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하나님 말씀 !!

[스크랩] 정경론과 해석학 - 2007/01/16 10:12 | 이성구

하나님아들 2012. 11. 21. 12:16

정경론과 해석학

신학논쟁 | 2007/01/16 10:12 | 이성구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성경을 정경으로 받는 사람들은 이 원리 역시 모르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이 역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고 믿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왜 같은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각기 의견을 달리할까? 진보주의자들이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도 왜 보수주의자들과 여러가지 측면에서 의견을 달리할까? 사형제도, 사학법, 낙태, 동성애, 여성안수 등 곳곳에서 부딪힌다. 다른 성경이나 다른 표준이 있어서가 아니라 같은 성경을 들고 부딪힌다.
왜 같은 성경을 근간으로 하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형태의 교회를 세우며 섬기는 것일까?
교파는 무엇이며, 교단은 무엇인가?

소위 이단으로 취급되는 사람들도 모두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단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영국서 만난 여호와의 증인들은 헬라어 성경을 들고 토론하자고 달려들기도 하였다.

성경의 성격에 관한 신학적 이론은 정경론이라는 이름으로 기술한다. 영감성 계시성 독자성 완전성 정경성 외경 가경 정경집성의 역사 등에 관한 탐구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성경의 계시성과 영감성을 믿는다고 해서 성경에 관하여 꼭 같이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크게 혹은 작게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해석들을 만날 수 있다.

성경의 정경성에 의문이 없지만 천주교와 안식교는 성경의 해석을 전혀 달리하는 부분이 있어 문제가 된다. 소위 구원파에 속한 사람들도 성경에 대한 믿음만은 완전하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보편적인 구원론과 그 궤를 전혀 달리한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성경을 가르치며 설교하며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때 가장 문제 되는 것을 두 가지 정도로 압축해서 말할 수 있다.

성경과 해석

  그 하나는 해석의 문제이다. 흔히 조금만 자신과 다른 신앙적 원리를 말하면 정경론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몰아가지만 그게 아니다. 성경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해석방법에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성경비평학이라는 학문의 분야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넓게는 성경해석학이라고 해야 하나, 그 범위를 줄여 비평학이라고 하는 것이 오래동안 문제가 되어왔다. 한동안 보수주의 학계는 비평학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무조건 터부시 하였다. 학자들의 세계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풍토에는 크게 변화된 것은 없
다. 성경을 어떻게 비평적으로 읽는가 하는 질문이 금방 나타난다.
  그러나 비평적 읽기라는 것이 비판적인 읽기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다. 보수주의자건 진보주의자건 이제 '본문비평'이라는 말은 아무도 거부하지 않는다. 원본이 없는 성경이니 사본들 가운데 과연 어떤 사본이 정본에 가까운지 비평을 해 보지 않을 수 없다는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흔히 고등비평이라고 하는 문서비평 이후의 비평작업이라는 것이 무신론자나, 성경 파괴주의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기 위한 악의적인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벨하우젠이 구약을 오경부터 읽어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예언서를 읽고 오경을 읽으면 이해할 수 있다고 한 것을, 그래서 오경보다 예언서가 시대적으로 앞섰다고 주장하는 것을, 처음부터 성경의 신적권위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정당성을 부여받기 어렵다.  성경이 제대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고민 끝에 얻은 자기나름대로의 해석이다. 옳고 그르고는 그 다음에 우리가 판단할 일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실한 법을 가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고 부패한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지 않은가? 모세 시대부터 그렇게 분명한 율법을 가졌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왕들이 어떻게 그렇게 불신앙적이고 반신앙적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사사시대나 초기 왕정시대에는 그런 법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선지자들의 설교를 통해 이스라엘에는 윤리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럴듯한 설명이다.
     이런 비평학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인간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8,9세기는 시대적으로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한창 부풀어 오를 때이다.

인간 이해의 차이

  15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17,8세기에 꽃을 피운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개성·주관·비합리성·상상력·개인·자연스러움·감성을 강조하는 18,19세기의 낭만주의는 결국 인간중심주의로 나아갔다.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 때문에 인간에 대한 공포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계몽주의 특유의 낙관론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결국 성경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서도 그렇게 범죄 타락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인간임을 역사는 밝혀주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20세기에 터진 6백만 유대인을 살해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만약 벨하우젠이 1844년보다 5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도 전혀 다른 견해에 도달했을지 모를 일이다.
    오늘날 내노라하는 정치인들이며 심지어 요즘 돈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르는 판 검사들이 법이 없거나 법을 몰라서 부정하고 부패한 짓에 휘말려 드는 것이 아니다. 죄악중에 출생한 인간이기 때문에 별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결과를 빚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개혁주의 인간론을 먼저 공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평학이 얼마나 변해왔는지, 공부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변천과정을 살피면 비평학의 궁극적 목표가 절대로 성경의 파괴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비평학자들 가운데 성경을 파괴하는데로 빠져버린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본래의 목적이 그랬다고 주장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비평학은 성경 해석을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방법이 절대적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해석방법은 인간이 찾아낸 수단일 뿐이다. 신학 역시 상황이 만든 성경 해석의 틀이 아닌가. 성경은 절대적이어도 누구의 신학이든 신학이 절대적일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앎과 신앙과 행동

성경을 대하면서 갖게 되는 또다른 오해는 성경의 성격을 아는 것과, 믿는 것, 그리고 성경대로 사는 것을 혼동하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안다하고 믿는다고 하면 다 끝나는 것인줄로 착각한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머리로 인지하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공부을 열심히 하면 성적이 오른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몰라서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경우는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그런데 도둑질을 시키고 몸을 팔게 하는 부모를 가진 자녀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일반적인 원리를 믿는 것과 그 믿음을 실재화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고 하셨고, 야고보 선생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단정했다. 다른 여지를 전혀 남겨 두지 않았다.

보수주의자로 자처하는 자들은 자주 이런 두가지 오류에 빠져들고 있음을 보게 된다.
  1. 자신만이 온전한 성경관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정경론에 관한 것인지 해석에 관한 것인지 구분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자신과 다르다며 원색적인 비난을 일삼는다. 자신의 해석방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지 않은채. 때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여성 안수, 안식일  등) 때로는 성경을 완전히 문화적, 상징적으로 해석한다(예배중에 수건쓰기, 눈을 빼어버려라 등). 그래도 자신의 해석방법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다른 사람이 다른 해석을 시도하면 그냥 자유주의자나 이단이 된다.

  2.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성경대로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면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 소위 자유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한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자유주의자로 불리는 장로교 기장의 사람들은 진리, 정의, 평화, 자유, 하나님이 주신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군사독재시절 자기 목숨도 내어놓고 싸웠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말씀대로 살려고 목숨을 내어 놓는 일이 있는가? 고신의 설립자들을(후손들이 아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진리를 위하여 그들은 목숨을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손인 우리는 어떤가? 의를 위하여 핍박받을 생각이 있는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라고 하였는데, 과연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일반인의 경계만큼이라도 주의깊게 말씀을 받아들였는가? 그래서 복음병원 사태가 터졌는가?
    이광호 목사가 복음병원보다, 교권주의보다 성경관이 중요하다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표현은 그야말로 면피용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성경관이 중요하면 성경대로 사는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 명백히 불법을 행하고 이중 삼중 장부를 쓴다고 총회 앞에서 감사가 보고하는 사태가 벌어지는데도, 아무 소리 없이 교회가, 공회가 범죄하는 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과연 성경을 믿는 사람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가? 김해복음병원이 사채놀이터가 되었다는 소리가 공공연한데도 나만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가르치고 신학입네 하며 고고한척 하고 있으면 되겠는가?
  그건 아니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대로 살아가려 하는 모습에서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다. 행함이 없으면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 형제를 원수대하듯 대하며, 단 한번도 대화해 보지 않은 채 고소하고 고발하기를 밥먹듯이 하며, 불의와 불법을 마음대로 자행하는 것이 성경을 믿는 사람의 행위일까?

"성경을 믿는다는 것을 너의 몸으로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라" 주님은 여전히 그렇게 말씀하고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끝내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 모두 그렇게 살았으면 한다. 내용 없는, 순전히 사변적인 말놀음은 이제 그만하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주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다 주님 만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런 한국교회를 보고 싶다. 그런 고신교회로 거듭나기를 갈망한다.
출처 : 포커스
글쓴이 : 포커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