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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을 대적하면?*김병삼 목사

하나님아들 2017. 8. 19. 14:34

예수가좋다오

하나님을 대적하면?

글/김병삼 목사

 

[열왕기상 21장 17-26절 17. 여화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8.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19.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2.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이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23.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26. 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
 아합 왕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싸움을 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거룩을 향한 몸부림’이 끝날 때 하나님을 대적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거룩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그 거룩은 필연적으로 내 안에 있는 타락한 악행과 더러운 것이 소멸하기를 기도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을 붙들려는 몸부림입니다.

 

아합 왕이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에게서 이러한 몸부림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을 보면 죄를 짓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몸부림이 없어져서 거룩을 상실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이 점점 대형교회를 찾아갑니다. 그래서 큰 교회는 점점 더 커지고 작은 교회는 점점 작아집니다.


 대형교회를 찾는 이유는 숨어 지내기가 좋아서라고 하지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신앙 생활하기 좋은 곳. 사실 신앙 ‘생활’이란 삶에서 부대끼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인데 말이죠. 또한, 요즘 많은 사람은 교회 브랜드를 자신의 신앙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교회에 다닌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할 수 있기를 원하죠. 그러다 보니 작은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누군가 “어느 교회를 다니세요?”라고 물으면 “네,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다닙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하죠.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교회 이름을 ‘집에서 가까운 교회’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무언가 신앙에 대한 몸부림이 사라져 버린 것을 느끼지 않나요? 언젠가부터 세상에 쉽게 적응해 버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호산나 교회 홍민기 목사가 쓴 [하나님 중심]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집트는 전 국민의 90% 이상이 이슬람교도입니다. 예전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었지만, 지금도 ‘남은 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출세하기 어렵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다닐 수 없습니다. 정부기관에 입사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큰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언젠가 이슬람 정부가 그리스도인 리더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겠다. 대신에 너희는 모카탐이라는 곳에 가서 살아라.” 이슬람 정부가 제안한 모카탐 지역은 이집트의 수도에서 버리는 모든 쓰레기가 모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며 살아라. 너희가 거기서 산다면 거기서 만큼은 예배드리게 해 주마!”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후손들이 손으로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동네에는 곳곳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배 때마다 그들은 몸을 깨끗이 씻고 깨끗한 옷을 입고 2만 명가량 수용할 수 있는 동굴 교회에 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당신은 예배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아합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입니다. 아합은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대체로 악한 왕의 대명사처럼 알려졌지만, 그가 다스리던 시대에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왕국을 이루게 됩니다. 당시 근동지방을 지배하던 앗수르를 견제하며 국제정세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것에는 둔감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계속해서 멸망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에서 아합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됩니다.

 

잠시 아합이 살았던 삶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그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외면한 삶을 살면서 했던 결정적인 선택 중의 하나가 그를 돌아올 수 없게 하지요.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였을 것인데, 당시 번성했던 페니키아 (두로와 시돈)의 왕이며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사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합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결혼이었고 책략적 결혼이었던 것이죠.

 

이스라엘은 서쪽으로는 지중해를 끼고 동쪽으로는 사막을 접하고 있습니다. 오직 북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의 북쪽에 강국이었던 두로와 시돈이야말로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죠. 혹 어떤 분들에게는 왜 아합이 나쁜 사람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외교에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단지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를 생각할 뿐이죠. 당시 국제정세를 생각한다면 아합은 가장 현명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현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정직하냐를 보고 계시는 거죠. 어떤 목사님이 쓴 글에 아합 왕의 이야기를 보면서 알베르트 까뮈의 희곡 “오해”를 인용했던 것이 있습니다.


 어느 시골에 홀어머니가 남매(쟝과 말타)와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어려운 가정 형편을 참다못한 아들은 돈을 벌어오겠다고 가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남아 있는 모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기로 굳게 마음을 먹습니다. 돈을 벌어서 집을 나간 아들을 찾아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녀는 작은 여인숙을 차렸습니다. 그러나 시골의 여인숙을 운영해서는 돈을 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모녀는 한 가지 꾀를 냈습니다. 자기 여인숙을 찾아온 손님 가운데 제법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죽이고는 돈을 빼앗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녀는 여인숙을 찾아온 사람 가운데 돈깨나 있는 것처럼 보인 사람에게는 수면제를 먹여 죽인 후에 여인숙 뒤에 있는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완벽하게 범행을 저지르고는 손님의 짐꾸러미에서 돈이나 보석과 같은 값나가는 것을 챙겼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잘 차려입은 한 청년이 그 여인숙에 들어왔습니다. 여인숙 주인인 모녀는 그 청년을 범행의 대상으로 지목하고는 그 날 저녁 그에게 수면제를 먹여 죽이고는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여인숙으로 돌아와 그 손님의 짐꾸러미를 풀어헤쳤습니다. 돈을 꺼내기 위해서 지갑을 여는 순간 두 모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방금 자기들이 죽여 강물에 던져버린 그 청년이 자기들이 20년 동안이나 그렇게 보고 싶었고, 찾고 싶었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두 모녀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아들을 던져버린 바로 그 강물에 투신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까뮈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범죄는 아무리 행운이 따른다 하더라도 항상 불행할 뿐이다.”

 

아합 왕이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떠난 일들은 불행을 만들 뿐입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말씀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돕는 배필”로 상대방을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죠. 세상의 많은 사람이 결혼에 실패하는 이유가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며 결혼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결혼을 하고 나면 얼마나 서로에게 실망하겠습니까? 이기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이 만나 얼마나 많은 싸움을 하겠습니까?


 제가 너무 진부하고 이상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할 때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죠? “좋은 배필을 찾기 전에 좋은 배필이 되라고.” 누군가에게 좋은 배필이 된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그 사람을 위해 내가 뭔가를 해주고 싶고 섬기고 싶은 마음입니다.


 부모님에게도 그런 권면을 하고 싶습니다. 내 자녀에게 가장 좋은 배필이 누구인가를 찾는 것의 기준을 어디에서 찾느냐는 것이죠. 내 자식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찾는 기준에서 벗어나 좋은 사람을 만나 서로에게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결혼은 전략적이 아닙니다. 결혼은 선교도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결혼하고 제일 답답한 것이 아내가 가는귀가 먹은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프게 된 것도 함께 살아가며 짧은 시간이지만, 고생했던 결과입니다. 답답할 때마다 조금 더 친절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아내는 제가 설교하는 발음이 좋아진 것이 자신이 잘 못 알아듣기 때문이라고 당당하죠.)

 

정략적인 결혼 그것이 잘못되었고, 이득을 취하려는 결혼은 아내 이세벨이 이방신을 섬기는 제사장의 딸이라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은 아합과 함께 살면서 더욱 사악한 길로 인도할 뿐이죠.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세 가지 표현에 주목해 보세요.


 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26. 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그런데 하나님을 분노하게 한 나봇의 포도원의 비극이 그의 아내 이세벨의 작품이었던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읽지 않은 사건을 요약합니다. 아합 왕이 왕궁에서 보니 아주 탐나는 포도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21장 2절입니다.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이 말을 들으면 아합이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 않습니다. 아주 신사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 이미 왕궁이 있고 많은 것을 가졌는데 왜 끊임없는 탐심으로 남의 것을 봅니까? 진짜 그가 가진 것보다 나봇의 포도원이 더 좋았을까요? 그가 사는 왕궁터가 설마 나봇의 포도원보다 못할까요? 설상 그보다 못하다 할지라도 왕의 마음에 왜 백성의 것을 탐하는 마음이 들었을까요?
 신명기에는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에 주시는 법이 있는데, 새로운 땅 가나안에서 왕을 세우게 되면 지켜야 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신명기 17장 14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 16 병마를 많이 두지 말고,  17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고 자기를 위해 은금을 많이 쌓지 말고, 18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고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하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왕은 군림하거나 누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권력이라는 것을 다시 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적 리더십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는 왕으로 세움 받았으나 하나님을 떠난 사람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습니다.

결혼이 중요하다는 것은 바로 그 상태에서 아내가 아합의 마음을 바로잡아줬어야 하는데, 아합이 근심하는 이유를 듣더니 이세벨이 알아서 일을 처리합니다.

 

같이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봉인한 편지를 보내 나봇을 역적으로 모함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를 높이고 불량한 사람을 데려다 증거하도록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왕을 저주하였다고, 그렇게 해서 그를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이라고. 나봇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자 이세벨을 아합에게 찾아가 말합니다. 당신이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는 나봇이 죽었으니 포도원을 취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신 것은 백성을 잘 돌보라는 것인데, 백성의 것을 갈취하기 위해 모함해서 죽이다니요. 하나님께서 분노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합을 향하여 엘리야가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당신처럼 악을 행한 왕이 없는데 당신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했습니다.”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하나님을 대적하면”이라고 잡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에 대하여 욕을 하거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에도 언급했지만, 아합 왕의 행한 일들에 대하여 세상의 논리로 말을 한다면 그렇게 큰 죄를 짓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왕이 되어 그 정도 권력을 누리는 것이 큰 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고, 그 나라의 왕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통치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해 얻어야 하는 기준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행동은 “탐욕”을 향해 갑니다. 아니,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이유가 탐욕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보지 못했지만, 아합의 별장이 있었던 궁터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다 공개가 되었는데 갔다 온 사람들에 의하면 그 주위 경관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동쪽으로는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요단강이 보이고, 동북쪽으로는 갈릴리 호수가 보이고, 서쪽으로 3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지중해가 보이는 기가 막힌 전망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별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또 다른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자 하는 욕심이 생깁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4장 2~3절의 말씀입니다.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혹시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나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어!”
 하지만 무엇에 대한 탐욕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특징은 탐욕에 물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올바른 사랑”에 대하여 늘 강조했는데, 사랑해야 할 것과 사용해야 할 것을 늘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용해야 할 것을 사랑하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잘못된 사랑이 ‘죄’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5절에서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질을 사랑하는 자에게 절대로 만족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물질이 그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적의 결과는 “심판”입니다.


 오늘 본문 17절부터 24절은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심판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조금 무서운 이야기지만,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심판하신다는 것이죠.

열왕기상 16장에 보면, 아합이 왕이 되고 사마리아를 건축하고 바알 신전을 세우고 그 앞에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습니다. 이는 바알을 섬기는 바알의 딸 이세벨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죠. 또한,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며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왕상 16:3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열왕기상 18장 19장에서는 유명한 엘리야와 이방 선지자들이 갈멜 산에서 대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야의 승리로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게 됩니다. 20장에서는 아람 왕 벤하닷을 살려주었을 때 예언자를 보내어 잘못을 지적하지만, 오히려 화를 냅니다.

 성경이 무엇을 증거하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아합 왕에게 끊임없이 경고하고 기회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결국 오늘 본문에 이르러 그를 벌하시기로 하셨다는 것이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죠.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27~29절의 말씀과 그리고 다음에 시작하는 22장의 말씀입니다.

 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28.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아합의 회개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재앙을 그의 아들 대에 내리겠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런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합을 그렇게 무섭게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금세 회개하는 모습 때문에 심판을 연기하시는 하나님을 보면, 아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재앙을 면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것은 아합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훨씬 사악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악용하려는 나쁜 마음 때문에 말이죠.

 

아합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22장에서 증명됩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는 선지자들에게 묻는데 자신에게 좋은 말 하는 자의 소리는 귀를 기울이지만, 선지자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는 늘 자기에게 불길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죠. 결국, 전쟁에 승리하리라는 거짓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가 싸우지만, 미가야가 한 불길한 예언(전쟁에 나가면 왕은 다시 이 왕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때문에 마음에 걸려 한 가지 꾀를 냅니다. 변장을 하고 전쟁에 나가는 것이죠. 일반 병사처럼 자신은 변장을 하고 여호사밧 왕에게 왕복을 입고 전쟁에 나가라고 합니다.


 얼마나 영악한 꾀입니까?
 아람 왕은 이미 32명의 장수에게 오직 이스라엘 왕을 죽이는 데에만 신경을 쓰라고 했고, 여호사밧 왕을 변장시켰으니, 그가 죽으면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사밧이 누구입니까?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던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이죠.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아합의 최후가 다가옵니다. 너무나 허무하게도 무심하게 적이 쏜 적의 화살에 맞아 피를 많이 흘려 죽고 맙니다. 22장 34절에 기록된바 화살이 ‘갑옷 솔기’에 맞습니다. 당시 병사들은 쇠로 만든 갑옷을 입습니다. 솔기란 그 갑옷을 연결하는 작은 이음새입니다. 무심히 쏜 화살이 바로 그곳에 맞았습니다. 과연 우연일까요? 하나님을 심판하는 화살이었습니다. 결국, 그 전쟁에서 아합 왕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열왕기 상 22장 37~38절 말씀입니다. 37. 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38.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정말 허무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심판은 그렇게 허무하게 찾아옵니다. 마음에 걸리면 그만둘 일이지 끝까지 자기 고집을 부리는 사람. 그게 악인의 최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모습 말입니다.


 끝까지 돌아오기를 바라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달리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심판을 받은 아합 왕의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사사건건 하나님이 진노하실 만한 일을 하면서 살았던 아합 왕, 끝까지 기다리셨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 아합 왕. 아합 왕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최후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왕의 삶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심판을 이야기하시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결국 돌아오지 않은 왕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관점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정치를 잘해도 불의한 방법은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방법이요. 우리의 삶의 과정이 얼마나 진실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면 심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의 죽음을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 세대는 여러분의 삶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찌해야 할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금 불의한 것을 하고 있는데 마음에 걸리면 회개 하십시요. 그것에서 돌아서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가좋다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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