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삼위일체론 연구
차 례
서 론
1. 연구의 목적 및 의의
2. 전개방법
본 론
1. 삼위일체론의 역사적 고찰
1.1. 삼위일체론에 관한 3세기 이전의 견해
1.2.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단의 견해
1.2.1. 단일신론(monarchianism)
1.2.2. 아리안주의(arianism)
1.2.2.1. 아리우스 주장
1.2.2.2. 아리우스 주의의 역사적 발전
1.2.2.2.1. 종속주의(subordinationism)
1.2.2.2.2. 전형적인 아리우스주의(arianism proper)
1.2.2.2.3.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
1.2.2.2.4. 유니테리안 주의(unitarianism)
1.2.3. 사벨리안주의(sabellianism)
1.2.3.1. 성부고난설(partripassionism)
1.2.3.2. 성부속성설
1.2.3.3. 전형적 사벨리안주의
1.2.3.4. 사벨리안주의의 영향
1.3. 삼위일체론 논쟁
1.3.1. 배경
1.3.2. 니케아 회의(325년)
1.3.3. 안디옥 회의(379년)
1.3.4.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
1.4.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1.5. 종교개혁자 칼빈의 삼위일체론
1.6. 최근의 상황
2. 삼위일체론에 관한 개혁주의 입장
2.1. 성경의 증거
2.2. 삼위의 각론(各論)
2.2.1. 성부
2.2.1.1. 아버지되심
2.2.1.2. 성부의 사역
2.2.2. 성자
2.2.2.1. ‘아들’의 의미
2.2.2.2. 성자의 영원한 나심
2.2.2.3. 성자의 신성
2.2.3. 성령
2.2.3.1. 성령의 의미
2.2.3.2. 성령에게 붙여진 명칭과 특징
2.2.3.3. 성령의 인격성
2.2.3.4. 성령의 신성과 사역
2.2.3.5. 성령의 영원한 나오심(삼위와의 관계)
2.2.3.6. 현대 한국교회의 성령이해
결 론
1. 연구결과
2. 제언
참고문헌
서 론
1. 연구의 목적 및 의의
삼위일체 교리는 오직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교리이다.1 이 교리가 명확하게 알려지기에는 상당한 시일을 요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는 완전하지만 이 교리가 난해해서 인간이 이 계시를 파악하기에는 시일이 걸렸다는 뜻이다.2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의문은 초대교회 시대보다는 오늘날 더 많이 밝혀졌지만 지금도 완전하게 이 교리의 의문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관한 질문은 점점 더 뚜렷하게 신학적인 사고의 중심문제가 되고 있다.3 특히 여호와증인 같은 이단은 성경에 삼위일체란 용어가 어디에 있는가? 성경에 없는 교리를 왜 만드는가?4하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전면 부정한다. 그러나 이 교리는 성경에 확실하게 계시된 진리요(창 1:26,요1:1) 기독교 교리의 진리요 왕관이요 심장부와도 같이 중요하고 실제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교리이므로 이 교리에 그릇된 견해를 품으면 우리의 모든 신학은 위태롭게 된다.5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리가 너무 난해하다고 해서 신앙으로만 안주하고 있으면 안될 것이다. 이단들의 비 성경적인 내용으로 도전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력이 미치는 한계까지는 계시를 통한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6 더구나 범신론적 사상이나 뉴에이지 같은 사상이 난무하는 오늘 날에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연구는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이다.
본 교리에 대하여 지속적인 연구를 할 때 과거에 수 많은 기독교의 정통과 이단들과의 논쟁에서 기독교의 정통이 승리를 할 수 있도록 주께서 섭리하셨던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본 교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명을 가지고 연구를 할 때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더욱 큰 지혜와 힘을 주셔서 주님의 진리의 빛이 더욱 확고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증거되며 종말을 내다보는 우리의 앞날은 소망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자가 본 논문을 쓰는 목적은
첫째, 본 교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만을 통해서 계시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둘째, 본 교리에 대한 정통과 이단의 주장을 확실히 구분짓기 위해서이다.
셋째, 본 교리에 대한 역사적인 상황을 통하여 개혁주의에로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보고자 함이다.
마지막으로 본 교리를 논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기독교의 본질에 적합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본 논자는 “단일(單一)한 신성(神性)에 삼위(三位)가 계시니 곧 그 본질(本質)과 권능(權能)과 영원성(永遠性)이 동일(同一)하신 성부(聖父) 하나님, 성자(聖子) 하나님, 성령(聖靈) 하나님이시다”라는 논지(論旨)를 가지고 본 논문을 논술하고자 한다.
2. 전개방법
논자는 본 노문을 전개함에 있어서 본론 ‘1’ 에서는 삼위일체의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이단들의 주장과 그 변형 과정, 그리고 회의에서 나타난 이단들과 정통주의의 논쟁을 살펴본 후에 삼위일체 교리의 정통에 서 있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대작인 ‘삼위일체에 관하여(De Trinitate)’에 나타난 그의 삼위일체론과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의 걸작인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을 통하여 그의 가르침을 살펴보면서 삼위일체 교리의 개혁주의로의 발전 과정을 논의할 것이다. 본론 ‘2’ 에서는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으로서 성경적 증거와 삼위(三位)에 대한 각위(各位)를 살펴봄으로써 본 논문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이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린다!(Soli Deo Grolia!)
본 론
1. 삼위일체론의 역사적 고찰
1.1. 삼위일체론에 관한 3세기 이전의 견해
속사도시대(AD 80~130)의 교부들인 클레멘트(Clement), 바나바스(Barnabas), 이그나티우스(Ignatius), 헤르마스(Hermes) 등은7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공유하였으며 그것은 구약 성경 가운데서 발견된 신의 개념을 근거로 하여 한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강조되었다.8 하나님을 “전 우주의 아버지와 창조주,” “우리의 조성자”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전능과 우주적 통치를 믿었고, 삼위일체 신론이 아직 완전하게 논의되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세례와 같은 문제에서는 삼위일체적 신조를 주장하였으며,9 성삼위신조를 남겨 놓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교부들에게 있어서는 이일신론적(二一神論的)인 경우가 많았음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비록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간주되기는 하였지만 실제의 동일시보다는 표현상의 동일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성령을 한 인격적 요소로 표현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음은 확실하다.10 이 시기에 교회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흔적은 발견할 수 있으나 엄격한 의미의 삼위일체 교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그러나 2세기 중반에 들어들면서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11 저스틴 마티(Justin Martyr),12 같은 변증가들에 이르러서는 신성안에 있는 복수형을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로고스(λόγος : 말씀)와 성령이 실제로 시간과 공간안에 현현하였으면서도 어떻게 성부의 존재 속에 거할 수 있는지, 즉 말씀과 성령이 성부와 더불어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통일성(단일성)을13 깨뜨리지 않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줄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2세기의 사상을 집약한 이레니우스(Irenius)는 경세적 삼위일체 개념을 주장하였고,14 3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터툴리안(Tertullian)15의 주장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터툴리안은 변증가들의 로고스 개념을 사용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이론 전개는 그 후에 인정된 바 있는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로고스의 개념을 변증가들이 사용했던 방식으로 적용시켰는데, 신적 말씀이 창조시에 하나님의 이성으로부터 나왔다는 주장이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Word)이 탄생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아버지로부터 구별된다. 그리스도는 마치 광선이 태양으로부터, 식물이 그 뿌리에서, 혹은 강물이 그 원류로부터 비롯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계시하신 분이시다. 터툴리안은 변증가들과 마찬가지로 ‘종속론(Subordinationis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는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와 함께 하나이지만, 그와 동시에 아버지와는 무언가 다르다는 점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 위대하신 것은, 생명을 부여하는 자가 낳음을 받은 자와는 다르며, 보내는 이가 보내심을 받은 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Adversus praxean, 9) 터툴리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위격(혹은 인격, persona)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는데, 이 용어는 마침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공식적 용어가 되었다. 아들은 독립적인 위격으로서 아버지로부터 나왔다. 로고스는 하나의 독립적인 실존을 가진다. 그러나 세 위격들은, 태양빛들이 태양과 함께 하나인 것처럼, 한 분안에 존재한다. 터툴리안은 헬라어 ‘본질’(essence 혹은 substance, ουσία)이라는 말에 대한 상당어로써 ‘substantia’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이 용어도 역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는 공식 용어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 사이에 명확한 구분을 두었다. 이 두 본성(본질)은 한 인격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된 것이 아니라, 연합되어 있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본성을 의미한다고 그는 말했다.16 이와 같이 2-3세기의 인물들이 통일성을 강조한 까닭은 무엇보다도 교회안에 일어났던 영지주의나 단일신론 같은 이단들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17 이 이단들은 2세기 말에 크게 유행하였고 3세기초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18 그리하여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혼선이 빚어졌고 그 결과 기독교회 내에서는 성경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정립이 필연적으로 세워져야 함을 자각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4세기라 하겠다.
1.2.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단의 견해
1.2.1. 단일신론(monarchianism)
단일신론(혹은 군주신론)19은 하나님은 한분이며 그가 창조하시고 또 다스리신다는 강력한 유일신 사상을 가지며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인데 이렇게 볼 때 기원은 정통이었으나 나중에 반 정통으로 기울어져 갔다. 비록 예수와 성령의 초인간적 능력을 인정하기는 하나 그들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 초인간적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어떤 신적 능력을 부여해 주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에 대한 믿음을 동일시 하지 않는다. 이점에 있어서 그들은 유대교의 유일신관을 계승한 것이었다.20
하나님을 단독적 통치자라고 하는 관념은, 각종 다신론적 종교와 철학이 성행하던 당시의 문화적․종교적 분위기 속에서는 일어날 수 밖에는 없었다. 특히 일부 신학자들(교부)은 그러한 다신론적(多神論的)경향을, 다른 교부들이 말하는 삼위일체론적 사고 구조에서 강하게 느꼈다. 그 결과 그들은 성경적 유대적 유일신론을 고수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단독적 통치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인되고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할 뿐이라고 하는 군주신론(단일신론)을 주장하게 되었는데, 단일신론자들은 이자택일(二者擇一)의 입장에 놓여 있다. 즉 그리스도의 완전신성을 부인하면서까지 단일신론을 변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어떤 질(quality)이나 힘(force)으로 감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이룩한 구원론적 역할은 극단적으로 약화되고 말았다. 이 점을 느낀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단일신론에 대한 강한 반대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사상의 형태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 데 한 형태는 역동적(力動的, dynamic) 단일신론(혹은 양자론적 단일신론)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양태적(樣態的, modalistic) 단일신론으로 불리워진다.21
첫 번째 형태인 역동적 단일신론의 창시자는 데오도투스(Theodotus)였다. 그는 로고스 기독론을 반대하면서 전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였다. 차라리 그는 그리스도가 인간에 불과하다고 믿었다(에비온적 견해) 그리스도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통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22 그리스도께서 세례받기 이전까지도 그분이 최고로 덕있는 분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지, 보통 사람의 삶을 살았다고 하였다.23 즉 그리스도는 다만 그의 의로운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세례를 받을 적에 성령 혹은 그리스도가 그분에게 강림하셨고 그 순간부터 그분은 기적을 행하셨으나 신적으로 되신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역동적 단일신론은 예수 안에서는 인간만을, 성령 안에서는 신적인 영향만을 보았다.24 이 사상을 수용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이며 또한 이 이론을 수용하여 더욱 발전시킨 인물은 아리우스 논쟁을 일으키게 한 장본인인 아리우스로서 이 사상은 아리안주의로 연결된다.
두 번째 형태인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진술한 신학자는 서머나의 노에투스(Noetus of Smyrna)였다. 노에투스는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하여 ‘경륜’의 개념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로고스 기독론과 그 안에 함축된 종속론적 경향들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성부만이 하나님이었다.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가려져 있지만, 하나님은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이 땅에 오셨고 자기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하나님은 고통과 죽음에 복종하지 않는 분이지만, 자신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내리시면, 고난을 받으실 수도 있고, 죽음을 맛보실 수도 있다고 하였다. 노에투스는 이같은 주장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단일성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 사상을 수용하여 체계적 형태를 부여한 인물은 누구보다도 사벨리우스였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인 동시에 동일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써만 구별된다고 하였는데 그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였으며,25 성부, 성자, 성령을 신적 본체가 계속적으로 나타난 현현의 세 모양으로 간주하였다.26 이러한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사벨리우스주의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여기서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이단들의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살펴봄으로 인하여 이단들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1.2.2. 아리안주의(arianism)
1.2.2.1. 아리우스 주장
A.D. 2세기와 3세기에 있었던 아리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단지 초 자연적 방식으로 낳은 사람으로만 여기고, 그가 세례 때에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서 그의 사역에 적합하게 되었고 주(主)로 높여 졌다고 생각하였으며, 그의 선재와 신적 본성을 부인하였다. 에비온주의(Ebionites), 알로기파(Alogi), 데오도투스(Theodotus), 아르테몬(Artemon),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anrchianism 혹은 양자론적 단일신론)을 받아들였다. 4세기에 이 주장이 루시안(Luncianus)과 그의 제자 아리우스에 의해서, 또한 아에티우스(Aetius)와 유노미우스(Eunomius)에 의해 옹호되었으며 아타나시우스의 ‘The Banquet’라는 제목의 작품에 의해 그들의 단편들이 보존되어 있다.27
아리우스는 하나님은 나시지 않았고(unbegotten), 성자는 나셨다(begotten). 그러므로 성자는 신적 속성을 갖고 있지 않다. 즉 그는 성부와 동질이 아니다 성자는 존재하지 아니한 때가 있었다.28그는 성부처럼 불변적이지 않고, 선(善)뿐만 아니라 악(惡)도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전한 피조물이다.’ 그는 선을 선택하였고, 그럼으로써 불변성을 얻었고, 그리하여 신성에 이르렀다.29 성자는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이란 완전한 피조물이 될 수 있었다.30 따라서 우리의 영예를 받으시기에는 합당하나 경배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당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아타나시우스의 작품을 보면 아리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위하여 몇 구절의 성경을 인용하여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일성(신 17:3; 고전 8:6), 성자의 출생(잠 8:22; 골 1:15), 성자의 성부께 대한 종속(요 14:28; 고전 15:28; 히 3:2), 성자의 지식의 제한성(막 13:32; 요 11:34), 성자의 능력의 제한성(마 28:18), 성자의 선(善)의 제한성(눅 18:19), 성자의 지혜의 성장(눅 2:52), 성자의 수난(요 12:27; 13:21; 마 26:39; 27:46), 성자가 주(主)와 그리스도로 높여지심(행 2:36; 빌 2:9; 히 1:4) 등, 더 나아가 그들은 그들의 견해와 일치하는 초기 교부들의 글에서 많이 인용하여 그것을 근거로 증명해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명목론적으로 파악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철학으로부터 다양한 논의를 도출해 내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통일성과 불출생을 증명하였다. 끝으로 그들은 니케아 신조(Nicene Creed)에 있다고 생각되는 몇몇 흠과 모순을 지적했다. 즉 만일 성자가 낳아졌다면 바로 그 사실이 그가 낳아지지 않는 분이신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심이 비교된다는 점, 또 성자가 시간내에 존재한다는 점이 성부와 비교된다는 점,31 등의 이론에 근거를 두어 아리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1.2.2.2. 아리우스 주의의 역사적 발전
아리안주의란 성자와 성부와의 동일본질을 부인하며, 성자에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 위치를 부여한다는 데에 있다. 이 결과 어떤 이들은 성자가 하나님과 거의 동등하다거나 여겼고, 또 어떤 이들은 단지 위대한 사람 정도로만 여겼다. 또 다른 이들은 그를 이 두 극단 중 중간 위치에 두었다. 역사적으로 성자는 점점 더 신성을 박탈 당해 결국에는 그의 신성이 전혀 주장되지 않는 상황까지 이르렀다.32 아리우스주의의 핵심은 성부와 성자의 동질성을 부정하고 성자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어느 한 위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사이의 지점에다가 성자를 두느냐에 따라 후에 다음 네 가지로 그 형태가 갈라졌다.33
1.2.2.2.1. 종속주의(subordinationism)
이 주장에 의하면 아들은 참으로 영원하며, 성부의 본질에서 낳아진 분이다. 그는 피조물이 아니며, 무(無)로부터 존재케 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부보다 열등하고, 그에게 종속된다. 성부만이 정관사를 붙인 ‘호 데오스(ό θέος : 그 하나님)’이시고, 그만이 ‘신성의 원천’이시다. 성자는 정관사를 가지지 않은 ‘데오스(θέος : 하나님)’이고, 성부와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질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주장은 저스틴 마터(Justine Martyr), 터툴리안(Tertullian), 클레멘트(Clement), 오리겐(Origen)34 등의 가르침이며, 유사 아리안주의자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rsarea),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 등이 지지하였다. 후기에는 항론파들(알미니안주의자들)과 많은 근대 신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옹호하였다.
1.2.2.2.2. 전형적인 아리우스주의(arianism proper)
이 고대형의 아리안주의는 종교개혁 후기의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특히 영국에서-애호되었다. 밀턴 같은 사람은 가르치기를 “성자와 성령은 우주 창조 이전에 존재하는 분들로서 성부의 자유의지에 따라 창조되었으며 그들이 하나님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오직 그의 직무 때문이다. 이는 마치 구약의 사사들이나 지도자들이 신으로 불리워진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1.2.2.2.3.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
이 주장에 의하면, 성부는 유일하신 참하나님이시다. 성자는 하나님이, 성자가 존재하기 이전에 가지고 계셨던 직접적이고도 초자연적인 개념으로, 창조한 한 거룩한 인간이었다. 그는 인류에게 새 계명을 선포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이 임무를 완성하기 위하여 그는 신적 은혜에 참여자가 되기 위하여 천국으로 올라가셨다. 성령은 단지 하나님의 힘이요 세력일 뿐이다. 이 상은 플란드로부터 독일, 화란, 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터져나갔다.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는 죤 비들(John Biddle), 나다니엘 라드너(Nathanael Lardner), 린세이(Lindsey), 그리고 유니테리안 협회의 창시자인 프리스틀리(Priestley) 등에 의해서 이 견해가 옹호되었다.
1.2.2.2.4. 유니테리안 주의(unitarianism)
16세기 무렵부터 세르베투스(Servetus) 등에 의해 시작되어 비들(J. Biddle), 프리스틀 등에 의해 영국과 미국 등에 널리 퍼졌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는 그의 덕과 경건성 등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한 인간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 주장은 합리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서 수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아버지 한 분만을 하나님으로 믿고, 같은 신성을 가진 삼위의 일체를 믿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한 분으로서 예수는 하나님의 여러 자녀 가운데 한 아들이며 ‘그 아들’이 아니다. 예수는 진리를 가르친 위대한 선생이며 고상한 생활의 모범적 인물이거나, 아버지와 동등한 독생자는 아니다. 즉 이들은 예수를 인류의 4대 성인 중에 한 사람으로서 취급한 것이다.35 따라서 성령은 거의 언급하지 아니하며, 또 그의 신성이나 인격성은 부정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단지 한 인간으로만 보는 극단적인 단일신론을 주장한 자들이다.
1.2.3. 사벨리안주의(sabellianism)
아리우스파와 사벨리안파는 다같이 삼위일체론을 부정한다. 아리우스파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고, 사벨리안파는 오히려 성부, 성자, 성령의 신성을 확고히 주장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한다.
A.D. 2,3세기의 사벨리안주의의 선구자들은 노에투스(Neotus), 프락세아스(Praxeas), 에피고누스(Epigonus) 그리고 클레오메네스(Cleomenes)이며 이들의 주장인 군주론, 성부고난설, 또는 양태론을 사벨리우스가 옹호하고 더 발전시켰다. 사벨리우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창조주와 입법자로서 성부의 위격으로, 또는 성부의 양태로 나타나셨다. 성육신 때로부터 승천하실 때까지는 구속주로서 성자의 위격과 성자의 얼굴로 나타났으며, 마지막으로는 생명을 주시는 이로써 성령의 위격과 얼굴로 나타나셨다고 한다. 이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사벨리우스는 특히 신 6:4; 출 20:3; 사 44:6; 요 10:38에 호소한다. 그는 성령을 신적 본질에 포함시켰고, 성자와 성령을 성부와 온전히 동등한 위치에 두었다.36 즉 성부, 성자, 성령의 나타나심이 동일한 존재가 나타나는 세양식(三樣式)이라고 보았다. 이들의 주장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다음과 같은 형태로 갈라진다.
1.2.3.1. 성부고난설(partripassionism)
성부라는 한 하나님이 성자로도, 성령으로도 나타난다는 것으로써 노애투스는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본질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각기 다른 이름과 형태만을 가진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또한 클레오메네스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후 부활하신 분이 곧 만물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에 체계적 형태를 부여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사벨리우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인 동시에 동일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써만 구별된다고 말했다. 성자와 성령은 신성이 세상에 나타날 때 취하는 형태들에 불과하며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성경 속에서는 당시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인격화시켰다는 것이다.37
1.2.3.2. 성부속성설
안퀴라의 말세루스(Marcellus of Ancyra), 설미움의 포티누스(photinus of Sirmium) 의 이론으로서 성자와 성령은 창조와 구속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인격을 취한 신적 속성들이라는 주장이다.38
1.2.3.3. 전형적 사벨리안주의
이 사상은 양식적 단일신론(Moelistic monarchianisim)이라고 불리워진다. ‘성부는 신적 존재의 전체요, 유일한 하나님이시다’39라는 사상으로서 이들은 단일의 신적 본체를 인정하고 그 본체가 창조와 율법 수여에서는 성부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구원적용(또는 생명수여)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이 상이 성부 고난설과 다른 점은 성부 대신 유일 본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사벨리우스, 중세 범신론자들, 제세례파40 등에 의하여 주장되었다.41
1.2.3.4. 사벨리안주의의 영향
뵈베(Bohme)는 삼위일체를 신성 안에서의 한 과정의 산물로 보았으며, 진젠돌프(Zinzendorf)는 가족설을 말하였으니 이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은 완전히 감추어져 아무도 접근할 수 없으나 계시로 나타날 때 성부는 아버지, 성령은 어머니, 성자는 아들, 교회는 그 아들의 신부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다.42 스웨덴보르그(Swedenburg)는 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순수하고 단순한 삼신론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영혼과 육체, 그리고 그 모두로부터 나오는 활동이 서로 연관되어 있듯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임마누엘 칸트(Immauel Kant)는 세 가지 자격이 세 가지 인격을 대신하고 있다고 했다. 즉, 참 종교는 거룩한 입법자, 선한 통치자, 그리고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였다.43
이상에서 논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존재 및 관계에 관하여 역사적인 주장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살펴보았으나 개혁주의가 취하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도 없다. 이러한 이단들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을 부인하고 인격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던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인격을 부인한다던지 하여 너무 한쪽으로 지나치게 취우치게 됨을 보게 된다. 이제 우리는 본 교리에 대한 논쟁을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개혁주의 정통교리가 교회사에서 어떻게 새워졌는가를 역사적인 발자취를 통하여 찾아보게 될 것이다.
1.3. 삼위일체론 논쟁
1.3.1. 배경
본인이 앞에서 살펴본대로 4세기 이전에는 초대교부들의 가르침과 변증가들의 로고스 개념과 터툴리안과 같은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에 대한 명백한 교리가 세워지지 않고 계속해서 단일신론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본 교리에 대한 교회 내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논쟁으로 인하여 그 명료성을 오히려 잃어가고 있는 듯 하였다. 그러던 중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Arius)와 알렉산더 감독의 수행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와의 논쟁이 최고 절정에 달했다. 이것은 안디옥의 루시안이(Lucian)이 사모사타의 바울의 제자로서, 그는 성자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이 낳았고,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창조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루시안의 제자인 아리우스는 이러한 스승의 원리에 찬성을 하였고 또한 오리겐의 종속론의 영향을 받았다.44 아리우스에 의하면 성부만이 신적 존재요, 성자는 피조자로서 피조된 만물 중에서 가장 크고 제일인 그가 먼저 창조되었고, 그를 통해서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45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하여 알렉산더는 32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교회 대회를 열고 아리우스를 정죄하였다. 아리우스는 루시안 문하에 동학한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의 도움을 구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마침내 동방교회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의 교리적인 대혼란을 막기 위하여 콘스탄틴(Constantine)황제는 교회의 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삼위일체론적 정통주의의 형성을 추적하게 될 것이다.
1.3.2. 니케아 회의(325년)
아리우스 논쟁으로 인하여 교회의 분열이 야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콘스탄틴황제는 황제의 종교문제 고문 감독이었던 코르도바의 감독 호시우스(Bishop Hosius of Cordova)는 중대성을 인식하고 황제를 설득하여 325년 5월에 소아시아 북방 비트니아(Bythnia)에 있는 니케아(Nicea)에서 최초의 세계적 종교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는데 니케아 회의는 제 1 차 공의회로서 종교사에 매우 중요하다. 회의가 시작되자 감독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 부류는 알렉산더와 나다나시우스에 의하여 영도된 호모우시오스(’ομοούσιος : one substance : 동일본질)을 주장하는 동질론자이었고(10명 정도), 둘째 부류는 아리우스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 의하여 영도되는 아리우스주의자들(20명 정도)과, 셋째 부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평을 희망하는 자들이며,46 이들은 호모이우시오스(’ομοιούοιος : like substance : 유사본질)을 주장하는 중도파로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영도하는 부류로서 대부분의 감독들이 여기에 속했다. 한편 황제는 삼위일체에서 하나님의 통일성 보다는 제국의 통일성에 더 큰 관심을 쏟았으므로 가능한한 최대한의 감독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형식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아리우스를 옹호하는 무리들을 정죄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역사적인 기독교회의 니케아 회의는 콘스탄틴 황제의 참석과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의 사회로 시작하였다. 물론 회의의 주제는 삼위일체 교리였다.47 아리우스를 맨 처음 반대한 사람은 그의 감독 알렉산더였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의 참대적자는 아타나시우스였음이 판명되었다.48
우리가 살펴본대로 아리우스는 성자는 신적 존재로서 성부보다 열등하다고 하여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진정한 본질의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하여 아타나시우스의 기본 입장은 성자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과 아들의 완전한 신성을 주장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인 고로 아들은 완전히 하나님으로서 결국 동일본질이라고 하였다.49 아타나시우스는 구원론에 초점을 맞추면서 예수님의 정체(Identity)를 생각했다. 그는 아리우스의 큰 잘못은 구원론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생각한 점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50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참 하나님이 되셔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는 결코 지음을 받은 자가 아니라 태초부터 인격으로 존재했으며, 분리될 수도 없고 나누일 수도 없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어야 했다고 이해하였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게하시기 위함이었다.51
결국 아리우스파는 정죄되고 니케아신조(Nicene Creed)가52 제정되었는데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53
우리는 한분 하나님을 믿는다. 그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드신 자다.
그리고 한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신 자이시며 독생자이시다.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오신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오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다. 낳으신 자이시고 만들어진 자가 아니다.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존재케 되었다. 그는 우리 사람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 성육신하셨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당하시고 삼일만에 다시 일어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셨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는다.
그러나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 탄생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들, 무(無)에서부터 아들이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 하나님의 아들은 상이한 본질 혹은 실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자들, 혹은 아들은 피조되었다든지, 혹은 변화될 수 있고, 바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보편교회는 저주한다.
이 신조는 오리겐의 종속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온전하고도 참된 신성을 고백하였다.54 그리고 이것은 사벨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아리우스의 피조설을 뿌리부터 제거해 버렸다. 또한 이 신조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 개체성을 확립하는 동시에 성부와의 일체성을 확립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가장 표준적인 신앙임을 보여 주는 신조로서55 이후에 이단과 정통을 나누는 표준이 되기도 하였다.56
그러나 우리는 니케아 회의의 결정으로 기독교회의 삼위일체 교리 논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됨을 보게 된다. 그것은 교회의 신앙이 당시의 황제들의 정치적 양상이 바뀌어짐에 따라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이 신조는 성령에 관한 고백이 지나치게 간단히 때문이다. 성자와 성령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만은 확실하나 동일인지 혹은 발출인지 조차 밝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는 아직도 발전해야 할 필요성을 지니고 있었다.57 어떻게 보면 니케아에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논쟁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회의로 인해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간의 불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왜냐하면 회의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감독들이 신조에 서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방교회의 대부분은 반아리우스주의 즉 유사본질을 주장하는 온건파에 속해있으면서 니케아신조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소수의 감독만이 참석한 서방교회는 니케아신조를 쌍수를 들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후 아타나시우스는 황제들의 종교적인 입장이 변함에 따라 다섯 번이나 추방 당하는 수난을 당했고, 아타나시우스의 동질론은 60년간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결국에는 아타나시우스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1.3.3. 안디옥 회의(379년)
동방과 서방의 불화를 조정하기 위하여 안디옥에서 여러번 회의가 개최되어 두가지(① 본체유사설, ② 성부의 의지적 행동에 의한 성자의 발생)를 제외하고는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다 받아들였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이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가 반니케아파(아리우스파와 반아리수파를 말한다)에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 사이에, 나증에는 반아리우스파 자체내에 분쟁이 발생하여 아리우스파는 가장 보수적인 반아리우스파를 니케아 진영으로 추방시켰다. 한편 젊은 층의 니케아파가 일어났는데, 그들은 오리겐의 제자들로서 ‘위대한 캅파도키아인들(The Great Cappadocians)’이라는 이름으로 보다 잘 알려진 세 사람의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는데,58 이들은 가이사랴의 감독을 역임한 대 바실(Basil the Great, 379년 사망)과 그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94년 사망),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ey of Nazianzus, 약 390년 사망)였다.
이들은 휘포스타시스(‘υπόστασις : 실체 혹은 본체)라는 말을 우시아(ούσια : 본질)과 프로소폰(πρόσωπον : 인격 혹은 위격)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오해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그말을 성부와 성자의 인격적 실존을 나타낼 때만 사용하도록 제한시켰다.59 그들은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삼인격을 명확히 강조했고, 로고스의 인격성을 보호했으며, 신격안에 있는 삼위의 통일성을 열렬히 주장하였으며, 특히 성령의 개념에 있어서는 아리우스는 성령은 성부를 통해 생겨난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와 캅파도키안의 세 교부들은 성령은 성부와 동일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60
이들에게 있어서 본체의 개념을 삼위일체 교리에 사용될 때, 신격의 세 위(位)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특유한 성질과 속성을 가짐으로써, 상호간에 구별이 되는 동시에, 각기 특별한 존재 형태를 취하게 된다. 아울러 그들은 모두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이와 같은 방식의 설명은 흔히 ‘한 본질, 세 위격(one essence, three persons)’61이라는 말들로 요약된다.62
이러한 캅파도키아의 세 학자들의 주장으로 말미암아 니케아 신학이 아리우스주의와 양태론 사이의 진정한 중재적 입장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1.3.4.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
362년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회의63에서는 성령은 성부, 성자와 동질로서 비슷한 인격이라고 선언하였으나 안디옥 회의를 거쳐오면서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현재의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있는 성령 개념이 승인을 얻게 되었다. 이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완성하고 적용하는 일이라고 해석하였으며 성자와의 차이점은 아들은 출생되어 보냄을 받았으나 성령은 나왔다는데 있다고 하였다.64 이렇게 하여 삼위일체 논쟁은 콘스탄티노플 회의로 끝이 났는데, 이 회의는 동방에서 니케아 신앙의 최후의 승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동서방을 통한 기독교권에 있어서의 니케아 신앙의 확인을 의미하며, 기독교 정통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도 신조가 세워졌는데, 이 신조는 니케아 신조의 확대판으로서 니케아 신조에 대해서 일부분 수정했지만 대부분 그대로 재확인하여 받아들였다. 그리고 성령의 신성을 증거하기 위하여 이 부분은 대폭적으로 확대시켰다.65 그리하여 콘스타티노플에서 세워진 신조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Niceno-Constantinoplitan Creed)'라고 부르는데66 이로 인하여 삼위일체 교리가 확연히 선포되었고, 니케아 회의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론 논쟁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삼위일체론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67
1.4.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을 더 정교화하고 온전히 발전시킨 공로는 아타나시우스, 갑파도키안 신학자 세 사람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354~430)에게 있다. 특히 서방의 삼위일체 개념을 최종적인 단계에 이르도록 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한 작품인 ‘삼위일체론에 관하여(De Trinitate)’에 잘 나타나있다.68 이 책은 15권으로 된 대작인데 399년부터 419년에 걸려 완성킨 것으로서 그 때까지의 여러 학설을 종합하여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체계화한 것으로서69 이 책의 구조와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권-4권 : 삼위일체의 동일성과 동등성은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며, 보냄을 입은 성자나 성령은 보내신 성부와 동등하도 삼위일체자체는 본성에서 불가견하고 불가분리하기 일한다.
5권 :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다르다는 것, 곧 낳으신 분(beget)과 나오신 분(to be begotten)은 서로 그 본질이 다르지 않겠느냐는 사람들, 즉 이단들에 대항하여, 이 용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상대적 관계를 가리킬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6권-8권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고전 1:24)고 해서 아들이 성부를 지혜롭게 하거나 능력있게 한다는 뜻이 아니고, 아버지 자신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 지혜와 능력이 아니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 한 본질이신 것과 같이 한 지혜와 한 능력이라고 가르치고, 삼위일체 내에서는 어느 한 분이나 어느 두 분을 합하거나 또는 세 분을 합하더라도, 어느 한 분보다 크시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 사랑에는 삼위일체의 흔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9권-14권 : 삼위일체의 흔적들을 피조물 특히 신의 형상인 인간 내부에서, 혹은 인간 외부의 대상과 그것에 대한 감각적 인상 및 인식의 상호작용에서 찾고자 한다. 즉 자연계와 사람에게서 심리분석을 통한 삼위일체의 유비를 찾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은 아직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며 사람의 진정한 지혜, 즉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랑하는 데 대해서 말하며, 이런 마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금생에서는 이 마음이 하나님의 지식으로 새롭게 되며 내세에 하나님을 뵐 때에는 하나님과 온전히 같게 되리라고 한다.
15권 : 2권부터 14권까지의 내용을 요약하고 삼위일체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행복된 일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 자신을 통해서 거울로 희미하게 볼 뿐이라고 하면서 기도로 끝을 맺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에서 수락한 진리는,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구별되는 동시에 공동본질적, 즉 실체에 있어서 숫자적으로 하나이시라는 것이다. 특징이라고 할 만한 점은 그가 아무데서도 그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계시의 소여(所與)이다. 그의 견해로는 그것을 성경이 거의 매 page마다 선포하고 있으며 ‘보편적 신앙’이 신자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의 신학적 노고는 삼위일체론을 이해하려고 했던 하나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신앙은 지성을 앞서야 한다는 그의 원리에 대한 최상의 본보기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논함에 있어서 성부만이 참된 원래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버렸다.70 삼위일체적 정통주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설은 성부를 출발점으로 삼는 전통과는 대조적으로 신적인 본성 자체로서 시작한다. 이 단순하고 변치않는 본성, 혹은 본질이야말로 삼위일체라는 것이다.71 그러면서 그는 성부를 신성의 원천, 또는 시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였다.72 이것은 신성이 논리적으로 먼저 성부 안에 존재하고, 성부가 그 신성을 성자와 성령에게 부여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으로가 아닌 위(位)로서 그는 성자의 아버지이시라는 의미에서만 그렇게 불리운다는 것이다.73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너무나도 엄밀하게 고수했기 때문에, 아버지 뿐만 아니라 아들과 성령도 아들의 성육신에 다같이 참여하였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를 표현하기 위해서 삼위의 활동은 별개로 나뉘어져 있는 분리상태에서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고, 삼위는 세 위격이 항상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활동한다는 이론을 체계화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본성을 지닌 분은, 한 신성을 지닌 분은, 한 위엄하신 분은, 한 영광 받으신 분은 그리고 한 분 의지이시며, 한 분 활동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 속에 있는 세 개의 위격 낱낱이 아니고 한 분 하나님 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아버지 홀로는, 아들 홀로는, 성령 홀로는 활동하실 수 없다는 결론”이다. 또한 삼위의 각 위격에 관한 그의 고찰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υπόστασις : 본체)라는 낱말은 원래적으로는 독특한 인격적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라틴어로 개체(persona)라는 단어는 흔히 독특한 자아의식의 뜻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는 이 단어가 신 ‘격들’(divine ‘persons’)의 상이성과 복수성을 강조하는 듯하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못하게 생각했다.74 실제로 헬라어로 본체의 뜻과 일치하는 단어를 라틴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데 항상 주저하였으며, 나중에는 관계(relatio)라는 개념으로 대치시켜 사용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세 개의 개체는 서로 상이하게 다른 것이 아니라, 각각 관계에서, 세상에 대한 관계에서 다를 뿐이다. 모든 절대적 특성, 즉 완전성, 선함, 전능성 등은 본래적인 통일성으로서 삼위일체 내에 속해 있지만, 관계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내적 생명력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의미한다.75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관계라는 개념으로 한 본체이신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고 하였다. 위격들이 셋이지만 따로 따로 하나의 단일한 보이지 않는 능력들의 현현들이라고 했으며 그것은 구별(distributio)이지, 분리(separatio)가 아니다. 신성은 불가분리적인 하나이다. 셋이라는 것은 단지 등급이나 형식이나, 혹은 현현에만 적용되는 것이며 위격들이 이러한 등급이나 형식이나 현현으로 제시되어 진다.76 따라서 한 분 하나님은 아버지 한 분만이, 아들 한 분만이, 성령 한 분만이 독자적으로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항상 사무이적인 한 분 하나님으로, 즉 하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셨고, 계시며, 계실 것이다.77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의 위격과 통일성을 매우 강조하였음을 볼 수 있고78 삼위의 위격은 세 인간이 소유 하고 있는 인간의 인격들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인격들은 오직 인간들 자신 각자에게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삼위의 위격은 상호 하나로서의 의지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79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개념을 따른 서방 교회는 삼위일체론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진전을 이룩했지만, 어떤 수정이나 새로운 요소를 도입시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누구나 원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있다(Quicunqe vult salvus esse)”라는 말로 시작하는 아타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Creed)는80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으며, 따라서 동방에서 보다는 서방에서 환영을 받았고, 개혁자들 또한 이 신조에 동의하였다. 루터파 신앙고백서들과 개혁파 신앙고백서들이 모두 세 가지 에큐메니칼 신조(symbola ecumenical)와 잘 조화되고 있다. 벨직 고백서의 제 9 항은 아타나시우스의 신조를 명백히 언급하고 있으며, 심지어 성공회에서는 이 신조가 예식문에까지 들어가 있다.81 이렇게 기독교의 정통교회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였고 그의 업적은 그만큼 지대하였다.
1.5. 종교개혁자 칼빈의 삼위일체론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이하 Institutes 라 한다) 1권 13장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논의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 자신 만이 자신에 대해서 충분하게 증거할 수 있는 분이시며, 이러한 하나님 자신의 증거가 없이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이시다.”8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언어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여야 할 것”83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 것에서는 하나님에 관해서 어떠한 생각도 갖지 말것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어떠한 것도 언급하지 말 것을 모두가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여기서 초대교회와 니케아학파의 교리를 옹호하면서 삼위일체의 용어, 즉 휘포스타시스(‘υπόστασις)나 위(位, person), 또는 실체(substance)라는 용어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설명하고 있다.84 칼빈은 “신은 한분으로서 스스로를 알게해 주셨으며 동시에 세 위격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쳐 주신다”는 명제를 세우고 있다.85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상으로부터 좀더 정확하게 자신을 구별하시기 위하여 다른 특별한 표식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통일성과 함께 자신이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주장하셨다.86
칼빈은 히 1:3에서 사도가 말하는 “카라크레오 테스 휘포스타세오스 아우투 (χαρακτήρ τής ’υποστάσεως αύτοΰ :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니다)”라는 말씀에 대해서, “사도는 이때 틀림없이 성부를 성자와 다른 실재로 보았다”고 하면서 “본체라는 말을 본질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조잡할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해석”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고 분할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87 그러므로 본체의 형상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성부는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의하여 구별되기는 하지만 자신을 성자 속에서 완전히 표현하심으로 성부의 위격을 아들 안에서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성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질 동일의 본성이지만 성부와 다른 인격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성부의 위격이 아들에게 반사되어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품성과 속성이 성자와 성령에게도 있다. 그리고 성령 역시 성부와 성자의 속성을 공유하시는 하나님이지만 성부와 성자의 위격과 구별되는 위격을 지니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는 세 위격이 있다.88
칼빈은 ‘삼위일체’, ‘위’라는 말은 성경에 비록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성경이 인정하고 있으므로 ‘삼위일체’라든지 ‘위’라는 표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용어의 사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89 그가 말하는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다른 실재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하여 저들과 구별되며 본질이라는 용어와도 다르다. 그러나 실재는 본질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 그리고 각자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부에게 속한 구별의 표지는 성자에게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90
한편, 성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구분하면서 이 문제를 규명하면서 얼마나 경건하고 신중해야 하는가를 그 신비의 중대성이 경고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단어들은 분명한 실재적 구별을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부와 성자나 성령이라는 단어를 단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따라 어떤 때는 이렇게 또 어떤 때는 저렇게 하나님을 명명하기 위한 단순한 부가적 호칭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91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구별되는 특징들을 신중히 고려하지 않거나 위(位)를 단순히 평범한 특징으로써 인식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모습은 보지 못하고 단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특징이나 행동 양식 중 어느 하나만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백히 보여주신 자신의 모습과는 다르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베일에 가리워진 채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92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다음과 같다. 곧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의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와 묘략 및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성령님께서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성부의 영원성은 동시에 성자와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원에 있어서 “먼저”니 “나증”이니 하는 개념을 찾아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의 순위를 주목하는 것이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일은 아니다. 즉 성부가 제 1 위로 간주되고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나온다. 성자는 오직 성부에게서만 발생되며 동시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생된다. 이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증명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로마서 8장이 가장 확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93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절대적으로 주의하여야 할 것은 삼위의 존재 양태는 구별이지 결코 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94 칼빈은 우리를 하나의 믿음으로 모으게 하는 세례 방법이 어떤 다른 것보다도 하나님의 유일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95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권고하실 때, 그는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하나의 믿음을 갖게 되는 것 외에 대체 다른 무엇을 더 바라셨겠는가? 세례야 말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같은 하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공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96 칼빈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정립하는 데 있어서 이론에만 집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여기서 명백해진다. 그의 의도는 단지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직접 자기 자신을 보여 주고 계시는 하나님 한 분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유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신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져 버린 모든 헛된 우상이 아닌 참 하나님으로 자기 자신을 선포하고 계신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세 개의 존재 양태를 갖고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는 것이다.97 삼위일체 교리는 다른 우상들로부터 하나님을 구별하면서 우리에게 계시될 주님으로써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확고하게 나타내주는 것이다.98
이와 같은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그의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을 주지 않고, 별로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가 확신하는 바로는 세 위격이 영원부터 단일한 하나님에게(또는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 존재하였다는99 것으로서 당시 종속설에 뿌리를 둔 유니테리안의 창시자인 세르베투스의 견해를 논박하여 삼위일체론의 종속설을 완전히 제거한 것은 그의 또 다른 공로이다.
1.6. 최근의 상황
본인은 위에서 이미 개혁주의에 서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았는 데 그들은 공히 동일본질이나 위격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하여 애를 쓴 흔적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이러한 영향이 오늘날 개혁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아직도 본 교리에 대한 완전한 정립은 세워지지 않고 있으며 이단들의 주장이 아직도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본인은 여기서 서 철원교수의 논증을 통하여 보다 최근의 상황을 논하면서 본 교리에 대한 개혁주의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서 철원교수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올바른 성경관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로서 그 위에 은혜언약의 전교리와 기독교 신앙 전체가 기초되어 있으며 이 교리는 신비 중의 신비여서 인간의 지성으로는 금생과 내세에 있어서도 궁구할 수 없는 신비라고 하고 있다. 계속해서 그는 세상에 대해서는 유일한 존재로 계시하신 하나님이 그 내적 존재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삼위로 계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데, 어떻게 한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계시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지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신비여서, 종말 영화 상태에서도 궁구해 볼 수가 없는100 교리로서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성과 신비성을 강조하면서, 본 교리에 대한 일위일신론(一位一神論)과 삼신론(三神論)에로의 양극적 위험을 살펴보면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증을 펴고 있다.
서 철원교수는 ‘신앙과 학문’ 제 III 부 7장에서 삼위일체론을 논하면서 바르트의 성경관과 함께 그의 삼위일체론을 비판하면서 본 교리에 대한 최근의 문제점들을 논하고 있는 데 그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자신(성부)을 계시자(성자)로 또는 인간과의 만남에서는 자신을 주(또는 영)로 계시하신다고 하는 데 이러한 바르트의 주장은 삼위일체론을 일신론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자로서 영원한 아들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그의 가르침으로서 이는 비성경적인 주장임이 틑림없다.101
이러한 바르트의 비성경적인 삼위일체론이 전통적 교리를 수용하고 있는 교회 내에도 매우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로서 우리는 이 현대적 삼위일체 교리의 변용을 막아야 할 것이다.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가 다른 면으로 위태하게 되고 있는 데, 그것은 존재론적 삼위일체론 교리를 받는 신학교에 나타난 현상이다. 존재론적 삼위일체 교리를 받는 전통적인 공교회의 신학적 논의가 갖는 위험성은 삼위일체의 신비의 논의에서 삼위와 본체와의 관계에서 삼위에 강조를 둠으로 나타나는 위험, 즉 삼신론의 이단의 위험이다. 이 논의는 한 신적 본질에 강조를 두어 신적 본질에 삼위에 공통이어서 동본질면에서 보면 하나(unum)이나, 그 위격들 면에서 보면 셋이 되어 세 하나님으로 보게 되는 위험이다. 여기서는 세 위격 간의 통일은 의지에 의한 연합이라고 할 것이다. 이 논의는 삼위일체 교리의 결정에 공헌을 많이 한 갑파도키아 세 신학자들이 강조를 신의 본질(ούσία)에 두어 세위격이 동본질, 본성을 공유하므로 세 위격의 동일을 강조하기 위해서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ωρησις) 곧 연합을 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삼위일체관은 많은 사람의 귀에 삼신론으로 들렸다. 현금 한국 신학계에서도 이런 신의 본질의 동일로 인한 의지의 일치를 삼위일체로 보는 삼신론의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서 진보하여 동일 신적본질 unum이지, 한 하나님 unus가 아니라고 한다. 즉 종말상태에서 한 하나님이 아니라 세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사단적 진술에까지 이르렀다. 이 진술에 이르기 위해 삼위일체의 접근을 삼위격에서 해야하고 동일본질에서가 아니라고 어떤자는 말한다. 또 호모우시오스(όυοουσιος) 곧 동일본질의 해석에 있어서 본질의 하나와 본질 동일로 이해하는 데 동일본질에 강조를 두고 한 본질을 말하지 않으면 양태론이 된다. 둘다 강력히 피해야 할 이단들이다.102 또한 한 본체 una substantia 뿐 아니라 한 하나님 unus Deus를 말하지 않으면 삼신론의 오류에 빠지기 십상이다.103 그러므로 한 본질 unum(동일본질)이고 unus(한 하나님)가 아니라고 하고 여기서 추론하여 종말에서 세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하는 것은 반기독교적인 진술이다. 그러므로 한 신적 본질과 삼위 간의 관계는 아직도 바르게 설명하기 어려워도, 한 동일 신적 본질 안에 삼위가 동참함을 말하는 정도에서 정통적으로 한 동일본성에 근거한 세 위격이 한 하나님임을 바르게 강조해야 한다.104
2. 삼위일체론에 관한 개혁주의 입장
본인은 앞에서 많은 지면을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이단들의 사설들과 개혁주의의 모체가 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과 칼빈의 가르침을 살펴보면서 삼위일체론의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섭렵하면서 서 철원교수의 주장을 통하여 최근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개혁주의적인 삼위일체론을 살펴보아야 하는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의 가르침이 이미 개혁주의 정통에 서있는 뿌리이며 줄기이다. 우리는 이제 성경의 증거를 살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칼빈이 말한대로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언어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맥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성경의 직접적인 말씀은 더욱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인의 은사이신 나 용화교수께서는 개혁주의에 관하여 논하면서 칼빈주의가 바로 개혁신학이고, 복음주의이며 정통신학이자 청교도적 신학이고 보수주의라고 하면서105 개혁신학의 첫째 원리를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인식하여 성경의 절대 권위에 순복하고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절대 규범으로 삼는데 있다. 개혁신학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말하며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억측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성경보다 앞세우지 않는다고 하였다.10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개혁주의적인 삼위일체론을 살펴보기 위해서 성경의 증거를 살펴봄이 마땅하다 하겠다.
2.1. 성경의 증거
본 논자는 서론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는 없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이 확고하게 가르치고 있는 진리라는 말을 하였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교유한 이름들만이 아니라 ‘신적 본질의 통일성 내에 구별이 있음’을 시사하는 그의 위격의 이름들을 알릴 때 일정한 진전이 있었음을 발견케 된다. 삼위일체에 관한 계시는 구약성경에서 시작되었으나 신약성경에서 더 명확하게 계시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에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몇 가지 내용으로 요약하여 살펴보자.
첫째, 삼위(三位)로107 존재하시며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한 분 이외에는 없다.
신적 실유 안에는 구분 할 수 없는 오직 하나의 ‘본질’이108 있다. 즉 하나님의 속성은 오직 한 분의 신적 실유가 계시다는 것, 즉 오직 한 분만이 존재하실 수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은 용어의 어떤 의미로도 복합하거나 분할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109 성경은 여러 구절들에서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이 계심을 가르치고 있다.(왕상 8:60; 고전 8:6; 딤전 6:15).
둘째, 한 분 하나님께서는 세 위격들로 구별되신다.
성경에서 삼위일체를 논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복수성에 주목하여야 한다. 복수성은 하나님께서 친히 복수형태로 자신을 말씀하시는 구절들 속에서 보여지는 데, 이는 하나님 안에 위격들의 구별을 내포하고있는 것이다.110 이것에 대한 한 증거는 창 1:26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또 다른 예는 창 11:7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세 번째는 예는 사 6:8이다.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다른 구절들 속에서는 “여호와의 사자”로 불리는 존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동일시되거나 또 한편으로는 그와 구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읽게 된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 16:7, 10, 13). 하갈은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하나님을 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롯에게 나타난 세 사자의 경우는 이상하기까지 하다. 사자들은 때로는 셋이기도 한 것 같으며, 때로는 하나인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그들이 말할 때는, 우리가 들은대로, 롯과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분은 주님이신 것이다(창 18장).또한 위격들의 구별은 말씀이나 하나님의 지혜가 인격화되는 구절들(tl 33:4, 6; 잠 6:7; 비교. 히 1:8, 9)속에서도 발견된다. 다른 한 경우에서는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자로, 메시야(성자)와 성령을 둘 다 언급하거나, 혹은 메시야를 말씀하시는 자로, 하나님과 성령을 둘 다 언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사 48:16; 61:1; 63:9,10).111 이러한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는 한 분이신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성으로 나타내시면서 삼위일체에 관한 진리를 점진적으로 밝히고 계신 듯이 보인다.112
둘째, 여호와는 독생자를 낳으셨으며 그 아들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다.
시 2:7에는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했다. 여기에서 “오늘날”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영원현재로서, 그것은 아버지에 의한 아들의 영원한 출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아들은 곧 하나님이라 불리셨고(요 1:1),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호칭되었을 뿐만아니라(요 9:35; 롬 1:4), 독생자(요 3:16, 18)와 그의 맏아들(히 1:6)이라고도 호칭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바”되기 이전에도 아들이셨다. 왜냐하면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고 했으며, 또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사 9:6)이라고 호칭되었기 때문이다.113 그리고 놀랄만한 구절은 잠 30:4이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본 잠언의 저자는 아버지의 이름, 여호와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의 아들의 이름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보내주신 ‘독생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들로서 오신 분이다.114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의 많은 구절들 속에서 가르쳐주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1-2)라는 구절을 읽을 수 있는데 이 구절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음은 요 1:14로 보아 분명하다. 14절에서 1절의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에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었다“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주장하듯, 예수가 성육신 중에 하나님이 되기를 멈추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일시적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영광과 권위를 옆으로 제쳐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가 지상에 계실 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라고 말씀하셨는 데 이러한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의 아들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임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셋째, 성령은 하나님과 구별되고 있다.
창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으며 2절에서는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했다. 창 6:3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고 했다. 이러한 성경 말씀들은 분명히 하나님(성부)과 성령이 구별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115 그리고 성령은 영원하시고(히 9:14), 전지하시고(고전 2:10-11), 편재하시며(시 139:7-10), 전능(눅 1:35)하신 속성들을 가지고 계신분으로서 성부, 성자와 동일본질이시다.
넷째, 삼위는 각기 신성한 존재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상이한 점을 가지고 서로에게 연관되어 있다.
성경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며(막 9:37; 마 10:40; 갈 4:4), 아버지와 아들, 즉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보내게 된다(요 14:26; 15:26; 16:7)고 말한다. 우리는 삼위일체 속에 하나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단지 성부는 어떤 다른 인격(위격)에게서 태어나시거나 생기지 않으시며,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태어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부터 생기신다. 성경은 분명히 이 순서를 소위 구별적 전치사들인 에크(έκ, ~로부터)와 디아(διά,~을 통하여) 엔(έν, ~안에)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전치사들은 만물들이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 있다는 개념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실체에 있어서 성부는 첫째요, 성자는 둘째요, 성령은 셋째이다. 그러나 이 순서는 어느 인격이 시간이나 본질적 위엄에서 더 앞선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원의 논리적인 순서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116이런식으로 연관되어 있는 하나님의 삼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 말하듯(Q6) “본질적으로 같으며, 능력과 영광에 있어 동등하다”
다섯째, 삼위의 하나님은 함께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삼위일체적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일을 하신다. 예컨대 성부 하나님은 창세전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선택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그들을 인치신다(엡 1:4, 13). 창조 사역에 있어서는 성부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시는가 하면(창 1:1, 3; 히 11: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었으며(요 1:13; 골 1:16), 성령으로 또한 만물과 인간이 창조되었다(욥 26:13; 33:4; 시 104:30).117 이러한 사역들은 삼위가 구별되는 사역들로서 본래적으로 창조는 성부에게, 구속은 성자에게, 성화는 성령에게 돌려지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삼위는 서로 협력하여 함께 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2.2. 삼위의 각론(各論)
우리들이 이미 앞에서 살펴 본 삼위일체 교리의 논쟁은 대부분 성자에 관한 논쟁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성자에 관한 언급도 그 만큼 많아졌다. 그리하여 본 필자는 각론을 논함에 있어서는 제 3 위(位)이신 성령 하나님에 관하여 좀더 저세한 논의를 하고자 한다.
2.2.1. 성부
2.2.1.1. 아버지되심
성부의 위격적 속성은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낳아지지 않으심(Agennesia)이고 적극적으로는 아버지되심(paternity or Fatherhood)인데,118 본 논자는 여기서 후자의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부에 대하여 ‘부(父)’의 칭호가 적용됨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주 만물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즉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의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버지로 불리어졌다(고전 8:6; 엡 3:14-15; 약 1:17). 둘째,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정적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신 14:1; 32:6; 사 1:2; 63:16; 호 11:1; 렘 3:4), 특별히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 다”(신 32:6)하셨는데, 이것은 구약에 있어거 선민의 아버지가 됨을 가르침이다.119 셋째,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 이스라엘 중에 참으로 아버지 하나님에게 효도를 행하는 자가 적었으므로 보다 더 제한된 의미의 하나님의 부격관(父格觀)이 생겼다. 하나님은 그 국민 전체보다는 특별히 그들 중에 하나님을 참으로 공경하는 사람들의 아버지이셨다(시 103:13; 말 3:17). 그리하여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리하여 양자의 영을 받게 되었다(요 1:12. 엡 1:5; 롬 8:15; 갈 4:5). 이렇게 하나님이 영적 자녀를 생산하신다는 사실에 비추어 ‘아버지’라는 명칭은 성도의 아버지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사용되었다.120 넷째, 하나님의 제 1 위(位)는 제 2 위(位)인 성자의 아버지가 되신다.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신학적 계시는 제 1 위(位)이신 성부께서 제 2 위(位)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말씀이다.121 이것은 하나님의 본래적인 부격(父格)이니 제 1 위(位)의 제 2 위(位)에 향한 적극적 관계를 함의한다. 하나님은 참되고 완전한 의미의 아버지이시다. 사람과 달리 하나님은 유독히, 또는 완전히 아버지이시다. 그는 혼자서 아버지이시며, 성질에 의한 아버지이시며, 영원부터 처음도 없이 끝도 없이 아버지이시다. 성부의 성자에 대한 이 관계 때문에, 또는 성부의 성령에 대한 관계 때문에122 제 1 위(位)는 때때로 “스스로 난, 스스로 생성된, 창조되지 않은, 시작이 없는, 자기 기원적인, 자기 존재의 근거인, 자원인적(自原因的)인분”이라고도 불리우며, 성자와 성령 그리고 신성 전체의 ‘시작, 원인, 뿌리, 원천, 기원, 머리’ 등으로도 불리운다. 이에 근거하여 Bavinck도 말하기를 “하나님은 아버지로 높여드리기를 거부하는 이는 그를 창조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이보다 더 큰 무례를 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23
2.2.1.2. 성부의 사역
하나님의 하시는 사역들 가운데는 특별히 어느 한 위(位)에 돌려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니 성부에게 돌려지는 사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향적 사역(혹은 본체적 사역)이다.
성부의 위적 특성은 첫째로, 그의 내향적 사역에 있으니 소극적으로 말하면, 그는 발생, 또는 파송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적극적으로 말하면, 성자의 발생과 성령의 파송이다. 성령의 파송은 성자의 사역도 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성부의 독특한 내향적 사역은 능동적으로 성자를 영원히 발생하심이다. 성자의 영원발생은 성부의 의지의 선택에 의하지 않고 성질의 필연에 의하여 성자의 위(位)를 발생하시되, 그에게 신격의 전 실체를 전달하시어 성자로 하여금 성부의 정확한 형상으로 계시면서 영원히 계속하게 하시는 성부가 영원한 위적 행위이다.
둘째, 외향적 사역(혹은 경륜적 사역 또는 경세적 사역)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포함된 구속의 계획(엡 1:9; 3:11; 딤후 1:9)은 선택을 포함하였고, 선택은 구원얻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을 뿐(요 17:6,9; 롬 8:29; 엡 1:4; 벧전 1:2)아니라, 또한 구속은 성자를 통하여 한 것이다(시 2:7-9; 40:7-9; 벧전 1:20; 2:4; 롬 8:29).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는 창시자로 되셨다.124 즉 구속은 삼위의 사역으로 계획은 성부, 성취는 성자, 적용은 성령에게 돌려진다. 그리고 성부께서는 구속의 중보자(仲保者)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시었다(벧전 1:20; 2:4; 요 6:37; 17:4-7) 그리고 창조와 섭리는 삼위에게 속한 것일지라도 특히 성부의 사역으로 돌려진다. 이 일에 있어서 성부는 창시자요 선발자라고 하면, 그 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되며, 성령은 주로 완성하시는 역사를 하신다고 볼 수 있다(고전 8:6; 엡 1:9). 또한 성부는 구원의 계획자일 뿐만 아니라 구원 적용에서 부르시는 자로, 또 믿는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자로 나타나신다(고전 1:9; 갈 1:15-16). 칭의에 있어서, 성자는 칭의의 근거가 되는 공로를 마련하신 분이며, 성령은 칭의의 조건이 되는 믿음을 일으킨 분이며, 그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분은 성부이시다.
2.2.2. 성자
2.2.2.1. ‘아들’의 의미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시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졌다.125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또한 그가 하나님의 부친적 행위에 의하여 출생되었다는 사실의 견지에서 그에게 주어진다. 그의 인성편으로 성령의 초자연적 공작에 의하여 출생되었으므로, 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며(눅 1:32,35), 또한 직위적, 즉 메시야적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다(마 26:63; 요 1:49; 11:27). 그리고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제 2 위(位)로서의 의미에서 또한 ‘아들’이라고 불리워졌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중보적 지위와 사역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된 것이 분명하다(요 1:14; 마 28:19-20; 고전 1:9).126
2.2.2.2. 성자의 영원한 나심
성자는 영원 자존자(永遠自尊者)이므로 성자의 나심은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고 삼위일체의 특성으로부터 나온 개념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나심을 가리켜 영원한 나심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언급하면 성자의 나심(발생)은 성부의 필연적이며 완전히 자연적인 행위이다. 이것은 성자의 발생이 결코 성부의의지와 관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자의 발생은 성부의 필연적 의지의 행동이며, 그것은 단순히 그의 동시 발생적 의지(concomitant will)가 그 출생을 완전히 기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성자릐 발생은 성부의 영원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자의 발생이 아주 먼 과거에 완성된 행동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발생이 무시간적(timeless) 행위, 즉 영원한 현재의 행위, 항상 계속하지만 언제나 완성된 행위임을 의미한다. 성자의 발생의 영원성은 하나님의 영원성으로부터 유래할 뿐만 아니라, 신적 불변성과 성자의 참된 신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밖에도 이 영원성은 성자의 선재성(pre-existence)이나 성부와 동등성(equality)을 라르치는 모든 성경구절들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미 5:2; 요 1:14, 18; 3:16; 5:17, 18, 30, 36; 행 13:33; 골 1:16; 히 1:3).127
2.2.2.3. 성자의 신성
성경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신성을 표현하는가 하면 하나님에게만 있을 수 있는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돌려졌다. 즉 그는 영원적 존재(요 1:2-3; 사 9:6; 빌 3:21; 계 1:8)이시며, 편재(마 18:20; 요 3:13)하시며, 전능(사 9:6; 빌 3:21; 계 1:8)하시며, 불변하신분(히 1:10-12; 13:8)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사역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돌려졌으니. 즉 창조(요 1:3; 골 1:16; 히 1:2), 섭리(눅 10:22; 요 3:55; 엡 1:22), 사죄(마 9:2-7; 막 2:7-10; 골 3:13), 심판(요 5:4) 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적 영광을 돌리고(요 5:22-23; 14:1; 고전 14:19; 소후 13:13), 기도와 예배를 그에게 드림이 마땅하다(요 14:14; 눅 24:51-52; 행 7:59; 히 1:6).
2.2.3. 성령
2.2.3.1. 성령의 의미
성령이라는 용어의 히브리 어원은 ‘루아흐(חור)’이고, 헬라어로는 ‘프뉴마 (πνεΰμα)’인데, 이 두 말은 다 라틴어 ‘스피루투스(spiritus)’와 같이 ‘호흡’, ‘바람’을 의미한다. 영어의 스피맅(spirit)은 라틴어 동사인 스피로(spiro : 숨쉬다)에서 온 스피리투스(spiritus : 숨, 바람, 공기, 생명, 혼)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חור)는 완전히 유추적인 용법을 가지고 있다. 그 본래의 의미는 ‘바람’, ‘움직이는 공기’(창 8:1)이다. 그다음에 ‘호흡’, ‘생명의 호흡’(창 6:17; 욥 17:1)이고, 셋째로는 ‘동물의 혼’, 사람과 돌물들 안에 있는 ‘생명적 원리’(삼상 30:12), 넷째로, ‘사람의 이성적인 영혼’(창 41:8)이다. 그러므로 비유적으로 ‘성품이나 기질’(민 5:14)을, 그리고 다섯째로 ‘여호와의 영’(창 1:2; 시 51:11))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πνεΰμα)도 동일한 어법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프네오(πνέω : 숨쉬다, 불다)에서 인출되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호흡(계 11:11), 둘째, 움직이는 공기(요 3:8), 셋째, 생명적 원리(마 27:50), 그리고 이성적 영혼(마 10:1; 히 1:14; 12:23)으로 나타나며, 또한 하나님의 본체의 속성으로써 나타나며(요 4:24), 하나님의 영, 혹은 주의 영, 성령으로 불리우는 삼위일체의 제 3 인격에 대한 인격적 명칭으로 언급되고 있다.(행 16:6-7; 롬 8:9; 고후 3:17; 갈 4:6; 빌 1:19; 벧전 1:11).128
2.2.3.2. 성령에게 붙여진 명칭과 특징
삼위일체 가운데 제 3 위(位)의 성령을 ‘영’이라고 칭함은 제 1 위(位) 성부, 제 2 위(位) 성자, 제 3 위(位)는 영으로 그 위적 관계를 지시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으며(요 4:24), ‘성령’이라 칭함은 성령은 속성의 외적 특성이 아니고 성질의 특성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그가 전 우주에 성(聖)의 조성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성과 성화사역의 목적과 영광을 도러내며 예수를 성자로 계시하신 것 때문에 ‘성령’이라 칭한다(롬 11:36; 고전 10:31)129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라 칭함은 그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고전 2:11), 성부로부터 발출하여 그와 동질적인 영이시라는 친밀한 위적 관계(요 15:26)를 표현하며,130 ‘그리스도의 영’이라 칭함은 ‘아들의 영’, ‘하나님의 영’들은 삼위를 지시하는 명칭으로 사용(갈 4:6; 롬 8:9; 벧전 1:11)되고, ‘그리스도의 영’은 직무적인 위격을 해속헤 준다.
2.2.3.3. 성령의 인격성
성령의 인격성을 초대 교회에는 단일신론파가 부정했고, 종교개혁시에는 소시너스파가 부정했으며, 후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인 슐라이허마허와 릿츌 등의 일위실론파가 부정했다. 그러나 성령은 어떤 영향력이나 덕의 세력, 정신 등이 아니라 실존의 인격성을 갖춘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의 인격성에 대하여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다. 성령의 활동과 사역은 모두 인격적 활동들이다. 성령의 활동 중 이지적(理智的) 속성을 나타낸 성구는 요 14:26; 15:26; 롬 8:16을 들 수 있고, 감정의 속성을 제시하는 대표적 성구는 사 63:10과 엡 4:30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의지(意志)의 인격성을 나타내고 있는 성구인 행 16:17; 고전 12:11 등에서 성령의 인격성을 대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살펴 본대로 성령은 인격적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으로 그의 능력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즉 성령의 존재와 사역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131
2.2.3.4. 성령의 신성과 사역
성령이 삼위일체 중 한 위로서 완전한 신성을 가지심은, 성자의 신성과 유사한 방법으로 증명된다. 즉 그는 하나님의 명칭들, 속성들, 사역들을 가지시며, 또 예배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성령에게 돌려지는 신적 명칭들은 여호와의 이름이 그에게 적용되었으며(출 17:7; 삼하 23:2; 사 6:9; 렘 31:31; 행 28:25; 히 3:9; 10:15), ‘하나님’이란 이름이 그에게 돌려졌다.(행 5:3-4; 고전 3:16; 6:19; 딤후 3:16; 벧후 1:21), 그리고 성령에게도 신적 속성들이 돌려졌다. 즉 영원(히 9:14), 편재(시 139:7-10), 전지(사 40:13-14; 롬 11:34; 고전 2:10-11), 전능(눅 1:35; 롬 8:11; 15:19; 고전 12:11) 등이며, 그의 신적 사역은 창조(창 1:2; 욥 26:13; 33:4; 시 33:6), 섭리적 혁신(시 104:30), 중생(요 3:5-6; 딛 3:5), 죽은자 가운데서 성자를 일으키시며 마지막 날에 성도들을 일으켜 그리스도의 나라로 인도하심(롬 8:11) 등과132 성경에 영감을 주시고(고전 2:13; 벧후 1:21), 교회를 형성하시고 성장시키시며 도한 새생명의 원리로서 교회 안에 거하신다(엡 1:22, 23; 2:22; 고전 3:16; 12:4 이하).133 그러므로 성령은 성도들의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
2.2.3.5. 성령의 영원한 나오심(삼위와의 관계)
성령께서 다른 위(位)들과 갖는 관계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으니, 곧 나오심과 밀접이다. ‘나오심(procession)’이란,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주로 성령이 성부, 성자로부터 오심을 말하는 요 15:26과 성령이 또한 그리스도의 영 또는 아들의 영이라고 호칭되고(롬 8:9; 갈 4:6), 또 그리스도의 파송한 바 되시는 사실에 기초한다.134 또한 성령은 다른 두 위(位)로부터 나오시기 때문에 그 두 위(位)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계신다. 이 사실은 성령을 가리켜 ‘나의 신’(창 6:3), ‘하나님의영’(고전 2:11), ‘주의 영’(고후 3:17), ‘그리스도의 영’(롬 8:9)이라고 호칭한데서 알 수 있다. 성령이 성부, 성자와 밀접함은 마치 인간과 그 영혼의 밀접함 같이 묘사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전 2:10-11). 또 사역의 양식에서도 주(그리스도)가 영(성령)과 동일시되었다.135 그리고 오순절날에 성령이 교회로 파송되셨던 사역은, 성령의 성부와 성자와의 하나 됨에 근거하고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의 지상 사역을 행하시는 일, 즉 성자가 행하셨던과 같이 가르치고, 선포하고, 증명하고,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 보혜사)로 오셨다.136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유일하신 하나님은 삼위로서 존재하시고 동일한 속성을 소유하고 계신 삼위일체의 각 위(位)는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는 삼위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비공유적속성과137 공유적 속성을138 분할이나, 감소없이 동일하게 본질로 지니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스런 속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충족하심과 풍성하심을 알게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본래적으로 충만하심과 풍성하심이 삼위 간에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삼위의 하나님의 신비스런 관계를 깨닫게 될 때에 우리들의 삶도 풍성해지고,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인139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2.3.6. 현대 한국교회의 성령이해
과거 초대 교회의 중심적 신학적 관심사가 삼위일체와 기독론이었고, 슐라이에르마허 이후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중심적 관심사도 신론과 기독론이었다. 그런데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헤겔의 역사주의의 영향으로 하나님을 역사와 인간 안에 내재하는 ‘역사 신’ 또는 ‘인간 신’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0년 이후 현대 교회는 새로운 신학적 관심사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성령론적 관심사이었다. 그것은 신학적 중심적 관심사인 신 이해의 한 형태로 나타난 본래적 신학적 관심사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가 추구한 새로운 성령 이해가 한 편으로는 보편주의적 세계 정신 또는 인간 정신의 모습으로, 다른 한 편으로는 오순절파의 은사 현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보게 되는 데,140 근래에 와서 학자들간의 성령론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데 그 중에 특히 성령의 나오심에 관한 차 영배교수의 가르침은 한국교회에 갈등을 초래케 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인은 여기서 간단하게나마 그의 주장을 살펴보고, 그의 문제점을 논하면서 바른 성령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차 영배교수는 “오순절 성령강림은 단회적 구속을 위한 역사적 사건, 곧 ‘eventum historicum salutis’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구원의 서정, 곧 ‘ordo salutis’에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141 그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음 9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이 그때의 성도들로부터 영원히 떠나시지 않기 때문에, 다른 성도들에게는 다시 오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역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42 둘째, 성령에 관한 보편적인 약속과 또 성도들 각자에게 실제로 주어진 것을 볼 때 오순절 성령 강림이 계속됨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한다. 요엘 선지의 예언도 모든 육체를 겨냥하여 남종과 여종, 늙은이와 젊은이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그 보편성을 강조했고(욜 2:28-29; 행 2:3, 17-18), 행 2:39에서 베드로도 성령은사의 보편성을 강조한 것은 성령강림이 계속됨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143 셋째,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 속하기 때문에 단회적인 구원의 사건이 될 수 없다고 한다.144 오순절 성령강림이 구원의 서정에 속한 이유는 “성령의 세례, 권능의 임재, 충만함을 입은 일들”이 일어나고145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첫 열매라고 부르는 것과 오순절 성령강림을 ‘선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예수님의 완성된 구속 사건에 포함되지 않고 그 구속사건의 보상임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46 넷째, 오순절 성령의 사역은 첫째로 성화의 사역이었기 때문에 이 성화의 사역을 위해서는 계속 성령이 오셔야 한다고 주장한다.147 다섯째,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권능의 성령이 계속해서 임할 것을 미리 보시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한다.148 여섯째, 오순절 때 성령을 충만히 받았고 또 충만히 받으라는 성경의 명령들은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과 동질의 성령이 계속해서 임할 것을 가르쳐 준다고 주장한다.149 일곱째,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는 교리는 성령이 오순절에만 오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오실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150 여덟째, 그리스도는 성령을 주시는 분인데 이 일을 단회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시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이 오늘도 똑같이 임하신다고 한다.151 아홉째,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영의 상태(sastus gloriae)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오순절 성령과 본질적으로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영광의 성령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고 주장한다.152
차 영배교수의 이러한 주장들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는 교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라고 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성령의 영원한 나오심’의 교리는 성령강림의 영속성을 증거하고 있다. Filioque에만 주의를 기울이면서 “항상 계속해서 나오신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성령의 영원한 발출(proessio aeterma)는 예수께서 오순절에 임하실 보혜사 성령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하신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요 15:26). 에크포류에타이(’εκπορυεταί. 나오다)가 현재형이므로 계속 나오심을 증거하여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조는 ‘영원히’(eternally)란 말을 덧붙였고 현재진행형으로 처리했다. 따라서 이 ‘나오다’(procedens)는 단순히 삼위일체 내의 영원한 ‘나오심’(processio) 만을 말한 것이 아니고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계속하여 하늘로부터 성부와 성자에게서, 혹은 성부에게서 성자로 말미암아 나오시되, 계속 진행하여 나오신다는 것, 곧 그 반복이 뒤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53
우리는 차 영배교수의 이러한 주장에는 동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적인 성격과 계속적인 성격에 대한 차 영배교수의 견해를 볼 때 논리의 모순과 애매성을 부인할 수 없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창조 때도 그리스도의 성육신 때도 없었던 전무후무한 독특한 성령의 사건이라고 하면서154 또한 동시에 오순절 성령강림은 오늘도 오순절 때와 동질의 성령이 계속해서 임하시는 연속적인 사건이라고 한다.155 만약 오늘도 오순절 때와 똑같은 동질의 성령이 계속하는 연속적 사건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전무후무한 독특한 사건이라고 하는지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를 보여준다.156
차 영배교수는 오순절의 역사가 오늘날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하면서 오순절의 반복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오순절파의 주장으로서 이 또한 잘못된 주장이다.
차 교수와 같은 주장을 하는 오순절파는 사마리아인들의 개종. 요한 제자들의 개종 사건에서 오순절의 반복을 주장한다.157 또 현금 오순절파의 부흥운동에서 성령 받음을 오순절의 반복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받은 성령이나. 지금 우리가 받는 성령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한 번 파송되어 온 후 교회와 함께 영구히 계시지(요 14:16), 하늘로 가셨다가 청구하면 또 오시는 것이 아니다. 또 신자들에게 오신 성령도 한 번 오시면 영구히 계시지 떠나가셨다가 또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이방신들의 세계에나 있는 것이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3천명에게로 거처를 확보하실 때(행 2:41) 하늘에서 다시 파송되어 오신 것이 아니다. 당일에 오셨던 성령이 많은 무리가 예수 믿어 성령 받을 때 다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다.158 또한 오순절 후 며칠 내에 5천명에게로 성령이 오셨을 때도(행 4:4) 성령이 하늘에서 다시 오신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성령이 다시 오실려면 이전에 강림했던 자들에게서 성령이 철수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암시는 성경에 전혀 없다. 이 외에도 사마리아인들이 성령 받은 것도(행 8:17),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도 동일하며(행 9:17), 고넬료 가정과 로마인들이 개종하여 성령을 받을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4)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브라함 카이퍼는 좀 달리 이해하였다. 성령이 교회에 오셨지만 유대인들에게 오실 때는 저수지에서 한 수도관을 통해 물이 공급되어 그들이 물에 잠기고,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오실 때는 또 다른 수도관을 통해 물이 공급되어 그물에 잠기는 방식으로 성령이 두 번 부어진 것으로 설명한다.159 카이퍼의 이해는 바르지 못하다.
첫 번째 오순절에 성령 부어짐은 최초의 것이고 두 번째는 교회의 이방인 부분을 보충하는 부어짐이 있었는데 둘다 동종류이지만 특성에 있어서는 예리하게 구분된다고 본 것은 합당치 않다. 또한 요 15:26의 성령의 나오심을 의미하는 에크포류에타이(’εκπορυεταί. 나오다)가 현재형으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진행형으로 보는 것은 성경의 문맥상이나 헬라어의 문법상으로도 잘못된 해석이다. 먼저 성경의 문맥상으로 볼 때, 요 15:26은 14:6,17,26에서 약속한 것, 즉 보혜사 성령의 오심을 제자들에게 상기시켜 주면서 제자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보혜사를 보내 실 것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보내어질 것이다. 비록 강조점은 다르나 근본적으로 동일한 말씀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리라”(요 14: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 14:26). 여기 15:26은 성령은 보내시는 아들의 행동과 이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발현된 사실을 강조한다. 성령의 보내심(πέμψω)은 미래의 일이다. 오순절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펨포(πέμψω-보낼 것이다)라는 미래시제가 사용되었고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에크포류에타이(’εκπορυεταί. 나오다)는 현재시제이다. 이 단어를 문법적으로 분해를 해보면 직설법 현재 중간태(수동태 디포넌트)인데 이 단어는 현재 직설법의 용례 중에160 미래적 현재로서 이것은 미래에 있을 사건을 현재에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는 용례 중에 하나이다.161 이러한 상황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에크포류에타이(’εκπορυεταί. 나오다)는 진행형이 아니라 미래, 즉 오순절에 오시게 될 보혜사 성령의 약속을 말씀하시면서 그 사건, 즉 성령의 나오심은 영원한 나오심으로서 완료형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처음 오순절시 성령 강림은 그 뒤 성령의 오심과는 그 특성이 다르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성령이 인류에게 처음 오시는 종말론적 사건이고, 그 다음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성령 받은 것은 보충적 부어짐이나 반복적 강림이 아니라, 성령이 그의 주거를 확장하심이기 때문이다. 오순절은 결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162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은 개인이나 집단의 경험의 한 모델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성령의 오순절 사건은 반복될 수 없는,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임을 강조해야 한다.
결 론
1. 연구결과
난해한 삼위일체론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여러 가지 비유(①수증기-물-어름 ② 태양-빛-열)를 통하여 이 교리를 해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교리를 이러한 비유로 통하여 해석하려고 하는 노력은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오히려 잘못 오해하여 오류를 범하기 쉽고, 본 교리의 성격상 진리 손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록 삼위일체론에 관하여서 하나님의 계시를 바탕으로 하여 의미있는 말을 할 수 있다고는 해도 삼위일체는 여전히 불가해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삼위 앞에 마땅히 겸손하여야 한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강연자인 다니엘 웹스터에게 “어떻게 뛰어난 지력을 지닌 사람이 셋과 하나가 같은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삼위일체를 믿을 수 없다고 하자, 그때에 웹스터는 “나는 천국의 수학을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웹스터의 이 대답은 피조물의 겸손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삼위일체 교리는 3이 1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 논자는 서론에서 “단일한 신성에 삼위가 계시니 곧 그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라는 논지를 가지고 본 논문을 전개해 나날 것을 밝힌바 있다. 그리하여 본인은 본 논지를 증명하기 위하여 ‘1’에서는 삼위일체론의 역사적인 고찰을 ‘2’에서는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살펴보았는 데 이에 대하여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삼위일체에 관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적 교부들은 삼위일체 신론이 아직 완전하게 논의되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세례와 같은 문제에서는 삼위일체적 신조를 주장하였으나 아직 삼위일체에 관한 명료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고, 이 시기의 교부들에게 있어서는 이일신론적(二一神論的)인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에 교회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흔적은 발견할 수 있으나 엄격한 의미의 삼위일체 교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변증가들은 기독교에 대한 변증을 위해 기독교 신학을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하나님과 로고스의 관계 속에서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성자를 성부에 종속시킴으로 해서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에 대한 개념을 갖지 못하였다.
2세기말이 되면서 군주신론이 등장하여 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그것은 역동적 군주신론과 양태론적 군주신론으로서 이 둘은 다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으로서 전자는, 예수의 신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던 비인격적 권능이고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였으며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이 아들로 삼았다(양자설)는 설로서, 예수는 하나님보다 열등하며 그는 단지 우리보다 뛰어난 분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은 종속주의 아리우스주의, 소시니안주의, 유니테리안주의로 약간 변형된 형태로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후자는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가면을 사용하여 변장술로써 여러 모습을 지님이 가능한 것처럼,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의 모습으로 양태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고난은 가면일 뿐이고 실재는 성부게서 수난을 당하셨다는 설로서 이들의 주장은 성부고난설, 성부속성설, 사벨리안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정통주의에서 있는 학자들과 변증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삼위일체에 관한 이단들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거세지자 본 교리에 대한 교회 내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논쟁으로 인하여 그 명료성을 잃어가고 있는 듯 하였다. 그러던 중 325년 니케아에서 아리우스 논쟁, 즉 삼위일체에 관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아리우스 논쟁의 주역은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였다. 역동적 군주신론의 영향과 오리겐의 영향을 받은 아리우스는 존재의 시작이 없는 단 한 분의 출생되지 않은, 기원이 없으신 한 분만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등함과 종속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타나시우스는 성부와 성자의 똑같은 신적 본체를 주장하였으며, 하나님 안의 세 실재를 인식하였다. 그는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ομοοΰσιος)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쟁으로 열린 니케아 회의는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니케아 신조를 만들어 내어 삼위일체론 형성의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후 아타나시우스의 동일본질을 더욱 발전시킨 학자가 캅파도키안의 세명의 교부들인데 바실,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동일본질과 개체 위격간의 구별을 우한 개념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본질과 본체의 구분을 하였다. 그들은 이 개념에 의해 ‘한 본질 (ο’υσία), 세 본체(‘υπόστασις)’라는 논리를 전개해 나갔으며, 위대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통일성에 강조점을 두고 삼위일체론을 전개하였는데, 그는 삼위일체 안의 세 인격이 관계성을 가지며 상호 의존하며 세 가지 존재양식을 소유한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각 위격은 신적실체 안에 있는 상관적인 삼위일체론적 구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성경의 인용과 고대 신조들을 옹호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증명하여 당시 삼위일체에 관한 이단으로서 세르베투스의 이론을 반박하였다. 칼빈은 “신은 한분으로서 스스로를 알게해 주셨으며 동시에 세 위격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쳐 주신다”는 명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우상으로부터 좀더 정확하게 자신을 구별하시기 위하여 다른 특별한 표식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시기 위하여 자신을 삼위로 계시하셨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통일성과 함께 자신이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주장하셨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삼위의 존재 양태는 구별이지 결코 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를 하나의 믿음으로 모으게 하는 세례 방법이 어떤 다른 것보다도 하나님의 유일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볼 때에 칼빈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정립하는 데 있어서 이론에만 집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여기서 명백해지며, 하나님께서는 세 개의 존재 양태를 갖고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고 칼빈은 가르쳤다.
현대의 한국적 상황을 통하여 비추어 본 교리를 생각해 보면서 본 교리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관하여 동일본질이나 위격 중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다보면 과거 이단들이 빠졌던 오류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있으니 공히 함께 강조하여야 함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본 교리에 관한 개혁주의 입장을 살펴봄에 있어서 성경적인 증거와 삼위의 각론을 살펴본 후에 성령에 관한 한국적 상황을 살펴보면서 특히 오순절 계통의 왜곡된 성령론을 살펴보면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오순절 때 일어났던 역사의 반복이나 보충적 부어짐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주거의 확장으로 보아야 함이 타당함을 논증하였다.
이상에서 삼위일체 교리 정립에 관한 역사적인 과정을 간략하게 요약하였는데, 본인은 여기서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의 형성과정이 필연적인 개혁주의로의 발전과정으로 보여진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삼위의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지금도 역사 속에서 교회와 세상을 모두 다스리고 계심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교회는 언제나 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승리하게 됨을 소망하게 된다.
2. 제언
신구약성경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살아 계신다는 많은 증거들을 근본으로 삼아 삼위일체 교리가 탄생되었으며 이 삼위일체 교리는 초대교회 때부터 현대가지 정통신앙의 중심사상이 되어 왔다. 만약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정란다면 그것은 바로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호와 증인의 말대로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는 직접적으로는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이는 성경에 계시된 내용들로 인하여 충분히 사용이 가능한 진리 표명의 단어임에 틀림이 없는 것으로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학의 왕관으로서 교의신학의 모든 부분을 총괄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63 이 교리는 기독교의 심장으로서 모든 교인들의 신앙고백 속에 살아 움직이며 교회의 예배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도가 행해지며, 모든 교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은혜로 주어진 모든 구속사역이 성부, 성자, 성령의 역사이시며,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를 섬기며, 경배한다. 이렇게 삼위일체 신앙은 우리 고백의 핵심이요 기독교를 이단과 이방의 종교로부터 표요,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의 영광이요 위로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전체의 존립과 사활이 달려 있는 문제로, 이 교리는 모든 교리의 근본이며 새 언약의 실체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전 생애를 걸고 싸운 것도 이 때문이며,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양태론적(유니테리안) 삼위일체론을 한사코 반대한 것도 이것을 양보하면 기독교교리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기독교는 우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의 고백여하에 그 존폐가 걸려있다고까지 하였다.164 우리가 삼위 하나님에 관하여 바르게 알고 믿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기초가 된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바른 이해와 신앙이 없이는 어떤 신앙의 행위도 바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월필드가 말한대로 삼위일체의 관념은 우리의 하나님 사상을 조명하며 풍부케 하고 고상케 하며 이 교리를 기초로 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독립성과 자충족성을 주장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삼위로 자신을 계시하신 의도 중에 하나가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시고 풍성하심을 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삼위일체론에 관하여’라는 대작을 모두 마친 후에 “우리가 삼위를 말하는 것은 이 말로 (하나님을) 온전히 다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도 표현되지 않고 남겨질까봐 그것을 막기 위해 말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이단이 난무하여 복잡하고, 사상의 변화가 빠르고 다양하게 일어나는 시점에서 이들에 맞서 우리가 개혁주의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많은 진리 탐구와 땀이 요구된다 하겠다.
성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진리와 생명을 소유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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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ReturnBible / 개혁신앙
글쓴이 : returnbibl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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