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김향주 교수
서 언
1. 한국교회에서는 신학교육과 목회의 연관성의 문제가 있다. 보수신학을 주장하는 신학교에서 조차도 목회는 신학교육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기초로 목회하면 안 된다.” 는 말을 교수가 공공연하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위험한 발상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면 그들이 신학교 문을 나가 삯군 목사가 되란 말과 같을 것이다. 많은 시간과 재정을 투입하고 공부한 신학교육은 하나의 목사 면허증을 받는 과정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신학교육은 교수의 인격은 물론 가르치는 자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앙의 전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만약 신학교육과 목회의 관계를 2원론으로 본다면 이는 앞으로 교회의 엄청난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교회의 타락은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신학교육이 바로 목회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2. 성도들에게 신앙고백 교육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
“조직신학” 하면 일선 목회자들이 상당히 거부감을 느끼며 어려운 학문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다. 교리는 신앙고백을 체계화한 성경의 기본 원리이다. 이는 모세,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의 기록 즉 성경을 주제별로 조직화한 내용이다.
이 내용은 종합하고, 비교 분석하고, 주제별 유비(Analogy)를 통해 성경의 전체 내용을 정립한 것이다. 이 신앙 고백 즉 교리는 교회사를 통해 정립되어진 것이므로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이 교리는 아주 쉽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조직화했기 때문에 누구나 읽으면 이해가 가능하다. 이중 가장 잘된 내용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소요리 문답(Shorter Catechism), 그리고 대요리 문답(Larger Catechism)이다.
이 내용은 초신자로부터 직분자들에 이르기까지 교육하기 적합하게 그 교육내용이 풍부하며 잘 정립되어 있다. 그런데 장로교회의 이름을 가지고 신앙고백 교육을 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신앙 교육에 대해 건전할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지 강한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3. 조직신학은 교리학 즉 신앙고백의 해설에 관해 보다 깊은 학문적 설명이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면 쉽게 이해되는 학문이다. 한국의 신학교들중에 상당수가 조직신학을 말하기는 하는데 신앙고백을 부정 또는 반대하는 신학을 전개하는 일들이 늘어간다. 이는 분명코 불원간에 교회의 타락을 불 보듯 하는 일이다.
목회 할 때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을 가르치며 성도들을 인도하면 어떤 이단 사설이나 비 성경적인 외부의 침투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교회의 성도들이 견고한 신앙을 자손만대에 물려줄 내용이 무엇인가?
“오직 믿음, 성경대로의 삶” 이라고 외치면서 본질을 외면하고 신앙의 껍질을 부여잡고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하나님을 나의 현실문제의 해결사 정도로 생각하는 악세사리의 신앙을 외치고 있는 한국 교회가 아닌가?
사도시대 이후 지금까지 성경 교사시대를 이어왔다. 이 역사가 바로 교리교육의 역사가 아닌가?
왜 우리는 이러한 금보다 더 귀한 순교자들이 이룩해 놓은 교리교육을, 교회사를 통해 이룩해 놓은 교리교육을 너무나 쉽게 밀실에 가두어 두고 있는가? 교회 정통적 전승은 오직 이 교리 교육에서 그 진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1 장 서 론
기독교 교리학의 서론을 논하려면 성경의 완전영감설로 귀결된다.
만약 광범위하게 신학 서설(prolegomena)을 논하려면 각 신학의 체계 개념부터 종교론, 정경론, 사본학, 그리고 교리학 성립의 역사 등의 많은 분야를 첨가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기술할 내용은 단지 종교론과 성경의 영감설을 중심으로 한정하려고 한다.
1. 종교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종교를 떠나서는 그 존재를 찾을 수 없다 모든 종교는 그 기원, 배경, 문화, 역사, 그리고 의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 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생활은 물론 그가 속한 국가의 흥망성쇠까지 결정된다. 미개한 종교, 이슬람교, 힌두교, 카톨릭 등에 속해있는 나라는 미개한 국가가 되어 왔고 기독교를 그것도 개혁신앙을 기초 한 성경신앙을 표방하는 국가는 가장 문명이 발달한 국가로 세계를 지배해 온 것이 역사의 증거이다. 기독교와 기타 종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가? 기독교를 종교의 영역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칼빈이 쓴 “종교 강요(Calvin's Institute of Religion)”라는 말을 오늘날 쓰는 “기독교 강요”라는 말을 칼빈이 잘 못 쓴 것이므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칼빈을 아주 무식한 사람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그런데 종교라는 개념은 19세기 이전 구미에서는 기독교만을 종교의 개념으로 받아 들였다. 즉 기타의 종교는 종교의 개념으로 취급하지 아니하였다.
19세기 독일에서 발흥한 극 자유주의 신학자인 괴팅겐 대학교 교수 리츌(Albrecht Ritschl)의 제자들에 의해 성경 비평학을 펴내면서 종교사학파(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의 성경 비평학에서 다루는 신학적 개념은 초 자연주의적 성경 해석을 배제하고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 대조하여 역사속에서의 문화와 습관을 기초로 하여 모든 종교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를 절대 종교로 삼지 말고 다른 종교와 동등한 입장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주의적 발상은 성경의 절대적 신관을 정면으로 대항하기에 이르렀는데 성경에서 아주 금기사항으로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타 종교에 대한 제 1계명과 제2계명을 이성주의적으로 범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장에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논하자면 오직 기독교만을 종교로 섬겨야 하며 만약 기독교를 교리로 논하여 정의 하려면 생명의 교리 그 자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모든 지구상에 있는 종교를 종교의 영역 안에 두고자하면 기독교는 그런 영역 안에 들어갈 수 없으며 기독교만 타 종교와 다른 생명의 교리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기독교만이 계시종교이며 하나님이 더럽고 추한 인간을 찾아오신 생명의 근원이며 기타 종교는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자연적 종교심에 의해 주관적으로 신을 찾아 헤매다가 스스로 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만들어낸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만이 객관적 신의 존재를 주관적으로 교제하게 하는 생명의 종교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기타 종교와 대비 한다는 발상 자체가 우상숭배의 발판을 마련하는 길이요 패망의 길이다.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종교와의 대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일은 차치하고라도 이제는 공공연하게 기독교 TV에서 타종교와의 대화 프로그램을 방영해도 당연지사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에 대해 심장의 피가 역류함을 느끼며 하나님의 진로가 한반도에 임하지 아니할까? 심히 걱정 되는 바이다.
19세기 자유주의가 판을 친 독일이 1차 2차 세계대전의 주동자가 된후 혹독한 매를 맞은 것을 기억하며, 기독교인들을 수없이 죽인 인본이 원자폭탄의 매를 맞은 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하나님을 아는 길에 있어 3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간 이성을 통해 아는 길이며
둘째는 기적을 매개로 하여 체험적으로 아는 길이며
셋째 객관적 계시인 성경을 통해 아는 길이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성경을 절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대로 의지하고, 생활하고, 성경에 어긋난 행동은 즉시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러면 우리가 모든 신앙의 지침이 되는 성경은 어떤 책인가? 성경의 영감설을 살펴보자.
2. 성경의 영감설
성경의 영감이란 말은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전하는 메쎄지를 기록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이 교리는 성경의 기원과 궁극적인 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표명이다.
1) 영감의 범위
(1) 부분영감(Partial Inspiration) :
이는 교훈이나 사상의 일부는 영감이 되었지만 성경에 기록된 역사속의 인간들이 말하는 내용이나 악한자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는 18C 이신론(Deism-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인정하되 만물을 다스리고, 보존하고, 그리고 섭리하심을 부정)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난 학설이다.
(2) 사상영감(Thought Inspiration) :
성경에 흐르는 기본적 사상은 영감이 되었으나 문장이나 글자는 영감되지 아니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제 2저자인 인간이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글자나 문장을 사용함이 아니고 인간의 의지에 의해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3) 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 :
축자영감설은 사상영감설과 반대된 설로 문자에 까지 모두 영감 되었다는 설이다. 이 영감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바는 축자영감설을 기계적 영감설과 동일시하는 경향이다. 기계적 영감설은 제 1저자인 하나님께서 받아쓰기식이나 또한 글자 하나, 하나를 제 2저자인 인간에게 주입시켰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축자영감설은 제 2저자인 인간의 인격과 그에 관한 환경까지도 이용하게 하여 인간의 인격을 방해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 을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셨다는 주장이다.
(4) 완전영감(Plenary Inspiration) :
이는 그저 완전(Perfect)하다는 개념보다 전체, 충분, 또한 모든 범위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부분영감이 아니고 성경 전체가 모두 빠짐없이 영감되었다는 것이다. 이 뜻은 완전영감 안에 축자적으로 영감된 내용을 포함한다는 뜻이다.
2)영감의 방법
(1) 기계적 영감(Mechanical Inapiration) :
이 영감설은 받아 쓰기식 영감설인데 하나님께서 한 음절까지도 오류없이 제 2저자인 인간이 수동적으로 받아써서 기록하게 했다는 것이다. 복음주의적 입장에 있는 이들이나 자유주의적 입장에 있는 이들의 상당수가 기계적 영감설을 축자영감설과 같은 영감주의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근본주의적 입장에 있는 분들이 더욱 강하게 성경 기록의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하면서 축자영감설을 포함하여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내용이 축자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점에는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이지만 제 2저자의 인격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받아쓰기(Dictation)를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는 기계적 축자영감설의 입장을 따르지 아니한다.
(2) 동력적 또는 감동적 영감(Dynamical Inspiration or Illuminational Inspiration) : 이는 기계영감설과 정 반대의 입장의 내용으로 성경자체의 영감설을 부정하여 제 2저자의 의도대로 성경을 기록하였으며 이 영감의 내용이 성경을 읽은 성도들에게 조명되는 정도에 그치는 것과 같이 제 2저자도 조명을 받은 정도에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직관적 영감(Intuitional Inspiration) : 이는 인간이 영적 감각이 고도로 발달한 상태에 도달하여 “성령의 감동 없이도 하나님의 영적 내용을 전달하게 되어 있는 상태에서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영적 이성이 발달하여 스스로 영적 감각을 가지게 되어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는 것이다.
(4)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 : 이는 개혁신학에서 받아들이는 가장 보편적인 영감설인데 제 1저자인 성령께서 제 2저자인 인간의 인격과, 그들이 처한 환경과,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여 오류 없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우리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주님의 제자들은 완전영감설을 받아들이며 그 완전영감설에 연관되어진 축자영감설과 유기적 영감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기독교 외에 기타 생명이 없는 종교에서도 그들이 추구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경전을 따르며 신봉하고 있는데 왜 유독 기독교 안에서 기독교의 탈을 쓰고 비 기독교인들이나 주장하는 성경의 완전영감설을 거역하는자들이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그들은 “나는 비 기독교인이다.” 라고 선언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제 2장 신 론
교리 즉 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먼저 하나님이 전제 되어야 연구가 시작된다. 하나님을 전제한다는 의미는 특히 기독교 안에서만 통할 수 있는 원리로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아오시는 계시의 교리”가 연구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1. 하나님의 존재
일반 철학적 입장, 즉 이성주의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이 몇가지가 있다.
1)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 Argument) : 모든 자연의 존재로부터 유추된 하나님의 존재론을 주장한다. 우주의 동인은 움직임이 없는 자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미한다.
2) 도덕론적 증명(Moral Argument) : 도덕적 존재의 원인과 뿌리를 찾아가면 도덕적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실존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 : 인간의 의식가운데 하나님의 존재의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미한다.
4)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 : 모든 존재와 사건은 무의미하게 진행되거나 의미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든 일은 목적이 있어 그 목적을 향해 가는 진행과정에 있다. 그 목적을 향해가는 주인이 하나님이다.
5) 역사적 증명(Historical Argument) : 인류 역사속에 나타난 초자연적 종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는 초자연적 종교를 역사와 연관시키는 경우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하나님의 존재론은 이성주의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의식만을 논증할 수 밖에 없다. 즉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의 존재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한다고 해서 기독교와 같은 범주에 둘 수가 없다. 일반 철학이나, 기타 종교에서나, 불신자들이라도 하나님의 존재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존재를 믿는다. 그러나 구원의 하나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으로서의 교제의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3위 1체의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유일하고 명확한 교제의 하나님을 인식하는 존재 의식은 오직 3위 1체 하나님을 바로 아는 일이다. 기타 종교에는 전여 불가능한 존재의식이다.
그러므로 타 종교와의 대화는 하나님의 존재론부터 불가능하다. 즉 우리가 주장하는 교제의 3위 1체 하나님의 존재론은 하나님을 초자연적인 하나님 뿐 아니라 나의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며, 예수님을 나의 주세주로 부르게 되며, 성령을 나의 심령속의 내주자로 부르게 된다. 그러면 3위 1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2. 3위 1체 하나님의 인격
3위 1체 교리는 아주 신비하고 심오한 영적 이해가 필요하므로 합리적 논증만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한계가 있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한계를 벗어나 이성적 시도를 강행하면 잘못된 교리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고대신조들(니케야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칼게돈 신조, 콘스탄틴 노플 신조)을 깊이 참조하여 극히 조심성 있게 다루어야 한다.
1) 유일 불가분리적인 본체
유일 불가분리적 본체(ousia essentia)라는 말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6문에 실체(Substance)에 있어서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Van Til 박사에 의하면 하나님의 유일성은 단수성(Unity)과 단순성(Simplicity)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실체적 존재는 3위의 유일 불가분리적인 본체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2) 위의 구별
하나님 안에 3개체의 신이 존재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체 안에 인격적 구별이 있다. 이는 사벨리우스(Sabellius)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나타나는 세가지 양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의 한 본체 안에 공유될 수 없는 특성들에 의해 분류되는 실존으로 구별된다 는 의미이다.
오늘날 교회내에 많이 설명되고 있는 - 물이 고체, 액체, 기체 등의 변화를 3위에 비교하여 설명하는데, 이는 나타난 모양의 변화만을 강조함으로 3위 1체 교리에 적합하지 못한 설명이다. 또한 아버지가 교회에서는 목사, 국가의 입장에서는 국민, 집에서는 아버지의 이름과 직무가 각각 다르다는 설명을 통해 3위 1체를 설명하려고 하나 이도 또한 하나님의 본체와 3위의 인격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적합하지 못하다.
3) 1체와 3위의 관계
유일성과 위격 구별을 조화시키는데 박형룡 박사의 교리학이 잘 성명해 주고 있는데 “하나의 의미는 영원한 자존적 신의 본체는 3위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는 말이며, 셋의 의미는 인격(위)적 특성들에 의하여 구별되는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영원부터 영원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Van Til 박사가 3위1체론 구분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존재론적 3위1체(Ontological Trinity) : 영원전의 3위의 하나님은 동등영광, 동일 권능, 동시존재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
(2) 조화론(섭리론)적 3위1체(Economical Trinity) : 3위에 있어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고, 구원을 계획하신 분이시며, 아들로서의 하나님은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구원사역을 완성하신 분이시며, 그리고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은 아들이 완성하신 구원을 그의 백성의 심령속에 적용하시며, 이끌어주시며, 그리고 간섭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3위 1체의 신앙은 아주 예민한 부분이며 인간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러나 3위의 하나님은 전여 혼합되지 아니하며, 전여 분리되지 아니하며, 전여 혼돈되지도 아니하며, 유일하신 한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그러면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 그러나 3위는 시간적으로나 능력으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고대신조의 중요 내용이다.
3.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사역은 신적작정론(Decree)과 예정론(Predestination)으로 귀결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스스로 계획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다스리시며, 계획하신 그대로 종말에 그분의 뜻을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아니고 어느 누구의 원인이 되어서도 아니다. 스스로 결정하시고, 스스로 이루시고, 스스로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특별이 개혁파 신학에서 주장하는 신조 가운데 아주 중요하게 취급하는 교리중 하나가 신적 작정의 교리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교리를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역사하시는 분을 강조하고 있는 엡1:4에 기록된 말씀에 부합하는 것이다.
신적 작정(Decree)과 예정(Predestination)은 한국교회에서 혼동되어 사용함으로 그 단어의 뜻이 구분 없이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영어에서의 그 뜻은 분명이 다르며 또한 박형룡 박사의 교리학에도 그 뜻을 구분하고 있다. 신적 작정은 만물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예정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 인간, 그리고 천사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예정이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1) 신적 작정의 특성
(1) 이 작정은 영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창조이전 하나님의 내적 사역이었다. 만물에 관해 3위 1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설계였다. 이 계획은 단편적인 사건을 설계함이 아니고 모든 역사와 종말에 관한 계획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적인(벧전 1:20, 엡3:11)사역이다.
(2) 불변적이며 무조건적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무한한 지혜와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므로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가 없다. 목적을 변경하거나 수정이 불가하다. 그리고 이 계획은 상대적 요건을 필요로 하지 아니한다. 그러면서 죄에 관하여는 허용적이다. 인간에게 선택권을 부여함으로 인간이 자유의지를 사용하게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특권을 누릴 것을 제시하고 계신다. 그러나 불순종의 조건은 형벌을 제시하고 계신다.
(3) 시원적이다. 종말(재림)은 창조이전 영원한 계획에 의해 역사속에서의 사역이 완성될 때 임하게 된다.
2) 예정론
예정론에 있어서 선택과 유기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상당수의 경우 멸망 받을 자들 중에 구원 받을 자들만을 택하는 경우 예정론으로 규정 짖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방예정에 그치는 이론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를 쌍방으로 예정하신 것이다. 즉 선택과 유기를 모두 예정하신 것이다.
(1) 예정론에 대한 반대 이론들 : 예정론에 있어서 숙명론, 인간의 자유를 박탈, 인간의 노력을 감소, 전도할 의지를 꺽는다는 등의 이의를 제시할 수 있으나 숙명론은 맹목적인 무계획에 의해 발생하는 사건이며 예정론은 가장 합당하고 지혜로운 방법으로 목적이 분명한 계획이며, 자유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살려가면서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가 동류(Concurrence)하면서 사역하시며, 노력의 감소에 관하여 성령은 사악한 인간의 게으름을 오히려 일깨워 열심있게 하며, 또한 전도는 인간의 자력적인 의지로 절대 불가능 하므로 오직 성령의 의지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2) 예정예지와 예지예정 : 예정론에 있어서 예정이 먼저냐? 예지가 먼저냐? 하는 논거가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정을 우선으로 취급하며 알미니안주의자들이나 웨슬리안주의자들은 예지를 우선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보통이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교회 안에서 그렇다. 그러나 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내적 사역은 창조이전 영원에서의 사역이므로 시간적이나 논리적으로 순서를 정하여 결론내리기 힘들다. 예정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포함하고 있으며 미리 아신다는 것은 예정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정론은 참으로 깊은 은혜에 잠기게 한다. 구원 얻는데 만약 단 1%라도 사악한 나의 의지가 포함 된다면 구원에서 떨어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미리 예정해 두셔야 나의 의지는 짓이겨지고 미리 정한 계획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예정된 자에게 성령이 강권적으로 구원을 적용시키실 것이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엡1:4)”라는 말씀에 그처럼 감격할 수가 없다.
제 3 장 인 간 론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론은 계약론과 관계된 죄악론으로 종결된다. 그리고 그 죄악론은 인간의 사망의 상태를 말해 준다. 즉 계약을 어기기 전에는 생명이 존재했으나 계약을 어기면 사망이며 그 계약을 어기는 것을 죄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 회복 즉 구원은 계약의 회복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내용이다.
1. 창조된 상태의 인간은 행위계약 안에 있는 인간이다. 자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인간인 동시에 범죄의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왜 범죄의 가능성이 있었는가? 그것은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는 순종을 전제로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동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어기면 사망이다. 지키든지 어기든지 간에 인간의 의지에 따라 영생과 저주가 결정되기 때문에 유동성이다.
2. 범죄한 인간은 행위계약을 파괴한 인간이다. 즉 계약에서 떨어져 나간 인간이다. 이는 자력으로 전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인간이므로 스스로 율법을 행할 수 없다. 그래서 범죄한 인간이 되어 하나님과 교제에서 끊어진 즉 죄악에 버려진 상태의 인간이 된 것이다.
불신자들이나 심지어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칭하는 자유주의 부류에서 일반은총안에서나 기타 종교적으로 선을 행한 것을 공로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구원과 연관을 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성경에서 요구하는 선이 무엇인지 전여 알지 못하는 생각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선의 기준은 행위언약을 세밀하게 재 선포한 10계명과 그 명령에 따라 나타난 성경의 규례(Statutes)들과 율례(Ordinances)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을 완성할 때에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선을 행하여도 자력의 선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3. 구원받은 인간은 은혜계약 안으로 들어온 인간이다. 행위 즉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인간은 은혜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해가는 상태에 있는 인간이다. 은혜로 교제를 회복해 간다는 의미는 오직 성령에 의해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을 심령속에 적용시키시며 성화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화의 완성은 영혼과 육이 분리되는 육신의 죽음을 거처 완성된다. 여기서 인간의 죽음의 상태를 생각해 보자.
4. 인간의 죽음의 상태는 3가지로 나누어진다.
1) 원죄적 죽음 :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이미 죄를 범한 상태에 놓여 있다. 행위언약을 어긴 인간은 언제인가는 형벌의 댓가인 영혼과 육이 분리되는 죽음을 거처 영원한 형벌의 죽음으로 가는 노정이 결정된 것이다.
2) 영혼과 육신의 분리적 죽음 : 인간은 누구나 이 땅위에서 한계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반드시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혼이 육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의 상태로 들어가는 길이 정해져 있다.
3) 형벌의 죽음 : 택함 받은 자는 영원한 하나님과의 교제 상태로 들어가고 유기된 자는 영원한 형벌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택함 받은 자는 천국으로 유기된 자는 지옥으로 들어간다. 형벌의 죽음으로 결정된 자는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진다.
인간의 본질을 정의 하는데 일반 철학이나 타 종교에서는 인간 중심의 교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나 경험을 찬양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이 세상의 가장 사악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철학에서는 합리주의적 사상과 실존주의적 사상 두 가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전자는 인간 논리주의를 기초하고 있으며 후자는 경험주의를 기초하고 있다. 인간의 논리나 경험은 성경계시주의에서 볼 때 아주 편협적인 한계가 있다. 인간의 합리주의나 경험주의는 강하게 강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장을 보내게 된다.
사악한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깨어지고 부셔져야 인간의 본질을 바로 발견하게 된다. 완전한 거룩의 인격을 소유하신 하나님 앞에 만물보다 사악한 인간을 비추어 볼 때만 인간 본질을 바로 알 수 있다. 왜 성경에 인간의 사악하고 구역질나도록 추한 모습을 수없이 기록해 두었는가? 그것은 인간의 사악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기 위한 증거이다. 인간이 인간을 통해 인간을 바로 아는 길은 전여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비추임을 통해 인간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추한 인간의 보습을 바로 보여주고 있다.
제 4 장 기 독 론
먼저 하나님이 전제되어야 신학을 연구하게 되며 그 다음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된 인간을 바로 알아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길이 되며 인간은 사악한 존재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떨어진 존재이므로 중간에 중보자로서 예수그리스도를 알아야 구원의 길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인간론 다음으로 기독론을 연구하게 된다.
1. 그리스도의 인격론
그리스도의 인격론은 주로 고대신조에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예수님의 2성 1인격론이다. 이 교리는 반드시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에서 신조를 등한시 하는 경향이 점차 늘어간다는 풍문을 들을 때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1) 2가지 신성과 인성
예수님의 인격에 있어서 필수조건으로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의 성품을 소유하신 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들의 하나님인 예수님은 시공간에서 불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이요, 인간은 우리와 모든 성정이 같으나 죄를 지을 수 없는 인간이다.
2) 그리스도의 한 인격
그리스도의 1위(One Person)는 그리스도의 한 인격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 인격 안에 두가지 성품이 연합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 인격 안에 두가지 성품이 존재한다는 말은 이중적인 성격이라는 말도 아니며, 전여 혼합되지 아니하며, 혼돈되지도 아니하며, 분리되지도 아니하며, 두가지 성품이 교통하며 협동한다.
3) 두가지 성품이 한 인격안에 존재해야 할 이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 요건은 중간에 막힌 죄의 담을 허는 것이 필수요건이다. 완전한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을 양쪽 다 만족하게 하는 요건은 하나님이 죄인들 속에 들어온 무죄한 인간이 되어야 하고 사악한 인간은 죄가 소멸된 자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중보는 한편만을 위한 자가 아니며 그러나 하나님은 한분이어야(갈3:20)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신분
1) 비하(Humiliation)의 신분
비하의 신분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 낮아질 대로 낮아진 예수님의 천한 지위를 의미한다. 이는 예수님의 성육신(예수님이 육심을 입으심이 아니고 육신을 취하심)을 시작으로 율법아래 순종(능동적 순종. Active Obedience), 십자가의 수난(수동적 순종. Passive Obedience), 사망, 장사를 말한다.
2) 승귀(Exaltation)의 신분
승귀의 신분은 성도들이 함께 동행 할 자취를 미리 보여주시는 맏아들로서의 중보자 사역이다. 이는 부활, 승천, 하나님의 능력인 우편에 계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형으로서의 재림이다.
3. 그리스도의 직분
그리스도의 3직은 중보사역으로서의 유일한 3중직임을 수행하는 중보사역이다.
1) 선지자직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직무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그대로 그의 백성에게 전달하는 직무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통해 백성에게 교훈하며, 경계하며, 권면하며, 책망하는 일을 행했다. 물론 장래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는 일들이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으나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예언이었으며 주관적 예측이 아니었다. 선지자들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닥쳐 올 역사를 예언하며 그 역사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예언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을 예언했으며 또한 재림을 예언했다. 그리고 예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 재림은 역사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2)제사장직
제사장은 백성의 대표자로서 중보자가 되어 제사드림과 중보자로서의 기도드림이다. 구약의 중보자로서의 제사직은 미완성의 직무를 행하였으나 참 제사장(히9장)되신 예수님은 단번에 완성된 제사직을 수행한 것이다.
3) 왕직
이 왕국은 영적 왕국과 우주적 왕국을 포함하고 있다. 영적 왕국은 현세적이며 미래적인 교회 즉 하나님 나라의 왕국인 천국에 관한 왕국이며 우주적 왕국은 힘의 왕국 즉 세상 나라와 모든 자연계의 일반은총에 관한 섭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은 은혜의 왕권이라고도 말하는데 교회를 통치하는 군주적 왕권이다. 이는 성도들의 심령의 다스림과 영적 생활에 대한 중보적 통치권을 말한다.
힘의 왕국 즉 세상 나라 통치의 왕국은 교회를 다스리기 위한 보조적 역할을 한다. 힘의 왕국은 그리스도께서 우주를 다스리는 섭리를 통해 종말에 영원한 나라의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의 한 방편이다. 나아가 종말에 왕권의 완성은 영의 왕국인 교회뿐 아니라 세상나라들도 하나의 통일된 만물을 그의 발아래(엡1:2023, 히2:9) 두심으로 이루어진다.
4. 그리스도의 속죄
1) 속죄의 원인
속죄의 원인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셨는가? 물으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답하고 있다. 그럼 왜 사랑했습니까? 하고 물으면 답이 없다. 사랑하심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무한이 깊은 무조건적 사랑이기 때문에 답이 없다.
2) 속죄는 사랑과 공의(righteousness no justice)에 기초함
속죄의 기쁘신 뜻은 공의와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일본 기다모리의 신학에서 나타나는 분노의 신학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풀어줄 길이 없었으나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죄인을 유화(Propitiation)하게 하였다.” 라는 논설을 주장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케 하여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믿는자에게 은혜로 의롭게 하신 것이다. A.A. Hodge 박사는 “아들이 지고 있는 형벌은 아버지를 향하여 공의를 만족시키는 책임을 스스로 취하고 있으며 그의 백성에 향해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었다.”고 그의 저서 “The Atonement", P.29에 소개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속죄 사역 안에 공의와 사랑이 연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3) 속죄의 화목(Reconciliation)과 유화(Propitiation)
화목은 하나님으로부터 적의와 소원된 관계를 제거함을 의미한다. 이 적의감과 소원된 관계는 이중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의 적의와 소원된 관계는 물론 우리로부터의 하나님에 대한 적의와 소원된 관계를 말한다. 이 쌍방에 나타난 적의와 소원된 관계를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제거함이 화목이다.
유화는 롬3:25, 요일2:2, 4:10 등에 나타나는데 이는 구약에 나타난“카파르”란 말로 죄를 가리운다는 의미이다. 죄로 말미암아 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Pacify)시키거나 가라앉게(Appease)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교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교리와 충돌 된다는 생각이 올 수 있으나 유화의 교리는 오히려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는 결과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죄에 대해 틀림없는 댓가를 지불해야 진노에 대한 유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4) 속죄의 순종성
속죄에 있어서 에수님께서 행하신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과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은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교리는 하나의 논리적 서술에 불과하다. 또한 이 순종성은 율법과의 3중 관계를 형성한다. 박형룡 박사는 그 내용을 자연적이며, 언약적이며, 그리고 형벌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자연적 인간은 창조 된 인간이 행위언약에 불응하였으므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표 할 어떠한 조건도 유지하기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언약적 인간은 순종을 조건으로 한 사람과 행위언약을 맺었으나 실패한 인간을 대신하여 한 사람의 순종을 요구하였고, 형벌적 인간은 불순종이라는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그 많은 백성을 위해 형벌을 자취한 것이다.
(1) 능동적 순종 : 아담이 실패한 언약적 율법을 행하신 모든 사역을 예수님이 수행한 것이다(히2:1018, 5:8-10). 나아가 비하의 신분으로 오셔서 일생을 통하여 인성으로서의 시험과 모든 인생의 고통을 감당하신 수난을 통해 순종의 사역을 완성하신 것이다.
(2) 수동적 순종 : 우리 즉 그의 백성이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이 감당하신 것이다. 이는 제사의 제물이 되어 수난과 죽음으로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보상하시기 위해 채무를 실행하신 순종의 의무이다. 이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며 법적 선고로 인해 결정된 형벌을 가감 없이 받은 수난이다. 이 수난은 하나님을 향해 공의를 만족케 했으며 그의 백성을 향해 사랑과 용서로 나타난 은혜의 가치이다.
5) 속죄의 한계
이는 돌트(Dort)신조에 나오는 제한속제(Limited Atonement)에 대한 교리가운데 예수님 속죄사역의 영향력이 온 인류에게 미치느냐? 아니면 택한 그의 백성에게만 미치느냐? 의 문제이다. 한마디로 제한속죄의 교리와 보편속죄의 교리와의 대립이다.
이 문제는 만약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하기로 정하셨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어느 부분이 미완성 내지 실패작으로 추락하고 만다. 또한 주님의 기도가 인간의 불신앙 때문에 좌절되었단 말도 된다.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기도와 언급을 보면 제한된 그의 백성을 구원함이 목표였음을 밝히 알 수 있다. 인류중에 어떤 자들은 유기된 자로 선택된 이유는 불신자로서의 하나님의 정하신 사명을 하도록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악한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믿기로 예정된 자는 하나님의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 의 문제는 기독교인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등장했다. 초대교회 민족주의에 기초를 둔 유대주의 경직된 바리새인들의 핍박과, 왕권을 신성시하는 로마의 정치적 압박과, 또한 인간이성의 극치를 이루어 스토익 철학과 에피큐리안 철학을 최고의 지성으로 여겼던 헬라주의가 로마 국가의 주요한 이념들로 등장하여 서로를 견지하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합종연횡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요,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요, 또한 그리스도”란 신앙 고백은 위에 언급한 3대 세력으로부터 극심한 핍박과, 천대와, 멸시를 받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 결과 300년이 넘도록 간헐적으로 혹독한 핍박아래 수없는 순교자들을 양산해 냈으며 그 순교의 결과는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어 고대 신조를 양산해 냈다. 그 고대 신조의 내용이 기독론에서의 2성 1인격과 신론에서의 3위 1체의 교리이다.
제 5 장 구 원 론(성 령 론)
기독론 다음순서로 구원론이 와야 하는 이유는 “예수 믿으면 구원 얻게 된다”는 교리는 2천년전 예수님이 완성해 놓은 구속을 적용하는 일은 전여 성령의 사역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개혁파 신학에서의 구원론은 성령 사역의 교리이다. 구원론(Soteriology)은 헬라어 어원에서부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성령론 역시 헬라어 어원으로 볼때 Pneumatology라고 칭하기 때문이다.
이는 제 3인격의 하나님인 성령께서 구속을 성도의 심령에 적용하는 교리로 지칭하기 때문에 성령사역의 교리라고 말한다(소요리 문답 29문). 만약 성령께서 성도에게 적용사역이 없으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성도의 심령 밖에서 완성된 그대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 구속적용은 우연한 사건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정된 자에게만 때와, 장소와, 환경까지도 계획에 따라 적용하는 사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론은 “구속 사역의 적용”이라고 정의함이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는 일을 따로, 그리고 성령 받는 일은 따로 정하고 비록 구원 받았다고 할지라도 성령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적 실존주의적 발트주의를 표방하는 무리들이 기세를 올리는 일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이들은 구원의 서정에 대해 위기 신학의 배경을 가지고 도전한다. 위기의 순간 이외에는 성도의 견인이 지속될 수 있는지 보증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발트에 의하면 “예정은 만세전에 그의 백성을 구원 받도록 예정해 두었으나 일정수의 무리를 선택하고 또 일정수의 무리들을 유기시켰다” 는 교리를 부정한다. 나아가 예정의 교리는 오늘 예정된 사람이 내일 기각될 수 있다고 말한다.
구원적용이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역을 거부하는 비 성경적 교리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구속적용에 관계된 사건은 모두가, 은사와 열매를 포함하여, 충만까지 성령의 전폭적인 사역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사역의 교리 즉 구원론은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의 교리이다. 성도가 구원을 의식하기 이전에 죽어있는 심령속에 성령에 의해 생명의 싹이 심어지는 사역이며 나아가 성장하는 사역이다.
1.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이는 구원 적용의 순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은 객관적 구속사역이 죄인의 심령속에 주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순서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순서를 절대적 시간적 순서로 이해할 것이 아니며 성경에 기록한 대로 논리적 순서에 의해 체계화 한 것이다.
성도의 의식속에서 일어나는 구원의 과정은 일률적으로 성도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며 예정, 칭의, 그리고 양자 등의 교리는 하나님의 단독 사역으로 성도의 의식과는 관계가 없다. 또한 소명된자는 이미 중생과 성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전여 시간적 순서를 정하기 어렵다.
구원의 서정은 개혁파 신학을 표방하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벌코프(Berkohf)교수의 입장과 박형룡 박사의 입장을 주로 참조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 순서는
(1) 예정(Predestination)
(2) 소명(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 External calling and internal calling)
(3) 중생(Regeneration)
(4) 회심(Conversion- 회개와 신앙 repentance and faith)
(5) 칭의(justification)
(6) 양자(Adoption)
(7) 성화(Sanctification)
(8)견인(Perseverance of Saints)
(9)영화(Glorification)로 정할 것이다.
구원의 서정을 논하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즉 특별한 은혜의 공작으로서 성령의 받음, 세례, 충만, 은사, 열매 등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순서로 넘어가려고 한다.
1) 특별 은혜로서의 성령
(1) 성령 받음
성령 받았다 하는 말은 “구원 받았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마12:31-32, 고전12:3, 막3:28-29, 갈5:5, 에1:13).
(2) 성령 세례
성령 세례는 “죄인을 정화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성령 받았다”는 의미까지 포함한다. 이는 구약의 의식(시51:7, 겔36:25)과 요한의 세례(요3:25-26)에도 포함돼 있으며 영적 생활에 있어서 최초의 체험(행2장, 8장 19장)을 말하기도 한다.
(3) 성령 충만
충만의 개념을 물질적 표현으로 기록됐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데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는 전폭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지배아래 성도의 자아가 성령에 의해 압도당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는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은사와 열매가 나타나기도 한다(출31:3, 신34:9, 눅1:15, 행2:4, 행6:5, 행11:24).
(4) 성령의 은사
성령의 은사는 구원을 위루기 위해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도를 사용하는 사역의 방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인격의 성향에 따라 은사가 다르게 나타난다(고전12:4-31).
(5)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충만의 결과로 인하여 나타나는 현상인데 주로 외적으로 현상화 되는 윤리적 도덕적 인격의 변화이다(갈5:22-24).
(6) 성령의 내주
성령의 내주를 세례, 인치심, 그리고 충만과 혼돈하여 이해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은 “성령이 한번 주어지면 항상 성도의 심령속에 인격적으로 거주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사역의 요소들을 동원하는 기본 요건은 성령의 내주이다. 즉 은사는 물론 믿게 하시며, 성령의 충만과 더불어 열매를 맺게 하는 사역의 기본 요건이 내주이다. 성령의 “기름 부음”과 거의 같은 뜻인데 내주는 구속에 포함된 진리를 바로 알게 해 준다(롬8:8-9, 요7:37-39, 고전6:19, 요일3:24, 딛3:5, 살후3:13, 벧전1:2, 요일2:27, 롬8:14, 갈5:22, 롬5:5).
(6) 성령의 인치심
인간 편에서 이해의 각도로 볼 수 있는 물리적 표현이 나타나는데 “인을 친다”는 말은 하나님 편에서 자신의 백성을 보증하신다는 주권적 사역의 표현이다(렘32:9-12, 고후1:22, 엡1:13, 에4:30).
2. 구 원 의 각 론
1) 소명
(1) 외적 소명 : 복음 전도가 선택된 자에게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유기된 자 에게도 공통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외적 소명이다. 그러므로 이 소명은 모든 사람 누구에게나 임할 수 있는 보편적이며 일반적이다. 이 소명은 회심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방편이다(롬10:14-17, 마13:1-23).
(2) 내적 소명 : 이는 유효 소명이라고도 말하는데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첫 번째 성령의 공작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적용시켜 구원의 과정으로 이끌어 들이는 작업이다(롬8:28-30, 살전1:5-6, 행9:6). 이때 성령은 말씀을 도구화 하여 구원의 공작에 연합시켜 죄인의 심령에 적용시키신다.
2) 중생
내적 소명이 적용되면 이미 중생의 단계에 들어간 상태이다. 단지 중생은 인간편에서 그 의식이 애매한 경우가 허다하다(웨스트민스터 10장 2조, 딤후1:9, 딛3:4-5, 고전2:14, 요6:37). 이는 죄로 죽어있는 인간의 의지에 성령으로 새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으로 새 창조적 작업이다. 죄인은 전여 수동적이며 불가항력적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의식이 확실하지 않다.
3) 회심
회개와 신앙을 함께하는 회심은 점진적이며 일생을 통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성령이 말씀을 통해 죄인에게 하나님에게 방향을 전환하도록 특별한 공작을 이루어 나가는 작업이다(창6:6-7, 삼상15:11, 행14:15, 고후7:10). 회개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심히 슬퍼하는 일이며 신앙은 하나님을 의지 하는 일이다.
4) 칭의
회심은 죄인의 의지와 동반하지만 칭의는 하나님의 단독 사역으로 법적 선고에 해당한다. 이는 오직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에게 돌리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조 11장 1조).
5) 양자
칭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데 법적 선고에 의해 실제적 의인의 자격을 부여하는 과정이 양자의 단계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하여 구약에 나타난 기업의 전수를 영적으로 집행하는 작업이다(롬8:17).
6) 성화
성화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전여 믿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성령의 공작이며 죄가 억제되며, 구원의 은혜는 점점 강화되며, 의에 대해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웨스트민스터 13장, 소요리 35문).
오해하기 쉬운 것은 성화의 실체 변화를 도덕적 윤리적 변화로 보는 경우가많은데 성화는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성도들이 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 깊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사역이다(롬7:14-20). 그런 의미에서 성화는 지상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다. 성령의 충만으로 순간적 신앙몰입의 단계에서는 일시적 완전 성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인데도 신자가 협력하는 하나님과의 공동 작업이다. 윤리적 도덕적 변화나 선행과 공로는 성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이다(눅6:43-44).
성화와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율법은 성화의 기준이 되는 잣대와 같다. 율법은 그 자체에서 폐기가 아니고 저주에서 폐기되었기 때문이다(롬13:10, 고전9:21, 갈6:2, 롬3:31). 그러므로 성화의 과정에 있는 자는 율법에 대항하지 않고 자발적인 순종을 기꺼이 행하게 된다(갈5:13, 고전8:11-12).
7) 성도의 견인
견인의 교리에 오해되는 부분이 한국 교회에 많이 잔재하고 있는데 이는 “죄인이 주관적으로 스스로 견인의 위치에 도달한다”라는 뜻이 아니며 “일단 선택받는 자가 중생되어 은혜의 상태에서 내적 소명을 받은 후 아무리 극악한 범죄를 행할 지라도 은혜로 구원받은 자녀로부터 제외되어 그 예정이 결코 취소되어 버림받지 아니한다는 뜻이다(살후3:3, 딤후1:8, 요1027-28).
8) 영화
영화는 부활과 더불어 분리된 영혼과 육이 연합하여 심화되고 영화되어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 속으로 들어감을 말한다. 이 때는 죄가 없는 완전 성화에 도달하게 된다.
한국 교회안에 구원에 관한 확신을 시간 더하기, 말씀의 구절 더하기,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더하기 하여 어느 때 어느 말씀으로 회개하며 구원의 확신을 받았는가? 라고 강조하는 위기신학적 인간중심의 인식론을 강조하여 구원파가 주장하는 교리를 기성교회 목회자들이 상당수 따르는데 심한 걱정이 앞선다.
더욱이 Witness Lee(미주지역에서 이단설로 규정된 교리)가 주장한 육의 구원, 혼의 구원, 그리고 영의 구원을 강조하여 육의 구원은 이제 갓 예수를 아는 단계, 영의 구원은 아직 육의 기질이 남아있는 단계, 영의 구원이 이루어져야 완전한 구원으로 성화의 단계에 들어간다는 위험천만한 내용들이 만연하여 가는데 심한 우려를 갖지 아니 할 수 없다.
영, 혼, 육에 대한 인간의 구조론을 성령의 사역인 구원론에 대입 시키는 교리 자체가 비 성경적이며, 개혁신학에서 인간의 구조론을 2분설인 영혼과 육으로 보는 경향이 학자들 간에도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성경은 주로 인간 구조를 영혼과 육으로 말하고 있는 구절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인간 주조론은 논리적 분류에 불과하며 인격적인 면에서 영혼과 육은 항상 같이 작용하고 있다. 구원의 단계를 육의 구원, 혼의 구원, 그리고 영의 구원으로 분류하는 것은 전여 비 성경적이다. 인간의 구조론을 히4장 12절의 말씀에 의해 혼, 영, 관절, 골수, 생각, 뜻 등으로 나누어도 된다는 말이다.
제 6장 교 회 론
구원받은 성도는 교회를 떠나서는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론 다음에 교회론이 와야 한다. 교회는 성도의 어머니 역할을 한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교회를 지칭하는 말은 부르다, 소집하다, 명사로는 회중 등을 의미하고 있다.
1. 교회의 본질
1)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주장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그 본질을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형식주의에 대항하여 “선택된 자들이 교제하는 단체”로 그 정의로 삼고 있다(벨직 신앙고백 27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25장 1조).
2) 유형교회(Visible Church)와 무형교회(Invisible Church)
교회를 나타내는 두 면을 말할 수 있으나 교회의 본질은 동일한 입장이다. 유형교회는 지상 교회, 역사속의 교회, 불완전한 교회, 유기된 자도 일시적으로 포함된 미완성의 교회, 말씀전파와 성례가 집행되는 교회, 그리고 외면적 조직을 갖춘 교회 등으로 말하고 있다.
무형교회는 천상의 교회, 예정된 자들만 존재하는 교회, 완전한 교회,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 그리고 비 조직교회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교회관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체를 무형교회로 명명하며 조직적인 관점에서의 지상교회는 유형교회로 명명한 것이다.
3) 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지상교회 즉 유형교회는 필연적으로 영적 전투를 요한다. 그 이유는 적의를 가지고 대항하는 악마의 바탕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로 교회는 타 종교와 같이 피안의 세계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평안을 추구하는데 끝나지 않고 영적 전도로 성도를 뺏어 오는 싸움을 해야 하며 성도를 지키기 위해 교리를 방어하는 싸움을 해야 한다. 그 싸움은 예수님 재림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은 승리의 교회이다. 그러나 영적 전투를 계속하는 지상교회는 완전한 승리를 쟁취한 것은 아니다. 승리를 얻어가고 있는 중이다. 천상교회(무형교회)는 승리교회의 본질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완전한 승리는 예수님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
4) 교회와 하나님 나라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뗄 수 없는 절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행8:12, 19:8, 28:23). 그 이유는 구약에서부터 나타나는 언약적 관계에 교회관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마8:33).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신비적 결합의 지체로 그 백성이 교회 안에 구성원으로 존재해야 함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마10:35-37, 마21:43).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교회밖에 존재할 수 없다.
5) 교회의 표증
(1) 말씀의 올바른 전파 : 말씀 전파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증으로서 다른 표증들은 말씀 전파에 포함되어 나타나는 부수적인 내용들이다. 지상교회는 말씀을 순수하게 교리적으로 지키며 말씀대로 전파에 힘쓸 때 가장 영광된 교회로 승화되었다. 여기서 대두되는 율법과 복음의 문제가 있다.
A. 율법의 용익(The use of the Law) : 칼빈을 중심하여 개혁파 신학에서 주장하는 율법 즉 십계명을 사용하는 유익이 무엇이냐? 의 문제에 대해
a.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
b. 성도생활의 기준이 되며
c. 국가나 사회에서 법의 기준이 된다는 3가지 내용으로 집약된다.
율법은 모든 일반은총의 분야에까지 윤리(Ethics)와 도덕(Morality)의 기준이 된다. 윤리는 선과 악의 기준을 측정하는 원리이며 도덕은 선과 악을 실천하는데 대한 원리를 규정하는 학문이다.
10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는 물론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에 있어서 윤리와 도덕의 기준이다.
구약에 나타난 율법에 관한 여러 가지 히브리어의 표현이 있는데 율법, 규례, 율례, 명령, 법도, 계명, 그리고 주의 법(주의 말씀)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요약하여 3가지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도덕율의 계명, 시민법, 그리고 제사법으로 요약할 수가 있다.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고 하는 도덕율의 계명으로부터 인간이 타락하여 십계명을 완수할 수가 없으므로 제사법을 통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그 후에 성도가 세상에 나가 올바른 삶을 살도록 시민법이 주어진 것이다. 출 20장에 10계명이 주어지고 그 후에 제사법과 시민법이 기록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B. 율법과 복음의 관계 :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 지금은 복음시대이므로 율법의 폐기론을 강하게 주장하여 율법의 무용론을 강조하는 이들이 상당수 잔재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부터 즉 창조 때부터 은혜가 우선이었다. 에덴동산에서 모든 삶의 조건을 풍족하게 베푸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도덕율의 언약을 맺었으며, 조건 없이 애굽에서 죄악에 찌든 백성을 구해낸 후에 10계명의 계약을 맺은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율의 계약은 은혜로 구원 얻는 믿음을 전제로 형성된 것이다. 구약에는 율법을 통해 믿음이 나타나고 신약은 은혜를 통해 율법이 나타난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과 율법은 서로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다.
C. 율법의 폐기론 : 믿음으로 구원 얻었으니 율법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율법 폐기론이 등장하
여 무 율법주의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율법이 가져다주는 은혜의 방편을 모르는 처사이다. 율법의 폐기는 정죄에 의한 저주에서 폐기이지 율법이 성도를 바르게 교육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믿음으로 이끄는 안내자가 되는 율법 자체로부터 폐기가 아니다.
D. 신율주의적 율법론 : 무율법주의도, 자율주의도, 타율주의도 비 성경적이다. 성경에 의한 율법론은 칼빈이 십계명강요에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신율주의적이다. 무율법주의는 신앙생활이 타락의 길로 접어들기 쉽고, 자율주의는 자기 자신이 성경외에 다른 교리를 만들어 신앙생활 하기 쉽고, 타율주의는 개혁신학에서 강조하는 성경에 의한 양심을 통한 성령의 사역에서 벗어난 신앙생활이 되기 쉽다. 신율주의는 성경에서 명한 계명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스스로 양심이 하나님께 굴복되어 하나님의 명하신 계명을 지키기 위해 전심을 다하며, 회개하며, 은혜위에 은혜를 더하는 신앙사상을 말한다.
십계명을 능등적으로 명하는 항목은 4계명과 5계명이다. 그러나 10계명 모두를 능동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
1계명은 너는 오직 나와 사랑을 나누자는 뜻이다. 내가 너를 고난의 풀무인 애굽에서 조건 없이 건져낸 이유는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 이 세상 무엇보다 크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제발 나에게만 그 사랑을 돌려다오! 그러한 뜻이다.
2계명은 삶에서 그 사랑의 표시를 꼭 나에게만 해다오! 라는 뜻이다.
3계명은 나의 이름에는 나의 인격이 들어있다. 그 사랑의 표시인 나의 인격을 소중하게 여겨다오! 라는 뜻이다.
4계명은 그러면 나와 너와 함께 그 사랑의 정을 나눌 수 있는 날을 정하여 그날만은 즐겁게 교제하자. 1주일 동안 너를 위해 너 마음대로 일하도록 허락하겠으니 하루만 나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자! 는 뜻이다. 그러면 이제 잠간 동안 이 세상 살면서 나와 교제를 나누는데 거침돌이 되는 너의 주위의 사람들과 어떤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가?
5계명, 네 생명의 근원이 되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6계명, 남의 생명을 네 생명같이 귀하게 여기고
7계명, 가정과 남녀의 질서를 바로 지키고
8계명, 남의 물건도 나의 물건처럼 귀하게 여기고
9계명, 모든 일에 있어서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10계명, 마음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죄악의 욕심을 억제하며 살아다오! 라는 뜻이다.
모든 윤리와 도덕의 기준은 10계명이며 그 기준은 수직적 관계인 하나님으로부터 관계정립이 바로 되어야 수평적인 인간관계정립이 형성된다.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상황윤리(Situation Moral Rule, Situation Ethics)는 계명의 원리를 무시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항상 성경의 법칙에 의존하여야 한다. 양심도 하나님의 법에 정한 양심이어야 한다. 양심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에 위배되는 일이 있을 때 절제하는 양심이 신율주의 양심이며(고전 10:23-33) 참된 자유를누리는 양심이다.
2) 성례의 올바른 집행 : 말씀의 올바른 전파가 실행되는 교회에서는 성례가 올바르게 집행되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성례 집행에는 반드시 올바른 말씀의 전파가 전제되어야 한다.
3) 권징의 올바른 시행 : 교인은 신조를 고백하는데 정확해야 하며 율법이 신앙생활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이는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모든 생활의 영역에까지 그 표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18:18절 이하의 권징을 반드시 실행하여야 한다. 이 권징은 말씀의 순수한 전파를 위해 교회를 정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2. 교회의 정치제도
1) 교황정치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정치 제도로 모든 교회는 교황 한 사람의 놓이게 된다. 교황의 모오성을 주장하여 교회의 군왕정치를 실행하는 군주국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교황은 베드로를 이어 천국의 열쇠를 계승하며 해석하는 자이다. 결국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앞세우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 교리보다 공로를 앞세우게 되고,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을 중간에서 차단하여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일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2) 감독정치
교회의 중심은 감독중심이라고 주장한다. 감독은 사도적 권위를 승계한다고 주장한다. 초대교회, 영국교회, 미국의 감독교회, 그리고 한국의 감리교회는 제도적으로 감독제를 실행하고 있다. 한국의 감리교회는 약간의 장로회 정치를 도입하고 있으며 신학은 웨슬레 사상을 따르고 있으면서 일부 강한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 하고 있다.
3) 조합정치
교단을 형성하고 있으나 사실상 지교회 중심의 정치제도를 실행한다. 교단은 각 지역 대표자들의 모임으로 형성되어 있으나 교회의 결정권이나 신학적인 문제는 물론 교역자 초빙도 지교회의 결정에 의존한다. 침례교회가 이에 대당한다.
4) 회중정치
이는 지교회 독립정치 제도를 기본으로 한다. 교역자들의 동일 서열을 인정하지만 성도들의 결의에 의해서만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도록 한다. 회중교회가 이 제도에 해당된다.
5) 장로회정치
장로회 정치제도는 대표제 정치제도이다. 선도들의 대표인 장로를 택하여 당회를 구성하고 상회의 노회를 통해 지도를 받는다. 물론 노회도 대표자들이 모여 지교회의 현안 문제와 교리 문제를 다룬다. 당회는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가 대표가 되고 백성되는 성도들이 뽑은 다스리는 장로가 회원이 되어 교회를 치리한다.
교육하는 장로 즉 목사는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겸임하게 되는데 목사는 복음으로 교육하고 교인들을 돌아보는 일을 함께 수행하지만 다스리는 장로는 교인들을 돌아보는 일만을 주로 수행한다. 그러므로 당회는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함께 모여 각 지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숙의하고 의결한다. 같은 내용과 제도로 상회를 구성하여 하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숙의하고 의결하는 기구인 총회를 조직한다.
장로회 정치는 모든 장로들을 같은 동등한 회원으로 간주한다. 목사와 장로의 차이는 일하는 기능의 차이이다. 하회와 상회의 관계는 서로 협력하며, 견지하며, 그리고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 제도는 건전한 교리를 유지하기에 합당하며 정치적 힘이 한쪽으로 쏠리는 일을 방지한다. 교역자 청빙에 있어서도 백성되는 성도들이 투표하여 상회인 노회에 상신하면 노회는 교리가 건전하고 신앙의 행실이 바른 교역자를 파송하도록 서로 협력한다.
3. 교회와 국가
교회의 정치 체제는 국가의 정치제도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정치제도는 국가의 정치제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주로 3가지의 제도를 말 하게 되는데
첫째: 교회 권력형,
둘째:국가 권력형,
셋째: 정교 분리형이다.
교회 권력형의 원리를 주장하는 곳은 캐톨릭 교회이며, 국가 권력형을 주장하는 곳은 독일 교회이며 정교분리형을 주장하는 곳은 주로 장로회 정치를 실행하는 곳인데 미국을 중심하여, 한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 그리고 호주 등이다.
1) 교회 권력형
중세 1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로마 캐톨릭 교회는 모든 제왕들 위에 군림하였으며 제왕들의 왕권을 허락하는 위세를 떨쳤다. 무오한 교황에 소속된 교회의 백성들은 제왕들과 함께 교회의 일원이므로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 제왕들이 행사하는 세속적 판단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자는 오직 교황뿐이라고 주장한다.
2) 국가 권력형
에래스터스의 견해에 의하면 캐톨릭이 주장하는 교리와 정 반대의 입장으로 교회의 정치적 제도는 국가의 제도아래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하나님의 신적제도임으로 교리의 전파, 성례, 권징 등을 국가가 관장하며 재정을 후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교회의 직원을 임명하고 행정을 감찰하는 일까지도 국가의 임무로 본다.
3) 정교 분리형
신학적으로는 개혁파 교회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제도적으로 장로교 대표제를 표방하는 교회관에 관련된 정교 분리형을 따르고 있다. 교회나 국가는 둘다 하나님의 주권적 허락하에 주어진 두 가지 조직체이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서로 다른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고 본다. 교회의 회원들과 직원들은 역시 국가의 회원과 직원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업무의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서로 간섭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향해서는 서로 협력하는 입장에 있다. 국가는 사회의 악을 제어하고 선을 집행해야 하고 교회는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도덕율을 실행하기 위해 영적 선을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에게 총과 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극악무도한 죄악을 억제하기 위한 방편이며 교회안에서는 오직 도덕율을 집행하기 위해 영적 치리권만을 허락한 것이다. 성도는 두 영역에서 임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특별은총의 영역인 교회안에서 주어진 임무에 충실해야 하며 일반은총의 영역인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충성되게 수행해야 한다.
정교 분리라는 의미는 교회와 국가의 제도에 한해서 분리라는 말이지 모든 영역이 2원론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하나가 되어 협력해야 한다. 제도적으로 교회가 국가의 공직자들을 임명하거나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국가도 교회에 대해 마찬가지이다. 영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자가 비록 국가의 원수라고 해서 성찬을 주도한다면 교회는 타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완전 분리의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을 향해서는 서로 깊은 간섭이 필요하다. 만약 국가가 악을 행하여 존폐 위기에 처할 때 교회는 분연히 일어나 국가의 도덕적 회복을 권면하고 심지어는 총칼을 들어야 할 때 혁명까지도 불사해야 한다. 또한 만약 교회가 국가의 법을 어기고 불신자보다 더 타락한 경우 총칼을 동원해서라도 힘을 사용하여 처벌해야 하며 교회의 도덕적 회복을 위해 어떠한 압력 수단이라도 강구해야 한다.
국가의 존폐는 교회의 존폐로 연결되고 교회의 부흥은 국가의 번영으로 연결되는 일들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국가번영과 교회부흥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이 지켜온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고수해야 한다. 그 때 미래의 교회는 영속적으로 유지 될 것이며 국가는 번영 할 것이다.
*일반 은총론
교회와 국가에 관한 신학적 입장을 논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제목이 “일반 은총론”이다.
이 제목은 특별은총론 외에 또 다른 은총론이 대두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자는 구원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은총을 받은 자이지만 일반은총을 받는 문제에 있어서는 불신자나 다 같은 은총 안에 존재한다.
교회와 국가론에 있어서 국가에 관한 신학적 문제는 일반은총론의 영역에 속한다. 일반은총론은 자연계시 즉 일반계시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특별은총론은 특별계시인 성경과, 시공간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진다.
자연계시는 19세기 이전에 주로 사용했던 용어이며 19세기 이후에는 일반계시로 불리어졌다. 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는 충분히 알 수가 있으나 특별은총의 영역에서의 3위 1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통로는 오직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인 구세주로 받을 때만 가능하다.
A. 일반은총과 일반계시
일반은총은 신자나 불신자나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각자의 문화명령에 관한 은사이며 또한 보편적으로 공평하게 내려주시는 값없는 은혜다. 각자의 취미와 능력이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각자의 일반 은혜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비와 공기와 삶을 살아가는 재료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공급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반계시는 이러한 하나님의 보편적 섭리를 보여주시는 조명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연의 신비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며 어떤 사람의 특수한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된다. 또한 역사의 흐름을 통해 모든 사건을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다스리심을 알게 된다.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는 역사의 절대 변수는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깨닫게 한다. 이 땅위의 모든 사람, 모든 재료, 모든 사건들은 결국 인위적인 요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형성돼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일반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조명해 주시는 하나님의 경륜(Administration)이다.
B. 문화명령(Cultural Mandate)과 종교명령(Religious Mandate)
아담이 창조함을 받을 때 먼저 문화명령을 받았다(창1:26-31, 창2:15, 19). 이 문화명령을 받을 때 인간은 무한한 은혜를 받았는데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며, 만물의 이름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것이 일반은총을 통해 하나님과 맺은 문화노동의 계약이다.
이 계약은 자연을 다스리는 중보자 역할을 아담이 수행하는 일이었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자연법칙을 아담이 대신 다스리는 일이었다. 여기서 하나님과 자연과의 관계를 아담이 질서 있게 유지하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자연을 질서 있게 다스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또한 자연을 질서 있게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는 길은 종교명령인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는 선악과의 명령에 포함된 것이다. 범죄한 후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가시와 엉겅퀴를 맺는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이 문화노동은 십계명에서 세밀하게 재 선포 되었는데 6일간 힘써 일하고 안식일 하루를 하나님을 위해 일하라는 종교명령에 포함된 내용이다. 그러므로 일반은총 영역의 노동은 6일간의 문화노동이며 특별은총 영역의 노동은 일반은총의 노동을 쉬고 하나님을 위해 하루의 노동을 바치라는 종교명령의 노동이다.
노동의 법칙에서 볼 때 6:1의 노동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노동을 하는 경우 하나님의 안식일 법칙에 해당되는 문화명령과 종교명령을 어기는 일을 하게 된다. 종교명령은 1주일간 하루 주님을 위해 일하라는 종교노동을 말하는데 전제가 6일간은 열심히 문화노동에 종사한 후 하루를 완전히 쉬라는 명령이다.
이 문화명령은 일반은총에 나타난 인간을 위해 주어진 노동의 은혜이다.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나 건강과 재물을 주신 것은 문화명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노동의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불신자들도 해당된다. 불신자들이 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일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일을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하게 된다. 이 문화명령의 타락은 노동의 타락이다. 어느 누구나 불법적으로 자기 유익을 위해 돈이나 물건을 취할 때는 제제를 받아야 하며 형벌을 받아야 한다.
C.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영역주권
논리상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을 분리하는데 영역을 기본으로 하여 나눈다. 그러나 이 영역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2원론으로 작용할 수 없다. 먹고 입고 사는 문제를 악에 속한 것으로 여기고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돈이 “일만 악의 뿌리”이기 때문에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가족을 위해 일하는 것을 게을리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성도로 취급받을 수 없다.
문제는 모든 일에 만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재료가 되어야 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왔고 만물은 교회에 복종하도록 창조 되였기 때문이다(엡1:21-23). 신자나 불신자나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 종국에는 악한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일하는 모든 인류는 특별은총의 영역의 사역을 뒷받침하는 일을 한다.
기독교 국가의 과학적 발전과, 문화의 발전과, 경제적 발전은 복음을 전하는데 중요한 방편이 된다. 일반은총론에서 볼 때 높은 도덕적 수준으로 헌법을 집행하는 나라들은 거의 기독교 국가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복음전도에 큰 뒷받침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든지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그 은사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특별은총의 영역에서는 택정함을 받은 자만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다. 나아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일반은총의 영역에서도 대부분 뛰어난 은사를 발휘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에게 주어진 문화명령의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4. 은혜의 방편
하나님은 모세나 선지자들에게 직접 나타나기도 하시고 직접 말씀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기록된 성경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성경 교사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은혜를 성도들에게 주입 시키는 일에 방편 즉 도구를 사용한다. 그 방편이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
1) 말씀
이 말씀은 인격적 로고스인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권능의 말씀(시33:9, 롬4:17)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이미 기록된 영감된 성경을 의미한다. 또한 전도의 말씀, 설교, 그리고 신앙고백의 가르침까지도 포함한다(고전1:21, 히4:12).
이 말씀은 성령과의 밀착된 관계를 가지고 은혜의 사역에 도구로 동참한다. 성령은 인격이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사역이 가능하지만 특별히 초자연적 특별 사역 외에는 성령이 말씀을 도구로 하여 은혜의 사역을 시행하신다. 개혁파 신학에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말씀의 단독 사역은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3인격인 성령의 사역에 의해 말씀을 사용해서 성도의 심령에 구원의 은혜를 적용시키는 것을 강조한다.
2) 성례
성례는 말씀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말씀을 우선으로 하여 성례를 집행해야 함이 개혁파 신학의 교리이다. 캐톨릭 교회는 성례를 우선으로 한다. 보고 만질 수 있는 복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말씀은 듣고 읽고 인격적 결단을 요구하지만 성례는 보고 만져야 은혜의 방편이 됨으로 먼저 말씀에 의해 인격적 결단이 이루어진 후 성례에 참여하는 것이 순서이다.
(1) 성례의 정의
성례(Sacrament)라는 말은 소요리 문답과 대요리 문답에 잘 나타나 있는데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예식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세운 새 언약의 유익을 감각적 표로 인쳐 성도들에게 적용함”을 말하고 있다.
(2) 성례의 두 가지
개혁파 신학에서 주장하는 성례는 세례와 성찬으로 한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1)신구약의 일치인데 신약의 세례와 성찬은 구약에는 할례와 유월절이다.
(2) 예수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을 성례로 정해야 한다(요6:41-58, 마26:26-35).
(3) 사도들의 전승이 있어야 한다(고전11:23-34).
캐톨릭 교회에서는 두 가지 성례 이외에 5가지 즉 견신례, 고해성사, 신품례, 혼례, 종부례를 첨가하였다. 이는 성경적이지 못하며 역사적 교회에 나타난 성례의 예를 보아도 성립되지 못한다.
이 5가지 예는 신구약의 일치나, 예수님의 제정하신 것이나, 사도들의 전승에서 보면 어느 곳에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3) 기도
(1) 기도의 정의
기도는 성도의 영혼이 하나님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소요리 문답 98문에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원을 하나님께 고하여 그의 뜻에 합당한 것을 간구하여 죄를 자복하고 그의 자비하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니라.” 고 정의하고 있다.
(2) 교리적 요점
A. 하나님의 인격성 :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여 묻고, 대답하고, 사랑 받으며 깊은 대화로 나아간다.
B. 하나님의 내재성 : 하나님의 인격성이 성도의 인격안에 계시며 성령으로 더불어 교제하며 성도의 생각들을 알고 계시며 우리의 열망을 따라 인도하고 계신다.
C. 하나님의 주권성 : 기도는 만물을 다스리시고, 보호하시고, 그리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기도의 의지를 성도들에게 부여하시고, 그의 뜻에 따라 응답하시고, 필요를 따라 일용할 모든 요구를 제공하신다.
D. 기도의 대상 : 기도의 대상은 오직 성경에 의한 하나님에게만 드려야 된다. 성경에 의한 기도의 대상이라는 말은 3위 1체 하나님께만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는 성도들이 신앙을 키워가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다. 그래서 성도의 영적 어머니 역할을 하는 곳이 교회이다.
두 가지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 하나가 교회에서 나타나는 비리 문제이다. 이런 일로 인해 무교회주의적인 요소들이 불거지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못하다. 물론 우리는 자신들을 향해서는 죄에 대하여 강력한 검사역할을 해야 하며 세상에서는 빛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회에서 나타나는 불쾌한 사례들은 이 지구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일어날 것이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개방된 곳이 교회이며 교회 회원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적나라하게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일로 교회를 부패의 집단으로 여기고 신앙을 키워 나가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를 어떤 모임의 단체로 보느냐? 의 문제이다. 제도가 잘 갖추어진 대형 교회만을 생각하는 현대 교회의 흐름을 심히 근심된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가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을 개탄하지 아니 할 수가 없다.
개혁신학을 남겨준 순교자들은 홀로 주님만 바라보고 소수와 함께 신앙의 정조를 지키며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분토처럼 버리고 초지를 관철하여 한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제 7 장 종 말 론
“종말론”이란 단어는 에스카톨로지(Eschatology;헬 Eschatos)란 말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 원어의 뜻은 끝난다는 말보다 시공간의 역사를 포함한 종말의 개념이다. 즉 시공간의 역사는 종말의 역사를 예표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말의 종말은 그냥 끝난다는 종말의 개념으로만 이해하면 신학적으로 큰 오류가 생긴다. 박형룡 박사의 교의학에는 내세론을 그 개념으로 종말론을 전개하고 있다. 의미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시공간에서의 삶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의 일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1. 개인적 종말론
개인의 종말은 육체적 죽음을 의미한다. 이는 육체로부터 영혼의 분리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의 3가지가 있는데
첫째; 원죄적 죽음인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면서부터 죄악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태에 놓여있다. 이는 영적 죽음이다(사59:2, 롬7:24).
둘째;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다. 이는 개인의 종말을 의미하는데 보통 말하는 육체의 죽음을 의미한다(전9:10, 시6:5, 마10:28).
셋째; 형벌의 죽음이다. 이는 영혼과 육이 분리되어 하나님의 교제로부터 추방되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히9:27, 계1:18, 21:8).
그러나 개인적 종말론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에 초점을 맞추어 그 의미를 전개한다.
1) 사망의 본질
과학적 입장이라고 말하면서 애매한 논증으로 인간의 죽음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이 존재한다. 더구나 이성주의입장에서의 신학을 전개하는 펠라기우스주의와 소시니안주의 자들이 주장하기를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연적 상태에서 창조되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의 범죄와 그의 형벌에 의해 주어지는 죽음의 의미를 소멸시키는 교리이다.
성경은 자연적 사망설을 거절하여 “사망은 죄의 값”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롬6:23, 고전15:56, 창2:17, 시90:7-11, 갈3:13). 그러므로 병이나 사고로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경우 하나님은 질병이나 기타 사고를 섭리가운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죽음은 하나의 징계의 과정을 통과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죽음 자체가 성도에게 주어지는 형벌이라기보다 심화되고 영화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징계의 수준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 후에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보다 높은 수준에 이르는 영적 과정이다. 인간의 본질적 범죄의 여파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에서의 죄도 없고 미움도 없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생각하고 능히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할 때, 또한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천사들이 보호한 기록을 보고 심히 위로를 받는 것은 내가 숨을 거둘 때 천사가 와서 나를 감쌀 것을 생각하면 일시적으로 당하는 죽음은 하찮은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2) 영생의 의미
영생이란 말의 뜻은 아따나시아(헬, Athanasia)로 영어의 "Immortality"로 표현되는데 “죽지 아니함”의 뜻이다. 또 다른 단어 아이오니어스 조에(헬, aionios joe)는 “eternal life”로 “영생”이란 뜻이다. 다른 종교에서도 사후의 내세를 말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와 같은 정확한 근거나 역사적 사실로 증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의 의미는 무의미한 영속적인 시간의 존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과의 실체적이며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곳이다.
3) 사후의 상태
영혼과 육이 갈라진 후 육은 썩어지며 부활하기까지 영혼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1) 중세 캐톨릭 교회 : 연옥의 교리인 림보(Limbus)라는 장소가 있다는 주장을 1546년 Trent 회의에서 확정한 교리이다. 이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상태에서 지옥에 가장 가까운 음부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는 구약의 성도들과 세례 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러한 교리는 제 2의 기회설을 주장하게 되는데 림보에서 다시 구원얻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음부”에 관한 교리에서 예수님의 재림 이전의 영혼의 존재에 대해 제시하고 있는바, “스올”이나 “하데스”라는 말은 음부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상태를 추상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죄악에 있는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또한 무덤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벧전 3:18-20까지의 내용을 보면 제 2의 기회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나 여기에서 말하는 “옥”의 개념은 벧전 1:10-11에 의거 구약의 죄가 많은 곳의 개념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음부라는 말은 제 2의 기회설을 말하는 림보 즉 음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 죄악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2) 사후 영혼의 의식
어떤 부류에서는 육체적 뇌의 활동이 중지됨으로 사후에는 의식이 없이 잠자는 상태가 재림 때까지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성경 단12:2, 시6:5, 마태9:24, 행7:60, 고전 15:51, 살전 4:13 등의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구절의 내용들은 사체와 잠자는 자의 유사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도에게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날 것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성경은 사망 즉시 영혼과 육이 분리되어 영혼은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의식생활로 들어감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눅16:19-31, 행7:59, 고후5:8, 빌1:23, 계6:9, 7:9). 그리고 후에 예수님 재림 때에 영혼과 육이 연합한 실체로 영화되고 심화되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2. 역사적 종말론
그리스도의 재림을 일반 역사의 끝으로 보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각을 역사적 종말론으로 명명한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는 과거의 역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는 창세전에 계획하신 3위 1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Decree)에 의해 진행되어 왔다.
창조된 역사는 우연하게 진행되어 우연하게 종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역사를 통해 미래의 역사를 예언하였고 그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초림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역사속으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 그리고 역사속에서 예수님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과, 재림하실 것을 예언하셨다. 그리고 그 모든 예언이 역사적으로 완성되었고 남은 한가지 역사적으로 완성될 재림이 남아있다. 그러면 재림의 시기가 언제인가? 라는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그 관심이 천년설이다.
천년설은 수없이 많은 이론들이 있다. 아마 그 이유는 추측하건대 미래에 일어날 예수님의 재림을 가정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더욱이 계시록은 상징적 문장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에 많은 해석이 난무하여 왔다. 그러나 여기에 주요한 3가지의 천년설을 소개하고 정의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1) 전 천년설(Pre-millennialism)
계시록 20장에만 천년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천년전에 예수님의 재림”을 문자대로 받아들인다. 그 세부적인 내용은
(1)천년전에 예수님이 공중재림하고
(2)천년동안 마귀를 무저갱에 가두고 예수님과 성도들이 공중잔치에 참여하고
(3) 천년이 찬후 영원한 신천신지가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2) 후 천년설(Post-millennialism)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이 지난 후 임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자들의 후 천년설은 지상 낙원주의에 기인하여 천년을 전여 지상평화의 유지에다 억지로 맞추려고 한다.
전쟁이 없는 인류 평화가 지속되면 예수님의 재림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 사실 예수님의 가시적 재림을 부정한다. 그러나 재림을 역사적 사건으로 믿으려는 부류에 속한 후 천년주의자들은 계시록 19장을 초림에 관련된 기록으로 보고 이미 천년이 이 땅위의 환란을 통해 영적으로 임하였고 천년이 지나면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주장이다.
3) 무 천년설(Amillennialism)
무 천년설이라 하여 천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Berkhof 교수는 천년의 개념을 없다는 개념보다 의미적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박형룡 박사는 무 천년주의를 천년이 없다는 개념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 천년주의는 천년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천년에 관한 계시론적 해석을 바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천년을 문자 그대로 봐야 하느냐? 아니면 천년이라는 의미로 봐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개혁파 신학에서는 의미로 보는 경우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그 하나는 천년을 교회시대로 보고 천년의 시작을 오순절에 두는 주장과 예수님의 초림에 두는 주장이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개인적 종말에 두는 주장이 있다. 개인적 종말을 천년의 시작으로 보는 자들은 “지상 천년은 없으나 천상 성도들의 행복을 말하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단언한다.” 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천년을 의미적으로 볼 때 개인적 종말을 당한 성도들이 영혼과 육의 분리의 때가 천년의 시작으로 보는 내용이다. 천년의 시작을 성도들의 영혼과 육의 분리의 때로 보는 주장은 로뢰인 보에트너(Loraine Boetner)가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천년동안 예수님과 성도들의 찬치라는 개념은 이미 영적 교제의 개념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사람이 영혼과 육의 분리 이후 이미 종말 즉 내세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때 천년의 기간은 끝나는 것이다.
천년을 문자적으로 보면 계시록 해석에 문제가 생긴다. 계시록 7장 144,000성도나, 계시록 17장 7머리와 10뿔이나, 계시록 19장 24장로나, 그리고 계시록 13장의 666은 모두가 상징적 의미로 받아야 하며 문자적으로 받을 수 없다. 계시록의 해석을 어느 부분은 문자적으로 받고 어느 부분은 상징적으로 받으면 자가 모순이 생긴다.
그러므로 1,000년이란 기간도 상징적 의미로 받아야 한다. 천년을 상징으로 볼 때 무 천년주의가 적합하며 천년의 의미를 성도의 개인적 종말을 그 시작으로 보는 것이다. 성경 문학을 보면 10의 수는 길고 많다는 뜻이다. 10에 해당되는 두 자리 수를 더하면 1,000이 되는데 이는 길고 또 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1,000이란 수는 오랜 기간을 의미하므로 개인이 죽은 다음 당장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이 아니고 긴 시간이 지난 다음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뜻이다.
이 파란 많은 세상에 살면서 너무나 짧은 삶을 수 천년 살것처럼 자신의 안일과, 명예와, 물질의 소유를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소유하려고 전력을 다하는 이들을 보면 성경에 나타난 마 13장의 비유가 적절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의 삶은 잠간 지나가는 바람잡이에 불과하다. 천국을 준비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힘써 일해 세상 것을 얻으면 하나님을 위해 아낌없이 써야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천대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외롭게 투쟁하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내가 너에게 준 달란트를 남겼으니 상으로 갚아 주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성도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개혁신앙에 나타난 신앙고백 구절마다 순교자들의 피가 숨어있는 것을 누가 부정하랴? 이 신앙고백들이 현대 교회에서 천대받고 목사의 서재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잠자는 고전으로 남아 있는 동안 한국교회의 신앙의 뿌리는 점점 뽑혀 모래위의 누각이 될 것이다. 번영신학이 판을 칠 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의 찬송은 영구적으로 영문 밖에서 서성거릴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가졌느냐? 가 신앙의 척도로 평가될 때 순교자들이 지켜온 영광된 교회는 가장 추한 몰골로 전락될 것이 확실하다.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여우의 괴교를 영혼의 뒤뜰에 숨기고 늑대의 이빨을 양의 탈속에 감추고 교회와, 신학교와, 교단의 재산을 탈취하는 삭군들이 판을 치고 있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주님! 지구의 종말이 올 때까지 개혁신학이 한국교회에서 춤추는 축복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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