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생각! 말!! 행동!! 영성!!

영성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21. 1. 2. 22:22

영성이란 무엇인가?

 

 

 

 

1. 영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영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 먼저 영성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바울 처럼 결혼도 하지 않고 고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 결혼을 하더라도 자식을 낳지 않고자 하는 사람, 또 TV를 치우고, 세속적인 것을 끊고 기도에만 전심하고자 하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부흥사나 기도원 원장 같이 많은 은사가 나타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한 때는 사도 바울처럼 결혼을 안하고, 자식도 안 낳고 순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대학 1년 때에는 캠퍼스 뒷산에 올라가서 손에 대 못을 박고 예수님을 닮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단한 것처럼 보이고 영적인 것 같은 이런 뒷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실망을 하고 의문을 품게된다. 그것이 아닌데… 도대체 어떤 것이 올바른 영성인지 혼돈이 올 때가 있다. 유진 피터슨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게 되고 영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거룩하게 보이는 교회나 목사님이 아니라 오히려 푸주간 일을 하시는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는 영성이 얼마나 포괄적인가 하는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겉으로, 부분적인 것으로 접근함으로 잘못 된 편견으로 빠진다는 것이다.

어떤 성자와 창녀의 집이 마주보고 있었다. 서로 매일 보며 지냈다. 이 성자는 날마다 네온싸인이 번쩍이는 창을 바라보며 무언인가 생각하였다. 창녀도 이 성자를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우연히 같은 날 죽었다. 그런데 천국에 가보니 창녀는 천국에 와 있고, 성자는 지옥에 와 있었다. 두 사람을 데려온 심부름꾼들은 무엇인가 잘못 착오가 있다고 생각하며 의문을 품었다. "천국마저 이렇게 불공평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때 현명한 심부름꾼이 대답했다. "착오가 아니라 바로 온 것입니다." 성자가 지옥에 온 이유는 겉으로는 거룩한 삶을 살았지만 속으로는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나는 언제나 한번쯤 저 네온싸인이 번쩍이는 곳에서 창기와 더불어 한번 즐겨볼 수 있을까?" 묵상하였고, 창녀는 비록 죄악 된 삶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성자를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저분처럼 고결하게 살 수 있을까?"성자의 삶을 사모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성자는 중심의 소원을 따라 지옥에 떨어졌고, 창기는 천국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하!" 이와 같이 영성은 겉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영성은 창녀 속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 21:31). 그러므로 우리가 영성 생활을 바르게 하려면 편견 된 시각과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생각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한다.

그러면 '영성'이 무엇인가? 영성은 영어로 spirituality, 간단히 설명하면 영적 성품, 우리의 생각과 삶속에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그 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분에 대해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영이 우리의 말과 행동과 삶 속에 스며들어서 마침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형성(그리스도 화) 하는 능력이다. 영성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며, 신앙은 이 영성이 겉으로 드러나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2. 영성의 목적

그러면 영성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영성이 있어야 영적인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고, 영적 열매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영성의 목적은 '예수님' 자신이다. 곧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중심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다. 예수님이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통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다 알지만 실제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 대게 예수 주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 당시도 그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정작 그 분을 중심으로 터치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붕을 뜯어 달아 내린 중풍병자나 옷 가에 손을 대었던 혈루증 앓는 여인만이 고침을 받았다(막 2, 5장). 나머지는 돌아갔다. 많은 신자들이 새벽기도, 전도, 봉사, 제자양성 등 무엇인가를 했다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것들은 마땅히 신자들이 이렇게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취 지향적인 신앙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순간 순간 넘어지고 자빠지며 굴곡이 심하다. 잘 하였을 때는 자만하게 되고, 못하였을 경우는 좌절감과 정죄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 신앙은 속히 주변 변두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엇을 성취하고 못하는 것이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 자체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고, 그 분이 약속하신 성령과 친교를 해야만 우리 신앙이 풍성해지고 성장 할 수 있다. 시편 2:12절을 보면 "그 아들에 입 맞추라"는 말이 있다.
이 말씀도 예수를 사랑하고, 이 사랑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예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와 복을 결정한다고 말한다(고전 16:22).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지만 힘이 없고, 은혜가 없다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삶에 중심에 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여러 복잡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 아들에게서 빗나간 것이 문제다. 예수님께서 에베소서 교회를 책망하실 때 "너의 첫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고 하셨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살피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셨다. 에베소 교회는 겉으로 문제가 없는 아주 훌륭한 교회였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그들은 희생과 진심을 드려 교회 건축도 하고, 역사도 일으켰다. 그러나 한가지 예수님께 대한 사랑에서 빗나갔을 때 책망을 받게되었다.

영성은 외적인 역사보다도 예수님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신앙은 꾸준하게 되고, 어떤 상황과 조건을 띄어 넘어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 요한복음 10 :10을 보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영성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우리 삶 속에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가에 따라서 영성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다. 영성에 따라 실상은 부요한 자도 되고, 실상은 가난한 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풍성한 영성 생활을 할 수 있을까?

 

 

 


3. 균형 잡힌 영성

E.글렌 힌슨은 건강한 영성을 위해서 네 가지가 균형이 잡혀야 한다고 하였다. 첫째, 경험적 차원. 둘째, 지적 차원. 셋째, 사회적 차원. 넷째, 제도적 차원이다. 이는 마치 네 개의 상다리와 같아서 하나가 없으면 책상은 흔들리고, 두 개가 없어지면 쓰러진다고 한다. 즉 영성은 다양한 측면에서 넓은 시야를 열어놓고 예수를 배워야 예수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하나의 다리로 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편견 가운데 빠져 말씀 파, 성령 파, 사회 운동 파 등 다양한 종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아도 삐딱거리게 쓰러지게 되는 이유는 이런 영성이 균형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영성을 하려면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경험적 차원의 영성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론이나 관념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삶 속에 실체의 하나님을 만나고 알고 경험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인격적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 하고, 말씀을 순종하고 약속을 체험해야 한다. 또 성경에 기록된 대로 치유와 다양한 은사들도 체험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불확실한 믿음을 굳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을 중시한 나머지 방언, 은사, 병 고침 등 외적으로 경험적인 것만을 강조하게 되면 신비주의로 흐를 수 있다. 자신들의 신앙이 최고인 것처럼 주장하는 은사 중심 오순절 파들의 문제가 이런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경험은 뜨겁지만 삶의 인격이 갖추어지지 않기 때문에 덕이 안 되고, 또한 영적 교만 때문에 다른 사람의 배척을 받게 된다.

둘째, 지적 차원의 영성
우리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깊은 신앙으로 이끌려면 경험적인 것만으로는 안되고 지적인 영성이 필요하다. 즉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가는 투쟁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을 꾸준히 공부하고, 묵상하는 삶은 영성에 필수적인 것이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호 6:3). 어느 정도 안다고 해서 더 이상 배우지 않는다면 신앙도 깊어질 수 없다. 이는 마치 영어 공부하는 사람이 어휘실력을 키우지 않으면 항상 기본적인 대화밖에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경은 물론이고 생각하고 사고하는 지적 폭을 넓히기 위해서 계속 배움의 길을 가야한다. 신학적 공부도 필요하고, 영성 깊은 선배들의 책을 꾸준히 읽는 것도 필요하고, 삶 속에서 다양하게 배울 수 있는 채널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보고 깨닫는 것도 깊어지고 신앙도 깊어질 수 있다. 교회에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지적 차원으로 가치관 정립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데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러나 지적인 것이 중요하지만 자칫 머리로 아는 데만 머물러버리기 쉽다. 그렇게 되면 머리만 커지고 heart가 없는 냉한 지적 신앙 인이 되기 쉽다. 처음에는 누구나 새로운 지식에 은혜를 받지만 어느 정도까지 가면 그 이상은 말씀을 파는 것도 한계에 이르게 되고, 더 이상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못한다. 사람 섬기며 내면문제를 돕는 것도 한계를 느끼게 되다. 말씀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감동이 되지 않고, 삶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어느새 말만 하는 지식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차원의 영성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배우고 깨달은 진리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핵심은 위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옆으로 이웃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은 삶 속에서 다른 사람과, 사회로 연결되어지고 나누어져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불의 한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갖고 돕고, 나그네를 환대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는 지식을 실천한다. 이렇게 이웃에게 사랑이 실천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나 우리의 신앙이 굳어지지 않고 온전해질 수 있다. 대게 사람들은 예배에서, 수양회나 세미나를 통해 은혜를 받는 것을 의존한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설령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가정에 돌아가서 부부관계나 자녀 관계에 사랑이 실천되지 않고, 캠퍼스나 직장에 나가서 받은 말씀의 은혜가 실천되지 않고 차단된다면 진리는 단지 지식으로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될 때는 성경 공부하는 것도, QT(일용할 양식, 소감 쓰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고, 신앙생활에 대한 열정을 접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정체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알수록 받은 말씀 하나라도 실천하고 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그 지식은 산지식이 되고, 은혜는 계속 유지되고, 우리의 신앙은 살아있고 약동하는 신앙이 될 수 있다. 성경에 이런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느니라"(히 13:2)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 자신도 우리가 가난한자, 헐벗은 자, 갇힌 자를 대접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너도 가서 이같이 행하라고 하신다. 이는 단지 봉사차원이 아니다. 사랑을 베풀고 섬기는 과정 속에서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영성이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도 길가에 쓰러진 강도 만난 자(불행한 자, 어려운 성도들)를 심방하여 돕고 나면 오히려 힘이 나고 은혜스런 이유도 여기 있다. 단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이 풍성해지려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소흘히 해서는 안 된다. 삶의 영성, 즉 사회적 차원의 영성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 켈리라는 사람은 지나치게 사회적 관심에 매일 때 영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질 것을 우려하였다. 잘못하면 봉사활동에 그치게 되고, 그 사랑도 자기 의를 쌓는 결과가 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들인 후에는 '자기 사람들'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래 복음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동이 따르는 사회적 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하며, 주님 앞에서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하고, 자신이 들어 날수록 더욱더 주님께 영광 돌리며 영성의 내면화에 힘써야 한다.

넷째, 제도적 차원의 영성
그러나 위에서 세 가지 영성이 살이 찌려면 제도적 영성이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제도적 영성이란 교회 전통과 규범, 예배의식 등을 말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교회 제도들의 심각한 결점과 약점을 인식해왔다. 그래서 교회 제도를 형식적인 것으로 무시하고 부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무교주의(無敎主義)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잘 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런 교회제도 안에서 우리의 기본적 신앙이 보호받았고, 성장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메조리 J톰슨은 공중 예배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도 없다고 하였다. 예배에 행해지는 기도, 성례 전,그리고 말씀 선포를 통해서 교회는 계속해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으며, 예배는 모든 영성훈련의 기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 영성이 풍성해지려면 교회제도의 영성을 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전통과 제도가 형식화되지 않도록 하며 동시에 정체성을 영적으로 잘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영성이 없는 성전 개혁을 하셨지만, 기본 안식일을 준수하시면서 회당에서 생명이 말씀을 선포하시고 불쌍한 영혼을 치료하시는 일을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가끔 교회를 다니지만 예배에 가치를 두지 않고 형식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옳지 않은 일이다. 예배가 어떻게 진행되고 말씀이 선포되는가, 기도생활이 어떻게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가, 교회 교육이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따라서 그 교회 성도의 기본 신앙의 골격이 갖추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교회 제도에 따라서 에베소 교회가 될 수 있고, 서머나 교회도 될 수 있고, 빌라델비아 교회도 될 수 있고, 라오디아 교회도 형성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생각할 때 제도 영성처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 성수, 십일조도 기본적으로 잘해야 하고, 예배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도록 경배 찬양과 말씀 선포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한다. 또 건강한 영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 깨어 기도해야 하고, 교회에 맞는 영성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교회 제도가 바르게 세워지지 않고는 개개인 성도들의 영성도 바르기 될 수 없다. 제도는 좋은 내용을 담기 위한 그릇인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 지적, 사회적인 영성을 무시하고 제도의 영성만 강조하다 보면 또 모든 것이 형식으로 흐르고 겉만 뜨거운 교회가 될 수 있다. 이런 교회의 교인들은 교회에서만 뜨겁게 소리지르는 위선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영성을 위해서는 어느 한가지만 강조해서는 안되고, 다양하게 포괄적으로 경험적 차원, 지적 차원, 사회적 차원, 제도적 차원에서 골고루 영성이 균형 잡혀야 한다. 신앙은 어느 한가지만 전문적으로 한다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깊어지려면 기도를 해야하고, 기도가 깊어지려면 말씀을 기초해야하는 것과 같다. 하나만 깊은 것은 깊은 것이 아니라 편협한 것이다(물론 전문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상호 균형을 이룰 때 깊어지는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겸손하게 신속히 배우는 교회는 성장을 하고 세계를 주도해나가고 있다. 어떤 교회는 선교단체의 제자양성, 세계선교를 전략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하고, 그러면서도 사랑의 봉사를 꾸준히 실천하며, 음악이 섞인 경배찬양으로 젊은이들의 심령을 사로잡으며 깊은 말씀으로 비전을 제시한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다양한 은사들을 살려 전문사역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대적으로 깨어서 우리도 부족한 것을 열심히 받아들임으로 영성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은 커져도 개인적으로 신앙은 삐딱거리며, 좀처럼 예수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그러면 나 자신과 우리 선교회의 영성 수준이 어떠한가 체크해보자. 내가 속한 모임은 그 동안 40 년 만에 1만명가까이 제자양성과 1500명 선교사를 파송 하는 큰 역사를 이루어 왔다. 이는 하나님이 이루신 큰 역사이며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이런 고민을 하였다. "내가 비록 이런 큰 단체에서 사역을 한지 20년이 지나고 있지만 내 개인 신앙의 영적 수준은 어떠한가? 나는 과연 영성이 있는지? 나는 정말 말씀의 전문가인지? 나는 정말 기도하는 사람인지? 사회 봉사활동에 기여를 잘 하고 있는지?" 일은 많이 하였지만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하면 나의 영성이 너무나 어리고,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교회 사역과 제도 속에 쫓기고 좇기며 피곤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울은 경륜이 깊어질수록 이렇게 고백하였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그런데 바울과 같은 그 분을 믿고 따르는 나 자신은 어떠한가? 좁고 옹색하고 가난하고 구차하고 한 사람도 품고 섬기기 어려운 자가 아닌가. 왜 나는 다른가?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잠시 잠깐 성취감으로 기쁨을 얻긴 하지만 여전히 영적 상태는 곤고하고
빈약하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었다. 기쁨과 행복도 역사 의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과연 나의 영성을 사역으로, 성도들의 열매로, 띄어난 제자양성으로 그렇지 않으면 설교말씀으로 측량할 수 있겠는가? 물론 나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입고, 말씀 때문에 남았고, 말씀 때문에 변화 받았고, 그리고 현재도 이 하나님의 역사를 사랑한다. 그러나 4년 5년 10년이 지나면서 그 말씀들도 더 이상 우리의 신앙을 진보시키지 못하며, 신앙의 인격이나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아왔다. 점점 머리 신앙에 머물러 판단력만 늘어가는 사람들, 보이는 열매가 없으면 신앙에 기쁨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 모임을 떠나면 인격적인 신앙이 약하고 다른 교회에서는 적응이 안 되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자기 것이 최고라는 자기 생각과 독단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을 본 것이다. 과연 나와 우리 성도들의 영성 지수는 높은 것인가?

내가 한번은 어떤 형제와 대화하게 되었다. 그 분은 아주 성실하고 열심히 주를 섬기는 목회자 후보생이었다. 나는 그 분이 이러한 충성스러운 모습을 볼 때 은혜가 되었다. 그런데 대화를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분은 온 힘을 다해서 제자양성을 하고자 애를 쓰고 있었지만 새 신자 전도 열매가 없어서 고민이라는 것이다. 여름 수양회도 새 신자를 데려 가야하는데 염려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본래 결혼도 안 하려 하였고, 결혼 한 후에도 목양을 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아기도 안 갖고 있다고 하였다. 정말 사도 바울 같이 훌륭한 분이고 성실한 분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성이 너무 약하다는 것과 내면은 영적 빈곤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본 것이다. 내가 이 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자네, 그러면 결혼도 안하고, 아기도 안 갖고, 그러다가 양도 열매로 얻지 못하며 어떻게 할 것인가? 열매는 하나님 소관 아닌가?" 그는 수궁하였고, 나는 이렇게 다시 말해주었다. "신앙의 푯대를 예수님께 두고, 예수님을 배우고 알아 가는데 초점을 두게. 예수님을 배우는 것은 성공해도 배우는 것이고 실패해도 배우는 것이데. 결혼 생활하며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것도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고, 거기서 하나님을 잘 배우면 제자양육의 비밀도 터득할 수 있는 것이네." 내가 이 분의 이야기는 하는 것은 바로 이 분에게서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오늘날(개혁 전) 열심을 다하는 우리 형제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열심히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서 부모 형제 전 토도 버리는 희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성의 균형이 안 잡히면 그 희생과 열심도 나중에는 원망으로 바뀌게 되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영성이 없을 때 영적인 종들이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것을 보았고, 영적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모든 인격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가끔 우리 모임 가운데서도 이런 돌출적인 행동을 해서 충격을 받게 하는 사람을 본다. 잘 해 왔고 믿음직하던 사람들 중에서 말이다. 때론 내가 그런 요주의 인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부인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 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우리 신앙의 경각심을 주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열심히 최고라는 자가당착 속에 빠져있어서는 안되고 주님 앞에서 나의 영적 수준을 늘 체크 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과감하게 주변에서 안으로, 인격적 깊은 영성으로 들어가고자 노력해야 해야 할 것이다.


4. 영성이 풍성해지는 원리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풍성하고 뛰어난 영성을 개발을 할 수 있을까? 이제 영성을 위한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 영성이 풍성하려면 균형 잡힌 영성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무조건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고, 1:1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예배를 빠지지 않고, 봉사 많이 한다고 해서 영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가 눈과 귀가 말씀과 모든 예배, 모든 사람, 모든 삶과 사건, 자연을 향하여 예수님을 느낄 수 있도록 열려있어야 한다. 옷감 장사는 길을 지날 때 사람들의 옷만 보이고,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은 차만 보이고, 집을 이사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은 집밖에 보이 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과거에 노트북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자나깨나 길을 갈 때나 노트북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노트북을 얻을 수 있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예수님만 보여야 한다. 사람을 보아도 예수를 보고, 자연을 보아도 예수를 보고 사건 속에서도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는 보이지 않고 돈만 보이고 문제만 보이고, 내 교회 목사님, 내 성도들, 내 자식 등 사람들만 보인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 보이고, 무슨 소리가 들리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영성의 모습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답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욥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 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 편에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고 고백하였다(욥 23:8,9). 영성을 하지 않으면 현재도 이 같은 심정을 느끼며 신앙 생활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영성 있는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16:8 )

그러므로 풍성한 영성을 위해서는 영적 눈이 열려 성경과 모든 삶 속에서 예수를 보아야하고, 예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소한 일들 속에서 도 하나님의 영적 역사를 접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 영적 귀가 열려 성령이 교회에 들려주시는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 사건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즉 생각하고 사고하는
관점도 모두가 예수님 중심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돈, 권력, 섹스에 대해서 부정적인 선입관을 갖고 있다. 그러나 리차드 포스터의 '돈과 권력과 섹스'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세속적인 것 같다고 생각한 것에도 얼마나 놀라운 영적 파워가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영성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이 불필요한 것들이 될 수 있지만, 영성 있는 사람에게는 버릴 것이 없다. 아가서를 보면 때로 음란한 책처럼 보여질 때가 있다.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 태 노루새끼 같구나"(아 4:5). 이는 신부 된 신자와 신랑 된 그리스도와의 사랑이 깊이가 어떠해야하는가를 말해주는 영서다. 부부생활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랑의 깊이가 어떠해야하는가 알 수 있다. 그것은 형식이 아닌 깊은 사랑이다. 단지 밥해 줄 사람이 필요하고, 옷 빨아줄 사람이 필요하고, 심부름 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라면 결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지 주종 관계에 불과한 것이다. 결혼 생활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가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고 얼마나 뜨겁게 깊이 사랑해야하는 인격적 관계인 것을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이 비밀이 크도다"(엡 5:32)고 하였다. 그래서 솔로몬은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말하려고 아가서의 사랑이야기를 쓴 것이다. 신앙생활이 깊어지기를 원하는가? 이 부부생활의 비밀을 깨달으라. 신앙생활 중에 가정 생활 역시 소흘이 여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또 우리가 매일 접하는 TV 문제도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나는 초기 목회 생활 할 때 주일에도 TV에 정신이 빠져 설교 직전까지 갈 때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과감하게 치워버리는 결단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적절하게 TV를 보면서 많은 은혜와 영감을 얻는다. 어떤 분은 "TV는 나의 목자시니" 하시는 분이 있다. 실제로 TV가 목자가 될 때도 있다. TV는 우리가 직접 관찰하고 연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나 인간드라마 등 영적 원리들을 전문가들로 하여금 연구하여 편집 보도하도록 하여 많은 혜택을 준다. TV에 잘못 빠지면 죄를 짓지만, 잘 보면 영성에 도움을 준다. 하나님은 세상 주권자들, 천체 과학자들, 예술가들을 쓰셔서 당신이 나타내고자 하시는 메시지를 전달해주신다. 그 위대함을 들어내시며 자신을 나태 내고 만나고 느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신다. 천문학자는 천체를, 의학자는 인간신체의 신비를 끊임없이 알려준다. 그것을 보고 느끼며 감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음악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음악이 잡음이 될 수 있다. 그림을 감상할 줄 모르는 사람은 미술 관람을 하면 재미가 없다. 시를 감상할 수 없는 사람은 글을 일기 싫어한다. 이렇게 정서가 메마르면 인생이 재미가 없다. 먹는 것이나 관능적인 것 외에서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야 즐겁고 행복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깨닫고 보고 듣는 영성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고 은혜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려면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는 '삶의 영성'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느끼는 것은 교회에서, 기도실에서만, 성경에서만이 아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자연 속에서 우리가 수없이 부딪히는 사람들 속에서, 심지어 필립얀시는 영적이지 않는 곳 같은 뜻밖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소하고 작은 일과 사건들 속에
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접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놓치면 삶이 메말라진다.

야곱은 형, 에서의 낮을 피하여 도망하다가 길거리에서 처량하게 돌 베개를 하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거기서 그는 사닥다리가 땅에 서 있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닥다리 위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놀라운 고백을 하였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야곱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장소에 하나님은 계시고, 야곱에 그 하나님을 발견했을 때 영성의 눈이 떠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야곱에 다시 밭단 아람에서 돌아오며 얍복 강에서 최대의 위기를 만나며 기도할 때 또 거기서 그는 천사와 씨름을 하며 이겼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변화되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는 '여호와 삼마'(거기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 속에도 계시고, 예배할 때 성전에도 계시고, 부엌에서 설거지 할 때 도 계시고, 심지어 화장실에도 계신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속에 계시고, 내가 부딪히는 쓰리고 아픈 사건들 속에 계신다. 이 하나님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다.
로렌스 형제는 취사장에서 일할 때 성령께서 냄비와 접시 사이를 운행하신다고 하였다. 실제로 거기서 유명한 '하나님 임재연습'이란 책을 썼다. 영성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삶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제 영성의 대가들을 잠깐 살펴보자. 다윗의 영성은 성경에서 최고다. 그의 영적인 많은 시편들은 대개 사울에게 쫓기고, 압살롬에게 쫓기면서 광야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유리 하는 가운데 쓰여졌다. 그러나 그의 영성은 광야에서 최고로 달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에게서 기름 부으신 하나님을 느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자여 가거라 가거라"욕하는 시므이에게서도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
을 들었다(삼하 16:7,10). 그는 생명과 사망이 한 걸음 사인인 위기에서도 자연을 보며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시들을 보면 '나의 방패 되신 하나님', '나의 요새 되신 하나님', '나의 산성' 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시 18:2). 그는 자신이 처한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가 입을 열어 시를 읊으면 메시아의 비밀과 하나님 나라가 쏟아져 나왔다. 어떤 위기의 상황도 그를 흔들 수 없었다.

성프란시스는 거리의 문둥이에게서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는 자연과 동식물과도 대화를 나눌 정도로 영성이 뛰어났다. 문둥이를 사랑으로 안아주고, 꽃을 바라보고, 새를 바라볼보며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비밀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형제 해와 자매 달'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고 하였다(롬 1:20a ). 이것이 자연의 영성이다. 그의 '늑대 길들이기'는 아주 유명한 사건의 하나이다. 한번은 늑대가 마을에 내려와서 아이들을 물어갔다. 성프란시스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늑대를 만났다. 그리고 "내게로 오너라 늑대 형제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가 나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것을 명한다." 그는 늑대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다시는 해치지 않을 것과 사람들은 늑대를 정중히 대하고 음식을 나눠줄 것을 평화 협정을 맺었다. 늑대는 꼬리와 머리를 흔들어 답했고, 그 후에는 실제로 해치지 않고 사람이 주는 음식을 얻어먹었으며 2년
을 더 살았다고 한다.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의 저자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영성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크로저 신학교 시절 캠퍼스 강가를 거닐면서 아름다운 자연 속에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느끼며 살았다. 또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다. 자신을 죽이려고 폭탄이 터지는 위험가운데서 너무 두려워 하나님께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마틴 루터킹아 두려워 말고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싸우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꼈을 때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흑인을 위한 자유평등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었다. 그가 위대한 개혁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과 영적 교감할 수 있었던 그의 영성이 뒷받침 해 주었기 때문이다.

슈바이쩌는 자연의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가졌다. 개미 한 마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피조한 생명을 존귀히 여겼다. 그는 공사를 하다가 개미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공사를 중단시켰다. 여름에도 벌레들이 들어와서 등불에 타 죽을까 보아 문을 닫고 살았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영성은 일생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아프리카 영혼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쏟게 하였다.

또 머더 테레사 역시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녀는 빈 손으로 고아 사업을 시작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다고 말렸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충분합니다". 그녀는 캘거다 거리의 죽어가는 행려병자들을 데려다가 임종을 돌보는 일을 시작하였다. dying house (죽어가는 사람의 집)이란 간판을 걸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인간은 행복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람을 섬기다보니 죽은 자들이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 집은 living house 로 바뀌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작을 일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작은 일이 없습니다." 그녀는 작은 일 속에서 위대한 하나님을 만났다. 작은 일을 시작하였지만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한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작다고 소흘히 여기고, 하찮다고 경이 여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는데 대해서 열등감을 느낀다. 이는 일이 작아서가 아니라 그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진홍 목사님이 청계천 판자촌에서 주님의 일을 시작하고 오늘날 세계적으로 두레마을을 운영하며 하나님의 큰 일을 하게 된 것도 바로 굶주려 죽어 가는 아이들의 눈 물 속에서 주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에 성전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오히려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예배 시간은 겨우 몇 시간이고 대게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많은 불신자들을 만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서는 착실하고 기도 잘하는 신자이지만 밖에서는 세상 사람처럼 살아간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부딪히고 인간적 사업에 바쁘다. 그 많은 시간을 하나님과 무관하게 이원론적으로 살아간다면 영적 생활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피곤하고 지쳐서 교회로 돌아오지만, 피곤한 사람들에게는 말씀 공부하는 것, 전도하는 것, 모임 이루는 것 모두가 피곤의 연속이다. 결국 안 에서도 실패한다는 것이다.
성전은 교회만이 아니다. 내 마음이 성령이 거하는 전이고, 내가 거하는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 모든 곳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그리고 삶이 우리의 예배 처소이다. 거기서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 깊은 영성으로 들어갈 수 있고 또 진정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밖에서 그 많은 시간을 승리할 때 안에서도 승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자매님이 식당에서 육신 적이고 음란한 분위기 때문에 영적 생활을 할 수 없었고 직장 생활 마저 위기를 만나게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과감하게 예수를 말하고, 성경 말씀을 말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사람들은 슬슬 피하기 시작하며 상황이 역전되었다고 한다.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고, 이 자매는 삶의 현장에서 영적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William Farley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책상이 제단이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무실은 성전이요 우리의 동료 직장인들은 함께 축제를 즐기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러면 우리의 직장이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로 변한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도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하셨다. 우리의 친절한 말, 겸손한 태도, 희생적인 섬김, 부지런한 자세, 충성심. 이 모든 것이 삶이며 예배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사람들은 거기서 하나님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 속에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내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평신도 목자님들께 직장에서 상을 받아오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방적으로 전도하라는 것보다 더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기도하고 상을 받게 되면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나 역시도
나의 삶을 인하여 하나님을 느끼게되는 사람들을 볼 때 큰 은혜를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밖에서의 삶의 승리를 체험하면 내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하고 싶고, 성전으로 오는 발걸음은 가볍고 기도는 은혜가 충만하게 되고 말씀은 더욱 잘 들어오게 되고,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 양을 칠 힘도 얻게 된다. 그렇지 않고 밖에서 실패하면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석해도 은혜를 받지 못한다. E.M 바운즈는 "밖에서의 승리가 골방의 승리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영성이 깊어지면 모든 삶이 영적
승리의 장이 되는 것이다.

5. 영성을 위한 우리의 기도

잠언, 신명기를 보면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는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잠 20:12, 신 29:4. ). 그러므로 영성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가운데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은 우리를 말씀을 바르게 보게 도와주고, 사건과 사물을 예수님 편에서 보도록 도와준다. 예수님 말씀대로 풍성히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이러한 신자들의 삶과 성령님과의 관계를 자동차에 키로 비유할 수 있다. 아무리 자동차를 세차하고 기름을 채워도 키가 없으면 그 자동차는 쓸모가 없다. 또 키가 꽂혀 있다고 해도 그 키를 돌리지 않으면 차는 움직이지 않다.
이처럼 내 안에 성령이 계시지만 그 분이 역사 하시도록 해야 한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 말씀을 깨닫는 것, 기도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깨닫는 것, 세계선교 어떤 것도 성령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한마디로 영성은 성령과 친밀한 교제 안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였다. 우리는 정말 그 분이 내 안에 살아 계신 것처럼 인정하고 인격적으로 존귀히 모시며 살아야 한다. 범사에 그 분을 인정해야 하고, 모든 것을 그분과 사의하고 의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성은 개발되어도 영성은 개발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믿으면서도 못된 성질을 버리지 못하고 음란성을 버리지 못하고 버릇없이 굴며 세상
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인격적 교제가 없기 때문이다. 성령이 계시지만 사람들은 각방을 쓰며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한번도 성령을 멸시한 적이 없지만 그 분은 나로 인하여 수없이 멸시를 받으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결할 수 없고, 변화가 안되고, 무력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목회자가 이렇게 고백하였다. "만일 나의 사생활이 비디오에 찍혀 공개된다면 나는 목회 할 수 없다." 우리는 누가 보나 안보나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는 것같이 생각하며 그 분 앞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디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의 모습이 참 인격이라고 하였다. 그러려면 범사에 성령을 인정하고 사랑고백을 해야 한다. 범사에 성령을 말하고 성령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삶에 풍성한 열매가 어떻게 맺혀진다고 하는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
성령 의 열매다. 성령 안에서 성경을 보면 볼수록 새로워지고, 기도는 성령 안에서 무시로 할 수 있으며, 매일 사람들 만나는 것이 즐겁게 된다. 잘 때도 깰 때도, 길을 걸을 때도 그 분을 만나며, 그 분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환경 조건을 넘어서서 늘 풍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내가 영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리가 성령보다도 사람이나 제도에 매이고 의존적이 될 때 성장 발전할 수 없고, 또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누구나 다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사람과 제도가 가르쳐주는 것만을 모방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신앙은 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비슷비슷한 많은 사람은 나올 수 있지만 세계를 움직일 창조적 소수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도 실상 힘과 지혜와 모든 깨닫는 것에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전 1:25을 보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속히 사람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는 데서 벗어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분 안에서' 이다. 우리가 늘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게된다면 우리는 죄악 된 세상에서 우리의 신앙을 성결하게 지킬 뿐 아니라, 나름대로 독특한 은사가 있고 개발하여 토인비가 말한 창조적 소수가 될 수 있다. 물론 사람과 제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모방 없이 창조도 없다. 토인비는 모방을 '미메시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기계적인 모방을 통한 지름길이기 때문에 쇠퇴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교회의 사역이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보면 사람과 제도에 머물러 있는 이 과정이 너무 길다.

처음 과정은 섬세한 돌봄을 받아서 인격적인 섬김을 받고 급성장하게 되어 좋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지나면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사람의 방향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너무 오랫동안 사람과 사람의 제도에 갇힐 때 부패하고 썩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정도의 과정이 지나면 신속히 예수님께로 방향을 틀고 그 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몽학 선생 아래 있던 사람은 어느 시기가 되면 아버지에게도 돌아와야 하듯이 우리 자신도 이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목회자를 바라보며 성장하던 양들도 이제 주님께로 돌려져야 한다. 그래야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역시 하나님 안에서 창조적 소수가 되어서 새 역사를 이끌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리스박사의 재미있는 동물학교 비유가 있다. 어느 날 동물들이 모여 말했다. "21세기는 가까웠는데 우리가 그냥 있을 수 있느냐? 무엇인가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들은 교육만이 새 시대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일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동물학교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교과 과목으로 달리기, 나무 오르기, 날기, 헤엄치기 등을 정했다. 오리는 수영을 잘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날기에서는 겨우 낙제를 면했다. 달리기는 성적이 안 좋아서 방과 후 연습을 하느라고 물갈퀴가 너덜너덜해졌다. 토끼는 달리기는 잘했지만 수영의 기초를 연습하느라고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다람쥐는 나무 오르기는 성적이 좋았지만 무리한 날기 연습에 근육에 쥐가 자주 났으며, 독수리는 입학 할 때부터 문제아로 찍혔다. 가장 높이 날고 탁월한 활공능력이 있었지만 넓이 뛰기, 달리기에서는 늘 먼지만 일으키며 운동장을 엉망으로 만들어 졸업할 때까지 남에게 피해만 입히는 골칫덩어리로 왕따가 되었다. 그 중에 점수를 제일 잘 받아 장학생이 된 동물은 예상외로 뱀장어였다. 뱀장어는 수영도, 달리기도, 날기도 조금씩 할 줄 알아 가장 높은 평균 점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 초원에 사는 야생 개와 두더쥐는 학교에서 '땅파기', '굴파기' 과목이 없어서 아예 입학도 하지 못한 채 박에서 교육세만 꼬박꼬박 냈다는 것이다.

이 동물들이 나름대로의 은사를 살리지 않고 동물들이 만들어 놓은 동물 학교에 매이거나, 서로 비교하며 경쟁했다. 이들은 모두 틀에 갇혀 무능력한 바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들은 자연으로 돌아가 창조주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그게 본래의 모습이다. 그래야 자신들의 은사를 발견하고 살리며 모두가 창조 세계에서 자기 분야에서 저마다 두각을 나태 내며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자유를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갈 5:3).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그 분의 통치를 받으며 산다면 각자 은사를 살릴 수 있고 이 시대의 창조적 소수가 될 수 있다.

* 개인 영성 개발에 대한 조언

첫째, 성령을 의지하는 삶
성령을 제한시키지 말고, 모든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만이 우리를 진리 되신 예수께로(요 14:17, 16:13) 인도확신을 갖는다면,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범사에 인정하고 의지하는 습관을 들이라. 성경을 읽을 때, 기도 할 때, 예배드릴 때(요 4:23), 일하고 공부할 때(신 8:18, 벧전 4:11), 잠 잘 때(욥 33:16), 길을 걸을 때(잠 16;9, 6:22은), 주님의 일을 할 때(엡 6:19) 순간 순간 성령을 의지하라. 성령과 교제법의 책을 읽고 연습하는 것도 유익하다(베니흰. 의「성령님 안녕하세요」, 김열방의「성령님과 교제법」, 클라우디오 프레이젼의「성령님 갈급합니다」참조)

둘째, 성경 말씀
모든 신앙의 기초가 되며, 제 일 순위가 되어야 한다. 규칙적인 말씀일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음식 이상으로 가치가 영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신 8:3). 육신이 살찌려면 육의 양식을 잘 먹어야 하듯이 생명의 떡을 먹지 않고 영성을 풍성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꾸준히 20page, 10page식 읽는 습관을 들이자. 이를 절대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말씀을 삶의 가장 앞자리에 세우고, 욥기 23:12절을 붙들면 가능하다. 본인도 이 말씀으로 실천하게 되었다. 이렇게 읽으면 일년에 4번을 읽게 된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할 두 가지 자세는 첫째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 따라가는 자세가 필요하다(캘빈). 둘째는 내가 성경을 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도록 해야 한다. 내가 필요한 말씀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자신을 맡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들려지는 말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달라"고 늘 성령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이다(시 119:18)

셋째, 기도
하나님과 교제는 영성의 기본이고, 기도하는 것은 말씀과 더불어 영성을 쌓는 데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기도의 원칙은 먼저는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하되 제목 기도에서 변화와 주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영성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점차적으로는 내 편에서 일방적으로 하는 데서 듣는 기도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 기도는 성숙한 기도의 단계이며 연습이 필요하다(머더 테레사, 잔느 귀용, 로렌스 등 많은 분들이 듣는 기도를 말한다). 우리 기도는 근본 자기 중심적인 데서 하나님 중심의 기도로 바뀌어야 하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교제가 되어야 한다. '주고받는 것', 이것이 영성 있는 기도이다. 이런 영성 기도를 위해서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해야하고, 바울처럼 영으로(방언)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힘써야 한다. 성령 안에서 영으로 기도해야 무시로 할 수 있고 영적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엡 6:18, 고전 14:15). 기도는 첩경이 없다. 쌓
는 만큼 쌓여지는 것이다. 기도할 힘이 없는 경우는 겸손히 기도를 끌어줄 사람을 찾고 배우는 것도 유익하다.

넷째, 성결을 유지해야 한다
마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뵐 수 있다고 하였다(마5:8).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14). 바울은 살전 5:23에서 우리를 향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영뿐 아니라 혼과 육까지도 성결, 즉 거룩함을 보존해야 한다. 이는 첫째 조건이 선행될 때 가능하다. 성령의 인도함 받으며 성령과 교제하는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의지로 죄를 이길 수 없고, 성결을 유지할 수 없다. 오직 예수의 피로 씻을 뿐이며, 성령과 교제함으로만이 육체의 소욕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다(갈 5:16,17)

다섯째, 독서
영성 있는 사람들의 글을 읽기를 꾸준히 해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영성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는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노력하고 힘썼는가 구체적으로 배우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다. 나보다 더 영성 깊은 선배들의 글을 읽으면 좁은 생각과 사고의 틀을 깨고 영적 도약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본인 개인적으로도 이중표, 로렌스, 쟌느 귀용, 아빌레 데레사, 토저, 유진 피터슨, E 글렌힌스, 도날드니콜, 메조리 J 톰슨, 후안 까를로스, 헨리누엔, 필립얀시, 달라스 윌라드, 폴 마샬, 마틴로이드 존스, 마틴루터 킹, 레오버스카 글리오 등 글들을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 기도, 말씀에 대한 자세, 성령과 교제, 임재, 예배, 기름 부으심, 찬양, 은사 다방면의 삶의 영성을 들어내는 글들이 많이 있다. 이런 글들을 잘 선별해서 읽으면 영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영성으로 가는 길에 끊임없는 격려가 될 것이다.

여섯째, 사람에게서 늘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사람을 단지 사람으로 보아서는 변화가 없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닮은 존재로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사람의 모양을 한 주님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사람에 대해서 믿
음을 가질 수 있고,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조건을 뛰어넘어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보게 되면 내 영성은 날마다 새로워지게 된다. 내가 만나는 그 모든 사람들은 내 영성을 키워주는 스승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을 통해서 죄를 보고, 사단의 역사를 보게 되고, 거기서 불신과 불쾌감과 미움이 생기면 영성은 마이너스가 된다. 그러므로 매일 스치는 사람들을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 하는 것은 내 현재 신앙의 영성을 키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는 영성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일곱째, 자연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느끼는 삶을 살아 야 한다.
이제는 날 마나 눈뜨고 일어나면 보고 느끼는 자연도 그냥 스쳐서는 안 된다.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자연 속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매일 밟고 지나다니는 흙, 푸른 하늘, 하늘을 나는 새, 맑은 물, 이름 모를 꽃을 보고 하나님을 느낀다
면 자연은 이제 나의 영성을 순간 순간 눈 뜨게 해 주는 좋은 영성 교육장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은 오히려 나에게 해악이 될 수도 있고, 삶의 고독을 부추길 수도 있고, 단지 먹고 살아가는데 생계 수단에 불과하거나, 그런 수단도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영성이 깊어지려면 이제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자연을 음미하며 감사할 수 있는 여유도 가져보아야 할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 1:3. 롬 1:36).

여덟 번째, 모든 '사건'과 '일'을 하나님 편에서 보는 훈련

사람들은 흑백 논리로 사건을 보고 사물을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 폐단성은 상당히 크다. 그 때문에 불행한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불행한 신자가 어디 있는가? 이미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지 않으셨는가! 하나님 안에서 이제 우연한 것이나 불필요한 것들은 없다. 불행한 일들조차도 거기에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진 흙 속에서 영성의 보화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형들에 의해서 버림받아 노예로 팔리고 억울한 누명으로 옥에 갇혔던 요셉을 보자. 그 인생이 얼마나 기구하였는가? 그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보았는가? 형들도, 다른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을 보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전혀 상처받거나 비참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그림자라 할 정도로 영성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피날레를 장식하였다. 욥을 보자. 이유도 알 수 없는 가운데 '의롭고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칭찬 받던 자가 하루아침에 온 재산과 자식들과 건강을 잃고 걸인처럼 밖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러나 그는 그 때 자신이 당한 처지를 역시 자신 편에서 보다 하나님 편에서 본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그는 그후 단련 받은 후에 정금 같이 나왔다.

아홉 번째, 사랑과 섬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영성이 깊어지려면 이제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삶의 영성 중에서 중요한 것이 사랑과 섬기는 것이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낮아져서 섬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의 마음에 접할 수 있고 주님의 마음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눅 14:14). 그리고 말 그대로 삶의 영성을 하는 사람은 삶이 풍요로워진다. 이 영성은 간단히 말하면 나를 주는 것이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시간을 주고, 관심을 주고, 물질을 나눠주고, 필요한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톨스토이 말대로 주는 것만이 내 것이다. 대가를 받지 못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준 것들은 내 영성 계좌에 고스란히 +로 채워지는 것이다. 영성이 풍성하려면 이제부터 갚을 것이 없는 자들에게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찾으라. 그 순간부터 풍요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열 번째, 예배
마지막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리는 삶이다. 이제까지의 형식을 벗어버리고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지속적인 영성의 공급이 이루어지려면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예배의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형식이 아닌 참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구체적으로 그 분을 만나고 그 분은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다. 예배는 곧 인생의 목적
이다. 예배가 잘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나고 예배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주의 깊이 생각해보자(요한 4:20-24).

이상에서 우리는 영성을 위한 주의 깊은 노력이 필요함을 배운다. 그러나 알아야할 것은 영성은 단지 사람이 중심이 되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성은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 안에서 끝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신령하게 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성장하도록 도우실 때 협력을 잘 하는 것이다.
메조리 J톰슨은 영성생활의 전환점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고, 생활의 안정과 어떤 성취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진리를 받아들일 때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열망이 없이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만사를 제쳐놓게 된다. 정말 영성이 중요한 일이라면 이를 위해 시간과 열정을 투자해야 한다. 중요하다고 인정해도 실제적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앞에서 언급한 이러한 일들 한가지 한가지를 완성하는 것에 목표를 두어서는 안되고, 이러한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부분적인 실패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끊임없이 노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 10)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