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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

하나님아들 2018. 9. 26. 01:00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


정이철 목사.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라고 소개하고 있는 그의 신학사상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제기한 연구 보고서가 나와 화제다. 연구를 진행한 교수는 총신대학교의 일곱 학자들(김성태, 이한수, 김지찬, 정승원, 김창훈, 박용규, 이상원). 한국교회와 예장합동측 총신대학교 사태에 대한 왜곡은 물론, 방언에 관한 몇 개의 신학적 잣대로 다른 사람을 무차별 정죄하는 정 목사의 발언에 대하여,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학적 성숙을 위한 깊은 책임의식을 느껴 성찰과 반성으로 임한다는 게 평가서 작성의 이유다. 이 평가서를 독자들이 읽고 바른 판단을 할 필요가 있음을 인지한 본지는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에 대한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

 

들어가면서

총신대 김영우 총장은 지난 십수년 동안 자신은 진정한 개혁주의자이며 총신은 잘못된 복음주의에 물들어 있었다고 호도하면서 자신이 그것을 바로 잡고 있다고 직간접으로 표방하여왔다.(*일곱 명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정이철에 대한 보고서를 내는 것은 정이철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고 말하며 학교의 명예를 심각하게 손상하고, 무차별적으로 근거 없이 방언을 비롯한 몇 개의 신학적 잣대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더 이상 묵인하는 것은 신학교 교수로서 깊은 책임의식과 총신과 교단과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학성숙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고는 서로 읽고 검토하고 보완하여 완성한 것임을 밝힌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김 총장처럼 겉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예장합동과 총신을 변질된 현대복음주의로 흘러가는 것처럼 몰아가며 여러 학자들과 목사들을 비판하는 또 한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은 정이철이다.(*정이철이 담임하는 교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는 전남 여수 인근에서 출생하여 여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총신대와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였다. 1992년 11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신반포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전임강도사, 교육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서울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95.10), 목사 안수(97.10)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에서는 주님의 기쁨교회(2001-2002), 앤아버 한인장로교회 (2002-2004)에서 시무했고, 현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2004-) 담임을 맡고 있다(앤아버 반석장로교회 주소는 다음과 같다. 2118 Ann Arbor-Saline Rd., Ann Arbor, MI 48108. Tel: 734-678-7133). 그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새물결, 2013),「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에스라서원, 2014),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GNPBOOKS, 2015) 등 세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개인적으로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정이철 목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홈페이지, <http://cantoncrc.com/with_pastor>/ (2018년 4월 17일 접속); 바른믿음 홈페이지, <http://www.good-faith.net/>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목사는 이름뿐인 개혁주의를 외치는 김영우 총장을 공공연하게 두둔하며 자신도 김 총장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식의 지지 글을 자신의 사이트에 올렸다. 총신 사태를 김영우 총장의 정관변경과 사유화 그리고 학사비리 등의 문제로 보지 않고 신학적 문제로 호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은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양비론을 내세우며 마치 이 둘이 대립적이어서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왜곡하면서 자신을 진정한 개혁주의자라고 자처하며 자신들을 치켜세우고 있다. 말뿐인 개혁주의는 이단도 주장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거짓 선지자들과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를 구분하는 방법을 우리 주님은 가르쳐 주셨다. 마7:20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김 총장의 열매가 어떤지는 이미 많이 알려졌고 곧 확실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한 성경적 근거 없이 단지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교조적 착각으로 많은 목사들과 교수들을 비판하여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정이철 목사는 교만과 비방과 분열의 열매를 맺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진단해 본다. 정이철은 방언을 인정하면 특별계시의 존속을 인정하는 것으로, 심지어 이단이라고 몰아가고 있다. 정이철이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극단적인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사고를 가지는 반개혁주의적이고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과 맞지 않은 비성경적인 이단적인 측면도 상당히 많다. 그의 신학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본 후 어거스틴, 칼빈, 핫지로 이어지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이해해온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혁주의 견해를 제시할 것이다. 그런 후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려고 한다.
 

I. 정이철의 신학 사상에 나타난 비 성경적 이단성
 

1. 박영돈 교수에 대한 정이철의 방언 비판 문제

  

▲ 정이철 목사는 자신이 운영하는 <바른믿음>에서
박영돈 목사의 방언관을 비판했다.(사진은 인터넷 화면 갈무리)

정이철 목사는 소위 <바른믿음>이라는 본인의 사이트에 한국의 대표적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이며 고신신대원 조직신학 교수인 박영돈 교수의 방언에 관한 글들을 인용하면서 비판한다. 정이철 목사가 주로 이단으로 정죄하는 대상들은 오늘날에도 방언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교수들과 목사들이다. 비록 이들 중 누구도 방언을 성경적 특별계시 차원으로 놓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정이철 목사는 마치 이들이 특별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거나 성경이 특별계시임을 부인하는 자들인 것처럼 이단으로 정죄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영돈 교수에 대한 정이철 목사의 비판이다. 그가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박영돈 교수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에 수록된 글들은 다음과 같다.

“고린도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계시와는 정반대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데, 어떻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었겠는가?”(154쪽)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지, 예언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특성상 방언은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기도의 내용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말씀이 될 수는 없다.”(173쪽)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의 유형에 가깝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방언의 특성은 특정한 지방의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종의 신비한 언어라는 점이다.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라고 하였다.”(175쪽)


박영돈 교수는 방언에 대해 나름대로 개혁주의 틀 안에서 건전하고 날카로운 해석과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모두 외국어라고 가르치는 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였으나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일종의 기도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상당히 많다. 박영돈 교수는 이러한 개혁신학 입장에서 신학적 지식과 해석학적 지식을 갖고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이철 목사는 박영돈 교수를 '이단'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심지어 그는 “박영돈 교수가 감히 이런 주장을 하고서도 편히 살기를 바랄 수 있을까? 명색이 고신의 교수이고 조직신학 학과장인 박영돈 교수가 이런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고 그대로 동승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다.”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해댄다. '이런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고 그대로 동승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동류의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같은 이단의 범주로 그를 평가한다는 말이 아닌가? 개혁주의 신학자가 개혁주의 틀 안에서 자신의 방언에 대한 입장을 개진한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인신공격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자신이 이단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표현이다.(*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한 것도 아닌데, 박교수를 이단의 한 부류로 모는 정이철 목사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이단이라면 그 옷이라도 싫어해서 불구덩이에서 건져내야 하며 이것이 이웃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박영돈 교수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왜 유독 정이철 목사만 박영돈 교수를 향해 이단 이론을 답습하고 동승하고 있다고 주장할까? 여기 다른 이유는 없다. 정이철 목사 자신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른 복음이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꾸짖을 때 사용했던 말이다(갈1:6-9). 여기 다른 복음이란 한 마디로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게 되지만 율법의 행위, 곧 할례를 받고 장로들의 유전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론을 떠나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것 외에 의롭게 만드는 다른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박영돈 교수가 칭의론을 거부했는가? 그가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했는가? 박영돈 교수가 방언을 계시의 방편이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기도의 수단으로써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 것인데, 정이철은 박영돈 교수를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는 자라고 정죄하였다. 정이철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의롭다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유대주의자이며 바리새인이다. 요한 칼빈의 멘토요, 종교개혁자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어거스틴이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덕목으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상기해야 한다.
 

2. 방언을 하나님의 직통계시와 직통설교라는 정이철의 주장은 개혁신학 왜곡

정이철 목사는 아래와 같이 방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박영돈교수를 비판한다.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직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설명하는 특별계시를 내포하는(특별계시를 보충하는) 계시적인 은사였다. 쉽게 말하자면,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였다. 이 점에 대해서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유대인을 선지자로 세우시고 유대인들의 언어로 예언하시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방인들의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시니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인들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시는 하나님을 보고서 불신앙했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악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방언이 있는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나타났다. 최초의 방언이 나타난 사도행전 2장에서는 삼 천 명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탄생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목사는 방언이 “직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설명하는 특별계시”라고 단정함으로 방언을 직통특별계시로, 이어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라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의 방언을 “하나님의 직통 설교”라고 단정한다. 심지어 “이 점에 대해서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방언을 직통특별계시, 직통설교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지 흥미롭다. 그가 어떤 성경적 근거로 방언을 하나님의 직통계시이며 직통설교라고 하는지 의심스럽다. 이러한 단정적 말투가 영락없이 이단 교주와 비슷하다.
 

개혁주의자들 가운데는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기도의 언어로서의 방언은 구별된다고 보는 신학자들이 적지 않다.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은 각 지방의 언어를 말하는 기적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듣는 기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외국어를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 기적이지 그 자체가 새로운 진리에 대한 직통계시가 아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도 직통계시는 아니다. 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이라는 매개체 없이는 쓰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통계시는 아니다. 물론 바울 서신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께 받아 바울이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직통계시라고 하지 않는다. 직통계시는 이단들이 잘 쓰는 용어이다. 개혁주의 성경관은 신구약 66권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영감된 말씀임을 주장한다.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성경의 영감은 유기적 영감이지 직통으로 받아 적는 기계적 영감이 아니다. 혹 정이철 목사는 벧후1:21,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는 말씀을 직통계시라고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베드로 사도는 벧후3:1에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라고 말씀한다. 베드로후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베드로가 썼지만 베드로 자신의 지식과 상식과 경험 등이 개입되지 않은 직통계시는 아니다.(*만약 정이철 목사 주장대로 방언이 직통계시이며 직통설교라고 한다면 왜 사도바울은 통역을 요구했을까?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통역하면 그 통역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지 않는가? 통역은 사람의 말이지 않는가? 왜 바울은 방언보다는 통역을 더 중요시 했는가?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라면 바울은 자신의 서신보다 더 권위적인 직통계시 앞에 무릎을 꿇고 경청했어야 하지 않는가? 왜 방언을 자제하라고 하며 통역 없이는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한다며 금했던가? 더욱이 바울은 고전14:19에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한다. 만약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라 한다면 어떻게 일만 마디 하나님의 직통계시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할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직통계시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의 깨달음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보다 낫다는 말인가?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다른 교회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하시며 훈계하는 내용을 주로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파당문제, 성찬문제, 음란문제, 의복문제, 부활문제 그리고 은사문제였다. 즉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여러 은사들은 교회들이 지향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 지양해야 할 문제였다.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며 직통설교라면 왜 교회를 위한 목회서신서에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을까? 그것은 바로 방언은 교회가 지양해야 할 일종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정이철 목사는 “이전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유대인을 선지자로 세우시고 유대인들의 언어로 예언하시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방인들의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시니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고린도교회는 헬라 지역에 위치한 교회로서 헬라어가 통용어였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히브리어로 예배를 드렸을 가능성이 많았지만 헬라어, 아람어, 심지어 로마 제국 아래에서 라틴어까지 사용되었던 고린도지방에서 하나님이 유대인들로 충격 받도록 이방인들의 말로 십자가를 설명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다들 헬라어를 이해하는 상황에서 다른 이방나라 언어로 십자가를 설명했다고 유대성도들이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회개를 했을까? 만약 정이철 목사가 말하는 이방인들의 말이 히브리어도 헬라어도 아니라면 어떻게 고린도교회의 유대인들이 이해를 하고 회개를 했을까? 혹 정목사는 통역을 했을 것이라고 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이 통역없이 방언을 했기에 사도바울은 통역 없으면 하지 말라고 자제 시킨 것이다.) 정 목사는 복음의 내용보다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현상 자체를 보고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고 두려워하고 회개를 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것은 복음의 성격을 왜곡하는 것이다. 오순절 때 3,000명이 회개한 것은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방언을 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사도행전 1장 8절에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심으로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 “저희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그들 가운데 초자연적인 성령의 임재 현상들이 나타났으며 베드로가 성령의 권능을 받고 능력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선지서와 다윗의 시편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메시아이며 부활하신 주가 되신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입증한 영감어린 성경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베드로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말씀을 직통으로 계시해준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께 듣고 배운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고 깨달게 하신 것이다.
 

3. 정이철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을 동일시

정이철 목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것이 성경의 방언의 기능이다.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친히 설교하시는 현상이었다. 그 때에는 교회에 설교자가 없었고, 성경도 없었으니, 현실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친히 말씀하시어야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2018년 4월 17일 접속.)

  

▲ 박영돈 교수가 쓴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왜 초대교회에 설교자가 없었다고 주장하는가? 무엇보다 바울과 11사도가 있었고 7 집사들도 있었다. 베드로도 설교했고, 11제자들이 베드로와 함께 설교했다. 빌립도 설교를 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교훈을 했다. 방언으로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은 개혁신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적 가르침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았다(엡2:20). 방언하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은 신사도운동의 주장과 별 차이가 없는 이단적 발언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단회적인 직분이며 그들과 선지자들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외에 다른 터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정이철 목사는 이단임에 분명하다.

 정이철 목사는 계속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단들도 사도행전의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거짓 방언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신학을 주장한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다른 종류의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혀를 움직여서 하나님 자신에게 비밀스러운 영적인 기도를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하늘의 언어’의 방언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기독교에 두 종류의 방언이 있었다는 이런 주장은 거짓 방언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된 이론이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시대와 고린도교회 시대는 동시였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처음부터 바울에게서 신학을 배운 사람이고,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를 동일하게 전파한 사람이다. 바울이 가르친 성령의 은사와 누가가 설명하는 성령의 은사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 무엇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기독교의 방언의 형식은 반드시 이방인의 언어이고,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그리스도에 대해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의 방언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했다. 성경의 방언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심판의 표적이며, 반대로 믿고 순종하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 백성되는 복이 부어졌음이 선포하는 표적이라고 가르쳤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목사는 위 문장에 있는 대로 “거짓 방언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된 이론”이라는 용어를 구사하며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사도행전의 방언과는 달리 외국어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거짓 이론을 주장하는 자라고 단죄한다. 칼빈은 성경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했고, 개혁주의 영역에서도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을 동일시하지 않는 학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도 정목사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교회 방언을 구분하는 이들을 이렇게 함부로 거짓된 이론이라고 정죄한다. 정죄를 하지 말고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사도행전과 같이 외국어라는 사실을 해석학적, 문헌적, 역사적, 사회적 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먼저 제시했어야 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이 뭐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교인들을 헛된 환상을 갖게 하고 대외적으로 관심을 끌며 스스로 바른 신학을 세우는 이 시대의 의로운 대선생인 척하는 것은 영락없는 이단 교주의 모습이요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는 거의 동시대에 기록되었고 누가와 바울은 동역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말씀한다. 외국어라고 한다면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외국어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는 말씀은 단순히 그 외국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보다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러한 언어이며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외국어였다면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전 14:22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니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말씀한다. 만약 방언이 외국어라면 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겠는가? 따라서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표적(sign)이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자기 밖의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다. 방언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한다면 방언 자체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방언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파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14:21에서 인용된 사28:11,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에서 다른 방언은 바벨론 혹은 앗수르 제국의 언어이다.

그러나 이 언어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이 본 의미였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 28장의 다른 방언, 즉 바벨론 혹은 앗수르 제국의 언어가 표시하는 즉 표적은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반면에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을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이라고 한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다. 고전14:21에 이사야 28:11을 인용했다고 해서 고전14장의 방언이 외국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4. 바울의 “다른 복음”(고후 11:3, 4)을 거짓방언으로 곡해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계속 주장한다.

박영돈 교수 등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에서 사도행전의 방언과 다른 이상한 기도의 방언이 나타났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었다. 고린도교회에 기도를 위한 방언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박영돈 교수처럼 다음의 성경구절을 근거로 주장한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과연 위 말씀이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했음을 의미하는 내용일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고 있음이 전제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영'으로는 기도하므로 '마음'으로는 그 기도의 내용과 의미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 과연 바울의 신학일까? 바울이 그런 내용을 가르쳤던 사람이었나? 바울이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고 일한다는 것은 이방종교의 사상이지 기독교 사상이 아니다. 대체 바울은 왜 이런 이상한 말을 했을까?

바울은 고린도전서보다 약 5개월 후에 쓰여진 고린도후서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이 떠난 고린도를 떠난 후 이단들이 고린도에 찾아가서 거짓된 가르침을 베풀었고, 고린도 신자들이 바울에게서 배운 것을 버리고 이단들이 가르친 것을 따라갔다고 심각하게 책망했다. 즉, 고린도에 나타난 이상한 방언기도 운동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바울은 이상한 거짓 방언기도의 은사에 빠져 이단의 길로 가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마귀가 하와를 미혹하였던 것처럼 이미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고 한탄하면서 책망했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우리는 위 문장에서 정이철이 고린도의 방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그가 사용한 용어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그것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었다.”

2. “고린도에 나타난 이상한 방언기도 운동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었다.”

3. “바울은 이상한 거짓 방언기도의 은사에 빠져 이단의 길로 가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마귀가 하와를 미혹하였던 것처럼 이미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
 

위 정이철의 주장을 요약하면 고린도교회 방언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고, “이상한 거짓 방언”으로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심어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곧 이단들이 고린도교회에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방언을 거짓 방언, 이단적인 방언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이처럼 정이철은 사도행전과는 달리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닐 가능성 있는 내용이나 주장은 다 이단적 행태나 거짓 방언으로 정죄한다.

그 예로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구절이다. 여기 “내가 만일”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이것은 가상적(hypothetical) 표현이지 바울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말씀한다(고전14:18). 따라서 14절 말씀은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나 자신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한다며 바울 자신을 예로 들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훈계하고 있는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자신의 의견을 일단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거기에 맞추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어떻게 이 구절을 두고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위적 주장을 할 수 있는지 매우 흥미롭다.(*정이철 목사는 “바울이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고 일한다는 것은 이방종교의 사상이지 기독교 사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이단들의 해석방법이다.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방언을 다루면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말을 전하지 말고 통역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방언으로 기도해도 깨닫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의미로 바울은 말씀하신 것이다. 정이철목사는 무지하게도 “마음”(νοῦς)을 영과 비슷한 개념의 마음(mind)으로 이해하고 있다. 14:19,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헬라어 원문에는 없는 “깨달은”이라는 단어를 한글 성경은 넣었다. νοῦς를 한글성경은 “깨달은 마음”으로 번역한 것이다. 원문은 πέντε λόγους τῷ νοΐ μου 혹은 πέντε λόγους διὰ τοῦ νοός μου 로 되어 있다. “내 마음의 다섯 마디”라는 것이다. 원문의 마음(τῷ νοΐ 혹은 τοῦ νοός)은 영어로 intellect, 한글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즉 영으로 기도해도 나는 지적 열매를 맺지 못한다. 즉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그 다음 15절,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향해 주시는 권면이다. 거짓 이단들을 빗대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이철목사 말대로 바울은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영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여기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해도 그 뜻을 깨닫고 기도해야 하고 방언으로 찬송해도 그 뜻을 깨닫고 찬송해야 한다고 권면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정이철 목사는 특유의 이단 해석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 고후 11장에 언급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고린도교회에서 직통계시가 아닌 기도로서의 방언을 하는 사람들과 단정적으로 연결시킨다. 고후 11장의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다른 영을 받고 다른 복음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닌 유대주의자들이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고 예수를 유대 왕국의 회복자로 보는 유대주의자들이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는 수신자가 같지만 그 목적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데도 정이철 목사는 이단처럼 이들을 억지로 연결시키고 있다.
 

5.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 사이비로 정죄

끝으로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박영돈 교수를 비방한다.
 

고신의 조직신학 학과장이라는 박영돈 교수가 이단들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의 비밀의 방언기도 이론을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직접 설교하시는 계시적인 은사가 아니었고,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 박영돈 교수의 신앙성장 과정이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어떤 유형의 이단과 밀접했으므로 이런 사이비 신앙이 형성된 모양이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은 위 글에서 “이단들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의 비밀의 방언기도 이론”, “어떤 유형의 이단과 밀접했으므로 이런 사이비 신앙”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단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단들이 주장하는 방언이론,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어떤 유형의 이단이라는 표현을 통해 정이철은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으로 “사이비 신앙”으로 정죄한다. 목사의 탈을 쓰고, 아니 신자의 탈을 쓰고 어떻게 한 신실한 신학자이며 목사인 사람을 비방하고 모욕을 줄 수 있는가? 그렇지 않고서는 이러한 무서운 저주를 퍼부을 수 없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방언을 “사탄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라고 단죄하였는데 자신과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고 이렇게까지 모욕을 주는 정이철 목사가 오히려 마귀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보인다. 사탄이라는 말의 뜻은 대적하는 자, 모함하는 자이다. 방언을 인정함으로 자신과 좀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거짓의 영으로, 이단으로, 다른 예수를 따르는 자로 모함하고 적을 만드는 정이철 목사는 전형적인 사탄의 자식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깎아내리고 자신을 치켜세우고 의롭다 만드는 그는 영락없는 현대판 바리새인이다.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도 점점 더 방언에 대해 다양성을 인정하는 경향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국내 총신과 고신을 비롯한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교에 재직하는 교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누구도 계시의 방편으로 방언을 인정하는 신학자는 없다. 특별계시는 종결되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방언은 각 지방 언어이지만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기도의 수단으로 보고 방언을 인정한다.

따라서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특별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정죄하거나 그런 입장의 신학자들을 반개혁주의 신학자로 매도하는 것은 개혁주의 안에서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나 칼 매킨타이어 노선의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행태이다. 심지어 은사중지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개핀 교수도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개혁주의 안에 이론으로 여기고 다른 견해를 인정하고 존중했다. 신학적으로 다른 입장과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고 그것도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인정한다고 해서 누구도 정이철 목사처럼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비방하고 거짓 영이라고 정죄하지 않는다.



II. 개혁주의 전통의 성령의 이적관(異蹟觀)
 

우리는 지금까지 박영돈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나타난 정이철의 개혁신학의 왜곡과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으로 정죄하는 몰아가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자들이 이적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기독교 전통, 역사적 개혁주의 노선에 선 어거스틴,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찰스 핫지, 현대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스프라울, 파이퍼 등의 입장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어거스틴의 기적 이해
 

  

▲ 어거스틴이 살았던 당시 도나티스트 파들은 방언을 인정했고
그런 현상이 당시에도 나타났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파들의
성령의 역사나 방언의 은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되지 못함을 비판한 것이다.
 

소위 개혁주의 창시자 요한 칼빈의 신학적 멘토였던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편 우리는 기적을 전파한 사람들에 대해 의심해서는 아니 된다. 비록 실제적으로 본 사람들이 많이 없고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신적인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설명을 하기 전에 사람들이 믿기도 했다.”(*Augustine, De Vera Religione 25 (47) as found in Augustine: Earlier Writings.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Trans. by John S. Burleigh. (Philadelphia, Pa.: the Westminster Press. 1953), 248. 어거스틴은 겸손을 최고의 기독교인의 미덕으로 여겼다. 위 인용문 바로 이어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다룸에 있어서 매우 겸손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또한 어떤 인간의 권위도 순전한 영혼의 이성(이해)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분명한 진리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만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지 않는다. 만약 교만이 없는 곳이라면 이단도 없고 분리주의자도 없고 할례자도 없고 우상숭배자도 없다. 만약 약속하신대로 사람들이 완전하게 되기 전에 서로 반대의 입장들이 없었다면 진리를 매우 열정적으로 찾은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기적을 전파한 사람들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무엇인가? 기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다는 말이 아닌가? 어거스틴은 기적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입장을 전파하는 자들을 의심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도 남겼다. “오늘날 세례받는 자에게 안수 할 때 그들은 성령을 받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방언으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자들이 지나갈 때 그 그림자로 병이 낫는 일이 그쳤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그 책(De Vera Religione)을 쓸 때 한 맹인이 밀란에서 눈을 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알 수도 없고 또한 알지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Augustine, Retractiones, in The Edinburgh Magazine and Literary Miscellany. Vol. 15. (Edinburgh: Printed for Archibald Constable and Company. 1824), 688.) 어거스틴은 성령의 놀라운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의 회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말씀이 매개되어 성령께서 그 심령에 강하게 역사하신 회심이었다.
 

어거스틴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죽은 신학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과 살아계시는 성령 안에서 발생되고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당시 도나티스트 파들은 방언을 인정했고 그런 현상이 당시에도 나타났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파들의 성령의 역사나 방언의 은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되지 못함을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성령은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보편적 교회를 하나되게 하신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7x7=49에 하나 더한 50일째 성령이 임하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엄중한 교훈을 주신다. 즉 하나가 더해진 것은 우리로 하나되게 하라시는 것이다.”(*Augustine, Sermo CCLXVIII (268) Col. 1231.)
 

어거스틴이 도나티스트들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은 이들의 방언 남발과 신비체험 강조 때문이 아니라 교회를 떠나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를 공격한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핵심, 특히 오순절 방언의 현상은 교회가 하나됨에 있었다고 어거스틴은 강조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령의 역사나 방언을 부정하지 않았다. 도나티스트를 어거스틴이 정죄한 것은 그들의 재세례와 분리주의 사고였다. 박해를 참고 견딘 것은 참으로 높은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이지만 자신들이 준 세례만을 세례로 인정하고, 다른 기성교회를 정죄하는 분리주의 사고를 어거스틴이 경책한 것이다. 사랑의 결여된 것이 도나티스트들의 가장 큰 문제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만약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면 그 세례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본질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에서는 관용을 외쳤던 교회 지도자였다.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며 교회를 어지럽히고 함부로 교회 지도자들을 공격하는 정이철 목사는 어거스틴의 기준에 따르면 이단인 것이다.
 

2.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기적 이해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비록 칼빈주의자가 아니지만 건전한 신학자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루터는 비록 로마 천주교와 재세례파의 신비주의를 강하게 공격하였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설교에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설교에 표적이 동반된 것처럼 기적이 동반되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사람은 두 가지 방법 중 한 방법으로 자신이 설교자로 부르심을 얻는다. 첫째는 하나님께 직접 받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들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다. 만약 직접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설교에 기적들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설교에는 표적이 동받되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Martin Luther. Festival Sermons of Martin Luther, trans. by Joel R. Baseley. (Michigan: Mark V Publications, 2005), 3-4.)
 

개혁주의 창시자 칼빈은 루터처럼 로마 천주교와 재세례파의 신비주의를 반대하고 특별 계시의 종결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비 비 워필드가 말했듯이 ‘성령의 신학자’였다. 그만큼 기도를 많이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성령의 역동성을 당대에 회복하려고 노력한 신학자도 드물다. 어거스틴은 그런 면에서 종교개혁을 진정한 교회 갱신과 개혁으로 한 차원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혁주의는 즈빙글리와 칼빈에게서 비롯되었지만 그 사상적 기원은 성경과 어거스틴에게서 큰 빛을 졌다. 칼빈은 교회의 참된 회복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고, 그런 면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교회의 참된 회복과 연계시켰다. 요한 칼빈은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이 오늘날에도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였다.
 

“비록 엄밀히 말해서 믿음은 말씀에 근거하고 그 목적을 말씀에 두지만 여전히 기적들이 발생한다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 단 그 기적들이 말씀과 연계되고 그것들이 신자의 믿음을 말씀으로 향하게 할 경우이다. 왜 기적들을 표적들(signs)이라고 했는지 이미 설명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이상하고 비범한 일들을 보여주심으로 그 기적들로 인하여 사람들로 당신의 능력을 생각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vol. II, translated by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281.)
 

  

▲ 칼빈은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에 나타난 은사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 

일각에서 보통 칼빈을 은사중지론자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글들, 특히 고린도전서 주석을 보면 확실히 은사중지론을 주장하지 않고 자신 당대에도 은사들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칼빈주석 중에서 고린도전서 14장에 관한 주석에서 그는 바울 시대에 빈번하게 등장하던 은사들의 풍성함이 왜 자신의 시대에 잘 나타나지 않는가를 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우리는 바울의 이 구절에서 어떻게 교회가 놀라운 부와 다양한 영적 은사로 말미암아 번창하게 되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빈약한 재능과 결핍을 사실상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망은에 대한 대가로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풍요함은 결코 다함이 없으며 그의 관대하심이 줄어드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J. Calvin, 성경주석 19: 로마서, 빌립보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서울: 성서원), 413.)

칼빈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렇다. 초대교회에 빈번하게 나타났던 은사들의 풍요함이 자신의 시대에 빈곤과 결핍으로 바뀐 것은 "우리의 망은에 대한 형벌"이다. 칼빈은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에 나타난 은사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 칼빈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불신앙과 게으름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관대하심으로 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을 능력이 없지만, 경건을 실행하기에 게으르지 않고 그것이 산출하는 결과를 얻기에 게으르지 않는 한, 아직도 우리는 빛과 교훈을 충분히 받을 수 있고 또한 나누어줄 수 있다." 대담하기까지 한 칼빈의 이러한 주장은 은사들의 풍요함이 사도 시대뿐 아니라 현 시대에도 여전히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칼빈의 이런 주장에 비추어볼 때 그가 은사중지론자라고 볼 수 없으며, 그러므로 은사중지론이 마치 개혁주의 신학의 본류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3. 20세기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A. A. 핫지, 스파라울. 파이퍼
 

미국 칼빈주의 대부라 할 수 있는 구프린스톤신학을 대변하는 찰스 핫지의 아들인 A. A. 핫지는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로 기적이 초대교회에만 국한된 현상으로 보지 않았다. “기적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는 하나님의 뜻의 도구일 뿐이며 그 도구는 기적이 발생되도록 더 높은 도덕적 다스림에 쓰임받는 것이다.”(* A. A. Hodge. A Commentary on the The Confession of Faith. With Questions For Theological Students and Bible Classes.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and Sabbath-School Work, 1869), 140.) 

기적이 현재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긍정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기적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오늘날도 일어나는 것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섭리하시며 필요할 경우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주지했듯이 개혁주의 안에는 방언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은사 중지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방언이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방언의 존재를 인정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참으로 많다. 21세기 미국의 대표적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스프라울 박사(R. C. Sproul)는 방언을 인정하고 자신이 그렇게 방언의 은사를 간절히 사모했다며 이렇게 고백했다.
 

“아무튼 난 방언 은사를 구했고 나의 친구들과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난 방언으로 말미암아 큰 덕을 세우지 못했고 따라서 깨달을 수 있는 기도를 여전히 선호하고 있다. 한편 난 이 방언이 신약에 나타난 것과 같은 것인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에서도 방언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고린도전서) 방언이 외국어였다는 주장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증명되지 않는다. <중략> 난 성령이 말씀과 반하여 결코 역사하시지 않고 언제나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므로 난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난 여전히 오순절파 친구들과 교제하고 있고 그들의 기도 사랑을 기쁘게 지켜보고 있다. 난 오순절파가 시작된 교회의 삶 가운데 성령과 그의 역사로 말미암는 참된 부흥을 감사하고 있다. 한편 난 오순절 파에서 발생되는 잘못된 교리에 주시하고 있다.”(*R.C. Sproul, “Zeal Without Knowledge” https://www.ligonier.org/learn/articles/zeal-without-knowledge/). 만약 스프라울이 방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간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존 파이퍼는 방언을 성령께서 역사하는 영적 체험으로
말하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말씀한 방언은 외국어로
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물론 파이퍼 박사 역시 오늘날 방언을 특별계시나 예언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표적인 개혁주의 침례교(Reformed Baptist) 목사이며 학자인 존 파이퍼(John Piper) 박사는 개혁주의를 평생 설교하고 가르쳤던 분이다. 이 분은 방언을 성령께서 역사하는 영적 체험으로 말하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말씀한 방언은 외국어로 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물론 파이퍼 박사 역시 오늘날 방언을 특별계시나 예언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유다서 1장 20절 “성령으로 기도하며”를 해석하기를 이것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그 자신이 방언받기를 위해 기도했다고 고백하고 그러나 하나님이 마음에 확신을 주시기를 자신은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은사와 목양하는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방언하는 신자들을 말씀으로 잘 가르치고 또 목양해야 함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방언이 교회에 중요한 은사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John Piper Inteview. https://www.desiringgod.org/articles/piper-on-prophecy-and-tongues).



소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오늘날 개혁주의 전통의 성령론은 매우 풍성하고 풍요롭다. 그런데도 정이철은 방언의 존재를 인정하고 초자연적 기적을 인정하면 특별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진실을 호도하고 심지어 이단이라고 단죄한다. 이것은 방언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함부로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자의적으로 이단이나 오순절주의니 현대복음주의로 정죄하는 전형적인 극단적 칼빈주의의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모습이다.
 

  

호튼 박사는 성경 계시의 종결을 믿고 더 이상 메시야적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똑같은 말씀과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거스틴, 칼빈, A. A. 핫지, 스파울, 파이퍼 모두 대표적 개혁주의자들로 성령론을 풍성하게 발전시킨 주역들이지만 정이철의 잣대로라면 다 이단들이다. 물론 아직도 개혁주의 안에 은사 중지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적지 않은 현대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안에 은사중지론을 주장하는 개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퍼거슨, 존 프레임, 바커 같이 은사중지론을 지지하지 않는 신학자들도 여럿 있다. 방언의 존재 여부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물론 개혁주의 전통에 서있는 누구도 방언을 특별 계시의 연속성이나 방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특별 계시는 성경으로 종결되었다고 개혁주의 전통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White Horse Inn, “Reformed and Charismatic?”https://www.whitehorseinn. org/2011/08/ reformed–and- charismatic/ 끝으로 미국 서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는 구속사의 새로운 장을 쓰는 기간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사도행전과 계시록 사이의 선교를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기간이다. 바로 새 언약의 사역 기간이다. 교회는 성육신을 연장하거나 그리스도 구속사역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교회는 오순절을 반복하거나 사도들의 특별한 사역을 연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대신 이 기간의 사역을 위해 똑같은 말씀과 성령을 받아야 한다.” 호튼 박사는 성경 계시의 종결을 믿고 더 이상 메시야적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똑같은 말씀과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려면 똑같은 성령을 받아야 하고 그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순절에 오신 것이다. 오순절은 단회적 사건이지만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그 오순절에 임하신 같은 성령이시다).
 

게다가 오늘날 미국의 유수한 신학교나 한국에서 어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라도 방언에 대해 자신과 좀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단과 동질의 부류로 정죄하지 않았다. 특별계시의 연속성과 계시의 수단으로 방언을 이해하지 않는데도 방언의 존재를 인정하면 무조건 이단과 동질의 집단으로 정죄하는 정이철이야 말로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은 십자가에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과 성령 강림과 성경의 완성까지 한 패키지로서 봐야 한다. 오늘날 방언이 계속되어도 그 방언은 계시적 의미나 구속사적 의미는 없다. 또한 오늘날 신유가 계속되어도 그 신유는 계시적 의미나 구속사적 의미는 없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병을 고치신 것은 그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구속자이신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의인의 믿음의 기도가 병을 고친다고 해도 그 의인은 구속자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방언이 오늘날 계속된다고 해서 그 방언이 계시적 의미나 구속사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성경 66권이 완성됨으로 계시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지만 성경에 나온 은사들과 성령의 역사들이 다 종결된 것은 아니다. 성경이 완성되었지만 성경을 통한 성령의 역사는 계속된다. 바른 믿음은 자신만이 옳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바른 믿음은 결코 교만과 분열을 조장하지 않는다. 조금 지식이 생겼다고 복음의 동역자들을 극단적으로 비방하여 상대적으로 자신을 치켜세우고 스스로 의롭다하는 것은 사탄에 속한 자의 모습이지 결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모습이 아니다. 함부로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고 이단과 같은 동질의 사람으로 매도하고 정죄하는 것은 분열을 획책하는 사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III. 종합정리: 정이철의 신학 문제와 총신사태에 대한 왜곡 문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정이철(* 정이철이 담임하는 교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는 전남 여수 인근에서 출생하여 여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총신대와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였다. 1992년 11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신반포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전임강도사, 교육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서울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95.10), 목사 안수(97.10)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에서는 주님의 기쁨교회(2001-2002), 앤아버 한인장로교회 (2002-2004)에서 시무했고, 현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2004-) 담임을 맡고 있다(앤아버 반석장로교회 주소는 다음과 같다. 2118 Ann Arbor-Saline Rd., Ann Arbor, MI 48108. Tel: 734-678-7133). 그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새물결, 2013),「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에스라서원, 2014),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GNPBOOKS, 2015) 등 세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개인적으로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정이철 목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홈페이지, http://cantoncrc.com/with_pastor .2018년 4월 17일 접속 ; 바른믿음 홈페이지, http://www.good-faith.net/ 2018년 4월 17일 접속 )은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을 표방하며 개혁신학을 사수하는 기수처럼 자처하지만 자신의 견해와 다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비판하고 심지어 ‘이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개혁신학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개혁주의 노선과 전혀 다르다. 게다가 그가 비판한 글들을 검토한 결과 그의 신학과 행동에는 다음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1. 칼 매킨타이어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정이철은 개혁신학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근본주의를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1941년 결성된 미국교회협의회(ACCC[근본주의기구, ICCC 전신])의 칼 매킨타이어를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자들은 1) 1942년 결성된 미국복음주의협의회(NAE)를 신복음주의라고 공격하고, 2) WCC, WEF(WEA), 로마가톨릭을 동일집단으로 매도하며, 3) 개혁주의와 복음주의를 구분하고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으로 진실을 왜곡하여 성경의 권위와 종교개혁의 전통을 존중하고 계승하는 복음주의를 반개혁주의운동으로 왜곡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칼 매킨타이어를 따르는 근본주의는 수없는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여 세계기독교를 파괴한 신앙운동이었다. 한국에서도 매킨타이어 근본주의 분리주의로 인해 수없이 교단이 분열되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이철이 동일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정이철은 칼 매킨타이어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근본주의를 진정한 복음주의,’ 진정한 개혁주의라고 옹호하는 한편 복음주의를 현대복음주의라는 자신이 만든 용어로 범주화시켜 반개혁주의 지도자들로 매도하고 있다. (* 정이철, “개혁주의로 가야할 합동 교회들이 현대 복음주의로 빠졌다,” 바른믿음, 2018년 1월 27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58> . 2018년 4월 17일 접속).

1961년 9월 21일 오후 7시 부산시 동광동 남교회당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 46회 총회에서는 그 다음날 9월 22일 총회장 한상동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회장이 총회 산하에 있는 개인이나 단체로 I.C.C.C.에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선언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 46회 총회 회의록(1961년), 15.) I.C.C.C.는 주지하듯이 ACCC에서 발전한 칼 매킨타이어가 조직한 신근본주의 노선의 중심 기구이다. 1961년 제 46회 총회가 칼 매킨타이어 신근본주의 단체인 ICCC와 우호적인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우리 총회가 ICCC와 우호관계를 끊게 하여 달라”(*대한예수교장로회 제 46회 총회 회의록(1961년), 20.)는 헌의를 받아 정치부로 보냈고, 다시 총회 석상에서 깊은 논의를 거쳐 전 총대들이 ICCC와 관계를 끊기로 진중하게 결정한 것이다. 그 총회는 총회장 한상동, 박형룡, 정규오 목사를 비롯한 교계지도자들이 참석했다. 그 이듬해 제 47회 총회에서는 ICCC 국제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들이 총회 석상에서 입장표명(공개사과)하였으며,(*대한예수교장로회 제 47회 총회 회의록(1962년), 40.) “ICCC에 대한 우호관계를 계속한 회원에 대해서는 회장이 권면위원 3인을 자벽하여 권면하는 것이 좋은 줄 아나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 47회 총회 회의록(1962년), 43.)고 결정하였다.

실제로 ICCC 국제대회에 대회에 참석한 “김윤찬 목사가 ICCC 세계회의에 참석한 심경과 치리하면 잘 순복할 것을 공언하였다”(*대한예수교장로회 제 47회 총회 회의록(1962년), 45.)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가 칼 매킨타이어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에 대해 얼마나 단호한 입장을 취했는가를 보여준다.

1961년 이후 예장합동은 칼 매킨타이어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와 공식적으로 단절하고 완전히 교류를 끊었다. 칼 매킨타이어가 1959년 예장합동이 예장통합과 WCC 에큐메니칼 문제로 교류를 단절한 후 WCC 에큐메니칼반대운동을 앞세워 예장합동을 자신의 신근본주의운동 ICCC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용산교사 건물을 구입할 때 자신을 지지하는 모 예장합동 인사를 통해 재정지원을 해준 것은 있지만 분열을 획책하는 것이 드러나 바로 관계를 단절했다. 칼 매킨타이어가 사당동 총신대학교 캠퍼스를 구입하거나 건물을 짓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당캠퍼스 대지는 백남조 장로님이 사재를 털어 구입한 것이고, 건물은 명신홍 목사님이 칼 매킨타이어가 신근본주의 신학교라고 비판하는 미국칼빈신학교가 소속된 미국 CRC의 도움을 받고 전국교회의 헌금으로 건축한 것이다. 1964년 8월에는 미국 칼빈신학교 교장 크로밍가가 내한하고 명신홍 박사는 미국에 가서 1964년 9월 CRC로부터 3만 달러, 총 4만 달러를 모금하였다. 1961년 예장합동지도자들은 칼 매킨타이어의 ICCC와 완전히 관련을 끊었다.

성결교도 1965년 12월 31일 칼 매킨타이어의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단체인 ICCC를 탈퇴하였고,(*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3(1960-2010)」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324-325.) 심지어 칼 매킨타이어 주도로 결성된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총회(대신측)도 1968년 3월 7일 ICCC를 탈퇴하였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3(1960-2010)」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193-195.) 

그런데도 정이철은 신근본주의를 진정한 복음주의라고 옹호하고 그것과 다른 이들을 신학적으로 매도하고 있다. 따라서 신근본주의 분리주의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정이철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합동의 총회와 교단의 신앙노선과 전적으로 배치되는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예장합동 총회가 관계를 단절한 칼 매킨타이어 신근본주의 분리주의는 총회가 지향하는 것이 아님에도 정이철은 총회의 결정과 입장과 다른 주장을 하며 총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게다가 방언을 인정하고 성령의 능력과 체험을 받는 자들을 함부로 현대복음주의 혹은 이단 혹은 오순절주의자 등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는 교단과 총신이 신학적으로 변질되었다고 왜곡하며 총신의 사태를 마치 신학적인 문제인양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근본주의 분리주의에 대한 우려는 1979년 총신대학교 교수들의 신학입장에서도 분명히 밝혔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3(1960-2010)」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1070-1079.).
 

2. 허위사실유포

정이철은 계속해서 실제로 있지도 않은 주장을 하거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양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게재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하면서 교단의 지도자들과 총신을 음해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 사실만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총신 사태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김영우 측의 입장을 대변하고 사실을 왜곡하며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습니다. 총신 사태의 핵심은 신학적인 문제라고 호도하고 있다.

  

▲ 정이철 목사는 국내의 개혁주의 목회자들을 방언을 하다는 이유로
이단적 성향의 반개혁신학 지도자로 왜곡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 김남준 목사도

 방언을 거짓방언이라고 주장했다.(사진출처= 정이철 <바른믿음> 화면 갈무리)

둘째, 한흠, 권성수, 오정호, 권순웅, 김남준, 송태근, 박용규 등이 마치 특별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자들, 현대 오순절주의자, 심지어 이단적인 성향의 반개혁신학 지도자들 인양 왜곡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예장합동과 총신의 지도자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교단의 분열을 획책하고 있다. (정이철은 자신이 운영하는 바른믿음 사이트에 ‘문제인물’과 ‘최근논쟁’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이들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문제인물,’ 바른믿음,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List.html?sc_section_code=S1N17&view_type=sm 2018년 4월 17일 접속); ‘최근논쟁,’ 바른믿음,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List.html?sc_section_code=S1N15&view_type=sm  (2018년 4월 17일 접속).

셋째, 정이철이 자신의 사이트에서 오정호 목사가 총회에서 WCC에 예장합동이 가입하자고 주장했다는 것은 명백한 허위 사실이다.

넷째, 지금부터 12년 전에 CGNTV에서 강의한 세계부흥운동의 역사 중에서 웨일즈부흥운동과 아주사부흥운동을 선별하여 마치 이 두 운동을 대표적인 부흥운동으로 박용규 교수가 옹호하는 것으로, 그래서 그를 마치 오늘날도 특별계시의 연속성을 지지하는 반개혁신학자로 매도하고 있다 (*정이철, “박용규 교수의 웨일즈 부흥 강의는 개혁신학 관점이 없는 내용,” 바른믿음, 2018년 3월 23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14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박용규 교수의 아주사 부흥 강의는 총신 죽이는 산당신학,” 바른믿음, 2018년 3월 29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262018년 4월 17일 접속).

심지어 마치 박용규 교수가 자신의 비판을 보고 겁이 나서 관련 영상을 게재한 사이트에 연락하여 영상을 내리라고 해서 내렸다고 허위 주장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총신의 신학은 개혁신학이 아니고 성경을 겉으로 대충 따르는 현대 복음주의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총신신대원에서 오래 동안 교회사를 가르친 박용규 교수이다. 나는 우연히 박용규 교수의 아주사 부흥에 대한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이것이 총신의 실상이구나!’하면서 한탄했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박용규 교수의 강의 앞 부분을 녹취하여 간단히 기사 하나를 작성하여 <바른믿음>에 올렸다. 나중에 보니 그 글의 근거가 되는 강의 영상이 인터넷에서 사라졌다. 박용규 교수 본인이 손을 써서 없앤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신학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면 정직하게 사과하고 해명하던지, 아니면 반박하던지 해야 할 것이다. 명망있는 교수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컴퓨터에 이미 그 강의 영상이 다운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이 글을 쓸 수 있었다.”(정이철, “박용규 교수의 아주사 부흥 강의는 총신 죽이는 산당신학,” 바른믿음, 2018년 3월 29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26> , 2018년 4월 17일 접속).

박용규 교수는 어떤 사이트에 무엇이 게재되었는지도 몰랐고, 그것을 요구하여 내리라고 요청한 적도 없다.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진실을 호도하여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키고 있다(* 확인해 본 결과, 정이철이 언급한 “박용규 교수의 아주사 부흥에 대한 인터넷 강의”는 2006년부터 2007년까지 CGNTV에서 방영한 ‘박용규 교수의 예루살렘에서 평양까지(총 28편)’ 중 제25편 ‘1906년 아주사 오순절 부흥운동’을 말한 것으로, 이 동영상은 현재 CGNTV 홈페이지에서 언제든지 다시보기가 가능하다. 박용규, “25편 1906년 아주사 오순절 부흥운동,” 박용규 교수의 예루살렘에서 평양까지, CGNTV 홈페이지, 2007년 3월 13일. http://www.cgntv.net/player/home.cgn?vid=50886&pid=422 ,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은 자신이 참고한 출처 미상의 웹사이트에 게재되었던 위 동영상이 삭제된 것을 두고 마치 “근거가 되는 강의 영상이 인터넷에서 사라”진 것처럼 왜곡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마치 박용규 교수에 의한 것인 양 허위 주장을 하고 있다.)

심지어 정이철은 박 교수가 단지 몇몇 이단만 이단으로 삼고 다른 이단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별 관심도 없는 것처럼 진실을 왜곡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괜히 개혁신학만이 교회를 교회되게 만드는 유일한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다. 박용규 교수 같은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 자신들의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구도에서는 절대로 그 이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이철, “박용규 교수, 20세기에 방언이 나타나고 더 중요해진다,” 바른믿음, 2018년 4월 8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41 ,2018년 4월 17일 접속).

그러나 이 글은 사실을 왜곡해도 보통 심각한 왜곡이 아니다. 박용규 교수가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가 저술한 「한국기독교회사 1-3권」까지 보면 얼마나 한국교회 안에 있는 이단들에 대해서 혹독하게 비판을 했는지 모른다. 특히 최근 출간한 「한국기독교회사 3권」의 19장 전체가 이단에 대한 장이다. 박용규, “제19장 급부상한 한국교회 이단세력,” 「한국기독교회사 3권」(1960-2010)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855-915. 여기에서 필자는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외에도 통일교, 전도관, 김기동 귀신론, 구원파, 이장림, 시한부재림론, 류광수 다락방, 만민중앙교회 등 수많은 이단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2005년 평강제일교회 문제만 아니라 1996년에 류광수 다락방 문제가 나왔을 때도 총신교수로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었고, 이단보고서를 작성해서 이단에 맞섰다).
 

다섯째, 이미 정이철은 웨슬리의 구원관이 행위구원관이라고 확신하고 자기의 주관적 견해를 진실인양 왜곡하여 감리교 신학교 교수들로부터 지적을 당하고 사과한 전적이 있다(* 정이철, “이것이 저의 진심의 사과이고 분명한 소신입니다,” 바른믿음, 2017년 9월 26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965>, 2018년 4월 17일 접속).

허위사실은 그 외에도 참으로 많다. 과거 총신과 우리 교단이 이단과 맞서 싸울 때도 이단조차도 이렇게 허위사실을 무차별적으로 게재하지 않았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정이철의 행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무차별적 허위사실 유포는 그동안 권위를 인정받아온 예장합동교단과 총신을 심각하게 음해하는 해당행위로 그대로 묵과할 경우 폐해가 더욱 심각할 것으로 사료된다.
 

3. 방언을 인정하면 특별계시를 인정하는 반개혁신학으로 매도


정이철은 방언을 인정하면 무조건 반개혁신학 혹은 반개혁주의자로 매도하고 있다. 게다가 방언을 인정하면, 특별계시를 받은 자들이나 특별계시가 지금도 존속하는 것을 인정하는 자들로 취급하며 그들을 반개혁신학을 주창하는 이단자들이라고 사실을 왜곡하여 이들을 매도하고 있다(* 정이철, “은사중지론을 버려야 목회가 크게 성공할까?,” 바른믿음, 2016년 5월 22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507>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박용규 교수, 20세기에 방언이 나타나고 더 중요해진다,” 바른믿음, 2018년 4월 8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41>, 2018년 4월 17일 접속). 이것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며 진실의 왜곡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는 평양신학교 전통부터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은사를 매우 강조하고 중시했다. 길선주, 김익두는 총회장을 지낸 능력의 종들이었고,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평양장대현교회는 한국장로교를 대표하는 장로교회였고, 한국장로교는 성령의 역사로 오늘의 기적을 이룬 교회였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었고,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고 체험한 자들이었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안에 워필드-개핀의 전통을 따라 은사중지론을 주장하는 입장이 강했었지만 20세기 접어들어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신학교 안에서 성경의 빛에 비추어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성경신학, 특히 신약연구의 발전으로 오늘날 개혁주의 안에서도 방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성경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입장을 따르지 않는다. 한국교회 개혁신학을 대표하는 예장고신과 총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장합동총회와 더불어 한국개혁신학을 이끌고 있는 고신의 경우 고신대학교 조직신학을 오래 가르치고 있는 박영돈 교수는 개혁신학을 매우 깊이 있게 연구하고 개혁주의 성령론에 있어서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는 신학자이다. 또한 변종길 교수는 신약분야에서는 상당히 학문성을 인정받고 있는 분들인데 이들은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다.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20년 전 신학적 입장을 발표할 때도 방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늘날 국내외 개혁주의 신약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방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이철은 방언의 존재를 인정하면 무조건 오순절주의자니 특별계시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자니 하면서 반개혁신학 목회자나 반개혁신학 신학자로 매도하고 있다. 정이철의 이같은 행태는 칼 매킨타이어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자들이 따르고 추구하는 전형적인 극단적인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행태로 심각한 문제 아닐 수 없다.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이고, 청교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사모했으며, 회심을 매우 중시했다. 그 회심은 분명한 체험이 나타난 것으로 그 결과 삶에서 뚜렷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을 강조했다. 칼빈주의자들 가운데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스코틀랜드 개혁자이자 장로교의 아버지 존 낙스, 아일랜드 장로교, 미국 청교도 지도자들, 아일랜드 장로교 출신의 미국 장로교 부흥운동 지도자 윌리엄 테넌트, 그의 아들 길버트 테넌트, 화란 개혁교회 출신의 부흥운동 지도자 흐릴링하이젠, 영국과 미국과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에 놀라운 부흥운동의 불을 지핀 칼빈주의 부흥운동 지도자 조지 휘필드, 웨일즈 칼빈주의 부흥운동 지도자 다니엘 로랜즈, 미국 마지막 청교도 신학자, 목회자, 부흥운동 지도자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한 부흥운동의 주역들이 모두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강하게 일어나 미국장로교가 본래 성령론이 없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성령론을 추가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 장로교는 부흥운동을 경험했고, 그 영향을 받은 언더우드, 마포삼열, 이길함, 블레어, 스왈른 등 수많은 선교사들이 파송을 받아 한국장로교를 형성한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 길선주, 주기철, 손양원 등 수많은 장로교 지도자들이 그런 전통에서 세워진 평양신학교 출신들이었고, 이들의 영향력이 한국교회를 갱신하고 부흥시키는 원동력이었다.

 

  

▲ 평가서는 방언을 인정하면 무조건 그릇되고 잘못된 반개혁적 인사로 비판하여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바른믿음> 화면 갈무리)

방언을 인정하면 반개혁주의자 반개혁신학 목회자나 신학자로 매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개핀 밑에서 학위를 받은 고신의 박영돈 교수가 증언하는 것처럼 개핀도 은사중지론을 절대시하지 않고 개혁신학 안에 있는 한 신학이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다른 견해도 존중하고 있다. 이런 변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방언을 인정하면 무조건 마치 신사도운동을 지지하거나 오순절운동주의자들이거나 특별계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개혁주의와 개혁신학을 심각하게 호도하는 것이다.
 

4. 총신사태에 대한 왜곡보도(김영우 측과 재단이사 측의 대변자 역할)
 

정이철이 방언 여부를 가지고 방언을 인정하면 반개혁신학자로 매도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오늘의 총신 사태를 김영우 총장과 현 재단이사회의 정관변경과 사유화 문제로 보지 않고, ‘현대복음주의라는 명칭을 만들어 마치 총신이 개혁주의를 떠나 현대오순절주의 신학을 받아들여 반개혁주의로 흘러가는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면서 김영우 총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지지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 몇 가지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김영우 총장이 물러나면 총신의 개혁신학이 무너지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김영우가 총신의 총장으로 계속 재직해야 개혁신학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로, 현 총신의 사태가 신학문제에서 기원된 것처럼 진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김영우와 재단이사회를 비판하는 글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는 정이철은 개혁을 주장하는 교수협의회와 총회 지도자들, 특히 그동안 교단의 갱신을 주장한 교갱협의 사람들을 집중해서 방언이라는 잣대로 가지고 이단적 가르침을 지지하는 자들이라고 공격하고 있다(*정이철, “총신학생들이 교갱쪽 적폐세력과 연관없어야 할텐데...,” 바른믿음, 2018년 3월 4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90>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총장 죽이기 내막은 오정현과 비리교수들, 그리고 그 후의 돈,” 바른믿음, 2018년 3월 26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21>, 2018년 4월 17일 접속). 그러면서 정작 김영우 총장의 배임증재 혐의, 정관변경문제 등 총신의 근본 문제 제기에 대한 그의 글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이철이 어떤 입장에서 진실을 호도하는지를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정이철, “‘정관변경’ ‘총신 사유화’ 등 논란에 대한 김영우 총장의 설명,” 바른믿음, 2018년 3월 31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30> , 2018년 4월 17일 접속).

셋째, 교단의 존경받는 지도자들과 신학자를 비판하면서 총신문제와 연관시키고 있는 것에서 정이철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비판하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정이철, “총신 사태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오정호 목사의 형님 사랑,” 바른믿음, 2018년 3월 19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10>, 2018년 4월 17일 접속).

이상에서 보듯이 정이철은 총신의 문제를 신학적인 문제에서 기원된 것처럼 진실을 왜곡하여 보도하고, 총신의 사유화를 막고 본래의 교단 신학교로 바르게 회복하기 위해 총신 개혁에 앞장서는 교단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을 반개혁주의 목회자나 신학자로 호도하고 있다. 그는 예장합동 46회 총회에서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한 ICCC노선의 전형적인 칼 매킨타이어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입장을 가진 자이다.

앞으로 정이철은 계속해서 교단과 총회와 총신대학교를 이간하고 음해하며 한국교회를 혼란시킬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움직임을 간과하면 나중에 더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교단적인 차원에서 바로 잡아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2018년 4월 18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이한수(신약신학), 박용규(역사신학), 김성태(선교신학), 이상원(조직신학), 김지찬(구약신학), 김창훈(실천신학), 정승원(조직신학)



출처 : 예수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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