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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호와의 증인: 재림파와 러셀파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

하나님아들 2012. 10. 17. 16:43

이글은 "여호와 증인 정보카페"에서 발췌한글이며 '

저희가 쓴것이 아님을 밝혀둡니다 . 그냥 참고로 하시라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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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재림파와 러셀파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

  • 글쓴이: Watchman
  • 조회수 : 546
  • 07.01.28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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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현대 역사가 찰스 테이즈 러셀이 워치타워 협회를 설립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최근까지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18세기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가 러셀의 믿음의 근원이었다는 것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습니다. 증거들은 러셀의 신학체계와 연대(지복 천년기 전 그리스도 재림설)에 관한 사상이 수많은 재림교의 저술물과 교리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러셀은 재림파 교도가 되었으며 러셀이 설립한 "성서 연구" 운동은 재림파의 분파 혹은 분교가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은 러셀의 재림교 분파 혹은 분교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입니다. 이어지는 내용들에서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증거들을 간단하게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Ken Raines

 

 

 

찰스 테이즈 러셀

 

러셀은 185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앨러게이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장로교 믿음을 가지고 성장하였으며 그의 아버지와 함께 메이슨의 고위층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나중에 그는 조합교회와 연합합니다. 지옥과 다른 여러가지 주제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혼란을 느낀 그는 십대 시절을 종교적 회의론자로 보내게 됩니다. 이것은 그의 나의 16세 때 그리스도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듯 합니다.  한 시사문제해설자에 의하면, "젊은 시절의 러셀의 무신론자였고 종교회의론자가 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지옥에서 영원한 고초를 받는다는 교리로 인해 성서를 믿을 수가 없었다."        E.D. Stewart, "Life of Pastor Russell," Overland Monthly, 69:129, Feb., 1917. Quoted in Edmond Gruss, Apostles of Denial, (Presbeterian and Reformed), 1970, 1986, p. 39.)

 

 

1869년 18살의 나이에 그는 조나스 웬델이 주재하는 재림교회 집회에 참석합니다. 러셀은 "그곳에서 모이는 몇몇의 사람들이 위대한 교회들의 신앙보다 나은 것을 제공할 정도로 더 현명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고 재림교 집회 참석 이유를 말합니다.(재판 파수대 3821면) 그리고 그는 재림교의 교리가 영원한 고초 교리보다 더 "현명한" 것으로 분명히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집회는 성서에 대한 러셀의 믿음을 재정립시켜 주었습니다. (영혼의 안식 속의 재림교도들의 믿음)  

 

이 집회 후에, 러셀은 곧 일부 친지와 교우들과 함께 성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이 연구에는 러셀이 종교회의론자였을 때부터 이미 재림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도 참석하였습니다. 이 그룹이 처음으로 조사한 것은, 당연하게도,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영원한 고초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스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스튜어트가 인용한 러셀의 지옥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한 그의 입장에 따라, 그는 성서를 믿기 위해서는 영원한 고초 교리를 제거해야만 하였다....성서는 그의 마음 속에서 연구되었다" "성서 연구를 영원한 고초 교리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충격적일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Edmond C. Gruss, Apostles of Denial, (Presbeterian and Reformed), 1970, 1986, p. 40. 

 

 

 

 

재림교도 러셀 

 

그의 성서 연구 기간 중에 러셀은 조지 스토스, 조나스 웬들, 조지 스테트슨과 넬슨 바버와 같은 몇몇 재림교도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러셀에게 끼쳤던 다른 가능한 영향력으로는 크리스터델피안의 루터교 사제였던 조셉 세이스와 아마도 프리메이슨이었던 것 같습니다. 워치타워 협회는 최근에서에야 러셀에게 이 재림교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협회는 러셀이 조지 스토스에게서 "영혼이(영혼의 잠)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데 대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하였습니다. (왕국선포자 46면 참조) 러셀 자신도 재림교도들인 스테트슨, 스토스, 웬들 그리고 바버에게 많은 가르침의 빚을 졌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재판 파수대 288~9면, 3821~3면; 왕국선포자 120면 참조) 따라서 오늘날 협회도 인정하듯이, 러셀은 영혼의 멸성을 포함하는 "많은" 신학체계를 성서 자체가 아니라 재림교도들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러셀의 성서 연구 그룹은 원래는 재림교도들의 성서 연구에서 유래한 듯 보입니다.칼 올프 존슨에 의하면, 사실상 러셀의 성서 연구 그룹은 앨러게니의 조나스와 뉴욕 조지 스토스 회중의 지도를 받는 그룹을 포함하는 특정 재림교도들과 매우 친밀하고 매우 빈번한 접촉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칼 올프 존슨, 이방인의 때의 재고, 1986년, 27면, 이후부터 존슨으로 표기)

  

 

러셀 신학체계의 많은 부분이 이러한 초기 재림교도들로부터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러셀의 일부 믿음 예를 들어, 특정한 연대 계산과  성서의 논리적인 해석 기법의 일부는 윌리암 밀러에 의해 시작된 재림 운동의 그 시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버트 크롬튼 여호와의 증인의 날짜 계산과 그리스도의 재림, 1996년, pp 20~21, 이후부터 크롬튼으로 표기)

 


아침의 전령 1878년 7월.러셀 편집인, J.H 패튼이 부편집인이었음.

우측 하단에는 "1914년 이방인의 때의 끝"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음.

 

 

 

넬슨 바버 (Nelson Barbour)

 

러셀이 성서연구집단을 조직하여 성서연구를 시작했을 당시에 그의 믿음에 주요한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은 뉴욕 로체스터의 넬슨 바버였습니다. 바버는 15,000부가 발행되던 한밤중의 외침(The Midnight Cry)라는 재림교 잡지의 발행인이었습니다. 그 잡지에서는 예수께서 1874년에 돌아오실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돌아오시지 않자, 바버는 처음에 당황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인도를 따르던 사람들이 "300명으로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밤중의 외침 독자 중에 나중에 러셀의 파수대 집필자가 된 키스(B.W. Kieth)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엠파틱 다이아글롯 희영 행간역의 마태 24장의 파로우시아라는 단어가 "임재"로 번역된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바버는 1874년의 그리스도의 재림 연대를 올바르게 예언하였지만 잘못된 기대 즉 그것이 눈에 보이게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바버의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신자들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 설명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찰스 테이즈 러셀입니다. (파수대 재판-Reprints pp. 230-231)

 

 

1874년 10월에 한밤중의 외침은 발행을 중단하였습니다. 1875년에 그 잡지는 아침의 전령(Harald of the Morning)이란 이름으로 다시 발행되기 시작합니다. 1876년에 이 잡지를 받아본 러셀은 바버의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임재"라는 견해에 감명을 받습니다. (러셀은 분명히 이 잡지를 읽기 전에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셀은 바버가 제시한 연대에 관한 해석을 대부분 받아들입니다. 바버의 연대 해석을 받아들인 것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일어났습니다: 전령紙를 읽은 후에 러셀은 바버에게 그의 연대해석에 관한 편지를 씁니다. 그후 1876년에 러셀은 필라델피아에서 바버와의 만남을 갖습니다. 러셀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1874년을 암시하는 그 예언이 주의 임재와 '추수'가 시작되는 해"라는 것에 대해 바버를 확신시킬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증거는 나를 만족시켰다."고 러셀은 말합니다. (파수대 재판 p. 3822, 존슨, p. 28)

 

존슨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이루어진 바버와의 만남들에서 러셀은 이방인의 때에 대한 계산을 포함하는 바버의 연대 계산을 수용하였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동안, 러셀은 "이방인의 때: 언제 끝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그리고 이것은 1876년 10월 조지 스토스의 정기 간행물인 바이블 이그재미너에 실렸다. (존슨 28면)


 

바버와 러셀은 곧바로 아침의 전령의 공동으로 발행하게 되며, 러셀은 재림교 잡지의 보조 편집인이 되었습니다.

 

1877년에, 바버는 자신이 쓴 내용을 책으로 발행하였는데 그 제목은 3개의 세상과 이 세상의 추수(또한 3개의 세상: 또는 대속 계획이라고도 불림)였습니다. 이 책에는 바버가 그 책 내용의 모두를 저술하였음에도 러셀이 부발행인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연기된 요한 계시록 여호와의 증인들의 이야기, 제임스 펜튼, 토론토 대학 출판, 1985년, p. 19. 이후로는 펜튼으로 표기)  바버는 자신이 쓴 이 책에서 천년기 신학과 연대에 관한 재림교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버가 이 책에서 가르친 신학이 러셀이 나중에 전망대 (The Watch Tower)에서 차용한 내용들입니다. 러셀은 교회와 예수께서 함께 구원자 (The Christ)가 된다고 말합니다(5~6면). 또한 예수와 그의 신부와 교회가 "두번째 아담과 하와"를 구성한다고 하였습니다(11면). 사실상 교회는 신들이 될 것이었고 교회는 "삼위의 일부분이" 될 것이었습니다(13면). 따라서 나머지 인류의 "영적인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16면). 이 144,000명의 "영적인 존재"는 그들이 다스리는 천년통치기간 중에 일부러 땅에서 사람으로 "물질화하거나" 지상에 있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존재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천년통치 기간 중의 인류의 영적인 발전을 주시할 것입니다(43, 47면) 인류의 숭배에는 이 "통치자들" 또는 "가르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섬기는 것이 포함될 것입니다(68면) 

 

 

연대에 관해서는, 1873년에 아담 창조 "6,000년"이 끝날 것이라고 바버는 말하였습니다 (76~77면). 예수께서는 1874년에 돌아오실 것이며 "추수"는 1874년에서 1914년에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1914년은 "이방인의 때"의 끝이 될 것이며 지상에 하느님의 왕국이 설립되는 해가 될 것이라는 등등의 견해를 제시하였습니다. 바버가 쓴 "이방인의 때"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83, 84면)"


따라서, 기원전 606년에 하느님의 왕국이 끝이 났으며 왕권이 제거되었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것이 이방인의 손에 맡기워졌다. 기원전 606년부터 2520년의 기간은 1874년으로부터 40년이 지나는 기원 1914년에 끝이 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40년의 기간은 "나라들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곤란한 시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 40년의 기간동안 하느님의 왕국이 설립될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천적으로 그리고 후에는 영적으로 설립된다.) 유대인들이 회복될 것이며 이방 나라들은 "토기장이의 질그릇" 같이 부숴질 것이다. 또한 이 세상 나라들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며 심판의 때가 될 것이다.  이 일들의 일부는 이 세대가 목격하게 될 것이다...나는 이 계산에서 일년도 빼거나 더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내용들이 러셀이 시온의 파수대를 1879년에 발행하기 시작하였을 때 바버의 견해를 거의 수정하지 않은 채로 발행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러셀이 제창한 교리들이 누구에게서 배운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버의 이러한 견해들은 이미 당시 러셀과 같은 재림교 신자들이었던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펜튼은 "대속"에 관한 믿음, "회복될" 지상 낙원에 관한 믿음, 기성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과 조건주의(영혼의 잠) 그리고 일년에 한 번 "니산월 14일"에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들 모두가  조지 스토스의 재림교 (The Second Adventist)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펜튼, pp. 16-17) 앞서 언급하였듯이, 현재의 파수대 집필자들도 러셀이 영혼의 잠에 관하여 조지 스토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러셀에게 있었던 다른 가능한 영향들

 

루터교 신부인 조셉 세이스가 러셀의 교리 형성에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할이 어느 정도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분명한 것은 러셀이 세이스의 책에 나오는 피라미드학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러셀은 "당신의 왕국이 임하옵소서"의 '피라미드학'에서 그점에 관해 호의적인 인용을 하였습니다. (성경연구 3권, 당신의 왕국이 임하옵소서 327~8면, 1891년, 1908년판)  

 

펜튼 교수는 칼 올프 존슨이  1828년 헨리 드루몬드가 그의 저서 '재림교리 2막'에서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재림에 관한 생각을 처음으로 지지하였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 생각을 나중에 세이스가 받아들였으며 세이스가 그의 저서 '우리 주의 돌아오심의 목적과 방법'에서 '보이지 않는 임재'를 주장한 것을 아마도 러셀이 "표절"하였을 것이라고 결론내립니다. (펜튼 18면) 그러나 크롬튼이 이와 비슷한 견해로 1815년에 이미 유명해진 상태였습니다.  

 

특별히 유의할 만한 것은 제임스 헤이틀리 프리어가 1815년에 발행했던 "다니엘, 에스라와 성 요한의 복합적인 견해"에서 제임스가 예수의 재림이 육적인 사건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으로 1822~3년에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했던 것이다...나중에 러셀의 믿음 체계에서 중요한 부분이 된 것과 제임스의 견해는 유사하다. (크롬튼 18면)      

 

펜튼 교수는 또한 세이스가 예수께서 육체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영으로 부활하셨음을 믿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믿고 있는 바와 동일합니다. 세이스는 또한 '기독교화된 천문학의 별에 담긴 복음'이란 책을 썼습니다. 세이스는 수많은 밀교적이고 어수룩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세이스의 믿음은 재림교도들도 믿었던 것이며 물론 여기에는 러셀도 포함됩니다. 정확히 누가 러셀의 믿음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지금으로선 명확히 결론내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간에, 러셀은 1800년대 말에 분명한 재림교도였습니다. 또한 당시 재림교도들과 많은 믿음 체계를 공유한 것도 분명합니다. 러셀은 재림교파 몇몇과 연합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재림교 출판물을 발행하기 전에는 재림교 출판물을 편집하고 발행하는 일을 돕기도 하였습니다.   

 

프리메이슨의 영향

 

이러한 영향력들에 더하여, 러셀은 분명히 프리메이슨 고위층이었습니다. 프리메이슨이 러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프리메이슨과의 연관은 적어도 그의 저작물 중에 프리메이슨 문양이 포함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예를 들면, 파수대 표지에 나타난 "십자가와 왕관" 문양과 다른 문양들과 1911년부터 성경연구 표지를 장식하기 시작한 33도 메이슨의 문양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신화에서 유래한 "날개달린 태양 원반" 문양 등이 있습니다. 러셀이 자신의 출판물들의 표지에 이러한 문양들을 사용한 것은 그가 다른 프리메이슨들에게 자신이 이 "비밀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프리메이슨은 그의 삶과 믿음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러셀의 믿음을 조사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프리츠 스프링마이어, 워치타워와 메이슨, 포틀랜드 발행, 1990, 1992년; 켄 레이너스 "날개달린 태양 원반" jw 리서치 2권 1번, 윈터, 1996년 22~24면)  

 

 


사진 설명:

왼쪽 서적의 표지: 날개달린 태양 원반  오른쪽 파수대 표지의 왼쪽 상단: 십자가와 왕관 

이러한 문양과 다른 문양들 예를 들면 피라미드과 태양 문양들이 러셀 당시 협회 출판물에 많이 나타납니다.

 


 

성경 연구생들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한 러셀과 바버의 교리 분쟁은 러셀로 하여금 바버와의 동업자 관계를 끝나게 만들었으며, 1879년에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 임재의 전령이라는 러셀 자신의 잡지를 발행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버와 결별하면서, 러셀은 바버의 독자 중 상당수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중에는 전령지의 다른 부편집인 J.H 페이튼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러셀은 1874년을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임재의 해로 여기는 바버의 연대와  앞서 설명한 수많은 재림교도의 천년기 교리에 대한 믿음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1799년을 세상 끝의 시작으로 1914년을 "이방인의 때의 끝"으로 믿었습니다.  

 

페이튼은 수년간 파수대지에 많은 기사를 썼습니다. 그 기사들 중 일부는 삼위일체론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천사장 미가엘이 아니라(재판 파수대 48면) "육체로 나타나신 하느님"이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재판 파수대 27면) 러셀은 페이튼으로 하여금 파수대 독자들을 위해 바버의 '세 개의 세상'을 대체하는 책을 집필할 것을 격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속 또는 "대속물"에 대한 러셀과의 교리적인 논쟁으로 페이튼은 러셀을 떠납니다. 러셀과 페이튼이 결별한 후에, 러셀은 "시대에 관한 계획" (나중에 '시대에 관한 경륜'으로 바뀌어져 불림)이라는 자신의 책을 집필하는데 그것은 천년기 새벽 시리즈의 첫 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성경연구로 바뀌어져 불림). 러셀은 곧 "성경 연구생"들 사이에서 남아있는 주요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리우스파를 신봉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삼위일체론자들의 교리를 반박하는 수많은 기사들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과 성경 연구생들을 기성 교회들로부터 분리하였으며 심지어는 재림교회들과도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연 설명(역자 주)

 

아리우스:     

리비아 출생. 안티오키아에서 신학을 배우고 젊었을 때 메리티오스의 교회분열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파문()당했으나, 후에 사면을 받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가 되었다. 스승 루키아노스의 설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의 피조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321년 알렉산드로스 주교()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또 파문당하고 친구인 니코메디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스에게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도 다시 자기 주장을 펴다가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논쟁에 패하고 정식 추방당하여 일리리쿰으로 유배되었다 

 

 

 

배교와 회복

 

앞선 재림교도들과 마찬가지로, 러셀은 점점 다른 모든 교회들을 배교자로 보는 견해를 발전시켰고 자신의 활동을 수세기 동안 왜곡되어왔던 진리를 "회복"시키는 운동이라고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견해와 그가 발행하는 출판물은 그 자신과 추종자들에게 점점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되지 않아 성서 연구생들의 활동과 러셀의 가르침이 곧 "진리"를 뜻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러셀의 저술물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1906년쯤에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천년기 새벽과 시온의 파수대에 제시된 진리, 그리고 그것이 지금에서 제시되어지는 것과 관련하여 수많은 궁금증들이 있습니다...그 진리들은 신의 계시의 결과입니까?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밝혀주신 그분의 계획의 신비를 풀 열쇠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주신 것입니까? 하느님의 진리는 도대체 어떻게 밝혀진 것입니까?...아닙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나는 탁월함이나 초자연적인 힘이나 신성함 혹은 권위가 나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나의 믿음의 집안 식구들인 동료 형제들 사이에서 나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열망이 조금도 없습니다. 단지 주인이 말씀하신 대로 "누구든지 너희 중에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는 말씀이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느님의 대변자로서 내가 제시하는 진리는 신의 계시나 꿈이나 하느님으로부터 음성이 들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밝혀진 것입니다....또한 진리가 밝혀진 것은 어떤 인간의 천재성이나 예리한 분별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때문에 밝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대변자도 있을 수 없으며, 돌들이 소리칠 것입니다. (재판 파수대 3821면)     

 

 

어떤 특별한 "권위"도 없다고 말하는 한편, 러셀은 "믿음의 집안 식구"들에게 주이께서 임명하신 "종"으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분명하게 나타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대변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수천년간 잃어버린 진리를 회복하는 "정해진 때"가 도래하였고 하느님께서 자신만을 홀로 택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러셀은 자신만이 홀로 1900년대 초부터 "적절한 시기"에 "양식"을 공급하는 일을 출판물을 통해서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자신이 아니 다른 누구도 하느님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을 수없다는 것과 자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하느님을 대변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러셀보다 앞선 시기의 사람들인 밀러나 버버가 "한 밤중의 외침"등을 통해 이미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러셀은 자신이 최종적으로 성서의 진리를 회복시키는 사람으로 선택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일례로 1910년에 그는 자신의 출판물의 중요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어이없는 진술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는 성경 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를 매일 12페이지씩 읽는 계획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방법보다도 더욱 훌륭한 성서 연구 방법이다... 

 

더우기 우리는 사람들이 성서만을 읽어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진실로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 성경 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를 제쳐둔다면, 심지어 그가 그것을 읽어 왔다손 치더라도, 그가 그 내용에 익숙해져 있다손 치더라도, 그가 그것을 10년을 읽어왔다손 치더라도, 성경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를 제쳐두고 무시하며 성서만을 읽는 습관에 빠진다면 그가 성서를 10년동안 이해해 왔다손 치더라도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는 2년내로 영적 암흑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성경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를 단지 참조용으로만 사용하고 성서의 매 장을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2년이 지나면 빛 속에 거하게 될 것이다. 그는 성서의 빛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재판 파수대 4684~4686면)  

 

모든 사람이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말을 하는 한편, 분명히 러셀은 모든 사람이 성서를 오직 그의 출판물을 통해서만 "연구"하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성서만을 읽어서는 소위 "하느님의 계획"을 알 수가 없었으며 오직 자신의 책을 읽어야만 알 수가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성서 속의 문맥들을 이해하기 위해 시대에 대한 경륜을 옆에 두어야만 하였습니다. 성서만을 읽는 것은 영적인 암흑으로 이끌 것입니다. "하느님의 대변자"이며 온 "믿음의 집안 식구"의 종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러셀의 이러한 논리에서 이 모든 믿음이 생겨났고 그러한 믿음에 따라 다른 모든 교회는 배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식으로 발전하던 러셀의 생각은, 자신과 자신이 주도하는 활동을 모든 교회들과 재림교 단체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 러셀교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에 불과하다! 

 

러셀과 마찬가지로, 워치타워 협회의 "판사" 러더포드, 프레드 프랜즈와 다른 협회장들은 배타적인 분파로 발전하여 기성 교회들로부터 더욱더 멀어졌을 뿐 아니라 러셀이 세운 교리들도 버려 버렸습니다. 따라서 워치타워는 러셀을 추종하던 다양한 성경연구생 그룹들과도 확연히 다른 종교 단체가 되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러셀 당시 성경연구생으로 불렸던 그룹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채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역자주) 오늘날 성경연구생들 모두는 러셀이 설립한 워치타워 협회보다 더욱 밀접하게 러셀의 가르침에 고착하고 있습니다. 워치타워 협회는 1928년에 러셀의 성경연구를 발행하는 일을 중지하였습니다. 많은 성경연구생들은 워치타워 협회를 배교자로 간주하는데 그 중 가장 큰 이유가 러셀의 성경연구에서 밝혀진 가르침들을 더이상 협회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러셀이 자신의 성경연구를 무시하는 일에 대해 경고했던 것처럼 워치타워 협회는 영적인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믿습니다. 많은 성경연구생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바빌론의 창녀로 간주하며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에게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는 외침을 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연구생들이 여전히 "목회자" 러셀의 "오랜된 빛"에 고착하고 있다고 믿으며 따라서 최신의 "빛" 또는 "현재의 진리"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믿으면서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자신들이 더이상은 "러셀파" 혹은 러셀의 추종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월터 마틴과 노먼 클랜 저, 워치타워의 여호와, 미네아폴리스, 베다니 하우스 출판사 발행, 1953. 1974년 41면; 황금시대 1920년 3월17일호, pp. 409-414.) 워치타워 협회는 1927년까지 러셀만이 홀로 "충실하고 지혜로운 종"이며 "적절한 때에 양식"을 나누어주는 종이라고 가르쳤지만, 더이상은 그렇게 가르치지도 그것을 믿지도 않습니다. (러더포드 저, 하나님의 거문고 1921년 237, 239면) 워치타워는 원래의 생각 즉 "종"은 러셀 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44,000명으로 구성된 하나의 반열이라는 예전 생각으로 회귀하였습니다. 워치타워의 이 진리는 계속 발전하여, 오늘날 지상의 144,000명의 남은 자가 러셀이 설립한 조직을 이끌고 있다고까지 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은 러셀을 진리를 회복하는데 공헌한 조직의 창시자로 큰 바빌론에서 나오게 한 조직의 창시자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시대 이후로 "빛이 밝아짐에 따라" 러셀이 가르쳤던 많은 가르침들을 "진리"로 더이상 여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은 러셀의 저술물들을 읽거나 읽는 것을 격려하지 않습니다. 단지 현재 협회 출판물에 간간이 인용될 뿐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러셀의 가르침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예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러셀이 오늘날 살아있어서 왕국회관 집회에 참석한다면 그리고 그가 여전히 자신이 죽을 때 믿었던 믿음을 고수한다면, 그는 그 자신이 설립한 워치타워 협회에 의해 제명처분이 되고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크롬튼은 러셀의 연대 체계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밀러가 만든 연대 체계를 '복원'한 것이며,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의 연대 체계는 러셀의 연대 체계를 '복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크롬튼 18면)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은 재림교와 러셀파의 분파로 분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찰스 테이즈 러셀의 믿음이 그들 존재의 근원이며, 이것은 그들이 1800년대 재림교 운동이 빚어낸 하나의 분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더이상 러셀이나 재림교가 가르쳤던 교리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들과 동료형제들이라고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러셀파나 재림교는 똑같이 그리스도교로부터 배교해 나간 분파들이며 여호와의 증인은 러셀파와 재림교로부터 배교한 또다른 분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각주 참조) 만일 어떤 여호와의 증인이 재림교나 성경연구생들이 갖는 집회에 참석한다면, 그리고 여전히 여호와의 증인의 믿음을 고수한다면 그는 배교로 제명될 수도 있습니다.     

 

각주: 예를 들어 워치타워에서 나가서 라이먼의 가정 선교 활동을 조직한 폴 S. L. 존슨과 같은 개인들을 언급할 때, 워치타워는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발등을 찍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때때로 책임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자신이야말로 영적 빛의 통로라고 여기고 조직이 마련한 것을 배척한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추종하게 하려고, 즉 사도 바울이 설명한 것처럼,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들었다...폴 S. L. 존슨은...자신이 예수께서 마태 20:8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집안을 관리하는 자라고 주장하였다." - 왕국선포자 627~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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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성경예언연구회
글쓴이 : 박용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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