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이 첫 목회를 할 때 후두염에 걸려 말도 제대로 못 할 지경이 되어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걱정이 많으시군요.”, “예, 걱정이 많습니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으십니까?” “설교 걱정이지요. 주일 설교, 주중 설고, 이런 설교, 저런 설교, 설교, 설교, 설교…, 그 많은 설교를 어떻게 감당할지 자나 깨나 걱정입니다.”
그때 의사가 말하기를 “목사님, 설교 준비하는 일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때 노만 빈센트 필 목사가 정신이 번쩍 들어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모든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했습니다.
설교 문제 뿐만 아니라 가정 문제, 자녀 문제, 직장 문제, 사업이나 돈 문제를 생각하며 ‘한평생 어떻게 할까?’ 염려하고 걱정하면 그 문제에 빠지고 문제에 눌려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기 바랍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바라보는 모든 것이 낯선 곳이라는 것 말입니다. 오늘 참 낯선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복인지 아닌지 구분 안 되는 일 말입니다.
기브롯 핫다아와와 가데스 바네아에서.
왜 이런 일이? 오늘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 민수기 10장 33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갈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브롯 핫다아와는 시내산 동북 55km 지점에 있는데 현재는 아인 엘 하드라(Ain 엘 Hadra)지역으로 불리는데 약 사흘 길인 셈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형국입니다. 시내산에서의 사건 후 딱 3일입니다. 도대체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반복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까요? 왜 이렇게 원망할까요? 이들의 영적 상태가 잘못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그들의 ‘건망증’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잊어도 될 것이 있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구약의 제사는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것을 상기하기 위한 의식입니다. 만남과 관계는 늘 확인되어야 하는데, 당장 눈앞에 어려움을 보면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참 답답하죠?
언젠가 제가 그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과거의 은혜를 잊지 마라!’ ‘지금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라!’ ‘미래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지금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 지금도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리고 미리 아시고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결국, 신앙이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연속 선상에 있습니다.
대부분 육신의 병은 ‘식욕부진’과 함께 옵니다. 아니, 식욕이 없어졌다는 것은 어딘가 병이 들었다는 신호이기도 하지요. 오늘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일어난 사건은 바로 병든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기적의 사건, 사방에서 몰려든 메추라기를 얻게 된 것은 올바른 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려주시던 만나가 더는 맛이 없다고 느꼈을 때, 즉 소화기능에 탈이 났는데, 그들에게 주어진 고기는 ‘소화불량’에 걸리도록 한 것이죠. 치유되진 않은 상태에서의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광야에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었던 만나가 더는 맛있게 여겨지지 않고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은 영적 식욕부진의 상태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50절에서는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했고,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언제부터인가 나를 변화시켰던 은혜의 말씀이 지루하고,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면 틀림없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오늘 일어난 일 역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중 일어난 일입니다. 과거와 쭉 연속 선상에 있습니다. 홍해의 기적, 마라와 엘림의 놀라운 역사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병이 든 증거는 과거의 은혜를 잊은 것이죠. 참 이해할 수 없죠? 현재 내리는 만나가 축복인데 그것이 축복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현재를 만족하지 못할 때 찾아오는 것이 탐욕이죠. 광야에서 만나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복이 불평의 대상이 된 것이죠. 참 어이가 없는 일이죠.
출애굽기 16장 31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만나를 보았을 때, 만나의 맛을 ‘꿀 섞은 과자’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놀라워 ‘만후’(히브리말로 저것이 뭐냐)라고 외치던 것이 ‘만나’로 변한 것이죠. 너무나 축복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오늘 불평하는 모습을 보세요.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민11:4) 무엇이 먼저일까요?
탐욕 때문에 감사를 잊을 것일까요?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탐욕이 생기는 것일까요?
어느 것이 먼저이든 탐욕과 불평은 늘 함께, 감사와 행복도 늘 함께 나타나는 것이죠.
한 가지 예화를 소개합니다.
남의 과오를 자주 탓하는 친구에게 한 남자가 말했습니다. “자네가 한 말을 불평 노트에 자세히 적을 테니 사인은 자네가 하게.”“아니, 뭐… 그렇게까지 기록에 남길만한 건 아니야.” “사람들은 불평하기는 좋아하지만, 그 말에 대한 책임은 지지 못 하거든.” 남자의 말에 친구는 얼굴을 붉혔습니다. 그 이후에 긴 세월 동안 노트에는 단 한 줄의 기록도 없었습니다. 불평 노트 앞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종종 말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다.
하지만 침묵을 지켰던 것을 뉘우쳐 본 적은 결코 없다.’
불평은 탐욕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탐욕의 무덤’은 불평에서부터 시작된 사건입니다. 왜 인생에 불만이 없겠습니까? 어떻게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겠습니까? 그러나 신앙은 불만족스런 상황 가운데서 만족을 찾는 것입니다. 감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탐욕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훨씬 더 복된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망이 채워지는 것이 행복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는 말을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정말 신앙의 냄새가 나나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과 함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겠죠. 그러나 누군가에게서부터 불평이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불평이라는 놈은 아주 전염성이 강하지요.
원인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의 사건을 민수기 11장 4~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특히 이 불평의 말이 섞인 무리로부터 시작됩니다.
‘섞인 무리(mixed multitude)의 불평’ 우리가 출애굽 여정 첫 시간에 살펴보았지만,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뿐 아니라 종 되었던 다른 민족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또한, 이 무리 중에는 애굽 사람과 결혼하여 살고 있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유월절에 참여하며 할례를 받았지만, 신앙이 깊은 자들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익숙한 애굽을 그리워하며 불평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보다는 애굽에서의 추억이 더 강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까 애굽 땅을 그리워하며 불평하기 좋아한 것입니다.
민수기 11장 5~6절입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을 배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굳건히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섞인 무리’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신앙과 교회에 방관자들이 하는 불평이 아닐까요? 불평은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의 전유물입니다. ‘불평’과 ‘애정 어린 충고’를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임 있게 하는 말과 여차하면 떠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상처를 주고 불평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무책임한 불평이 문제이고,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것을 불의한 일로 생각하는 자들이 큰 문제입니다.
저는 종종 그런 말을 합니다. “당신의 불평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것이기에 일어나는 일이면 거룩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한 것이라면 불의한 것입니다.”
탐욕에 물들어 불평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정상적인 눈을 멀게 한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환경 때문에 과거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이죠.
민수기 11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기억하십시오. 누군가 원망의 언어를 쏟아낼 때 하나님께서 듣고 계십니다. 제가 광야를 지나며 느낀 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불평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1장 19절이 묘사하는 광야를 보세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그 광야가 바로 바란 광야입니다.)
신명기 8장 15절입니다.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그들의 상황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고,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두려운 광야를 지났습니다.
그들을 인도하신 여호와께서 그들로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힘든 곳이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신 곳이고 위험한 곳이지만, 여호와께서 인도하신 곳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래전 [시속 3마일의 하나님]이라는 설교집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속도가 아니라 인간의 속도로 함께 걷고 계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미래의 소망이 살아지는 순간 광야는 더는 견딜 수 없는 땅이 됩니다.
옛날 청교도들은 믿음을 찾아 떠난 새로운 땅에서 고난을 겪을 때 서로 만나면 이렇게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The best is yet to come.”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러분의 인생에도 어둠의 시기, 아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시절을 지난 사람도, 그 길을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이 떨어뜨려 놓으셨으면 미래로 인도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흔적이 있습니다. 훈장 같은 흔적과 감추고 싶은 상처와 같은 흔적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며 수많은 기적의 흔적을 맛보았지만, 수치의 흔적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기브롯 핫다아와” 그곳은 그들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수치스런 무덤을 만든 곳입니다.
수치가 수치로 끝나면 비극이지만, 수치를 바라보며 삶을 교정하는 기념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독일과 일본을 우리가 자주 비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독일은 자신들의 죄를 기념관으로 만들어 놓고 기억합니다. 다시는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가능하면 감추고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과거의 역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할 것이냐의 문제죠.
탐욕을 채우는 것은 복이 아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겠습니다.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얼마나 큰 기적이 일어났는지 아시나요? 메추라기가 몰려오기 시작하는 데 2백만이 머무르는 진영 사방으로 하룻길 되는 곳에 가득히 메추라기가 떨어졌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고기가 지천으로 깔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기적이 축복의 기억이 아니라 수치의 상처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의 축복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던 불평이, 눈앞에 현실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축복은 축복을 가장한 재앙입니다. 기적이 일어나 그들이 고기를 맛보려 하였으나 고기가 이 사이에 끼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탐욕의 무덤’ 즉 ‘기브롯 핫다아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결코, 지금 당신이 지고 가는 그 길, 감당하는 일을 불평하지 마십시오. 무거워도 내려놓을 때가 있고, 끝이 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이라면 맡기고, 내가 져야 하는 것이라면 끝까지 질 힘을 달라고 기도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한 가지 좋은 예화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사나이가 있었다. 매사에 불만으로 가득했다. 한번은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서 멀리 있는 곳으로 짐을 옮기게 되었다. 사나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짐을 짊어지고 나섰다. 한참 가다 보니 사나이는 다른 이들보다 자신의 짐이 더 무겁고 커 보여 몹시 기분이 나빴다. "난 역시 재수가 없어!" 그는 갑자기 힘이 빠져 가장 뒤처져 걸었다. 길이 너무 멀어 마을 사람들은 중간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 되었다.
이때다 싶어, 사나이는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몰래 일어나 짐을 쌓아둔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짐을 하나하나 들어보았다. 그리고는 그중 가장 작고 가벼운 짐에다 자기만 아는 표시를 해두었다. 날이 밝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젯밤에 몰래 표시해 둔 짐을 찾았다. 그런데 그 짐은 바로 어제 온종일 자신이 불평하고 지고 온 그 짐이었다. 자신이 가진 짐이 제일 가벼운 짐이었음에도, 그는 계속 불평하면서 짐을 지고 왔던 것이다. 결국, 불평, 불만은 습관이고 성격이다. 습관적인 불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이 와도 불만이고 감사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은 힘든 상황이 와도 감사한다.
인간의 탐욕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단지 끊임없이 그 탐욕을 채우려고 갈망할 뿐입니다. 그리고 채워지지 않음에 대하여 불평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탐욕으로 망가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권력에 맛을 들이면 내려오기가 참 힘이 듭니다. 누군가에게 제거당할 때까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갑니다. 돈에 맛을 들이면 멈춰지지 않습니다. 쓰다 쓰다 죽어도 다 못 쓰는 돈을 왜 그렇게 모아놓고 욕심을 부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몇 해 전 일본에 쓰나미가 덮쳤을 때, 수많은 금고가 떠다녔다고 하지요.
노인들이 노후를 위해 은행도 못 믿고 나라도 못 믿고 돈을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지난번 일본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쓰나미 이후에 갑자기 소비가 늘었답니다. 모을 것이 아니라 쓰고 죽자고 말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탐욕이 저주가 될 때까지 그들의 탐욕을 충족 받고자 합니다. 돈이나 쾌락을 탐하는 자들은 그 돈이나 쾌락으로 멸망하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그것을 줄기차게 추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탐욕스런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오히려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심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고, 마침내 그들을 장사지낼 커다란 무덤이 생기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탐욕이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축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데스 바네아는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진 이스라엘, 불신앙의 사람들이 다다르게 되는 막다른 길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결국, 탐욕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기브롯 핫다아와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지 못한 결과라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난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신앙의 눈으로 보지 못한 비극의 장소로 기록될 것입니다.
시내산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하여 가장 먼저 다베라에 진을 쳤고 이어 기브롯 핫다아와 하세롯을 거쳐 가데스 바네아까지 계속 북진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냈으나 약속의 땅에 대한 불신과 원망으로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제가 너무나 많이 설교시간에 이야기해서 더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꼭 한 가지만 다시 한 번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막 지대에 귀하게 존재하는 오아시스인 가데스 바네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출발하여 11일 만에 도착하여 가장 오래 머문 곳입니다(신1:2, 19∼20). 이곳에서 모세는 가나안 본토에 정탐꾼을 파견했는데, 정탐꾼들의 비 신앙적 보고를 들은 백성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도 현실에 대한 원망으로 광야에서 40여 년을 방황하며 고난의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민13:1∼33, 14장, 신1:1∼8).
참 비극적인 일이지요.
한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불평하는 자들에게 주신 기적이 비극이 되었고, 한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주시려고 정탐꾼을 보냈으나 축복을 소유하지 못하고 불신앙의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죠. 메추라기를 몰고 온 기적의 사건이 복되지 못한 불행! 약속을 이행하시려는 준비된 축복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불행! 결국은 모두가 불신앙의 눈으로 현재의 축복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혹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탐욕의 무덤을 만드는 기적을 바라며 신앙을 가장하고 있지 않은지, 주시는 복도 받지 못하는 비 신앙적 믿음은 아닌지.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고백인지를, 여러분이 하는 불평이 정당한 것들인지를, 그렇게 이루기를 원하는 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를 말입니다. 혹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기를 원하시면 준비한 가나안을, 우리의 비겁함과 두려움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하지는 않는지를 말입니다.
10일간의 우주 탐사를 마친 한국 역사상 첫 우주인 이소연 자매가 무사히 귀환에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광주 성지 교회 이길수 안수집사와 정금순 권사의 1남 2녀 중 장녀로 어려서부터 기도 안에서 자라온 믿음의 딸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정금순 권사는 특히 딸 소연이가 “하늘을 나르는 인물로 자라게 해 달라!”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날마다 딸과 Q.T를 나누었고 이 소연 자매는 늘 어머니와 고향 교회에 기도 제목을 전해왔다고 합니다.
소연 자매는 한국을 떠나기 전 지구로 귀환하고 귀국하면 제일 먼저 고향 교회에 와서 간증을 나누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미래는 언제나 내일을 향한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준비된 선물입니다. 과거에 은혜를 주신 주님, 현재 내 인생의 광야에 만나를 내리시고 계신 주님, 그리고 미래의 약속을 붙들고 살게 하시는 주님,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주님이시라면 왜 원망하십니까? 왜, 불평하십니까?-ⓗ