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이란 무엇인가?
요1:1-18
우리는 흔히 기독교인을 ‘신자’, 비기독교인을 ‘불신자’라고 부릅니다.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신앙하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진리를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해주는 진리 즉 신앙의 내용은 너무 방대합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생활을 위해서는 신앙의 내용을 핵심적으로 요약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신앙의 내용을 개인적으로 믿을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공적으로 고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믿어야 할 신앙의 핵심내용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을 ‘신앙고백’ 혹은 ‘신조’(신조나 신경은 같은 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2세기 교회는 이러한 신앙의 핵심 내용 즉 신조를 교부들에 따라 ‘진리의 기준’,‘신앙의 기준’,‘교회의 기준’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러한 신조는 교회가 세례지원자를 교육하거나, 세례 지원자가 세례를 받기 위해 공적인 신앙고백을 하거나, 이단을 분별하거나 방지하려고 할 때 등 아주 중요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 개인적으로 믿는 믿음이 내용이 약간씩 다를 수 있고, 또한 교회마다 혹은 교파마다 믿는 내용이 약간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마다 반드시 믿어야 할 믿음의 공통분모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등 모든 기독교가 공통적으로 믿는 신앙의 내용이 있습니다.
교파나 교단을 초월해서 공통적으로 믿는 ‘보편적’인 신앙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신조에는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도신경입니다.(2세기경에 시작되어 8세기경에 최종확정)
둘째 니케아 공회와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만들어진 니케아 신조입니다. (325년 니케아공회에서 만들어져서, 381년 콘스탄티노플공회에서 보완됨)
셋째, 451년에 만들어진 칼케돈 신조입니다.(451년 칼케톤 공회에서 결정됨)
그러므로 이 보편적인 3개의 신조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믿어야 할 신앙의 내용입니다. 이 중에서도 사도신경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며,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조를 확대한 것이며, 칼케톤 신조는 기독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조이기 때문에, 이 3개의 신조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성경의 어디에 나오며, 누가 만든 것입니까?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1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성경의 어느 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사도신경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은 십계명이나 주기도문처럼 성경의 특정 본문에 나오는 내용이 아니라 성경 속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사도신경의 형태로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사도신경 속에 나오는 내용들은 모두 성경 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의 뿌리는 성경이며, 사도신경은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내용을 요약한 것을 왜 하필이면 ‘사도신경’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기독교 문서에서 ‘사도신경’이라는 말이 처음 나타나는 곳은 390년 암브로시우스가 초안한 것으로 알려진 교황 시리키우스(Siricius)에게 보내진 밀란 공회의 편지에서입니다.
또한 사도신경이 사도들에 의해서 직접 작성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루피누스(Rufinus)가 사도신경에 대해 최초로 해설한 책(404)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직접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 사도들이 가르친 신앙의 내용을 가장 잘 요약해주고 있기 때문에 ‘사도신경’이라 불러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언제 어디서 만들어진 것입니까?
사도신경의 모체는 A.D 170-180년 사이에 로마 교회에서 세례식 때 사용한 로마신조(Symbolum Romanum)입니다.
히폴리투스(Hyppolitus)가 215년에 쓴 ‘사도적 전통’이라는 책에는 2세기 후반 로마교회에서 세례식 때 사용한 로마신경의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당시 로마교회는 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교육시켜 부활절 아침 세례식을 베풀 때, 세례 후보자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신앙을 다음과 같이 문답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신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당신은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 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믿습니다”
“당신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몸의 부활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로마 교회는 이렇게 세례식을 베풀 때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묻고,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때마다 물로 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로마 교회만이 아니라 당시 초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형식입니다. 단지 교회마다 약간씩의 문구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인 신앙고백의 내용은 대동소이했습니다.
그런데 2세기에 로마교회가 사용하던 이 세례 신조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과 다른 점은 로마교회의 세례 신조는 문답식으로 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거의 동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교회의 세례신조를 사도신경의 원조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례식 때 사용한 문답식 세례신조가 4세기경이 되면서 선언식 세례신조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로마 교회의 선언식 세례 신조를 최초로 문서로 남기고, 주석을 쓴 사람은 4세기말 인물인 루피누스(Rufinus)입니다. 루피누스가 기록한 사도신경(404) 본문은 다음과 같은 선언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2. 그 외아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3. 이는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였으며
4.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박혀 장사한지
5.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6.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7.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8. 성령과
9. 거룩한 교회와
10.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11.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러한 루피누스의 본문과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12번째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는 것과 항목별로 약간씩의 형용사가 더 붙여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로마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교회들도 거의 대동소이한 사도신경의 내용을 사용하다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본문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8세기 때 약 750년 경이었습니다. 이 이후로는 다른 교회들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본문의 형태를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2세기에 로마교회에서 세례시에 사용한 문답식 로마신경을 뿌리로 해서, 4세기경 문답식이 선언식으로 바뀌고, 8세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본문이 확정된 것으로서 2세기 로마신경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내용
사도신경의 내용은 12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2.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3.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5.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6.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7.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8. 성령을 믿사오며
9.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10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11 몸이 다시 사는 것과
12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도신경의 구조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도신경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사도신경 12항목 중에서 절반인 6항목(2-7)이나 됩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고백의 출발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시작되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한 최초의 신앙고백의 사례는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 교회사 최초의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대표적인 신앙고백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가장 기본적인 뿌리가 되는 항목은 바로 2번째 항목인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의 탄생(3), 예수님의 죽음(4), 예수님의 부활(5), 예수님의 승천(6), 예수님의 재림(7)에 대한 신앙고백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로써 사도신경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가장 간결하면서도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진술이 되었습니다.
둘째, 사도신경은 삼위일체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의 12가지 항목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크게 3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부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1)
2부 성자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2-7)
3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8-12)
사도신경의 구조가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적으로 표현된 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신 세례식 제정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기위해, 세례 받을 사람들에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처음에는 문답식으로 확인하고, 나중에는 선언식으로 고백하게 한 것입니다.
셋째, 사도신경은 성경 전체의 내용을 창조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순서로 요약한 것이기도 합니다.
1항목은 창세기 1장 1절을 기초로 천지창조에 대한 신앙고백으로서 구약성경 전체의 요약이며
2-7항목은 신약성경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에 대한 요약이며
8-12항목은 신약성경 서신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성령과 교회와 구원과 종말에 대한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전체를 창조-구원-종말의 시간적인 순서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초대 교회는 사도신경을 사용한 것일까요?
사도신경과 같은 ‘믿음의 내용을 요약’ 하는 것은 초대 교회의 여러 가지 삶의 정황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신경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 때는 세례식을 베풀기 위해 문답을 할 때, 설교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할 때, 기도와 찬양속에 기본적인 신앙고백을 담아 예배할 때, 귀신을 �아낼 때,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인들에게 공식적인 편지를 쓸 때의 인사말 등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특별히 다음의 3가지 경우를 조금 더 자세하게 보겠습니다.
첫째, 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세례문답용 교리로 사용되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기독교로 입문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 기독교의 기본신앙이 곧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믿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신앙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사도신경 속에 담겨있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례를 주기 전에 사도신경에 있는 믿음의 내용을 확인하고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둘째, 사도신경은 세례받기 위한 준비자 교육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보통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려고 하는 세례 신청자에게 세례를 주기 전에 3년의 세례 준비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 세례 준비자 교육 기간중에 있는 사람을 ‘카테큐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세례 준비자 교육을 시킬 때 사용된 것이 바로 사도신경의 내용입니다. 사도신경의 내용으로 세례 준비자 교육을 시키며 암송을 시켰던 것입니다. 특히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공인되어 국교가 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사도신경의 내용은 문서가 아니라 세례 받을 사람들에게 구두로 전수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도신경의 내용은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는 교회의 정회원들에게만 알려져 있었습니다.
셋째, 사도신경은 교회를 공격하고자 하는 이교의 공격과 교회 내부의 이단을 방지하는 데 가장 강력한 방패로 시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A.D 170년부터 A.D 250년에 이르기까지 영지주의, 마르키온주의, 몬타누스주의 등등 여러 종류의 이단으로부터 도전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가 이러한 이단들의 도전에 직면해서 바른 신앙을 수호하고자 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사용한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 속에 담긴 내용은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며, 기준입니다. 따라서 이 신앙의 기준을 받아들이며 정통 교회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단이 됩니다. 니케아 신조나 칼케톤 신조의 경우도 이 신조의 내용 속에는 수많은 당대 이단적인 가르침을 배격하는 바른 신앙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사도신경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첫째, 사도신경은 성경 공부의 열쇠입니다.
성경은 크게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과 우리가 행해야 할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이 교리라면, 우리가 행해야 할 내용은 윤리입니다. 그런데 윤리는 항상 교리를 기초로 합니다. 교리가 뿌리라면 윤리는 열매입니다. 윤리는 항상 교리를 배운 후에 그러므로 교리에 따라 실천해야할 내용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할 때, 성경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권별로 귀납적으로 많이 공부하고 있지만 성경 전체의 핵심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기독교 교리에 대한 기초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결국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성령님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종말에 대한 중요한 진리 즉 교리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66권 어떤 성경책을 펼치더라도 이런 기본적인 교리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통해 이러한 기본적인 교리중의 교리 내용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어떤 성경이라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놓이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교리중의 교리를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성경공부의 마스터키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도신경은 기독교 세계관의 안경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막론하고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매일 살아가는 삶의 배후에는 인생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하는 인생관과 세계관이 있습니다. 우주와 인간의 기원과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인간의 죄성은 어떻게 된 것일까? 개인과 역사의 종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등등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세계관의 핵심입니다. 사도신경 속에 있는 신앙고백은 바로 하나님의 우주와 인간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몸의 부활과 영생으로 끝나는 종말에 대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핵심입니다.
셋째, 기독교인의 신분증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한다고 하는 것은 지난 2000년 동안 사도신경을 고백한 모든 기독교 신자들과 내가 같은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육상경기에서 계주경기를 할 때, 바톤을 다음 주자에게 계속 넘겨주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는 사도들의 시대부터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다음 세대에게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기독교 신앙의 바톤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도신경을 고백한다고 하는 것은 지난 2000년 동안 이 땅에서 삼위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았던 모든 기독교인과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가 참 기독교인이라는 증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사도신경의 기독교 교육의 기본 교과서입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교리중의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교회에서 가장 먼저 배우고,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새신자 교육을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전통이 바로 세례를 받기 전에 사도신경에 있는 내용부터 가르쳐서, 사도신경의 내용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한 후에 세례를 주고 기독교인이 되게 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을 오늘에 적용하며, 우리도 교회에 들어온 새신자에게 기독교의 가장 기초교리인 사도신경부터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사도신경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부모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지도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즉 교회학교나 가정교육에서 교사나 학생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필수적으로 가르치고 확인해야합니다.
이렇게 사도신경의 내용이 다시 교회나 가정에서 바르게 가르쳐지게 될 때,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위에 바르게 건축될 수 있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마 6:25-34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 창조사실을 자신과 연관시켜 생각하고 그 일에 자신의 존재를 던져 넣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라고 했다.
1.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시다.
기독교적 유신론적 입장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반적 유신론적 의미에서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기독교 유신론적 의미에서 창조 신앙은
1) 하나님께서 무(無)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로서 지금도 그것들을 붙드시고 다스리심을 믿는 것.(창조와 섭리에 대한 신앙)
2) 그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시라는 것을 믿는 것.(삼위일체 하나님 신앙)
3)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 되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믿는 것이다.
이것들 중 첫 번째 것은 유대교인이나 이슬람교도들도 믿는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믿는다. 이 창조와 섭리를 하나님이 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가지신 경륜을 따라서 지혜와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영원까지 이 피조계를 창조의 능력과 동일하신 능력으로 유지하시며 통치하신다. 성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지으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온 세상을 섭리해 가신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믿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도 그의 창조능력을 느끼고 감사해야 한다.
그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나의 하나님이요 아버지가 되심을 믿을 때, 바른 창조 신앙을 가진 자라 할 수 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서 내가 창조의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나의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를 마련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었다면 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나는 창조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까지 믿을 때, 기독교 유신론적 의미의 창조 신앙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2. 창조자를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나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을 믿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예수님께서도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 하셨으니 우리를 돌보심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전혀 관계하지 않는 분이 아니다.(Deists, 이신론자들 주장)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를 자상하게 돌보신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 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심을 믿는 것이 창조 신앙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신 이는 목숨을 위하여 먹고 입을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마 6:25, 31)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길 수 있다. 그것은 주어진 삶의 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성도는 그 모든 것의 해결을 자신이 다 해야 하거나 또 할 수 있는 듯이 노심초사하거나 안절부절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런 문제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16) 그렇게 할 때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이와 같이 창조 신앙을 가진 이는 삶에 대하여 초연한 태도를 가지고,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일에는 적극적인 참여를 한다. 주께서 하지 말라 하신 것은 염려하는 것이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보살피도록 맡기셨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듯이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와 나라가 이 세상에 온전히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쓰는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고 명하셨다. 여기서 '구하다, 추구하다' 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이는 계속 추구해야 함을 가르친다. 고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날 것을 소망하고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그 나라의 의를 추구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왕되신 그리스도께 항상 순종하며 산다. 이런 성도는 슬픈 세상에서도 하나님만 신뢰하고 결국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모든 일이 자신의 죄로 인해 좌초된 것이 아닌 한, 자비하신 아버지에 의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때로는 욥과 같이 애매하게 고난을 받거나 예수님을 위해 적극적으로 고난받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시며 지켜주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롬 8:38)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현세에서나 심지어 죽어서라도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실 분이시다.
3. 창조 신앙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여러 속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특히 다음의 두 가지 속성을 우리는 믿는다.
1)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전능하신 힘으로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것을 유지하시고 통치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경륜하시며 나를 그 나라 백성으로 삼으셔서 다스리시고 돌보신다. 무(無)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전능하신 힘으로 나를 돌보심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무엇이나 다 하신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지(willing)하신 것은 무엇이나 다 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는 강력한 힘을 가지신 분이 나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이들은 세상적 방법으로 자기 삶을 개척하려 하지 않는다. 큰소리치고 남을 이용하고 욱박지르고 자기 힘을 나타내 보일 때 무엇인가 있는 듯이 돌아보는 것이 세상이다. 그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님을 본받아 온유와 겸손으로, 선으로 악을 갚으며 산다. 전능자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드럽고 조용하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는 이는 연약해 보이나 강하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사적인 욕망이나 개인의 소원을 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키 위해 나타난다. 고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사용(使用)해 보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반하는 생각이다.
2) 하나님의 신실성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어떤 경우에도 신실하게 지키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참되시고 진리되신 하나님은 믿을만한 하나님이시고 온 세상은 변해도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하나님의 말씀도 변치 않으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리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오는 말씀 또한 믿을만한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이 믿음은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오늘도 자상하게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마 1:18-21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그 본질과 존재와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온전히 동등한 하나님이시고, 역시 동일 본질의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창조와 섭리는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이 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이런 일에 관여치 않는다는 오해가 있으면 안 된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라고 기도하셨다. 그 영광 가운데 계시던 성자께서 그 하늘 영광을 떠나셔서 인간성을 취하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과 그의 지상 사역을 중심으로 사도신경은 고백된다.
1. 계시된 이름 예수
웃음이라는 뜻을 가진 이삭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친히 지어주신 이름이다(창 17:19). 세례요한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사가랴에게 지시하여 준 이름이다(눅 1:13, 59-64).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어 주시기도 했다. 높은 아버지(high father)라는 뜻의 아브람에서 많은 무리의 아비(father of the multitude)라는 뜻의 아브라함, 발꿈치를 잡은 자(heel-holder)라는 야곱에서(창 25:26) 하나님과 겨룬 자(God's fighter)라는 이스라엘로 고쳐주신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이름의 변화는 그들의 역사 가운데서의 성격이나 특성의 변화를 나타내 준다.
예수라는 이름도 하나님께서 미리 지어주신 이름이다(눅1:31, 마 1:20-21). 구약의 여호수아가 예수처럼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이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1 세기 중반까지는 일반적인 이름이었으나 예수께서 구속을 위해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후에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너무 악명 높은 이름이기 때문에,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너무 고귀한 이름이 되어서 사람들은 그 이름을 감히 자녀들에게 붙이지 않았다. 이제는 '예수' 하면 나사렛 예수 즉, 우리 주님만 생각케 된다.
2,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이스라엘 중에 예수라 부른 이들이 여럿 있을 수 있지만 그저 부모 된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기대하고 바라면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이는 그저 믿음의 표현이었다. 또 여호와께서만 우리의 구원이심을 고백하면서 주께서 그 구원을 속히 가져다주실 것을 기원하는 것이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붙일 때의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주실 때는 그 이유까지 밝혀주셨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라' 했다.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다.
1) 예수라는 분은 그가 기본적으로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말한다.
여기서 '구원' 은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의 회복과 온전하게 됨을 의미한다.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 회복과 온전하게 됨 - 이것이 구원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포괄적인 뜻이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이 구원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시 130:8).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물리적 또는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즉, 영적인 것이므로 영적 문제의 해결 없이 물리적, 정신적 회복만으로는 궁극적인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루시는 구원은 일차적으로 구속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을 설명하면서 '이는 ---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라는 점이 강조된 것이다. 죄는 영적인 문제로 시작하지만 결국 정신적, 도덕적, 윤리적 문제까지 낳는다. 따라서 죄와 그로부터 오는 '비참함' 이란 문제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총체적 인간 문제도 궁극적인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인간의 궁극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그로부터 물리적, 도덕적, 정신적 회복이 이루어지고 이런 것들이 온전해질 때, 인간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진다. 예수는 일차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궁극적으로 온전한 의미의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시다.
이 예수가 구원주로 그것도 유일하신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라는 이름에 신비한 마술적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구원주로 오셔서 구원 사역을 다 이루셨으므로 오직 그만이 우리의 구원자시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는 구원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루신 구원 과정을 살펴보면, 그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모든 면에서 성장했다(눅 2:52). 자신의 존재와 사역의 의미를 말씀과 행위로 가르쳐 주시고 그 가르침에 따라 영적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다가 거기서부터 구원 완성을 위해 다시 오신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그는 이미 우리의 구원자시며 다시 오실 때 구원을 완성시키실 것이다.
2) 그는 '자기 백성' 을 구원하신다 했다.
독특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백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누가 그의 백성인가? 이스라엘 백성인가?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다. 예수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았다'(요 1:11) 고 했다. 예수님의 백성이란 예수님께서 죄로부터 구원해 주신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다. 스스로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해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구원을 이루신 이들이 다 예수님의 친 백성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다(행 18:9-10 에서 아직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지 않은 고린도 사람 중에 '내 백성이 많다' 고 했다.). 이렇게 미리 백성이라 부른 이유는 '그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서 곧 가족에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John Calvin, Acts of the Apostles, vol11., 136) 그리고 주께서는 그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을(행 13:48, 요 10:16)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미리 정하신 예수님의 백성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다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의 죄로부터 구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이시다. 예수님의 백성은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을 받아들이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어떤 수준에 이르러야 예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헛되고 불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원하신다는 말도 무의미하게 된다. 예수님이 구원하신 백성은 당연히 그 나라의 백성다운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이 점을 너무 강조해서 타인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여 예수님의 백성을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의 확신이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예수님만을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의 함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마리아나 성인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종교개혁자들은 철저히 배제했다.
또 예수를 믿는 믿음과 함께 구원 얻을 만한 공로가 되는 행위와 삶이 구원에 필수적이라 생각하면 예수님을 온전한 구원자라 생각지 않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고, 심지어 자랑한다 해도 구원을 위해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주로 믿고 의존하며 우리의 삶을 그의 가르침을 따라 정리해 가야 한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행 5:1-11
성령 그는 누구신가?
1.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동일 본질의 하나님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동일한 본질(homoousios)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그 존재와 영광과 능력에 있어서 동등하시다. 이것은 세 분 하나님(삼신론)이 아니고 한 분 하나님(유일신론)이시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오시고(보내지시고, 요 15:26)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관계성을 표현한 것뿐이지 시간에서나 영원에서 성자가 있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항상 나오시며(processio) 항상 숨쉬어지시는(spiratio) 것이다.
하나님의 일, 교회의 일은 성령 하나님을 속이는 인간적 수단과 방법으로 할 수 없음을 아나니야와 삽비라 이야기에서 보여준다(행 5:1-11).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힘만을 의지해야 한다. 성령은 지, 정, 의를 가지신 인격체다. 그는 말씀하시고(계 2:7, 행 13:2), 중재해 주시며(롬 8:26), 증거하시고(요 15:26), 인도하시며(행 8:29, 롬 8:14), 명령하시고(행 16:6-7), 지도하시며(요 16:13), 지명하신다(행 20:28). 그는 속임을 받기도 하시고(행 5:3-4), 욕되게도 하시고(히 10:29), 모독을 당하기도 하신다(마 12:31-32).
성령은 신적 인격체며 그의 품성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다. 그는 영원하시고(히 9:14), 전능하시며(눅 1:35), 무소부재하시고(시 139:7), 전지하시며(고전 2:10-11) 하나님이라 불렀고(행 5:3-4), 창조주로서(창 1:2)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창 1:26, 11:6-7, 사 6:8, 마 28:18-20).
2. 성령님은 우리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에 참여케 하신다.
성령의 하시는 일 중 가장 현저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으로 이루신 모든 유익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요 15:26).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리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신다(요 16:14).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다(요 14:26).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신다(요 16:13).
교회에 대하여 이와 같은 일을 하시어 사도들에게 영감하시고 계시를 기록케 하시며 개인을 거듭나게 하시고 인도하심을 받게 하신다(요 3:5). 이와 같이 '다시남' 은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로 다시 나는 것이므로, 이 중생도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근거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있고서야 성령님의 새 언약적 사역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 이전에도 장차 이루실 그리스도의 사역에 미리 근거해서 구약 성도들을 중생시키시고 그들 안에 계시고 인도하셨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유익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일의 시작이 중생이다. 중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하고, 그 부활 생명의 약동으로 하나님의 효과적 부르심에 반응하여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으며, 그 후 계속해서 평생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화의 길을 간다. 그리고 그리스도 재림시 우리의 몸과 영혼이 영화롭게 된다.
3. 성령의 내주(內住)하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일으킴을 받은 우리의 삶은 성령 안에 있는 삶이며, 성령의 지배를 받아가는 삶이다. 이것을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 또는 '내주하신다' 고 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과 우리가 성령 안에 있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와 성령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의 밀접한 관계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22) 그 둘이 하나이며(요 10:30) 그러나 구별된다(distinct).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이렇게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은 구별될 수 있으나 하나이시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 안에 있다' 는 표현은 가장 긴밀한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2:16)
이같은 연합의 신비함이 우리와 성령님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성령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신다(요 14:16).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속에 계신다(요 14:17). 성령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다른 실제가 아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던 주님이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30) 고 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주님께서 몸으로는 하늘에 계시지만 영으로는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이들과 항상 함께 하신다.
그래서 성령님은 '그 아들의 영' 이라고도 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또한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연관시켜 상호 호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을 살펴보고 이를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의 성령과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과 연관하면 이 두 구절 모두가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1) 이는 구약 선지자들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신 것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언급한 것이다. 또한 갈 4:6 의 '아들의 영' 을 빌 1:19 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과 연관시키면 이 모든 표현들이 성령을 지칭하며 얼마나 성자의 사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를 잘 드러난다.
4.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일
성령으로 행하는 것, 즉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갈 5:1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있어야 한다(갈 5:18). 이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과(엡 5:18)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 것이다. 성령께 민감하여 그가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그리고 성령의 힘에 의존해서 따라가는 삶이다. 성령은 우리 인격을 배제하고 황홀경 속으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가장 잘 반영되도록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신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에 대한 시금석은 다음 두 가지로 제시해 볼 수 있다.
1) 온전하고 구비된 그리스도의 품성이 드러나는 삶이다.
즉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그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하루아침에 다 되는 것이 아니라도 날마다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온전히 드러나는 삶을 향해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령께 의존해 나아간다.
2)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그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간다.
그 나라를 중시하는 교회의 사명을 유의하면서 교회의 지체로서의 모든 활동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열심을 다해 나아간다.
거룩한 공교회
엡 2:11-2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으심, 부활이 역사의 초점이라면 그의 몸되신 그리스도의 교회 역시 같은 의미의 초점은 아닐지라도 역사의 초점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교회의 기초이며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역사를 이해하고 판단해야 하는 기준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은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속의 신비는 그의 백성들 가운데 충만히 드러나 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 3:8-10)
하나님의 지혜의 풍성함이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 안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정사와 권세들도 그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을 알기 위해 교회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이 위대한 구원의 드라마를 연출해 오신 하나의 무대와 같은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는 것이다.
1, 교회란 무엇인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people of God), 그리스도의 나라(kingdom of Christ), 성령의 교통하심(felloeship of Holy Spirit)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성령의 사역과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불러 모으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공동체다.
교회는 역사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가 세우신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시대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구약의 배경 없이 교회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호칭의 개념이 구약에도 있기 때문이다.
1) 교회(ekklesia)라는 말이 LXX(70인 역본)에 자주 나온다.
'에클레시아' 라는 헬라어는 히브리어 '카할'(qhl)을 번역한 것이다. 카할은 '에클레시아' 와 같이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은 자' 들 혹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로서 '모인 자' 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을 신명기에서는 총회(assembly)의 날로(신 9:10, 10:4, 18:16) 그리고 시내산에 모여든 이스라엘 백성의 나라를 말한다(시내산 위에는 구름이 덮였고 아래에는 백성이 모였다. 이것이 시내산 교회다. 즉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 백성의 모임이 있는 교회다). 또한 회중(congregation)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시 22:22, 25). 이것이 스데반이 말한 교회다.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행 7:38) 이들 용어의 중심요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에 응답이 있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과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엄숙히 언약했다.
2) 교회는 구약의 총회(assembly)에 곧바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a,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다(마 16:18, 행 4:11-12, 벧전 2:4-6).
b. 성령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아 세워진다.
c, 모든 종족의 백성들을 포함하므로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새로운 백성(새 언약의 백성)이 된다.
2, 교회의 속성들
1) 모든 교회는 '하나' 다(Unity).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이 말씀이 역사적으로 크게 오해되었었다. Vulgate(라틴어역) 성경에서 제롬은 '우리'(fold)라는 말과 '무리'(flock)라는 말을 구분해 내지 못하였다. 헬라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제롬은 같은 뜻으로 번역하여 많은 후의 번역들이 오역을 따랐다. 제롬은 예수님께서 오직 한 개의 조직만 존재하는 것으로 말씀한 것처럼 번역했기 때문에 결국 로마 카토릭 교회와 같은 교회관이 생겨졌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교회는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물론 교회는 조직된 부분도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목자로 받아들인 자들의 전체 무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성은 모든 양들을 하나의 조직 속에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충성을 다해 그를 따를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주장하듯이 단 하나의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은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다른 조직을 이루고 다른 형태의 예배와 성직체제로 차이점을 드러내서 안 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교파가 다른 교파를 배타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데 있다. 자기들과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타교파 성도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으로 정죄하는 것은 복음전파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더욱이 그것은 죄악이다.
2) 성령에 의해 권능을 부여받은 교회(Apostolicity).
교회에서 사도적이라는 용어는 2, 3세기경부터 사도와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 대사(마 10:2, 막 6:30). 전령사(요 13:16), 선교사(계 2:2), 12사도(갈 1:17), 넓은 의미에서 복음 사역자들(고전 12:28)을 말한다.
이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의 증인으로 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들이다(갈 1:15-17).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이지만 교회는 그의 죽음, 부활, 승천 후에 바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권능으로 제자들에게 강림하시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한 첫 가르침에 응답하게 된 오순절에 생겨나게 되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은
a, 교회에 권능을 부여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의 명령을 행하되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아가도록 한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b,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그의 백성들 안에서 개발시키기 위해 보내진 것이다(고후 3:18).
c,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이 세상 사는 동안 그들을 위로하고 인도하신다(요 14:16-17)
이처럼 교회의 사도성은 교회가 사도들의 추종자로서 그들의 봉사 직분과 직접 연관성이 있다(사랑, 희생, 겸손, 증거와 일치된 신행일치의 삶, 사도적 봉사의 계속성 즉 종된 사역 등).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는 의미다.
3) 모든 백성을 포함하는 교회(catholicity).
교회의 보편성, 우주성 즉 교회의 본성 안에서 모든 문화의 모든 백성이 교회의 연대감 속에 하나가 되며 모든 인종적 혹은 그 밖의 장애들이 혁파되는 것이다.
카톨릭(catholic)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카토리켄' 이라는 부사적 표현과 '카토리코스' 라는 형용사적 표현을 라틴어에서 'Catholicus' 또는 'Universalis' 라고 했다. 이 말은 '전체' 또는 '일반적인 것' 을 향한 제시된 방향을 말한다. 신약에서는 철저하게, 완전하게, 전체적으로 라는 뜻으로 한 번 나타난다(행 4:18). 그러나 교회를 'Catholic' 이라고 부른 적은 없다. 그러나 교회의 속성 중 Catholic'(우주성)은 시간적(요일 1:1-3)에서 뿐 아니고 공간적 의미에서도(요 4:23) 그리고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행 10:34, 갈 3:26-29).
4) 교회의 거룩성(Holiness).
고린도교회는 우상숭배, 당 짓는 일, 간음, 부활을 부인하는 이단 사상 등으로 어지러웠지만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교회는 회개를 필수적으로 동반해야 하며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적극적인 갱신이 요청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처럼 교회 갱신과 거룩성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 갱신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며 거룩성 즉 죄와 세상과의 구별(distictiveness)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후 6:14-7:1, 11:2, 롬 1:7, 벧전 2:9-10).
교회의 하나됨(연합성), 사도성, 보편성, 거룩성을 구현해 나가기 위해 힘쓰는 전투하는 교회(Church Militant)에 속한 그리스도의 정병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요일 1:1-4, 마 18:21-35
거룩한 공교회 바로 다음에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라는 말이 나온다. 문자적으로 거룩한 것들의 교제 또는 거룩한 자들의 교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교제(코이노니아) 는 교회의 또 다른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사도성, 거룩성, 우주성, 연합성).
1. 성도의 교제의 의미
1)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일체의 한 부분으로서의 교제
성도의 교제는 사람들끼리의 교제가 아니고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나누는 교제이다(요일 1:1-3).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를 통해서 이 소식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사귐에로 들어가게 된다.
말씀 선포를 통해서 성령께서 그 사람과 그리스도 사이에 이런 생명적 관계를 형성시키시면 복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신비한 한 몸을 이루게 된다. 이 신비한 하나됨에 참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된다. 그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 이 땅에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십자가 사건과 복음전파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므로 인간이 자랑하거나 드러낼 것이 없다. 우리가 하나되어 그리스도와 성부 안에 있게 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2)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교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성도의 교제는 무엇보다 우리의 존재와 은사를 다른 이들을 위해서 서로 나누어 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나의 존재 전체와 은사 모두가 오직 다른 지체를 위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철저히 다른 이를 위해 사는 이가 없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 11:29-30)
안디옥 교회의 구제는 예루살렘 교회와 교제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교회 성도들을 나는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가? 그들의 문제를 알게 되었을 때 내 태도(마음)는 어떠했는가?
2. 죄를 용서받는 것의 의미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사죄의 근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 된 본성도 기억하지 아니하시고 정죄하시거나 벌을 내리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죄의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전적이고 온전하신 순종이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8-10)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죄를 용서받는 것은 성도에 관한 항목이다. 즉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신다는 뜻보다는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는다는 뜻으로 그 다음에 계속되는 '성도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한 성도에 관련시켜야 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하나님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보다는(우리가)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for us), 우리의 자리에서(in our place), 우리 대신에(on behalf of us)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온전히 감당하심으로 우리는 죄 용서함을 받게 된 것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그러므로 우리는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
용서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평화(peace with God)가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심에서만 아니라 그의 삶 전체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그 공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객관적으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나와 관련하여 발생한 것으로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 사건과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義)의 전가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이뤄진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으로 믿어야 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르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래서 사도신경은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을 내가 용서받은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3. 죄를 용서받은 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
죄를 용서받았으니 자유라고 외치며 죄로 줄달음쳐서는 안 된다.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 하셨다(갈 5:13)
1) 감사의 삶
용서함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의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 잘 알아 나가려는 노력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려는 몸부림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a, 용서받은 그 감사한 마음으로 나도 자신과 이웃을 받아들여야 한다.
b, 죄의 종노릇하던 데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산 자로 그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한 데 이른다(롬 6:19).
c, 열심히 살면서 스스로를 자랑치 않을 것이다(롬 3:27).
2) 용서의 삶
자신에게 잘못한 모든 사람을 그저 용서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이웃을 용서할 수 없다면 자신이 받은 용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이것은 가능하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그러나 잘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원리를 악용해서는 안 된다. 잘못한 이는 용서를 강요할 수 없다. 혹시 할 수 있다면 용서를 간청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형제를 겉으로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 속으로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더 큰 죄를 용서함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용서하는 마음을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교회, 그리스도와 신비하게 하나 되어서 죄 용서함을 받은 교회 공동체도 감사와 용서의 공동체가 된다.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감사와 용서로 가득차 있지 않은 교회는 교회됨을 아직 잘 드러내기 못한 연약한 교회이다. 죄 용서함을 받은 감사를 표출하는 교회 - 그것이 우리가 꿈꾸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교회이다.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고전 15:35-44, 계 21:1-8
이 고백은 몸이 부활하여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기원하는 말이 아니고 성경 계시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고백이다. 영원히 사는 것은 개인적인 것 뿐 아니라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와 하나님 백성으로서 경험되는 것이다.
1, 몸의 부활
1)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할 때 부활은 영과 육의 온전한 사람 즉 전인(全人)의 부활이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영육 통일체(psycho-somatic unity)의 온전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때의 영과 몸은 모두 선했다. 그들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죄로 인해 영육의 분리인 물리적 죽음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관점에서 보면 영과 몸 모두가 온전한 것이 인간의 바른 모습이다. 우리의 부활도 영육 통일체의 부활일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생각할 때도 인간은 영육 단일체의 온전한 사람이 회복되어야 한다. 창조 본래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마땅히 이르러야 하는 더 높은 상태(the higher state)에로 인간을 올려놓으시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창조를 무시하고 이루는 것이 아니라 창조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던 바,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온전히 구원된 인간은 최초의 창조된 인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이른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전한 구원은 몸의 부활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창조가 파괴된 상처를 지닌 구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파괴된 인간을 고치실 뿐 아니라 더 높은 상태에로 옮기셔서 고치신다. 더 높은 상태에로 옮기신다는 그 높은 상태의 극치인 부활체는 어떤 특성을 가졌나?
3) 부활체의 특성들
a,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몸이다(고전 15:42).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몸은 썩을 몸이 아니었다. 타락이 없었더라면 죽지 않도록 창조된 몸이었다. 더구나 부활의 몸은 창조의 몸과 달리 타락하여 죽을 가능성조차 없는 몸이다.
b, 영광스러운 몸이다(고전 15:43).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그 영광의 기준이 그리스도의 부활체의 영광이다(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
c, 부활의 몸은 강한 몸이다(고전 15:43)
이 세상 몸은 병들고 노쇠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을 (고전 15:49) 입히실 때에는 그 몸이 강한 몸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계 21:4)
d, 신령한 몸이다(고전 15:44).
육의 몸과 대조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온전히 성령의 통제를 받고 성령에 의해서 변화된 몸이다. 신령한 몸이란 영으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고 우리 몸과 연속성을 가진 몸이다. 살과 뼈가 있는 몸(눅 24:39)으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는 몸이다.
4)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부활체
a,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구현하면서 사는 삶을 산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이루면서 산다.
b. 진정한 복됨으로 '행복의 최고 상태를 낳는 질서' 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산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사 65:18)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사 66:10-11)
c, 새 하늘과 새 땅은 온전한 의로 가득찬 상태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d, 평강으로 가득찬 삶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사 66:12)
e, 영광으로 가득찬 상태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3)
2, 영생
1) 영생은 지금 여기서 시작된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생(죠에 - 생명)에 참여케 된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에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것이 없이는 영생과는 전혀 관계없는 자가 된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2) 죽음 이후의 영생
우리가 죽으면 육은 흙(먼지)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즉시 하나님께로 간다. 그 상태는 기쁘고 즐거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 이후 온전한 영혼의 상태에 이르게 되어(성화의 완성) 영생에 들어간다.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이 있는 하늘(히 12:23)과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것이다.
3) 그리스도 재림 이루의 영생
하늘에 있는 온전케 된 영혼은 그 온전케 된 영혼에 걸맞는 몸을 입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 있는 우리도 간절히 원하고 간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2-4)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그 나팔 소리는 주님의 재림 때 일어날 일을 묘사하는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당시 살아있던 성도들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 재림과 함께 그 영혼이 온전히 성화되고 몸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과 같은 몸으로 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이것은 몸에 대한 성화의 완성이고 영화인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성도들과 함께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육 단일체로서의 온전한 성도들이 거하게 될 것이다. 비로소 온전한 생명의 의미로 가득찬 삶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부활로부터 시작된다. 영생은 끝없는(endless) 시간 또는 무시간(timeless)이 아니고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시간이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생명과 영생은 같은 말이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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