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 제1절 초대 한국 교회가 처한 시대적 상황 1.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 가. 시대적 개관 기독교가 이 땅에 선교의 문을 열기 시작한 때는 조선 왕조가 외세에 못 이겨서 몰락(沒落) 과정에 있을 때였다. (1876년 강화수호조약이후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으며, 1882년 6월에는 조영수호 통상조약이 제물포에서 체결되었고, 같은해 6월에 독일과도 수호조약을 맺었고, 1884년 6월에는 러시아와 1886년에는 프랑스와 조약을 맺음으로 조선은 구미 제국에 널리 문호를 개방하였다.) 문호의 개방으로 외세에 위기의식이 짙어지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론 근대적 제도, 서양의 기술을 섭취(攝取), 채용해야겠다는 개화신조가 더욱 고조 되었다. 내부적으론 개화(開化)와 수구 두 세력이 대원군과 민비의 대립에 얽혀서 정계는 혼란을 빚어지게 되었다. 경제적으론 국가의 재정적인 궁핍이 심하였다. 그로인해 농민의 세금이 증가되므로 양반 관료에 대한 불평이 높았으며,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나. 종교적 상황 한국의 역사를 통해 한 대 전성했던 선이나 불교나 유교의 정신적 차원이 고갈되고 그 형식과 명분만으로 무게 없는 반복만 되풀이 하던, 종교적 신앙과 정신생활의 전례없는 진공기로 근대 한국은 종교적 생활에서 심한 허탈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때에 유교는 현실적인 윤리기강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종교적 국면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불교는 너무 신비주의에 흘러 한국인의 정신에서 소외되었다. 그러므로 근대 한국은 새 종교에 대한 일종의 갈망이 현상적으로 널리 펴져있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68. 1993) 내외의 관찰자들에게 한국은 비종교적인 인상을 짙게 풍기었다. 1953년 하멜(Hendrik Hamel)은 한국은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이들은 종교에 관하여 전혀 논란하지 않는다”고 평한 일이 있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69. 1993) 외형적인 종교의 부재와 함께 국내외 혼란이 곁들여 있었다. 운양호를 몰고온 일본과 1876년 2월 26일 강화 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와 같은 구미 제국과 수호 조약을 맺음으로 은둔국의 고립은 세계 무대앞에 깨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황막한 새 정세의 전개에, 기댈 곳이 없는 서러움을 안은 둣한 모습이었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가 선교되기 직전의 근대 한국의 모습이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70. 1993) 2. 복음의 수용 가. 선교사들의 선교이전 시대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카톨릭을 통해 들어와 있었다. 1866년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B.A)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하므로 한국 초최의 순교자가 되었다. 토마스는 북경에서 조선인 동지사(冬至使-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를 만나, 조선 내에 카톨릭의 수난을 알게 되었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 만주 주재원인 월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주선으로 1865년 9월 4일 중국 지프를 떠나 조선 서해안 자라리에 도착했다. 거기서 카톨릭 교인과 접촉을 하여 우리말 지식을 습득하면서 성서를 나누어 주었다. 그는 서울에 가서 전도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작은 범선을 타고 한강을 향했지만, 심한 폭풍을 만나 구사일생로 만주 피즈우에 표류하여 북경으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 갈 것을 결심하고 1866년 한국이 필요하리라는 상품을 실고, 통상 개시의 유무를 시탐하기 위하여 파견된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널 서먼호를 타고 한국을 향하였다. 이 상선이 대동강 입구에 들어서자 평안도 감사가 문정서를 보내어 온 까닭을 묻자 한국과 통상을 개시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자 감사는 크게 놀라 거절을 하였다. 그러나 이 상선은 대동강을 따라 평양시까지 올라갔다가 때마침 내린 홍수와 바닷물의 만조로 사주(沙柱)를 넘어왔다가 물이 빠지자, 배가 모래와 진흙 속에 빠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한국 병사의 포화에 배는 불타게 되었고, 토마스 목사도 다른 일행과 함께 살해 되었다.(백 낙준 한국 개신교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9. P48) 그러나 개척 선교사의 한 사람인 모페트(Samuel A. Moffett) 목사에 의하면 1893년 11월에 학습 교인반을 조직 할 때에, 토마스 목사에게 중국어 신약 성서를 받은 사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초기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구도자(求道者)적인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 기독교를 받아드리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신앙을 지켜왔던 것이다. 나. 초기 선교사들의 내한 실제로 한국 최초의 선교사는 북미 장로교의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라는 의사였다. 알렌은 갑신정변 우정국 사건 때에 개혁파에 칼에 맞은 보수파의 중추인 민 영익을 치료해 주므로 그 의술을 인정받아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을 받게 되었고, 고종과 민비에 총애를 받게 되었고, 미국인에 대한 인상이 우호적으로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미국 선교사의 전도에 밝은 전망을 보여 주게 되었다. 1885년 4월 5일에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처 세 사람이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달후인 5월 3일 감리교 월리암 스크랜턴(Wm B. Scranton)과 그의 모친 스크랜튼(Mrs. M. F. Scranton) 여사가 함께 입국하였다. 다. 선교의 운허 과정 1990년 이후 갑신정변,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을 한국 사회는 일대 변동을 겪게 되었다. 이때부터 개화기의 학술지나 언어지에서는 유교사상의 극복을 위한 철저한 유교 비판의 소리가 높아갔고, 기독교에 대하여는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유교나 불교를 신봉하는 개화파 인사들마저도 기독교야 말로 쇠약해 져가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고, 선교 단체들은 곧 개화의 힘이 될 것이라 공헌하게 되었다.(심 일섭 “한말사상과 기독교에 수용과정에 관한 연구” (신학 사상) 제28집 (서울 신학 연구소 1980) p.171 그러나 고종은 종교의 전파는 허락지 않았고, 기독교는 금교되고 있었다. 그후 조선 정부는 1898년 6월 10일에 스왈론 선교사에게 호조 (護照;외국인에게 내주던 여행권)를 발행함으로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 젤러 목사가 입국한지 13년만에 선교의 윤허가 내려 졌다. 이로 인하여 선교의 자유가 부여되었다. 3. 초기 선교 정책과 대 부흥 운동 가. 초기 선교 정책 1). 장로교 정책 미국의 감리교와 장로교를 비롯해서 캐나다, 호주, 영국 그리고 간접으로 일본을 통하여 새 선교지 한국에 여러 계층의 선교사들이 몰려들고 아울러 한국 교회 내에 간혈적인 수난도 있고 하여, 뚜렷한 선교 방법의 설정을 서두르고 피차 경쟁하는 잘못을 피하는 방법을 구하며, 더 나아가 한국교회 수난에 대용할 선교사들의 입장을 밝히는 정책 설정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국 주재 선교사들의 초청에 의해 1890년 존 네비우스 박사(Dr. John Nevius)가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그들은 네비우스 박사의 저서≪선교 사업의 방법≫(Methods of Mission Work)에 제시된 원리에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7명의 젊은 장로교 선교사들을 데리고 두 주일 동안 체류하게 된 그의 한국 방문은 선교정책에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선교사들의 하나하나의 복음 전도와 광범위한 순회 전도 (2) 자립 선교 (3) 자립 정치 (4) 자립 보급 (5) 체계적인 성서 연구와 모든 활동에 거의 성서의 중심성을 관철하다. (6) 성서의 교훈에 따라서 엄격한 생활훈련과 처리를 한다. (7) 다른 교회나 기관과 협력 및 일치의 노력을 계속하며, 최소한도 다른 기관과는 지역을 피차 뜻에 맞게 분활하여 전도한다. (8) 지역과 프로그램 분활 이후에는 피차 절대 간섭은 하지 않 는다. (9) 그러나 경제나 그 이외의 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넓게 피차 돕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대개 요약된 그 원칙이다. 강력한 자립성과 광범위한 순회선교, 성서에 대한 압도적인 강조가 그 기초였다. 그러나 또 한가지 이 원칙의 핵심에서 차세적 생활과 의무에서의 둔퇴(遁退)가 종교의 본분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통상의 생활을 하면서 교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 모습이라고 설파하는 정신도 깔려있었다. 2). 감리교의 선교정책 감리교는 장로교의 경우처럼 도식화된 문서상의 일정한 정책 규정이 따로 없기 때문에 그 윤곽을 더듬어 살펴볼 수밖에 없다. 감리교는 탐색, 순회전도를 원칙으로 했다. 이것은 실제로는 장로교와 별 차이가 없는 정책이었으나 이러한 방법이 옛적 감리교 전도사들과 부흥사들의 순회전도와 꼭 같았기 때문에 감리교의 생리에 들어맞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감리교는 교육분야의 있어서 장로교의 경우보다 훨씬 차원 깊은 집착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한국에 온 지 꼭 넉 달만에 두 사람의 학생을 가지고 학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장로교가 젊은이들을 교육해서 후에 각각 출신 교회로 보내어 힘있는 전도자적 크리스챤을 양성 힘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았는데 반해서, 감리교는 교육 일반에 주력함으로써, 그것으로 복음전도의 한 수단으로 삼는 폭넓은 방법을 원용하고 있었다. 두 교회는 이 교육 정책에 있어서 후에 그 간격을 더 넓혀갔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에의 치중은 복음사업의 부진을 자초할 수박에 없었다. 나. 교회의 폭발적 증가와 부흥운동 1895년과 1896년에는 교회의 세례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선교사들도 역시 이 놀라운 성장의 대해서 알고 격려를 받고 있었다. 서울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한국의 실정은 변해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랫동안 무관심하던 백성들은 이제 각성의 징조를 나타내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895년에 평양으로부터의 연례보고에 의하면 “평양에서의 활동은 이제 개척 전도의 단계를 지나서 확고한 기반을 닦기 위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교회는 발전하고 팽창하기 시작하였으며, 평양과 그 변두리 지방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한 요인으로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는 계속해서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의 주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세례교인과 초신자들이 모두 열렬한 복음전도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전도활동을 하고 우리 선교사들은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해 주어야 했다.” 이처럼 초창기에 벌써 교회는 선교사들보다 앞장을 섰는데, 선교사들은 초인간적인 노력으로 세례 지원자들을 가르치며 신앙이 약한 자들을 훈련시킴으로써 “후원”의 책임을 충분히 감당하였다. 1900년 한 해 동안에 세례교인수는 3할 이상이나 증가되었다. 사람들은 놀라운 수효로 교회에 몰려들었으므로 선교본부의 연례 보고가 “이 사람들이 너무 빨리 증가되고 있지나 않은가?” 하고 반문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재빠른 성장은 아무런 영적 근거도 없이 수효만 많이 모아놓은 것이었던가? 여러 가지 증거는 그것이 영적 근거 위에 확고하게 기초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당시의 선교사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위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헌신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많은 수효를 모아놓는 데만 유혹을 받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교회 공동체와 세례교인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신자들”(adherevts)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 “공동체”(Community)라는 말은 주한 장로교 선교사회(Presbyterian Council of Mission In Korea)의 정의에 의하면 세례교인,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 학습 과정의 구도자, 정기적인 출석자,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옛 생활로부터 떠나 기독교의 감화 밑에 있는 또는 그 밖의 사람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세례교인들”(Communicants)이라는 말은 교회의 기둥이 되는 세례 받은 성인 신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급속도로 성장하는 교회에는 교회 공동체와 세례교인과의 비율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일 어느 한 해 동안에 교회 공동체는 크게 늘어났는데 세례교인수는 조금밖에 늘지 않았다면 그것은 양적으로만 크게 늘어나고 새로운 신자들의 훈련은 빈약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100퍼센트 완전한 교인으로 만들 수 있는 교회는 없지만, 초기의 주한 선교사들은 훈련시키는 소임을 훌륭하게 감당하였던 것이다. 1898년에는 교회 공동체와 세례교인과의 비율이 36 : 1이었다. 1907년부터 1942년까지의 평균 비율은 2.6 : 1이었는데, 이것은 한 사람의 세례인이 매주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모든 비기독교적 종교 행사를 걷어치운,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신자로 인정될 만큼 충분히 훈련을 받지 않은 다른 2.6 사람에 해당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초기 선교시대는 앞으로 올 놀라운 영적인 대 부흥을 위한 태동의 시기였다. 앞서 말한 놀라운 성장이 영적 근거 위에 기초해 있었다는 더욱더 신빙할 만한 증거는 급속도로 성장하는 한국 교회로부터 “1907년의 대부흥”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이 대 부흥은 전혀 영적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서술되어왔다. |
대부흥운동의 태통 가. 부흥운동의 원류(源流) 한국 교회의 부흥 운동의 패턴은 영미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의 복음이해와 신앙형태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것들의 특징은 경건주의적(개인의 회심과 구원의 내적 확신을 위한 것)이고 주관주의적(회심과 확신은 개인의 경험을 통하여 얻는 것)이었다. 19세기 말엽 미국의 부흥 운동가 찰스 피니와 무디에게 감화를 받은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에 들어와 부흥 운동을 일으킴으로 미국 교회를 닮게 되었다. 1903-1907년간에 일어난 대 부흥운동은 원산에 모였던 남 감리교의 선교사들이 선교 사업에 성과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모여서, 성경 연구를 하고 기도하였을 때 강원도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하디 목사가 참석하여, 성령의 체험을 하므로 써 같이 참석한 선교사와 한국인 신도들도 성령을 받아 큰 부흥운동에 불길이 일기 시작하였다. 다른 하나의 부흥운동의 흐름은 사경회를 통한 부흥이었다. 1909년에는 북 장로교회 선교 구역에는 모두 5만 명에 달하는 참가자를 가진 약 8백번의 사경회가 있었다. 나. 1907년 대 부흥운동 1907년 부흥운동은 정월 장대현 교회에 유력한 장로인 길 선주 가 기도중에 큰 소리로 “나는 도둑과 같은 인간이 올시다”라고 자기 죄를 자백함으로 발단(發端) 되었다. 이로 인하여 집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백하고 눈물과 감격으로 밤새워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이 감동의 기류가 며칠 계속되므로 시작되었다.(길 선주 장로가 설교를 하였다고 함) (한국기독교사 연구(김 양선. 기독교문사.1981,p87)) 2.대 부흥운동의 양상과 성격 가. 대부흥운동의 양상 1907년에 일어난 대 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큰 파문(波文;어떤 일의 영향)을 일으켰고, 교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운동은 숭실대학교, 장로회 신학교, 성경학교와 중학교에서도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1907년 길 선주장로가 서울에 와서 경기도 지방회의 사경회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서울 지방 교회가 대 부흥을 일으켰다. 이 부흥운동은 장로교 중심의 평양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감리교에도 급격한 부흥을 일으켰다. 이 부흥운동은 성경공부와 심령부흥운동(기도 중심적)이었다. 그리고 전도운동이었다. 이 부흥운동은 성경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고자 하는 막대한 기독교인들이 생겼고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는? ①비기독교인 친척들에게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였고, 사경회를 더욱 왕성히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②많은 사경회와 사경회의 목표를 철저히 성경에 두게 하였다. ③한국 교사들에게 사경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④이러한 사경회는 1907년 대부흥회에 확고한 성서적 근거를 제공했다. ⑤사경회는 항상 복음 전파운동과 관련되었다. 나. 대부흥운동의 성격 1)신자가 된 사람들을 영적 소생시키려는 부흥운동이었다. 2)회개운동이었다. 3)사경기도회 적인 것이었다. 4)통성기도였다. 5)전도위주였다. 가가호호를 심방 전도하였다. 3. 대부흥운동의 결과 가. 긍적적인 면 1).한국에 기독교를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기독교회의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였다. 2).신도와 신도들 사이에 화해를 가져왔다. 교회의 연합정신을 강하게 하였다. 3).한국인 신자와 선교사들간에 이해 증진에 기여하였다. 한국인의 신앙지도력과 목회자들의 실력을 인정받게 하였다. 4).교인들 사이에 새로운 도덕관념이 생겨 종래의 봉건주의적 사상을 타파하였다. 높은 윤리 수준을 유지하였다. 5).성경 공부와 기도생활을 신앙의 기초가 되게 하였다. 새벽기도를 정착시키었다.(길 선주 목사와 박 치록장로가 장대현 교회에서 처음 시도함) 6).경이적인 교회 성장을 초래하였다. (장로교는 1906년 교인수-54,987명에서 1907년 73,844명(34%)로 증가함. 감리교는 1906년 교인수-18,107명에서 1907년 39,613명(118%)로 성장.(송길섭. 한국 신학 사상사.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7.4 p157) 나. 부정적인 면 1).한국 교회가 정치에 무감각해지고, 몰역사성(沒歷史性)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몰(沒)없음의 뜻을 강조하는 말)(김 우영, 기독교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1995. p44.) 이 운동을 계기로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관심을 교회 안의 일에만 가두어 두려고 하였다. 비정치화 작업을 펼쳤다.(송길섭. 한국 신학 사상사.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7.4 p159) 2).내용적인 면에서도 개인 구원만을 강조하므로 사회 구원은 도외시(度外視) 하는 경향을 보였다.(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1995. p44) 결론적으로 1907년 대 부흥운동은 우리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큰 획을 그은 사건이며, 소극적이며, 단순했던 복음을 체계적이며 거국적인 종교 운동으로 끌어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 운동의 차원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역사를 이루었다.(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1995. p44) |
일제치하의 부흥운동 1. 각 교단의 부흥운동 대 부흥운동이 있은 후 1910년 8월29일에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합병을 당하였다. 이때 교회는 전국적으로 조직을 가진 유일한 단체였다. 그리고 일제 탄압의 시련기에 교회는 민족의 안식처요 민족정신(民族精神)을 불어 넣어 주는 요람으로써의 애국적 사명(使命)과 구령사업을 그치지 않았으며, 이 구령사업은 부흥운동을 통하여 표출되었다. 가. 감리교회의 부흥운동 1909년에 9월에 개최된 남 감리교 주한 선교부의 연차 대회에서 “20만 명의 심령들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가 채택되게 되었다. 그 대회가 폐회된 직후에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 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가 서울에서 소집되어 “백만명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슬로건을 채택하였다. 이 백만명 신자화의 운동은 한국교회의 전도열을 진작시켜 주었고, 한국 미래교회의 전통으로 넘겨주었다. 남 감리교회는 1925년을 부흥년으로 설정하여 교직자들의 성령 충만 운동을 일으켰다. 1930년에는 미 감리회와 남 감리회가 합하여 조선 감리회가 성립되었다. 감리교회의 부흥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이 용도 목사였다. *이 용도 목사 ①1901-1933.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부흥사. 1901년 4월6일에 황해도 김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출생. 시변리 교회 전도부인으로 있던 모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강 병도. 기독 지혜사. 교회대사전. 3권 1994. p894.) ②1924년 한영서원 재학 중에 3. 1운동에 가담 2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는등 4차례에 걸쳐 3년여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런 당시 송도 고등 보통학교 교장 왓슨선교사는 그를 협성신학교에 추천하여 입학하였고, 1928년1월 28일에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졸업 그 이튿날에 강원도 통천 지방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하였다.(송길섭. 한국 신학 사상사.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7.4 p301) ③1928년에 통천읍 근방 산(백정봉)에서 박 재봉이란 청년과 10일간 금식 기도를 한 후에 영적인 능력을 얻어 교회를 50명에서 160명으로 부흥시키고, 부흥사로 활동을 하였으며, 1930년9월28일에 연합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1931년 순회부흥사로 활동하였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1993. p.91) 그는 청빈하였으며,(苦(쓸,고)는 나의 선생. 貧(가난할, 빈)은 나의 애처. 卑(낮을,비)는 나의 궁전이라함) 그의 부흥회는 회개, 기도, 사랑이었다. 그는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삶이라고 외쳤다. 무조건의 사랑을 강조하였으며, 목회자와 선교사와 신학과 교리의 기독교를 공격하므로 신비주의에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유일회적인 계시를 무시하므로 1933년 휴직 처분을 받았고, 얼마 후, 해주에서 여러 교인들의 돌에 맞고 원산에 와서 치료를 받다가 지병(폐병)으로 33세가 되던 1933년 10월 2일 원산에서 숨을 거두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1993. p.91) *이용도 목사가 조선 교회에 미친 영향 첫째로, 참 나라 사랑. 민중사랑의 본을 보였다. 둘째로, 새로운 스타일의 부흥회를 시작하였다.(선교사들과 다르게 토착적 신비적 타입의 집회 형식이었다) 셋째로, 자기 만족에 빠진 교회 지도자들을 깨우치게 하는 개혁을 일으켰다. 넷째로, 전국적으로 기도 부흥을 일으켰다.(예:1931년 9월 아현동 성결 신학교 신학생 부흥회-기도에 불이 붙음.) 다섯째로, 많은 젊은이들을 주의 사역자로 만들었다.(조 경우, 조 신일. 이 호운, 명 조관, 김 광호, 변 종호, 김 용련 목사등) 이 용도 목사의 단점을 굿이 꼬집어본다면 신학적 훈련이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비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그의 강한 기성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비판은 장로교단과 그가 속한 감리교단의 제재를 받았던 것이다.(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1995. p50) 나. 장로교의 부흥운동 1919년의 3.1민족 운동을 계기로 전환된 일제의 문화 회유 정책하에서 한국 교회는 교육, 계몽, 문맹퇴치운동과 교회의 진흥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1920년대의 시대적 사황 속에서 길선주 목사에 이어 김 익두 목사가 전국을 순회하며 신유 이적을 나타내 보이면서 한국 교회의 영적 성장을 이루었다. (1) 길 선주 목사의 부흥운동 1869년 3월15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길 봉순과 노 복순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한 길 선주는 1897년에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까지 한학, 수학, 선도(9년간 심취)수양, 의학연구 하였고, 1907년의 대 부흥운동 때, 크게 활약하여 전국으로 사경회와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장로교회 목사며, 독립운동가 33인중1인, 12세에 한시를 지어 장원 급제하여 부사(府使) 대도호부사와 도호부사의 총칭)의 통리가 되기도 하였다. 1903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 1907년 6월 10일 졸업. 최초의 목사 7인중에 1인이다. 길 선주 목사는 요한 계시록 1만 2백회를 독파하여 거의 암기하였고, 신약 성경은 1백회, 구약성경은 30회 이상을 읽었으며, 요한 1서는 5백회를 독파하였다. 그의 설교는 넘치는 열력과 함께 전부가 성서귀절을 구슬처럼 꿰메어 맺는 해석으로 일관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더구나 그의 부흥의 행각은 35년간 남북 만주, 그리고 이 강산 3천리를 망라하여 연 6천리를 다녔으며, 그의 행적은 약 20만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1935년 11월18일부터 있었던 평서노회 사경회 마지막날 새벽기도회를 설교하다가 쓰러질 때까지 복음선포에 헌신하였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1인이기도 하며 한국교회 신앙에 보수주의적 신앙형태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저서로는 1916년에 종교소설인 만사성취, 1921년 그의 설교집 강대보감, 1930년 신학서인 말세론(1970년에 출간됨)등이 있다. *길선주 목사의 신학 사상을 살펴보면? 첫째, 성서무오설과 축자적 영감설을 중심으로 한 청교도적 보수신앙으로써 성서의 압도적 권위에 대한 부동의 신앙을 심었다. 성서 통독 및 성경공부를 강조하였고, 유형기의 어빙돈단권 성경 주석문제에 관해 언급하는 등 자유주의적 성서해석을 절대 용인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둘째, 기도의 열심을 가르쳤다. 박 치록 장로와 같이 시작한 새벽기도회를 비롯하여 가정기도회, 금식기도, 철야기도, 직원들끼리의 특별기도의 습관을 가르쳤다. 특히 새벽기도회는 교인들의 신앙과 열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한국교회의 중요한 신앙유산이다. 세째, 활발한 전도열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 때부터 채택했던 일일연보 또는 날연보제도를 강조하여 평신도들의 전도에 대한 열심을 자극시켰다. 유일한 신학작품인 말세론(길 선주 목사는 예수님의 재림 연대를 1974년으로 잡았었다. 또 다른 곳에서는 2002년으로 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이 연대가 맞지도 않을 수 있다고 단서를 붙였다.(송길섭. 한국 신학 사상사.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7.4 p277)) 예수의 재림의 징조와 그 내용을 증거하였다. 한국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뜨겁게 갈망하기 까지의 이유로 길 선주 목사는 말하기를 \\\\\\\"세상이 병들었으므로 의사되시는 예수를 갈망하는 것이요, 시대가 컴컴하고 어두워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어 광명한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여 시대적 암흑기를 예를 들어 주의 재림을 고대하였다. 길 선주 목사는 당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당시 교인은 그의 설교를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30여년간 2만여회나 설교하였고, 그의 집회로 설립된 교회가 백 여개나 되었고, 그를 길 대사, 영계의 지도자, 교회의 아버지, 민족의 지도자라고 불리웠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1993. p.93) (2) 김 익두 목사의 부흥운동 1874년 1월3일 황해도 안익군 대원면 평촌리 농부 김 응선씨와 정 익선씨의 독자로 출생하여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6세때에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한후, 17세부터 상업에 종사하였다가 실패하므로 20세부터 방탕하여 악명 높은 불량배가 되었다. 그는 1900년 27세때에 안악교회 소 안련(스왈른; Wilbeer. L. Swallon)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몰래 참석을 하였다가 영생에 대한 설교를 듣고 마음이 입교를 결심하게 되었고, 박 태환의 인도로 입교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1901년 1월 마지막 주일-?) 또는(같은해 7월-(강 병도. 기독 지혜사.교회사 대사전(3). p300. 1994.) )소 안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기 전에 언행을 삼가면서 성경을 수십번 읽었다. 1901년 28세때에 재령읍교회의 조사(예전에 장로교에서, 목사를 도와서 전도하던 교직(교직), 또는, 그 사람)가 되었다. 1902년 2월에 순 한문으로된 신약성경을 100독을 하는 열심적인 사람이었다. 그해 10월 신천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 1906년 신천교회의 조사로 1906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 1910년 3회로 졸업을 하였다. 1913년 신천교회를 건축하고 그 교회 위임 목사가 되었다. 그가 실제적인 신유은사가 나타나기는 1919년 12월 경북 달성의 현풍교회의 사경회에서 였다. 많은 이적을 나타내므로 임 택권 목사는 김 익두의 이적 증명서를 발행하기 까지 하였다. 1920년에는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생전에 776회의 집회와 28000회의 설교를 하였고, 150개 교회를 신축하였으며, 1만여건의 신유 이적을 행하였다. 일경의 강요로 신사 참배를 한적도 있으며, 기독교 연맹의 총회장이 되어 북한 노동당에 협력하기도 하였다. 1950년 10월14일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하여 예배당 안에서 사살되었다.(강 병도. 기독 지혜사.교회사 대사전(3). p300. 1994.) 그의 설교의 중심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천국, 회개 등의 순수 복음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의 부흥회의 특징은 자신이 금식과 기도로 무장하며 설교하고, 신유의 은사가 나타났으며, 신유체험과 은혜 체험자의 현장 간증으로 신앙 고백케 하는 형식을 취하였다.(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1995. p49) *임 택권목사는 김 익두 목사에 대하여 ①고난 당한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와 권고 ②반 기독교적 비판, 물질 만능의 사고에 대한 신의 경륜으로 역사의 개입을 증거 ③시대의 징조에 대한 회개의 촉구라고 밝혔다.(임 택권(편) 죠션 예수교회 이적 증명 서울:조선 야소교회서. 1921. p5)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은 내세지향적으로 현실 세계에 어려운 상황에서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하여 일제폭정하에서 미래에 꿈을 갖게 하였다. 김 익두 목사의 설교(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교회안에는 권리가 없습니다. 세상의 부가 없습니다. 세상의 영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들어오는 길은 너무 좁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담배와 술을 먹을 수 없고, 따라서 첩도 두지 못하니 그 길이 좁습니다. 교회밖에는 길이 넓은 것입니다. 문물이 발달된 오늘에 돈만 있으면, 교통의 편리한 혜택으로 멀리 여행도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 범위가 대단히 넓어 죄짓게 하는 길도 많습니다.......영원히 사는 길은 교회의 좁은 문을 통과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다. 성결교회의 부흥운동 1.성결교회 초기의 부흥운동 성결교회는 1907년 5월30일 동경 성서학원에서 3년 동안 수학한 김 상준, 정 빈, 이 장하 3인이 한국에 와서 전도 활동을 하므로 시작되어 오늘날 성결교회 의 시초가 되었다. 2.이 성봉 목사의 부흥운동(1900-1965) 1900년 7월 4일에 평남 강동군 강동면 간리에서 감리교 권사 이 인실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6살 때는 온 가족이 예수를 믿는 가정에서 자랐으며, 1920년(20세)부터 3년간 병으로 고생을 하다가 중생을 체험하고, 1925년에 선교사업에 헌신하기로 다짐을 하였다. 1928년에 동양 선교회 경성 성서학교에 입학을 하여 공부를 하였으며, 그해에 수원교회를 개척하였다. 1930년에 목포교회로 부임 1931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6년에 신의주 교회로 전임하였고, 1938년에 전국 부흥사로 활동하였다가 1941년 만주 지방 선교사로 파송(사리원 감리교회 부흥회) 예수 재림에 대한 설교를 하였다가 사리원 경찰서에 투옥되었다가 출옥하여 다시 만주 선교에 힘썼다. 해방이후 이북에 돌아와서 이북 성결교회의 재건 운동에 힘썼으며, 1946년에 월남하여 남한 성결교회의 재건을 목표로 순회 집회에 힘썼으며, 1954년-1956년까지 임마누엘 특공대라는 이름으로 약소교회를 위한 순회 집회를 하였다. 1955년 신촌 성결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62년에 별세하였다.(강 병도. 기독 지혜사. 교회사 대사전(2). p883. 1994.) 주님의 이적과 기적을 많이 일으키는 권능의 종으로 교파를 가리지 않고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집회는 저녁 집회에는 천로역정을 많이 인용하여 감동을 주었으며, 낮 시간에는 요나서를 강해하였으며, 새벽에는 회개 운동을 강하게 일어났다. (예; 이 천석 목사의 간증) 이 성봉 목사는 30여년간을 쉬임없이 활동한 수명이 긴 부흥사였으며, 후세인에게 깊은 존경에 대상이 되는 부흥사였다. 2. 시련기에 처한 교회 가. 3.1 운동으로 야기된 교회의 시련. 3.1운동에 교회는 강력한 민족적 정기와 울분을 호소할 효과적인 통로를 제공했다. 교회의 전국적인 유기적 맥망을 통하지 않고는 비밀 연락과 그 보장, 그리고 거사의 동시성(同時性)을 보장하기가 어려웠다. 3.1운동의 거족적인 거사의 준비가 통일된 주도와 그 경로를 그 기초로 해서 갖추어지고, 마침내 최 남선이 작성한 독립 선언서에 기독교 인사 16명이 서명 날인 함으로써 독립만세 운동의 대열은 감동과 열의로 그 대오(大悟-크게 깨달음)가 세워졌다. 국내외에 대한독립선언서와 각종 문서의 전달에 있어서도 교회는 큰 역할을 하였다. 평양 기독교 서원의 총무이던 안 세환은 동경에 가서 내각 총리대신과 저명한 정객들에게 독립에 관하여 진정하기로 하고 3월 3일 경시 총감을 만나 한국 독립에 관해서 진술하였는데, 경시 총감은 총리대신에게 상신 한다고 하였다가 5일에 갑자기 체포하였다. 다음으로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담에 보내는 탄원서는 감리교 목사 현 순과 전도사 김 지순이 맡아 안동의 김 병농 목사를 통하여 전달하기로 하였으며, 국내와 각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일은 정동 교회 목사 이 필주와 배재 학생 김 진호가 담당하였다. 3.1 독립만세 운동에 많은 교회가 참여하였다. 평양에서는 이 날(3월1일) 낮 1시에 감리교회의 남산재교회와 장로교의 장대재교회에서 고종의 봉도회(奉導會) 이후 계속해서 선언식을 거행했고, 시가행진으로 돌입하였으며, 진남포에서는 감리교 학생 120여 명이 교회당에 모여 시위하여, 다음날 시위의 주도 노릇을 하였고, 안주에서는 그곳 집사 김 화식이 평양에서 선언서를 가져와, 천도교와 합동하여 운동을 전개시켰으며, 신천에서는 신성학교에서 교원과 학생 수백 명이 “조선 독립단”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들이 경찰서에 다다랐을 때에는 그 수가 3천여 명을 넘게 되었다, 대구에서는 이 민집 목사가 주도하여 3월 8일 한 곳에서 군중을 동원함으로써 경북 운동의 선구가 되었으며, 3월 11일에는 기독교인들과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시위운동이 부신진에서 전개되었다. 전주에서는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 및 신흥학교 학생들이 3월 13일에 목판 인쇄한 태극기를 들고 구보행진하며 시가를 누벼다. 그리고 함경북도 성진에서도 3월 10일 기독교계 보신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흔들면서 나팔을 불고 여기 합세한 군중 2백과 함께 일본인 거주지로 행진하다가 일경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에 이렇게 교회가 앞장서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고, 또한 이에 비례하여 교회의 피해도 그만큼 막대한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대한 교회의 가혹한 핍박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은 경찰과 헌병의 병력으로 교회를 때려 부수고, 종탑과 성경책을 산산조각 냈으며, 검거선풍 역시 기독교인들을 특별히 목표로 하는 등 교세가 우수한 지방의 기독교인을 상대로 가혹한 보복이 있었다. 가장 비인도적인 참화(慘火)는 수원 부근의 제암리 교회당의 소실사건이다. 만세시위가 막바지에 이른 그해 4월 15일 낮 2시경 아리다라는 일본군 중위가 제암골 교인들을 그곳 감리교회당에 다 모이게 한 뒤 군인들이 총을 겨누어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 교회당에 불을 질러, 교인들이 다 타서 죽고 교회당은 잿더미다 되었다. 이러한 학살과 만행은 부근 기독교인들이 사는 많은 동네에 감행되었다.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받은 피해는 막심했다. 총독부가 1919년 5월에 발표한 피해 통계를 보면, 전부 파괴된 예배당 수가 17동, 일부 파괴된 예배당 수가 24동, 그외 다소 피해본 예배당 수가 41동 등, 교회의 피해액이 약 3만 달러, 오산중학교 피해액이 5천 달러이며, 그리고 1919년 6월 30일(현재) 투옥된 사람도 기독교인 2,190명으로 유교와 불교, 천도교를 합한 1,556명보다 훨씬 많은 수며, 교역자가 수가 151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1919년 10월 장로교 총회의 보고는 장로교회와 교인들의 피해만도 체포된 교인 수가 3,804명, 목사와 장로의 수가134명, 기독교 관계 지도자의 수 202명이 수감되었으며, 사살된 자가 41명이나 되었다. 그날 현재 수감 중인 수가 1,642명, 매 맞고 죽은 수가 6명, 훼손된 교회수가 12개소였다. 함북노회만도 26명의 참살자가 기록되었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기독교의 참여와 이에 따른 교회의 핍박이 가혹했으므로 많은 신학교가 속강을 중단했고,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혀 총회 임직을 선교사들에게 대량 위임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 등 많은 시련을 있었다. 나, 공산주의의 시련 1925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에 대한 정면 도전에 나섰다. 이들은 1925년 10월 23일 조선주일학교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그 바로 앞 광장에서 노골적인 반기독교대회와 반기독교 강연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이 일로 인하여 교회는 공신주의의 실상을 직시하였고, 공산주의를 경계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교회와 공산주의와 충돌은 별로 없었으나, 한국과 만주 국경지대에서는 유혈 대결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교회의 피해가 컸다. 공산당에 의한 한국교회 최초의 피해는 1925년 동아교회(침례교)에서 생겼다. 그 해 길림성 지역으로 파송되었던 윤 학영, 김 이주, 박 문기, 이 창희는 9월 하순에 공산당들에게 붙잡혀서 일본의 밀정이라는 누명으로 악형을 받아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국에서 벌어진 동포간의 비운, 그것은 장차 교회와 공산당과의 대결의 비극적 상징이 되었다. 동아교회의 두 번째 희생은 김 영국, 김 영진 두 형제 목사의 순교이다. 1932년 10월 14일, 간도에 있는 종성동교회에 공산당원 30여명이 난입하여 부락만은 교회에 회집시킨 후 불신자와 신자를 갈라 앉히고 신자들에게는 생명으로 신앙의 값을 협박하였다. 두 형제 목사의 엄숙한 신앙고백이 청청히 울릴 때, 비류들은 잔인무도한 악형으로 이들을 탈피하여 죽이는 참혹을 감행했다. 같은 날 정 춘후 집사 역시 총살의 순교로 영광된 하늘 길에 올랐다. 1932년 감리교연회에서 파송받아 시베리아 산안촌에서 전도하던 김 영학 목사는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소련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언도받아 중노동 하던 중 얼음이 갈라져나간 강에 빠져 순교자의 행렬에 동참했다. 3. 신사참배 문제가 교회에 끼친 영향 한국 교회가 일본의 잔인한 박해를 받아온 역사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한국 교회의 정신적 핵심이 되어왔던 민족조의의 골격을 와해하고자 일본은 신사참배라는 거침돌을 하나 만들어놓았다. 일본의 신사참배는 옛날의 천황이나 무사들의 영을 섬기는 사사에 전 국민을 참배하게 함으로써 그 충성을 시험했고, 그와 같은 국민의례를 통해서 군국주의의 정신적 단결을 도모하려 하였다. 이 신사는 우리나라 도시나 읍, 면에까지 모두 세워졌다. 가. 신사참배 문제의 대두 신사참배 형식의 강요가 교회에 시련을 주기 시작한 것은 한일합병 직후 일본 천황의 사진에 축제 때마다 최경례하라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에 1921년 전국의 선교사들은 진정서를 내고, 이런 신적 지고성을 부인하는 “천황에 대한 예배”가 기독교인에 있어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 주장하였던 것이다. 1920년도만 해도 신사와 종교는 관념상 다른 것이고 신사에 참배시키는 것은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므로, 국민의 신교의 자유가 침범되는 것은 물론 아니라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1925년 10월 15일 남산 중턱에 소위 사격관폐대사 조선신궁이 준공되고, 천조대신과 명치 천황이 제신으로 소위 진좌되고 나서는, 사태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경신의도와 조상숭배를 가지고 국민정신의 근간”으로 하는 일제 정치에 충성이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참배강요의 마수가 뻗친 것은 1935년 평양의 기독교 학교에 대해서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할 때부터이다. 평양은 당시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어질 만큼 교회의 세력이 컸다. 1935년 11월 평양 숭실 전문학교장 매쿤(G.S. Mccune)박사와 숭의여고 교장 스누크(V.L. Snook)여사는 우선 학교의 대표자로서 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청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신앙의 양심을 내걸고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에 평안남도지사는 60일간 여유를 주면서 만일 신사참배를 거절하면 학교의 폐쇄와 강제로 추방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매쿤박사는 평양 시내 27개의 교회 목사들과 노심 협의했다. 이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부가 다 참배에 반대했다. 한 목사는 “신사에서 신을 참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반대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평양도지사는 스누크여사와 매쿤박사를 면직시키고 미국으로 출국시킨 후 대대적인 신사참배 강요에 나섰다. 선교사들간에는 의견의 분열이 있었다. 그것은 사실 하나의 국민적 의례로서 정치적 의미만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한국 교회가 인정하듯이 종교적 성질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현안의 초점이었다. 1939년 4월은 일제의 의회에 제출된 1938년말의 “종교단체법”이 통과된 때였다. 이것은 박해의 구실에 보탬이 될 사건이었다. 이 법안의 특징은 신사를 종교 범위밖에 놓음으로써 종교단체에 대한 정부의 취체에서 제외시켰을 뿐아니라, “유신의 도는 절대의 도로서 오히려 종교를 초월하는 일본 고유의 교와 일치하는 것” 이란 입장을 굳혔다. 나. 장로교에 끼친 영향 장로교에서는 1931년 9월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그것이 부산일보에 보도되어 큰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조선총독이 1936년 8월에 국제 명칭을 꾀한다 해서 신사 규칙을 전면 개정을 단행하자 난경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의 철수는 선교사들의 학교 교육에 결정적인 파탄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선교사업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36년 초, 장로교 선교사들은 사태의 불안을 인식하고 선교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기독교 학교의 폐쇄를 원칙으로 삼았고, 그해 10월 실행위원회에서는 1938년까지 평양내외의 학교 폐쇄단행을 결정하고야 말았다. 연희전문과 세브란스 의전 및 정신학교를 폐쇄한다는 것은 1938년 선교 대회 때 결정되었다. 미국 본국 장로교의 선교회에서도 매카이 박사가 참석한 한 위원회에서 한국에서의 학교 폐쇄 조치를 승인했고, 위원회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신사참배에는 반대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1938년 전국적으로 노회가 모이기 시작하자 일본은 조직적으로 파괴공작에 나섰다. 우선 강경파인 주 기철, 채 정민, 이 기선을 예비 검속(檢束)하고, 친일파 목사 이 승길과 김 일선을 통해서 표독한 분리공세를 펴며, 총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협박으로 신사참배 가결을 촉구했다.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총회가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개최하였을 때 ,일본은 문제를 한꺼번에 결단 내릴 획책을 꾸몄다. 총대 193명의 사이사이에, 97명의 경관들이 끼어 앉아 회의 진행을 감시했다. 첫날엔 임원선거가 있었다. 총회장에 홍 택기, 부회장에 김 길창, 서기에 곽 진근, 회계에 고 한규였다. 둘째 날 오전 10시는 평양이 떠들썩했다. 평양, 평서, 안주노회의 소위 삼노회를 대표해서, 박 응률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하면서, 참배결의와 성명서 발표제안은 했다. 불레어의 반대 발언은 즉각 거친 경관의 폭력적인 제재를 받아 힘에 밀려 퇴장했고, 한국과 함께 살아온 장로교가 홍 택기의 의식적인 가결 획책으로 신사참배가 기독교신앙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결의하고 말았다. 신사참배에 대한 주 기철 목사의 항거는 참으로 위대한 신앙의 꿈이었다. 그는 1938년 2월 평양 산정현교회 헌당식 날 경찰에 구속되었다가 잠시 석방된 일이 있었는데, 그해 이 유택, 김 화식 두 목사와 함께 묘향산과 대성산에서 금식기도를 하는 등 순례의 길을 걷다가 6월 30일에 돌아왔을 때에는 공교롭게도 일본 기독교의장 도미아 목사가, 120여명의 산정현교회 교인들과 평양 유지 교인들 앞에서 신사참배가 성서적으로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역설하고 있었을 때였다. 주 기철과 손 양원 목사는 그들의 간장이 뒤집히는 듯했다. 소리 높여 그 부당함을 외쳐 맹렬히 그의 괴변을 반박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생명은 이제 신앙의 값을 치를 때가 온 것이었다. 농우회사건(1939년8월) 이후 평양노회가 그의 파면을 감행한 사실을 들었다. 그는 1940년 10월 네 번째로 마지막으로 구속되었고, 경찰은 교회 문에 못을 박아 폐문 시키고 말았다. 그는 마침내 견딜 수 없는 고문을 4년 계속해 받다가 그 지구력이 순교의 영광을 나약과 불인으로 해서 빼앗길세라 염려해 순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1944년 4월 22일 영광된 순교의 숨을 거두었다. 순교자들은 초인들이 아니었다. 다만 주님이 우리 위해 돌아가셨다는, 그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에서 한 발자국도 빗나가지 못하는, 어쩌면 섬약한 인간들이었다. 주 기철 목사가 순교한 후 신문에는 아무 글도 나오지 않았다. 세상은 그의 고난을, 그의 승리를 모르는 것 같았다. 책 하나 남긴 것 없이 그는 이렇게 갔다. 다. 감리교에 끼친 영향 1937년 7월 북경 근처에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황 신격화 사상이 국부의 강력한 군사력 증강과 함께 독재 체제로 돌변하여 그 사상은 일본 본토에서보다 한국 안에서 더욱 노골화하였다. 군국주의자들이 일본의 황제를 천황이라 부르고, 그를 살아 있는 현인신이라고 하며, 함부로 부르지를 못하게 하고 부를 때에는 차렷 자세로 천황 밑에 폐하란 말을 꼭 붙여 말하고 쓰게 하는 신격화 사상은 막을 길이 없었다. 천황 중심의 국제 관념을 명시하는 말이 있고 천황은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 기관으로서 이를 행사한다는 “천황기관설”을 뒤엎고, 천황에게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는 관료제 정치를 합리화하는 “천황주설권”이 신성불가침으로 우상화되기에 이르렀다. 천황의 이름으로 자행된 일본의 정치 악은 언제나 우리들의 민족 감정을 상하게 하였고, 걸핏하면 기독교의 지도자나 신자를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교회의 의사 표시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반대의 의견은 묵살과 검색으로 탄핵되고, 다만 친일의 발언만이 교회의 양심을 대변하는 것처럼 대서 인용되었다. 여기 교회 반응의 일치는 비탄을 동반하였지만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감리교의 대부분은 신사참배가 정치적인 국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본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 계통의 학교들은 폐쇄되지 않고 해방 전까지 생존할 수 있었으며, 교회 수난도 비교적 가볍게 스쳐갔다. 라. 성결교회에 끼친 영향 성결교회는 신사참배 거부 및 전도표제로 내건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복음 중 재림의 교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국시에 어긋난다고 하여 박해를 받게 되었다. 성결교회의 유일한 전도 방법인 구령집회 심령부흥회가 음으로 양으로 방해받고 설교자들을 감시하여 불온사상, 반전운동, 민족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예비(豫備)검속(檢束), 혹은 형(刑)을 지우고 단체의 유일한 기관지 “황천” 에 무서운 검열로 삭제, 정간을 계속시키다가 마침내 폐간을 시켰다. 1943년 5월초에 성결교회 총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이것이 일제치하의 마지막 총회였다. 이때는 이미 일본 성결교회가 수난 당한 때라 우리에게도 그들의 손이 미칠 것을 총 회원 전원이 육감으로 느끼게 되었다. 5월 23일은 주일이었다. 이날은 의례히 여러 성직자들이 교회를 비우지 아니할 것을 예측한 왜경들은 다음날인 24일 아침 5시를 기하여 일제히 검속(檢束)하였으니, 200여 남녀 교역자와 장로와 심지어 남녀 집사들까지 100여명이 구속당하게 되었다. 5. 24검거 이후 서산지방은 먼저 예배 금지를 당했고, 전국적으로 9월에 교회 문을 닫게 되었으니 12월 29일에는 강제 해산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힌국 교회의 첫 재물이 된 성결교회는 도처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고 “목자를 치매 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리라”는 말씀과 같이 교역자들은 전부 감금 신세를 지게 되었으며, 일반 신자들은 뿔뿔이 해어져 산지(山地)사방(四方) 흩어져버렸고, 폐문된 교회당은 중산보국을 구호로 삼는 왜적이 가만 둘리가 없었다. 가마니공장, 새끼공장, 기구공장 등 각종 형태로 강점하여버렸다. 출감한 교역자들은 직장을 찾아 거리를 해매야 했으며 젊은 교역자들은 보국대에 강제 노무를 감당해야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일본 및 남양군도로 강제 징용에 끌려가거나 이러한 영장을 받고도 도피하여 산과 들로 방황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성결교회 교역자들이 겪은 3년의 박해였다. 이러한 환란 가운데 왜경에 고문을 당하여 순교한 모사는 철원교회 박 봉진, 함흥에 김 호, 충남 은산교회 손 갑종 씨였고, 평신도 순교자로는 군산 정 태희 장로와 신안주교회 김 지봉 집사 등이었다. 뿐만 아니라 근 1년동안 옥고를 겪은 교역자들이 출감은 되었지만 갖은 고문과 굶주림과 운동 부족으로 건강을 잃어 병사자가 있는가 하면, 그 유가족들이 굶주림에 못 견디어 쓰러지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성결교회 본산인 성서학원은 교단 해산과 함께 폐교되었고, 성직자를 훈육하자던 교사(校舍)는 일본 기독교단이 경영하는 신학교와 동흥실업학교와 한국 민족정신 말살 기관인 황도선양회와 교회 탄압의 기수들인 일제 특별 경찰대 등이 각각 분할 점령하게 되었다. |
해방 이후의 부흥운동 1. 교회 재건운동 8. 15 해방으로 이제까지 신앙의 자유를 상실하였던 우리 민족은 다시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 것이며, 국가의 주권상실이 가져다주는 비극의 참상을 깨닫게 되었으며, 국가의 재건이라는 대명제 앞에 서게 되었다. 일제 최후의 발악이라고 할 수 있는 말살정책의 한 방법으로 채택되었던 소위 “신사참배”로 인한 일대 시련과 박해 속에서 어떤 이들은 친일적인 성격을 표명하여 이 박해를 모면한 교계인사들도 있지만, 감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하고 또는 산으로 숨어서 그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가, 북한에서의 교회 재건운동과 수난 교회재건 운동은 전국에서 지체 없이 시작되었다. 신자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도생하던 70여 명 중, 주 기철 목사나 채 정민 목사를 비롯한 50여명은 감옥에서 순교했고, 나머지 20여명은 출옥됐다. 종교는 압박과 그 피해에서 신경을 날카롭게 하여 열정과 신앙의 예민으로 해서, 전혀 상상도 못하는 곳으로 경건과 순교의 영광을 다짐하게 된다. 이들은 “출옥성도”로 자칭했다. 그리고 이들의 영광된 수난과 그 순교정신은 기성교회의 현실 타협적 존속에 반발했고, 따라서 은총의 개념이 막연해진 채 ,도덕적 순결과 신앙의 의지적 보수라는 인효(仁孝)론적 화살로 그 참회의 상징을 요구했다. 교회는 우선 양심의 숙연한 비판에 떨었다. 출옥한 20여명 교역자들은 8월 17일에 출옥하자마자 자신들의 그리운 가정에 돌아가는 것도 뒤로하고, 옥중 순교한 주 기철 목사가 시무 하던 산정현교회로 모여 2개월간 합심기도를 하였다. 출옥성도들은 신사 참배한 한국교회를 위한 통회와 함께 속죄의 기도를 올렸으며 또한 앞으로의 한국교회 재건에 관한 기본원칙을 발표하였다. 첫째, 신사에 참배한 교회의 지도자(목사와 장로)들은 모두 권징의 길을 택하여 통회 자복한 후 교역에 나서야한다. 둘째,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하여야 한다. 셋째, 목사나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넷째, 위의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 각 노회와 지교회는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 다섯째,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시급히 복구 재건할 것 등이 었다. 1945년 12월 1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북한 5도 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평양노회가 중심이 되어 평북의 여섯 노회 즉 평동, 평북, 용천, 의산, 산서, 삼산노회 등과 합의 한 후에, 북한에 산재하고 있는 5도의 16 노회에게 모두 연락을 취하여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연합노회 조직을 위한 회합을 보게 된 것이다. 5도 연합노회가 결의한 중요 안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북한 5도 연합노회는 남북통일이 완성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하는 잠정적 협의기관으로 한다. 둘째, 회의 헌법은 개정 이전의 것으로 하되 남북통일 총회가 열릴 때까지 그대로 사용한다. 셋째, 전 교회는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자숙할 것을 원칙으로 한다. 넷째, 신학교 운영은 연합노회 직영으로 한다. 다섯째, 조국의 기독교회를 목표로 독립기념 전도회를 조직하여 전도 교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여섯째, 북한교회를 대표한 사절단을 연합군 사령관에게 파견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한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이 기관의 구체적 행동에 경계를 하게 되었다. 더구나 기독교 사회민주당과 같은 정당이 출연하고, 신의주 학생의 봉기가 있자 교회의 세력을 부르조와의 잔재 요소로 간주하고 그 근절을 계획하게 되었다. 1946년 11월 28일에는 기독교도 연맹을 조직하여 왕년의 부흥사 김 익두 목사와 산동성 선교사로 갔던 박 상순 목사를 감언(甘言) 공갈(恐喝)로 가맹시킨 다음, 교회를 공산주의 선전에 악용하며 교회의 이름으로 남한을 공격하고, 김 일성을 절대 지지하여 선거에 솔선수범한다는 해괴한 결의문까지 발표하게 했다.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들은 투옥과 추방으로 위협하였다. 신학교도 공산당의 손에 의해 강제 통합되었다, 1946년 9월 창립한 감리교의 성화신학교와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에는 각각 600여명의 학생들이 등록하고 있었다. 1949년 연말이 가까워 오면서 북괴정권은 기독교도 연맹을 시켜서 어용신학교로서 기독교 신학교란 것을 개교하게 하였다. 북한에서의 기독인의 수난은 김 화식이 기독교 자유당 조직 활동으로 1947년 11월 피체(被逮)된 얼마 후, 순교한 때로부터 비롯되어 오늘에 이른다. 같은 해 1947년 에는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김 인준이 소련군에 의해 순교했고, 이 정심 역시 그해 12월 8일 소련군의 고문으로 순교의 길에 올랐다. 그 뒤를 김 철훈, 이 유택이 따랐다. 나. 남한에서의 재건운동 남한에 있는 교회들은 미군의 진주 때문에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 비록 일제가 설정 강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교파의 합동으로 된 교단의 존속을 그대로 계속하려는 운동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는 감리교의 변 홍규, 이 규갑을 비롯하여 박 연서 목사들이 장로교의 김 관식, 송 창근, 김 영주등 여러 목사와 동참해서 그 존속을 의논했다. 이것은 북한 지역의 교회 재건운동과는 그 성질에서나 의도에서 전혀 판이한 종류의 것이었다. 교단 지도자들은 끝까기 건국과 교회와의 불가분리의 관계를 역설하면서 교단 존속의 방향으로 여론을 유도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밀려났던 변 홍규, 이 규갑과 같은 인물들이 호응할 까닭이 없었고, 여기에 합세한 수십 명 감리교 목사들은 감리교는 새로이 재건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퇴장하고 말았다. 1) 감리교회 재건운동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교단대회에서 대회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퇴장한 이 규갑, 변 홍규 등은 곧 바로 동대문교회로 가서 감리교의 재건을 주장하여 재건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대회의 위원장으로 이 규갑 목사를 추대하였고 동부, 충부, 서부의 세 연회를 조직하여 동부연회는 변 홍규 목사에게, 서부연회는 이 유용 목사에게 각각 회장을 맡기고, 이로써 감리교회가 재건되었다고 국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진행은 여의치 않았다. 여기 호응하는 교회의 수가 그 과격성 때문에 많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6년 1월 감리교 신학교를 재건, 설립하고 변 홍규 목사가 교장에 취임했을 때에도 전국 교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재건파에 반대한 이들을 부흥측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1946년 4월 7일 강 태희 목사를 중심으로 수표교회에서 기독교 조선감리회 부흥 신도대회를 열었다. 부흥 측에서는 1946년 9월 기독교 조선감리회의 “부흥”됨을 선언하고 감독에 강 태희를 선출하였던 것이다. 재건파에서 장 석영을 감독으로 기독교 조선감리회를 조직한 것은 1948년 1월 23일이었다. “조선감리회의 역사적 신성을 유지하고자” 함이 그 목적이었다. 2) 장로교의 재건운동 장로회에 있어서 남한지역에서 가장 먼저 교회 재건을 위해 일어난 곳은 부산을 중심한 경상남도 일원이었다. 이는 순교자 주 기철 목사나 최 상림 목사 그리고 출옥성도라고 일컬어지는 손 양원 목사, 주 남선 목사, 한 상동 목사 같은 분들이 다 경남 사람으로 다년간 그곳에서 목회한 영향이 적지 않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1945년 11월 3일에는 제 47회 경남노회를 개최하여 재건노회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결정된 중요한 안건은 현역 교역다들에 대한 자숙이 강조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첫째로 목사, 전도사, 장로등은 일제히 자숙하는 행동을 취하기로 하되 일단은 교회를 사면해야 하며, 둘째는 자숙기간이 끝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한 시무 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 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역 교역자들은 자숙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암암리에 폐기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얼마 후 이를 자각한 노회원들은 제47회 정기노회가 모이자 사태의 책임을 묻고 임원직의 총사퇴를 요구하였으며, 출옥 성도 주 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 추대하고 교회재건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1946년 6원 12일부터 4일간 서울 승동교회에서 소위 남부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는 북한의 교회가 포함되지 아니한 남한교회만의 총회였기 때문에, 남부총회라고 이름하였다. 남부 총회는 재야 교역자인 배 은희 목사를 회장으로 했고, 함 태영 목사를 부회장으로 하여 총회를 소집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주도권이 일제시대의 교단 자도자들의 손에서 떠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이들은 실제로 교회 목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교회 주도권의 변화에는 영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남부총회가 결의한 중요 안건은, 첫째로 헌법은 남북통일 될 때까지 그대로 사용할 것과, 둘째로 제27회 총회에서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는 취소되어야 하며, 셋째로는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의 직영 신학교로 한다는 것 등이었다. 3)성결교의 재건운동 1945년 9월 10일부터 역사적인 재건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때까지 과거 헌법에 의하여 개회됨에 의장 천 세광 목사, 부의장 김 유연 목사가 추대되었다. 이 때 총회원 70여 명이 모인 중에 북한 대표로서 이 성봉, 조 기함, 조 한수, 이 용선, 최 학철 제씨가 38선을 넘어 참석하였다. 개회 벽두에 각 지방 대표들의 교회 재건보고로부터 시작하여 흐뭇하고 만족한 분위기 속에서 의사가 진행되었다. 이 때 중요한 의제로서는 신학교 개교 문제와 《활천》 복간건 및 각 기관 부활과 부흥 대책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승리중에 폐회하였다. 첫째, 교회 명칭 변경문제: 성결교회는 개창시는 복음전도관이라 했고, 1922년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개칭하였으나, 해방과 동시에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부르게 되었고, 동양선교회는 선교기관이므로 성결교회와 횡적 관계뿐이며, 독립 한국에 자주교회이니 그 명칭을 고치기로 하고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변경하였다. 둘째, 신학교 개교: 신학교를 개교함에 있어서 1940년 경성신학교로 인가 받은 이후 폐교함에 이르렀으니 행방된 오늘에 수도가 “경성”에서 “서울”로 개칭됨에 따라 자연적으로 “서울신학교”로 변경했다. 체제를 쇄신하기 위하여 교장에 이 건 목사를 선임했고, 이 명직 목사를 명예교장으로 추대하고 교수를 박 현명, 김 유연, 김 응조, 김 감, 최 석모, 학교유지 총무 박 형규, 서무 한 영환 제씨가 담당하게 되었고, 학생은 60~70명으로 개교하게 되었다. 셋째, 《활천》복간 넷째, 신생부인회 조직 이와 같이 재건총회에서 거대한 의결을 하는 동시에 모든 진용을 쇄신하여 신생 대한민국에 신생교회로서 출발하게 되었으니 성결교회의 앞날은 양양하게 되었다. 총회 본부를 신학교 안에 두고 젊은 새 총리 박 현명 목사 영도아래 황 성택 목사가 총무로 선임되어 교회 재건에 진력하게 되었다. 2. 6.25의 상처와 교회 부흥운동 가. 6.25로 인한 교회의 피해 6.25의 전란을 겪으면서 받은 국민 전체의 손실과 참회는 컸다. 그러나 기독교회가 받은 비극의 깊이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준엄히 공산당에 대항하던 목사들은 남부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으며, 여순반란때 두 아들을 죽인 적구의 조소를 받으면서까지 용서해 주었던, 성인 손 양원 목사와 저명한 부흥목사 김 익두 목사의 순교, 구세근, 노 영수, 감리교의 송 정근, 1930년대 농촌 사업의 기수였던 조 민형과 신 석구, 장로교의 박 경구, 정 일선이 순교, 그리고 남 궁혁, 양 주삼, 송 창근, 박 현명 제목사와 신학자들이 납치되어 해방이 묘연하게 되었다. 이 사변을 통해 파손, 손실된 교회의 수는 장로교가 152교회, 감리교가 84교회, 성결교가 27교회 그리고 구세군이 4교회, 기타 교파에서도 그 손해는 막심했다. 순교, 납치 당한 이는 장로교에 177명, 감리교에 44명, 성결교에 11명이었다. 그러나 이 통계는 교회가 그 뿌리에서부터 받은 아픔과 고난을 표명할 수는 없었다. 이 사변이 교회에 준 비통한 상처는 사실 이런 외관적인 침해가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파생한 본질 반역의 기구한 파탄과 자학의 돌이킬 수 없는 수치가 실질상의 피해였다. 서울을 점령한 공산군의 선무공작이 활발해지자 저들에게도 동조하여 교회를 괴롭히는 분자들이 일어났음은 일대 유감이었다. 7월 10일경에 경동교회에 다녔다는 김 욱이란 자가 종로 네거리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YMCA회관에 기독교 민주동맹이란 간판을 내걸고 김 일성 입경 환영대회를 개최한다면서 대대적으로 떠들어댔다. 그는 각 교회별 기독교 민주동맹지회를 결성해야 한다면서 교역자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보다 더 심각하기는 전직 목사였다는 최 문식의 소행이었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며 일찍부터 공산주의 사상에 감염되어 1946년 대구 철도파업사건에 주도 역할을 하여 종신형으로 복역 중에 있었다. 그러다가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감옥에서 뛰쳐나와 7월 중순부터 거리를 쏘다니며 날뛰기 시작하였다. 그는 종로의 기독교서회 건물을 접수하여 사무실을 차려놓고 미처 남하하지 못한 교역자들을 색출하는 일에 광분하였다. 북괴정권을 지지하는 궐기대회를 개최해야 한다느니, 남북통일의 호소문을 작성해야 한다면서 교역자들의 서명날인을 강요하였다. 그런데 9원 21일 궐기대회가 전혀 기운 없이 진행되자 화가 치민 그는 교역자들을 향해 협조를 거부한 반동분자라는 구실을 내세워 발견되는 대로 공산군에 체포 연행하게 했다. 1953년 종전 이후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1959년까지는 전쟁으로 파괴된 교회들이 거의 복구되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저명한 인물들은 납치 당하거나 순교 당했기 때문에 교회는 지도자들의 결핍에 빠졌다. 교회지도자 결핍으로 일어난 일들이 바로 이단종파운동이었다. 나. 이단종파 운동들 6.25와 그 후유증 때문에 시달리는 교회에 열광적이요 종말론적인 내면화의 경건이 여기저기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상 유래없는 참화를 입은 민중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벅찬 현실이 끝없이 이어져가는 것 같은 허탈이 엄습했고, 거기서 솟구친 서민층의 자욱한 절망감은 교회의 건전하고도 선량한 신앙과 윤리의 부재에 의해서 절실한 종말의식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처음 교회와 교리에의 냉대에서 시작하여 그 “악마성”을 공격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사회에서의 개인적 내지는 집단적 격리로까지 발전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의 특징은, 철저하게 내세적이요 현실 부정적이면서도 가혹할 정도로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생태에 접속하게 되어 있어서 축복과 열락의 상징인 내세의 천국이 여기, 이 땅에서 그 종말의 아련한 대망의 자리에 물리적으로 체험 가능하게 이르기를 줄기차게 갈망하는데 있었다. (1)나 운몽의 용문산 기도원 나운동은 6.25전란 때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죽을 뻔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이 있어 이를 계기로 오직 하나님께 온몸을 다 맡기게 되었으며, 수도생활을 통하여 입신, 방언, 예언, 진동, 신유 등의 온갖 신비 체험을 다 맛보게 되었다. 나 장로의 기도와 능력 있는 설교는 많은 병자를 고쳤고, 여러 사람들에게 입신과 방언의 은사를 주기도 하였다. 1954년 이른바 양칠년 창립기념집회를 계기로 나 장로는 본격적인 부흥운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의 부흥운동은 점차 기드온 운동으로 틀 잡혀가기 시작하였으며, 1955년 기드온 성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기드온 신학교와 수도원을 세워 교역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신학을 전공한 바 없으나 기독교 도리학을 통하여 자신의 교리 주장을 집약하였다. 일곱 편으로 된 이 책은 신론, 경륜론, 인생론, 기독론, 성신론, 말세론을 차례로 다루고 있으며, 교회론이 빠져 있다. 그는 공자, 석가가 동방의 성자이며 유,불교가 기독교 복음 안에 조화되는 것이, 진리는 형에 있지 않고 질에 있으니, 진리이면 유교나 불교, 기독교가 다 하나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195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1회 총회는 “박 태선, 나 운몽, 엄 애경, 노 광공 등 비성서적 교훈을 가르치고 교회 질서를 무란케 하는 자의 집회를 불허하고 엄단한다”하고 결의하였으며, 성결교회에서는 1956년 4월에 모인 총회에서 “통일교 박 태선, 나 운몽, 노 광공, 여호와의 증인 엄 애경, 백 권사, 입신파, 방언파를 이단 사설로 규정하고 참가자는 처벌한다”라고 결의하였다. 감리교는 1962년 10월 총리원에서 열린 연합감리사 회의에서, “나 운몽, 백 시응 등 건덕에 해로은 자들을 초빙하지 못하도록 하되 이를 위반하는 교역자는 심사에 부치기로 한다”라고 하였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67년 5월 9일 서울노회에서, 고려파 장로회는 1968년 7월 22일 경북노회에서 “나씨 집단”을 이단으로 취급하기로 규정하였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114. 1993) (2) 박 태선의 전도관 운동 박태선 장로의 철저한 섹트(sect)적 사회윤리의 감람나무교회(천년성), 곧 “한국예수교 전도관 부흥협회”는 사변 후의 교계와 일반 민중 사이에 불길처럼 확대해 갔다, 1955년 3월 하순 남산 광장에서 김 현준 목사와 미국의 스완스 부흥사를 초빙하여 함께 대대적인 연일연속의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박 태선은 기성교회는 죄로 썩었으므로 은혜가 말라 없어졌으니 자신의 안찰 기도를 받고 생명수를 마시고 천년성 신앙촌으로 들어와야 구원을 얻는다고 절규하였다. 그를 향해 동방의 의인(이사야41:2,25),이라고 부르며, “감람나무”(계시록11:4, 슥4:3-14), 또 는 보혜사 심지어는 영모라는 말로 호칭하면서 숭배했으며. 감람나무의 진액을 받은 14만 4천명이 천년왕국에 들어가 왕노릇하게 되는데 그 중의 14만명은 이미 순교한 수가되어 있고, 나머지 4천명은 소사에 있는 소래산이 예수가 재림할 산이니 그곳 신앙촌 천년성에 들어가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한 모양으로 기성교회 신도들을 유혹하여서 수많은 가정을 파괴하였고 이혼으로 부부가 생이별하게 만들었으며, 헌금이라는 미명으로 신도들의 가산을 긁어모아 마침내는 사회문제화하기까지 이르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서는 1955년 7월에 박태선 집단을 사이비 교파라고 규정하였다. 1956년 6월에는 전국 지방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각 교회가 뜻을 모아 박 태선 성명서를 발표하여 이단이라고 성토하였다. 1957년 10월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회를 선두로 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 대한감리회,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기독교 대한구세군의 전국 굴지의 교단들이 단합하여 박 태선과 그의 전도관 활동의 비법과 이단성을 폭로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순진한 교인들이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하였다. (3) 문 선명의 통일교 포교 문선명은 그의 환상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1954년 5월 1일 유호원의 도움으로 통일교를 창시하게 되었으며, 그 원명은 “세계 기독교 통일신령협회”(The Holt Spirit Association for the Unification of World Christianity)이다. 통일교의 최대 목표는 그 이름이 말하는 대로 세계의 모든 종교, 사상, 정치제도까지도 교주 문 선명을 중심으로 통일하여 지상왕국을 건설하는데 있다. 예수는 영에는 성공하였으나 육에 실패하였으니 불완전한 구세주라는 것이며, 문 선명은 영육이 아울러 성공한 완전 구세주로서 능히 세계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일교는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하와와 사단과의 관계가 성적 교통이었으니 만큼, 그때의 정화가 윤리에서의 구속과 같다고 본다. 따라서 이 피의 순결이 횡적으로 한국에서 비롯 전 세계에 미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가족적인 이미지로써의 순혈의 전수 과정을 종교적 의례로 승화, 변성해서 합동결혼을 집행하게 된 것이다, 통일교가 반 기독교적이며, 분파적 생리에 서 있다는 사실이 셋 있다. 하나는 십자가 공로의 부인이다. 그것은 성사된 사실이 아니고 간단히 말해서 옛날에 끝난 사건이다. 예수는 할 일을 다 못 이루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누군가가 다시 와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 교훈이 사뭇 경험적이다. 셋째로, 통일교는 일관된 신비주의 사상이다. 다. 교회 내의 건전한 부흥운동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로부터 선망의 적이 되어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열띤 신앙부흥운동의 성행이라 하겠다. 6. 25 전란으로 교회의 유형적 소유를 송두리째 상실하게 된 한국 교인들은 물질보다 먼저 신앙의 부흥부터 초래되기를 간절히 희구하였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은 그대로 응답을 받아, 심령의 큰 부흥을 맞은 한국 교인들은 방방곡곡에 수많은 교회당을 복구 건립하였고, 그 어디에 가나 은혜 받은 교인들이 차고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전쟁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는 1952년 이 해를 “신도 전도 총동원의 해”로 결정하였다. 신도들은 부흥에 호응하여 모두가 총궐기하여 1월부터 3월까지 개인의 신앙 부흥을 위하여, 4월부터 5월까지는 개인 전도를 하여 이웃에게 성과를 올리기로 했고, 6월부터 8월까지는 집단전도로, 9월부터 12월까지는 교회의 전체적인 부흥을 위하여 성과를 올리기로 했다. 과연 이 4단계 전도운동은 적중하여 상당한 부흥을 가져왔다. 감리교에서는 1953년이 웨슬리(John Wesley) 기념 250주년을 맞는 해였으므로 특별히 부흥 전도의 해로 작정하였고, 부흥의 기세를 크게 드높였다. 그리고 1954년이야말로 장로회나 감리교에 있어서 미국교회로부터 선교를 받은 70주년에 해당하는 해였으므로 이를 기회로 하여 기념사업으로는 무교회 면에 5백교회 설립 운동을, 감리교에서는 1백처 교회 신설운동을 과감하게 전개하여 그 나름대로의 결실을 거둔 바 있었다. 성결교회에서도 1952년 3월에 “춘계대부흥 전도운동”을 전개하여 상당한 교세의 부흥을 초래하였다. 한편 세계적 대부흥사인 밥 피어스(Bob Pierce)와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목사와 같은 인사들이 잇달아 한국을 방문하여 대전도집회를 개최하였음은 한국 교회의 신앙 부흥운동을 위하여 큰 고무제가 되었다. 피어스 목사는 6. 25 전란에 내한하여 초우의 대부흥을 일으킨 것을 필두로 하여 전후 다섯 차례나 찾아와 대부흥집회를 열었다. 특히 1955년에는 자신이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고 서울, 대구, 부산 등 주요도시를 편력하여 대부흥회를 개최하여 수만 명의 결신자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6. 25 전란 중인 1952년 12월 15일과 또 1956년 2월에도 내한하여 부산과 서울에서 각기 전도 강연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수많은 결신자를 거두는 성과를 올렸다. 3. 새로운 교회 부흥운동 1960년대는 우리나라가 정치 사회적인 과도기에서 조국 근대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1960년 4월 19일에 자유당 말기 부정부패의 정권이 붕괴되고, 4. 19의거 13개월만인 1961년 5월 16일에는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교회는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해야 했고,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인 복음을 이 땅의 구석구석까지 뿌려야 했다. 가, 1960년대의 민족복음화 운동 1964년에 김 활란의 발기로 구성된 초교파적인 한국 복음화 운동추진회가 있었다. 여기에는 한 경직, 홍 현설 목사를 중심으로 N.C.C.가 입교단은 물론 보수측 교단과 천주교회까지 대거 참여하여 전국적인 복음화운동이 비롯되었다, 이 운동의 필요에 대하여 홍 현설 박사는 다음과 같이 필설 하였다. “전국 복음화운동은 진실된 기독자라면 누구든지 오늘의 조국의 암담하고 절박한 현실 아래서 이런 종류의 긴급한 전도운동의 필요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욱이 지나간 해의 언론 윤리위원회법을 둘러싼 언론 파동과, 갑자기 열을 올렸던 남북통일론의 대두는 식자들의 불안과 염려를 자아낸 커다란 쇼크였었다. 이러한 민족적 위기의식이 저미(低迷)하는 중에서 지금이야말로 복음으로써만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굳은 신념에서 어느 누가 맨 처음으로 발설했는지를 알아볼 필요도 없이 이심전심으로 이런 생각들이 모여 구체화하게 된 것이 전국 복음화 운동이다. 아무리 모든 종류의 교회 연합운동을 반대하는 극단적인 태도로 나아가는 교파가 있다손 치더라도 설마 이 운동이야 반대하랴 하는 신념에서 시작한 것이다. 이 운동은 어떤 제도적인 초교파운동이 아니며, 따라서 항구적인 조직체가 아니고 하나의 위원회로서 1965년 일 년간 전개할 운동임을 말하고 있다. 이 운동은 기발하고 참신한 새로운 전도 방법을 들고나 온 것은 아니다. 그랬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방법은 우리가 이미 시험해 보고 활용해 본 것들이다. 다만 이번에 이 운동에서는 지금까지의 재래식 전도방법 대로 입으로만 전도하는 방법(Oral Method)에다가 최근에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는 매스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우리의 복음 전달방법을 모다 효율적으로, 보다 광범위하게 미치도록 하자는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 운동에 가담하는 각 교파는 각기 자기 교파의 특색을 살려서 그들의 신년 계획을 이 운동으로 발전적으로 통합 실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주기를 바라고 있다. 예를 들면 구세군은 노방전도로, 감리교회는 속회를 통해서, 성공회는 그 장엄한 예배를 통해서, 장로교, 성결교회는 부흥전도집회나 사경회를 통해서 어떻게든지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는”(고전 9:12) 일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기대한다. 이 민족복음화 운동은 1965년 11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대규모 부흥집회를 개최하므로 써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대규모 부흥집회 이외에도 1960년대 이후의 한국 교회는 개교회마다 연례적으로 부흥강사를 초빙한 부흥회를 개최했다. 이를 통한 교세의 확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성령운동으로 폭발적인 교세 확장을 이루었다. 나. 1970년대의 대규모 부흥운동 1960년대의 부흥운동의 결과로 1970년 초부터 교회는 급진적 성장을 보이게 되었다. 70년대 부흥운동이 활발해지자 한 경직 목사를 대회장으로 한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가 1973년에 개최되었다. 이 전도대회에 대회장으로 있었던 한 경직 목사는 그의 개회인사 말로 밝혔듯이, 이 대회의 목적은 오직 하나 “5000만을 복음화시키는 것”이라고 밝혔으며, 교파를 초월한 대중전도 부흥회라고 그 성격도 말했다. 이때의 전도의 양상을 보면 1973년 5월 16-27일간은 부산, 춘천, 대전, 전주, 광주, 대구 등지에서 예비 지방전도대회를 갖고, 서울대회는 5월 30일부터 6월 3일에 걸쳐 여의도 5. 16 광장에서 열렸는데 대회 첫날 5월 30일 밤에는 51만 여명 참석하였고, 6월 3일 주일 노후에는 115만 여명이 모여 이 대회에 연인원 334만 명이 모였고, 결신자 수는 대회기간에 4만 4천여명이며, 성가대로 동원된 인원이 4만 2천명이었으며, 대회에서만 수집된 헌금은 3천여만원이나 되었다. 그리고 지방대회에서는 부산, 대구, 대전, 전주, 광주, 춘천, 제주, 수원, 인천 등지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동원된 연인원은 1백 36만 명이었고, 결신자 수는 3만 7천여명, 헌금은 330만원으로 집계되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총동원된 연인원은 4,711,588명에 결신자 수는 81,842명. 그리고 수금된 헌금은 33,813,191원이었다. 1974년에는 국제대학생선교회의 후원 아래 한국대학생선교회에 의하여 주도된 세계적인 대전도부흥회인 엑스폴로 ’74(EXPLO \\\'74)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새벽기도회, 낮 공부(전도요원 훈련), 저녁집회, 철야기도회 등으로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연인원 6백 50여만 성도가 운집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예수 혁명”, “성령 폭팔”이란 표어를 내 걸고 초대교회 사도행전의 사람들처럼 변화 받고 한꺼번에 3천 명, 5천 명씩 구원시키는 폭발적인 사건을 기대하면서 베풀어진 동 대회의 대회장 김준곤 목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령의 언어와 설교가 과잉 상태이면서도 신화나 사화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성령은 충만히 받아야 한다면서 이 “성령을 받는 방법은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이 대회는 사도행전의 연장처럼 기도폭발, 말씀폭발, 사랑폭발, 전도폭발의 역사로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하자”고 했다. 이 대회로 국내 결신자 수는 27만 여명이며, 외국인 결신자 수는 1,192명이고, 교인 동원수 1974년 8월 13일 밤 75만, 14일에 136만, 15일에 68만, 16일에 153만, 17일에 158만, 철야기도회만 연인원 143만 명이며 성가대로 동원된 연인원이 9만 명이었다고 보고 되었다. 이제까지의 전도 부흥집회가 모두 외국 자본에 의해서 외국인 강사에 의해서 주도되어 온 것에 대한 민족적인 자각과 함께 순수한 우리 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1907년 평양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70주년을 기념하면서 민족적인 대부흥운동을 열기로 부흥사들이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가칭 ’77년 “민족복음화 성회 발기회”로 이름을 내걸고 ’74년 11월부터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광주등 12개 대도시에 월 1차씩 연합성회를 성공리에 마쳤다. 이때 내건 표어는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한국인에 의해서, 오직 성령으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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