 면류관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일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참으로 작고 보잘 것 없는 결과>들을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매우 대단한 것>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으로 확대하시어 그들의 공로를 칭찬하시고 기뻐하시면서 그들에게 상급과 면류관을 주신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들의 영광과 기쁨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받으신다는 섭리적 주제 하에 오히려 온갖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시면서 자녀들에게 영광과 기쁨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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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신앙의 원리를 아는 자들은 결코 어떤 것이 과연 하나님의 섭리인지 알 수 없다고 하거나 또는 왜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항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니님의 의를 이루는 신앙>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어 드리는 신앙>은 결국 자신의 상급과 면류관과 영광과 기쁨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이며 사랑이고 은총이기 때문이다.

  신학이 요구하는 차원의 신앙적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도들은 법적 행정적으로는 거듭난 의인들이지만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상태적인 의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충분히 그러한 신앙적 삶을 살 수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그러한 신앙적 삶을 살 수 있도록 후원하고 지원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촌각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함께하심 속에서 충분히 그러한 신앙적 삶을 살게 된다.

 

2) 하나님 종으로서의 신앙.

 

  신학이 요구하는 성도들의 신앙적 삶이 개인들에게 적용될 때에는 일상적 삶에 국한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적용될 때에는 보다 높은 차원의 신앙적 삶으로 요구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1-33>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8-10>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실제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삶-마8:20>을 사심으로서 하나님 종들의 삶에 대한 지표를 세우셨다.

  바울은 하나님 종들의 삶을 <마지막까지 앞만 보고 달리는 달음질 하는 자-고전9:24>로 정의하였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선포한다.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하여 하나님 종들의 삶은 현세의 <재물, 명예, 권세, 권위,> 등등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의,식,주-衣食住>까지도 초월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버리며<마8:22> 사지<死地>라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달려간다<요21:19>. 그들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는 삶>이다. 때문에 하나님 종들의 신앙적 삶은 신앙적 삶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사명적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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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신앙적 삶>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신앙적 삶> <빛과 소금의 전사로서의 신앙적 삶>은 인간으로서는 절대 살 수 없는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충분히 살 수 있는 삶이다. 인간으로서는 타락한 본성 때문에 욕심을 버리지 못하므로 그러한 삶을 절대 살 수 없는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부여된 인격으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고자 하는 신앙으로 그러한 삶을 충분히 살 수 있다. 그리고 인간들은 성령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없으므로 그러한 삶을 살 수 없는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 문제는 오직 한 가지이다. <욕심을 버리느냐? 버리지 않느냐?>이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계속 거부하며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그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욕심을 버린다면 그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비 진리적 삶을 사는 것과 심지어는 그러한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종들이 비 진리적 삶을 사는 것은 모두 욕심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