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내용!! 강해!!

[스크랩] 빌립보서 주석

하나님아들 2012. 11. 26. 00:19

빌립보서 제 1 장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1:1-6).

  

감독은 목사이다.

 

칼빈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1:1)”에 나오는 감독을 목사와 같은 뜻으로 해석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1.1).

 

또한 칼빈은 집사들은 폭넓게 본다. 즉 “가난한 자를 돌보고 도와주는 자에게 또는 도덕적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지정된 장로들(pro senioribus)에게 두 가지로 사용된다. 바울은 전자의 의미를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했는데 나는 구제품을 주고 받는 것을 관리했던 청지기로 생각한다”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1.1).

  

구원의 확신에 관한 삼단논법

 

칼빈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마음에 새기시는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삼단논법이 있다고 한다. 즉 “항상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을 마음속에 생각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선지자가 증거한 대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시지 않는다(시138:8; 사64:8). 우리는 그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속에 시작하신 것을 완전히 이루실 것이다”라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1.6).

  

선택받았다는 증거는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이다.

 

또한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증거는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하여 알 수 있으며, 왜냐하면 성령이 자기의 부르심의 증인이시기 때문이라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1.6).

 

자기자신과 타인에 대한 구원의 확신은 구별된다.

 

칼빈은 자기자신에 대한 구원의 확신은 성령이 친히 자기 자신에게 증인이 되어 주시므로 알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구원의 확신은 오직 “성령의 밖으로 나타나는 효험외에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법칙이라고 한다. 즉 칼빈은 이 두가지를 구별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1.6).

 

1절. 감독들과.

 

p.471.

 

바울은 그 존귀함 때문에 목회자들에게 각각 다른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여기서 ‘감독’이라는 말이 한 교회에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적용된 것으로 보아 모든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이름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독과 목사는 같은 뜻이다.

 

집사들.

 

이 명칭은 가난한 자를 돌보고 도와주는 자에게 또는 도덕적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지정된 장로들(pro senioribus)에게 두 가지로 사용된다. 바울은 전자의 의미를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했는데 나는 구제품을 주고 받는 것을 관리했던 청지기로 생각한다.

 

6절.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p.473.

 

교인들의 장래에 대한 바울의 확신은 그에게 기쁨을 더하여 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인간이 육체의 질병과 나약함, 위험, 방해 속에서 감히 내일을 약속할 수 있단 말인가?’ 바울은 분명히 이 확신을 인간적인 우월성이나 불변성에서 찾은 것이 아니었고,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선언하심에서 얻었다......그러므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하여 묵상하게 하심으로 장래에 대한 용기와 확고한 소망을 갖게 하고, 항상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을 마음속에 생각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선지자가 증거한 대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시지 않는다(시138:8; 사64:8). 우리는 그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속에 시작하신 것을 완전히 이루실 것이다. 내가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한 말 속에는 단순히 창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어 그의 아들로 삼아주신 것을 뜻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성령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가 (p.474)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구원을 단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여기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가지는 것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성령은 자기의 소명에 대해서 자기에게 증인이 되어 주신다. 성령은 선택받은 자 개개인의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성령의 밖으로 나타나는 효험외에는 알 수가 없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보여주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신앙의 확신이란 자기 속에서 일어나서 자기 안에 머무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번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어떤 증거를 느낄 수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즉각적으로 선한 소망을 가짐으로써,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지 않고 사랑으로 공평하고도 인간적인 판단을 받을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일반적인 법칙에 불과하므로,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자신의 노력을 없애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칼빈.빌립보서주석.(1:7-26).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1:7-26)

 

목사들을 괴롭히는 위선자들이 있으나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칼빈은 위선자들이 목사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복음의 무기를 빼앗는다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1.16). 오늘날 거짓된 자들이 순수한 복음을 더럽히고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복음을 왜곡하는 자들을 보면서 바울이 당한 고난을 우리도 함께 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시기심으로 바울을 괴롭히려는 욕망은 오히려 복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을 칼빈은 “놀라운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1.16).

  

믿음은 선한 양심의 기초이다.

 

칼빈은 “오 선한 양심! 우리를 얼마나 강하고 담대하게 해주는가! 믿음은 선한 양심의 기초인 것이다. 아니 양심의 선한 것 그 자체이다”라고 한다. 즉 믿음은 선한 양심의 기초라는 것이다(칼빈 빌립보서주석 1.23).

  

칼빈주석 발췌(1:7-26)

 

16절. 저들은 다툼으로......

 

위선자들이 선하고 경건한 목회자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복음의 무기를 빼앗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님을 여기에서 본다. 분명히 바울은 자기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여기에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시기심으로 가득 찬 자들이 바울을 꺾으려는 욕망이 달성되었다면 우리는 그들의 심술굳은 노력을 통해서 오히려 복된 결과를 가져오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2절. 내가 ......끼었으니.

오 선한 양심! 우리를 얼마나 강하고 담대하게 해주는가! 믿음은 선한 양심의 기초인 것이다. 아니 양심의 선한 것 그 자체이다.

 

칼빈.빌립보서주석.(1:27-3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1:27-30).

 

거짓된 교리를 성도들은 영과 혼의 이중연합으로 배격해야 한다.

 

빌립보교인들에게 거짓된 교리를 함께 힘을 모아서 배격하도록 하고 있다. 칼빈은 여기서 영과 혼이 연합되는 이중 연합을 바울이 요구한다고 한다. 영은 이해를 의미하며, 혼은 의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칼빈 빌립보서주석 1.27).

  

핍박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칼빈은 핍박을 “묵묵히 그리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1.28).

 

믿음은 핍박을 끝까지 견디기 때문에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이다.  

칼빈은 “믿음이란 핍박을 끝까지 견디는 것인 만큼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라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1.29).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너무 높은 지식이어서 하나님이 보여주실 때에만 알수 있다.

 

칼빈은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너무도 높은 지식이어서 우리의 노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잠깐 동안 나타내 보여주실 때에만 우리의 나약함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있음을 우리는 매일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1.29).

  

칼빈주석 발췌(1:27-30).

 

27절. 일심으로 서서.

 

바울은 이와 같은 교정수단으로 그럴 듯 하고 새로운 교리를 배격하기를 바라면서 영과 혼이 연합되는 이중 연합을 요구한다. 첫째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들 가운데서 서로 뜻이 화합하는 것이요, 둘째로는 마음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두 말이 서로 연결될 때에는 영은 이해를, 혼은 의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먼저 마음이 질서있게 화합되면 뜻도 하나가 되어진다.  

 

28절. 저희에게는 ......빙거요.

 

p.490.

 

헬라어에 알맞는 의미는 다른 사람들이 ‘이유’라고 할만한 강제적인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악한 자는 주님을 대항하여 싸움을 벌였을 때 벌써 그 반역의 싸움으로 자기들에 대한 멸망의 빙거를 가지게 되며, 경건한 자들을 대적하기를 맹렬히 하면 할수록 자기들의 멸망을 더욱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악한 자들에게서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을 구원의 동기로 어떤 곳에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엔데익신)이란 말 대신에 (엔데이그마)란 말을 사용함으로 구원의 빙거 또는 증거(살후1:5)라 했고, 다른 곳에서도 종종 사용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대적에게서 공격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할 때는 특별한 위로를 받는 것이요 우리의 구원의 증거를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핍박이란 묵묵히 그리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악한 자는 자기들의 정죄의 빙거를 가진다. 이는 자기들을 멸망시킬 돌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29절. 믿을 뿐......

 

p.491.

 

바울은 믿음과 십자가를 불가분리의 관계로 연결을 맺음으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핍박을 견딘다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음을 알게 하여 준다. 바울은 그들이 택함 받은 것이 그리스도가 자신과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큼이나 십자가 받은 것이 그리스도가 자신과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큼이나 십자가와 분리할 수 없음을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분명히 증거하기를 믿음이란 핍박을 끝까지 견디는 것인 만큼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너무도 높은 지식이어서 우리의 노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잠깐 동안 나타내 보여주실 때에만 우리의 나약함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있음을 우리는 매일 경험하고 있다. 바울이 더욱 귀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또는 최소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근거로 하여 얻은 것이다. 이로써 바울은 모든 공로의 개념을 배제한다.

 

칼빈.빌립보서주석.(2:1-6).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2:1-6).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

 

칼빈은 빌립보서 2장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The form of God)은 하나님의 위엄(his majesty)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해석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6.).

 

칼빈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그리스도는 영원한 신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며, 또한 그의 낮아지심은 자발적인 것이요 필연적이 아님(his abasement was voluntary, not of necessity)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칼빈에게 독특한 것은 여기서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내가 분명히 알기로는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Christ's divine essence)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또한 여기서 분명히 아리안주의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본체(the essence of God, 조창훈주; “하나님의 본질”)를 빼놓는다면 어디에서 취한 것이 하나님과 동등(equality with God)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칼빈이 왜 그리스도의 신적본질을 이 구절에서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본질을 말하는 것인지는 필자는 이해하기가 어렵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6.).

  

하나님의 사역이 영원한 신성의 증거이다.

 

칼빈은 “하나님은 그의 능력(his excellences)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데, 그의 사역(his works)이 영원한 신성(his eternal Godhead)의 증거가 된다.”고 한다. 이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능력적인 면, 곧 그의 사역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성의 증거이기 때문이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6.).

 

아래는 칼빈주석 본문(발췌)부분이다.

  

6절.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p.495.

 

그러므로 바울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 안에(in the form of God, 조창훈주; 영문판자체로만 볼 때, form은 라틴어판을 참고해야 더 정확하겠지만, 라틴어의 forma라고 추정된다. forma는 형상이라고 보통 해석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 안에”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계셨으므로 자신을 하나님의 본체로(in that form, 조창훈주; “그 형상 안에”) 보여주는 것을 부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음에도 자신을 비우셨다는 것이다(Hence he sets out with this -- that, inasmuch as he was in the form of God, he reckoned it not an unlawful thing for him to shew himself in that form; yet he emptied himself.)......

 

여기서 하나님의 본체(The form of God, 조창훈주; “하나님의 형상”)는 그의 위엄을 의미한다(The form of God means here his majesty). 왜냐하면 인간이 외모를 통해서 그 본체(by the appearance of his form, 조창훈주; “그의 형상의 외모에 의해서”)가 알려지는 것처럼,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엄은 바로 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For as a man is known by the appearance of his form, so the majesty, which shines forth in God, is his figure.)......

 

왜냐하면 요한복음 17:5에서 그가 말한 대로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기 전에 가지셨던 하나님의 지혜는 초라하고 천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하나님의 웅장한 영광이었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분이었으므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보여줄 충분한 권리가 있었지만 사실 그대로 보이지 않으시고 인간이 보기에 그가 그러한 권리를 가지셨다고 볼 만한 모습을 취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고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없다. 바울이 “여기지 아니하시고” 했을 때는 ‘그는 참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합당하며 정당함을 알고 있었다’는 뜻을 말하는 것으로 그의 낮아지심이 자발적인 것이요 필연적이 아님(his abasement was voluntary, not of necessity)을 우리에게 알게 하여 준다......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his eternal divinity)이 이 말씀 안에 분명히 언급되고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는 자는 장님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분명히 알기로는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Christ's divine essence)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리스도는 피조된 하나님이요, 성부보다 못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과 동등함(he was consubstantial, 조창훈주; “그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다.”)을 반대하는 아리안주의의 불경스러움을 논박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 오직 하나님의 본체(the essence of God, 조창훈주; “하나님의 본질”)를 빼놓는다면 어디에서 취한 것이 하나님과 동등(equality with God)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이사야가 부르짖은 분과 같으시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있노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 하리라”(사48:11).  

 

본체(Form).

 

이 말은 일반적으로는 ‘모습(figure)’ 혹은 ‘외모(appearance)’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나도 이 점에 대해서는 쉽게 인정하지만 하나님에게 그 형상(such a form)을 적용 할 때는 거짓이나 꾸며댄 것은 없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능력(his excellences)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데, 그의 사역(his works)이 영원한 신성(his eternal Godhead)의 증거가 된다(롬1:20).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적 본체(Christ's divine essence, 조창훈주;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는 그리스도의 위엄(Christ's majesty)으로부터 올바르게 증명되며, 그 위엄은 스스로 낮아지시기 전에 성부와 동등으로 취하셨다(which he possessed equally with the Father). 모든 마귀들이 나로 하여금 이 구절을 의곡되게 할지라도 최소한 나에게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본체(his essence, 조창훈주; “그의 본질”)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빌립보서주석.(2:7-8).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7-8).

 

그리스도의 낮아지심(비하)

 

칼빈은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9)”를 해석하면서, “여기서 ‘비운다’(This emptying)는 것은 ‘낮추셨다’(the abasement)는 것과 같은 말”이라 한다. 그리스도께서 신성면에서는 “자기의 영광을 축소시킨 것이 아니라 감추심으로(not by lessening it, but by concealing it) 간직하셨다.” 유사한 표현으로 칼빈은 “나는 육신의 낮아지심(the abasement of the flesh)을 자기의 신적 위엄(his divine majesty)을 가리우는 베일(a vail)과 같은 것에 불과했다고 답한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여기서 그리스도는 분명히 여전히 신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또한 베일같이 인간의 육체를 입으심으로 그 신성이 여전히 존재하나, 가리워져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7.).

 

또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2:8)”란 구절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가 겸손의 모형(such a pattern of humility)이라고 한다. 즉, “주님되시는 그리스도가 종이 되는 것은 크나큰 겸손이다.”라는 것이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8.).

 

아래는 칼빈주석 본문(발췌)부분이다.

 

7절. 자기를 비어.

 

여기서 ‘비운다’(This emptying)는 것은 ‘낮추셨다’(the abasement)는 것과 같은 말로써 그 다음 말들을 보아 이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표현은 ......즉 아무 것도 없게 한다는 말을 사용했다. 실은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Godhead)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잠깐 동안 중지하시고(he kept it concealed for a time) 육체의 나약함 아래서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는 자기의 영광을 축소시킨 것이 아니라 감추심으로(not by lessening it, but by concealing it) 간직하셨다. “그렇다면 그는 인간으로서 행하셨단 말인가?”하는 질문이 있다. 에라스무스도 이 말에 동조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기 전 하나님의 본체(the form of God, 조창훈주; “하나님의 형상”)는 어디에 있었는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답하기를 바울은 그리스도를 육신 속에 나타난 하나님(God manifested in the flesh), 즉 전체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비운다(this emptying)’는 것은 오직 그의 인성에만 속한다(this emptying is applicable exclusive to his humanity)고 한다. 이것은 마치 내가 인간을 ‘인간은 죽는 존재이므로 단지 세상만을 생각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나는 실제로는 전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단지 인간적인 면, 즉 육체만을 죽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한 품격에 두 가지 성질(Christ has one person, consisting of two natures)을 가졌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아들이신 그가 실제로는 하나님과 동등(in reality equal to God)이심에도 불구하고 육신 가운데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는 자기의 영광을 억제하고 종의 형체(the appearance of a servant)를 가지셨다고 한다(it is with propriety that Paul says, that he who was the Son of God, -- in reality equal to God, did nevertheless lay aside his glory, when he in the flesh manifested himself in the appearance of a servant).

 

둘째로 야기되는 문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이적과 능력을 통해 증명하였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것이 항상 나타났다고 요한이 증거한 자(요1:14)를 어떻게 비웠다고 말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나는 육신의 낮아지심(the abasement of the flesh)을 자기의 신적 위엄(his divine majesty)을 가리우는 베일(a vail)과 같은 것에 불과했다고 답한다. 이것은 그가 부활 후까지는 변형된 모습이 공개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마17:9). 그러나 그는 자기의 죽음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았을 때에는 말하기를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요17:10)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또 다른 곳에서도 가르치기를 “그는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1:4)고 한다. 또 다른 곳에는 (고후13:4) “그는 육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고난당하셨다”고 한다. 요컨대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은 그리스도 안에서 외면적 모습이 낮아지는 방법으로 나타나셨는데 이것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비워진 것(brought down to nothing)이라는 말이다. 이는 그가 종의 형체(the form of a servant)를 입으셨고 우리와 같은 본성(our nature)을 취하셨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종이 인간의 종이 인간의 종이 되신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할례의 수종자(롬15:8)라 불렀고, 그리스도는 스스로 자기를 증거하기를 섬기러 온 자(마20:28)라 했으며, 이사야는 벌써 오래 전에 같은 것을 예언하기를 ‘보라, 나의 종, 등등’(사42:1)이라 했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그런데 바울이 의도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사람의 수준으로 낮아졌기 때문에 그 모양(appearance, 조창훈주; 위에서는 “외모”로 번역하였음)이 사람의 일반적인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말씨온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자기들이 상상해 낸 허영(the phantasm)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별로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반박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이나 세상에 계실 때 사신 상태만을 단순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진실한 자의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의 상태와 구분된 행동으로 자기를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그처럼 사신 것이 아니고 자신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보는 방법으로 사셨지만 아무리 거룩한 자라 할지라도 결코 같을 수 없는 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말씨온주의자들은 상태의 유사성(similarity of condition) 때문에 본성의 실재(reality of nature)를 부정하는 아주 어린 아이와 같은 이론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8절. 나타나셨으매(영문판에서는 7절에 포함된다).

 

p.499.

 

이는 ‘알리어진다(known)’ 또는 ‘보여진다(seen)’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대로 바울은 판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이 앞에서는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나님이시오, 성부와 동등이라고 함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미천하고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알려진다(he was reckoned)고 말한다. 우리는 항상 내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그 복종이 자원하는 것(such abasement was voluntary)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복종하셨으니(영문판에서 8절).

 

주님되시는 그리스도가 종이 되는 것은 크나큰 겸손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기를 죽지 않으실 뿐 아니라 삶과 죽음의 주님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성부에게 복종하셨고 심지어는 사망에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이것은 지극히 낮아지심이었다. 특별히 바울이 곧 첨가하여 강조한 죽음의 종류를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그의 죽으심은 사람 보기에도 비천한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도 저주이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러한 겸손의 모형(such a pattern of humility)은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끌만한 것이었지만 이를 말로 표현하기란 그 위대함에 비추어 볼 때 불가능한 일이다.

 

칼빈.빌립보서주석.(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그리스도의 높으심

 

칼빈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겸손을 따르는 것을 “그리스도의 형상(his image)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하나님은 “기꺼이(the more cheerfully)” 그리고 자발적으로(voluntarily)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 그리스도 자신의 공로를 위해서가 아니라고 한다. 또한 칼빈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대로 “그리스도는 성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보내어져 그의 전생애가 우리 앞에 놓여진 거울(a mirror)처럼 되어졌다.”고 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뛰어난 이름(빌2:9)”을 주셨는데, 이 이름은 ‘위엄’(dignity)을 의미하며, 이 이름은 신적(a Divine name)이라고 한다. 즉 “그리스도에게 최고의 권세(supreme power)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최고의 영광된 수준에 계시기(he was placed in the highest rank of honor)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의 “그 발음 속에 모든 권세가 들어있는 마술적인 이름”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그 음절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르본 학파의 궤변이다.”라고 비판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9.).

 

칼빈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빌2:10)”을 천국에서 지옥에 이르는 모든 자들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황주의자들의 연옥교리를 비판한다. 마귀들이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자발적인 복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빌2:10)”을 해석하면서, 칼빈은 여기서 경배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속하는 것인지 인성에 속하는 것인지를 생각한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육신 속에서 나타내신 분이었으므로(viewed as God manifested in the flesh)(딤전3:16) 그리스도의 전 성품(Christ's entire person)에 그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본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육신을 입고 연약함 아래 감추이신 분이므로 인성에서만 자신을 낮추신 것도 아니요 신성에서만 자신을 낮추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도 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최후 심판의 날까지는 완성되지 못한 채 매일매일 확장되며 증진된다고 본다”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10).

 

아래는 칼빈주석 본문(발췌)부분이다.

 

9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를 권고 받아 낮아지는 것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일로 깨달아지기 전에는 겸손한 자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his image)을 이루어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듣게 될 때에는 우리가 보다 기꺼이(the more cheerfully)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생각이 일어나게 된다. 스스로 겸손하여 자발적으로(voluntarily)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축복이 된다는 것을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를 그 예로 보여준다.....

 

이 구절은 궤변가들에게 그리스도는 먼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공로를 행하였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생각이 옳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이 거짓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어떤 이유를 위해 오셨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호하게 만드는 세속적인 생각을 가장 먼저 피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것은 그가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 자신을 위해 필요한 공로의 사역을 담당했다고 하는 주장이 사단의 꾀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혼합되지 않은 선을 보고, 맛보고, 깨달으며, 느끼고 알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은 그 자신과는 무관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버렸으며, 그의 삶은 온전히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할 때마다 그 유익과 고귀함을 말해준다. 즉 그의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화목되고, 모든 의를 회복하며, 오염에서 깨끗게 되고, 삶을 얻으며, 생명의 문이 열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누가 중요한 열매는 그리스도 자신 안에 있었으며, 우리를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을 생각했으며 우리를 구원하기 전에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공로를 세우셨다고 하는 사단의 선동에 반대하고 나서지 않겠는가?

 

더욱이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반대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거짓된 교훈을 세우고자 바울의 말을 불경스럽게 악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추론적 표현은 여기서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문제, 즉 인간이 신적 영광에 도달하는데 그리고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얻는데 공로를 세웠다는 주장을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리석다기보다는 말하기조차 두려운 생각이다......

 

그리스도는 성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보내어져 그의 전생애가 우리 앞에 놓여진 거울(a mirror)처럼 되어졌다. 거울(a mirror)은 밝지만 스스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유용하고 편리하도록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을 찾으시거나 받으신 것이 아니라 전혀 우리들을 위해서 하셨다. 성부와 동등한 자가 높임을 받기 위해서 무엇이 새롭게 필요한가를 나는 묻고 싶다. 그러면 소르본 학파의 궤변주의자들은 자기들의 빗나간 생각을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이라는 것을 경건한 독자들은 배우게 될 것이다.

 

뛰어난 이름을 주사.

 

여기서 ‘이름’은 ‘위엄’(dignity)을 대신한다. 이것은 모든 언어에 매우 공통적인 말이다......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최고의 권세(supreme power)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최고의 영광된 수준에 계시므로(he was placed in the highest rank of honor) 하늘이나 땅에서 그와 동등한 권위(dignity)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신적(a Divine name)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바울은 이 사실을 온 세상이 하나님께 경배할 것을 전파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서 설명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소개하기를 “나는 살아 있노라.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노라 하였노라”(사45:23). 이제 여기서 경배는 특별히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공교하게 생각하기를 ‘예수’라고 하는 거룩한 이름은 여호와에게서부터 왔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유에서 신실함을 찾지 못했다. 나는 쓸데없는 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추리는 이처럼 중요한 문제를 사소한 문제로 만들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요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자들은 바울이 단 두 음절로 자기가 의미하고 있는 것을 함축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위엄에 대해서 말한다고 함으로써 그 참된 의미를 도무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알렉산더의 이름 속에서 그에게 필요한 이름의 위대함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노력은 쓸데없는 것이요 바울이 의도하는 바를 새로운 것으로 바꾸려는 책략이다. 그러나 보다 더 추악하고 야만적인 것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르본 학파의 궤변이다. 이들은 마치 그 발음 속에 모든 권세가 들어있는 마술적인 이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는 반대로 그 음절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10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

 

바울이 천국에서 지옥에 이르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예속했다고 하기 때문에 교황주자들은 이 말씀이 연옥교리를 지지해 준다고 하는 어리석은 말을 한다. 저들의 추리는 이렇다. 마귀들은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는 데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갖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역하도록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들이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도 두려워 떨고 있다(약2:19)는 말씀이 없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들이 언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오는가? 참으로 내가 알기로는 그들은 자기가 원해서 그리스도에게 예속되거나 기꺼이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요 또 하지도 않을 것이다. 바울도 여기서 자발적인 순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도 그들에게 (안티스트레폰)이라는 말로 답변할 수 있다. 즉 ‘그들에 의하면 연옥의 불은 일시적인 것으로 심판날에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데 이 구절은 연옥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이 예언이 심판 날에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절머리 나도록 천박한 사상들을 어린아이보다 못한 사람인들 해롭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사람들도 이 관습에 따라서 존경을 받는 것은 틀림없지만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경배를 무릎을 꿇는 것으로 표시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경배를 드리려고 한다면 마음속으로 주의해야 한다. 외부적인 행동을 통해서도 경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순전히 경배하는 자들을 가리켜 바알의 형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자(왕상19:18)들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경배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속하는 것인지 인성에 속하는 것인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변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성에도 새롭게 주어진 것이 없는 반면에, 인성 그 자체도 각기 분리해서 볼 때 하나님께서 높이신 승귀에 의해서 비로소 영광을 취한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답하기를 다른 많은 경우와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육신 속에서 나타내신 분이었으므로(viewed as God manifested in the flesh)(딤전3:16) 그리스도의 전 성품(Christ's entire person)에 그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육신을 입고 연약함 아래 감추이신 분이므로 인성에서만 자신을 낮추신 것도 아니요 신성에서만 자신을 낮추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높이시기를 미천하고 어두운 세상에 사셨던 바로 그 육신(in the same flesh)을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을 수 있도록 지극히 높여 영광스러운 자리로 올리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바울은 모순을 저지른 것같이 보인다. 롬14:11에서는 한 날에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을 말하고자 할 때에 바로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을 말하고자 할 때에 바로 이 구절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 말씀이 이미 성취되었다면 바울이 여기서 말한 것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타당치가 못하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최후 심판의 날까지는 완성되지 못한 채 매일매일 확장되며 증진된다고 본다. 모든 사람들이 현재 그리스도에게 예속해 있다고 하는 말이나, 이 예속은 부활의 날까지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고 하는 말은 모두가 사실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시작에 불과하고 그 완성은 장래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이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방법으로 적용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다른 모든 예언들이 어느 한 특정한 시기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전 시대를 가리키고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이사야가 말한 대로 영원한 하나님 되심을 추측할 수 있다.

 

칼빈.빌립보서주석.(2:12-16).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2:12-16).

 

겸손을 낳는 두려움은 믿음의 확신을 흔들지 않는다.

 

칼빈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을 해석하면서,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겸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12).

 

또한 “자기 자신의 힘을 믿어 부풀어 오른자는 동시에 방종에 빠져드는 것이 필연적이다”라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12).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이 이 구절이 마음의 확신(assurance of faith, 조창훈주; 믿음의 확신)을 흔들리게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한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떠는 자는 확신이 없기(in uncertainty)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바울의 말이 우리가 일생동안 구원의 확신(assurance of salvation)에 대해서 굴곡이 있어야 할 것으로 말한다고 한다.” 칼빈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두려움의 두 종류를 설명한다. "하나는 겸손을 낳고, 하나는 주저함(hesitation)을 낳는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바로 겸손을 낳는 두려움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두려움은 양심의 평온함을 뒤흔들고 확신(confidence)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확신을 갖도록 해준다(it rather confirm!!s it).”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13).

 

성령의 효과적인 능력으로 우리의 의지와 유효적 능력을 재형성하신다.

 

칼빈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2:13)”을 해석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중생의 영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초자연적 은혜를 의미하고 있다.”고 한다. 칼빈은 궤변가들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를 조화시키는 노력에 대해서 비판을 한다. 어떤 행동에는 의지와 유효적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의지는 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악하여졌지만 하나님께서 재형성시켜 주실 때에는(only when it has been renewed by God) 선하게 되기 시작한다고 본다”고 한다. 또한 “다만 그의 경향성이 성령으로 지배되어질 때에(only when his inclination is regulated by the Spirit of God)선을 행한다”고 한다.

 

즉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감동케 하시어 거룩한 행위에서 완전해지고 유효적인 능력이 갖도록 하신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는 인내가 하나님의 순전한 은사라고 생각한다.”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13).

 

선한의지나 선한행위는 “하나님의 공로없는 자비”에 돌려야 한다.

 

칼빈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을 해석하면서, 궤변철학자들의 공로의 보상에 대한 사상을 비판한다. 칼빈은 우리의 선한의지나 선한행위는 모두 “그의 공로없는 자비(his unmerited mercy)”에 돌려야 한다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13).

 

구원은 우리의 소명의 전과정을 포함한다. 이것을 하나님은 은밀한 사역으로 완성하신다.

 

칼빈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4)”을 교황주의자들은 펠라기우스파가 인간의 능력을 높이듯이 이 구절을 왜곡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공통되는 적용이 되는 말인데,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반반씩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고 칼빈은 비판한다. 칼빈은 본래 이 구절은 “우리의 소명의 전과정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유선택에 따라 정하신 모든 것들의 완성까지를 포함한다고 생각한다(I answer, that salvation is taken to mean the entire course of our calling, and that this term includes all things, by which God accomplishes that perfection, to which he has predestinated us by his gracious choice).”고 한다. 또한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가 아무 할 일도 없이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은밀한 자극을 통해서 우리가 충동을 받아(after having stirred us up by a secret influence) 기쁨으로 일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13).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노력하는 완전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빌2:15)”를 해석하면서,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삶을 살 수 없지만 전심을 다해서 완전해지기를 위해 항상 힘써야 한다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15).

 

아래는 칼빈주석 본문(발췌)부분이다.

 

12절. 두렵고 떨림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복종과 겸손으로써 자기들의 순종을 증명하고 나타내 보이기를 원한다. 선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겸손의 원천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바로 이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힘을 믿고 우쭐대면서 자기 자신만으로 만족할 때에는 맹목적인 신념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교만해진다는 것이다.

 

13절.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아무 것도 보잘 것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모든 거만함을 파괴하는 거대한 대포와 모든 교만을 죽이는 칼을 쥐는 것과 같다.

 

나는 지금 중생의 영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초자연적 은혜를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에는 두 개의 원리적인 부분, 즉 의지와 유효적 능력이 있다. 바울은 이 두 가지가 다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말했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느 편에 더 많은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인가? 그런데 바울이 전체를 단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을 보아 이 양쪽은 다 꼭같은 힘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의지는 기초와 같고 유효적 힘은 완전한 건물의 꼭대기와 같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처음과 나중의 창조자라고 말함으로써 양자와 동등함을 더욱 분명하게 했다. 궤변가들은 이 둘 사이에다가 어떤 것을 인간 편에 남겨두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우리 안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자유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를 조화시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내가 의미하는 자유의지란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자기의 행동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것, 그리고 독특하고 분리된 능력을 말하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수 있다. 나는 용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 자체를 논하고 있다. 그들은 자유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를 조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자유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키어 올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함으로써 자유의지를 구분한다. 그들은 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역시 주셨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의 마음이 단순히 돌아섰거나, 뒤섞어져 있으므로 선한 의지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선한 의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우리가 순전한 은혜가 없이는 선을 조금도 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쳐서 사람을 마치 돌과 같이 만든다고 비난하지만 이것은 수치스러운 행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지를 사실 그대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의지는 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악하여졌지만 하나님께서 재형성시켜 주실 때에는(only when it has been renewed by God) 선하게 되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이도 어떤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경향성이 성령으로 지배되어질 때에(only when his inclination is regulated by the Spirit of God)선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게 될 때에야 우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 적용된다는 것과, 궤변철학자들의 교훈이 어리석다는 것, 그리고 은혜가 우리에게 제공되어 우리들 가운데 있어서 우리가 선을 택하고자 하면 할 수 있도록 하여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유효적으로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선한 의지를 행사하도록 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논리가 둘째 부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바울은 하나님은 (에네르곤 에네르게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감동케 하시어 거룩한 행위에서 완전해지고 유효적인 능력이 갖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약속하시기를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겔11:20)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인내가 하나님의 순전한 은사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선한 의도’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베네플라시툼) 즉, ‘기뻐하신 뜻’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취하여 하나님에게 돌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선한 의지와 행위 모두를 하나님의 유효적인 노력에 돌리기를 만족해 하지 않고, 모두를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his unmerited mercy, 조창훈주; 그의 공로없는 자비)에 돌린다. 바울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궤변철학자들이 공로의 보상으로 생각하는 종속적 은혜의 개념을 몰아낸다. 바울은 우리의 일생이 올바르게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his unmerited mercy, 조창훈주; 그의 공로없는 자비)을 좇아야 된다고 가르친다.

 

두렵고 떨림으로

 

분명히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게 될 때 점점 선하게 되며, 이러한 자는 부주의함에서 일어나 부지런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반면에 자기의 힘을 믿어 부풀어 오른 자는 동시에 방종에 빠져드는 것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면서 자유 의지를 축소하는 우리들의 입장을 공격하는 교황주의자들은 뻔뻔스럽게 비방하기를 우리는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고 하나님을 두려워 벌벌 떨게 함으로 모든 관심을 파괴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 교황주의자들의 교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교리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두려움으로 그에게 복종하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들음으로 더욱 방종하여 죄악에 빠져드는 자가 많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교리의 잘못에서 온 것이라는 데는 반대한다. 우리가 이 교리를 받아들일 때는 우리의 마음에 더욱 조심을 하게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은 이 구절이 마음의 확신(assurance of faith, 조창훈주;믿음의 확신)을 흔들리게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다. 떠는 자는 확신이 없기(in uncertainty)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바울의 말이 우리가 일생동안 구원의 확신(assurance of salvation)에 대해서 굴곡이 있어야 할 것으로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바울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는 한 바울이 확신(조창훈주; 영문판에 없음)을 갖기를 주저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한다고 볼 수가 없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확신(confidence)과 (플레-로포리안, full assurance, 주4; 충분한 증거)을 가지라고 권하고 있다. 논쟁이 없이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두려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겸손을 낳고, 다른 하나는 주저함(hesitation)을 낳는다. 전자는 육신적인 방종과 나태함, 그리고 교만에 반대되는 것이고, 후자는 믿음의 확신(assurance of faith)과 반대된다. 더욱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자는 자기들의 연약함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assurance upon the grace of God)하고 위로를 받는 것이지 결코 방종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것과 오히려 위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욱 기도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두려움은 양심의 평온함을 뒤흔들고 확신(confidence)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확신을 갖도록 해준다(it rather confirm!!s it). 반면에 우리들의 불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를 뻔뻔스럽게 대하도록 한다. 이 말들은 바울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직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하나님께 복종할 것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옛날에 펠라기우스파가 주장하듯 오늘날의 교황주의자들은 이 구절이 인간의 능력을 높이는 것이라고 어리석은 주장을 한다. 우리가 그들을 대항하기 위해서 앞에서 말했던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을 하면, 그들은 즉시 다음과 같은 말을 방패(말하자면)로 삼아 받아 넘긴다.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공통으로 적용이 되는 말인데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반반씩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 요컨대 그들은 ‘이루라’는 말에서 자유의지를, ‘구원’이라는 말에서는 영생의 공로를 유출해 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구원은 우리의 소명의 전 과정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유 선택에 따라 정하신 모든 것들의 완성까지를 포함한다고 생각한다(I answer, that salvation is taken to mean the entire course of our calling, and that this term includes all things, by which God accomplishes that perfection, to which he has predestinated us by his gracious choice). 이것이 편협하고 건방진 말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구원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 복된 생명을 동경할 때에 완성된다고 말한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요, 우리 편에서는 다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동하도록 예비해 주실 때에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사용한 말과 어울리는 의미는 ‘끝까지 간수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에 간직해야 할 것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울은 여기서 우리의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가 아무 할 일도 없이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은밀한 자극을 통해서 우리가 충동을 받아(after having stirred us up by a secret influence) 기쁨으로 일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15절.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

 

p.510.

 

이 말은 ‘흠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신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감으로써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하도록 하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전혀 비난을 받지 않을 만큼 완전한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이 없는 자라고 부른 것은 전심을 다해서 완전해지기를 위해 항상 힘쓰고 있기 때문이다.

 

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우리가 빛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생명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바울이 등불을 언급한 것은 우리가 악한 것들을 불태워 버리는 등불이 되도록 하려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다. 바울은 빛이 나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에다 비유했다. 달리 비유하자면 우리는 촛대요 복음 진리는 양초와 같아서 우리 위에 복음 진리를 올려 놓음으로 사방에 이 진리의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우리에게 만일 우리가 순결한 생활로 빛을 비추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당하게 거스르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도 중요한 문제로 말씀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마5:15) 그런데 우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방법을 통해서 그 위에 서 있게 될 수가 있다. 우리가 빛을 비추는 방법은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그 빛을 억제하거나 무기력하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준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부여받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천국 복음으로 비추어진 모든 사람은 빛을 가지고 다니는 자들인데, 혹 거룩함과 순결함 가운데서 걷기 않으면 이 빛이 그들의 죄를 찾아내고 들추어낸다. 또한 이 빛은 자기 자신을 바른 길로 인도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비추어 준다.

 

칼빈.빌립보서주석(2:17-24).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2:17-24).

 

복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다.

 

칼빈은 “만일 너희 믿음이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빌2:17)”을 로마서 (15:16)와 연결하여 해석하면서, 이 관제는 헬라어로 스펜도마이인데, 이것을 확정된 협정에 의한 희생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바울이 바로 이러한 관제로 드려질 것이라고 해석한다. 칼빈은 여기서 바울을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보고, 복음을 희생제물을 자르는 영적인 칼로, 믿음을 희생물로 말한다. 또한 바울만이 복음의 제사장이 아니라 복음의 사역자들도 역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제사장이라고 말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17.)

 

아래는 칼빈주석본문(발췌)이다.

 

17절. 만일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p.512.

 

헬라어로는 (스펜도마이)라고 했기 나는 이것을 고대 사람들이 시행했던 도살 협정이나 협약에 의한 희생을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헬라어 (스폰다이)는 확정된 협정에 의해서 희생되는 경우에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바울은 죽음을 믿음의 확증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기필코 성취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께 희생으로 드려지는 것은 교인들이 복음으로 거룩하게 되어질 때라고 말한 점에서 모든 구절이 보다 분명해진다. 비슷한 표현이 로마서 (15:16)에도 있는데 거기에서는 바울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말한다. 복음이 희생 제물을 자르는 영적인 칼이라면 믿음은 희생물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희생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이제 바울은 자기가 희생제물이 됨으로 해서 교인들이 더욱 확증을 얻고 확신을 갖게 된다면 크게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복음이 진실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이때는 우리가 우리의 가르치는 바를 피로써 확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신앙의 본질이란 다만 공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유익한 교훈을 배우게 된다. 복음의 사역자들도 역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사실로 위로를 받는다. 사람이 자신을 열심히 복음전파에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황주의자들은 이러한 희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엉뚱하게 전적으로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생각을 고안해 냈다.

 

칼빈.빌립보서주석(2:25-29).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2:25-29).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을 느끼나 하나님의 위로로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칼빈은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빌2:27).”를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쇠같은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이 있다고 한다. 철학적인 고집이나 스토익학파들이 말하는 완고함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쓰라림이나 고통의 느낌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의 모든 감각에 임하게 되면 기꺼이 등을 돌려대고 매를 맞을 수가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희생제물이 되기까지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2.27.).

 

아래는 칼빈주석본문(발췌)이다.

 

27절.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p.518.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죽는 것이 자기에게 크게 근심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키셨으므로 그 근심을 면하게 된 것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쇠같이 냉정한 사람이었고 인간적인 감정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스토익학파들의 (아파데이안)을 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은 ‘그처럼 굽힐 줄 모르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처럼 불굴의 정절은 어디에서 얻었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인내란 철학적인 고집이나 스토익파의 완고함과는 엄격히 다르다고 본다. 십자가를 견뎌내기까지 인내하는 덕이라고 해서 그 안에 쓰라림이나 고통의 느낌까지도 없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의 모든 감각에 임하게 되면 기꺼이 등을 돌려대고 매를 맞을 수가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희생제물이 되기까지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칼빈.빌립보서주석(3:1-6).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3:1-6).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야 한다.

 

칼빈은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빌3:2)”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우리가 더욱 세심하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거짓 사도들을 공격하는 바울의 열심이다. 이 거룩한 열정이 작열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고 부수어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확실히 좋은 목회자들은 양무리를 살진 꼴로 먹여주며 자기의 양들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이리떼들이 양무리를 공격해 올 때는 쫓아 보내며 또 계속해서 경성하여 경계하기를 쉬지 않는다.”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3.1-2.).  

 

아래는 칼빈주석본문(발췌)이다.

 

1절.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p.521.

 

여기에서부터 바울은 거짓 사도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시작한다......그러므로 바울은 교인들에게 단순히 근신하여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여 막아내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바울은 첫째로 그들을 ‘개’라고 부른다. 이 비유는 그들이 배 채우기만을 위하는 자들임과, 어리석은 부르짖음으로 참된 교리를 공격하고 있을 것이다......(p.522)둘째로 바울은 그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교리를 건설한다는 미명아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진멸하기만 했다는 의미이다......세번째 이름은 고상한 것으로 (프로소노마시아)들은 자기들이 할례를 받았음을 자랑했다. 바울은 그들을 교회의 단일성을 산상조각으로 갈라놓는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의 단일성을 산산조각으로 갈라놓는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의 자랑을 흉내를 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성령께서는 자기의 사역자들을 통해서 항상 재치와 유모어를 사용하신다는 예를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가리우지 않도록 바울은 허둥지둥하고 있다. 이러한 예들은 선지자들에게서 셀 수 없이 찾아볼 수가 있는데 이사야가 가장 재치있는 비유와 은유를 풍부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세심하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거짓 사도들을 공격하는 바울의 열심이다. 이 거룩한 열정이 작열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고 부수어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무절제함과 과격한 말들이 열심히 라는 가면 아래 스며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확실히 좋은 목회자들은 양무리를 살진 꼴로 먹여주며 자기의 양들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이리떼들이 양무리를 공격해 올 때는 쫓아 보내며 또 계속해서 경성하여 경계하기를 쉬지 않는다.

 

칼빈.빌립보서주석(3:7-11).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7-11).

 

그리스도인은 행위에 의존하는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

 

칼빈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3:7)”를 해석하면서, 바울이 자기의 행함 자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만심을 버린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주님께서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면 가난을 감수하고 견딜 수 있는 준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3.8.).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칼빈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9)”을 해석하면서 교황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교황주의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사람에게서 온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을 따라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이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3.9.).

 

그리스도인의 전 삶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다.

 

칼빈은 “믿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의 축복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전 생활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따르겠다는 조건으로 자기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도록 하자.”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3.10.).

 

아래는 칼빈주석본문(발췌)이다.

 

8절.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p.529.

 

우리도 믿음으로 얻는 의를 취급할 때 행위의 실존을 공격해서는 안되고 괴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그 속성을 공격해야 한다. 괴변주의자들은 생각하기를 사람은 그 속성에 의해서 정당화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의 행함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교만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 사역 속에 숨어드는 자만심을 버린 것이다......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주님께서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면 가난을 감수하고 견딜 수 있는 준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도 밖에서 어떤 것을 얻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치가 못하다.

 

9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p.531.

 

믿음으로 얻은 의에 대한 좋은 설명을 원한다면 그리고 그 진정한 성질을 알기 원한다면 이 구절을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의를 비교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에 속했다고 하는데 바울은 이것을 율법에서 난 의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로서 난 것으로 믿음으로 얻어진 것이요, 그리스도 신앙 안에 있는 것이라고 바울은 가르친다. 바울은 이 둘이 서로 대립하고 있어서 함께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둘째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교황주의자들과 크게 대립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사람에게서 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 둘은 서로 혼합해서 서로 구분이 없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바울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공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율법은 행함을 구속하고 있는 반면에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벌거벗게 하여 그리스도의 의로써 옷을 입도록 하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하나님께로서 나온다고 말할 때 그 이유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선하심을 따라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0절. 그 고난에 참여함을.

 

그러므로 믿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의 축복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전 생활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따르겠다는 조건으로 자기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도록 하자.

칼빈.빌립보서주석(3:12-17).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3:12-17).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는 완전에 이를 수 없다.

 

칼빈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빌3:12)”을 해석하면서, “믿음이 장성하는 것과 앞에서 말한 고난의 장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으면 그 즉시로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요, 에베소2:6 말씀과 같이 소망 중에 이미 하늘에 앉게 되기 때문이다.”고 한다.

 

칼빈은 여기서 바울이 “우리가 전진해야 할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매우 힘드는 것이므로 오직 이것만을 위해 힘쓴다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있는 한에는 완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라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3.12.).

 

바울은 구원의 확실성을 흔드는 말씀을 하지 않고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을 말한다.

 

칼빈은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빌3:13)”을 해석하는데, 이 구절은 “구원의 확실성(the certainty of his salvation)에 대한 의문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오히려 이 말씀은 “자기의 부르심의 목적을 아직 이루지 못했으므로 아직도 계속해서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3.13.).

 

연약한 자들의 무지함과 부족은 용서하고 견뎌야 한다.

 

칼빈은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3:15)”을 해석하면서, 이 구절은 “아직 연약한 형제들의 무지함을 견디면서 그들의 부족은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칼빈. 빌립보서주석, 3.15.).

 

아래는 칼빈주석본문(발췌)이다.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p.534.

 

그런데 바울은 무엇을 아직도 얻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으면 그 즉시로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요, 에베소2:6 말씀과 같이 소망 중에 이미 하늘에 앉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우리의 구원은 소망 중에 바라는 것이므로 그것을 받으리라는 것은 참으로 분명하지만 아직까지는 그것을 소유하는 기쁨을 누릴 수는 없다고 본다. 동시에 바울은 여기서 또 다른 문제, 즉 믿음이 장성하는 것과 앞에서 말한 고난의 장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바울은 앞에서 자기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또 힘써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아직도 여기에 이르지 못했다고 덧붙인다.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전적으로 참여할 때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만끽하고 그를 완전히 알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예를 들어서 우리가 전진해야 할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매우 힘드는 것이므로 오직 이것만을 위해 힘쓴다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있는 한에는 완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바울의 교리를 전혀 파괴하지 않을뿐더러 그가 의도했던 것을 바로 이해하게 되면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실하게 감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놀라운 교훈을 함에 있어서 겸손하게 진행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자기가 지닌 모든 미덕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 구절을 읽을 때 “잡힌 바 그것”이라고 하든지 “잡힌 범위 안에서”라고 하든지 그 의미는 서로 같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붙잡도록 그리스도께 잡힌 자였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감화와 인도하심에서 결코 제외된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공개적인 선택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았다고 보는 것이 더욱 그 뜻을 밝혀주는 것으로 본다.

 

13절.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구원의 확실성(the certainty of his salvation)에 대한 의문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아직까지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는 앞에서 말했던 것을 반복하면서 자기의 부르심의 목적을 아직 이루지 못했으므로 아직도 계속해서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한다.

 

만일 무슨 일에.

 

p.536.

 

바울은 자기와는 차이가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아직까지 무엇을 알지 못하고 있는지를 나타내 보여주려고 할 때에 동시에 앞에서 언급한 모든 장애물들을 초월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말하기를 “주께서 한 날에 너희에게 내가 말한 모든 것들이 참 지식과 올바른 삶의 완전한 규범임을 보이시리라”고 한다. 자기 교훈의 합리성과 진실성을 분명하게 확신하는 자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말은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만일 우리와 전혀 한 마음이 되기를 주저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아직 연약한 형제들의 무지함을 견디면서 그들의 부족은 용서해야 한다는 것도 배우도록 하자. 바울은 자기의 교훈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아직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점차 깨닫게 되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면서 그들을 계속 형제들로 여기기를 그치지 않았다. 다만 바울은 그들이 자기들의 무지함을 떠벌이지 않도록 주의할 뿐이었다.

 

칼빈.빌립보서주석.((3:18-4:3).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3:18-4:3).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능력의 한도 내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를 나타내시는 표에 의해서 판단 할 수 있다.

 

칼빈은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3)”을 주석하면서, “나는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능력의 한도 내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를 나타내시는 표에 의해서 판단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택함을 받은 자라는 표식을 찾아 볼 수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책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밝혀 드러내주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정하도록 하자. 진실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다. 또 양과 염소를 구별해 내는 것도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 그러나 사랑을 통해서 목자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복종하는 자, 그리스도의 우리에 함께 모인 자, 그리고 계속해서 이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자를 알아내는 것은 우리 편에 달려 있다. 또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특별하게 베푸시는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감추인 택한 자들의 인을 우리에게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사를 지극히 높이는 것도 우리 편에 달려 있다.”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4.3.).

 

아래는 칼빈주석본문(발췌)이다.

 

3절.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생명책은 모세가 출애굽기 32장 32절에서 말한 대로 생명으로 예정된 자들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하나님 자신이 이 책을 인봉하셨다. 그러므로 이 책은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정한 영원한 뜻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의 위치는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 집의 글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교훈이 시편 69편 28절에도 있다.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다시 말하면, 이것은 저희를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 곧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와 나라 안으로 받아들이신 신자 속에 계산하지 마소서“하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들이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 속에 있는 자들을 선포하는 권세를 경솔하게 침범하는 일을 저지르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능력의 한도 내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를 나타내시는 표에 의해서 판단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택함을 받은 자라는 표식을 찾아 볼 수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책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밝혀 드러내주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정하도록 하자. 진실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다. 또 양과 염소를 구별해 내는 것도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 그러나 사랑을 통해서 목자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복종하는 자, 그리스도의 우리에 함께 모인 자, 그리고 계속해서 이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자를 알아내는 것은 우리 편에 달려 있다. 또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특별하게 베푸시는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감추인 택한 자들의 인을 우리에게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사를 지극히 높이는 것도 우리 편에 달려 있다.

 

칼빈.빌립보서주석(4:4-23).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4:4-23).

 

모든 역경은 하나님의 섭리를 의존하여 평강을 누린다.

 

칼빈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는 구절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섭리(the providence of God)와 관련지어서 해석하고 있다. 신자들이 원통한 일을 당하여도 주의 선하심(whose goodness)이 함께 하고, 하나님의 손(the hand of God alone)이 함께 하므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세상의 일들은 모두 “아버지같이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통치(regulation of God's fatherly care)”아래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칼빈. 빌립보서주석, 4.5.).

 

확고하고 변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평강의 기초다.

 

칼빈은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평강은 “확고하고 변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라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4.7.).

 

인간의 영혼의 기능은 마음과 생각으로 구분한다.

 

칼빈은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을 주석하면서, “보통 사람의 영혼을 그 기능에 따라서 마음과 생각으로 구분한다. 마음은 이해력을 의미하고 생각은 모든 경향성과 의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은 영혼 속에 모두가 포함되는 말이다.”라고 한다(칼빈. 빌립보서주석, 4.7.).

 

아래는 칼빈주석본문(발췌)이다.

 

5절. 너희 관용.

 

바울은 여기서 그러한 생각들은 하나님의 섭리(confidence in Divine providence, 조창훈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를 대적하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는 바울은 “주께서 가까우시느니라”는 말 속에서 주님의 능력이 그들의 뻔뻔스러움을 정복할 것이며, 주의 선하심(whose goodness)이 그들의 원한을 이길 것이라는 뜻을 말하고 있는 것같다. 주님은 우리가 주의 계명을 순종하면 우리와 함께 하여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런데 어느 누가 하나님의 손(the hand of God alone)을 버리고 그의 명령으로 지음받은 세상의 모든 것들로 보호받으려 하겠는가?

 

이 말씀은 가장 아름다운 말씀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the providence of God)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모든 불인내의 원인이 된다는 것과 그 때문에 쉽게 혼란에 빠져 배반하게 되며, 주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자주 실망하게 됨을 알게 된다. 또 한가지는 단지 우리의 마음을 평온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his providential care, 조창훈주; 그의 섭리적 돌봄)를 충분히 깨닫게 되어서 아버지같이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통치(regulation of God's fatherly care) 아래 있음을 알게 하여 준다. 요컨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을 믿는 자들은 어떤 일에도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p.548.

 

성경은 보통 사람의 영혼을 그 기능에 따라서 마음과 생각으로 구분한다. 마음은 이해력을 의미하고 생각은 모든 경향성과 의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은 영혼속에 모두가 포함되는 말이다......바울이 ‘하나님의 평강’을 말한 근거는 사물들의 현재 상태나 세상의 다양한 흐름에 따라 생겨난 것이 아니고 확고하고 변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바울은 또 이 평강은 모든 이해와 지각을 초월한 것이라고 말한다.

출처 창골산봉서방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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