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2014.09.21 왜 기독교교육인가?(디도서 2:11-14)/ 설교: 권종호 목사

하나님아들 2018. 4. 28.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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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교육인가? 디도서 2:11-14 EBS TV에서 다큐멘터리로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는데, 서양인들은 명사로 생각하고, 동양인들은 동사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차를 마시는 사람에게 더 마실 것을 권할 때에, 서양인들은 “More Tea?”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더 마실래?”라고 묻습니다. 서양인들은 ‘Tea’라는 명사를 강조하는 반면에, 동양인들은 ‘마시다’라는 동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교육’이라는 말의 사용에 있어서도 동양과 서양은 차이를 보입니다. 동양에서 ‘교육’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전인 ‘맹자’에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곧 ‘맹자’의 ‘진심편’에 나오는 ‘득천하 영재이 교육지’ (得天下英才而敎育之)라는 구절에서입니다. 그런데 한자의 가르칠 교(敎)는 본래 ‘모방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교육이란 ‘위가 하 는 바를 아래에서 모방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식이나 기술의 전달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교육’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단어는 ‘education’입니다. 그런데 이 ‘educat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educo’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라틴어 ‘educo’는 ‘꺼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 로 서양에서 교육이란 ‘내재하고 있는 능력이나 발달 가능성을 꺼내어, 그것을 발전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가능성의 성장조성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육에는 동양에서 이해하는 ‘지식이나 기술의 전달’이라는 면과 서양에서 이해하는 ‘내재하고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어 그것을 성장하도록 한다’는 성장조성의 면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면 중에 어느 편에 중점 을 두느냐에 따라, 교육관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육관으로 자녀들을 교육하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어떤 교육관을 가지고 자녀를 교육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좋은 부모입니다. 왜냐 하면, 교육관이 없이 자녀를 교육하는 부모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교육기관에 맡겨버리고, 뒷짐 지고 구경하는 부모가 많다는 말입니다. 두 가지 면 중에 어느 편에 중점을 두던지 간에, 그러한 교육이 일어나는 장소는 공식현장과 비공식현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학교는 공식현장의 대표이며, 가정과 사회는 비공식현장의 대표입니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교육은 주로 비공식현장인 가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전문화, 분업화, 도시화에 밀려, 모든 교육은 점차 공식현장인 학교와 전문기관에 내맡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 더욱 두 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비공식현장에서의 교육은 거의 무시되어지고, 오직 공식현장인 학교와 전문기관에만 모든 교육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사회의 학교교육이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협성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을 가르치는 임영택 박사는 우리 사회 학교교육의 잘못을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 다. 첫째, 대학만 들어가면 된다는 입시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입시교육은 얼마나 많이 입력했다가 얼마나 정확하게 빼내는가의 은행저축식 교육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떻게 귀중한 일에 쓸 수 있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항상 ‘더 많이’를 추구하는 업적 중심의 교육입니다. 둘째, 좋은 대학 혹은 유망한 학과에 들어가야 된다는 돈 벌기와 출세주의의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학연 의 끈을 출세와 돈 벌기로 연결시키려는 발상에서 나온 교육인 것입니다. 셋째, “써 먹을 수 있을까?”의 생산성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업화와 개발주의에 기초를 둔 사회와 기업이 요구하는 효과적인 기술 인간을 배출하도록 하는 교육입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에, 다시 2년제 전문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에 다시 2년제 전문대학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효과적인 기술 인간을 요구하다보니 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잘못된 우리 사회의 학교교육은 필연적으로 뒤틀린 가치관을 심어주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귀중한 것인지를 생각지 않고, 오직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만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귀중함과 필요함은 상호 동반하지만, 대치될 수는 없습니다. 대치될 때에 가치관은 뒤틀리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어린 시절에 부모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필요하며, 무엇보다 귀중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장성하여 어른이 되면, 변화가 옵니다. 여전히 부모는 귀중한 분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꼭 필요한 분들 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의 차이가 오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있어서 부모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함부로 대한다면, 그는 불효자가 되고 맙니다. 부모의 귀중함을 생각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무엇이 필요한가?’보다 ‘무엇이 귀중한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이것 을 뒤바꾸면, 가치관이 뒤틀린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 뒤틀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돈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격보다 자신의 쾌락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동체의 질서보다 개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 사회를 구원할 구원의 밧줄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독교 교육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기독교교육은 무엇이 정말 귀중한 것이며,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묻고 답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교육은 성서를 교육내용으로 합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무엇이 정말 귀중한 것인지,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그 좋은 예가 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기록되어 있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는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 곁을 지나가게 된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어떤 이유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냥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를 그 사람의 상처에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음 날에는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의 돈을 주면서 그 사람을 돌 보아 주라고 부탁했습니다. 만약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유 속의 이 사마리아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무엇이 정말 중요 한지,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들어있는 누가복음 10장에는 이 비유에 이어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마을에 사는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접대하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먹는 음식보 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 지를 알았기 때문에, 좋은 편을 택했다는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 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 함으로 살도록 양육하신다는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추구하며, 그렇지 않은 것은 버리며 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서가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때문에, 성서를 교육 내용으로 하는 기독교교육은 언제나 무엇이 중요한지,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지를 묻고 답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교육은 우리 사회를 구원할 밧줄이 됩니다. 기독교교육이 우리 사회를 구원할 구원의 밧줄이 되는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교육은 온전한 공동체 형성을 위 한 삶의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교육의 교육내용인 성서에는 공동체 형성을 위한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말씀이 많습니다. 삭개오 이야기 는 그 좋은 예가 됩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라는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에, 삭개오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삭개오 는 여리고의 세관장이어서 부자인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보려고 길가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을 보려고 몰려온 사람들은 많았고, 삭개오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삭개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의 이 말은 그 동안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은 재산을 공동체를 위해 내어놓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잃어버린 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한 변화 되기 전의 삭개오와 같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구원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은 변화된 후의 삭개오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누구에게나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영생의 길에 대해 물었던 사람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한 부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계명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 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부자는 근심하면서 떠나갔습니다. 하늘에서 보화를 얻을 수 있으며,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울상을 짓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공동체 를 위한 삶의 변화를 구원과 연결시켜 말씀하셨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 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이유가 우리를 변화시켜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백성 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공동체를 위해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로 변화시키 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서가 공동체 형성을 위한 삶의 변화를 촉구하기 때문에, 성서를 교육내용으로 하는 기독교교육은 언제나 온전한 공동체 형성을 위한 삶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교육은 우리 사회를 구원할 밧줄이 됩니다. 결국 기독교교육은 무엇이 정말 귀중한 것이며,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묻고 답할 뿐만 아니라, 온전한 공동체 형성을 위한 삶의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를 구원할 밧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기독교교육 진흥주일입니다. 오늘 기독교교육진흥주일을 맞아, 여러분 모두 우리 사회를 구원할 밧줄인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기독교 교육을 활성화하는 일에 적극 동참하 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 모두 교회교육에 적극 협조하고, 가정에서의 기독교교육에 관심을 가지며, 직접 교육활동에 참여하는 성도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디도서 2:11~14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출처 : 주의 향기가 머무는 곳
글쓴이 : 삼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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