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위한 여행
자나 칠더스(Sanfrancisco 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
영성과 예배 사이의 상호 연관성은 일견 분명해 보인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통해 영적 체험에 이른다. 그리고 그 영적 체험은 다시 예배에 대한 더 큰 갈망으로 이어진다. 만약에 교회가 이 순환과정을 여행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이 길로 떠날 수만 있다면, 지금의 교회는 보다 강건한 신도들로 충만한 보다 강건한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의 성장이 뒤따를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경험 속으로 이끌려 들어올 것이고, 그 나라가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물론 문제는 목회자들이 신도들로 하여금 이러한 경건에의 여행을 떠나게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가 어렵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여정과 그 여행이 목표로 삼고 있는 대상 모두가 미궁(迷宮)이라는 데 있다. 찬송가 작자가 "굽이굽이 위를 향해 나 있는(winding ever upward)"이라고 부드럽게 묘사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길은 그야말로 미로이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더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 여정의 목표인 그 '대상'은 동시에 주체이기도 함을 깨닫게 된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성서 본문 그 자체의 주인공이시기도 하다.
우리는 예배의 대상(object)이 철학에서 말하는 '객체(다시 말해서 이성에 의하여 지각 혹은 파악할 수 있는 것)'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배의 대상은 오히려 예배의 주제, 다시 말해 예배에로 우리를 이끌고, 예배의 주요 원인인 자기계시의 주인이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그와 씨름하며,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고, 그에게 간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루기 힘든 본문을 지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풀어 나가듯이 하나님을 통달(master)할 수는 결코 없다. 하나님은 10대의 남자친구도, 할머니의 무릎도, 우리가 다가가는 친근한 'Yoda'도 아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야훼 하나님이실 뿐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꺼이 다가와 주실 뿐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가 감히 교만한 마음을 품을 수 없는 그러한 분이다.
"빛 가운데 계셔서, 우리가 다가갈 수도 없고, 우리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영원하고 보이지 않는 지혜의 신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분이시다. "세세 무궁토록 영원하신 우리 생명의 주 하나님"은 우리의 방법과 우리의 측정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사랑 그 자체"이시지만 내가 '붙잡으려'하면 그것을 거부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뿐이시다.
그렇다면 영적 예배를 열망하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러한 하나님과 교제하고 만나며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선한 의지교회가 강건해지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를 갈망하는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모스 와일더(Amos Wilder)는 "교회에 가는 것은 화산에 가까이 가는 것과 같다. 그곳에 가면 세상이 녹고 마음속의 모든 불순물이 걸러진다. 제단은 불꽃을 튀기는 배전용 제3궤도(third rail)이다. 성전은 보이지 않는 방사선이 있어서 손목시계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원자로 옆에 있는 방과 같다." 진실로 교회에 가는 것은 그러한 것이지 않는가? 분명히 그러한 하나님의 현존의 증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아마도, 와일더가 의미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 맡겨진 모든 원자력, 전기력, 화산 같은 힘을 맡은 청지기가 될 것을 기대하실 것이다. 예배란, 개인에게든 공동체에게든,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현존과의 강력한 만남이 아닌가?
"그건 그렇다, 그러나…"가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건 그렇다, 그러나…"는 기독교인 생활에 있는 수많은 모호한 문제에 대한 적절한 답변으로 사용되는데, 그것은 또한 예배의 목적과 영성의 본질에 대한 이상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원하시고 우리가 영적 성장에로 이르는 길을 걸어가길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영적 예배와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는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이정표
기독교 역사를 통해 "예배"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는 다양하였다. 칼빈이 예배의 개념을 명쾌하게 밝히긴 했지만, 개혁주의 전통에서 꼭 이것이다 하고 전해 놓은 정통주의적 견해는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 특히 개혁주의 전통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의들을 간략히 검토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첫째, 물론 여러 전통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성서에 따라"예배한다고 믿는다. 성서를 강조하는 것은, 종종 그것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특별히 개혁주의 전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비록 종교개혁자들이 열광적인 문자주의를 생겨나게 한 장본인들로 비난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성서에 따라서"는 그러한 열광적 문자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염두에 두었는데, 그것은 기독교인의 예배는 성서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행위이다. 기독교인이 예배하는 것은 성서가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Martin Bucer)와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들이 이해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핵심요소는 말씀선포, 자선, 주의 만찬, 기도 등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성서에 따라"예배하는 것은 성서와 선포를 예배의 초점으로 삼는 것은 의미한다고 주장해 왔다.
2) 종교개혁자들은 신약성서를 연구한 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한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기도(요 14:14; 15:16; 16:23), 설교, 가르침(행 5:41), 그리고 자선(마 18:5, 막 9:38-41, 행 3:6)은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신약성서의 교회는 예배를 히브리서(7, 9, 10, 13장)에 표현되어 있는 대로 올리어진 그리스도가 드리는 예배의 일부로 이해하였다.
칼빈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말을 해석하면서,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예배 역시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동맹자요 친구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칼빈은 로마서 8장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도 하늘 처소에 앉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이 대단히 신비적인 말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마치 저 차가운 개혁주의 전통의 창건자인 칼빈이 신비주의적인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처럼 들린다. 여기서 그는 20세기말인 오늘날 사람들이 '영성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게끔 할 수도 있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3) 칼빈은 물론 예배를 성령의 역사로 보았다. 예배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바울적인 이해를 통하여 그는 예배는 단순한 인간의 행위 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강조하였다. 실제로, 이렇게 볼 때 예배는 고지자(the Annunciator), 즉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사이로 가시는 분, 다시 말해서 빈처스터(Wincester)의 주교 테일러(John V. Taylor)가 "사이로 가시는 하나님(GoBetweenGod)"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한 분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드리는 예배의 특징은 성령의 조명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인데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은 예배 때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 자기들의 예배관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예배자들이 이러한 기도를 들을 때 그들은 그들 각자 각자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것을 생생하고 극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4) 개혁주의 전통의 예배관에서 가장 강조해 온 것은 아마도 예배는 응답의 행위라는 점일 것인데, 이것은 교회사 전체를 통해 견지되어 온 예배관이기도 하다. "기독교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놀라운 구속행위에 신앙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응답하는 행동이다."(Presbyterian Church, USA, Book of Order, S. 2.0100). 어거스틴부터 언더힐(Evelyn Underhill)에 이르는 위대한 기독교사상가들은 예배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여, 그것을 인간 본성에 뿌리박은 응답으로 보았다. 언더힐이 말하는 대로, "예배는, 어떤 종류 어떤 등급의 것이든, 영원한 분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배 때 자신들의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늘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머리로는)분명하게 알고 있다. 이점에서 그들은 보다 미신적이었던 (고대의) 그들의 조상들과는 다르다. 그들 역시 예배를 '응답'으로 보았을지 모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포 혹은 탐욕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기독교인의 예배는 이와는 달리 감사 혹은 기쁨에 근거한 것이다.
미지의 것을 통제하려는 노력(공포에 근거한 응답)과 특정한 목적으로 신의 비위를 맞추려는 시도(탐욕에 근거한 응답)는 인간의 정신 속에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경향이라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일부 종교에서는 탐욕과 공포에 근거한 예배를 공개적으로 드린다.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그러한 예배와 기도를 드리며, 그러한 행위가 기독교 아닌 다른 것에 근거를 둔 것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다.
5) 마지막으로, 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개혁교회 기독교인들은 예배가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edifying)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용어는 마틴 부처가 특별히 좋아하던 말인데, 그는 칼빈의 예배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용어는 물론 고린도전서 14장 1-6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예배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분명하게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상태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봉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현존과의 만남을 통하여 '성장'하여야 한다.
이 "유익을 주는 예배"는, 회중에게 강력한 감정적 경험을 갖게 할 지는 모르지만 그들을 성전의 네 벽 안에만 머물러 있기 만드는 예배와는 대조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익을 주는" 예배는 기독교인을 모이게 하되,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도록" 그들을 파송하기 위함이다(Presbyterian Church, USA Book of Order S.1000).
이처럼 유익을 주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비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배, 성만찬 때의 회상기도(anamnetic prayer:그리스도의 희생을 회상하는 성만찬 기도로,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는 말로 끝난다. 역자 주), 혹은 설교(특히 설교를 성례전으로 이해할 때)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예배는 "유익"을 주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도록 준비시키고 동력화 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이다.
예배의 정의에 관하여 불분명하거나 의견을 달리하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영성(spirituality)"의 정의에 관해서도 기독교인들마다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있다. 개혁주의 전통을 따라는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으로 "경건(piety)"이라는 단어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아주 최근에 와서야 "영성"이라는 단어에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올슨(Jeannine Olson)과 라이스(Howard Rice)같은 개혁주의 전통의 예배학자들은 이 문제를 새로운 혹은 낯선 개념을 차용하는 문제로 보기보다는 새로운 어휘를 받아들이는 문제로 본다.
그 둘의 주장에 따르면, 영성이란 개혁주의 전통에 새로운 개념이 아니며, 그 말을 예배와 관련시켜 사용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와는 정반대로, 영성은 우리 현대 기독교인들이 우리 자신의 전통에서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올슨은, 개혁주의 전통을 따르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경우, 그들이 찾는 것은 바로 그들의 뒷마당에 있다고 설명한다.
개인기도와 가정에서의 모임이 활력을 잃을 때 개혁교회 기독교인들은 로마 가톨릭교도와 감독교회 교인들(Epicopalians)이 영성이라고 부르고 어떤 개신교 도들은 전통적으로 경건이라고 부르는 것을 애타게 찾는다. 그러나 개혁교회 교인들이 구하는 실체는 바로 가정과 교회와 들판에서 드리던 그들 자신의 전 통적인 기도와 찬양과 예배 속에 있다.
라이스의 주장 역시 이와 비슷하다. 그는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이 우리가 최근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영적 경험을 권장하는 내용이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기독교인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은 모두 "하나님 경험"을 권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라이스는 주장한다.
칼빈은 반복해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에 관하여 말하였다… 이 범주들은 그의 신학의 핵심이다. 분명해지지 않은 것은 칼빈이 "지 식"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말은 너무도 자주 지적이고 합리적이며 비감정적인 함의를 가진 말로 해석되어 왔기 때문에 하나 님을 아는 것은 곧 소요리문답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의 속성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칼빈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가 사용한 "알다(Know)"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실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라이스는 계속해서(John Bowsma의 견해를 따라), 칼빈은 종종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인간의 천둥 체험에 비유하였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천둥을 "안다"는 표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20세기 기독교인들이 칼빈이 사용한 이 "알다"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는 그것을 "경험하다(experience)"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그는 주장하는데 이는 매우 그럴듯하다고 생각된다. 프랑스어에서 "알다"는 흔히 경험한다는 의미로 번역되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바우스마와 라이스는 칼빈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영성을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 혹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려고 애쓰는 행동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최근 수세기 동안 자신의 신학이나 예배를 "영적인" 것으로 보지 않은 전통 안에도 영성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실 하나님 경험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피하기 어려운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칼빈이 이에 관하여 한 마지막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현존은) 때때로 잠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되돌아와 새로운 힘으로 돌진해 온다. 만약(하나님의 현존을 피하고 싶어하는)어떤 사람이 불안한 양심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은 술주정뱅이나 미친 사람 이 잠자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잘 때에도 편안히 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섭고 끔찍한 악몽에 계속해서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경스런 자들은 바로 그들 자신이 하나님에 관한 관념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 에 언제나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례(實例)이다(Ⅰ,Ⅲ:1).
이상에서 "예배"와 "영성"이라는 단어를 그 동안 교회가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를 간략히 살펴보았거니와,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한 용어들의 기술적이고(descriptive) 규정적인(prescriptive) 개념에 관해 길게 이야기해 왔다. 즉 기능적 정의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영적 예배란 무엇이고 어떻게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인가? 적절히 표현할 말이 없으면 "신비"라는 단어로 얼버무리고, 그러한 문제는 그냥 덮어두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 왔다. 현대에 들어와 이 문제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약간 이루어졌는데, 그것들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의 주제로 분류할 수 있다.
1) 어떤 사람은 예배를 회상하는 행동으로 이해한다. "예배란 신앙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일차적인 방식이다."
2) 다른 사람들은 예배의 본질을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라는 이중적 운동으로 이해한다. "예배의 핵심은 자신의 생명을 인간에게 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 생명을 취하도록 하려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3) 제3의 집단은 예배에 있어서 제의(ritual)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배란 그리스도와 우리의 은총관계를 제의적으로 재연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궁극성을 내포하고 있는 양자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회상행위로 정의하든, 아니면 제의나 응답으로 정의하든, 정신만을 만족시키는 예배는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예배와는 거리가 있다는 데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이러한 통찰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교회사의 거의 모든 시대에,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의식을 넘어선 호소(transconcious appeal)"라고 부른 것을 옹호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가지의 예만 들어도 이점을 기억하는데 충분할 것이다.
교회사에서 일어난 모든 운동 가운데 청교도 운동처럼 철저하게 합리적인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은 거의 없다. 청교도들은 엄격한 생활방식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지적인 활동을 최우선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예배가 인간의 의지와 이성에 호소하는 데 집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청교도 전통에서는 이성보다는 인간의 감정을 더 강조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청교도들이 인간의 감정을 우선시 하였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J.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C. 촌시(Charles Chauncy)가 회심의 본질에 관해 벌인 논쟁이다. 이 논쟁은 사유와 감정의 상호연관성에 관한 토론에 집중되었다. 촌시는 설교란 청중의 지적 과정(cerebral process)에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청교도 신앙의 거두 에드워즈는 "가슴의 느낌"(sense of the heart)을 강조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청중은 자신들이 가슴으로 이미 아는 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회심이란 일차적으로 감정의 문제라는 것이다. 에드워즈와 많은 청교도들은 이러한 "가슴의 느낌" 이야말로 영적 회심의 진정한 원천이라고 본 것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들을 "차가운" 사람들로 생각해 왔는데, 그것은 실제의 청교도와는 거리가 먼 말이다. 그것은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는 태도에 적용되어야 하는 말이다.
궤도수정
하나님과의 교제에 이르는 길은 당연히 지금까지 우리가 "영적 예배"라는 제목 아래 헤쳐 온 영역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길에는 수없이 많은 철로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 어떤 철로로 가면 좁은 막다른 골목으로 통하는 것 같고, 또 어떤 철로로 가면 재수가 좋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길도 목적지로 직통하는 것이 없고, 어떤 길도 지도를 정확하게 그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궤도수정을 해야 할 것 같다.
1) 출발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 답은, 여행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의 기원과 동기에 관하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배는 "영적 경험에 이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배는 응답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은혜로운 행동에 대해 응답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한 응답의 행위를 통해서 영적 경험이 생겨나긴 하지만, 그것이 예배의 목표는 아니다. 그것은 성적 경험이 결혼의 목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경험을 얻으려고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미신적"이라고 조롱하는 저 옛날 사람들에 못지 않게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D. 윌리스(David Willis)는 그의 독창적인 저서 위험한 기도(Daring Prayer)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시도하는 위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이러한 시도 가운데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의적으로 이용하고 그것을 마치 레이저광선처럼 어느 한 방향으로 집중시키는 기술이 포함된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마술사 시몬이 안수에 대하여 가졌던 태도와 똑같은 때 도를 갖는 것이다. 안수를 하자 성경이 내리는 것을 본 뒤 그는 "나에게도 그런 권능을 주어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 고 청하였다.(행 8:19)
윌리스는 계속해서, 이러한 영적 탐욕에 대한 대안은 우리의 예배를 "신뢰와 사랑과 희망이 점점 더해 가는 관계성의 표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데, 그것은 우리가 먼저 사랑 받을 만한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떤 분의 사랑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예배에도 적용이 된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선행적 사랑과 은총에 응답하는 행위인 것이다.
부드럽게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고 예배드리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단테는 그의 저작에서 이 점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그의 신곡(Divine Commedy)을 보면, 사탄은 빙호(氷湖)에서 자신이 하나님보다 힘이 더 세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채 영원히 얼어붙어 있다.
2) 첫 번째 구비를 돌아서
하나님과의 교제로의 여행길을 떠난 직후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왠지 불안하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평소에도 자주 경험하는 그러한 불안이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합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종종 이성을 초월하는 차원을 가진 영적 예배를 경험하면 대단히 불안해진다. 우리가 글을 통해 복음의 "초의식적"호소를 접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은 착상(good idea)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존이 우리의 존재 전체와 교제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맡기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은 자신의 지적 과정(cerebral process)속으로 움츠러든다.
설교자들이 합리적인 호소만으로는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데 제한적인 효과를 거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초합리적인 것을 새롭게 평가하기 시작해야 한다. 다시 칼빈의 예를 들면, 그는 교회사에서 가장 냉철한 지성을 소유한 인물로 생각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는 수단은 합리적인 능력만이 아니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길을 '설득(persuasion)'이 아니라 '조정(accommodation)'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사실은 바울의 입장을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한 걸음 한 걸음
예배든 영적 경험이든 성서적 기억을 수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미국 교회에서 영적 권태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상당부분은 성서적 기억의 상실에 의해 야기되는 현상일 수 있다. 우리 자녀들을 기독교 공동체의 기억이라는 물 속에 들여보내 세례를 주는 일은 점점 중요해져 가고 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신앙적 전통은 예배와 영성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기독교인의 예배와 영성의 관계와 관련된 핵심적인 문제는 …세례반, 성서, 식탁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공동체적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다. 성서 속의 전체 이야기에 대한 살아 있는 기억이 없을 때 진정한 예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아는데 필수적이다. 이러한 기억은 또한 기독교인의 희망을 더욱 더 분명하게 해준다. 이 두 가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교에 이르는 길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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