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
정이철 목사.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라고 소개하고 있는 그의 신학사상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제기한 연구 보고서가 나와 화제다. 연구를 진행한 교수는 총신대학교의 일곱 학자들(김성태, 이한수, 김지찬, 정승원, 김창훈, 박용규, 이상원). 한국교회와 예장합동측 총신대학교 사태에 대한 왜곡은 물론, 방언에 관한 몇 개의 신학적 잣대로 다른 사람을 무차별 정죄하는 정 목사의 발언에 대하여,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학적 성숙을 위한 깊은 책임의식을 느껴 성찰과 반성으로 임한다는 게 평가서 작성의 이유다. 이 평가서를 독자들이 읽고 바른 판단을 할 필요가 있음을 인지한 본지는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에 대한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
들어가면서 총신대 김영우 총장은 지난 십수년 동안 자신은 진정한 개혁주의자이며 총신은 잘못된 복음주의에 물들어 있었다고 호도하면서 자신이 그것을 바로 잡고 있다고 직간접으로 표방하여왔다.(*일곱 명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정이철에 대한 보고서를 내는 것은 정이철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고 말하며 학교의 명예를 심각하게 손상하고, 무차별적으로 근거 없이 방언을 비롯한 몇 개의 신학적 잣대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더 이상 묵인하는 것은 신학교 교수로서 깊은 책임의식과 총신과 교단과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학성숙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고는 서로 읽고 검토하고 보완하여 완성한 것임을 밝힌다.) I. 정이철의 신학 사상에 나타난 비 성경적 이단성 1. 박영돈 교수에 대한 정이철의 방언 비판 문제
정이철 목사는 소위 <바른믿음>이라는 본인의 사이트에 한국의 대표적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이며 고신신대원 조직신학 교수인 박영돈 교수의 방언에 관한 글들을 인용하면서 비판한다. 정이철 목사가 주로 이단으로 정죄하는 대상들은 오늘날에도 방언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교수들과 목사들이다. 비록 이들 중 누구도 방언을 성경적 특별계시 차원으로 놓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정이철 목사는 마치 이들이 특별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거나 성경이 특별계시임을 부인하는 자들인 것처럼 이단으로 정죄한다. 다른 복음이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꾸짖을 때 사용했던 말이다(갈1:6-9). 여기 다른 복음이란 한 마디로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게 되지만 율법의 행위, 곧 할례를 받고 장로들의 유전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론을 떠나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것 외에 의롭게 만드는 다른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박영돈 교수가 칭의론을 거부했는가? 그가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했는가? 박영돈 교수가 방언을 계시의 방편이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기도의 수단으로써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 것인데, 정이철은 박영돈 교수를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는 자라고 정죄하였다. 정이철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의롭다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유대주의자이며 바리새인이다. 요한 칼빈의 멘토요, 종교개혁자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어거스틴이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덕목으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상기해야 한다. 2. 방언을 하나님의 직통계시와 직통설교라는 정이철의 주장은 개혁신학 왜곡 정이철 목사는 아래와 같이 방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박영돈교수를 비판한다.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직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설명하는 특별계시를 내포하는(특별계시를 보충하는) 계시적인 은사였다. 쉽게 말하자면,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였다. 이 점에 대해서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유대인을 선지자로 세우시고 유대인들의 언어로 예언하시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방인들의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시니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인들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시는 하나님을 보고서 불신앙했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악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방언이 있는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나타났다. 최초의 방언이 나타난 사도행전 2장에서는 삼 천 명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탄생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개혁주의자들 가운데는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기도의 언어로서의 방언은 구별된다고 보는 신학자들이 적지 않다.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은 각 지방의 언어를 말하는 기적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듣는 기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외국어를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 기적이지 그 자체가 새로운 진리에 대한 직통계시가 아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도 직통계시는 아니다. 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이라는 매개체 없이는 쓰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통계시는 아니다. 물론 바울 서신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께 받아 바울이 말한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이전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유대인을 선지자로 세우시고 유대인들의 언어로 예언하시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방인들의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시니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고린도교회는 헬라 지역에 위치한 교회로서 헬라어가 통용어였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히브리어로 예배를 드렸을 가능성이 많았지만 헬라어, 아람어, 심지어 로마 제국 아래에서 라틴어까지 사용되었던 고린도지방에서 하나님이 유대인들로 충격 받도록 이방인들의 말로 십자가를 설명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다들 헬라어를 이해하는 상황에서 다른 이방나라 언어로 십자가를 설명했다고 유대성도들이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회개를 했을까? 만약 정이철 목사가 말하는 이방인들의 말이 히브리어도 헬라어도 아니라면 어떻게 고린도교회의 유대인들이 이해를 하고 회개를 했을까? 혹 정목사는 통역을 했을 것이라고 답할지 모르겠다. 3. 정이철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을 동일시 정이철 목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것이 성경의 방언의 기능이다.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친히 설교하시는 현상이었다. 그 때에는 교회에 설교자가 없었고, 성경도 없었으니, 현실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친히 말씀하시어야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2018년 4월 17일 접속.)
왜 초대교회에 설교자가 없었다고 주장하는가? 무엇보다 바울과 11사도가 있었고 7 집사들도 있었다. 베드로도 설교했고, 11제자들이 베드로와 함께 설교했다. 빌립도 설교를 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교훈을 했다. 방언으로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은 개혁신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적 가르침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았다(엡2:20). 방언하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은 신사도운동의 주장과 별 차이가 없는 이단적 발언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단회적인 직분이며 그들과 선지자들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외에 다른 터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정이철 목사는 이단임에 분명하다. 정이철 목사는 계속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단들도 사도행전의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거짓 방언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신학을 주장한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다른 종류의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혀를 움직여서 하나님 자신에게 비밀스러운 영적인 기도를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하늘의 언어’의 방언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기독교에 두 종류의 방언이 있었다는 이런 주장은 거짓 방언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된 이론이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시대와 고린도교회 시대는 동시였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처음부터 바울에게서 신학을 배운 사람이고,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를 동일하게 전파한 사람이다. 바울이 가르친 성령의 은사와 누가가 설명하는 성령의 은사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 무엇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기독교의 방언의 형식은 반드시 이방인의 언어이고,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그리스도에 대해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의 방언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했다. 성경의 방언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심판의 표적이며, 반대로 믿고 순종하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 백성되는 복이 부어졌음이 선포하는 표적이라고 가르쳤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4. 바울의 “다른 복음”(고후 11:3, 4)을 거짓방언으로 곡해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계속 주장한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과연 위 말씀이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했음을 의미하는 내용일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고 있음이 전제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영'으로는 기도하므로 '마음'으로는 그 기도의 내용과 의미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 과연 바울의 신학일까? 바울이 그런 내용을 가르쳤던 사람이었나? 바울이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고 일한다는 것은 이방종교의 사상이지 기독교 사상이 아니다. 대체 바울은 왜 이런 이상한 말을 했을까? 바울은 고린도전서보다 약 5개월 후에 쓰여진 고린도후서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이 떠난 고린도를 떠난 후 이단들이 고린도에 찾아가서 거짓된 가르침을 베풀었고, 고린도 신자들이 바울에게서 배운 것을 버리고 이단들이 가르친 것을 따라갔다고 심각하게 책망했다. 즉, 고린도에 나타난 이상한 방언기도 운동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바울은 이상한 거짓 방언기도의 은사에 빠져 이단의 길로 가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마귀가 하와를 미혹하였던 것처럼 이미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고 한탄하면서 책망했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2. “고린도에 나타난 이상한 방언기도 운동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었다.” 3. “바울은 이상한 거짓 방언기도의 은사에 빠져 이단의 길로 가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마귀가 하와를 미혹하였던 것처럼 이미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 위 정이철의 주장을 요약하면 고린도교회 방언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고, “이상한 거짓 방언”으로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심어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곧 이단들이 고린도교회에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방언을 거짓 방언, 이단적인 방언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이처럼 정이철은 사도행전과는 달리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닐 가능성 있는 내용이나 주장은 다 이단적 행태나 거짓 방언으로 정죄한다. 그리고 정이철 목사는 특유의 이단 해석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 고후 11장에 언급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고린도교회에서 직통계시가 아닌 기도로서의 방언을 하는 사람들과 단정적으로 연결시킨다. 고후 11장의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다른 영을 받고 다른 복음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닌 유대주의자들이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고 예수를 유대 왕국의 회복자로 보는 유대주의자들이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는 수신자가 같지만 그 목적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데도 정이철 목사는 이단처럼 이들을 억지로 연결시키고 있다. 5.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 사이비로 정죄 끝으로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박영돈 교수를 비방한다. 고신의 조직신학 학과장이라는 박영돈 교수가 이단들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의 비밀의 방언기도 이론을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직접 설교하시는 계시적인 은사가 아니었고,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 박영돈 교수의 신앙성장 과정이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어떤 유형의 이단과 밀접했으므로 이런 사이비 신앙이 형성된 모양이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은 위 글에서 “이단들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의 비밀의 방언기도 이론”, “어떤 유형의 이단과 밀접했으므로 이런 사이비 신앙”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단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단들이 주장하는 방언이론,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어떤 유형의 이단이라는 표현을 통해 정이철은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으로 “사이비 신앙”으로 정죄한다. 목사의 탈을 쓰고, 아니 신자의 탈을 쓰고 어떻게 한 신실한 신학자이며 목사인 사람을 비방하고 모욕을 줄 수 있는가? 그렇지 않고서는 이러한 무서운 저주를 퍼부을 수 없는 것이다. | ||||||||||||
II. 개혁주의 전통의 성령의 이적관(異蹟觀) 우리는 지금까지 박영돈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나타난 정이철의 개혁신학의 왜곡과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으로 정죄하는 몰아가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자들이 이적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기독교 전통, 역사적 개혁주의 노선에 선 어거스틴,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찰스 핫지, 현대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스프라울, 파이퍼 등의 입장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어거스틴의 기적 이해
소위 개혁주의 창시자 요한 칼빈의 신학적 멘토였던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편 우리는 기적을 전파한 사람들에 대해 의심해서는 아니 된다. 비록 실제적으로 본 사람들이 많이 없고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신적인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설명을 하기 전에 사람들이 믿기도 했다.”(*Augustine, De Vera Religione 25 (47) as found in Augustine: Earlier Writings.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Trans. by John S. Burleigh. (Philadelphia, Pa.: the Westminster Press. 1953), 248. 어거스틴은 겸손을 최고의 기독교인의 미덕으로 여겼다. 위 인용문 바로 이어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다룸에 있어서 매우 겸손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또한 어떤 인간의 권위도 순전한 영혼의 이성(이해)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분명한 진리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만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지 않는다. 만약 교만이 없는 곳이라면 이단도 없고 분리주의자도 없고 할례자도 없고 우상숭배자도 없다. 만약 약속하신대로 사람들이 완전하게 되기 전에 서로 반대의 입장들이 없었다면 진리를 매우 열정적으로 찾은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기적을 전파한 사람들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무엇인가? 기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다는 말이 아닌가? 어거스틴은 기적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입장을 전파하는 자들을 의심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도 남겼다. “오늘날 세례받는 자에게 안수 할 때 그들은 성령을 받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방언으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자들이 지나갈 때 그 그림자로 병이 낫는 일이 그쳤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그 책(De Vera Religione)을 쓸 때 한 맹인이 밀란에서 눈을 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알 수도 없고 또한 알지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Augustine, Retractiones, in The Edinburgh Magazine and Literary Miscellany. Vol. 15. (Edinburgh: Printed for Archibald Constable and Company. 1824), 688.) 어거스틴은 성령의 놀라운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의 회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말씀이 매개되어 성령께서 그 심령에 강하게 역사하신 회심이었다. 어거스틴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죽은 신학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과 살아계시는 성령 안에서 발생되고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당시 도나티스트 파들은 방언을 인정했고 그런 현상이 당시에도 나타났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파들의 성령의 역사나 방언의 은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되지 못함을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성령은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보편적 교회를 하나되게 하신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7x7=49에 하나 더한 50일째 성령이 임하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엄중한 교훈을 주신다. 즉 하나가 더해진 것은 우리로 하나되게 하라시는 것이다.”(*Augustine, Sermo CCLXVIII (268) Col. 1231.) 어거스틴이 도나티스트들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은 이들의 방언 남발과 신비체험 강조 때문이 아니라 교회를 떠나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를 공격한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핵심, 특히 오순절 방언의 현상은 교회가 하나됨에 있었다고 어거스틴은 강조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령의 역사나 방언을 부정하지 않았다. 도나티스트를 어거스틴이 정죄한 것은 그들의 재세례와 분리주의 사고였다. 박해를 참고 견딘 것은 참으로 높은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이지만 자신들이 준 세례만을 세례로 인정하고, 다른 기성교회를 정죄하는 분리주의 사고를 어거스틴이 경책한 것이다. 사랑의 결여된 것이 도나티스트들의 가장 큰 문제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만약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면 그 세례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본질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에서는 관용을 외쳤던 교회 지도자였다.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며 교회를 어지럽히고 함부로 교회 지도자들을 공격하는 정이철 목사는 어거스틴의 기준에 따르면 이단인 것이다. 2.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기적 이해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비록 칼빈주의자가 아니지만 건전한 신학자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루터는 비록 로마 천주교와 재세례파의 신비주의를 강하게 공격하였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설교에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설교에 표적이 동반된 것처럼 기적이 동반되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사람은 두 가지 방법 중 한 방법으로 자신이 설교자로 부르심을 얻는다. 첫째는 하나님께 직접 받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들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다. 만약 직접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설교에 기적들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설교에는 표적이 동받되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Martin Luther. Festival Sermons of Martin Luther, trans. by Joel R. Baseley. (Michigan: Mark V Publications, 2005), 3-4.) 개혁주의 창시자 칼빈은 루터처럼 로마 천주교와 재세례파의 신비주의를 반대하고 특별 계시의 종결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비 비 워필드가 말했듯이 ‘성령의 신학자’였다. 그만큼 기도를 많이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성령의 역동성을 당대에 회복하려고 노력한 신학자도 드물다. 어거스틴은 그런 면에서 종교개혁을 진정한 교회 갱신과 개혁으로 한 차원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혁주의는 즈빙글리와 칼빈에게서 비롯되었지만 그 사상적 기원은 성경과 어거스틴에게서 큰 빛을 졌다. 칼빈은 교회의 참된 회복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고, 그런 면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교회의 참된 회복과 연계시켰다. 요한 칼빈은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이 오늘날에도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였다. “비록 엄밀히 말해서 믿음은 말씀에 근거하고 그 목적을 말씀에 두지만 여전히 기적들이 발생한다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 단 그 기적들이 말씀과 연계되고 그것들이 신자의 믿음을 말씀으로 향하게 할 경우이다. 왜 기적들을 표적들(signs)이라고 했는지 이미 설명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이상하고 비범한 일들을 보여주심으로 그 기적들로 인하여 사람들로 당신의 능력을 생각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vol. II, translated by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281.)
일각에서 보통 칼빈을 은사중지론자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글들, 특히 고린도전서 주석을 보면 확실히 은사중지론을 주장하지 않고 자신 당대에도 은사들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칼빈주석 중에서 고린도전서 14장에 관한 주석에서 그는 바울 시대에 빈번하게 등장하던 은사들의 풍성함이 왜 자신의 시대에 잘 나타나지 않는가를 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우리는 바울의 이 구절에서 어떻게 교회가 놀라운 부와 다양한 영적 은사로 말미암아 번창하게 되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빈약한 재능과 결핍을 사실상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망은에 대한 대가로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풍요함은 결코 다함이 없으며 그의 관대하심이 줄어드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J. Calvin, 성경주석 19: 로마서, 빌립보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서울: 성서원), 413.) 3. 20세기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A. A. 핫지, 스파라울. 파이퍼 미국 칼빈주의 대부라 할 수 있는 구프린스톤신학을 대변하는 찰스 핫지의 아들인 A. A. 핫지는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로 기적이 초대교회에만 국한된 현상으로 보지 않았다. “기적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는 하나님의 뜻의 도구일 뿐이며 그 도구는 기적이 발생되도록 더 높은 도덕적 다스림에 쓰임받는 것이다.”(* A. A. Hodge. A Commentary on the The Confession of Faith. With Questions For Theological Students and Bible Classes.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and Sabbath-School Work, 1869), 140.) “아무튼 난 방언 은사를 구했고 나의 친구들과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난 방언으로 말미암아 큰 덕을 세우지 못했고 따라서 깨달을 수 있는 기도를 여전히 선호하고 있다. 한편 난 이 방언이 신약에 나타난 것과 같은 것인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에서도 방언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고린도전서) 방언이 외국어였다는 주장도 들었다.
그리고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표적인 개혁주의 침례교(Reformed Baptist) 목사이며 학자인 존 파이퍼(John Piper) 박사는 개혁주의를 평생 설교하고 가르쳤던 분이다. 이 분은 방언을 성령께서 역사하는 영적 체험으로 말하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말씀한 방언은 외국어로 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물론 파이퍼 박사 역시 오늘날 방언을 특별계시나 예언으로 보지 않았다. | ||||||||||||||||||
소결론
어거스틴, 칼빈, A. A. 핫지, 스파울, 파이퍼 모두 대표적 개혁주의자들로 성령론을 풍성하게 발전시킨 주역들이지만 정이철의 잣대로라면 다 이단들이다. 물론 아직도 개혁주의 안에 은사 중지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적지 않은 현대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안에 은사중지론을 주장하는 개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퍼거슨, 존 프레임, 바커 같이 은사중지론을 지지하지 않는 신학자들도 여럿 있다. 방언의 존재 여부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물론 개혁주의 전통에 서있는 누구도 방언을 특별 계시의 연속성이나 방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특별 계시는 성경으로 종결되었다고 개혁주의 전통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White Horse Inn, “Reformed and Charismatic?”https://www.whitehorseinn. org/2011/08/ reformed–and- charismatic/ 끝으로 미국 서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는 구속사의 새로운 장을 쓰는 기간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사도행전과 계시록 사이의 선교를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기간이다. 바로 새 언약의 사역 기간이다. 교회는 성육신을 연장하거나 그리스도 구속사역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교회는 오순절을 반복하거나 사도들의 특별한 사역을 연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대신 이 기간의 사역을 위해 똑같은 말씀과 성령을 받아야 한다.” 호튼 박사는 성경 계시의 종결을 믿고 더 이상 메시야적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똑같은 말씀과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려면 똑같은 성령을 받아야 하고 그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순절에 오신 것이다. 오순절은 단회적 사건이지만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그 오순절에 임하신 같은 성령이시다). 게다가 오늘날 미국의 유수한 신학교나 한국에서 어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라도 방언에 대해 자신과 좀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단과 동질의 부류로 정죄하지 않았다. 특별계시의 연속성과 계시의 수단으로 방언을 이해하지 않는데도 방언의 존재를 인정하면 무조건 이단과 동질의 집단으로 정죄하는 정이철이야 말로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III. 종합정리: 정이철의 신학 문제와 총신사태에 대한 왜곡 문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정이철(* 정이철이 담임하는 교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는 전남 여수 인근에서 출생하여 여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총신대와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였다. 1992년 11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신반포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전임강도사, 교육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서울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95.10), 목사 안수(97.10)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에서는 주님의 기쁨교회(2001-2002), 앤아버 한인장로교회 (2002-2004)에서 시무했고, 현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2004-) 담임을 맡고 있다(앤아버 반석장로교회 주소는 다음과 같다. 2118 Ann Arbor-Saline Rd., Ann Arbor, MI 48108. Tel: 734-678-7133). 그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새물결, 2013),「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에스라서원, 2014),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GNPBOOKS, 2015) 등 세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개인적으로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정이철 목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홈페이지, http://cantoncrc.com/with_pastor .2018년 4월 17일 접속 ; 바른믿음 홈페이지, http://www.good-faith.net/ 2018년 4월 17일 접속 )은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을 표방하며 개혁신학을 사수하는 기수처럼 자처하지만 자신의 견해와 다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비판하고 심지어 ‘이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개혁신학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개혁주의 노선과 전혀 다르다. 게다가 그가 비판한 글들을 검토한 결과 그의 신학과 행동에는 다음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2. 허위사실유포 첫째, 총신 사태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김영우 측의 입장을 대변하고 사실을 왜곡하며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습니다. 총신 사태의 핵심은 신학적인 문제라고 호도하고 있다.
둘째, 옥한흠, 권성수, 오정호, 권순웅, 김남준, 송태근, 박용규 등이 마치 특별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자들, 현대 오순절주의자, 심지어 이단적인 성향의 반개혁신학 지도자들 인양 왜곡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예장합동과 총신의 지도자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교단의 분열을 획책하고 있다. (정이철은 자신이 운영하는 바른믿음 사이트에 ‘문제인물’과 ‘최근논쟁’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이들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문제인물,’ 바른믿음,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List.html?sc_section_code=S1N17&view_type=sm 2018년 4월 17일 접속); ‘최근논쟁,’ 바른믿음,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List.html?sc_section_code=S1N15&view_type=sm (2018년 4월 17일 접속). 셋째, 정이철이 자신의 사이트에서 오정호 목사가 총회에서 WCC에 예장합동이 가입하자고 주장했다는 것은 명백한 허위 사실이다. 넷째, 지금부터 12년 전에 CGNTV에서 강의한 세계부흥운동의 역사 중에서 웨일즈부흥운동과 아주사부흥운동을 선별하여 마치 이 두 운동을 대표적인 부흥운동으로 박용규 교수가 옹호하는 것으로, 그래서 그를 마치 오늘날도 특별계시의 연속성을 지지하는 반개혁신학자로 매도하고 있다 (*정이철, “박용규 교수의 웨일즈 부흥 강의는 개혁신학 관점이 없는 내용,” 바른믿음, 2018년 3월 23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14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박용규 교수의 아주사 부흥 강의는 총신 죽이는 산당신학,” 바른믿음, 2018년 3월 29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26> 2018년 4월 17일 접속). 다섯째, 이미 정이철은 웨슬리의 구원관이 행위구원관이라고 확신하고 자기의 주관적 견해를 진실인양 왜곡하여 감리교 신학교 교수들로부터 지적을 당하고 사과한 전적이 있다(* 정이철, “이것이 저의 진심의 사과이고 분명한 소신입니다,” 바른믿음, 2017년 9월 26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965>, 2018년 4월 17일 접속). 3. 방언을 인정하면 특별계시를 인정하는 반개혁신학으로 매도
방언을 인정하면 반개혁주의자 반개혁신학 목회자나 신학자로 매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개핀 밑에서 학위를 받은 고신의 박영돈 교수가 증언하는 것처럼 개핀도 은사중지론을 절대시하지 않고 개혁신학 안에 있는 한 신학이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다른 견해도 존중하고 있다. 이런 변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방언을 인정하면 무조건 마치 신사도운동을 지지하거나 오순절운동주의자들이거나 특별계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개혁주의와 개혁신학을 심각하게 호도하는 것이다. 4. 총신사태에 대한 왜곡보도(김영우 측과 재단이사 측의 대변자 역할) 정이철이 방언 여부를 가지고 방언을 인정하면 반개혁신학자로 매도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오늘의 총신 사태를 김영우 총장과 현 재단이사회의 정관변경과 사유화 문제로 보지 않고, ‘현대복음주의’라는 명칭을 만들어 마치 총신이 개혁주의를 떠나 현대오순절주의 신학을 받아들여 반개혁주의로 흘러가는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면서 김영우 총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지지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 몇 가지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김영우 총장이 물러나면 총신의 개혁신학이 무너지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김영우가 총신의 총장으로 계속 재직해야 개혁신학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로, 현 총신의 사태가 신학문제에서 기원된 것처럼 진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김영우와 재단이사회를 비판하는 글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는 정이철은 개혁을 주장하는 교수협의회와 총회 지도자들, 특히 그동안 교단의 갱신을 주장한 교갱협의 사람들을 집중해서 ‘방언’이라는 잣대로 가지고 이단적 가르침을 지지하는 자들이라고 공격하고 있다(*정이철, “총신학생들이 교갱쪽 적폐세력과 연관없어야 할텐데...,” 바른믿음, 2018년 3월 4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90>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총장 죽이기 내막은 오정현과 비리교수들, 그리고 그 후의 돈,” 바른믿음, 2018년 3월 26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21>, 2018년 4월 17일 접속). 그러면서 정작 김영우 총장의 배임증재 혐의, 정관변경문제 등 총신의 근본 문제 제기에 대한 그의 글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이철이 어떤 입장에서 진실을 호도하는지를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정이철, “‘정관변경’ ‘총신 사유화’ 등 논란에 대한 김영우 총장의 설명,” 바른믿음, 2018년 3월 31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30> , 2018년 4월 17일 접속).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이한수(신약신학), 박용규(역사신학), 김성태(선교신학), 이상원(조직신학), 김지찬(구약신학), 김창훈(실천신학), 정승원(조직신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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