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 교의신학!! 변증학!!

기독교(基督敎) 사상

하나님아들 2024. 3. 2. 17:30
기독교(基督敎) 사상              
 
기독교란?
고대 기독교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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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신학
기독교강요


기독교란?
우리가 기독교 사상을 공부하기 전에 기독교에 대해서 먼저 공부하겠습니다. 표준국어사전과 기독교사전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찿아보았습니다. 표준국어사전 -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천지 만물을 창조한 유일신을 섬기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다시 페르시아, 인도, 중국 등지에 전해졌는데, 11세기 그리스 정교회가 갈려 나간 후, 로마가톨릭 교회는 다시 16세기 종교개혁에 의하여 구교 곧 가톨릭교회와 신교로 분리되어 현재 세교회로 나뉘어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신교를 기독교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기독교 사전에서는 -
『기독교(Christianity)란 A.D 1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시된 계시 종교이다. 불교및 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다. 명칭은 크리스티아누스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는데, 그 의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행11:26)이다. 기독교의 기점과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 세상의 구원자로 믿는 것을 신앙의 근본 교의로 삼고있다. 기독교는 1세기 초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비록 유대교적인 배경이 있었지만 기독교는 그 나름대로 독특성을 갖고 시작되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제자들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그의 죽음을 의미와 부활을 선포했다. 이에 다소 사람 바울이 가세 해 유럽 지역에 복음을 전함으로서 교회의 터전을 굳게 하였다. 그래서 1세기말에는 로마제국의 주요 도시들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던 중 수많은 박해와 순교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기독교는 더욱 확장되어 4세기에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었다. 8세기에는 게르만 민족을 교화시켜 발전을 거듭했으나 11세기에 이르러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분리됨으로써 동방정교회는 비잔틴 제국에서, 로마 가톨릭은 서유럽 국가에서 자리 잡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종교개혁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생겨났으며, 이로인해 기독교는 동방정교회, 로마가톨릭, 프로테스탄트교회의 3대군으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독교에는 교파 간에 신앙, 의식, 조직, 정치제도의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그 근본적인 입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데서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어떤 기독교이든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특별히 기독교의 가장 특정적인 신관인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인(神人)교리는 기독교 교리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며, 그에 근거해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주었고, 따라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그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믿으며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며 원리이다.
기독교는 이같은 교의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한 것으로 믿는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인간의 양심이나 자연 혹은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으나, 이러한 자연계시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써 다만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올바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같이 기독교는 계시종교라는 특수성을 가지지만, 그 계시는 인류 역사 속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또한 역사적인 종교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자기 전통의 고수와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기독교는 이러한 계시의 내용이 성경에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경은 유일한 계시의 책이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되며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지고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체인 몸이며, 성도들은 여기에 연결된 지체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또한 성경은 이 세상에 종말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도 증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교의를 가진 기독교는 지난 2천년의 역사 동안 다른 어떤 요소보다 더 강하게 인류 역사에 영향을 끼쳤왔고 많은 변화를 초래해 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무수한 종교적 위기와 난관을 겪어 왔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늘 새롭게 변모하면서 그 본질을 지켜왔으며, 본래의 영적 위치로 되돌아가는 힘을 그 자체 안에 갖고있는데, 그 힘은 바로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믿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수적 외양적으로 팽대해 있으나 사실은 많은 문제점과 어려움들을 안고 있다. 그렇지만 20세기의 위기 속에서도 기독교는 끊임없이 개혁하며 앞으로 전진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세계속에서의 그 사명을 끝까지 다할 것이다』 <기독교사전>.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점
『기독교(基督敎)는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들에게 알게 하고 섬기게 할 것을 가르쳐줌으로써 시작되는 유일(唯一)한 종교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으로부터 출발(出發)되었다. 다른 종교의 교주(敎主)들은 자연의 지배(支配)를 받았다. 다른 종교의 교주(敎主)들은 죽어서 무덤과 시체(屍體)를 남겼다. 또 다른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찿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철학과 미신(迷信)이 발생하였고, 창시(創始)자에 의해서 종교가 탄생했지만 그들은 끝내 신(神)을 찿지 못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는 진리(眞理)나 영생(永生)을 말할 때“이것이 진리이고 저것이 영생 얻는 길”이라는 3인칭(人稱)을 사용하나 예수님은“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1인칭(人稱)을 쓰고 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의 행위(行爲)에 따라 해탈(解脫)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구원 문제는 연약한 인간의 힘이나 행위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기독교(基督敎)의 역사(歷史)
기원1세기 초 : 기독교는 1세기 초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1세기말에는 로마제국의 주요도시들에 교회가 세워졌다.


4세기 : 수많은 박해와 순교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기독교는 더욱 확장되어 4세기에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었다.
서기325년 :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
기독교는 8세기에 와서 게르만 민족을 교화시켜 발전을 거듭했다.


11세기 : 11세기에 이르러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분리됨으로써 동방정교회는 비잔틴 제국에서, 로마 가톨릭은 서유럽 국가에서 자리 잡게 되었다.
서기1054년 : 동서(東西)교회 분리. 동방(東方)교회와 서방(西方)교회(카톨릭)


16세기 : 16세기에 이르러서 로마 가톨릭에 대한 종교개혁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생겨났으며, 이로 인해 기독교는 동방정교회, 로마가톨릭, 프로테스탄트교회의 3대군으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기1517년 ;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宗敎改革)운동.
서기1524-1660년 : 종교전쟁




고대 기독교 사상
기독교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대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우리는『고대 기독교 사상(한철하)』에서 교리, 사상, 신조, 기독교 신앙의역사, 성경과 교리사, 교리와 사상의 기원에 대히여 공부하겠습니다.


1) 교리
『교리(敎理)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도리(道理)를 말한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도리를 불교 교리라고 함과 같이 기독교 교리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이치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바는 곧 기독교에서 신앙하는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에는 여러 가지 국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앙에는 감정적인 국면도 있고, 도덕적인 국면도 있고, 또한 지적인 국면도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신앙은 의지(依支)하는 면과 지적(知的) 국면과를 구별한다. 즉 신앙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면과 하나님을 아는 면이 있는 것이다. 교리는 바로 기독교 신앙의 이 지적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구원의 내용을 아는 일들이 교리에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는 기독교의 자기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이와 같은 자기 지식은 성경에서 끌어낸다. 그리고 성경이 곧 계시이므로 기독교의 그와 같은 자기 지식은 계시의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리는 계시의 지적 내용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와 같은 지식을 신조의 형식으로 격식화하여 고백문, 기도문 등 예배의식에 사용하기도 하나 특히 색다른 지식 체계나 이단에 접할 때, 신앙의 규칙으로서 교회 회의에서 제정하기도 한다』


2) 사상
『사상(思想)은 인간이 가지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사상을 만드는 존재이다. 그리고 사상에는 어떤 핵심, 즉 통일(統一)점이 있다. 이 통일점을 중심으로 모든 정신 활동이 의미의 통일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생각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통일을 잃어버릴 때 엄격히 분열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어떤 개인이든 사상의 통일이 있는 것이고, 또 이와 같은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사상은 항시 변하고, 따라서 여러 가지 사상이 생겨난다. 사상에는 기독교 사상만 있을 뿐 아니라, 불교 사상, 유교 사상, 공산주의 사상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사상들이 있다.
또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고대 기독교 여러 사상, 중세 기독교 사상, 현대 기독교 사상, 그리고 이 고대, 중세 현대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사상적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 교부 안에서도 우리는 여러 가지 사상이 함께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어거스틴 안에 우리는 헬라의 플라톤주의적 기독교 사상, 히브리의 구속사관(救贖史觀), 라틴의 고유한 제도(制度)주의 기독교 사상 등이 다 함께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상은 개인 혹은 단체가 가지는 정신 체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 사상은 개인 혹은 단체가 가지는 기독교의 정신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위에서 본 바와 같은 기독교 교리와 기독교 사상과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사상은 인간이 가지는 정신 체계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관적이다. 교리는 계시 내용의 지적 표현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객관적이다.
사상과 교리는 같은 기독교 신앙의 양면(兩面)이라 하겠다. 같은 기독교 신앙의 주관적 면을 우리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고, 같은 기독교 신앙의 계시적 객관적 면을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교리와 사상은 사실 구별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어디까지가 사상이며 어디까지가 교리라고 할 수가 없다. 각 교부의 가르침은 곧 그의 사상이다. 또 그의 사상을 그는 가르치는 것이다. 그의 사상을 떠나서 그의 가르침의 도리를 이해 할 수가 없으며 그의 가르침의 도리는 결국 그의 사상이었다. 이와 같이하여 사상과 교리는 일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면으로 더욱 굳어진 규격화 된 신조가 있다는 것을 고려에 넣을 때 사상과 교리는 구별된다. 즉 우리는 교리라는 것을 더욱 폭이 좁은 기독교 고유의 믿는 도리들이라고 보고, 사상은 더욱 폭이 넓은 비기독교 사상까지 통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사상은 교리적으로 틀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학 사상 내지 종교 사상의 변천은 대단히 복잡하고 언제나 계속된다. 고대에 있어서 우리는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라틴 등의 아주 뚜렷한 사상적 조류를 볼 수 있다. 중세 스콜라 신학에 있어서 우리는 안셀름, 아벨라드, 빅토리안, 어거스틴주의, 토미즘 등의 현저한 사상적 차이 등을 볼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 칸트 이후로 우리는 아주 활발한 기독교 사상 활동이 전개되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사상들은 얼마든지 폭이 넓어질 수 있다.
령 오리겐이나 아폴리나리스의 영혼론이 얼마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일치하여 가며 이것이 기독교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가? 아다나시우스에 있어서 플라톤의 존재론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고 있는가? 위 노스틱주의자들에 있어서는 거의 기독교가 그 모습과 내용을 달리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여러 가지 사상들에서 우리는 그 상응(相應)하는 교리적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고유의 교리에서는 멀어가고 있다.
편 기독교가 믿는 내용의 지적 표시는 더우기 교회적으로 표시한 것은 그 범위가 아주 좁아진다. 물론 교회의 여러 부분에 있어서 그와 같은 표시는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의 중심 원칙이 될 만한 것들은, 즉 교회의 회의에서 공인을 얻게된 것은 이를 몇 가지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회의의 삼위일체론, 칼케돈회의의 기독론, 어거스틴 펠라기안 논쟁의 은총론, 안셀름의 속죄론, 개혁시대의 칭의론, 중세나 개혁시대의 성례전론, 현대의 소시니안 논쟁, 알미니안 논쟁 등에 관련되는 여러 교리들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우리는‘사상’과‘교리’사이에 구별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양자는 분리되는 것도 아니요, 심지어 경우에 있어서 사상적 배경을 모르고 교리적 동향을 볼 수가 없으며 또 한편 사상 연구는 교리적 고찰에 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3) 신조
『신조(信條)는 교리보다도 그 범위가 더 좁아진다. 즉 교리 가운데 교회가 그 신앙 조항을 공적으로 정한 것을 신조라고 한다. 신조 가운데 니키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나 칼케톤 신조 등과 같이 신앙의 규칙으로서 대교회(大敎會)회의에서 정하여진 것도 있고, 혹은 어느 한 교회나 어느 감독 같은 이가 편의상 정한 것이 퍼져나가서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공인되게 된 것도 있다. 사도신경 같은 것은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시대 이후에는 각 교회가 각기 그 믿는바 내용을 총괄 요약하여 그 교회의 신조로 정하여 왔다.
가령 루터 교회에 있어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이나 협화(協和)신조, 개혁 교회나 장로교회 등에 있어서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나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있어서의 트랜트 신조 등이 그 예이다. 이것은 모두 교회가 권위로서 세운바 그 신앙 내용의 규정들이다. 교회에서는 개인이나 단체로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 믿는 바를 가르쳐 오는 것이나 그 교회의 신조에 위배된 것을 어느 개인이나 단체도 가르쳐서는 아니 되며, 이런 의미에서 교리는 언제나 신조에 어긋나지 않도록, 혹은 신조의 더욱 자세한 해명이 곧 그 교회의 교사들이나 단체의 교리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조직신학자는 언제나 교회의 신조에서 그 체계의 골자를 얻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록‘말씀의 신학’으로서의 새로운 종류의 조직신학을 모색하는 신 정통주의 조직신학에 있어서도 결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 교리 조항들에서 그 골자를 얻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결국 이 새로운 조직신학도 재래식의 성경 본문을 증거로서 열거하여 가는 방식과 큰 차이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사상은 개인 혹은 단체가 가지는 정신 체계를 말한다. 기독교 사상은 기독교인 혹은 기독교 단체가 가지는 정신 체계의 총체를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인간이 가지는 정신 체계는 언제나 단원(單元)론적이요, 폐쇄된 체계가 되기 쉽다. 여기에‘사상의 페쇄성의 문제’가 제기 된다. 더욱이 진리의 한 부분을 확대시켜서 체계화할 때 그렇다. 하나님 없는 사상은 언제나 그와 같이 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 정신에 역사하시지 않는 한 그 인간 정신은 언제나 폐쇄되기 마련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자기를 발견하게 되며, 또 이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빈이 하나님 지식과 자기 지식은 동시적이라고 한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 지식을 그 근본으로 하여 가지는 기독교 사상은 다 이 폐쇄성의 문제를 피하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본래 하나님이 자리를 가지는 사상도 그것이 사상화되고, 하나의‘사고’로서 고착, 확대될 때 그것은 하나의 철학적 사상으로 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가 부단히 그 이기주의를 경계하여야 할 필요가 생긴다. 기독교 사상은 폐쇄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 그 종교적 대상까지도 사상화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철학적 혹은 과학적 여러 영역을 사상화하여 경제 사상, 정치 사상, 윤리 사상, 예술 사상들을 만들어 냄과 같다. 대개 기독교 사상이 단원론적으로 되고 폐쇄적이 되는 것은 부분적 진리를 확대하여 나가는 데서 일어난다. 기독교의 전체의 진리를 다 고려 할 수 있는 단순한 신앙적 태도만이‘사상의 페쇄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인간은 자기가 믿는 바로 또한 생각한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그 믿는 내용을 사상화하여 오지 않았다면, 즉 부단히 자기의 사상 내용으로 만들어 오지 않는다면 그 믿는 내용들의 지적 표현들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교리도 발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가령 안디옥 학파의 신학 사상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 사상과 사이에는 큰 차이를 보이었다. 이것은 진리의 상이한 면들을 각각 강조하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상이한 사상들이 서로 만나서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논쟁을 거듭하는 동안에 고대 교회는 다 합하여 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사상’은 그 약점을 가지는 동시에 또 그 장점도 가진다. 어떻든 우리는‘사상’을 피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교리적으로 틀리지 않는 사상을 가지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사상의 창조적 활동을 막지 않도록 또한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결국 사상이든 교리든 신조든 간에 모두 계시의 책인 성경에 의하여 규정될 때 각각 그 기능들을 잘 발휘하게 될 것이다』


4) 기독교 신앙의 역사
『우리가 취급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교회사의 각 시대의 사상 경향을 주목할 것이다. 또 그 시대의 교사들의 사상들을 연구할 것이다. 특히 그의 신학 사상에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교사들에 있어서의 교리적 골자를 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의 교회가 공적으로 제정 혹은 고백한 신조들을 연구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각 시대의 사상과 교리와 신조의 총체적 연구는 결국 그 시대의 교회가 가지는 신앙의 해명으로 될 것이다. 의미에서 사상사, 교리사, 신조사가 다 우리의 관심 속에 들어올 것이다. 우리는 각 시대가 가졌던 관심을 우리의 관심으로 할 것이다.
각 개인이, 각 학파, 각 교회가 또는 전체 교회가 가졌던 관심을 우리의 관심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영생과 불사(不死)에 그 주요 관심을 보였던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에 대하여 자유 의지론을 추구하는 것은 동문서답식의 연구가 될 것이다. 사상 연구는 언제나 그것이 가졌던 근본 관심에 입각하여 연구해야 하며 그것이 교리상으로 미치는 영향이나 신조나 고백에 어떻게 관계되는 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결국 이 관련되는 교회의 또는 개인들의 신앙의 해명이 될 것이다. 이것은 교사들의 신학자로서의 사상이나 교리적 교훈의 문제 이전의 문제, 한 사도의 단순한 신앙의 문제로 귀착될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연구를 사상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고, 교리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상사도 이에 포함되고 교리사도 이에 포함되고 신조사도 이에 포함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신앙의 역사라고도 부를 수 있을 줄 안다. 교회사의 각 시대의 사상, 교리, 신조, 신앙을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이 학문은 극히 객관적인 학문이요, 또 분석적인 학문이요, 주관적인 어떤 사관을 가지고 취급할 성질의 것이 못된다. 우리는 이 후자의 경우를 하르낙에서 볼 수 있다. 물론 그와 같은 노력이 각 시대의 신앙과 사상과 그 교리적 골자와 그런 시대에 형성되는 신조 등의 내용을 어떤 특수한 각도에서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어 왔다.
가령 하르낙이 교리사를 예수의 순복음의 토대 위에 세워진 헬라의 건축물이라는 입장에서 보아 감으로써 그 근본 사관이 옳은 것이 못되나, 각 시대 시대의 여러 가지 점을 밝히는 공을 무시할 수 없고, 적어도 분석적 노력의 계기를 장만하여 준다. 가령 니그렌은 교리사를 아가페와 에로스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교부나 학파들을 아카페형, 이로스형, 노모스형으로 나누어본다. 이것도 하나의 관찰법이기는 하나 밤낮 이와 같은 사랑의 방향만 논함으로써 문제가 다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상사 혹은 교리사에 임할 때 객관적 분석적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사상과 교리를 측정할 표준은 곧 성경에서 발견되는 바 신앙인 것이다』


5) 성경과 교리사
『대부분의 교리사 학자들이 교리사를 씀에 있어서 성경으로부터, 즉 예수 자신과 사도 시대로부터 시작함을 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입장에는 대개 교리사를 발전적으로 혹은 퇴보적으로 보자는 헤에겔 사관 혹은 진화론 사관들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예수 자신에게서는 단순한 도덕적 종교이었던 것이 후에 헬라적 사색권(思索圈)에서 점차적으로 교리 발전을 이루어 왔다든가, 혹은 그 반대로 처음에 가졌던 종교적 체험이 점차적으로 식어 갔다든가의 역사적 연속성에 치중하는 사상에서 결과 되는 것이다. 교리사 학자가 예수의 메시지와 사도의 메시지의 서술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미숙한 해석으로, 더욱이 너무 성급히 단일사상을 성경에 뒤집어씌움으로써 그 출발로부터 어떤 폐쇄된 사상적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교리사가는 성경의 사상의 요약으로부터 출발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신앙을 교리사에 등장하는 여러 사상, 교리, 신조의 규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교리사는 무엇보다도 먼저‘신앙’의 역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회가 어느 시대나 가져왔다. 기독교 신앙 없이는 진실로 기독교회라 불리우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서 신앙과 사상의 경향이 달랐고 또한 지역의 차이에 따라서도 달랐다. 한 이 신앙과 사상의 골자가 되는 교리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것이 주로 문제가 되었고 논의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바로는 성경에서의 기독교 신앙은 그 양과 깊이와 명확성에 있어서 인간에게 필요한 최대, 최심(最深), 최고(最高)라고 할 수 있다.
각 시대의 부분성은 성경의 전체성에서 그 종합 통일을 찿아야 할 것이며, 각 시대의 신앙의 불명확성, 편파성 등은 모두 성경에서 정로(正路)의 표준을 찿아 그 단점들을 시정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 그 자체를 교리사 속에 넣을 수는 없다. 성경은 교리사 연구에 있어서의 표준이 되며, 또는 목표가 되어야할 것이다. 즉 교리사의 각 시대의 신앙 사상은 성경의 신앙에 비추어서 이해되며, 비판되어야 하며, 또 한편 성경의 신앙은 교리사상의 각 교회의 신앙적 노력과 그 업적을 통하여 더 밝아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신약사 즉 복음사, 사도사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즉 위에서 성경과 그 시대는 교리사에서 떼어서 따로 고찰하자는 입장은 반드시 성경의 역사적 연구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필요도 없고, 또한 신약성경이 가지는 역사적 배경을 밝힘으로써 성경 그 자체의 이해에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는 성서신학 그 자체에게 물어야 할 것이고, 교리사는 그 대상을 역사 속사도교부(續使徒敎父) 이후로 잡아야 할 것이다.
물론 신약 시대에도 교회가 전체로서 반드시 사도적 신앙을 다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는 사도들의 전부가 한결 같이 같은 모양의 신앙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 이런 모든 상태에 대한 연구는 성경 그 자체의 이해를 위한 것이요, 교리사 연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속사도 교부 시대나 또는 그 후 시대를 잘 알기 위하여서는 신약 시대나 그 전 시대의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속사도 교부 이후의 시대 연구를 그 주목적으로 삼는 것이요, 성경 그 자체를 교리사의 일부분을 교리사의 규범으로 삼으려는 것이 그 주요 이유이다』


6) 교리와 사상의 기원
『각 시대의 교회의 신앙은 그 전 시대로부터 전승되며 더욱이 성경을 통하여 얻어진다. 물론 기독교 사상과 교리의 본원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어 먼저 그 제자들이 그에 대한 신앙을 가졌고, 이 신앙은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서 전파되어 나갔다. 그 과정에 있어서 그 신앙은 문서의 형식으로 남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성경이다. 그러나 교회는 성경만 전승하여 가는 것이 아니요, 신앙에서 신앙에로 직접 교회의 모체 속에 산 전통으로서 가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시대에나 단순한 신앙을 가진 많은 무리가 그 신앙 안에 살며, 성경을 통하여 그 신앙을 힘있게 하여 오며, 또한 바로 잡아 온 것을 볼 수 있다. 신앙의 산 전통은 더욱이 신약성경이 아직도 경전으로 고정되기 전, 속사도 교부들에게서 잘 볼 수 있다. 이들은 사도들에게서 직접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신앙을 물려받은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도 예수의 부활에 관한 여러 전승에 관하여“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고전15:3)라고 말하고 있으니, 곧 바울도 직접 예수 주위에 있던 제자들로부터 물려받았던 것을 의미하며, 이 산 전통, 산 신앙을 바울은 여러 신도들에게 산 전통으로 전하였던 것을 말한다. 바울은 또한 데살로니가인에게도“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살후2:15) 라고 말하여 바울에게서 데살로니가인에게 전달된 산 전통을 말하고 있으며, 3장 6절에서 다시 같은 말을 하여 또한 디모데에게“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딤전6:20)로 명하고 있다.
속사도 교부들의 글을 보면 모두 이 사도들의 신앙의 산 전통을 받고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산 충성과 예수의 산 전통이 기억이 아직도 새로운 생명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앙은 공허하거나 백지 상태에 있는 마음에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은 대개 처음에는 이교 문화 세계에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규제를 받은 사람들에게였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이 헬라인이나 로마인에게 전달될 때 이들은 이미 그 시대의 헬레니즘의 사상을 받은 이들이었고, 여기서 여러 가지 종류의 혼합 사상이 일어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사실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이 각 지방으로 퍼져 나감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신앙 사상이 일어나게 됐으며 그 중에는 이단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상도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여기 대하여 교회의 신앙은 자신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여기에 교리 논쟁과 교리 형성이 결과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또는 여러 교회가 여러 공동 고백의 형식으로 신조를 제정하게도 되었다. 교리와 사상의 기원에 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마가가“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증거함과 같이 기독교 교리와 사상의 근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소급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행적은 보통 역사적 전통이 전달되는 것처럼 전달되어 내려가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행적은 성령의 깨우치는 역사 속에서 사신 주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사도들에게 의하여 증언되었고 기록되었고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파라도시스(傳統)는 직접 주께 받은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교회의 신앙의 근원을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과 교회 안에 내주 하시어 이 모든 것을 직접 작용하시는 성령께 돌려야 할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과는 같은 한 분을 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하여 이루어진 신앙의 전통은 성경의 형식으로 교회가 이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교회의 산 전통으로 계승되어 오되 교회의 이 산 신앙 전통의 계승은 성경을 규범으로 가지며 성령께서 또한 직접 인도하시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른 것이다.
즉 역사적 교회는 성경을 규범으로 하고 성령께 인도되는 한 오류를 범하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산 신앙 전통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기질에 따라서 그 강조점들을 달리하여 부분을 전체화함으로써 사상화되며, 혹은 그것이 점하는 다른 사상들과의 융합 작용을 거쳐 여러 가지 사상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이와 같은 사상 활동을 거치면서 기독교 진리의 이해를 깊이하여 가며, 여러 가지 교리와 신조를 산출하여 왔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합하여 성경의 진리의 이해를 도와주며 오늘날 교회가 받은 비신앙의 유산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온 것이다』 <고대 기독교 사상. 한철하>




속사도 교부
계속해서 “고대 기독교 사상(한철하)”에서 속사도 교부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1672년에 불란서 학자 쨘 꼬텔리에가 처음으로 사도들과 동시대에 산 교부들의 작품집을 냈다. 사도들과의 직접적 접촉을 통하여 산 전통을 물려받은 교부들의 작품집이다.
가) 바나바의 편지
나) 헤르마스의 목자
다,라) 클레멘트의 두 편지
마) 이그나시우스의 일곱 편지
바) 폴리캅의 편지
사) 폴리캅의 순교 이야기(7편)를 발표하고 1765년에 안드레아스갈란디가
아) 디오그네투스에의 편지
자) 빠빠이야스의 단편
차) 콰드라투스의 단편 고대 교부집 3편을 편찬했다. 그 후에 1873년에 -
타) 비레니오스가 발견한 교훈집이 발행되었다.
11편이 사도 시대로부터 2세기 전반까지의 작품들로 신약성경과 변증가들 시대 중간에 낀다. 이 중에 클레멘트의 첫째 편지가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A.D.96년의 것이고 둘째 편지와 디오그네투스(Diogne tus)의 편지가 제일 뒤에 기록된 것으로 2세기 중엽이전으로 본다』


1) 속사도 교부들의 의의
『속사도 교부들에서 어떤 특수한 기독교 사상 체계나 어떤 교리의 골자를 찿는 일은 거의 무용한 일이다. 더욱이 현재 우리가 가진 극히 특수한 문서 하나씩 가지고 그 저자들의 사상체계나 교리체계를 구성하는 것은 사실 위험한 일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하여 이 사도적 교부 시대는 어느 특수한 기독교 사상이나 교리에 대한 공헌을 찿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고, 다만 사도들의 신앙을 산 인물로서 계승하여, 그 생동력을 잃지 않고 다음 시대로 전달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클레멘트의 첫째 편지
『이 편지는 클레멘트 개인의 편지가 아니고, 로마 교회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 당시에도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의 분쟁이 있었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는 이 소식을 듣고 싸움을 그칠 것을 권하여 이 편지를 쓰는 것이다. 기원후 약 96년경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2) 속사도 교부들과 성경
『속사도 교부시대에 있어서 신약성경의 정경이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신약성경의 정경이 문제되는 것은 마르키온이 2세기 중엽에‘복음과 사도’라고 부른 정경을 하나 결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여기에 마르키온은 누가복음과 바울 10서신을 포함시켰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레니우스는 빌레몬, 요한3서, 유다서 등을 제외한 모든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언급하고 있다. 속사도 교부 시대 벌써 정통 신앙과 자유 사상과의 갈등 관계에 대하여 엿 볼 수 있고, 이같은 내적 대립관계는 후에 알렉산드리아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과 사이에 대립 갈등을 나타냄으로서 표면화되며, 종교개혁시대에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대립과 현대의 정통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대립에서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편 성경을 언제나 신앙의 규범으로 삼아야하는 동시에 그때 그때의 자유로운 독창적 탐구의 과정이 신앙에 부과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기독교 사상. 한철하>




변증가들
1) 변증가들의 출현과 그 의의
『2세기 중엽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이론적 공격이 많이 유포되었고 따라서 이에 대한 이론적 방어도 많이 전개되었다. 속사도 시대를 통하여 교회는 많은 핍박을 받았고, 속사도 교부들은 이와 같은 박해 당국자들에게 별로 변증(辨證)을 전개하려 하지 않았다. 이 박해를 다만 감수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는 널리 퍼지어 고대 문명의 최고의 교양을 갖춘 철인들이 기독교로 들어오게 되자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하여 변증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변증적 활동은 기독교 안과 밖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밖의 사상과 기독교 안의 신앙사상이 서로 만나 대화를 전개하는데 기독교의 변증적 활동이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변증적 활동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고 또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사도행전22장과 26장은 변증의 한 예이다. 이제 기독교와 고대 문명의 철학과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대(변증)에 기독교 전도는 철학적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다. 즉 이 시대의 문필가들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무죄함을 변증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전도할 목적으로 저들의 종교의 가치와 진리성을 증명하기에 노력한다.
이 시대의 변증가들의 출현을 또 하나의 요소로서 설명할 수 있다. 즉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문학형의 하나로서 고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헬라철학가 출신들인 이들 변증가들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문학형을 기독교 안에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떻든 변증가들의 출현은 헬라철학에 통달한 인물들이 기독교 안에 일어나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하였던 것이다. 변증가들은 기독교의 신앙 내용을 헬라철학의 용어, 사상들을 빌려서 설명하여 기독교의 가치나 탁월성 등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고전적 교양과를 연결시키는‘연결의 방법’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결과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 안에 헬라철학의 용어를 도입한 결과, 기독교 신앙은‘지적 도구’를 얻게 된 것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교리를 논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던 것이다. 만일 우시아(實證)이란 말이나, 휘포스타시스(個證)란 말이나, 프로스오픈(가면, 대표, 품격)이란 말이 없었다면 니케아 신조나 칼케톤 신조 등이 생겨나지 못하였을 것이고, 로고스(Logos)사상이 없었드라면 하나님의 삼위일체 내부에 사색을 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즉 변증가들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신학이 전개되기 위한 지적 도구로 장만하게 된 것이다』


2) 디오그네투스의 편지
『변증가들의 작품 중에 대표작품 10여편이 있으며 이 중에서도 대표적인 작품이 저자 미상의 편지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저자는 이 신앙을 얻기 위하여 아버지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것을 말하고, 사람이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는 남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요, 오히려 이웃의 짐을 지며 약한 자를 돕는 일이라는 것을 말한다. 더욱이 가짜 죽음을 멸시하고 참 죽음을 두려워할 것을 권하는 두 가지 죽음에 대한 구별은 후에 어거스틴의 죽음에 대한 사상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3) 저스틴에 있어서의 로고스 교리
『로고스 사상이 헬라 문화권에서 기독교에로 도입된 일은 큰 중요성을 가진다. 이 로고스 사상을 통하여 기독론은 큰 발전 분야를 얻었다. 로고스 사상이 기독교에 도입되는 형체는 필로가 준비하였다. 필로에 있어서의 로고스는 처음에 하나님 안에 있었고 이 로고스가 하나님에게서 먼저 나와서 하나님이 이 로고스를 통해서 우주를 창조한 것이다. 이리하여 로고스는 우주 창조의 원리와 원동력이 되어 있다.
즉 로고스는 우주 창조의 원리일 뿐 아니라 우주의 질서와 존속의 원리가 또한 로고스라는 사상이다.
특히 인간에서의 영혼의 이성적 부분은 이 로고스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로고스는 하나님 안에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 안에 또한 우주 질서의 여러 부분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스토아 철학의“산출적(産出的) 로고스”의 사상과 일치한다. 스토아철학의 이와 같은 로고스 사상을 변증가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


4) 아테나고라스의 삼위일체론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의 삼위일체론은 그 완전성으로서 유명하다. 이것은 또한 변증가들에게 있어서 로고스 교리가 얼마나 건전한 신앙적 기초에서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그의 탄원서 제10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것은 나는 이미 충분히 설명하였다. 대개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으니, 그는 피조자가 아니며, 영원하며, 보이지 않으며, 고통을 당치 않으며, 불가침적이며, 무한한 분이시다. 그는 다만 마음과 예지에 있어서 알리어지며, 빛과 아름다움과 영과 형언할 수 없는 능력으로 둘러싸이어 있다. 그로 말미암아 우주는 그의 말씀(Logos)을 통하여 창조되었고, 질서를 가지게 되었으며, 함께 모인다. 내가 여기서‘그의 말씀’이라고 말함은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가지신다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 아들을 가지 신다고 우리가 말하므로 어리석다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아들에 관하여 시민들이 사람들과 별로 다름이 없이 신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관념에 있어서(in idea)나 실제에 있어서(in actulity) 그의 말씀(logos)이신 것이다. 대개 그로 말미암아 그를 통하여 만물이 만들어진 것이고,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다. 그리고 성령의 일체성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으며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이며 말씀이시다. 그런데 만일 아들이라고 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자세히 알기를 원한다면 간단히 조금 더 설명하겠다.
그는 아버지의 첫 열매이시다. 나는 그가 창조되시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정신(mind)이시므로 태초부터 자신 안에 그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었으며, 영원히 지혜로우시다. 그러나 이 아들은 모든 물질적 사물들에게 형상(form)과 활동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적 사물들은 본질상 무형상적인 것이고 아무 활동성이 없다. 무거운 분자들은 가벼운 분자들과 혼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예언적 영도 입증하고 있다.
그 영은 말하기를“주께서 그의 역사를 위하여 그의 길들의 시작으로 나를 창조하시었으며”라고 한다. 진실로 예언을 말한 저 예언자들을 감동시키신 저 성령(the Holy spirit)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의 광채이시다(일부생략)」
아테나고라스는 저스틴에 있어서의 마찬가지로‘로고스’는 태초에 하나님의 마음으로서 하나님 안에 계셨고 다음에 이‘로고스’가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그를 통하여 만물이 그 형상과 질서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아테나고라스는 특히 아버지와 아들과의 일체성을 강조한다.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특히 성령의 일체성과 능력 안에서 이와 같이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아테나고라스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일체성을 말함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말한다. 성령에 대하여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광채에 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성령과 하나님과의 일체성을 말한다. 이와 같이 아테나고라스는 삼위의 분별과 그 일체성을 말하고 있다』 <고대 기독교 사상. 한철하>.


5. 이레니우스
『이레니우스는 자기의 소년 시절을 회상하는 글에서 폴리갑이 항상 가리치든 일을 말하면서, 폴리갑이 다시, 사도 요한에게 직접 배운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폴리갑은 그의 순교하는 해인 A.D.155년에 자기는 68년간 주를 섬기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레니우스는 자기가 어린 시절에 이 폴리갑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A.D.177년의 리용과 비엔나에서의 박해시에 이레니우스는 리용 교회의 대표로서 로마 교회에 그 편지를 가지고 갔다. 이때에 그는 존경 받는 교회의 지도자였고, 장로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레니우스의 이와 같은 연대는 바로 우리가 전장에서 본 변증가들의 시대와 일치한다. 저스틴이 이 시기에 활약하였고, 타티안, 아테나고라스, 안디옥의 테오필루스가 다 이 시대에 활동하였다.
제1세기를 사도시대, 제2세기 전반을 속사도 교부시대라고 하면 제2세기 후반기는 변증가들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 이레니우스는 변증가들과는 그 방향을 달리한 활동을 하였다. 변증가들이 이 시대에 기독교 철학자들로서 대외 사상들을 다루었다면 이레니우스는 교회의 정통신앙을 계승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교회에 가르치기에 힘쓴 신앙의 의식적 계승자이었다. 그러기에 그는‘교회의 최초의 조직 신학자’라고 일컬어진다. 교회는 어느 시대에나 이 양면에 있어서의 신학적 사명을 지녀왔다. 즉 대외적 신학적 활동과 대내적 신학적 활동이다. 이 시대의 변증가들이 외부의 여러 지성들과 상관하였다면 이레니우스는 기독교 신앙자체의 정리 해명에 주력했다. 이레니우스는 교회의 인물로서, 교회의 신앙 전통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였고, 또는 교인들의 양육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일부생략). 이상에 우리는 이레니우스의 구원관을 총괄갱신의 사상에서 보았다. 그 골자는 롬5장, 고전15장 등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로고스 사상이 이에 개입됨으로서 헬라 기독교 신학의 구원론의 기본 공식인“성육신 중심의 구속론”의 싹을 보았다. 또한 그의 구속론과 결부되어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의의 개념을 속상설의 삯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서방 기독교 신학의 구원론의 기본 공식인 만족설의 삯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정의’의 관념과 관련하여 우리는 히브리 전통이요 안디옥 학파의 기본 개념인 하나님의 정의로운 정치와 사탄의 폭군적 부정의 관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레니우스의 구속론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에 있어서 아직도 후에 발전될 여러 가지 관념이 미분화 상태에 있었고, 이것은 속사도 교부들에 있어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미분화 상태이다.
그러나 그는 바울에 있어서 로마서 5장12-21절과 고린도전서15장20-22절을 중심으로 그의 구속관을 전개시키고 있고, 그가 취하고 있는‘로고스’사상 때문에 헬라 기독교의 성육신 중심 사상으로 기울어진 것이 사실이다』<고대 기독교 사상. 한철하>.




알렉산드리아 신학
1)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제국의 제2의 도시요, 상업의 중심지로서 크게 번창하여 약 5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며 필로(Philo)에 의하면 전 이집트에 살고 있는 유대인의 총수는 100만이나 된다고 하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참으로 헬레니즘적 자유주의의 본바닥이었고, 필로의 업적은 그 한 유물이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초대 기독교회의 설립과정에 관하여 우리가 확실히 아는 바 없으며,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마가가 알렉산드리아의 첫 감독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제2세기 초의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는 저명한 기독교 교사 바실리데스를 내고 있다. 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것은 하드리안의 통치(A.d.117-138)후기 였고, 그 뒤를 이어 더욱 저명한 발렌티누스가 일어나서 로마로 가서 거의 감독이 될뻔 하였다. 이 사람들은 모두 이 시기의 노스틱주의 운동에 속하여 교회에 일반적으로 용납되지 아니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회가 역사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제2세기말에 이르러, 판타이누스가 가르친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를 통하여 클레멘트나 오리겐 등의 고대 기독교의 최대의 신학자들을 냄으로써이다』.


2) 판타이누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는 판타이누스 이전에도 있었던 것 같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알렉산드리아에는 신성한 학문연구를 위한 학교가 존속하는 것이 하나의 일찍부터의 관습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던 알렉산드리아가 일찍부터 바시리데스, 발렌티누스를 낸 것을 보면 일찍부터 학문적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신학교가 역사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판타이누스 때부터이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이 학교는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말하고 있다. 유세비우스가 그의 교회사를 쓴 것은 4세기 초이다. 그러므로 이 학교는 다음과 같이 존속된다고 볼 수 있다. 판타이누스(180년경), 클레멘트(200년경까지), 오리겐264년까지), 테오그노스투스(280년까지), 피에루스 이후에는 곧 니케아회의 시대로서 아다나시우스의 활동무대로 된다. 알렉산드리아 신학교는 판타이누스 때에 비로소 알려진다. 그는 특히 스토아 철학파 출신으로 철학에도 유명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히 대단하여 인도에까지 여행하면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클레멘트는 판타이누스 주위에 모였던 청년들 중에 하나이다』


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1) 클레멘트의 생애와 저서
『클레멘트는 지식을 찿아서 사방으로 여행한 끝에 마침내 알렉산드리아에 이르러 판타이누스를 발견하여 그 학생들 사이에 들어갔다. 판타이누스가 죽은 후에 클레멘트가 이 학교를 영도하였다. 클레멘트가 판타이누스를 만난 것은 기원180년경으로 보인다. 얼마 오래지 않아서 판타이누스를 계승하여 강의를 하여 알렉산드리아의 교육받은 층을 많이 끌었던 것 같다. 에피파니우스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아테네 태생이었던 갔고, 150년경에 이교의 부모에게서 출생하였다. 세베루스 황제 때에 일어난 박해 때(A.D. 202,203)에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서 그의 전 제자이었던 카파도키아의 감독 알렉산더에게로 갔다. 이 때에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는 오리겐이 그의 대신 강의하였다. 클레멘트의 주요 저서로는 헬라인에의 권고와 교사와 논설집이 삼대작으로 남아 있고, 이 밖에 설교집 부자의 구원, 예언선집, 데오도투스 문선집, 성귀 주석집 등이 있다.』


(2) 클레멘트에 있어서의 철학과 신앙
『클레멘트와 동시대인인 라틴 신학자 티툴리안은 철학이 모든 이단의 어머니라고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신자들의 학문과 논쟁에 대한 불신을 대표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우리가 믿게 된 후에 또 한가지 믿을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 이상 더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이 입장을 타당화하기 위하여 티툴리안은“모순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말하였다.
히폴리투스도 모든 이단이 다 이교 철학자에게서 그 사상을 끌어오는 데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여러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단순한 신앙 이상의 것을 구하는 것은 마귀의 장난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는 기독교를 교양있는 사람들에게 권하기는 어렵다. 클레멘트는 철학에 대한 더 적극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의 교양인들 사이에 임함에 있어서 이것은 목회적 필요성에 속하였다.
잘 교육받은 학습교인에게 헬라 시인이나 철인들이 마귀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는 일은 파멸적인 일이었다. 그리하여 클레멘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땅이 주의 것이요, 거기에 충만한 것이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학습 교인을 도우려 할 때에 특히 그들이 헬라인들일 경우에는 학구적 탐구를 멀리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대중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가면을 보고 무서워하듯이 헬라 철학에 질겁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철학은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어떤 악한 발명자가 인생에 도입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가 오시기 전에 헬라 사람은 철학을 통하여 교육을 받았고 철학을 통하여 의에 이를 수가 있었다.
율법이 유대인에게 몽학선생이었던 것처럼 헬라 사람에게는 철학이 몽학 선생이요 필요한 것이다. 클레멘트는 철학은 주께서 오시기 전에 헬라 사람에게 필요하였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이 히브리 사람들을 교육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이끈 것같이 철학은 헬라 사람들을 교육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클레멘트에게 있어서는 철학도 신적 기원을 가지는 것이다. 철학의 기원에 관하여 또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저들은 말하기를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진리와 같은 철학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연이란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예속하는 것이다”.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몽학 선생이라 불러 유대인으로 하여금 복음에로 이끌어 간 역할을 클레멘트는 헬라 철학이 헬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담당한 것으로 본다. 헬라 철학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이와 같은 태도는 변증가들의 태도와 직통한다. 즉 변증가들도 스토아 철학적인‘산출적 로고스’는 자연과 인간 전체에 퍼져 있어서 이 로고스에 참여하고 이에 따르면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헤라클레이토스든 소크라테스든 모두 그리스도 이전의 도인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변증가들이 헬라 철하과 기독교의 조화를 꾀하는 전통은 그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꽃피어 헬라 기독교 전체의 방향과 전통을 형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고법과 전통은 후에 어거스틴을 통하여 그대로 서방 기독교에 들어와서 오늘까지도 그 흐름을 보이고 있다.』


(3) 클레멘트에 있어서의 플라톤주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게 일관하는 교훈은 그의 도덕적 신비적 교훈과 그리스도의 품위에 관한 교훈이다. 전자 즉 그의 도덕적 신비적 교훈은 곧 그의 구원론이라고 할 수도 있고 혹은 그의 종교적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알렉산드리아 플라톤주의라고도 부르고 또 볼프슨 같은 이는 필로주의이라고도 한다. 클레멘트의 종교적 이상은 “땅에 난 인간을 거룩한 하늘의 존재로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한 표현에 있어서 요약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창조의 이 목적의 완전한 실현을 위하여 오신 것이요, 나머지 인간은 그의 형상대로 변화되어 갈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클레멘트에 있어서 ‘하늘의 존재’이지만 이 이상은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교부에 공통되는 이상이요, 이것은 또한 헬라 기독교 전체의 이상이라 하겠다. 이것은 또한 헬라 기독교의 구원의 핵심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클레멘트에 있어서는 위에 말한 대로‘하늘의 존재’인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데 영혼의 상승의 단계가 있다. 그리고 영혼의 이와 같은 상승의 각 단계를 그 거처라고 보았다. 클레멘트는 이 각 단계를 그 행위의 동기를 따라 구분하였다. 즉 두려움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따르는 행위의 단계이다. 클레멘트는 신자를 두 가지 계급으로 분류한다. 즉‘단순한 신자’와‘노스틱’혹은 완전한 신자이다.
‘단순 신자’는 다만 일반적 신앙을 가질 뿐이고, 노스틱(the gnostics)들은 충분히 발전한 단계에 이른 신도들이다. 이 두 계급 사이에 어떤 본질적 차이를 두는 것은 아니고 다만 정도의 차이뿐이다. 즉 계시를 믿는 일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다. 그와 같은 신앙으로도 충분하나 신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노시스(gnosis.영지)에 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이 때에 신앙은 영지(靈知)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클레멘트에 있어서의“아는 일은 믿는 일보다 더 우월한 것이다”. 클레멘트에 있어서 신앙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두려움과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서 외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한편 영지자는 환상 가운데 살며 구원을 내적으로 통찰한다. 영지자는 선을 행하되 보수를 기대하여서가 아니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선 그 자체를 위하여 선을 행한다. 그는 자기를 종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여긴다. 그는 항상 기도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교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신자가 다만 교회의 작은 신비를 필요로 할 뿐이라면 영지자는 큰 신비를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이 하여 두 가지 단계의 기독교가 결과 된다. 단순히 믿기만 하는 외적인 것에로 기울어지는 수련이 적은 초신자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보며 마음에 깨달음을 가진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친교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이것은 흔이 스토아 철학에서 지자(知者)와 달관(達觀)자를 구별하는 습관을 기독교에 옮겨 온 것으로 보인다.
“신앙은 본질적인 점들에 대한 간결화된 지식이다. 그러나 지식은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들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명증(明證)이다”.
신앙 위에 지식을 놓는 일은 헬라 기독교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어거스틴에게서도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성서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도 도처에 지식을 신앙 위에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령 에베소1장18,19절, 빌립보1장9절, 골로새1장9,10절 등에서 바울은 신도들의 신령한 지식이 자라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바울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덕의 순위는 믿음, 지식, 사랑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같은 순위를 베드로후서1장5-7절에서도 볼 수 있으니 거기서도 믿음으로 시작하여 지식을 거쳐 사랑에로 이르고 있다.
우리는 신앙의 이와 같은 경지를 욥기42장5절에“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한 것과 다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헬라 기독교에는 이와 같은 성서적 입장 이외에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즉 플라톤주의의 이상이 기독교와 종합되어서 기독교가 이해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플라톤주의적 기독교라고 부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어서 기독교의 이와 같은 플라톤주의의 사상적 배경을 우리는 필로에서 볼 수 있다.
필로는 예수와 동시대인으로서 예수에게 관심을 둔 형적이 없으며, 그는 다만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정통적 유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플라톤주의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 안에 들어오기에 앞서 유대교가 먼저 헬라적 사고방식과 융합하여 나타났고, 이것을 우리는 필로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학식 많은 유대인으로서 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아니하고 플라톤 철학에 맞추어서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당시 헬라적 풍토에 영합(迎合)하였다. 필로는 창세기를 순전히‘로고스’ 사상에 입각하여 이해하였고 창세 이전에 하나님 안에 있던 로고스와 창세 때에 하나님 밖에 나와서 창조에 종사하게 된 로고스의 구별도 이미 필로에게서 볼 수 있다.
그의 모세 오경의 주석서 32권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와 기독교 사상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성서의 비유적 해석법은 클레멘트나 오리겐이나 후에 모든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이 다 습용(襲用)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위에서 본바 알렉산드리아 구원의 근본 동기도 필로에서도 일관돼 있음을 볼 수 있다. 진실로 볼프슨은 이와 같은 플라톤주의 전통을 더 광범하게 추적하여 어거스틴, 스피노자, 헤에겔에서 서방 사상의 주요 흐름을 보고 있는 것이다』


(4) 클레멘트 신학에 있어서의 그리스도 중심성
『아다나시우스가 그토록 열심히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同一本質)의 교리를 위하여 싸운 것도 시릴이 그 토록 성육신 하신 로고스의 통일성을 위하여 싸운 것도 모두 그들의 눈앞에 이 역사상에 사신 로고스의 모습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육신이 되신 로고스가 그들에게 있어서의 의의를 나타낸 것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땅에 난 인간을 거룩한 하늘의 존재로 변화시키는 일”이 그에게 있어서 가능하여졌기 때문이다. 즉 로고스의 성육신은 곧 인성의 신성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구원론적 기초와 그들의 기독론적 고백은 서로 맞먹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 신학 발전의 초기에 있어서 클레멘트를 가진 것은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즉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2대 요소 즉 인간의 신성화란 구원론적 기본 이론과 더불어 살아 계신 로고스 그리스도에 있어서 확고한 전통을 세워 놓았던 것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신학적 전통은 이미 판타이누스에 있어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제2세기 말엽에 이르러 알렉산드리아가 당시의 전 기독교 세계의 신학적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그만한 신학적 탁월성과 생명력에 기인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클레멘트의 3대작‘헬라인에의 권고’와‘몽학선생’과‘논설집’은 사실은 하나의 전체 체계의 각 부분에 불과하다.
그의 전 작품을 일관하는 중심 사상은‘로고스’즉 말씀인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사상이다. 클레멘트는 이‘로고스’가 사람들을 이교의 미신과 부패로부터 구출하여 신앙에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보이며또 이 로고스께서 그들을 계명과 권징으로 연단시키신다는 것을 말하며, 그 로고스께서 저들을 하나님의 것들에 관한 보다 높은 지식에로 인도하여 가서, 다만 영적, 도덕적, 지적 수양에 전진하는 자만이 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그의 눈앞에는 항상 살아 계신 인격적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있었고 그는 곧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이었으나 사람이 되어서 우리 사이에 거하신 말씀이시다. 의의 복음은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요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다. 더우기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은 고대 기독교의 중심 과제이었고, 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삼위일체론, 기독론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발전
(1) 오리겐
『클레멘트 때부터 크게 유명하여진 알렉산드리아 신학파는 오리겐을 가짐으로써 그 극치에 올라갈 수 있었다. 오리겐은 18세 때에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A.D. 202) 후 그가 70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진실로 반세기 이상이나 그의 명성을 전 세계에 떨치며,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또한 많은 위인을 제자로 길러냈다.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에서 오리겐의 뒤를 이은 테오그노스투스, 데메트리우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 헤라클레스가 오리겐의 제자이었고 카파도키아 신학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그레고리 타우마투르커스, 니케아 회의 시대에 정통신앙의 지도자 아다나시우스, 또한 같은 시대에 대교회사가요 가이사라의 감독이었고, 신학의 지도자였던 유세비우스, 멀리 서방에는 밀란의 감독 암브로시우스, 또한 오리겐의‘제1원리론의 라틴역자요 오리겐 변호자 루피누스가 다 그를 중심으로 존경하고 따른 친우들이요 제자들이었다. 오리겐이 마태복음 19장 12절의 말씀을 따라‘스스로 고자 된’것은 신학교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할 때였고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여자 학습 교인에 대한 유혹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오리겐의 명성은 널리 퍼지어 아라비아나 팔레스타인까지 초청을 받아 가게 되었다』


(2) 오리겐에 있어서의 알렉산드리아 신앙 사상의 신학화
『오리겐의 특성은 탐구와 사색을 즐겨하는 성격에 있다고 하겠다. 그는 문자 그대로 학자였다. 클레멘트가 신앙가요 사상가이었다면 오리겐은 조직 신학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관계를 우리는 루터와 칼빈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클레멘트의 사상을 전부 오리겐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나 클레멘트의 영지의 완성에 대한 정열과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집중적 강조는 오리겐에서는 숨어버린다. 클레멘트는 성경의 비유적 해석을 실천함으로서 로고스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오리겐은 인간의 삼분설을 이용하여 성경 해석에 관한 이론을 전개시킨다. 칼빈이 개혁 신앙의 정리자요, 조직 신학자이었던 것 같이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 신앙 사상의 정리자요 조직자이다. 그의‘제1원리에 관하여’는 고대가 낳은 최초의 조직신학 교과서이다. 이 책은 4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에서 삼위를 위시하여 영계의 영적 존재자들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제2권에서 이 물질적 세계와 인간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즉 창조론과 인간의 영혼에 관하여 취급하고 있다. 제3권은 자유 의지에 대하여, 악마의 싸움 그리고 선의 궁극적 승리에 대하여 취급하고 있다. 말하자면 구원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제4권은 성경에 대하여 취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알렉산드리아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취급한 것이다. 이 책 초두에 오리겐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서 교회에 전하여 내려온 교리의 체계를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 <고대 기독교 사상. 한철하>




라틴 신학
1) 라틴어 사용권과 라틴 전통 신학 전통
『헬라어가 고대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알렉산더 대왕(B.C.356-323)의 덕택이다. 그가 전 지중해 세계뿐 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동방 세계 전역을 정복하여 수많은 헬라 문화 도시들을 세운데 기인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수리아의 가이사라, 안디옥을 위시로 사방에 산재하여 있는 기독교의 중요한 여러 중심지들도 모두 마케도니아에 의하여 세워진 여러 헬라 도시들이었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과 더불어 대감독 교좌의 도시들인 예루살렘과 콘스튼티노플은 콘스탄틴 황제 이후에 건설되었고 또한 그와 같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의 정치적, 문화 정복에서 서부 지중해 연안이 제외되었다. 여기에 옛날부터 페니키아인(성경에는 블네셋 사람)이 식민하여 세웠던 칼타고와 오래 전부터 존속하여 오던 왕국 씨라쿠사가 계속 패권을 장악하여 왔었다. 이와 같이 하여 이곳에서는 다른 헬라 도시에서처럼 마케도니아의 강한 문화적 영향에서 제외된 채 포에니 전쟁 끝에는 신흥 로마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완전히 정복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하여 서부 지중해 연안은 라틴어 사용권이 되었고 칼타고는 라틴 기독교의 한 중심지가 되어 티툴리안, 키프리안, 어거스틴 등의 위대한 라틴 교부들을 내었던 것이다. 같은 아프리카에 속하면서도 알렉산드리아가 헬라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칼타고가 라틴 기독교의 중심지가 된 것은 지리적 관계상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티툴리안에게서 형성된 라틴 신학 전통이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가를 키프리안, 암부로시우스에서 계속되어 가톨릭주의로 고정되어서 서방의 중세 교회를 거쳐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2) 터틀리안
(1) 터틀리안의 생애와 저서
『터툴리안은 기원150-160년 어간에 칼타고에서 났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 주둔군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문학과 법률에 있어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었고, 특히 그는 직업적인 법률가였던 것 같다. 약196년경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 같다. 그는 개종하자 기독교 변증에 나서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의 글은 기원197년으로부터 교황 칼라스터스(218-222)의 때까지 이르고 있다. 그는 기원 200년경에 칼타고 교회의 장로로 안수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러나 점차로 몬타니즘으로 기울어져서 기원 206년경에는 그 파에 가담하였고, 기원 213년에는 완전히 교회에서 분립하였다. 터틀리안의 저술로서는 31편이 남아있다. 그의 작품의 태반이 라틴어로 쓰여 졌다.』


(2) 터틀리안과 고전 문화
『헬라 철학에 대한 터틀리안의 태도, 더 나가서는 고전 문화 일반에 대한 태도는 그의 유명한 말‘모순되는 고로 나는 믿는다’. ‘아덴이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냐?’에 있어서 잘 요약되어 있다. 같은 태도는 전에 변증가들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 있어서 볼 수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이다. 변증가들의 경우는 같은 로고스가 혹은 소크라테스에 혹은 모세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나 헤라클레이도스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터틀리안의 동시대인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도 헬라 철학은 히브리 사람에게 있어서 모세의 율법처럼 헬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몽학 선생이며 말하자면 복음의 준비이었다. 그러나 터틀리안은 기독교의 모든 이단이 그 근원에서 볼 때 헬라 철학에서 온 것임을 알았다.
터틀리안의 헬라 철학에 대한 이와 같은 적대적 태도는 그의 기독교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알렉산드리아 기독교가 그 특성에 있어서 영지주의와 같은 노선을 걸으면서, 지식을 신앙 위에 놓고 단순한 신자와 영지자를 구별한 데 반하여 터틀리안에 있어서는 이런 구분이 철폐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지적인 면을 무시하고 단순한 신앙을 내세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라틴 기독교 신학의 창시자 터틀리안은 헬라 전통에 서는 것보다 오히려 히브리 전통에 더 가깝고, 기독교를 보는 면을 달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플라톤 철학에 대한 비판과 이를 노스틱주의와 결부시키는 일은 예리하고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터틀리안의 헬라 철학에 대한 이와 같은 불신은 이성 일반에 대한 그의 불신의 태도를 조성하였다. 즉“모순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그의 유명한 격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3) 터틀리안에 있어서의 취득시효
『터틀리안에 있어서 구원을 이루는 계시는 역사적 그리스도에 있어서 역사적 사건들로서 역사 속에 일회적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구약에 있어서 예언되었고 또한 준비되었다. 이 계시는 진리의 체계로서 즉 신앙으로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사도들에게 전달되었고, 또한 사도들은 저들이 세운 교회에 전달하였다. 그러므로 터툴리안은 그리스도께서 일정한 진리 체계를 제정하신 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라틴 교회에 특유한 전통주의를 볼 수 있으며 사도적 전승의 사상은 분명히 나타나있다. 이 사도적 전승의 사상은 서방 교회에 있어서 교황주의로서 그 극단적인 형체로 발전하여 갔고, 그런 전통주의는 카톨릭주의, 로마주의로 발전되어 갔다. 어떻든, 가톨릭주의나 전통주의, 교황주의의 많은 폐단에도 불구하고 이레니우스, 터틀리안으로 시작되는 이 서방교회의 특유한 짐승의 사상에 있어서 한 가지 항구적인 진리로 남는 점은 기독교 종교를 순전히 철학적 형이상학적 견지에서만 보는 헬라 기독교와는 달리 기독교 종교를 오히려 역사적 정치적 견지에서 보는 하나의 관점을 마련한 점이다』


(4)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서의 터틀리안
『미누시우스 펠릭스가 라틴어로 기독교 문헌을 남긴 최초의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터틀리안의 글을 모방한 것으로 오해되어 온 변증서가 하나 남았을 뿐이다. 터틀리안은 모든 의미에서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을 수 있다. 라틴 신학 용어의 태반이 터틀리안에서 온다고 소우텔은 말하고 있다. 노바티안의 삼위일체론이 터틀리안의 삼위일체론에 의존하고 있으며 레오의 교서 역시 터틀이안의 기독론에 의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앞서 라틴 신학의 특질이라 할 수 있는 사도적 전승의 사상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하나의 형식적 원리임이 사실이다. 동시에 이면이 헬라 기독교와 확실히 구별되는 하나의 기독교 전통을 이룩하는 것도 사실이다. 터틀리안은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법률적인 견지에서 본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이 형이상학적 견지에서 보는 것과 대조적이다. 하나님은 입법자요 범법에 대한 징벌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근본적 태도는 두려움이다.
그러나‘사람의 두려움은 하나님의 존영(尊榮)이다’그리고 죄인은 그의 회개로 말미암아 세례에 있어서 구원을 얻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범죄는 만족을 요한다. 이‘만족’이란 법률 용어도 터틀리안이 처음으로 교리에 도입하였다. 죄를 범함으로 노엽게 한 하나님과 다시 화목케 되기 위하여서는 노여움을 일으키신 주를 만족케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은 회개로 말미암아 할 수 있다』


3) 라틴신학 전통의 발전
(1) 가톨릭주의의 발전
『터틀리안의 사상에서 세 가지 사조를 볼 수 있다. 헬라 변증가들의 사상을 잇는 헬라적 기독교 사상과 노스틱주의 논박에 나타난 라틴 특유의 교회 전통주의 그리고 고대 및 중세 교회 전반을 특정지어 주는 구속적 금욕주의이다. 그의 초기 작품은 변증가들의 전통을 잇는 것들이었으나 그의 전성기의 작품들에는 라틴 특유의 전통주의 사상이 지배적이며 그러나 말년에 몬타누스주의로 기울어짐에 따라 도덕에 관련된 금욕주의적 작품들이 지배적이다. 이와 같이 교회의 신앙 전통에 대한 관심을 우리는 이미 이레니우스에서 보며. 터틀리안에서 보나 라틴 신학 전통에 있어서 터틀리안의 후계자라할 수 있는 키프리안에 있어서는 교회론의 형체를 취하며‘카톨릭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형체로 되어 간다.
그는 아프리카 교회의 감독으로서 터틀리안과는 그 생의 처지가 크게 달랐다. 터틀리안은 노스틱주의나 기타의 이단에 직면하여 교회의 신앙 전통에 주로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키프리안은 박해를 겪고 난 교회의 혼란기에 있어서 교회의 질서가 문제가 되었고 신앙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와 같이 하여 키프리안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교회 정치에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에게 있어서 우리는 이레니우스로 시작되는 라틴 특유의 파라도시스(傳承)의 사상이 카톨릭주의로 형성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니케아 회의에서 여러 교좌의 감독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될 때에 자연히 어느 교좌가 우위냐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에 다섯의 총 주교 교좌를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을 그 우위의 순서를 따라 말한다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과 예루살렘이었다』


(2) 키프리안에 있어서의 교회론
『캐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키프리안)는 81통의 현존하는 편지와 그의 집사 폰티우스의‘키프리안으 생애’등을 통하여 그의 감독직에 있던 10년간의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하여 상당히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도 터틀리안과 같이 이교도로 자라났고 법률가이었던 것 같다. 그는 부유한 사람으로서 245,6년에 세례를 받았다. 키프리안의 교리는 교회론에 집중한다. 키프리안의 신학은 다른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나 그의 생애에서 산출되었다. 더욱이 그의 교회론은 그의 감독으로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는 249년에 감독의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는 250년 1월에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키프리안은 감독이 되자마자 박해의 시련을 겪어야 하였다』 <고대 기독교 사상. 한철하>.




기독교 강요
『기독교강요(基督敎綱要)는 프랑스 종교개혁자 칼빈의 주요 저서이다. 1536년 스위스 바젤에서 라틴어로 초판이 간행되었을 때 6장으로 되어 있었으나, 계속 개정, 중보되어 59년에 80장으로 된 결정판이 나왔다. 초판은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예전, 교회통치에 대한 논술이 주요부분을 이루었으나 나중에는 거의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의 순서로 기독교 신앙의 대요를 정리했다. 종교개혁시대의 가장 체계적인 신학서로, 개신교 신학 사상의 고전인 동시에 특히 개혁파 교리의 출발점이 된 중요 저서다』<기독교사전>.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기를 원한다면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필요할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강요의 전체 내용을 올릴 수가 없어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최소한의 목차만이라도 기록함으로써 일반 신자 일지라도 “기독교 강요”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기독교(基督敎) 강요(綱要)
제1권 :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제1장 ; 하나님께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이 둘은 어
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제2장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제3장 :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래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었다
제4장 : 이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 부분적으로는 악의로 말미암아 질식 혹은 부패되었다
제5장 :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주 창조와 그 계속적인 통치에서 빛을 발한다
제6장 :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서 필요하다
제7장 :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증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권위는 확실한 것으로 확립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악랄한 거짓이다
제8장 :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 된다
제9장 :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제10장 :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지적하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있다
제11장 :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든 것은 불 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제12장 : 하나님은 우상과 구별되며 하나님만이 완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
제13장 : 성경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제14장 : 우주와 만물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명백한 특징들을 가지고 구별한다
제15장 :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초적 순결
제16장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로서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
제17장 : 섭리 교리에 대한 올바른 적용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
제18장 :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의 일을 사용하시며 저들의 마음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심으로써 모든 더러움에서 순결을 유지하신다


제2권 :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지식
(처음에는 율법으로 조상들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복음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제1장 : 아담의 타락과 배반으로 인류 전체가 저주에 넘겨졌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원죄론)
제2장 : 인간은 지금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 있다
제3장 :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정죄받을 일밖에 없다
제4장 :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제5장 : 자유 의지 옹호론자들이 보통 하는 항의를 논박한다
제6장 : 타락한 인간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구해야 한다
제7장 :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억제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그가 오시기까지 배양하시려는 것이었다
제8장 : 도덕적 율법(십계명)의 설명
제9장 : 그리스도는 율법하의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지셨으나, 오직 복음 안에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제10장 : 신구약 유사점
제11장 : 신구약 차이점
제12장 : 중보의 직책을 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셔야했다
제13장 : 그리스도는 사람의 육신의 진정한 본질을 취하였다
제14장 : 중보의 두 본성은 어떻게 한 위격을 이루는가
제15장 :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알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그의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세 가지 직책을 보아야 한다
제16장 :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어떻게 구속자의 기능을 다하셨는가? 여기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도 논한다
제17장 :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우리에게 얻어 주셨다고 하는 것은 정당한 주장이다


제3권 :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1장 ;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성령의 신비한 역사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제2장 : 믿음(그 정의와 속성에 대한 설명)
제3장 : 믿음에 대한 우리의 중생(회개)
제4장 : 복음의 순수성과는 거리가 먼 스콜라 궤변가들의 회개론(고해와 만족설을 논함)
제5장 :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제6장 : 그리스도인의 생활(첫째로 성경은 어떤 논거로 우리에게 이 생활을 역설하는가)
제7장 :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자기부정)
제8장 : 십자가를 지는 것(자기부정의 일부)
제9장 : 내세에 대한 명상
제10장 : 현세 생활과 그 보조 수단들을 사용하는 법
제11장 : 믿음에 의한 칭의(그 명칭과 문제에 대한정의)
제12장 : 우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칭의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제13장 :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제14장 :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제15장 :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제16장 : 이 교리를 겨냥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된 증상에 대한 반박
제17장 :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제18장 : 보상에서 행위의 의를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제19장 : 그리스도인의 자유
제20장 : 기도(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제21장 : 영원한 선택(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제22장 :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인
제23장 : 이 교리를 겨냥한 거짓되고 부당한 비난들에 대한 반박
제24장 :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제25장 : 최후의 부활


제4권 :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
제1장 :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진정한 교회(우리는 이 교회의 연합이 되어야한다)
제2장 : 거짓 교회와 참 교회와의 비교
제3장 :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그 선정과 직분)
제4장 : 고대 교회의 상태(교황 제도 이전의 교회 정치)
제5장 : 전체적인 교황 제도가 고대 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제6장 : 로마 교황청의 수위(首位)권
제7장 :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로마 교황권이 세력을 확대하여 무제한으로 교회의 자유를 압박하게 되기까지)
제8장 :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교황 제도하에서 교회는 임의로 교리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제9장 :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제10장 : 입법권(교황은 이 권한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가장 야만적인 압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다)
제11장 :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 제도에서의 그것의 남용
제12장 : 교회의 권징(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제13장 : 맹세(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제14장 : 성례
제15장 : 세례
제16장 :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 질에 가장 잘 부합된다
제17장 : 그리스도의 성만찬(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제18장 : 가톨릭교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말살하는 모독 행위다
제19권 :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비록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제20장 : 국가 통치


칼빈의 5대 교리
1) 전적타락(전적 무능)
사람은 본래 죽은 존재라고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가르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성경은 사람들이 묶여있다고 말하고 있다.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2:24-26).


성경은 사람들이 눈멀고 귀먹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막4:11,12).


성경은 우리가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성경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사악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생활을 통해서 :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가득 참)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이상의 사실들이 태어나면서부터의 인간의 상태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죽은 자들이 스스로를 살려 일으킬 수 있겠는가?
묶인 자들이 스스로를 풀어놓을 수 있겠는가?
눈먼 자들이 스스로에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귀먹은 자들이 스스로에게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줄 수 있겠는가?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 스스로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태어나면서부터 사악한 자들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물론 불가능하다.


욥은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라고 묻고 거기에 대답하기를,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말했다(욥14:4).
예레미야는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라고 묻고,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말로 그 질문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렘13:23).


타락이 전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구원을 소원하고 획득함에 있어서도 우리가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이 어찌 이보다 더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겠는가? 이 생생한 묘사는 죽음, 곧 영적 죽음의 그것이다.


2) 무조건적 선택
무조건적 선택은 1689년에 제정된 침례교 신앙 고백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 간편한 요약이 여기에 인용되었다. 이것은 또한 거의 동일한 술어로, 웨스트민스터 고백과 영국 국교회 39개 신조 및 모든 주요고백서들에 기록됐다.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는 전적 타락의 교리를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만일 인간이 사실상 죽었고 포로가 됐고 눈이 멀었다는 등등의 일이 벌었다면, 이것은 이 모든 상태에 대한 구제책은 인간의 외부에(곧 하나님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바로 앞장에서, “죽은 자들이 스스로를 살려 일으킬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라는 불가피한 대답을 해야 했다.
만일 인간이 아담 안에서의 타락, 곧 전적 타락 때문에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또한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다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이것은 결코 맹목적인 철학이 아니라 성경에서 유래됐고, 그 위에 터 잡았고, 그것으로 뒷받침이 됐고, 거기에 계시된 것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1).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롬9:15).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3) 제한 속죄(특정적 구속)
인간은 타고난 상태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적타락 또는 전적 무능이라는 총괄적인 제목 아래 둔다. 둘째로, 어떤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의심 없이 구원을 받았으니, 다른 인간들과는 구별하여 그들을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심에 틀림없다. 이것이 선택이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9:11).
우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모두 사실을 받아들이다-형벌을 당하시고 구원을 획득하셨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는 누구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으며, 누구의 구원을 획득하셨는가? 이에 관련하여 우리는 세 가지 관점을 가질 수 있다.
1)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별 없이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다(만인 구원론 자들의 주장).
2)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그 누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신 것이 아니다(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
3) 그리스도께서는 일정한 수효의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이는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서, 마땅히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들 가운데 일정한 수효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적극적으로 그리고 유효하게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는데, 이들에 대해 성부께서는 이미 그의 거저 주시는 선택의 사랑으로 구원을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한 수의 죄인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엡1:4).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요17:9), 그리고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고 그 자신이 말씀하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4) 불가항력적 소명(은혜)
불가항력적 은혜란 무슨 뜻인가? ‘복음의 부름’이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서 전달될 때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전달 될 때에, 그 부름에 대해 모든 사람이 다 귀를 귀울이지는 않으며, 또 모든 사람이 다 가책을 느끼고 그리스도를 요청하지는 않는 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종류의 소명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외적 부름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내적 부름이 있다. 외적 부름은 전도자의 전언(傳言)이라고 묘사되어도 좋을 것이며, 이 부름이 외부로 전달될 때 서로 다른 다수의 마음속에, 서로 다른 다수의 방법으로 작용해서, 서로 다른 다수의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가항력적 은혜가 역사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죄인의 영혼 속에 구원의 성업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성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외적 부름에 하나님의 성령의 내적 부름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이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실” 분은 보혜사 성령이시기 때문이다(요16:7,8). 성령님께서 장년 남녀나 젊은이를 부르실 때에 그 소명은 불가항력적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5) 성도의 견인(堅忍)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29- 31).
이렇듯 우리는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유효한 소명(또는 불가항력적 소명 내지 은혜)에 뒤이어 성도의 견인에 이르렀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이 복된 진리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요6:39. 요10: 28. 롬5:10. 롬8:1. 벧후1:10. 고전10:13. 롬8:28-39.>
칼빈이 전파하고, 어거스틴이 전파하고, 바울이 전파한 옛 진리야말로 오늘날 내가 전파해야 할 진리이다. 만일 전파하지 않으면 내 양심과 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된다. 나는 진리를 조작할 수 없다. 나는 교리의 거친 면을 잘라내는 따위의 일은 전혀 할 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