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이대웅 기자가 이어령 박사를 만났다. 이어령 박사는 “지난 1년간 극한의 상태에서 한 해를 보냈지만, 끝없이 책을 쓰고 강연도 하고 오늘처럼 대담도 하면서 보통 때와 다름없이 보냈다”고 말했다. 2018년, 무술년(戊戌年) 새해가 밝았다. '지성'을 대표하는 이어령 박사를 최근 영인문학관에서 만나, 교회와 기독교, 성경 읽기, 바짝 다가온 인공지능(AI) 시대 등에 대해 대담을 나눴다. 세례 10년째인 이어령 박사는 3여년만의 만남에서, 이 박사는 '마지막'(암투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 글이다. 3부로 나누어 제공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었으면 좋겠다. 세례 10년째? 문지방에서 서성거린 10년 -지난 2017년이 세례받은 지 10년째였습니다. "저에게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한 딸 민아와 세례를 해 주신 하용조 목사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로 치면, 저에게 있어서 그것은 잃어버린 십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서러운 것은 그러한 상실이 탐스러운 열매를 맺지 못한 십년이라는 데 있습니다. 딸도 목사님도 병고를 치르느라 힘이 들었고 거기에 남의 아픔까지 짊어지고 가시느라 힘든 이 속세의 삶에서 벗어난 것이, 그리고 주님 곁으로 가신 것이 큰 축복인데도 왜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터지는지.... 역시 저에게는 신앙의 힘이 부족했던 문지방에서 서성거린 십년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급기야 제 자신의 차례가 되어 지금 투병중이지요. 내 몸 가까운 곁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질병인 게지요. 그러나 나의 신앙이 조금만 두터워진다면 주님이 제 머리맡에 계실 겁니다." -신앙적으로 달라진 부분이 많은 한 해였을 것 같습니다. "역설적이지요. 죽음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불사(不死)의 존재라면, 생명이란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둠이 없다면 빛 또한 존재하지 않지요. 수술을 세 번이나 하고 내 바로 코끝에서 죽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 비로소 나는 '아!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던 것이지요. 십자가란 곧 죽음입니다. 형틀이고 그것에 매달리게 되면 누구나 죽게 됩니다. 교회에 걸려 있는 무수한 십자가의 상징은 바로 죽음 속에서 생명이 부활하는 주님의 모습이었던 거지요. 그 십자가(十字架)는 바로 십자로(十字路)이기도 합니다. 사방으로 뚫려 있는 교차점입니다. 하박국의 처절한 메시지.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으로 향한 조건 없는 믿음과 열정 또 하나의 열병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지요." 3년 전 만났던 이어령 박사의 모습.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왜곡된 종교' 있을 것 -지난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많은 기념행사가 있었습니다. "저 개인에게는 '루터 다시보기'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요. 아주 사소한 일부터 말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말이 우리나라에서만 스피노자의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러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알 수 있듯이, 가까운 이웃 일본만 해도 그 말을 한 사람은 마르틴 루터라고 되어 있지요. 그의 묘비명에도 뚜렷이 이 말이 새겨져 있어요. 아주 상징적인 오류이지요. 루터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왜곡된 종교가 있을지 모릅니다. 잘못 알려진 루터, 개신교의 정신 등..., 사실 루터는 겁쟁이였지요. 애초부터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학에서 법을 전공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어요. 부모님을 만나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스토테른하임 근처 벌판에서 난데없는 벼락을 만나게 됩니다. 그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목숨만 살려주면 수도사가 되겠다는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구도와 신앙의 삶이 엄청난 종교개혁의 태풍의 눈이 되어 세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천둥벽력이 귓전을 때려도 놀라지 않는, 담대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의 반석 위에서 오백년의 세월이 흘러도 불멸의 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루터의 힘에는 26명의 '납병정(알파벳 활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개혁은 인쇄 혁명 미디어의 혁명이기도 했지요. 사원의 대리석과 조각들을 성경의 문자들이 압도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지요. 동시에 당시에 밀어났던 농민 혁명, 민중들의 정치혁명도 일어났고요. 인간 세상에는 혼자 힘으로 되는 일이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혁명에는 변수가 생기고 애초의 초심대로 되지 않는 굴절이 생겨납니다. 오늘의 교회가 500년 전 개혁하려던 당시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하나님, 스스로 있는 자... 인간은 홀로 존재 못해 -인간 자신의 힘으로 초월할 수 없다는 건가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인간은 그리고 모든 생물들은 혼자서 존재할 능력이 없어요. 외부의 아무런 영향도 의존도 없이 살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말씀해 보세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 하나밖에 없는 유일자이고 절대자인 하나님이지요. 무신론자들이 그런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인정할 겁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그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내 자신으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에고 에이미(ego eimi, 내가 있다)'입니다. 영어로 하면 'I AM'인 거죠.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라고 하시지 않고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서로 맞물려 존재합니다. 지구는 태양을, 태양은 은하계를.... 별들의 무덤인 블랙홀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런 우주를 벗어나 혼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런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낸 창조자일 뿐입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과학적 논리이지요. 타자 없이 홀로 존재하는 자족적인 것. 그래서 노자는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고 했어요. 사람은 땅을, 땅은 하늘을, 하늘은 도를, 도는 자연을 따른다는 말이지요. 문자 그대로 자연(自然), 스스로 있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자족(自足),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바렐라(Varela) 같은 생물학자가 내놓은 최신 이론으로 보면, 밖에서 인풋(input) 없이도 무엇인가를 창조해낼 수 있는 것과 같지요.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잖아요. 먹으면 죽는 빵이 아니라,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생명의 떡입니다. 광야에서 왜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말을 거부하고 하나님 말씀의 양식을 말했는가.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말씀하십니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열역학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영구한 게 없습니다. 모두 소멸하지요." 이 박사는 "완벽한 교회는 없다"며 "완벽한 교회가 있다고 하는 순간, 그 옛날 교황처럼 면죄부를 팔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경은 '지상낙원'을 말하지 않았다 -기독교만이 그 본질을 갖고 있군요.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새롭다는 말을 함부로 써선 안 됩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습니다. 제도를 고치고 고쳐 봐도 새로운 제도가 생겨날 뿐입니다. 베드로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는 순간, 옛날과 다를 것이 없는 종교라는 또 하나의 인간이 만든 제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해지려면 막시스트들이 외친 '영구 혁명', 혁명을 해서 고치는 순간 또 혁명을 하는, 끝없는 그 길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사회적 비난과 핍박과 비판 속에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고칠 것이 없는 그런 교회는 일찍이 지상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기독교의 메시지도 다 끝나는 것입니다. '개신(改新)'할 필요 없는 기독교가 이 지상에 이뤄졌다면, 그야말로 지상에 하늘나라를 만들어 세운 것이니까요. 성서에서 언제 이 지상에 낙원을 만든다고 했습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오병이어가 기적이고 하늘의 뜻이라면 왜 예수님이 구름떼처럼 모여든 군중을 보고 산으로 피신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돌멩이로 빵을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게 아니라, 오병이어로 온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을 예수로 잘못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빵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먹으면 죽는 빵이 아니라 그 이상의 영원한 생명의 빵을 주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까. 교회는 혁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비난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세속적 의미의 개신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을 되찾는 개신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교회를 돌로 빵을 만들어주는 '빈자의 빵공장'처럼 알고 있다면,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는 것이 교회라고 본다면, 구름떼처럼 군중이 모여 오겠지만 그 교회에 예수님은 안 계십니다. 그것을 교회의 혁신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 이상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지금 교회가 비판받는 건, '진짜'가 있기 때문 -그것이 교회를 잘 다니시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10년 전) 세례받았을 때 하용조 목사님과 약속한 것을 솔직히 말씀드릴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저는 교회에 나가 사역하는 일보다는 강연이나 글로 사역을 하겠다고 말입니다. 각자 자신의 능력을 통해서 봉사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싫어서도 아닙니다. 요즘 교회의 유행어 '가나안 성도'가 아닙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 나가', 교회를 안 나간다는 은어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웃음). 그래도 갈 만한 곳은 교회 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에 기대가 크기 때문에, 그만큼 교회에 대한 반감과 비난이 드세다고 봅니다. 물론 이름만 교회지 가짜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짜, '짝퉁'이 많다는 건 진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웃음). 진짜가 없는데 가짜가 나와요? 가짜 교회가 많다는 건, 진짜 교회가 어디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기를 칠 수 있는 거예요. 진짜 다이아몬드 없이 어떻게 짝퉁 다이아를 만들겠어요? 가짜가 진짜를 욕할 순 없지요. 지금 교회가 비판받고 있는 것은 진짜가 있기 때문에, 역설적인 게 아닙니다. 한국교회에 이만큼 많이 모이고 있는 것은 진짜가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모두 비난받을 교회만 있다면, 거길 왜 가겠습니까? 집까지 내부순환도로를 이용할 때가 많은데, 항상 출구에서 막혀요. 차들이 정체되니 줄 서야 나갈 수 있어요. 그런데 차선을 위반하고 끼어드는 차들이 있어요. 그럴 때 절망하다가도 '아, 그래도 손해 보는 줄 알면서도 법을 지키고 줄서 기다리는 차들이 새치기하는 차들보다 많구나'하고 생각하면 희망이 생겨요. 옛날 '통금'이 있었던 시절, 교회가 가난하고 신도들도 많지 않았을 시절, 크리스마스가 참 요란했지요. 곳곳 상점과 길거리에서는 캐럴이 울리고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하늘의 별보다 더 빛났지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술 마시고 통금해제로 철야를 하며 자유롭게 밤의 축제를 즐겼어요. 통금해제로 세속적인 향연이라 비난을 받았지만, 그것이 바로 진짜 크리스마스지요.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게 탈선이라 해도 자유를 맛보게 하고, 하룻밤이라도 밤하늘을 보며 즐거움을 맛보게 한 선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베푸셨던 예수님의 정신." -인공지능의 시대에 대해 이미 '디지로그, 생명자본' 같은 데서 예견한 글을 쓰셨는데, 그 시대의 기독교란 어떤 형태로 존재할까요. "500년 전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하는 짓은 똑같아요. 그래서 하나님도 똑같이 계시지요. 우리가 정말 달라져서 신처럼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겠지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완벽한 것이란 없는 이 세상을 보고 '정말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추방당했구나, 낙원이 있었구나' 거꾸로 아는 것이지요. 빛을 본 자만이 어둠을 알고, 죽음을 아는 자만이 생명을 알지요.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생명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이어령 박사는 "'가나안 성도'들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이사 가지 말고 잘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나안 성도'라는 말 들으니... 아직 희망 있다 -아까 말씀하셨듯 요즘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을 거꾸로 '가나안 성도'라고 합니다. 신앙인들도 교회는 나가지 않는 시대, 교회는 이 사회와 불신자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능성이 많습니다. 뒤집어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시 뒤집어 읽으면 됩니다(웃음). 그게 바로 예수님 잡으러 다니다가 예수님 믿는 사람, 예수님을 부정하다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이미 아니까 안 나가는 것이지요. 다녔으니 알고 있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탕자, 돌아오다(탕자의 비유)>처럼 반드시 돌아올 길이 있습니다. '가나안'이라고 뒤집는 사람들이 자꾸 나오면, 또 다시 뒤집으면 됩니다. 하지만 원래 안 나가던 사람은 뒤집으면 더 나빠질 수 있지요. '안 나간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어머니가 믿으니까, 목사님이 믿으라고 하니까 교회 나가는 사람보다..., 스스로 박차고 나온 사람 아닙니까. <탕자, 돌아오다>의 형을 보십시오. 알지도 못하면서 아버지를 섬깁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올 때 뛰쳐나가는 게 싫었습니다. 돼지나 주는 야생 열매를 먹고 고생하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아버지가 잡아주는 양고기의 맛이 어떤 것인가를 알겠지요. 매일 양고기를 먹던 형이 알겠습니까? 다만 상속자로서 권위와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집에 남아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탕자는 아니었어요. 진리를 찾아 떠난 것이지요. 이 집 바깥에 아버지가 모르는,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보다', 그것이 구도(求道)입니다. 끝없이 도를 구하는 것이지요. '가나안 성도'라는 말을 들으니, 한국교회에 몇십 년 후에는 다시 르네상스가 오겠구나 싶습니다. 그렇게 뛰쳐 나가십시오. 탕자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까지 이사가지 말고 잘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웃음)?" "절대자의 말씀, 불완전한 인간 언어로 다 못 옮겨" 이어령 박사는 “하늘의 말과 지상의 말이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비록 '문지방'에 서 있다고 고백하시지만, 아예 문지방 바깥에 계셨던 과거와 비교해 성경 읽기에 있어 혹 달라진 점이 있으신지요(이어령 박사는 세례를 받은 후 '문지방을 넘어 열린 문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문지방 위에 서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편집자 주). "변한 건 없어요. 하지만 예전에는 성경에 이러저러한 모순이 있어서 믿지 않았다면, 지금은 여전히 모순이 있기 때문에 거꾸로 믿는 거에요. 전에는 그랬지요. '일점일획도 못 고친다면서? 그런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왜 다 다른가? 그럼 그중 어느 쪽은 틀린 것 아니야?' 이렇게 공박했다면, 지금은 틀린 걸 보니 이게 진짜라는 것이지요. 대개 범인(犯人)들이 말하는 걸 보면 정확합니다. 입을 맞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진실이라면, 자신이 한 말조차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범인이 심문을 받는데, 피해자를 만난 시각을 정확히 기억한다? 꾸민 것이지요. 그러니 성서가 무오류이고 정말 이치에 닿는 소리만 나와 있다면, 가짜입니다. 그런데 정말 진실하게, 아무것도 삭제하지 않고 고치지 않고 뒀다는 자체가 진짜라는 것이지요. 성서를 보면 삼척동자도 웃을 이야기들이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말로 정확히 옮겨진다면,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겠습니까? 어떻게 절대자의 말이 불완전한 사람의 언어로 다 옮겨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말씀을 남기셨지만, 인간에게 번역된 말이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행위로 보여주셨지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통한 드라마, 행위는 '사건(事件)'입니다. 물건(物件)은 보이지만, 사건은 보이지 않습니다. 행위는 물건처럼 남지 않기에 이야기로 남거나 동영상으로 찍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 예수님 말씀보다 더 신빙성 있고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말 중에 번역 안 되는 게 얼마나 많아요? 프랑스에 있을 때, 병원에 갔는데 '배가 따끔따끔하고 욱신욱신하다'는 게 표현이 안 되는 거에요. 한국 의사 같으면 말만 해줘도 낫겠는데(웃음). 배가 쓰리다. 배가 쌀쌀 아프다. 배가 더부룩하고 묵직하다, 번역이 됩니까? 사람의 말도 다 번역이 안 되는데,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인간의 말로 옮기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니, 니고데모가 '어떻게 거듭납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묻지요. 그렇게 거듭난다는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밤낮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답답해 하시면서,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건 전부 비유에요."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하늘의 말과 지상의 말이 같을 수 없습니다. 번역 가운데 이상한 것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저는 그러니 성서를 낱말의 부분으로 읽지 말고 전체적 행위의 언어로 읽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가 막힙니다. 실제적인 이야기를 해 봅시다. 제가 믿기 전에 가장 거부반응을 가졌던 것이 '노아의 방주'입니다. 첫째, 배는 물이 들어오면 뜨기 마련인데, 왜 산꼭대기에서 만들라고 하셨을까요? 심술이라면 몰라도, 물 들어오면 알아서 뜨는데 말입니다. 둘째, 짐승 암수 두 마리씩 넣었다면서요? 그러면 암수 없는 단성 생물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리고 초식·육식 동물을 다르게 만드셨는데, 두 마리씩 넣는다 해도 토끼와 늑대, 호랑이와 사자가 어떻게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남극·북극에 사는 동물들이 어떻게 노아가 사는 곳의 동물들이랑 같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방주가 커도, 지금의 동물원처럼 분리해 놓지 않으면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초식동물에겐 지푸라기 넣는다 쳐도, 육식동물에게 고기를 넣어주려면 씨가 마를 거에요. 그리고 물고기는 생물 아니에요? 하늘 아래 생물은 전부 멸하겠다고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는데, 물고기는 방주에 넣으면 다 죽을텐데.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 안 걸리는 게 없어요. 그렇게 많은 비가 어디서 왔는지 물으면 '그때는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다르고...', 육식동물 이야기하면 '옛날 육식동물들은 없었고 풀을 뜯어먹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곧이 들어도, '풀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아닌가?' 라고 비웃었던 것이 중학생 시절 읽었던 성경이었지요. 제가 기호학을 했지만, 성서를 '메타언어(대상을 직접 서술하는 언어 자체를 다시 언급하는 한 차원 높은 언어- 두산백과)'로 읽으면 노아의 방주는 '제2의 창조'를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만드시고 안 되니까 쓸어버리고 다시 새 질서(코스모스)를 세우신 것이지요. 제1창조 때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하면서 시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 제2창조는 공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생물들을 분류하여 칸막이를 해놓은 서랍장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우주의 시간을 만드셨다면, 이번에는 공간의 칸막이(분절)을 만드셨습니다. 너는 호랑이, 너는 사람 하면서 '분류'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류하시는' 분이십니다. 혼돈이란 분류되지 않은 거에요. 창조란 무질서했던 우주에 질서를 부여한 것입니다. 첫 창조가 시간적 질서, 노아의 방주는 공간적 질서, 이렇게 하면 이야기가 끝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우주의 혼란 상태에 시간적·공간적 질서를 주심으로써 남자·여자, 하늘·땅, 유형·무형 등 모든 걸 만드신 것이지요. 그것이 '로고스(logos)'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요 1:1)고 하셨습니다. 태초에 물건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로고스, 즉 이성은 전부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차이를 나타내 준다는 것이 어려운가요? 예전 전쟁 때 서울 종로가 다 폭격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종로가 없어졌나요? 아니지요. '종로'는 물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을지로'와의 차이를 이르는 말입니다. 그게 물질도 에너지도 아닌 상징 즉 로고스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을 자꾸 물건 만드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아담에게, 만드신 창조물에 이름을 지으시라고 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해서 '서울'이 생긴 것이지, 빌딩을 계속 지어서 서울이 태어난 게 아닙니다. 로고스, 빛과 어둠을 갈라놓는 거에요. 뭍과 물을 갈라놓으셨지요? 두루뭉술한 을지로와 종로를 갈라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울, 종로 하면 집만 보러 다닙니다(웃음)." 이 박사는 "인간 홀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과 동행하면, 엠마오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느낀 것처럼 밤길이 어둡지 않고 험하지 않다"며 '하나님과의 동행'을 강조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물질과 정신도 간단합니다. 여기 아버지가 남기신 도끼가 있습니다. 그런데 도끼 자루가 다 썩어서 새 것으로 갈았어요. 완전히 다 바꿨지만, 여전히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얘, 아버지 도끼 가져와' 안 그래요? 유물론자와 유신론자가 자꾸 왜 싸워요? 무식해서 싸우는 거에요. 마르크스도 사실 유물론자가 아니라 유신론자입니다. 영국 도서관에서 책 보고 <자본론>을 쓴 것입니다. '정보'가 물질입니까? 오늘날 유신론과 무신론, 인공지능과 과학기술을 말하지만, 해당 분야에서는 '특별한' 일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따뜻한 가슴으로 공감하고, 사람이 다치면 울고 때리면 말리는 바보가 더 똑똑할 수 있습니다. 예전 군대에 특별한 계급인 '특무상사(特務上士)'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특별'한 것 같지만, 장군은 '제너럴(General·보편적, 일반적, 넓은)', 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페셜'이 아니라) '제너럴'입니다. 위대한 사람도 '제너럴'입니다. 뭐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스페셜리스트)은 '제너럴'이 아닙니다. 제 성서 해석이 달라진 게 아닙니다. 동그란 구멍으로 바깥을 내다보면, 동그랗게밖에 안 보입니다. 성서는 넓은데,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의 프레임 안에서만 성서를 보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체험이나 지식만으로 하늘을 재단한다면, 하늘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라 그 프레임 속에 들어간 우리의 시선이 문제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목사님 골탕먹이느라 성경 속에서 설명 못할 것들만 계속 따와서 질문했습니다. 왜 그런 말만 했을까요? '똑똑하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거든요(웃음). '너는 특별한 신자다' 하는 사랑을 받고 제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지요. 그러니 저는 당시 성서의 잘못을 지적했다기보다, 성서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제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휴브리스(hubris·자만심, 오만)'입니다. 오만하게 잘난 체 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오만,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죄악입니다. 그 죄악을 범했다는 것이지요. 저는 요즘 성경 읽기가 너무 재미있습니다. 지금까지 읽히지 않던 것이 읽힙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는 새와 땅에 핀 백합화를 보라, 거두지 않고도 먹고 길쌈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옷을 만든다. 그런데 너희는 왜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는가'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주택 이야기는 안 하셨을까요? 우리 같으면 '새도 둥지가 있지 않느냐'고도 하셨을텐데 말입니다. 아, 역시 예수님은 '노마드(nomad·유목민)'이셨구나. 사는 집은 별 문제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농경 민족이니 먹고 입는 게 없어도 집은 있어야 하지요. 저번에 어떤 분과 이 이야기를 했더니 '기독교 30년 믿고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셨지요. 읽다 보면, 성서가 너무 재미있습니다. 주기도문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이 영어로는 '데일리 브레드(Daily Bread)'인데, 우리는 슬쩍 '양식'이라고 했지만 원래 '빵'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요? '매일 먹는 떡?' 떡은 어쩌다 한 번 먹는 것이라, 절대 안 되지요. 그러니 '웬떡이야!' 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은 최악의 번역이지요. '밥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해야 하지만, 사탄이 '돌'로 음식을 만들라고 했으니 밥보다는 빵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모래였다면 밥이 될 수 있겠지요. 이 구절은 도저히 번역이 안 되는 거에요." 그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오만하게 잘난 체 하는 것,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장 큰 죄악"이라고 전했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머리말에서 '문학비평가 시점으로 성경을 읽었기에, 종교적 해석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에서까지 '학(學)' 자를 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기독교만은, 믿음만은 제가 믿는 거지, 남의 이야기를 믿는 게 아니잖아요? 제 머리로 읽고 생각한 성경, 주님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개신교가 생겨난 것이지요. 신부나 교황이 권위로 해석한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대면해서 일대 일로 해석해야지요. 물론 우리 사이에 매개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하지만 나를 대신해서 남이 해놓은 걸 다 믿어선 안 되지요. 그래서 신학(神學)의 '신'에서 '니은(ㄴ)' 받침을 뺀, 시학(詩學)적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거룩한 책, 성경(聖經)이 아닌 그저 텍스트로 보고서 읽은 것입니다. 시를 평론하듯, 글로써 선입견 없이 읽어보니,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성서(聖書), 바이블(Bible)이라는 말이 원래 '종이, 책'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성스럽다는 말이 없었어요. 그냥 책, 정확하게는 '종이로 만든 책'입니다. 처음 기독교 성경이 쓰여졌을 때는 '종교'라는 이름도 안 붙었고, 그저 유대교의 한 지류로 봤습니다. 종교와 믿음은 다른 것이거든요. '종교(宗敎)란 이미 제도화된 것입니다. '종'이라는 글자도 불교에서 나왔습니다. 영어로 종교(Religion)라는 말은 '이어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끊어졌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지요. 원래 그 책 제목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였습니다. 한 기독교 방송에서 '내가 읽은 성서'에 대해 12회 동안 아나운서와 주고받은 이야기를 편집한 것이지요. 이어령 박사는 "종교에까지 '학(學)'을 붙이고 싶지 않다"며 "저는 요즘 성경 읽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많이 읽지 않더라고요. 빵만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로였을까요(웃음)? 그런데 이번에 제목을 바꾸니 또 많은 분들이 읽으세요. 물론 책 내용을 지금 쓰라고 하면 참고문헌도 넣고 다르게 쓰겠지만, 오히려 진실한 목소리는 여기에 더 담겨 있으리라 보고 그대로 냈어요. 그 안에는 전통적인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보시면 '이단'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내용도 있을 수 있습니다. 원래 문학자가 기독교에 대해 쓰면 다 이단으로 걸렸어요(웃음). 톨스토이도 그렇고 릴케도 그랬고.... 예술가들이 뭘 쓰면 대부분 파문당하거나 판매금지를 당하거나 기독교인 친구들이 떨어져 나가거나..., 이 책에도 아슬아슬한 대목이 참 많습니다." -항의하는 분은 없었습니까. "우리나라 교회가 상당히 진보적인가봐요(웃음). 누구 하나 제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저는 그게 이상했습니다. 완고한 교조주의처럼 '성경의 글자 하나도 못 고쳐' 하는 분들이 기독교의 전통을 지켜오는 것이거든요. 그래야 그것을 비판하고 '프로테스탄트(저항, 개신교)'하는 건데. 제 해석을 비판하고 완고하게 나오는 교회나 신학자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면 시대적으로 앞선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가 봅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거꾸로, 그런 완고하고 고집불통인, 꼬장꼬장한 옛날 선비 같은 분들이 남아있어서 제게 '이렇게 쓴 게 뭐요?' 라고 해야 저항도 하고 새로운 해석도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해석이든 옛날 그대로이든 별 반응이 없어요. 그게 슬픕니다." <계속> "딸처럼... 죽음 맞닥뜨릴 것, 내 종교는 이제 시작" 이어령 박사는 “죽음 앞에선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언이 진실한 것”이라며 “살아있을 때부터 유언하듯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했다. 앞의 두 편에 이어, 대담 마지막 편에서는 4차 산업혁명과 생명자본주의, 창조, 올림픽, 그리고 독자들을 향한 덕담을 풀어놓았다. 이어령 박사는 특히 현재 '암(癌)'과 함께 살고 있으며, 미답지인 '죽음'에 의연하게 맞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박사와의 일문일답. 세속화 추구하다 보면, 본질 다 잊히고 수단만 남아 -'종교인 과세' 문제처럼 최근 교회 내에도 '경제 논리'로 모든 것이 흘러갑니다. 낙태나 동성애, 페미니즘 같은 생명 문제도 결국 중심이 '경제적 관점'입니다. '신자유주의'인 세상과 교회 속에 '생명자본주의'가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는데요. "지엽적인 문제들이지요. 낙태 문제야 생명관(觀)에서 나왔지만, '생활(生活)'이라는 말 속에 생명이 있지요. 제가 말씀드리는 생명이란 다른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말씀이나 생애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고 신학적으로 찬반 논쟁을 할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 속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직접 정의한 말들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등 모두 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추상적이든 구체적이든, 예루살렘까지 가는 그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 길로 찾은 것이 진리입니다. 도교의 도는 마지막에 자연이 나오지만, 기독교의 진리는 쭉 올라가다 보면 생명이 나타납니다. 생명에 관한 것을 직접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지만 생활, 생명에 이르는 수단과 방법, 살기 위한 수단과 방법은 세속적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신 것은 타협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그 돈에 가이사의 초상이 그려져 있기도 하지만, 세금은 지상의 문제입니다. 지상의 것은 지상의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세속적 가치로 말씀하셨다면, 로마에 저항하고 유대인들의 해방을 추구하셨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말려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화를 추구하다 보면, 본질은 다 잊히고 수단, 즉 정치와 경제만 남습니다. 이건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해결하실 수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를 아십니까? 이단자를 처벌하는데, 예수님이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심문관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이 지상에 교회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난들 몰라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 그래도 예수님처럼 안 해서 천년 가까이 이만큼 끌고 왔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를 꾸짖으셨습니까? 끌어안고 위로해 주시지요. '권위를 보여주고 무섭게 하니 아직까지 교회가 존재하지,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기만 했으면 아무것도 안 남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위로하십니다. 이런 문제들은 하나의 행정이기 때문에, 저와는 먼 이야기라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는 어느 시대건 어디에서건 편안했던 적이 없습니다. 사랑받고 만세를 부르면서 환영받는 기독교인이란 없었습니다. 항상 외롭고 핍박받고 오해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내 이름으로 너희들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어령 박사는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는 빛도 어두움도 없다. 빛을 본 자만이 어둠을 알고, 죽음을 아는 자만이 생명이 뭔지 아는 것"이라며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죽지 않는데 어찌 생명이 있겠는가. 생명도 죽음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성도라면... 편하게 지낼 생각은 하지 말아야 기독교를 종교로 보지 않으면, 성경만큼 비극적이고 눈물나는 책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산고의 아픔을 겪지 않고는 나를 다시 만날 수 없다(요 16:21)'고 하셨습니다. 가장 큰 슬픔과 아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산고의 고통'에 비유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저는 죽었다 깨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이를 셋이나 낳았지만, 한 번도 아이를 낳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좋은 남편이 아니지요(웃음). 예수님은 대부분이 남자인 제자들 앞에서 '여자들이 애 낳을 때 얼마나 아픈지 아니? 그 아픔으로 생명을 얻는 거야. 그걸 치른 후에야 너와 내가 만나'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를 믿고 교회를 세우는 순간, 하나의 선지자나 예언자로서 길 잃은 양떼들 앞에 지팡이를 들고 나타났다면, 편하게 지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저도 편안하게 지내려면 말년에 이 고생 안 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 요즘 화두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 됐습니다. 오늘날까지 정보기술을 무기 만드는데 써서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드론으로 무인폭격을 하면 아군 희생자가 없으니 마음놓고 적진에 폭격하고 있잖아요. 로봇끼리 싸우면 사람이 안 죽으니까, 앞으로 한 번 전쟁이 나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정보기술과 인공지능이 지나간 산업시대, 자동차나 지나간 산업기술에 응용되면서, 모든 시스템이 우월해지고, 물질은 커지고 자연은 파괴되고 있습니다. 끔찍한 세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산업주의의 연장을 위해 인공지능이 쓰여진다면,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정보기술이 자연파괴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명기술로 쓰여야지, 더 이상 산업기술로 쓰여선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생명이 자본이다>를 쓴 것입니다. 산업사회는 공장, 물건을 만드는 것이었지요.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은 또 다시 인공지능을 비즈니스로 물건 만드는 사람이 연상되지요? 그러니 그 말은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봇 왓슨'처럼 인공지능을 의료에 사용하면 죽을 사람을 많이 고칠 것입니다. 물건을 만들고 돈을 버는 산업자본, 금융자본이 아니라, 그것이 생명자본입니다." ▲이어령 박사는 "인공지능이 아무리 똑똑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인간만의 긍지는 따로 있다. 기계에 패배했다고 죽지 않는다"며 "말은 우리보다 잘 뛰기에 말과 경주해선 이길 사람이 없지만, 말에 올라타면 이길 수 있다. 인공지능이 생기더라도 우리가 올라타면 된다"고 밝혔다. 인공지능 시대, 교회가 희망 줄 수 있다 -하지만 교회마저 신자유주의를 향해 달려가고 있어, 생명자본주의가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생명자본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구글에서 지금 자동차를 만들잖아요? 아마존에서 쇼핑센터를 만들었잖아요? 이런 '디지로그'를 제가 10년 전에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 기술을 산업자본에 쓰면 큰일 납니다. 생명자본에 써야 합니다. 병 고치는 왓슨처럼,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게임하는 것, 알파고가 바둑 게임을 하지 않습니까? 알파고가 바둑 둔다고 사람이 죽습니까? 재미있잖아요? 인공지능은 엔터테인먼트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교육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제 구구단 외워서 뭐하겠습니까? 인공지능을 이용하면 이제 아이큐가 별 문제 안 됩니다. 늘 말씀드렸습니다. 어린이부터 여자, 남자, 노인이 10층까지 올라갈 때, 계단이라면 차이가 있겠지만, 엘리베이터를 타면 똑같습니다. 수능? 인공지능이 다 찾아줍니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어떤 사람들이 존경을 받을까요? 다른 사람이 아플 때 같이 울어주고 사랑하는 사람, 또 재미있는 사람, 그리고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정말 존경받는 사람은 똑똑한 친구가 아니라, 가슴이 따뜻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남을 위해 봉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는 크리스천이 정말 존경을 받지 않겠습니까? 진짜 인공지능 시대가 된다면, '어느 학교 합격한 사람'이 아니라, '어느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산업과 금융 자본에 쓴다면, 주식회사는 다 망하게 됩니다. 인공지능이 다 계산해서 '여기에 투자하라'고 할 것 아닙니까? 사람이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기계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무슨 주식회사이고 투자입니까. 특히 양자컴퓨터가 생기면 인간이 1,000년 걸려 해결할 숫자를 눈깜짝할 사이에 풀어냅니다. 이게 보편화되면 암호도 걸 수 없어요. 지금 4자리 암호로 은행업무를 보고 있는데, 어느 나라에서 어느 사이에 빼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3차대전 납니다. 말이라도 인공지능에 '산업'을 붙이지 맙시다. 공장에서 공해 만들고 자연 파괴하고 농약으로 생산성 높이려다 먹는 것들 다 저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인공지능으로 또 그렇게 하자는 건가요? 이제 불합리한 것은 인공지능이 풀고, 인간은 인공지능이 못하는 따뜻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버려두고 왜 99마리에게 가고 있습니까? 하용조 목사님께 감사한 것은, 저 하나 기독교인을 만들기 위해 애써 주셨기 때문입니다. 쇼 하는 거 같아서, 한국에선 절대 세례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골방에서 하는 것인데, 왜 매스컴에 나가야 하냐고 했지요. 한국 아닌 객지 여관방에서 받고 싶닫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됐지요(웃음). 소문이 나서 일본 '러브 소나타' 찾아왔던 기자들이 전부 모였어요. 일본인데 한국인들이 더 많이 왔습니다. '러브 소나타'에 5천명이 왔는데, 그들을 버리고도 상처받은 한 마리 양을 구하려 하셨던 그 마음을 고맙게 생각하고, 그것이 딸과 저를 구제했습니다." 치료 안 하고, 암과 함께 지내고 있어 -건강은 어떠신지요. 알다시피, 저는 지금 (치료를 위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냥 암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약도 안 먹어요. 왜? 제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죽음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발자국 소리로 오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죽음에 관한 것 아닙니까? 백 마디 말 해도 소용 없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사건이 탄생과 죽음입니다. 종교만이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다 사라지게 하지요. 그러니 나의 종교는 이제 시작하는 것입니다. 맞닥뜨리는 것입니다. 우리 딸은 훌륭히 그걸 해냈지요. 암이 숨었을 정도로. 죽기 직전 한두 시간까지 말입니다. 암이 우리 딸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그의 신앙에 있어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 딸은 처참하게 마르고 끝까지 고사해서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부로서 빛나는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얼굴이었어요. 암도 그의 사랑과 신앙을 부수지 못했습니다. 저도 닥쳐봐야 알지만, 초연하게 글 쓰고 할 것 다 하면서 마치 영원히 사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성경의 말이 아니라, '까마귀 죽으려 할 때 그 소리 슬프지 아니한가. 사람이 죽으려면 그 말이 착하지 아니한가' 하는 증자(曾子)의 말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언이 진실한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부터 유언하듯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많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선 거짓말을 안 합니다. 지금 말하려는 것은, 죽음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되든 안 되든,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종교뿐이라는 것입니다. 문학이 할 수 있나요, 경제가 하나요? 다 살아있는 것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이 박사는 "죽음은 누구나 다 겪는 문제이므로, 어떤 종교든 무종교일 순 없다"며 "우리는 죽어야 하는 존재다. 그런데 종교만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했다. 예수님, 죽으셨으니 부활... 종교만 죽음 다뤄 삶과 죽음은 맞닿은 동전 같은 것인데, 그걸 몰랐습니다. 죽음을 몰랐다는 것은 생명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죽음이자 생명입니다. '죽을 수 있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이 없지만, 예수님을 따라가면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부활한다는 게 아니라, 내 삶이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도 다시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시라고 하니, 그제야 베드로는 바다에서 뛰어나왔지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예수님, 성육신하신 인간으로서의 신이지만, 부활 후에는 신이면서 지상에 머무르셨습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의 문제는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누구든 종교가 없을 순 없습니다. 죽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음이 뭔지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죽음은 종교에서만 다루고 있습니다." 창조는 기쁨... 상품 만들고 기뻐하는 것은 탐욕 -한 인터뷰에서 창조에 관해 말씀하시며 '창조에는 기쁨이 있다'고 하셨는데, 참 기독교적인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인들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창조성'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은 하나님을 닮게 만들어진, 이를테면 '짝퉁'입니다. 짝퉁은 진짜가 될 수 없지만, 그 비슷한 것으로 값어치가 있어요. 하나님을 닮아서 인간은 창조를 합니다. 만들어 놓으시고, 그것을 보시며 기뻐하셨지요. 아, 거기 빛이 있고 어둠이 있고 거기 생명이 있고 무생물이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듯, 창조의 기쁨은 우주적인 것입니다. 죽는 자, 모털(mortal)에게 유일한 즐거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처럼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고 즐거워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상품은 창조가 아닙니다. 상품을 만들어 놓고 기뻐하는 것은 탐욕이지요. 예술가가 하나님을 조금 닮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야윈 존재, 그것이 이 지상에서 별 존재감이 없는 예술가들입니다. 물론 상품화한 예술품으로 만족하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30년 전 올림픽 개·폐회식... 돈 안 받고 하는 일이 진짜 보람 이어령 박사는 "우리는 절대 신이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에게 '무임승차'하면 된다"며 "인간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면 엠마오 가는 길에 두 제자가 느낀 것처럼 밤길은 어둡지 않고 험하지 않다"고 말했다. -30년 전 서울 하계올림픽을 준비하셨는데, 이제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립니다. "그때는 지금과 달랐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6·25 전쟁 후,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땅에서 엄마를 찾는 고아의 얼굴, 우리나라의 그런 사진들이 늘 퓰리처상을 받았지요. 1970년대까지 그랬던 나라가 겨우 10년 지나서, 전 세계의 대축제를 개최합니다. 젊은이의 무덤이었던 곳, 가망 없었던 땅에서 거꾸로 젊은이들의 축제가 열렸습니다. 전쟁은 젊은이들이 하지 않습니까. 평화란 젊은이가 노인을 묻는 것이고, 전쟁이란 노인이 젊은이들을 묻는 것입니다. 그런 전쟁을 겪었던 한국에서, 6·25를 겪은 사람들이 올림픽에 참여한다는 감회가 어떠했겠습니까. 피난을 떠나고 젊은이들이 서로를 죽였던 곳에서, 세계 젊은이들이 환희하고 놀았습니다. 스포츠는 한 마디로 노는 것 아닙니까? 전쟁과 반대입니다. 공동묘지가 화원이 된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제가 글 쓰는 사람, 대학 교수로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막판에 들어갔습니다. 매일 회의를 하는데, 시간이 없으니 박세직 위원장을 옆에 놓고 글을 써서 바로 결제를 받았지요. 보수가 없었어요. 돈 받지 않고 하는 일이 최고의 일이잖아요. 보람된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돈과 권력으로 움직이는데, 돈과 권력이라는 이해관계 없이 일하면 인형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신을 닮아, 자족하는 것입니다. 그때의 감동은 잊을 수 없는데, 지금도 어디고 제 이름이 없습니다. 올림픽 관련 자료나 서적에도 없지요. 뒤에 알려진 것입니다. 올림픽 끝나고 마지막 다큐멘터리까지 영사실 들어가서 전부 같이 편집했지요. 그건 제가 좋아서 한 것입니다. 노는데 몇십 억 몇백 억을 주는 곳이 있겠습니까? 그냥 논 거에요(웃음). 이번 동계올림픽이 강원도 평창에서 열립니다. 그 유명한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가면서 상소문을 올린 게 있습니다. '이곳 강원도 땅은 낮이 짧고 밤이 길며, 여름은 짧고 겨울은 길어, 어떤 곡식도 되지 않으니, 백성들을 위해 세금을 면하게 하소서'. 감자밭이라 불리며 가장 못 살던 곳이 유일하게 겨울 올림픽을 열 수 있는 곳이 됐습니다. 정철은 한탄했지만, 겨울이 긴 곳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난과 슬픔 속에 살던 곳이 동계 올림픽을 통해 관광지가 되어, 지옥이 천국 되는 기적의 땅이 됐습니다." 단 한 번도 기독교를 비판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 마지막으로, 2018년을 살아갈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덕담을 부탁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평신도로서 기독교를 비판해 달라고 했지만,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고 새로운 기독교를 말할 만한 자리에 있지도 않지만, 오늘날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거꾸로 말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오만하고 순수한 척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말씀 중 하나가 '남의 눈 속 티끌을 보지 않고 내 눈 속의 들보를 보자'는 것입니다. 특히 유명 지도자라는 사람이 자기 눈의 들보를 놔두고, 마치 자신은 아니라는 것처럼 기독교를 비판함으로써 알리바이를 만드는 자는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다 같은 죄인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비난받을 일이 있다면, 우리는 비난받는 이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큰 소리로 오늘날 기독교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 '넌크리스천'이요 비난받아야 할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의 구절을 그저 액세서리처럼 보지 말고, 비판하기 전에 성서에 분명히 적힌 대로 '내 눈 안의 들보'를 봐야 합니다. 그것은 보지 않고, 그보다 작은 남의 것을 봐서야 되겠습니까. '가랑잎이 솔잎보고 바스락거린다'는 우리 속담도 있습니다. 속담은 거짓말 안 합니다. 기독교가 위기인 것은 사실입니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더구나 교회는 한 집 건너 식으로 늘면서 경쟁도 늘어갑니다.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잘 살게 되면 '다운(down)'되는데, 우리나라는 국민소득과 기독교의 융성이 같이 간 나라에요. 세계에서 아주 드문 나라입니다. 잘 살면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러한 기적의 나라였는데, 그래서 오히려 거꾸로, 진짜 교인들이 있어서 기독교라고 하면 사람들도 오고 구제도 받으러 온다고 생각했는지, 사이비나 기독교 같지 않은 기독교가 많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이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지, 나 아닌 것은 사이비고 자기는 진짜라고 생각한다면 성경을 안 읽어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금년 한 해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기독교가 가장 어려운 고비에 봉착한 이 위기를, 스스로 넘어설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이 되고 기둥이 되는 한 해가 되어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위기는 사실입니다. 권면의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고 여러가지 형편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힘이 없지만, 기독교의 리더들이라면 서로 비방하고 비난하고 알리바이를 만들 것이 아니라, 같이 끌어안고 갈 수 있는 리더가 됐으면 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아직은 그래도,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믿을 수 있는 사회에요. 믿었기 때문에 실망이 욕으로, 하나의 비난으로 쏟아지는 역작용을 일으킬 때가 옵니다. 그 직전입니다. 그러니까 이 위기를 잘 지내서 희망의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가 부탁드리고 싶고, 제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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