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지옥에 관하여 무엇이라 하는가?
이민규 교수(신약학 전공)
1. 들어가는 말
벌코프(H Berkof)나 홀튼(Wilko van Holten)의 말처럼 영원한 지옥은 많은 기독교인에게 회피하고 싶은 주제이고, 최근 코라비(Corabi)의 말처럼 철학적 변증의 도전 앞에서 윤리적으로 다루기 가장 어려운 내용 중의 하나이다. 성경에 보수적인 학자들도 지옥에 관해 분명 많은 문제를 느끼는 것은 틀림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소수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눅 12:32) 아무리 많이 잡아도 현재 기독교인은 인류 삼 분의 일이 안 되고 그중 상당수는 그저 명색만 기독교인이기도 하기에 인류 역사 전체의 구도 속에서 보면 비기독교인은 절대다수다. 이런 내용을 다룰 때 기독교인들의 입에서는 쉽사리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지금 당장 영혼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말로 상황을 합리화한다.
문제는 지옥 형벌의 무시무시함이다. 전통적인 지옥은 영원히 화형을 당하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옥에 관하여 불을 은유로 본다고 해도 고통은 현실이다. 한번 화형당하는 상태를 상상해 보라, 일 분이 천 년 같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을 백 년 이백 년, 수억 년도 모자라 영원토록 인간을 가장 극심한 고통으로 벌하실 수 있을까? 공의로운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이시다. 그렇다면 인간의 유한한 죄에 무한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내리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약속하신 공의의 실현일까? (행 12:31) 아니면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적인 잔인함인가? 혹은 지옥은 구원의 신비에 관한 또 다른 측면인가? 물론 구약에는 정의 실현을 위한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다양한 보복행위가 나오며 때론 하나님은 복수의 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나 1:2, 그러나 그는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해 아래 상상할 수 있는 어떤 형벌도 영원한 지옥 형벌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질문으로 기독교를 거부한 이 중에는 유명한 찰스 다윈이 있다. 무한하고 영원하게 징벌하는 잔인한 신을 자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간 기독교 안에서도 영원한 지옥을 받아들이기 난감한 이들이 영혼소멸설, 만인구원설, 연옥 등의 신학적인 제안을 하였다. 복음주의 성서학에서 연옥설은 성서의 근거자료가 몹시 미약하다고 평가됐으나 현재 가장 도전적인 논쟁 중의 일부는 영혼소멸설과 만인구원설의 한 종류인 제한적 징계설이다. 영혼소멸설과 제한적 징계설은 나름대로 복음주의 성서학자 사이에서도 현재 어느 정도 논쟁이 되고 있다
영혼소멸론자들은 성경에서 악인의 최후인 영원한 징벌이 바로 존재 자체의 영원한 소멸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영원한 지옥이 유한한 죄에 관한 유한한 징벌이냐, 아니면 유한한 죄에 관한 무한한 징벌인가? 혹은 무한한 징벌이란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영원하게 징벌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 스스로 당할 잔혹한 운명인가?라는 질문도 점점 그 중요성이 늘어나고 있다.
성경은 지옥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사실 성서학에서 지옥을 다루는 주류 학자들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특히, 신약은 사후에 관해 구약보다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많은 편은 아니다. 어려운 질문이지만 피하지 말고 혹시 우리가 지나친 선입견과 오해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솔직하고 진실하게 성경에 나타난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자. 원어는 비전공자들을 위해 처음에만 표기하고 이후부터는 한글로 표기할 것이다.
2. 본론
1. 지옥이란?
지옥이 불신자들이 영원히 불타면서도 소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고통만 당하는 곳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중세시대에서 처음 신학화 되었다. 동방의 초대교회에서는 500년 동안 만인구원론(Universalism)이 득세하고 있었지만, AD.160-225에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플라톤주의의 영혼불멸설을 수용하면서 “모든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에 악인에 대한 형벌도 영원하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리라”라는 마태복음 5:26을 해석하면서 영혼이 영광의 부활을 하기 위하여 세상에 있을 때 지은 죄를 정화 받아야 한다는 연옥 교리를 만들었다. 그 후 AD.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안은 저주받은 자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불태워질 것이라며 그 고통은 절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 했다. 이후 지옥의 장소에 대하여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중세시대에 어떤 이들은 불덩이인 태양 안에 있다고 믿지만 대체로 땅 밑에 여러 층과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아 왔다. 이러한 지옥에 대한 상상은 14세기 단테의 신곡에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가톨릭 안에서도 오래가지 못했다. 교황 바오로 2세는 지옥을 하나님이 죄인을 징벌하시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이 자연스럽게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장소라 했다.
2. 구약의 지옥? 스올!
먼저 구약에서 주된 관심은 사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사는 이 땅의 삶이다. 그러기에 구약에서 현대 기독교인에게 익숙한 지옥이란 개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주로 무덤, 음부로 번역된 스올이란 용어가 나오는데,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란 어렵다. 대체로 이곳은 죽은 자들의 거처다. 이 용어는 지하세계, 혹은 수메르와 바빌론의 이르칼라의 히브리 버전이다. 사후 죽은 자들이 거하는 지하세계에 대한 믿음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오직 이집트에서는 파라오 같은 최상위 계급만이 이런 운명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그는 지상을 다스리는 신이었고 그가 죽었을 때 신과 연결해주는 특별한 제의와 함께 오직 미라가 됨으로만 가능했다. 당시 히브리인들에게도 주변 근동 문화를 넘어선 죽음 이후에 대한 발전된 사상은 발견하기 어렵다. 스올은 원래 무덤(참조 사 14:11; 욥 17:13-16, 시 30:30) 혹은 죽음의 세계(호 13:14; 합 2:5; 사 28:15, 18, 28:18, 아 8:6, 시 49:14; 89:48; 잠 116:3; 잠 5:5; 왕상 2:6, 9)를 의미했다. 그러나 점차 이는 죽은 자의 영역이라는 의미로 발전하면서(사 14:9. 10; 욥 26:5-6) 모든 인간이 사후에 가야 하는 보편적 운명의 장소로 나타난다. (전 9:10)
구약의 스올은 신약의 지옥과 같은 개념은 아니다. 이곳이 악인에게 사후 징벌의 장소, 의인에게 영생의 장소라는 의미는 명확하지는 않다. 죽음은 모두에게 임하기에 이곳은 악인만 가는 장소가 아니다. (시 9:17, 31:17, 49:13-14) 이곳은 악인뿐만 아니라(민 37:5, 사 38:10, 시 39:3, 9) 의인(창 37:35, 사 38:10, 시 30:3, 9) 그 중간에 있는 자 할 것 없이 다 가야 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스올에 관한 기본적인 생각은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곳”이다.
이곳은 캄캄하고 흙먼지와(욥 17:16)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욥 17:14; 24:19-20, 사 14:11) 죽은 자는 같고 사랑, 미움 시기도 없고 상을 받을 수도 없고(전 9:5-6), 그저 의식 없이 아지랑이 같은 그림자로 침묵 속에 존재할 뿐이다. (시 6:5, 31:17, 사 28:18) 그래서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것이다. (전 9:4)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다” (전 9:10) 사후에 인격적인 존재로 살아남을 가능성의 소망 자체는 점진적인 계시를 기다리는 가운데 희미할 뿐이다. 사후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이라는 개념이 확실하지 않았기에 이곳은 의인들이라도 가기를 원치 않던 장소다. (겔 32:17-32; 시 6:5; 사 28:15) 그곳은 누구도 “주를 찬양할 수 없고 누구도 주께 감사할 수”가 없다. (시 6:5) 스올로 내려가 그 문을 지나면(사 38:10) 누구도 돌아올 수 없다고 믿었다. (욥 7:9-10, 사 38:10, 18) 물론, 부활에 관한 소망이 점진적으로 계시가 되기 시작한다. (단 12:2) 그리고 구약에서도 점점 스올의 의인들에는 미래 희망이 있다는 내용이 전개된다. (호 13:14; 시 16:10, 49:15; 욥 14:13, 삼상 2:6) 요한계시록에서 이 사상을 반영하는데 스올은 죽음이 다스리는 나라요,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까지 머무는 곳이다. (계 1:18, 20:13)
3. 헬라 문헌, 70인 역, 외경에 나타난 하데스
스올은 헬라어로 쓰인 유대 문헌에서는 하데스로 번역된다. 하데스는 헬라 문화에서는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헬라 신의 이름으로 그는 지하세계의 제우스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제우스의 형제로 묘사된다. 하데스는 당시 문헌에서 무덤, 사자의 세계, 사자, 조상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 혹은 “죽은 자의 프쉬케들”이 거하는 곳이다. 그러나 헬라 문화에서 하데스는 악인이 벌을 받는 지옥의 개념이 아니다. “프쉬케”는 오늘날 주로 개인 고유의 영혼으로 번역하지만, “죽은 자의 프쉬케”란 결코 플라톤이 주장한 개인 고유의 영혼이 아니나. “프쉬케”는 그냥 죽으면 떠나는 인간의 생명력에 가깝다. “죽은 자의 프쉬케”(생명력)는 어떤 의식도 없고 돌아올 수 없는 그곳에서 그저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영원히 잠들어 있을 뿐이다. 오디세이나 오르페우스의 신화에서처럼 죽은 자의 프쉬케를 잠시 깨울 수는 있지만, 그 또한 결국 허사로 돌아간다. 신약에서는 주로 무덤, 죽음으로 끝남을 의미한다.
70인 역과 외경에서는 스올을 하데스로 번역한다. 외경 문헌에서 인간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죽은 자를 하데스로부터의 살려낼 수도 있는 분으로 묘사한다. (Wis 16:13; Sir 48:5; Tob 132; 그리고 Wis 2:1) 여기서도 하데스는 형벌의 장소는 아니다. 하데스는 의식 없이 거하는 곳으로 이곳에서는 살아생전처럼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없다. (Sir 17:27; 41:4)
그러나 그 외 문헌에서 하데스가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라는 내용과 함께 어렴풋이나마 음부가 악인에 관한 징벌의 장소로도 등장한다. (Apoc. Zaph 10:3-14) 에녹 일서(BC 300)에서도 형벌의 장로로 음부가 소개되는데 내용은 일관성이 없다. 어떤 곳에서는 악인이 영원한 징벌을 받아(에녹1서 22:11) 의인들의 구경거리가 될 것이라 하면서(27:3), 다른 곳에서는 그들이 영원히 소멸할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91:9), 때로 이곳은 부활 때까지 머무르는 일시적인 거처로 소개된다. (Sib. Or.2:227-30; 4Ezra 4:42; Pseudo-Phoc. 112-14; b. Yebam. 17a)
4, 구약의 게헨나
게헨나는 원래 성문 바깥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장소로 히브리어 “게 벤 힌놈”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수 15:8; 18:16) 이곳은 우상 제물을 바친 곳이며 아하스가 그의 자녀를 불태운 곳이다. 이곳은 힌놈의 혹은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로 불린다. (사 66:20-24) 아하스와 므낫세 시대 몰렉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 심지어 자녀를 번제로 바친 곳이기도 하다. (대하 28:3: 33:6, 왕하 16:3) 선지자들은 이곳을 하나님의 큰 심판으로 대학살과 폐허의 장소로 묘사한다. (렘 7:30-33, 19:1-13; 32:34-35, 31:9; 66:24; 왕하 23:10; 레 18:21) 이는 우상 숭배자가 불타는 모습으로 자신을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는 형태이다. 나중에 이곳은 장례가 허용되지 않은 부정한 시체들을 버리는 곳이 되었다.
5. 유대 문헌의 게헨나
구약 이외의 문헌에서 게헨나는 주로 최후 심판의 장소로 묘사된다. 이곳은 불 혹은 흑암의 환경으로 이를 갈게 되는 곳이다. (Apoc. Ap 15:6; Sib. Or. 1:100-103, 2:292-310) 선한 이의 영혼은 새로운 몸을 받지만, 악인은 영원한 징벌을 받는다는 암시도 있다. (Josephus JW.2.163, 3:374-75, Ant18.14; Sib. Or.2:292-310)
현존하는 고대 유대 문헌 중 스올과 게헨나가 동일시되는 곳이 한번 발견된다. (b. B. Bat 79a) 의인은 게헨나에 들어가지 않으며 오직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죄인,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은 자, 여인의 말을 너무 많이 들은 자와(m,’Abot 1:5) 같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다. 이곳은 철저히 응보의 장소로 죄의 경중에 따라 징벌의 시간이 정해지지만(m. Ed. 2:10), 극악무도한 악인은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b. B. Mes. 58b) 오늘날 유대교에서 게헨나는 주로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6. 신약의 지옥
6.1. 신약에서 지옥으로 번역된 헬라어들
주로 신약에 나오는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게헨나, 하데스, 타르타로스가 있다. (벧후 2:4) 헬라 문헌에서 타르타로스는 살아 있을 때 신들을 모욕한 왕 탄탈루스와 시지푸스와 같은 자들이 영원토록 고문을 당하는 바닥이 없는 깊은 구덩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타르타로스는 범죄한 천사들에 대해 영원한 징벌을 하는 곳으로(벧후 2:4) 인간에게 적용되는 곳은 아니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게헨나와 하데스만 주로 다루고자 한다.
6.2. 게헨나
게헨나는 신약에 12구절에서 나온다. (마 5:22, 29, 30, 10:28, 18:9, 23:15, 33; 막 9:43, 45, 47, 눅 12:5, 약 3:6) 게헨나는 시체들을 태우고 태운 재를 버리는 장소로 심판에 관한 이사야의 마지막 환상이 근거한 곳이다. (사 66:24) 신약시대 이곳은 쓰레기 소각장으로 계속 불타고 있었다. 악인이 죽음 이후 받을 징벌로 불 심판은 신약에서 대체로 예수님이 자주 사용한다. 복음서에서 이 징벌이 얼마나 오래갈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6.3. 하데스
하데스는 11구절에서 나온다. (마 11:23, 16:18, 눅 10:15; 16:23; 행 227, 31; 고전 15:55, 계 1:18, 6:8, 20:13, 14, 에녹1서 22장은 하데스에 악인과 의인이 구분된 구역이 있다고 말한다) 하데스(지옥)는 교만한 가버나움에 대한 심판(마 11:23), 음부의 권세를 지닌 교회(마 16:18), 자비 없는 자와 거지 나사로의 사후 운명이 전혀 다른 상황(눅 16:23), 예수의 부활(행 2:27, 31), 그리스도인의 부활(고전 15:55, 호 13:14)과 관련하여 사용되는데 죽음의 세계다. 하데스는 계시록에 자주 등장한다. 죽음과 짝을 이루는 초자연적인 상징이며 악인을 징벌하는 곳이다. (계 1:18, 68; 20:13, 14) 계시록의 지옥에 관한 내용은 고도의 상징 언어로 묘사되기에 지옥에 대한 직접 묘사로 보기는 어렵다. 누가복음 16:13에서는 사후 징벌에 관한 장소로 하데스가 사용되는데 이런 차원에서 게헨나의 의도와 유사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서도 징벌이 얼마 동안 지속할지에 대하여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대 문헌에서는 악인이 징벌받는 곳으로 하데스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주로 게헨나로 서술되는데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데스와 게헨나의 구분은 분명하지 않다. 하데스처럼 게헨나도 몸을 가진 채로 있게 되는데 이 땅의 삶이 지속하는 동안에 죽은 자는 그곳에 가게 된다. (눅 16:27-31) 물론, 이 비유는 교훈을 위한 상징 언어로 묘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헨나와 하데스 모두 미래의 심판을 기다린다. (마 11:23; 눅 10:15, 마 5:22; 23:33) 계시록 20:14은 하데스 자체의 종말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6.4. 바울서신
바울서신에 지옥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헬라인에게 하데스란 유대적인 형벌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은 추상적으로 이방인도 이해하기 쉬운 하나님의 진노, 영원한 멸망, 파괴 및 상실로 이를 표현한다. (살후 1:9, 롬 1:18, 9:22: 빌 3:19, 살후 2:10)
6.5. 지옥 불?
불은 지옥에 대한 고통 중 일부를 묘사하는 데 공통으로 언급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지옥 불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곳에 대한 고통의 상징으로 피조 세상과 인간 경험의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멸망과 징벌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어둠,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이 적게나마 마태복음에 나온다. (마 8:12, 22:13; 25:30, 유사한 표현 계 14:10; 20:10; 21:8) 불과 어둠, 울며 이를 간다는 것 모두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지옥의 장소에 관한 사변도 무의미한 것이다. 이는 지각의 영역 밖에 있는 파멸의 우주적 객관적 양상을 지닌다. 즉, 성경에 나타난 지옥에 관한 묘사는 인간의 상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은유로 표현된 것이다.
예수가 지옥에 내려갔다는 영어 사도신경의 내용(한글 성경에는 빠져 있음)은 그가 지옥 불의 형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죽음의 권세에 넘겨져 더는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하늘에 속한 영화로운 상태도 아니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구속이 아직 완성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가 음부(지옥)에 데려간 것은 죽음의 상태로 가장 극단적인 자기 비하 사건으로 성육신의 절정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는 모든 지옥 상태까지 극복하고, 즉 승리하여 부활 승천하신 것이다.
7. 지옥에 관한 여러 견해
그간 지옥에 관한 여러 새로운 제안이 있었지만, 그중 영원한 소멸 혹은 영원한 징벌의 의미인가에 관하여는 많은 논쟁이 된다. 일부이긴 하지만 복음주의 내에서도 존 스토트(John Stott)와 같이 지옥이 영원한 소멸의 장소로 보는 이들이 있다. 영혼소멸설이 근거로 하는 주요 구절 중의 하나는 데살로니가후서 1:8-9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소멸)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러나 팩커(J. I. Packer)는 스토트의 영혼소멸설을 반대한다. 영혼소멸설을 반대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마태복음 25:46이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먼저 이 두 주장을 그들 입장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7.1 영혼소멸설의 근거
신약의 일부 본문은 “소멸한다”(마10:28)와 “불탄다”라는 이미지를 동시에 사용하여 악인들이 사후 불태워져 소멸할 것을 말한다. (마 7:19, 13:40, 42, 50, 요 15:6) 이외에도 악인의 최종적인 소멸을 암시하는 구절들로는 마 3:10, 3:12, 26:24, 빌 1:28, 살전 1:9절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묘사는 사실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사후에 문자적으로 영원한 지옥 불 가운데 영원히 징벌을 받는 곳으로 지옥은 중세에 유행했던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 성경의 사후 하나님 심판 사상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교리다. 영혼이 불멸하니 하나님의 징벌을 영원히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멸이란 성경에서 오로지 하나님에게 속한 성품으로 피조물에 부여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불멸하는 인간은 오로지 영광의 부활로 구원받는 자와 천국의 완성된 모습인 “새 하늘 새 땅”에게 허락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실 성경은 어디서도 불멸과 영혼을 연결하는 경우가 없다. “불멸하는 영혼”이란 플라톤주의 혹은 영지주의에 근거한 발상이다. 악인과 불신자의 운명인 지옥은 불과 멸망(destruction)은 소각, 소멸의 의미가 강하다. 지옥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의미는 형벌이 영원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어느 것도 반드시 소각(소멸, 멸망)될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영원’이라는 성경의 용어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많은 오해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유다서 7절에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라고 하였다.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이 지옥이란 말을 영원한 불로써 생각할 때,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가 지금까지 불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후서 2:6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라고 말한다. 소돔과 고모라를 태운 영원한 불은 그 결과로 불로 태워진 결과가 영원한 것이지, 불타는 기간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영원한 지옥 불도 이처럼 이해할 수 있다. 말라기 4:1에서,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했을 때도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 영원히 불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소멸론자들은 조건적 불멸설을 주장한다. 영원한 징벌은 헬라의 영혼 불멸설을 근거로 탄생한 것으로 성경적이지 않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멸은 오로지 하나님에게 속한 성품이다. 피조물인 우리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길은 오로지 생명의 하나님에 종속되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소멸론자들은 성경이 악인의 멸절을 가르친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유한한 죄에 대하여 무한한 징벌이란 하나님의 정의로운 속성에도 맞지 않는다고 한다. 영혼소멸설은 만인 구원론과 다르다. 영혼소멸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만이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생의 길이며, 지옥은 “영원한 잃어버린 상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됨”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서신에는 지옥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영혼소멸설에 이바지한다고 한다. 바울은 추상적으로 영원한 파멸, 파괴 및 상실로 이를 표현한다. (살후 1:9, 롬 9:22 빌 3:19, 살후 2:10 등) 따라서 바울의 견해도 불신자의 운명을 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영원한 징벌이라기보다는 영혼 소멸에 가깝다고 한다.
7.2. 유한한 죄에 대한 유한한 징벌(새로운 주장)
그러나 전부터 지옥은 영원하지만, 형벌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이들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이런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영원한 지옥에서 죄에 따라 징벌을 체험하지만, 그 기간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브루스(F. F. Bruoe)와 그린(Michael Green), 휴스(Philip E Hughes), 무디(Dale Moody), 피녹(Clark H Pinock), 스크로지(W. Graham Scroggie), 엘리스(E E Ellis)와 웬함(J. W. Waham), 퍼지(E W. Fudge), 포위스(D. Powys) 등 다양한 학자가 영원한 지옥이 반드시 영원한 징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지옥의 효력은 영원하지만, 징벌이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은 현대 주류 유대교의 주장과 비슷하다. 전통 유대교에서는 지옥 형벌이 가장 길 때 1년 정도까지라고 제한한다. 히틀러도 1년 정도면 죗값을 치르고 회개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영원한 지옥을 말할 뿐 영원한 징벌을 말하는 성경 구절은 실제로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유한한 죄에 대하여 무한한 징벌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 우주를 통치하실 때 지옥에 더는 악이 존재하지 않아야 모순이 없다는 것이다. (고전 15:28, 엡 1:10, 빌 2:10-11)
7.3. 지옥은 영원한 징벌의 장소(전통적인 견해)
지옥을 오늘날 전통적인 견해인 아무도 빠져나올 가능성이 없는 영원한 징벌의 장소로 강조한 신학적인 기원은 터툴리아누스(Tertulianus)부터이며, 이후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 계승되었다. 최근에는 브레이(G. Brey), 하몬(K. S. Hamon), 포슨(D. Pawson), 피터슨 (RA Peterson) 등이 이 주장을 한다. 마태복음 5장의 세 구절에서 하데스는 악에 대한 영원한 징벌과 관련되어 있는데(마 5:22, 39, 30), 이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고통을 주는 영구적인 징벌을 의미한다. 지옥은 영원한 징벌의 장소임이 틀림없는데, 불(마 25:41; 유 7), 징벌(마 25:46), 멸망(살후 1:9), 심판(히 6:2) 모두 영원한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 25:46은 영생과 나란히 언급되는 영벌을 나란히 언급하는데 이는 피하기 어려운 증거 본문이다. 즉, 지옥이 영원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징벌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원인이다. 여기서 죄의 크기나 유한성은 의미가 없다. 하나님과 끊어졌다는 사실이 이미 무한한 심판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근 학계에 주목받는 대중적인 신약학자인 톰 라이트(Tom Wright)는 지옥에 관한 흥미로운 주장을 하였다. 그는 루이스(C. S Lewis)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지옥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한 곳일 뿐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만, 하나님을 경배하길 거부하는 이들은 점점 철저하게 비인간화의 극치를 달리며 더는 하나님을 반영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간다. 그리하여 죽음 이후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이전에는 사람(하나님의 형상)이었으나 더는 사람이 아닌(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존재로 변한다. 이들은 자기가 경배하는 우상, 즉 탐닉하는 돈, 권력, 섹스 등의 혐오스러운 노예로 살아난다. 이 일은 사후에도 일어난다. 그가 보는 지옥은 우상숭배의 극을 체험하는 곳이다. 악인들도 사후 부활하지만 오로지 탐욕, 즉 자기 사랑과 자기 경배에 빠져 살게 된다. 지상에서도 성에 탐닉하는 사람은 더욱 성을 탐닉하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돈을 사랑하게 되어 인간의 형상이 아닌 자기가 숭배하는 돈과 섹스와 같은 우상을 닮게 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 없이 악마의 형상을 스스로 선택한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지상에서도 인간 자신의 선택으로 탐욕의 제국, 아비규환을 만들고 산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혜택을 볼 기회는 살아 있을 때뿐이다. 사후 그들에겐 오직 마귀의 형상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고 따라서 영원히 회개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에게 지옥은 “참인간 됨의 길을 저버린 사람들이 지속해서 있게 될 상태”이다.
필자가 보기엔 그의 견해는 지옥에 관한 매우 현대적인 반응이다. 현대 서구인들에게 호소력 있는 견해지만 과연 성경의 지옥이 그러한 곳인지 상당한 의문이 든다. 그의 견해는 성경적인 근거가 미약하기에 추론에 멈춘다. 사실 지옥은 정의할 수 없는 용어이다. 랍비 카츠(Rabbi Dr. Dovid Katz)에 따르면 지옥은 형이상학적인 곳이다. 이곳은 장소나 시간의 개념 안에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측정하고 평가하는 방법은 없다. 이곳은 나쁜 곳이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관한 이해를 돕는 용어다. 죄는 분명히 심판받지만, 지옥의 징벌에 대한 어떠한 물리적 서술도 은유일 뿐이다. 그러나 이곳이 어떤 곳이 아닌지는 알 수 있다. 이곳은 불타는 곳이 아니다. 지옥은 물리적 의미로 정의할 수 없다. 물리적 세계는 지옥과 같은 비물리적 세계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
3. 결론
현재 복음주의 내에서 논쟁이 되는 지옥에 관한 내용은 지옥의 존재에 관한 찬반이 아니라 지옥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Wolf)의 말처럼 포용이 있으면 배제는 불가피하기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복되고 아름다운 구원의 선물을 거부하는 자에게 배제란 불가피하다. 이 배제는 어떤 모습일까? 복음주의 내에서 지옥 패러다임 중, 영원한 지옥이란 “끝없는 징벌인가?” 아니면 “제한적인 징벌인가”에 관한 논쟁은 모두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주장을 펼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영혼소멸설이나 제한적 징벌과 같은 주장은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 부합하지 않는다. 모두 영원한 징벌에 관한 성경 구절에 걸릴 수밖에 없다. 소멸론자들은 영원이란 심판의 결과에 대한 영원성이지 결코 심판행위의 기간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에서 영원이란 용어는 심판에 관한 것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지복(至福)에 관하여도 사용된다. (마 25:46) 구원받은 자들의 끊임없는 기쁨은 악인의 끊임없는 징벌과 병행되어 있다.
영원한 형벌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다. 어려운 점은 성경의 지옥에 대한 묘사가 이 세상에 속한 경험과 언어로 인간의 경험과 상상을 넘어선 세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한 몸이 느낄 지복 상태를 상상할 수 없듯이 우리는 영원한 형벌의 의미를 알 수는 없다. 인간의 제한된 감정과 생각에 갇힌 우리가 부활 이후의 지극한 축복에 대하여 도저히 알 수가 없듯이, 우리는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또한, 영원한 심판은 복음을 향한 긍정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하기에 우리는 절대 잃어버린 자를 향한 슬픔의 눈물 없이 지옥을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이성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사후의 문제는 하나님 고유 권한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적인 논의란 한계가 있다. 사랑과 정의의 기준이 완벽하고 실수나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을 전제한다면 실수와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이 하나님의 고유권한을 판단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사후는 분명히 가장 올바른 상태일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지옥이 실재하는 사건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됨을 인식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성서학에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부재가 지옥이다. 아무튼, 전통적인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 개념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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