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십자가의 은혜를 베푸신 이유에 대하여 (아래 인용한 성경말씀을 깊이 상고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이유가 우리의 죄사함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받고, 구원받은 것은 영원히 변함없다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을 참 많이 봅니다. 며칠 전에 저는 조상숭배를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예배당을 몇 십년을 다녔는데, 삶은 변화된 게 없고, 오히려 죄사함 받았다고 주장하며, 죄를 안 짓고 사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말하더군요.
예배당을 다니면서도 사주팔자, 토정비결, 풍수지리, 손금, 관상, 조상숭배에 심취해 있으며, 유부남이면서도 바람을 피우고 다니고, 돈 욕심에 꽉찬 사람을 보았습니다. 예배당을 그토록 오래다니고, 매주 빠짐없이 예배당에 나가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것들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이러한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잘못된 가르침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설교를 들으니 생각이 바뀔리가 없고, 생각이 바뀌지 않으니 삶이 바뀔리가 없지요.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으니 구원은 이미 받았고, 죄 짓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자신도 죄를 짓고 살아도 괜찮다라고 죄를 합리화시키니 삶이 바뀔리가 없지요. 이미 구원받았다는 설교를 매주 듣고, 구원은 이미 받았으니 세상 욕심을 추구하며 살도록 유도하는 설교를 매주 들으니 생각과 삶이 바뀔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욱 세상적인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지요. 교인들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자녀 양육, 노후 대비 등 온통 세상적인 것에만 마음이 다 빼앗겨 삽니다. 그게 현실이에요. 저는 주변에 온통 그런 교인들만 봅니다. 그동안 많은 교인들을 봐왔지만, 전부 그런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예배당에 오래 다닐수록 더욱 세상적인 욕심이 강한 것을 봅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를 베푸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죄사함해주실려고 은혜베푸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죄사함이라는 은혜를 베푸신 것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죄사함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거기에 전제 조건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회개한 사람들에게 죄사함이라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고, 죄사함이라는 은혜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아래에 제가 인용하는 말씀들을 깊이 묵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이유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고, 올바로 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죄를 짓고 살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원하시기 때문에 기존에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은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데, 죄사함을 해주시는 목적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죄사함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죄사함이라는 은혜는 다시는 죄짓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베풀어 주신 수단이라는 것이지요.
쉽게 비유로 말씀드리면, 이웃집 주민이 저희 집에 몰래 들어와 도둑질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제가 그 사람를 용서해 줄 때 어떤 목적으로 용서해 주겠습니까? 다시는 도둑질 하지 않길 바라면서 용서해 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용서를 받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옆집 아저씨는 사랑이 참 많아서 내가 아무리 도둑질을 해도 용서해 주시더라. 가서 마음껏 도둑질해도 괜찮을 거야." 이런 마음을 갖고 계속 도둑질을 한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할까요? 계속 도둑질을 하도록 내버려 둘까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하여 처벌을 받게 할까요?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16~22)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서 죄사함이라는 은혜를 베푸신 것은 예수님만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심이 아니라 우리의 옛 사람 즉 부정과 불법을 마음껏 저지르고 사는 옛 사람 또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다시는 죄의 종노릇 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요1서 3:4~10)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오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범죄케 하는 마귀의 일들을 드러내시고 다시는 마귀에게 속아서 죄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도 미혹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죄를 짓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며 그 마지막은 지옥입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하여 계속 죄만 짓고 살던지 둘 중에 선택하셔야 됩니다.
(요1서 2:3~6)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
예수님을 아노라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한 사람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며,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산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대로 자신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하지 아니하고, 온갖 죄만 짓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며, 말씀을 올바로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병자도 고쳐주셨고, 간음한 여자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는 것이 목적이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병도 고쳐주시고, 죄도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목적도 성도들이 죄를 그치고, 더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요 14: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갈 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9~25)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살전 4:7~8)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신 목적도 마찬가지로 우리로 하여금 더이상 죄가운데 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다. 우리가 육체를 따라 사는 죄 짓는 삶을 살지 않도록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도와주시고, 육체를 따라 사는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죄사함이라는 은혜를 베푸신 것도 우리가 더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도 우리가 더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이고, 성령을 보내주신 것도 우리가 더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이 죄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요 배려요 도우심이라는 것이지요.
(고전 15:33~34)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벧후 2:18~22)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고후 11: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벧후 3: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고전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
하지만 사람들은 죄에서 벗어나길 싫어합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싶어하며,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이 가득합니다. 세상 욕심이 가득하여 돈, 명예, 권력, 쾌락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그 욕심에 끌려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 삽니다. 즉 욕심에 끌려 미혹되고, 자신의 욕심을 채워줄 거짓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토록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제발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고전 15:33~34)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
죄 가운데 살아도 구원받는데 지장없고,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속이는 사람들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시고, 더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는 올바른 사람(=의로운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의 은혜도 베푸시고, 성령님도 보내주시고, 고난도 허락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다수 목사님들의 가르침은 십자가의 은혜만 이야기합니다. 죄사함이라는 은혜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은혜만 받고 끝납니다.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여 사람들을 죄에 안주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죄 가운데 살아도 구원받는데 지장없다고 생각하니 마음껏 죄 짓고 삽니다. 제 주변의 교인들을 전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교인이라면서 술마시고, 룸싸롱, 유흥주점 다니고, 바람 피우고, 마음껏 거짓말 하고, 마음껏 돈을 탐하며, 마음껏 우상숭배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쫓아 사는 사람들이 정말 교인이 맞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러한 악한 죄인들을 양산해 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줄 아시나요?
(히 6:4~8)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먹을만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비를 흡수했는데, 가시와 엉컹퀴를 내면 불살라 집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말씀을 가르쳐 주심에도 불구하고 악한 삶을 계속 사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합당한 채소를 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올바른 삶(=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죄가 무엇이냐고 말이지요. ^^;;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죄이고, 순종하는 것이 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 죄와 의를 판단하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다 버리고 자기 기준으로 삽니다. 그렇다보니 자기 보기에 올바른 것을 행하려고, 힘써 예수님 보시기에 올바른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돈을 사랑하여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그것이 올바른 삶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버리고 자기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어 삽니다. 성경에도 그러한 예가 나오지요. 마음의 할례를 하라고 하니까 마음의 할례는 하지 아니하고, 육체의 할례만 고집하는 유대인들이 나옵니다. 자기의 기준에 자기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육체의 할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여기시는 것(=마음의 할례, 하나님 의)은 복종치 아니합니다. 자신의 전통을 세우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따라 살면서 힘써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여기는 것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늘날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자신이 기준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교인들도 그렇게 삽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기억하여 삶 가운데 실천해야 하는데, 실천은 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세운 기준에 따라 돈을 사랑하고,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음란한 것을 좋아하고, 술취하여 방탕한 삶을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산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이제 바뀌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벧전 4:1~3)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
과거에 충분히 죄 가운데 살았으니 이제 죄를 멈추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시렵니까? 예수님께서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 하시면 미워하지 말고, 음란한 마음을 품지 말라고 말씀 하시면 음란한 마음을 품지 말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 말씀 하시면 거짓말 하지 말고, 도적질 하지 말라고 말씀 하시면 도적질 하지 말고, 술취하고 방탕하게 살지 말라고 하시면 그렇게 사십시다.
예수님께서 잘못된 것을 요구하시나요?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 올바른 것만 요구하시지 않습니까? 또한, 예수님께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나요? 전부 가능한 것만 요구하십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애초에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십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을 직접 무너뜨리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니까요. 불가능한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십니다. 하지만, 여리고 성을 도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만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요구하는 것인데, 그것을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인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못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려고 그럽니까? 마음껏 미워하고, 마음껏 음란하고, 마음껏 거짓말 하고, 마음껏 도둑질 하고, 마음껏 돈만 사랑하고 방탕하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까? 그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사는 방식입니까?
저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고 싶습니다. 여기 계신 많은 형제 자매님들도 인간답게 사십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면, 짐승과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죄사함이라는 은혜를 베푸신 것은 우리가 더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의 죄사함이라는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우리가 더이상 죄 짓고 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2.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많은 교인들이 믿음과 행함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행함은 구원에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글이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말씀 인용은 최소한으로 하고, 최대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사람에게 이쪽 길로 가면, 낭떠러지가 있으니 그리로 가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 사람이 그 길로 가서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크게 다쳤다고 가정해 봅시다. 제가 그 사람에게 가서 뭐라고 이야기 할까요? 왜 제 말을 믿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지 않겠나요? 이처럼 믿음이란 믿음의 근거가 있고, 믿음은 행함을 반드시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지 여러 비유와 직접적인 설명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혀 믿지 아니하고, 추상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더군요. 예수님의 무엇을 믿느냐고 물어보면,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신 것을 믿는다는 둥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는 둥 여러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런데 희안한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은 전혀 믿지 않더군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구원자로 오신 것은 마귀들도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마귀와 전혀 차이가 없는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오신 것과 십자가에서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죽으신 것과 부활하신 것과 다시 오실 것은 당연히 믿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즉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지 말씀해 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믿음의 근거여야 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맘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지 말씀해 주시면, 믿음의 근거를 예수님의 말씀에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지 말씀해 주실 때, 그 말씀을 듣고 정말로 믿는 사람은 두려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 지옥갈 사람이라는 것이 곧바로 드러나니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게 되면, 두렵게 되고, 그 두려움은 회개로 이끕니다. 그렇게 계속 살면 지옥갈 수밖에 없다고 믿으니 회개케 되며, 더이상 지옥 자식의 삶을 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게 됩니다. 정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게 되면 회개하고, 더이상 죄 가운데 머물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 살아도 아무런 두려움도 괴로움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이라는 단어를 볼 때, 복된 소식이라고 생각하거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신 말씀만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입니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5장으로 쭉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5장엔 팔복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어떠한 사람이 천국에 가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 천국 복음입니다.
또한, 연이어 설명하시는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어떠한 사람이 지옥에 가는 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즉, 천국복음이란 어떠한 사람이 천국에 가는지에 대한 설명이며, 천국가는 방법대로 살지 아니하고 반대로 살면 자연히 지옥에 가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전부 이런 방식입니다. 천국 복음을 듣고 사람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천국갈 길을 선택할 것인지 지옥갈 길을 선택할 것인지 말이지요.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
복음서 처음부터 복음이 시작된 것이지, 십자가에서 복음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복음대로 살지 못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죄사함 받고, 다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만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이고,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말씀이며, 천국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천국 복음을 듣고 천국갈 길을 선택하거나, 지옥 갈 길을 알려주신 말씀대로 살아서 지옥에 가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십자가는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죄사함 해주시고, 다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지 말씀해 주실 때 농담으로 여기거나 과장한 것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도 믿지 않기 때문에 마음껏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면 지옥에 간다고 경고하는 말씀을 듣고도 우습게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예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부하 직원에게 어떤 일을 부탁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부하 직원이 제 말대로 실행하지 않았다면, 그 부하 직원은 누구를 우습게 여긴 것입니까? 저를 우습게 여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인들을 예수님에 대하여 주여 주여라고 말합니다. 만왕의 왕이라 말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주인되시고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습게 여깁니다. 어떠한 사람이 천국에 가고, 어떠한 사람이 지옥에 가는지 예수님께서 아무리 설명해 주셔도 예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눅 6:46~49)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람이 천국에 가고, 어떠한 지옥에 가는지 아무리 설명해 주셔도 사람들은 믿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주여 주여라고 말합니다. 한번도 예수님에게 주인 대우를 해 준적이 없고, 한번도 예수님의 말씀을 왕의 말씀으로 여긴 적이 없이, 불순종만 하면서도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중인격자이며, 인지부조화의 상태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람이 천국에 가고, 어떠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말씀해 주셨으면,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천국에 갈만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짜로 믿는 사람들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천국갈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돌면,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 주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아야만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은 돌지 아니하고,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며, 온 정신을 집중하여 정신통일 하면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 주실 것을 아무리 믿어도 여리고 성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돌아야 무너뜨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 여리고 성을 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열번 돌라고 하시면 열번을 돌아야 하고, 백번을 돌라고 하시면 백번을 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리고 성이 무너집니다.
이와같이 성도들은 자기의 생각을 믿음의 근거로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며, 자신의 생각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라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 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람이 천국에 가고, 어떠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실로 믿는 사람들만 회개하고,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게 되며, 결국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아니한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3. 십자가 옆의 강도에 대하여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이 부분은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고, 옆에 예수님도 못 박혀 있다고 가정하면, 여러분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십자가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구할 것 같습니다. 저는 배를 가르는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고통은 정말 너무나 극심했습니다. 배를 가르고 수술하는 것도 그토록 고통스러운데,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은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인간이 버틸 수 없는 극도로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먼저 십자가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아닌가요? 감이 안 오신 분들은 못을 팔뚝에 박아 보시면 금새 아실 겁니다.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못 하나만 팔뚝에 박아도 나 좀 살려달라고 아우성 칠 거에요.
돈 없다고 돈 좀 주시라고 예수님께 수없이 기도하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건강, 자녀 양육, 노후대비를 위해 그토록 기도하는 사람들은 팔뚝에 못 하나만 박혀도 여기서 구해달라고 아우성 칠 것입니다.
한가지 더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의 많은 교인들은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 좋은 대학을 나온 목사님들의 말은 너무 잘 믿지요. 하지만 노숙자가 한 말은 믿지 않습니다. 예배당도 크고 화려해야하고, 목사님의 학벌도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만약 여러분이 십자가에 달렸다고 가정했을 때 여러분과 동일하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뭐라고 말할 것 같나요? 비참한 그 모습을 보면서 너 자신이나 구원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화려하고 멋진 성전에서 깔끔하고 멋진 예복을 입고 가르치는 제사장 말을 믿지,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생각하실 것 같나요?
그 당시 예수님의 행색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제사장들처럼 멋진 옷을 입고 설교하러 다니셨을까요? 아니면 노숙자처럼 단벌 옷을 입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길에서도 노숙하시며, 노숙자처럼 다니시면서 설교하셨을까요? 다 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노숙자 행색의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 같나요? 여러분들이 과거로 돌아가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가정하고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그 당시에 살았다고 가정하고 상상해 보세요. 예수님의 행색은 노숙자 행색이요, 더군다나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을 구원자라고 생각하실 것 같나요? 현대의 많은 교인들은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에서 고난 가운데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못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참 많은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예수는 복을 못 받은 비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구원자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의 교인들이 과거로 돌아간다면, 대다수의 교인들이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의 말만 듣고 따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모와 학벌 그리고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너무나 좋아하니까 말이지요. 하지만 십자가 옆의 강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예수님이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에게 목숨을 살려달라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 옆의 강도처럼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이런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나요? 여러분의 목숨이 곧 끊어질 것 같을 때에도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겠나요? 이 세상적인 것들을 구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해달라고 구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 없어도 돈을 구하지 아니하고, 천국을 소망하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삶을 구할 수 있나요? 건강이 나빠도 건강할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천국을 소망하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삶을 구할 수 있나요? 매일 돈, 대학, 취직, 결혼, 자녀양육, 건강, 노후대비 등만 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십자가 옆의 강도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옆의 강도는 오늘날의 교인들보다 훨씬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십자가 옆의 강도를 살려 주셨다면, 그 강도는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께 충성하고 살았을 겁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목숨을 살려달라고 구하지 않을 정도면, 죽기까지 하나님께 충성할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강도를 낙원으로 데리고 가셨기 때문에 강도의 죽은 후의 세상에서의 삶은 성경에 기록될 수 없었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그 강도를 다시 살려 주셨다면, 12사도에 버금가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예상해 봅니다.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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